백승엽은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그냥 답하면 될 것을 나한테 물어볼 것이 뭐가 있다고 그러는 거죠? 혹시 다른 속셈이라도 품고 있는 건 아니죠? 그렇지 않으면 이런 수단으로 우리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그러는 거예요?”고은서는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제가 어떤 태도로 그쪽의 물음에 대답할지를 결정할 만큼 아주 중요한 물음이라서요. 따님을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제 물음 하나쯤 대답해주는 건 괜찮지 않나요?”백승엽은 고은서의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현장에 있는 기자들과 매체인들을 보며 순간 그까짓 물음 하나쯤을 대답해준다고 큰일이 나겠냐는 자신감이 생겼다.“대답 못 해줄 게 뭐가 있겠어요. 내가 당신처럼 물음 하나에 쩔쩔맬 줄 알아?”고은서는 기세등등한 백승엽의 모습을 보며 화내기는커녕 태연하게 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백승엽 씨, 방금전에 착한 따님분께서 마음씨 좋게 저를 구해줬는데 제가 은혜도 모르고 따님을 해치려 했다고 했죠?”“그래요! 목격자랑 다른 증거들도 다 있으니까 순순히 인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제가 대체 왜 그랬을까요?”고은서가 되물었다.“거참, 어이없는 질문이네. 제가 그쪽 생각을 어떻게 알아요.”백승엽이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다른 분들은 알고 계시나요?”고은서는 병실에 있는 기자들에게 물었다.그들은 서로 마주 보면서 어리둥절해 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은서만 빤히 바라보았다.박지연도 고은서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은서가 이미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냈기에 이렇게 담담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할 말이 뭔지나 얘기해!”백승엽이 성가시다는 듯 그녀를 재촉했다.고은서는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다 모르시나 보네요. 그러면 확실히 제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아마 자신을 구해준 은인을 죽이려 하는 게 아니
기자들은 더 몰두해서 두 사람의 표정을 촬영했다.“승재가 네 남편인 게 뭐가 어때서. 유미랑 승재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는데 사이가 좋은 게 정상이 아니야? 너 하나 때문에 인연을 끊기라고 해야 한다는 거야?”백승엽은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당연히 불가능하죠. 사이가 좋을 뿐만 아니라 서로 좋은 사업 파트너이기도 하잖아요. 백유미 씨를 위해 GS 그룹 슬하에 있는 판주 투자은행을 직접 수매할 정도로 친한 사이인데 제가 어떻게 인연을 끊으라고 하겠어요.”백승엽은 고은서의 말 속에 있는 함정을 발견하지 못하고 계속 나불거렸다.“우리 딸이 그럴 만한 능력과 가치가 있다는 걸 의미하지. 유미를 데려가겠다는 회사가 얼마나 많은데, 승재가 유미를 자기 회사에 남기려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야?”“백승엽 씨, 곽승재 씨가 조건도 훌륭하고 또 백유미 씨한테 이토록 잘해주는데 두 사람 혹시 오래전부터 눈이 맞은 사이는 아닌가요? 저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해도 자신도 모르게 곽승재 씨를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닌가요?”고은서는 백승엽에게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이런 상황에서 백유미 씨가 저를 처리해버리고 싶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여길 가능성도 있지 않나요?”“제가 봤을 땐 충분히 가능해요. 본인이 제삼자이면서도 조강지처를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제삼자라고 여길 수도 있죠.”박지연이 이내 말을 보태었다.고은서는 처음부터 차근차근 백승엽을 유도해 백유미와 곽승재 두 사람 사이의 부정당한 관계를 인정하게끔 만들 생각이었다.모든 걸 깨달은 박지연은 옆에서 자연스레 고은서를 도왔다.제삼자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백승엽은 순간 당황해하며 변명했다.“누가 제삼자라는 거야! 입을 삐뚤어도 말은 바른대로 해야지. 명예훼손으로 신고할 줄 알아. 유미랑 승재는 그냥 친구 사이라고!”“그냥 친구 사이라면서 방금전에는 왜 은서가 당신 딸을 질투한다고 한 거죠? 모순되지 않나요?”박지연이 물었다.“백승엽 씨, 백유미 씨께서 곽승재 씨가
