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그녀가 들으라고 큰 목소리로 말했던 탓에 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을 수 있었다.“내가 걱정하던 대로야. 곽승재는 바로 네가 했다는 걸 알아차렸어. 태도도 강경해. 곽승재가 나서면 화제성도 금방 잠잠해질 거야.”고은서가 병상에 누운 채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박지연의 어머니 윤성희에게서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귀국 중인 것 같았다.“안색이 왜 그렇게 어두워? 이혼 문제 때문에 그래? 아니면 약을 탄 사람이 백유미가 아니라는 걸 들어서 그래?”박지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고은서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곽승재가 백유미와 간호사 사이에 아무 관련도 없다고 단언한 순간, 고은서의 마음은 허탈해졌다.백유미는 언제나 곽승재의 신임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곽승재가 백씨 가문과의 거래를 중단한 건 시작일 뿐이었다.시간이 지나 백유미와 백승엽이 처량한 표정을 지으며 신세 한탄을 하면 곽승재는 다시 백씨 가문 사업을 도와줄 가능성이 높았다.지난 생에서 고은서는 백유미의 그늘 속에서 살았다. 비록 이번 생의 곽승재에게 변화가 생겼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백유미에 대한 옛정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고은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둘 사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그때 박지연의 핸드폰이 울렸다.“언니! 병동 아래에서 싸움 났어요.”박지연이 전화를 받자 상대방이 다급하게 말했다.박지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환자 가족이 소란을 피우는 건가요? 왜 보안팀에 연락하지 않았죠?”“환자 가족이 아니라 언니 친구의 남편, 곽 대표님과 다른 남자가 싸우고 있어요. 내려와 보시는 게 어떠세요? 어제 원장님이 곽씨 가문 일에는 간섭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잖아요. 그래서 나서는 사람이 없어요. 저도 몰래 연락하는 거예요.”“알겠어요. 바로 내려갈게요.”고은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민시후가 왔나 보네. 나도 같이 내려갈게.”곽승재가 엄한 사랑과 시비가 붙을 리는 없었다. 아마 병원을 나서며 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박지연의 단호한 외침에 곽승재와 민시후는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았다.“곽 대표님, 이게 무슨 뜻이죠? 왜 민 대표님을 막으시는 건가요?”표정이 어두워진 곽승재가 답했다.“지연 씨는 저희 사이의 일에 관여하지 말아 주세요.”“그럼 나는? 나는 참견해도 돼?”고은서가 싸늘하게 말했다.박지연은 얼른 핸드폰을 들어 고은서가 곽승재와 직접 말할 수 있게 했다.“민시후 놔줘. 만나야겠어.”고은서가 말했다.곽승재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고은서,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아직 건강이 좋지 않으니 넘어가는 거지 그렇다고 계속 참아줄 생각은 없어.”‘날 봐준다고?’고은서가 싸늘하게 웃으며 답했다.“내가 누굴 만나든 당신 허락이 필요해?”곽승재가 단호히 답했다.“다른 사람은 다 돼도 민시후는 안 돼.”“곽승재. 지금이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그런 강압적인 방식이 통할 것 같아?”민시후가 도발적으로 웃었다.“나랑 은서는 살아 있는 사람이야. 만나려고 한다면 언제 어디서든 만날 수 있지. 매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그 말을 드은 곽승재는 안색이 어두워지며 자비 없이 민시후에게 주먹을 날렸다.“그만해!”고은서는 곽승재의 의도를 간파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곽 대표님, 진정하세요.”박지연도 다급하게 말했다.“은서 안 그래도 상태가 좋지 않아서 움직이는 게 힘들어요. 조금 전에도 같이 내려오겠다고 하는 걸 겨우 말렸어요. 지금 민 대표님께 주먹을 휘두르시면 은서는 자기 몸 생각지도 않고 뛰쳐내려올 거예요.”곽승재가 이를 악물며 경호원에게 명령했다.“민시후는 미래 투자은행 문 앞에 던져주세요. 그리고 고은서 병실 밖에서 사람을 배치해 민시후가 보이면 바로 쫓아내도록 하세요.”경호원은 그 명령을 듣고 바로 민시후를 주차장으로 끌고 갔다.옆에서 사투하고 있던 민시후의 운전기사는 그 장면을 보고 결국 백기를 들어 민시후와 마찬가지로 곽승재의 사람에게 제압당했다.“고은서! 걱정하지 마! 사람 불러
