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이미숙의 말을 듣기 싫었던 고은서가 그녀의 말을 끊으려고 한 순간, 이미숙의 핸드폰이 울렸다. 밖에 있는 경호원에게서 온 연락이었다.“지금 밖에 박지연 아가씨께서 사모님을 찾아오셨는데 아무리 말씀드려도 돌아가려고 하지 않으셔서 연락드렸습니다.”경호원이 말했다.“들여보내세요!”박지연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고은서는 이미숙의 핸드폰을 집어 들어 경호원에게 외쳤다.하지만 경호원은 망설였다.“그럼 제가 나갈게요!”말을 마친 고은서가 밖으로 나가려 하자 이미숙은 그녀의 앞을 막아서지는 못하고 조바심을 내며 뒤를 따라갔다.“사모님, 천천히 가세요. 너무 빠르세요!”고은서가 서둘러 별장 문 앞까지 나가자 정말 박지연이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은서야!”박지연이 고은서를 보자마자 들어오려 했지만 이준이 앞을 막아섰다.“누가 감히 지연이를 막으라고 했어요!”고은서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지연이를 못 들어오게 한다면 제가 나가겠어요. 알아서 하세요!”곽승재가 고은서는 신경 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이준이 한참을 망설이다 박지연의 앞에서 물러섰다.별장 안으로 들어온 박지연이 고은서의 손을 잡고 그녀를 위아래로 살폈다.“괜찮아? 전화는 왜 안 받아?”고은서는 이미숙을 집 안으로 들여보내고 박지연과 함께 온실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곽승재 그 미친놈이 내 핸드폰을 빼앗고 나가지도 못하게 했어.”고은서는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어쩐지... 며칠 동안 네 상황을 물으려고 곽승재한테 연락했는데 항상 비서가 받더라고. 네 상황을 알리기 싫었던 거네.”“병원에서 나온 날 너한테 연락했는데 핸드폰이 꺼져있더라?”고은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박지연이 답했다.“그날 병원에서 한 사람이랑 부딪히는 바람에 핸드폰이 망가져서 어제저녁에 새로 샀어.”비록 너무 공교로운 상황이었는지만 고은서는 더 이상 따질 겨를이 없었다.“민시후는 어때? 또 곽승재를 찾아가 시비 걸지는 않았겠지?”“그러진 않았을 거야.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영상 있어? 보여줘!”고은서가 다급히 물었다.박지연이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을 재생했다.영상에는 고국성이 제복을 입은 몇 명의 직원들에게 연행되는 장면이 찍혀있었다.그 뒤에는 울부짖고 있는 단은숙과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유성준이 서 있었다.“세금 관련 심각한 문제가 터졌대. 세무 쪽에서도 이미 상당한 증거를 확보했다고 하더라.”박지연이 말했다.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지난 생에 비록 MQ가 점차 쇠퇴했다고 해도 세금 문제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MQ에 정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면 백유미가 그걸 가만히 놔뒀을 리가 없는데...’이번 일은 십중팔구 곽승재가 개입한 것이 틀림없었다.“은서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박지연이 걱정스레 물었다.“곽승재와 관련 없다고 해도 네 삼촌 쪽 문제는 빨리 해결해야 해. 미룰수록 안 좋은 소문이 퍼지며 고씨 가문 명성에도 크게 피해줄 거야.”고은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조씨 가문의 사업은 불안정한 상태였는데 누군가가 이 일을 빌미로 MQ를 공격한다면 큰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컸다.“차라리 곽승재한테 사실을 얘기하고 도움을 청하는 게 어때? 이대로 서로 상처를 주다가는 끝도 없어. 두 사람 모두 만신창이가 될 거야.”박지연이 제안했지만 고은서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지금 곽승재에게 그의 아이였다고 말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거야. 오히려 고씨 가문과 민시후를 위해 거짓말한다고 생각하겠지.’고은서가 원하는 건 이혼해서 곽승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지 화해가 아니었다.잠시 생각을 하던 고은서가 결단을 내렸다.“지연아. 부탁 좀 해도 될까? 곽씨 가문 본가로 가서 할머니 좀 모셔 와줘.”박지연이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좋은 방법인 것 같네. 할머니는 항상 널 아끼셨으니 네 일을 모르는 체하시지 않을 거야. 곽승재도 할머니 말은 듣겠지.”고은서가 덧붙였다.“그리고 민시후에게도 연락해서 곽승재와 대립하지 말라고 전해줘.”“민시후 걱정까지 하