고은서의 뜻을 알아차린 박지연은 백승엽의 밀치는 힘을 따라 자연스레 옆에 있는 테이블을 향해 넘어지더니 허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듯 신음소리를 냈다.고은서도 따라 겁먹은 듯 뒤로 피하는 바람에 백승엽은 허탕을 쳤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백승엽은 고은서가 피하려고 하자 더 악을 쓰며 그녀의 어깨를 잡아 끌어당겼다.“아악!”“그만 하세요!”고은서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병실 문 쪽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병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검은 수제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심상치 않은 기품을 내뿜고 있는 곽승재였다.“승재야, 네가 여긴 웬일이야?”백승엽은 이내 고은서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곽승재를 향해 미소 지으며 물었다.기자들은 다급하게 카메라를 곽승재를 향해 돌렸다.곽승재는 그들을 무시한 채 고은서를 향해 재빨리 다가갔다.얼굴이 창백해진 고은서는 두려운 눈길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는데 그녀의 머리카락은 이미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었고 심지어 입고 있던 환자복마저도 꾸깃꾸깃 해졌다.“괜찮아...”곽승재 입을 열자마자 고은서는 몸을 반대편으로 돌리면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대화를 거절하는 듯 그를 등졌다.“승재야, 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다 고은서가 날 모함하려고 이러는 거야.”백승엽이 변명했다.곽승재는 차가운 눈빛으로 백승엽을 째려보고는 병실 안에 있는 기자들과 땅에 넘어진 채 허리를 부여잡고 있는 박지연을 둘러보았다.“아저씨, 지금 뭐 하는 거죠?곽승재의 말에서는 분노가 느껴졌다. 백승엽도 그가 화났음을 감지했다.아무리 어릴 때부터 자라는 걸 봐온 아이라고 해도 백승엽은 곽승재를 볼 때마다 무언의 위압감을 느꼈다.“내가 다 설명해줄게.”백승엽은 말하고는 뒤돌아 기자들을 내쫓으려 했다.“나가, 나가. 다 나가라고. 찍을 게 뭐가 더 있다고 그러는 거야!”“수고비를 따로 준다고 했잖아요. 돈은 주셔야죠.”쫓겨난 기자 한 명이 불만을
곽승재는 백승엽을 노려보면서 물었다.“아저씨, 지금 뭘 걱정하시는 거죠?”“그냥 호기심일 뿐이야. 내가 무슨 걱정을 하겠니.”백승엽은 애써 괜찮은 척하면서 허리를 곧게 펴고 말했다.“승재야, 난 내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들은 내가 찾아온 게 맞아. 그런데 이 또한 다 유미를 위해서야.”곽승재는 그의 말에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는 기자들을 향해 담담하게 경고했다.“거짓 기사가 나오는 일이 없도록 처신 잘하실 거라 믿습니다.”언성이 높지 않았지만 기자들은 무언의 위압감을 느꼈다. 그들은 아쉬움만 품은 채 더는 망설이지 않고 병실을 나갔다.그런데 병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비서와 경호원들이 그들 앞에 막아서며 방금전에 촬영했던 내용을 전부 삭제하라고 할 줄은 미처 생각도 못 했다.속으로는 불만이 많았지만 곽승재의 요구라니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그 장면을 보고 있던 백승엽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일을 크게 만들어 고은서를 엿먹이려 했었는데 모든 게 물거품으로 돌아갔으니 말이다.땅에서 일어선 박지연은 곽승재를 무시한 채 병상 옆으로 다가가 고은서의 상태를 확인했다.곽승재는 차가운 눈길로 백승엽을 바라보며 물었다.“아저씨,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저 사람들을 고은서 병실로 데려온 이유가 뭐죠? 그리고 제가 들어왔을 때 왜 고은서를 잡아끌려고 했던 거예요?”백씨 집안 회사가 곽승재의 도움 없이 유지해나갈 수 없었던 이유로 그의 비난하는 듯한 태도에도 백승엽은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유미가 어렵게 정신을 차렸는데 신고도 하지 말고 고은서를 찾아가지도 말라고 하는데 아버지로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구나. 그래서 사람들 찾아서 유미를 더는 못 건드리게 고은서에게 경고 주려고 했던 거야.”백승엽은 자신의 불만을 토로했다.“그런데 고은서가 반성하기는커녕 유미를 제삼자라고 모욕을 하는 바람에 화가 나서 사과하라고 하려던 중이었어. 하필 그때 네가 마침 들어온 거고. 승재야, 난 그저 경고만 주려 했을 뿐이야. 아무래도 네 아