박지연이 서둘러 고은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곽승재가 막을 시간도 없이 너 찾으러 위로 올라갔어!”박지연이 불안한 마음에 덧붙였다.“은서야, 곽승재 씨 표정이 너무 안 좋았어. 제발 무리하지 마. 그 사람이랑 맞서지도 말고. 곧 올라갈게!”전화를 끊은 박지연은 엘리베이터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계단을 뛰어올랐다.병실에 있던 고은서가 핸드폰을 내려놓기도 전에 싸늘한 표정을 한 곽승재를 마주했다.“뭘 하려는 거야?”고은서는 경계심을 가지고 뒤로 물러나면서 침대 머리맡의 호출 버튼을 눌렀다.그 사이 곽승재가 긴 다리를 내뻗으며 그녀의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곽승재의 검은 눈동자는 차가운 빛을 내뿜었고 온몸에는 얼어붙을 듯한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모습이 여실히 느껴졌다.지난번 곽승재가 술에 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이후 고은서는 처음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난 곽승재의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었다.고은서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VIP 병실이라 그런지 아니면 이미 소문이 돌고 있어서 그런지 곧바로 한 간호사가 달려왔다.고은서는 구세주를 보듯 간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간호사님, 부탁이...”곽승재를 내보내달라고 말하기도 전에 곽승재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링거 빼주세요.”간호사는 차가운 기세에 눌려 잠시 멈칫하며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한 번 더 얘기해야 하나요?”곽승재의 싸늘한 시선이 간호사에게 닿자 간호사는 그제야 한기를 느끼며 병상 옆으로 다가가 고은서의 주삿바늘을 뽑기 시작했다.고은서의 불안감은 더 커졌다.그녀는 애써 불안한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곽승재,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아직 약도 다 들어가지 않았어.”곽승재는 별다른 말 없이 싸늘한 분위기를 내풍겼다.“너 진짜... 아!”고은서가 솜으로 바늘이 꽂혀있던 자리를 누르며 의도를 물으려고 한순간 몸이 가벼워졌다. 곽승재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린 것이다.간호사 역시 이 상황에 놀랐지만 곽승재의 강렬한 시선에 겁을 먹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안 그래도 박지연은 시부모님께 환영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만약 곽승재가 정말로 그녀의 시부모님을 끌어들인다면 그녀의 상황은 더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곽승재가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오는 이상 박지연도 더 이상 그를 막을 수 없었다.고은서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난 이 사람이랑 갈게. 넌 돌아가.”박지연이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먼저 말을 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는 괜찮아. 할머니를 봐서라도 날 어떻게 하진 않을 거야.”박지연은 그 말에 조금 근심을 덜었다.“알았어. 그럼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응.”그녀가 대답을 끝내자 곽승재는 곧바로 엘리베이터 문을 닫았다.고은서는 더 이상 저항하거나 소란 피우지 않고 차가운 눈으로 곽승재를 바라보며 물었다.“대체 날 어디로 데려가려고 그래?”곽승재는 그녀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도 그의 태도에 체념하며 눈을 감았다.병동 아래에 도착하자 기사가 준비하고 있었다.곽승재는 은서를 뒷자리에 앉힌 후 자신도 차에 올랐다.차 안에서 곽승재는 전화로 업무를 이어나가며 매우 바빠 보였다.고은서는 답답하고 화가 나 귀를 막고 구석에 웅크리며 불만을 드러냈다.곽승재는 그녀를 한 번 흘깃 쳐다보고는 통화를 멈추고 문자로 업무를 이어나갔다.약 30분 후, 차가 멈춰 섰다.눈을 뜬 고은서는 다른 병원에 도착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예원 별장이었다.“사모님, 드디어 돌아오셨네요.”인기척을 느낀 이미숙이 재빨리 달려 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사모님, 왜 이렇게 살도 빠지고 안색도 나빠지셨어요? 식사 잘 못 하신 거예요?”고은서는 이미숙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곽승재를 노려보았다.“이게 당신이 말한 조용히 쉴 수 있는 좋은 곳이야?”곽승재가 차에서 내려 그녀 곁으로 다가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는 차분히 답했다.“전문 의사와 간호사는 미리 대기시켜 뒀어. 여기보다 안전하고 조용한 곳은 없을 거야.”고은서가
