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엽은 억울한 듯 말을 이었다.“자식이 다치는 걸 보고도 가만히 있을 부모는 없어. 내가 선택한 방식이 잘못된 것뿐이지.”곽승재는 백승엽의 말을 무시하고 병상에 누워 있는 백유미에게 직접 물었다.“어제 어떻게 그렇게 우연히 고은서가 사고 난 근처에 있었던 거야?”백유미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잠시 후 고개를 돌린 백유미의 안색은 창백했고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녀는 곽승재가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한 것이 믿기지 않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승재야, 무슨 뜻이야?”“그래. 승재야. 무슨 뜻으로 유미한테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백승엽도 물었다.“내가 말했잖아. 유미는 산책하다가 우연히 고은서를 만난 거라고!”곽승재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백유미를 바라보았다.“고은서한테 네가 아이를 해쳤다고 했어?”백유미의 마음은 세차게 요동쳤지만 표정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다.그녀는 백승엽에게서 곽승재가 고은서의 병실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곽승재가 와서 따질 것이라 예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러나 백유미는 고은서가 어제 자신이 했던 협박을 곽승재에게 전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은서의 기분대로라면 승재를 원망하며 한마디도 하지 않아야 하지 않나? 왜 곽승재에게 이 사실을 얘기한 거지?’“그래서 정말 네가 한 거야?”백유미가 한동안 대답하지 않자 곽승재의 목소리는 더욱 차가워졌다.“아니야! 정말 아니야!”백승엽이 급히 답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승재야, 너 뭐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야? 고은서의 아이를 유미가 없앴다니. 고은서가 하는 헛소리 다 믿지 마! 고은서는 우리 유미를 원망해서 죄를 뒤집어씌우는 거야. 승재야, 절대 믿으면 안 돼.”“아버지, 나가 계세요.”백유미는 무기력하게 백승엽의 해명을 막아섰다.백승엽은 곽승재의 날카로운 표정을 보며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남아 있는 건 오히려 방해될 것 같아 그는 어쩔 수 없이 병실을 나섰다.“승재야. 유미도 모
곽승재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동요도 없이 극도로 차가웠다. 듣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었다.백유미는 등줄기로 느껴지는 싸늘함을 참아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승재야, 네가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널 위해서 그렇게 얘기한 거야.”백유미는 싸늘한 곽승재의 시선을 마주하며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 만약 은서 씨를 제때 구했다면 아이도 무사했겠지. 네가 내게 말한 적은 없지만 은서 씨 아이를 마음에 걸려 한다는 건 느낄 수 있었어. 나는 네가 그 어떤 불행도 겪지 않길 바랐기에 그 순간 그런 결정을 내린 거야.”곽승재는 백유미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아픔을 참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 표정에는 단호한 결심과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마치 그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하여 고통스러웠지만 후회는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네 스스로도 억지스러운 이유라고 생각하지 않아?”곽승재가 무표정하게 물었다.“네가 듣기에는 황당할 거야. 하지만 한 순간의 결정에 대해 매번 설명하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백유미의 눈가에 씁쓸함이 짙어졌다.“위대한 사람인 척 포장하려는 게 아니야. 나도 내 욕심이 있었어. 내가 병원에 입원하는 동안 너는 단 한 번도 병문안 오지 않았어. 네가 은서 씨 일로 괴로워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내가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면 네 고민이 적어지고 여유가 생겨서 날 보러 와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백유미의 대답에 곽승재는 믿는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는 말도 하지 않는 대신 물었다.“간호사한테 약을 타라고 한 일도 네가 송민아한테 뒤집어씌운 거야?”“아니야!”백유미는 단호하게 부정했다.“누군가가 은서 씨한테 약을 탔다는 사실은 정말 몰랐어. 그런데 어떻게 송민아에게 뒤집어씌워? 최근 병원에만 있었어. 그런 내가 송민아를 알 리도 없잖아.”곽승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승재야, 만약 내가 말한 이유가 아니라면 내가 왜 굳이 은서 씨를 자극했을