“승재야, 그럼 난 먼저 유미 병실로 돌아갈게. 잠시 후에 시간 되면 너도 유미 보러 한 번 와. 요즘 한 번도 보러 간 적이 없다며. 유미가...”백승엽이 곽승재에게 말했다.“잠시 후에 들를게요. 먼저 가보세요.”곽승재가 백승엽의 말을 끊고 말했다.백승엽은 더는 말하지 않고 고은서를 힐끗 째려보고는 병실을 나갔다.그가 나간 후, 곽승재가 고은서 곁에 있던 박지연에게 말했다.“박지연 씨도 잠시 나가 있으세요. 고은서한테 단독으로 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박지연은 의심하는 눈길로 곽승재를 보며 말했다.“곽 대표님, 금방 수술하고 몸이 허약한 애한테 무슨 말을 하려는 거죠? 방금전 백유미 아버지한테 시달림까지 받아서 그냥 쉬도록 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박지연은 고은서의 현재 상태를 말하면서 은근슬쩍 방금전 백승엽이 한 짓을 비난했다.곽승재도 그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한참 고민하다가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어제 투약한 간호사를 찾았는데 그냥 쉴래? 아니면 결과라도 들을래?”이 물은 선택제가 아니었다. 고은서는 필연코 결과를 들을 것이다. 그녀는 곽승재의 말을 듣자마자 박지연을 달랬다.“지연아, 먼저 돌아가서 쉬다가 나중에 와도 돼.”박지연은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거절했다.“아니. 나 안 돌아갈 거야. 밖에서 기다릴게.”박지연이 직접 말을 하진 않았지만 고은서는 그녀가 자신이 유산하게 된데 관해 은근히 자책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박지연은 자신이 일을 동료에게 맡기지 않았더라면 고은서가 그 간호사를 믿었을 리도 없었을 거라 생각했다.고은서가 전에 몇 번이고 자신이 경각심이 없이 소홀한 탓이라고, 박지연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그녀를 달래긴 했으나 그녀는 죄책감을 털어버리지 못했다.밖에서 기다린다고 고집부리는 박지연을 더는 막진 않은 것도 이 이유 때문이었다.박지연이 나간 후, 고은서는 웃음 거두고 낯선 사람을 보듯 차가운 눈길로 곽승재를 바라보며 말했다.“그 간호사가 누가 시킨 일이라는 건 말했어?”
“고은서, 내가 호수에 빠진 백유미를 구해서 불만이 생겼다는 걸 알겠는데 이젠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어?”곽승재는 분노가 섞인 말투로 말했다.“어제 그 상황에서 백유미가 죽는 걸 보고만 있으란 말이야? 게다가...”“미안하지만 난 당신이랑 더는 할 말이 없어.”고은서는 태도를 바꾸기는커녕 계속 그를 향해 비아냥거렸다.“지금 어제 호수에 빠진 사람이 백유미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구했을 거라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거지?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받았으니까.”틀린 소리는 아니었지만 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가 달갑지 않았다. 마치 그가 변명거리를 찾는 듯한 뜻으로 들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유미가 어렸을 적에 물에 빠져서 폐가 다친 이후로 물을 엄청 무서워해. 물에 조금이라도 오래 있으면...”“죽으면 뭐가 어때서!”고은서는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소리 질렀다.“당신은 지치지도 않아? 백유미한테 마음이 있으면 그냥 인정해. 그리고 나랑 이혼하면 되는 거잖아. 왜 백유미한테 마음이 있는 것처럼 계속 잘해주면서 내 손은 놓아주지 않는 건데?”곽승재는 애써 들끓는 분노를 참으며 말했다.“고은서, 어제 내가 백유미를 구하지 않고 그냥 익사하게 내버려 두었더라도 너한테 좋을 건 없잖아. 수많은 목격자들이 존재하는데 도망치려 해도 불가능하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진짜 대가를 치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대가?”고은서가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대가를 치르더라도 백유미가 먼저 죽어야 치르지. 당신이 그 타이밍에 나타난 게 우연이라고 생각해? 백유미가 이미 당신이 자신을 구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백유미와 연관된 일이라면 고은서는 항상 이성적이지 못했다. 심지어 백유미를 죽이기라도 할 듯했다.고은서가 흥분해 하자 곽승재는 다시 차근차근 그녀에게 설명했다.“어제 병원에 온 건 의사가 네 상황이 안정되었다고 연락이 와서 퇴원 수속 해주러 온 거였어. 그리고 마침 주차하고 병동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황급히 어디론가 가는 송민아와