곽승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다시 고은서를 안아 위층으로 향했다.고은서를 침대에 내려놓자 의사가 다가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이미 그녀의 병력을 확인한 듯 간호사는 차분하게 그녀에게 수액을 놓았다.고은서가 수액을 맞는 동안 의사와 간호사는 약을 정리하러 갔고 곽승재는 여전히 바쁜지 밖에서 통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고은서가 침실을 둘러보자 침구류가 추가된 것을 제외하고는 그녀가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그녀가 두고 간 몇 개의 쿠션, 얇은 담요, 털 슬리퍼 등 잡동사니들은 그대로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사모님, 시장하시죠? 죽이랑 반찬, 국 준비했는데 조금 드셔보세요.”그때 쟁반을 든 이미숙이 다가왔다.조심스러워하는 이미숙이었지만 고은서는 그녀의 말투에서 자신의 복귀를 무척 반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은서는 화가 났지만 그 화를 이미숙에게 풀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아줌마. 하지만 아직 별로 입맛이 없네요. 그냥 놔두세요.”“사모님, 입맛이 없으시더라도 조금은 드셔야죠.”이미숙이 안타까워하며 거듭 권했다.“안 그래도 날씬하셨는데 지금은 더 마르셨어요.”이미숙의 호의에 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죽만 조금 먹을게요.”“네! 사모님!”이미숙이 곧 따뜻한 죽 한 그릇을 가져와 그녀에게 떠먹여 주었다.“사모님, 손이 불편하시니 제가 먹여드릴게요.”이미숙의 정성을 마다할 수 없었던 고은서는 거부하지 않고 그녀가 하려는 대로 내버려두었다.죽 한 그릇을 다 먹자 이미숙은 다시 한번 반찬을 권하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사모님, 식사를 잘하셔야 빨리 회복하시죠.”곽승재가 이미숙에게 그녀의 일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은서는 물어볼 기분도 아니었다.“아줌마. 나중에 제 핸드폰 어디 있는지 물어봐 주세요. 통화 좀 하고 싶네요.”민시후의 번호는 핸드폰에만 저장되어 있었다. 곽승재에게 억지로 안겨 끌려온 고은서는 제때 핸드폰을 챙길 수 없었다.‘사람
고은서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곽승재에게 던지며 말했다.“내가 누구를 찾든 무슨 상관이야! 내 핸드폰이나 돌려줘.”핸드폰은 곽승재의 몸을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곽승재가 떨어진 핸드폰을 잠시 바라보고 주워들었다.그는 고은서를 내려다보며 비웃듯 말했다.“왜? 민시후한테 연락하려고? 꿈도 꾸지 마. 새 핸드폰이 필요 없다면 여기서 조용히 몸이나 회복해. 밖에 나가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손해 보는 건 너뿐일 테니까.”싸늘하게 말을 마친 곽승재가 더 이상 고은서를 신경 쓰지 않고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곽승재! 미쳤으면 의사한테 진단이나 받아! 미쳐서 날 괴롭히지 말고!”고은서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문 닫히는 소리뿐이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고은서는 그대로 뒤로 넘어갈 것만 같았다.‘빌어먹을 곽승재! 민시후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날 여기로 데려왔지! 난 이혼하고 싶었을 뿐인데 일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그 후 이틀간, 고은서는 예원 별장에서 요양했다.의사의 세심한 관리와 이미숙의 보양식 덕분에 그녀의 몸은 많이 회복되었다.비록 아직 기력이 부족해서 격렬한 운동은 할 수 없었지만 기본적인 활동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그녀는 더 이상 수액할 필요도 없이 약만 복용하면 되었다.몸은 차츰 회복되었지만 고은서의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하고 초조해졌다.이틀 동안 그녀는 방향을 잃은 나침판처럼 외부와의 연락이 모두 차단된 채 답답하게 방에만 갇혀 있었다.그녀는 바깥 상황이 궁금했다.또한 서연정의 귀국 여부로 궁금했다.하지만 그녀에게는 핸드폰이 없었고 빌려줄 사람도 없었다.곽승재는 그날 문을 닫고 나간 뒤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별장에 사람들을 배치해 그녀가 밖에 나가지 못하게 단속했다.고은서는 그날 곽승재가 차에서 내리며 너무 이른 시기에 욕했다는 말을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곽승재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야! 나쁜 놈보다 더해! 정말 미친놈이야!’“사모님, 화내지 마세