“몸 상태도 좋지 않은데 아저씨한테 잘 돌봐달라고 해. 아저씨와 GS 그룹 자회사와의 몇몇 협력은 잠시 중단할 생각이야.”곽승재가 말했다.백유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승재야, 지금 아버지 회사와의 프로젝트를 중단하겠다는 거야? 아버지가 은서 씨를 찾아간 것 때문에?”곽승재는 미동도 없는 표정으로 답했다.“고은서는 내 아내야.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아저씨도 연세가 있으시니 너무 과로하지 마시고 조금 쉬시라고 해.”말을 마친 곽승재가 그대로 병실을 나섰다.곽승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백유미가 침대 옆 물건들을 쓸어버리며 분노를 표출했다.그녀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둡고 서늘해졌다.때마침 병실로 돌아온 백승엽이 그 광경을 보고 놀라며 물었다.“유미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화를 내고 그래? 승재가 돌아와서 보면 어쩌려고 그래.”백유미가 냉랭한 목소리로 답했다.“날 돌아보기나 하겠어요? 지금 승재 마음은 온통 고은서한테 가 있단 말이에요! 고은서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을 기세예요!”“그래도 네가 이렇게 흔들리면 안 되지. 승재 마음을 다시 돌려놓을 방법을 생각해야지. 함께 자란 시간도 있고 승재를 구해준 적도 있잖아. 승재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니 그런 것들을 잘 이용해 봐.”백승엽이 급박하게 말했다.백유미는 차가운 표정으로 답했다.“그걸 이용하지 않았으면 여기 앉아서 아버지랑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었을 것 같으세요?”“그런데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거야?”백승엽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승재가 우리 회사와의 거래를 끊겠다고 하잖아요! 앞으로 뒷배가 없으면 회사는 어떻게 유지해요!”백유미가 이를 악물며 답했다.이 소식이 퍼지면 백씨 가문을 배신할 준비가 된 사람들은 기회를 노리고 뒤통수를 쳐 백씨 가문 회사는 큰 위기를 맞을 것이 분명했다.백승엽도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어떡하면 좋지? 이럴 줄 알았으면 고은서 찾으러 가지 않았을 텐데... 별다른 소득도
고은서가 곽승재가 조사해 낸 서류를 송민준에게 내밀며 말했다.“한번 보시죠.”송민준이 파일을 열어보자 송민아도 고개를 내밀어 들여다보았다.사진 속에는 송민아가 낯선 여인과 함께 있는 장면이 찍혀있었다. 그리고 송민아를 보살피는 가정부가 낯선 여인에게 송금한 기록도 담겨 있었다. 송민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이 사진은 뭐예요? 왜 아주머니의 송금 기록도 같이 있는 거죠?”고은서가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했다.“민아 씨가 사진 속 간호사를 매수해 저에게 유산하는 약을 전달하게 해서 유산하게 된 거예요. 이건 민아 씨 가정부가 간호사에게 송금한 기록이고요.”그 말을 들은 송민아는 충격에 휩싸여 넋을 잃었다.“저는 간호사가 누군지도 몰라요! 그런데 어떻게 간호사를 매수해서 은서 씨한테 약을 써요? 이 자료 가짜 아니에요?”고은서는 송민아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눈길을 송민준에게 돌렸다.“송민준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송민준이 서류를 덮으며 답했다.“이건 제가 더 자세히 조사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민아가 이런 일을 할 리 없다고 믿습니다.”“왜요?”고은서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송민아 씨는 이미 몇 번이나 제 아이를 없애겠다고 협박했어요. 또한 가만두지 않겠다고도 했고요. 명백한 증거도 있고 누가 봐도 송민아 씨가 범인이잖아요.”“아니에요! 저는 그런 짓 한 적 없어요.”송민아가 크게 외치며 말했다.“은서 씨한테 아이를 없애라고 협박하고 가만두지 않겠다고 한 건 맞지만 은서 씨를 건드리면 시후 오빠가 저를 더 미워하고 멀리할까 봐 두려워서 아무 짓도 할 수 없었어요! 이건 누군가가 저를 모함하는 거라고요! 아주머니한테 전화해서 송금 기록은 어찌 된 일인지 물어볼게요!”송민아가 진숙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아주머니가 고향에 일이 생겨서 휴가를 내셨어요. 신호가 잘 안 터져서 그런 것 같은데 다시 연락해 볼게요. 어쨌든 이 일은 저랑 상관없어요.”송민아가 흥분한 목소리로 주장했다.“그래요?”고