“민시후 약혼녀로서 송민아가 위기감을 느끼고 네 아이한테 손을 댄 게 분명해. 증거도 충분하고. 그런데 도대체 왜 넌 믿지 않는 건데? 그리고 벌써 하룻밤이나 지났는데 민시후는 왜 얼굴도 내밀지 않고 있는 거야?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곽승재는 차가운 눈길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물었다.고은서는 순감 흠칫했다.백유미와 연관된 일이라면 곽승재는 항상 평소보다 더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 ‘아이에 관해 이실직고한다고 해도 곽승재가 백유미를 탓한다는 법은 없어. 하지만 이혼이 더 힘들어지는 건 확실해.’고은서는 헛웃음을 치며 되물었다.“하고 싶은 말이 뭐야? 민시후가 병원으로 오지 않은 건 아직 내가 유산했다는 걸 모르고 있어서야. 요즘 당신 때문에 한창 바쁜 사람한테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 안 말했어. 그리고 어제 송민아가 찾아와서 아이를 없애라고 나를 협박하던데, 만약 진짜 송민아가 간호사를 시켜서 투약한 범인이라면 굳이 또 직접 찾아올 필요가 있었을까? 게다가 당신도 송민아가 어떤 반응인지 직접 봤잖아. 어딜 봐도 범인이 아닌 게 분명하잖아.”고은서가 담담하게 말했다.“백유미가 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송민아가 의사 찾으러 간 후 백유미가 직접 나한테 이 모든 걸 꾸민 사람이 자신이라고 자백했어. 나도 그 말을 듣고 흥분해서 백유미를 죽이려 했던 거고.”고은서는 또다시 흥분해 하며 눈을 붉혔다.“설마 또 내가 백유미를 모함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나 할아버지를 걸고 맹세할 수 있어. 백유미가 직접 자기 입으로 모든 걸 승인했다고!”백유미가 유산한 아이가 곽승재 아이라는 사실을 그에게 알려줄 리가 없다고 확신한 고은서는 이 골치 아픈 일을 그녀에게 던져주었다. 곽승재는 고은서가 함부로 자신이 제일 존경하는 할아버지를 걸고 거짓말을 맹세할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내가 가서 잘 물어볼게.”“어떤 답을 얻든 다신 날 찾아오지 마. 이혼 외에는 다신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대체 누가 백유미를 도와 날 해치려고 하는 거지?’고은서와 박지연은 이 물음 하나로 한참 동안 토론해보았지만 아무런 결론도 얻지 못했다.고은서는 백유미 외에 자신이 또 누굴 건드렸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은서야, 너 오늘 일부러 기자들 앞에서 화제를 백유미한테로 이끈 거지?”박지연이 또 다른 얘기를 꺼냈다.“그런데 곽승재가 비서한테 기자들이 촬영한 내용을 다 삭제하라고 시켰던데. 그러면 네가 했던 일들이 다 수포가 되는 거잖아. 곽승재 그 개자식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어떻게 물어보지도 않고 녹음파일이랑 동영상을 다 삭제할 수가 있어.”‘개자식이라. 참 알맞는 별칭이네.’고은서는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수포가 되는 일은 없을 거야.”박지연은 어리둥절했다.“설마 너 따로 계획해둔 게 있어?”“계획해둔 건 없는데 미리 해놓은 건 있지.”고은서는 폰을 꺼내 들고 흔들며 말을 이어갔다.“백승엽이 기자들을 데리고 병실로 들이닥칠 때 몰래 폰으로 다 녹음해뒀어. 나중에 함부로 편집한 동영상이나 거짓 기사가 뜨면 나도 반박할 증거가 있어야 하잖아. 그런데 동영상과 거짓 기사는커녕 나만 득을 보게 되었네.”“와, 고은서, 아까 그런 상황에서도 녹음하면서 증거 남길 생각까지 했던 거야? 너 진짜 총명하다.”박지연이 고은서를 보며 탄복했다. 그러나 흥분해 하는 박지연과 달리 고은서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하지만 나도 상응한 대가를 치렀지.’박지연은 고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자꾸 슬픈 과거에만 빠져있지 마. 우리가 지금 생각해야 하는 건 이 녹음파일을 어떻게 이용하겠는가야.”고은서는 이미 다 계획이 있었다.“백유미가 일을 크게 만들고 싶어 하는데 나도 도와야지.”“이 녹음파일로 여론을 일으켜 곽승재를 엿먹이려는 거지? 될 수록이면 GS 그룹 주시까지 영향받게 만들어 주주들로 하여금 곽승재에게 압력을 주게 만들려는 생각인 거야?”고은서는 박지연의 추측을 부인하지 않았다.“주주들이 가만있는다고 해도 곽