더 이상 이미숙의 말을 듣기 싫었던 고은서가 그녀의 말을 끊으려고 한 순간, 이미숙의 핸드폰이 울렸다. 밖에 있는 경호원에게서 온 연락이었다.“지금 밖에 박지연 아가씨께서 사모님을 찾아오셨는데 아무리 말씀드려도 돌아가려고 하지 않으셔서 연락드렸습니다.”경호원이 말했다.“들여보내세요!”박지연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고은서는 이미숙의 핸드폰을 집어 들어 경호원에게 외쳤다.하지만 경호원은 망설였다.“그럼 제가 나갈게요!”말을 마친 고은서가 밖으로 나가려 하자 이미숙은 그녀의 앞을 막아서지는 못하고 조바심을 내며 뒤를 따라갔다.“사모님, 천천히 가세요. 너무 빠르세요!”고은서가 서둘러 별장 문 앞까지 나가자 정말 박지연이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은서야!”박지연이 고은서를 보자마자 들어오려 했지만 이준이 앞을 막아섰다.“누가 감히 지연이를 막으라고 했어요!”고은서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지연이를 못 들어오게 한다면 제가 나가겠어요. 알아서 하세요!”곽승재가 고은서는 신경 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이준이 한참을 망설이다 박지연의 앞에서 물러섰다.별장 안으로 들어온 박지연이 고은서의 손을 잡고 그녀를 위아래로 살폈다.“괜찮아? 전화는 왜 안 받아?”고은서는 이미숙을 집 안으로 들여보내고 박지연과 함께 온실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곽승재 그 미친놈이 내 핸드폰을 빼앗고 나가지도 못하게 했어.”고은서는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어쩐지... 며칠 동안 네 상황을 물으려고 곽승재한테 연락했는데 항상 비서가 받더라고. 네 상황을 알리기 싫었던 거네.”“병원에서 나온 날 너한테 연락했는데 핸드폰이 꺼져있더라?”고은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박지연이 답했다.“그날 병원에서 한 사람이랑 부딪히는 바람에 핸드폰이 망가져서 어제저녁에 새로 샀어.”비록 너무 공교로운 상황이었는지만 고은서는 더 이상 따질 겨를이 없었다.“민시후는 어때? 또 곽승재를 찾아가 시비 걸지는 않았겠지?”“그러진 않았을 거야.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영상 있어? 보여줘!”고은서가 다급히 물었다.박지연이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을 재생했다.영상에는 고국성이 제복을 입은 몇 명의 직원들에게 연행되는 장면이 찍혀있었다.그 뒤에는 울부짖고 있는 단은숙과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유성준이 서 있었다.“세금 관련 심각한 문제가 터졌대. 세무 쪽에서도 이미 상당한 증거를 확보했다고 하더라.”박지연이 말했다.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지난 생에 비록 MQ가 점차 쇠퇴했다고 해도 세금 문제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MQ에 정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면 백유미가 그걸 가만히 놔뒀을 리가 없는데...’이번 일은 십중팔구 곽승재가 개입한 것이 틀림없었다.“은서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박지연이 걱정스레 물었다.“곽승재와 관련 없다고 해도 네 삼촌 쪽 문제는 빨리 해결해야 해. 미룰수록 안 좋은 소문이 퍼지며 고씨 가문 명성에도 크게 피해줄 거야.”고은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조씨 가문의 사업은 불안정한 상태였는데 누군가가 이 일을 빌미로 MQ를 공격한다면 큰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컸다.“차라리 곽승재한테 사실을 얘기하고 도움을 청하는 게 어때? 이대로 서로 상처를 주다가는 끝도 없어. 두 사람 모두 만신창이가 될 거야.”박지연이 제안했지만 고은서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지금 곽승재에게 그의 아이였다고 말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거야. 오히려 고씨 가문과 민시후를 위해 거짓말한다고 생각하겠지.’고은서가 원하는 건 이혼해서 곽승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지 화해가 아니었다.잠시 생각을 하던 고은서가 결단을 내렸다.“지연아. 부탁 좀 해도 될까? 곽씨 가문 본가로 가서 할머니 좀 모셔 와줘.”박지연이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좋은 방법인 것 같네. 할머니는 항상 널 아끼셨으니 네 일을 모르는 체하시지 않을 거야. 곽승재도 할머니 말은 듣겠지.”고은서가 덧붙였다.“그리고 민시후에게도 연락해서 곽승재와 대립하지 말라고 전해줘.”“민시후 걱정까지 하
“곽 대표님은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병뚜껑 열어주는 것조차 꺼릴 만큼?”여시은의 말투에는 약간의 유감과 억지로 짜낸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시은 씨가 원하는 건 물을 마시는 결과가 아닌가요? 물을 마실 수 있으면 되지, 누가 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요.”“왜 중요하지 않아요?”여시은은 눈을 깜박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저는 곽 대표님이 열어준 병의 물만 마시고 싶은데요.”노골적인 애정 공세에 곽승재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여시은은 전혀 민망한 기색이 없이 여전히 공세를 이어갔다.“솔직히 말할게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집안 어른의 뜻대로 조금씩 알아가면 안 될까요?”곽승재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우리 집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략결혼을 반대하세요. 