고은서가 사과를 한입 베어 물며 솔직히 답했다.“빈틈이 안 보여. 처음부터 끝까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허술한 구석이 없더라.”“그러니까 민시후가 너한테 그 사람은 속을 알기 힘든 사람이라고 하지. 역시 쉽지 않은 상대인가 보네.”박지연이 청포도 한 알을 입에 넣으며 덧붙였다.“네 추측이 틀린 건 아닐까? 송민준이 왜 백유미와 손을 잡고 자기 동생을 모함하겠어?”고은서가 답했다.“잘못 생각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이상한 점이 많아서 그래. 송민아 가정부가 그렇게 쉽게 매수될 리도 없고 백유미가 아무리 치밀하게 행동했다고 해도 아무런 꼬투리도 잡히지 않는다는 게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송민준이 가장 의심스러워. 클럽에서 나를 본 눈빛도 섬뜩했어. 마치 이미 나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리고 하필 송민준이 나타난 날 밤 내가 사고를 당했잖아. 그리고 서승현도 그래. 민시후 말로는 해외로 이미 도망갔을 수도 있다더라. 민시후와 곽승재 눈을 피해서 그렇게 사람을 숨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박지연이 청포도 한 알을 더 먹으며 말했다.“하지만 그 사람이 너한테 무슨 원한이 있다고 그런 일을 벌여? 네가 민시후와 가까운 사이여서 송민아 대신 복수하기 위해서?”고은서는 남은 사과 조각을 억지로 씹어 삼키고 병상에 누웠다.“단순히 송민아를 위해서였다면 다른 방법으로도 충분히 나에게 경고할 수 있었을 거야. 굳이 백유미와 손잡을 필요가 있었을까? 말이 안 돼.”박지연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만 생각해. 어차피 네 추측일 뿐이잖아. 송민준과 상관없을 수도 있잖아. 백유미 배후에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일단 쉬어. 또 피곤해서 쓰러지지 말고.”박지연의 말에 과장도 있었지만 오늘 확실히 많은 일들이 있었다. 고은서는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고 확실히 피곤했다.“지연아, 잠시 잘 거니까 음성 파일은 네가 계속 신경 써줄래?”“그래.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나한테 맡겨.”다음 날 아침, 박지연이 흥분한 목소리로 고은서
박지연의 걱정은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곽승재가 고은서의 뜻대로 하게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 이후로부터 그는 이혼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고은서가 민시후의 아이를 가졌다고 자극해도, 여러 번 모진 말을 해도 곽승재는 일말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고 아이를 지우고 예원 별장으로 돌아가라고 할 뿐이었다.이제 아이마저 없어진 상황에서 고가승재는 더더욱 이혼을 승낙하지 않을 게 뻔했다.“은서야, 이혼하지 않고 그냥 사는 건 어때?”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물었다.“백유미는 너희 사이를 갈라놓고 본처 자리를 꿰차려고 하는 거잖아? 그 여자 뜻대로 되지 않게 버텨봐. 백유미는 속이 뒤집어질 거야.”고은서도 그 방법이 백유미의 화를 돋울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오히려 자신이 더 불편해질 것 같았다.“조언 고마워. 하지만 상대방에서 엿 먹이려고 나도 같이 고생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고은서의 표현에 박지연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은서야, 전에는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기억해?”고은서가 답했다.“그래서 더 빨리 벗어나서 진짜 행복을 찾고 싶어.”박지연은 말문이 막혔다.잠시 후 박지연은 링거를 챙기러 밖으로 향했다.고은서가 핸드폰을 꺼내 박지연의 어머니에게 귀국 여부를 물으려 했지만 핸드폰에 주인혁의 이체 기록이 떠 있었다.[누나, 저 드디어 매니지먼트랑 계약했어요. 광고 촬영도 해서 회사에서 상여금 받아서 조금 더 갚아요. 나머지는 천천히 갚을게요.]주인혁이 말하지 않았다면 고은서는 주인혁이 돈을 갚아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을 터였다.[급할 거 없어요. 나중에 갚아도 돼요. 대회 준비하며 돈 쓸 곳이 많을 텐데 그것부터 신경 쓰세요.]고은서가 답장을 보내자마자 주인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누나, 요즘 잘 지내셨어요? 저는 매일 훈련하고 대회 준비하느라 정신없어서 연락 못 드렸어요. 늦게 연락하면 방해될까 봐 조심스러웠어요.”고은서가 웃으며 답했다.“그냥 그렇죠 뭐. 나쁘지도 좋지도