고은서는 몽롱한 상태에서 상대방의 품이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너무 허약한 탓에 차갑기만 하던 그녀의 몸도 따라서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그 사람은 등 뒤로 조심스럽게 그녀를 꼭 끌어안으면서 얼굴을 그녀 이마 가까이 붙였다.체온이 하도 높아서 불편함을 느낀 고은서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상대방은 더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지만 등이 점점 더 뜨거워 난 고은서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잠에서 제대로 깨지 못한 탓에 제대로 벗어날 수가 없었다.얼마 후, 그 사람은 그녀를 다시 꼭 끌어안으면서 손으로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흐느끼는 듯 몸을 떨기 시작했다.심상치 않음을 느낀 고은서는 눈을 번쩍 떴다.그러나 뒤돌아 확인하려고 할 때 그가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는 바람에 몸을 돌릴 수가 없었다.“은서야, 미안해...”귓가에서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예전처럼 발버둥 치며 화를 내면서 그를 내쫓는 대신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놔.”곽승재는 여전히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약간 울먹이면서 말했다.“은서야, 미안해.”고은서는 곽승재가 오후에 박지연한테서 들은 말 때문에 이런다는 걸 알고 있었다.“지연이 혼자만의 생각이니까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돼.”고은서의 말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당신 아버지랑 백승엽까지 여기로 온 이상 당신도 어쩔 수가 없었겠지. 할 만큼 했다는 거 나도 알아.”곽승재는 그녀를 놓아주기는커녕 방금전보다 더 세게 끌어안았다.고은서는 목 쪽으로 뜨거운 액체가 떨어지는 걸 느꼈다.“은서야, 차라리 욕이라도 해...”곽승재의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에서 그가 무척 후회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러나 고은서는 여전히 담담했다.“곽승재, 굳이 이러지 않아도 돼. 난 당신이 한 말을 애초에 믿은 적이 없으니까.”곽승재는 순간 몸이 굳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치 이번이 그녀를 안아볼
병실로 들어오자마자 이 광경을 주민기는 황급히 벨을 누르며 의사를 불렀다.“의사 선생님...”...고은서의 병실로 다시 돌아간 박지연은 방금전 씩씩거리며 나가던 모습과 별다른 점이 없어 보였다.“거봐, 내가 가지 말라고 했지?”고은서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녀를 위안했다.“화 풀고 나랑 내일 귀국할 준비 하자. 돌아가고 나서 나 밥 사줘. 그리고 SPA도 하고 싶은데 네가 쏠 거지?”박지연은 한참 동안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다가 끝내는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은서야, 곽승재한테 목매지 말고 우리 다른 남자 찾아보자. 넌 곽승재가 아니어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어.”박지연은 평소에 이런 오글거리는 행동을 별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이런 행위를 볼 때마다 혀를 끌끌 차곤 했었다.‘곽승재한테 찾아가더니 화가 많이 난 모양이네.’“알겠어.”고은서가 박지연의 등을 토닥이며 웃으면서 답했다.민시후도 어느새 백유미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백유미 정신질환 진단서에 관해서는 이미 조사해보라고 사람 시켰어. 민시현한테도 원지훈 사망 사건에 관해 다시 조사하게끔 당지 경찰 측에 말해달라고 부탁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마.”“괜찮아. 이미 결론이 난 사건이라서 큰 변화는 없을 거야. 그러니까 다시 조사해달라고 형을 귀찮게 굴지 않아도 돼.”고은서가 답했다.“해줄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는 데 써먹을 수 있을 때 써야지.”민시후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난 네 형한테 불리워 가서 밥 먹기 싫어.”고은서가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 말싸움을 했다.“민시후, 비록 네 선택이기는 하지만 다신 이런 일에 끼어들지 마. 나 때문에 네가 다치는 일은 더는 없었으면 좋겠어.”민시후는 이번 일로 며칠 동안 병상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지금도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됐다.그녀가 보기에도 엄청 안쓰러운데 그의 가족들은 오죽할까.“네가 다치는 일이 없는 한 이건 약속 못 하겠는데.”