아버지의 일방적인 희망 사항일 뿐이죠.”“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재혼 계획이 없습니다.”여시은은 여전히 달콤한 미소를 유지했다.“당장 결혼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어쩌면 만나다가 전혀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잖아요?”“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시은 씨와 맞지 않아요.”곽승재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고은서는 원래 활발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와 결혼한 후 시들어버렸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저한테서 도망쳤어요. 이혼한 후 그 여자는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됐죠. 그러니 저는 남편으로 자격 미달이에요.”“시은 씨는 여 회장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따님이고 조건이 우월하니 더 나은 남자를 만나셔야죠.”여시은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저는 고은서와 달라요. 고은서는 완전한 사랑을 원했지만 저는 조건이 맞는 파트너면 돼요.”“사랑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없어도 상관없어요.”그녀는 돌직구를 날렸다.“제가 고은서보다 승재 씨에게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고은서 만큼 똑똑하거나 유능하지는 않지만, 이게 남자들에게는 장
“아니,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여재훈 씨가 테이프 커팅에 참석했었잖아. 그때 외할아버지와 삼촌도 있었는데 서로 아는 눈치가 아니었어.”고은서는 말을 이어갔다.“당신도 우리 삼촌을 알잖아. 조금이라도 연줄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지. 여재훈 씨와 단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서 인사하고 관계를 맺으려고 했을 거야.”사실 그날 삼촌은 여재훈과 안면을 트려고 했지만, 여재훈 주변에 중요 인물들이 너무 많아 접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말리는 바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여시은이 오직 당신 때문에 나를 저격하는 거라고 생각해.”“당신들 둘이 Y국에서 만난 적 있잖아. 여시은은 그때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을 거야.”고은서의 분석이 정확할 수도 있다.곽승재는 이전에 곽현수에게 왜 백유미를 귀국시켜 그와 고은서의 결혼 생활을 망쳤냐고 따진 적이 있었다.그때 곽현수는 고씨 가문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여시은이 적합한 상대라고 말했었다.곽현수는 단지 할머니 때문에, 그리고 여씨 가문이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아서 이혼을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다.여시은도 Y국의 파티에서 만난 두 집안 어른들이 둘을 만나게 하려 했고, 그녀도 그와의 정략결혼에 긍정적인 태도였다고 인정한 바 있다.고은서의 분석이 맞았지만 곽승재는 마음이 전혀 홀가분하지 않았다.그녀의 말투가 너무나 차분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에서 자신을 향한 감정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가슴 속에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려는 순간, 회의실 방향에서 여시은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곽승재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 사이 눈앞까지 다가온 여시은이 배려심 있게 말했다.“곽 대표님, 일이 있으면 먼저 처리하세요. 10분 쉬고 회의를 계속한다고 전할게요.”여시은은 말하면서 생수 한 병을 곽승재에게 건넸다.곽승재는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
“외할아버지, 숙모 말로는 엄마가 북성에 있을 때 가슴 아픈 연애사가 있었던 것 같대요. 제 생부는 아닐 거라고 하는데,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고은서는 돌직구를 날렸다.“그럴 리 없어. 네 엄마는 활발하고 낭만적인 성격이었지만 고집스러운 면도 있었어. 쉽게 마음을 주지 않지만 한번 주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어.”고준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점에서는 네가 엄마를 똑 닮았어. 그래서 그때 곽승재와의 결혼을 허락했던 건데...”‘왜 갑자기 내 얘기로 넘어간 거지?’“북성에 연인이 없었거나, 있었다면 제 생부란 말씀인가요?”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생부일 가능성이 낮아. 