고은서는 박지연의 말을 듣고 다소 의아해졌다.지난 생에서 백승엽은 곽승재를 등에 업고 사업을 원활히 이어나갔다.많은 사람들이 백유미와 곽승재가 친밀한 사이라는 말에 백승엽에게 붙어 잘 보이려 애썼다. 하여 백승엽은 그 누구보다 풍요롭고 기세등등하게 살아왔다.‘이번에는 곽승재가 백승엽과 관계를 끊는다고?’“듣자 하니 어제 백유미가 엄청나게 화내면서 병실 물건을 다 부쉈대. 백유미 아버지도 고개를 푹 숙이며 병든 닭처럼 돌아갔대.”백유미는 흥미롭게 소문을 전했다.간호사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은 신뢰성이 높았다.아무래도 곽승재가 백씨 가문에 강수를 둔 듯했다.“백씨 가문도 자업자득이지 뭐.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딱 그 꼴이야.”백지연이 계속하여 비꼬며 말을 이었다.“어제 백유미 아버지가 너 때릴뻔했잖아. 내가 말리게도 못하고... 곽승재가 제때 오지 않았다면 넌 그대로 맞았을 거야!”고은서가 답했다.“맞고만 있지 않았을 거야. 나도 반격할 준비는 해뒀어. 그때는 백승엽을 자극해서 실수를 유도하려고 했던 거야. 그래야 약점을 잡을 수 있을 테니까. 오히려 네가 허리를 다쳤잖아.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 아니면 온 닥터가 나한테 뭐라 했을걸?”말하며 고은서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그러고 보니 이틀이나 집에 안 갔잖아. 온 닥터한테 전화도 안 왔어?”“바빠.”박지연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미리 얘기해 둬서 내가 어디서 뭘 하는지 알아. 굳이 전화 안 해도 돼.”“매일 그렇게 바쁘면 너랑 대화할 시간도 없지 않아?”고은서가 물었다.“괜찮아. 나도 너무 질척거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해.”“여기서 담배 피우시면 안 됩니다.”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던 중, 복도에서 다른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박지연이 병실 문을 열자 곽승재가 복도에 서 있었다.곽승재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수려한 몸을 난간에 기댄 채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여기서 뭐 하세요?”박지연이 묻자 곽승재는 담배를 버리고 긴 다리로 성큼
일부러 그녀가 들으라고 큰 목소리로 말했던 탓에 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을 수 있었다.“내가 걱정하던 대로야. 곽승재는 바로 네가 했다는 걸 알아차렸어. 태도도 강경해. 곽승재가 나서면 화제성도 금방 잠잠해질 거야.”고은서가 병상에 누운 채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박지연의 어머니 윤성희에게서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귀국 중인 것 같았다.“안색이 왜 그렇게 어두워? 이혼 문제 때문에 그래? 아니면 약을 탄 사람이 백유미가 아니라는 걸 들어서 그래?”박지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고은서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곽승재가 백유미와 간호사 사이에 아무 관련도 없다고 단언한 순간, 고은서의 마음은 허탈해졌다.백유미는 언제나 곽승재의 신임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곽승재가 백씨 가문과의 거래를 중단한 건 시작일 뿐이었다.시간이 지나 백유미와 백승엽이 처량한 표정을 지으며 신세 한탄을 하면 곽승재는 다시 백씨 가문 사업을 도와줄 가능성이 높았다.지난 생에서 고은서는 백유미의 그늘 속에서 살았다. 비록 이번 생의 곽승재에게 변화가 생겼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백유미에 대한 옛정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고은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둘 사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그때 박지연의 핸드폰이 울렸다.“언니! 병동 아래에서 싸움 났어요.”박지연이 전화를 받자 상대방이 다급하게 말했다.박지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환자 가족이 소란을 피우는 건가요? 왜 보안팀에 연락하지 않았죠?”“환자 가족이 아니라 언니 친구의 남편, 곽 대표님과 다른 남자가 싸우고 있어요. 내려와 보시는 게 어떠세요? 어제 원장님이 곽씨 가문 일에는 간섭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잖아요. 그래서 나서는 사람이 없어요. 저도 몰래 연락하는 거예요.”“알겠어요. 바로 내려갈게요.”고은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민시후가 왔나 보네. 나도 같이 내려갈게.”곽승재가 엄한 사랑과 시비가 붙을 리는 없었다. 아마 병원을 나서며 들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