곽승재는 눈앞에 놓인 종이를 보며 그대로 얼어붙었다.박지연은 콧방귀를 뀌면서 곽승재한테 고은서가 유산한 날 동료한테 부탁해서 그가 썼던 수건에 있던 머리카락으로 유전자검사를 했다면서 알려줬다.“고은서가 계속 마음에 못을 박는 소리를 해왔지만 당신을 좋아하는 마음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어요. 원래는 당신이 고은서의 마음을 되돌리고 두 사람이 재혼하게 되는 그날에 이 모든 걸 알려주면서 은서는 단 한 번도 당신에게 미안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당신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당신은 진짜 구제불능인 것 같네요. 어떻게 자기 아내랑 아이를 죽이려고 했던 범인을 이대로 놓아줄 수가 있죠? 당신은 은서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박지연이 화를 내며 호통쳤다.고은서가 유산했을 때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구슬프게 우는 모습을 떠올린 박지연은 지금이라도 곽승재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다.“은서가 그 아이가 태어나길 얼마나 기대했는지 알아요? 어떻게 하면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애가 행복하게 클 수 있는지를 얼마나 고민해왔는데. 그런데 결국에는 백유미 그 악독한 여자가 이 모든 걸 망쳐버렸잖아요.”박지연은 말하면서 울먹이기 시작했다.“아이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당신이 은서를 굳게 믿었다면 굳이 이혼할 일도 없었을 거예요. 아마 지금쯤 두 사람이 아이를 함께 키우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요.”곽승재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은서가 당신 같은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것부터 아주 큰 착오였어. 당신은 단 한 번도 은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 보지 않았잖아요. 단 한 번도 은서 입장에 서서 고려해본 적이 없잖아요! 민시후가 계속 눈에 거슬린다고 했죠? 그런데 민시후가 당신보다 백 배는 나아요. 적어도 은서를 웃게 하려고 노력하고 안전감을 주려고 노력하잖아요. 고은서가 무슨 일이 있든 항상 발 벗고 나서주잖아요.”박지연은 계속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은 그의 마음에 칼을 꽂았다.“고은서가 백유미한테 반격하려는 일을 민시후한테
박지연은 종래로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항상 깊은 사고를 거친 후에야 결정을 내리는 타입이었다.그뿐만 아니라 고은서와 마찬가지로 결정한 일이라면 꼭 해야 하는 성격이었다.고은서는 아무리 설득해도 그녀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당부했다.“적당히 해. 화내면서 눈물 흘리며 찾아오기 없기야.”박지연은 고은서의 농담을 뒤로 한 채 마치 곽승재를 후회하게 만들 히든카드라도 손에 쥐고 있는 듯 아주 결연한 표정으로 병실을 나섰다.고은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육현석이 아침에 어머니한테 불리워 해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조금이나마 나랑 함께 지연이를 설득할 수 있었을 텐데. 됐어. 당하고 나면 알아서 정신 차리겠지 뭐.’...박지연은 이내 곽승재가 있는 병실에 도착했다.어깨 상처가 아직 낫지 않은 탓인지 그의 얼굴은 아직도 창백해 보였다. 그녀가 병실로 들어갈 때 그는 병상에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옆에는 비서 주민기가 서 있었다.주민기는 그녀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눈치 있게 자리를 피해줬다.곽승재는 그녀가 찾아올 거라는 걸 먼저 예상이라도 한 건지 아주 덤덤한 표정을 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박지연 씨가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죠?”박지연은 냉소를 흘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곽 대표님, 백유미가 은서한테 얼마 악독한 짓을 했는지 알면서도 고작 정신병원 진단서 하나 때문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건가요?”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은서한테 백유미를 대가 치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면서요. 이게 곽 대표님이 말한 그 대가인가요?”박지연이 계속 캐물었다.곽승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해성으로 돌아간 후 정신병원으로 보낼 거예요.”“거참. 고작 정신병원 하나로 끝내겠단 말씀이세요?”박지연이 헛웃음을 치면서 말했다.“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다 백유미가 아무런 병이 없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지금 그저 핑