북성에서 돌아왔을 때 다른 곳에서 돌아왔을 때와 별다른 정서 변화가 없었거든.”고준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엄마가 유부남과 엮였을 리 없어. 송민준 부모의 이혼이 엄마와 상관없을 거야.’“오히려 해외에 머물던 어느 날 전화가 와서 깜짝선물을 준비했다며 신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어.”말을 이어가던 고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애하는 줄 알고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될 줄은...”“은서야, 네 엄마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네 생부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알아.”고준석은 외손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때 네 엄마는 치료가 안 되는 불치병을 앓은 것도 아니었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너무 지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지...”목이 멘 듯한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은서도 코끝이 찡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노인의 아픔을 다시 건드린 자신이 미웠다.고은서는 고준석의 손을 꼭 잡았다.“외할아버지,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엄마는 외할아버지같이 이해심이 넘치는 분을 아버지로 두어 너무 행복했을 거예요.”하지만 고준석은 더 슬퍼 보였다.“가끔은 내가 너무 자유를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할 때도 있어. 조금 구속했으면 사랑 때문에 큰 상처를 받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고은서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가 미혼모 신분으로 나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북성에 첫사랑까지 있었다고? 이렇게 복잡한 연애사가 있었다니.’“내가 그냥 제멋대로 추측한 거야. 연인 관계가 아니라 형님 마음을 아프게 한 친구일 수도 있지.”단은숙은 가방을 손에 들고 고은서에게 주의를 주었다.“이 얘기를 외할아버지나 삼촌한테 절대 하지 마. 내가 또 쓸데없는 소리 했다고 나무랄 거야.”외할아버지는 고은서의 엄마를 각별히 아꼈다. 미혼모가 됐어도 한 마디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아파하며 그녀의 과거를 캐묻지 않았다.외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집은 따뜻한 피난처였고, 엄마는 그 안에서 조용히 상처를 치유했다.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털어놓을 것이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아픈 기억일 테니 가족들이 상처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고은서의 엄마는 조향사로서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MQ의 베스트셀러 향수가 바로 그녀의 작품이었고, 이는 MQ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래서 삼촌 부부도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가족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니 주변 사람들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은서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없는 것이 큰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씨 가문을 노리는 세력이 나타나서 진상을 파헤쳐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면, 평생 엄마의 과거를 캐지 않았을 것이다.단은숙은 가방을 부인들 단톡방에서 자랑하기 위해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고은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엄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엄마는 북성에서 무슨 일을 겪었을까? 정말 첫사랑이 있을까? 혹시 송씨 집안 사람?’문득 송민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송민준과 송민아는 이복남매였다.‘그렇다면 송민준의 친모가 아버지와 이혼하셨다는 건데, 설마 엄마가 두 분 사이에 끼어든 건 아니겠지?’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고은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만약 송민준이 정말 C선생이라면, 그가 고씨 가문을 증오하는 이유는 충분하다.하지만 고은서는 엄마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