곽승재의 물음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갔어. 우연히 마주치기까지 했지.”여시은이 그들이 있는 곳을 알고 일부러 찾아왔을 것이라는 의심이 확 들었다.곽승재는 여시은이 WOR 게임 회사에 협력 제의를 했으나 주 개발자에게 거절당했다고 알려주었다.여시은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유혹을 던지는 걸 보면, 고은서가 이 일을 알게 만들어 화나게 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했다.고은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은서야, 무슨 얘기 하려고 했어?” 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일단 여시은의 이 문제를 접어두고, 오늘 송민준의 사무실에서 그의 컴퓨터에 있는 농장 영상을 발견한 일을 설명했다.곽승재는 표정이 복잡해지며 말했다.“송민준이 그렇게 방심할 사람이야? 아니면... 당신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뜻이야?”스스로 질문한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는 씁쓸하게 물어왔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말뜻을 알면서도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송민아가 비밀번호를 알아낸 과정을 설명했다.그녀와 송민준의 관계가 생각처럼 그리 가깝지 않음을 확인한 곽승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송민준이 어떤 반응을 보였어?”고은서는 들은 대로 전했다.“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고은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잘 모르겠어. 만약 그 이유가 아니라면, 송민준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했을까?”송민준이 C 선생이라 해도 농장과는 무관한 일, 조사 동기가 불분명했다.곽승재는 입술을 깨물며 분석을 이어갔다. “우리가 농장 사건을 파헤친 건 시은 씨가 너를 모함해 여 대표님마저 널 의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잖아.”“내 사람들이 샅샅이 조사했지만 결정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어. 전에도 말했지만, 시은 씨가 미리 손쓴 거 같아.”“만약 송민준이 너를 위해 조사한 게 아니라... 이미 그 영상을 확보한 상태였다면?”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고은서가 뭔가 깨달은 듯 소리쳤다. “설마 민준 오빠가 시은이 혐의를 숨겨준 장본인이라는 뜻이야?”곽승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
고은서는 송민준의 반듯한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민준 오빠가 정말 뒤에서 나를 죽이려는 사람일까?’통화를 마친 송민아가 들어오면서 둘의 대화는 자연스레 끊겼다. 송민아가 애교 부리며 조른 끝에 송민준의 손에서 의향서를 가질 수 있었다.점심이 거의 끝날 무렵, 고은서가 먼저 계산을 했다.송민준이 한 끼 식사값 정도 낸다고 문제 될 건 없겠지만, 의향서까지 받은 마당에 식사까지 대접받는 건 좀 민망했다.송민준은 고은서가 계산을 한 걸 알고도 기분 상해하지 않고, 오히려 기분 좋게 받아쳤다. “은서야, 그럼 다음번엔 내가 살 기회를 줘.”...의향서는 손에 넣었다지만 그래도 처리할 일은 여전히 많았다.고은서가 일을 마치고 라이트 문 아파트에 돌아온 건 밤 10시가 다 되어서었다.쑤신 팔을 주무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고은서가 집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검은 쓰레기봉투를 든 곽승재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진한 색 셔츠를 입은 곽승재의 옷자락은 허리에 대충 걸쳐져 있었는데 정장 바지와 긴 다리, 쭉 뻗은 체격에서 귀공자의 기품이 풍겨왔다.하지만 그에 비해 낯색은 별로였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손에 꽉 움켜쥔 검은 쓰레기봉투가 불조화를 이루었다.고은서의 시선을 느낀 곽승재가 고개를 들었다.이 시간에 마주칠 줄 몰랐던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척 지나가기가 더 어색하다고 느낀 고은서가 말을 건넸다.“쓰레기 버리러?”곽승재는 슬그머니 검은 봉투를 뒤로 숨기며 대답했다.“청소 아주머니가 교체하는 걸 깜빡해서 직접 내다 버리려고.”순간 송민준에게서 받은 영상이 생각난 고은서가 물었다.“지금 별일 없지? 너랑 할 이야기가 좀 있어.”말을 마친 고은서가 곽승재 방으로 가려 하자 곽승재가 막아서며 말했다.“너한테로 가자. 내 방이 좀 지저분해서 그래.”청소 아주머니가 다녀갔다면서 방이 지저분하다는 말에 고은서는 의문스러웠지만 더 묻지 않았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재빨리 쓰레기 버리러 계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