박지연은 또 다른 한 가지 소식을 고은서에게 전했다.범가온이 원지훈 유품을 확인할 때 그의 폰에서 백유미가 성폭행당하는 동영상을 발견했다고 한다.아마 원지훈이 자신의 앞날을 위해 그 동영상으로 백유미를 협박하려고 했던 모양이다.동영상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이었다.백유미한테는 기필코 아주 큰 타격이 될 것이다.범가온은 동영상을 확인한 후 아들의 죄를 덮어주기는커녕 사람을 찾아 그 동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했다고 한다.그 동영상은 업데이트되자마자 많은 사람의 주목을 끌었고 여론이 점점 커져갔다.“조회수가 어마어마하대. 특히 외국 사이트는 심사가 별로 엄하지 않아서 벌써 T국 여러 사이트 실검에 올랐어. 비록 국내에서는 동영상 풀버전을 볼 수는 없지만 전파 속도가 하도 빨라서 이미 본 사람들이 꽤 많을 거야. 백유미 이번엔 진짜 끝장이야.”그러나 고은서는 마음이 별로 놓이지 않았다.백유미에겐 곽현수라는 조력자가 있었고 그가 직접 나선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그 누구도 보장하지 못한다.아니나 다를까, 오후쯤이 되어서 고은서는 휠체어에 앉은 백승엽과 곽현수가 T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비록 이미 GS그룹 경영권을 곽승재에게 물려주고 회사 일에서 손을 뗐다고 하지만 T국 상류계층 사람들마저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 명성은 여전했다.그 사람들과 곽현수의 참견으로 T국 경찰 측에서는 얼마 되지 않아 원지훈을 죽인 백유미의 행위가 정당방위라는 조사결과를 공포했다.왜냐하면 원지훈이 찍은 동영상에서 백유미를 죽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그의 목소리가 함께 녹음되었기 때문이다.그래서 경찰 측에서는 원지훈이 앙심을 품고 백유미를 죽이려 하다가 도리어 칼을 들고 정당방위 하는 그녀에게 목이 찔려 죽었다고 판단했다.고은서 납치 사건에 관해서는 녹음 파일과 증인이 다 있었기에 백유미는 거의 유죄 선고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그러나 백승엽이 이름 있는 정신병원 진단서를 내밀며 백유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는 차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았다.“형, 전생이 존재한다는 게 말이 돼? 요즘 스트레스 너무 받아서 그저 악몽 꾼 걸 거야.”비록 고은서의 변화와 곽승재의 말들을 잘 되새겨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육현석 또한 전생이 존재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형수님처럼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가 자살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자신의 주장도 과감하게 제기할 줄 알고 또 하고 싶은 일도 한다면 하는 사람인 데다가 자신을 꾸미는 것도 좋아하고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사는 사람이 왜 자살을 한다는 거야?”그러나 곽승재는 전혀 위안이 되지 않은 듯했다.‘육현석의 말대로 고은서는 자신을 꾸미는 것도 좋아하고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지.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자살한다는 건 얼마나 큰 절망을 느껴서였을까?’“형, 방금전에 백유미 찾아가지 않았어? 어떻게 됐어?”육현석이 일부러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손에 있는 증거를 경찰 측에 넘기면 되잖아. 왜 굳이 직접 찾아간 거야?”곽승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증거가 나타난 타이밍이 너무 수상해.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자꾸 누군가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뭐? 누군데?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 건데?”육현석은 놀라움을 참지 못했다.“그저 내 직감일뿐이야. 자세한 건 더 조사해봐야 해.”곽승재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이튿날, 고은서는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약 효과가 아직도 남아있는 탓인지 머리가 계속 띄엄띄엄 어지러워 났다.“고은서!”그녀가 누워서 좀 더 쉬려고 할 때 박지연이 흥분해 하며 병실로 달려 들어왔다.“빅뉴스야!”반면 고은서는 약간 풀이 죽어 있었다.“뭔데?”“백유미가 다른 사람한테 맞아서 지금 중환자실에 들어갔대.”고은서는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누가 때린 건데?”“누가 때렸는지 한 번 맞춰봐.”박지연이 웃으면서 일부러 뜸을 들였다.고은서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T국에 있는 백유미랑
곽승재는 육현석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아직도 아침의 그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했다.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현실적으로 느껴졌다.고은서는 정신병원 환자복을 입고 있었는데 뼈밖에 안 보일 정도로 살이 빠져있었고 얼굴도 전과 다르게 핼쑥해져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그가 알고 있는 그녀의 똘망똘망한 눈빛과 다르게 꿈속의 그녀는 절망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냉소를 흘리면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고은서는 이미 피바다 속에 쓰러져있었다.그 순간 그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형, 왜 그래...”육현석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내가 잘못 본 거겠지. 형 지금 눈시울이 빨개진 거야?’오랫동안 곽승재와 지내오면서 그의 이런 모습은 육현석도 처음이었다.마치 하나뿐인 동반자를 잃은 늑대처럼 처절하고 비참하면서도 후회막심해 보였다.“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육현석이 위안했다.곽승재는 또다시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목이 쉰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어제 백유미가 칼을 들고 자살하려고 할 때 유난히 당황스러웠어. 마치 백유미를 막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아침에 이 꿈을 꾸고 난 후로 그 이유를 알겠더라. 고은서도 똑같은 일을 겪었는데 그땐 내가 미처 구하지 못했다는 걸.”“그러니까 지금 전생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거지? 방금전에 말한 일도 전생에 발생한 일이고.”육현석이 물었다.그러나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또한 전생이 존재한다는 게 아주 황당한 생각이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꿈에서 봤던 일들이 진짜 현실에서 발생한 것처럼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졌다.육현석은 곽승재의 이런 모습이 약간 적응되지 않았다.항상 강인한 모습만 보이며 할 줄 모르는 게 거의 없었던 곽승재가 갑자기 전생이라는 말을 꺼내면서 이토록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형, 그저 꿈일 뿐이야. 너무 자책하지마.”육현석이 애써 그를 위안
목소리가 별로 크진 않았지만 민시후는 아주 똑똑히 들었다.그는 육현석을 힐끗 째려보고는 고은서를 향해 아양을 떨며 말했다.“은서야, 방금 깎아준 사과 엄청 달고 맛있는데 한 조각만 더 먹여주면 안 될까?”나머지 세 사람은 충격적인 그의 모습에 입을 쩍 벌렸다.육현석은 진저리를 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민 대표님, 은서랑 얘기 더 나누세요. 저는 먼저 밥 먹으러 가볼게요.”박지연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하고는 쌩하고 달아났다.병실 안에는 고은서와 민시후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나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러는데 다음에는 연기하기 전에 나한테 미리 따로 신호 보내주면 안 될까?”고은서는 아직도 방금전의 놀라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곽승재 껌딱지 새끼를 가만두면 안 되지.”민시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한 시간 후, 육현석은 곽승재가 있는 병실로 찾아갔다.“형, 민시후 그 새끼 진짜 사람 약 올리는 데는 짝이 없어. 형수님 옆에 꼭 붙어있으면서 심지어 사과까지 먹여달라고 한다니까.”방금전 민시후의 모습을 떠올린 육현석은 씩씩거리며 말했다.“형수님을 바라보는 눈길은 또 어찌나 오글거리던지. 형수님을 완전히 자기 소유로 생각하고 있다니까. 환자만 아니었으면 정말 달려가서 한 대 치는 건데.”그는 말하면 말할수록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그 많은 여자 중에서 왜 하필 형수님을 좋아한다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다니까.”그러다 육현석은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형, 내 말 듣고 있어? 형은 화 안 나?”곽승재는 방금전부터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육현석의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형,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하필 그 위급한 상황에 백유미를 구하려고 한 거야?”육현석은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답답해 났다.“그 많은 인력과 재력을 소모하면서 힘겹게 형수님을 찾았으면 당시 상황이 어떻든지를 막론하고 형수님 곁
민시후는 순간 어리둥절해졌다.“뭐가?”고은서는 고개를 들고 의문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우리 서로 알고 지낸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잖아.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매력이 철철 넘쳐흐르는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날 좋아하게 된 거야?”“왜 갑자기 널 좋아하게 됐다니?”민시후는 거동만 불편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이라도 일어나 그녀의 이마를 한 대 콩하고 치고 싶었다.“그러니까 지금 내 마음을 의심하는 거야? 지금까지 내가 널 좋아한다는 말을 거짓말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고은서는 헛기침을 하면서 대답했다.“종일 껄렁대고 다니는데 뭐가 진심이고 뭐가 거짓말인지 어떻게 구분해.”“고은서, 너 진짜 한 대 맞을래?”민시후가 화를 내면서 얼굴을 홱 돌렸다.고은서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알고 있었다.민시후가 그녀를 도와 백유미한테 함정을 파줄 뿐만 아니라 집까지 사주고 또 서운도 함께 가주고 심지어 동물원까지 선물하는 걸 봐서는 그는 처음부터 진심이었다.그저 그녀가 계속 의심하면서 그의 진심을 의심했을 뿐.고은서는 씩씩거리고 있는 민시후를 보면서 조심스레 사과 한 조각을 그의 입 가까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맛 좀 보지 않을래?”“싫어.”민시후가 그녀를 째려보며 말을 이어갔다.“고은서, 넌 확실히 너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매력적이기는커녕 보는 사람 화날 정도로 멍청해. 내가 순간 눈이 멀고 머리에 문제가 생겨서 널 좋아하게 되었나 봐. 됐지?”“...”고은서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넌 왜 자꾸 너 자신을 비하하는 거야? 대체 곽승재한테서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으면 자신을 그 정도로 내리까냐고.”민시후가 씩씩거리며 물었다.“어느 남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다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겠어? 최선을 다해 그 여자를 지키려 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 그런데 왜 너는 자꾸 그걸 부담으로 생각하는 건데?”민시후는 자책하는 고은서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