송민아의 말투에 묻어난 야유를 고은서가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송민아는 송민준이 고은서에 대한 호감 때문에 몰래 조사를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고은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고 여겼다. 송민준과는 특별한 접점이 없을뿐더러 호감이라 하기엔 애매했다. 게다가 송민준은 묵묵히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었다.‘그렇다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한 걸까?’“그날 은서가 당한 사고가 항상 마음에 걸렸었어.”송민준이 송민아의 질문에 답했다.“그날 내가 늦지 않고 계속 함께 있었다면 은서가 물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거야. 게다가 여 대표가 은서가 시은 씨를 밀었다고 의심했다는 말에 내가 더 미안해서...”송민준이 사과의 뜻을 전했다.“다만 몇 분이라도 빨리 도착했더라면, 적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봤을 텐데 말이야.”이 설명에도 송민아는 만족스럽지 못한 뉘앙스를 풍겼다.“단지 죄책감 때문이야?”고은서는 송민아가 더 엉뚱한 소리를 해댈까 봐 서둘러 말을 끊었다.“민준 오빠, 그날 일은 어떤 각도로 봐도 오빠 잘못이 아니야. 전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어쨌든 진상을 밝혀줘서 고마워. 이 영상 나한테 보내주실 수 있어?”고은서가 조심스레 물었다.“물론이지. 원래도 너 주려고 했었어.”송민준이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이걸 바로 여 대표님께 보여줄 거야?”송민아가 물었다.송민준의 의도가 불분명한 시점에 고은서는 완전히 경계심을 풀 수가 없었다.“아마 재훈 씨는 최근 시은이 회사 설립으로 바쁘실 거야. 이 관건적인 시기에 드리면 내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서 아무래도 개업 축하 파티가 끝나고 나서 다시 얘기하는 게 좋을 거 같아.”“분명 시은 씨가 널 물에 빠뜨리고, 여 대표님의 오해까지 받았는데 넌 뭐 하러 그 사람들을 배려해!”송민아가 화내며 말했다.“내가 봤을 땐 그냥 영상을 보여주고 너를 오해했다는 걸 인지시켜야 해! 오빠, 어떻게 생각해?”송민준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은서도 자기 생각이 있을 거야. 은서의 판단
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와 고은서는 깜짝 놀라며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송민준이 사무실 문 앞에 서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고은서는 순간 어색함이 밀려왔다. 남의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함부로 만진 데다 지어는 내용까지 훔쳐보다가 주인에게 딱 걸렸으니 말이다.얼굴이 확 붉어진 고은서가 입을 열려는 순간, 송민아가 먼저 물었다.“오빠, 오빠 컴퓨터에 왜 지난번 은서와 여시은 씨가 물에 빠진 영상이 있는 거야?”송민준에게 사과하려는 고은서의 말을 끊은 채 송민아는 재차 추궁했다.“누구한테서 받은 거야? 왜 나한테는 말도 안 해줬어?”고은서 역시 궁금했기에 민망함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답을 기다렸다.송민준은 차분히 걸어와 영상을 끈 뒤 담담히 물었다.“민아야, 누가 내 컴퓨터를 함부로 만져도 된다고 허락했어?”송민아도 민망하긴 마찬가지였던지라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그냥 비밀번호가 맞나 확인해보려다가... 미안해. 이 일은 나중에 사과할게. 우선 이 영상 어디서 난 건지부터 말해봐.”송민준은 고은서를 보며 입을 열었다.“은서야, 지난번 곽 대표가 농장 사고를 수사한다는 말을 듣고 나도 사람을 시켜 조사해 봤어. 마침 그날 농장에 있던 관광객이 풍경 촬영 중 우연히 사고 장면을 찍어두었더라고.”송민준은 그 관광객이 급한 일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최근에서야 해성시로 돌아와 그날의 사고 수사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설명했다.“그럼 왜 나한테는 안 알려줬어?”송민아가 불만스럽게 묻자, 송민준은 오늘 아침에야 받은 결과라고 답했다.“안 그래도 은서에게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너희가 먼저 발견해 버렸네.”이 말을 들은 고은서는 이내 사과했다.“정말 미안해. 민준 오빠....”“비밀번호 푼 것도, 영상 연 것도 나야. 뭐라 할 거면 나한테 해.”송민아가 의리 있게 나서자, 송민준은 의자에 앉아있는 여동생을 흘깃 보며 받아쳤다.“요즘 부모님께 칭찬만 듣다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