이미숙은 황급히 설명했다.“제가 사모님 개인적인 일을 캐묻는 게 아니라 도련님께서 물어보실까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예요.”고은서는 리클라이너에 다시 누우면서 말했다.“괜찮아요. 제가 지금 행패 부린다고 빨리 돌아오라고 전하세요.”“하지만...”이미숙은 편히 누워있는 고은서를 보며 약간 망설여졌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는 고은서가 행패 부린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곽승재에게 꾸지람이라도 받을까 봐 걱정되었다.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고은서가 말했다.“곽승재가 믿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진짜 행패 부릴 수 있는데, 한 번 해볼까요?”“...”이미숙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곽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전화를 끊고 뒤돌아봤을 때 고은서는 리클라이너에 누워 졸고 있었다.“사모님, 아무리 햇볕이 쨍쨍하다고 해도 여기서 주무시면 안 돼요. 감기 걸려요.”이미숙이 그녀를 걱정했다.고은서는 몸을 옆으로 돌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담요 하나 가져다주세요.”“네, 금방 가져다드릴게요.”그러나 이미숙이 담요를 가지고 다시 돌아왔을 때 고은서는 누워있는 대신 테라스에 있는 유리 가드 옆에 서 있었다.“사모님, 방금전까지 주무시려고 하셨잖아요. 볼 일이라도 생겼나요?”이미숙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아니에요.”고은서는 다시 리클라이너에 누웠다.십 분쯤 지났을 때, 밖에서 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이미숙은 내려다보며 확인하고는 고은서에게 알렸다.“도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지금 돌아온 걸 보아서는 아마 전화를 받자마자 돌아오신 것 같습니다.”그러나 이미숙과 달리 고은서는 아주 담담했다.“아주머니, 내려가서 곽승재 혼자 올라오라고 전하세요. 제가 따로 할 말이 있어서요.”이미숙은 전혀 의심하지 않고 내려갔다.별장으로 들어온 곽승재는 위층에서 내려오는 이미숙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고은서는 괜찮아요?”“사모님께선 별일 없으세요. 지금 테라스에서 햇볕 쪼임을 하고 계시는데 도련님께 따로 하실 말씀이 있다고 도련님보고 올라
분노와 한기로 가득 찬 곽승재의 눈빛을 보며 고은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이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박지연은 아이에 관한 사실을 곽승재에게 알려주면 모든 일이 좋게 끝날 것이라고 믿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곽승재, 우리 그냥 이혼하자. 더는 끌지 말고.”고은서는 다리 하나를 가드 밖으로 내밀면서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뛰어내릴 거야.”“고은서, 지금 또 뛰어내리겠다면서 날 협박하는 거야?”이를 악물고 말하는 곽승재의 얼굴빛은 섬뜩할 정도로 어두웠다. 심지어 그로부터 차가운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네가 뛰어내리면 민시후도 마찬가지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내렸다.“스읍!”그러나 뛰어내리는 순간 고은서는 팔로부터 오는 고통을 느꼈다. 다름이 아니라 곽승재가 뛰어와 그녀를 잡았던 것이다.하지만 관성 때문에 고은서는 여전히 밑으로 떨어지려고 했다. 곽승재는 허리 굽혀 그녀의 다른 한쪽 손까지 잡고 화를 내며 말했다.“손 놓지 말고 꽉 잡아!”반쯤 거의 떨어지려고 하는 고은서의 귓가에는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자신을 잡고 있는 곽승재를 보며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전에 그의 사랑과 관심을 얻으려고 이 층에서 뛰어내린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또다시 테라스에서 뛰어내리게 될 줄은 그녀 자신도 생각 못 했다.‘이 결혼을 강구한 대가를 치르는 셈이네.’“널 끌어올릴 테니까 내 손 꽉 잡아!”곽승재의 목소리를 들은 고은서는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아마 거꾸로 봐서였을까, 고은서는 그의 눈빛으로부터 분노뿐만이 아니라 조급함도 보아낼 수 있었다.그녀가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걱정하는 듯했다.그러나 고은서는 중력 때문에 팔이 점점 더 아파왔고 눈도 깔깔해져 곽승재의 모습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곽승재의 손을
고은서가 깨어났을 땐 이미 침실 안이었다.고준석과 오춘식이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는데 백발이 성성한 고준석은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근심 걱정으로 가득 찬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많이 피곤해 보였다.오춘식은 그에게 약과 물을 챙겨다 주면서 그를 달랬다.“어르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께서 너무 흥분하는 바람에 정신을 잃은 거라고 했으니 괜찮을 거예요. 곧 깨어날 겁니다. 그리고 어르신도 몸 주의하셔야죠. 방금전처럼 은서한테 뛰어가시다가 넘어지기라도 하시면 어쩌려고 그러세요.”“나 그렇게 쉽게 넘어질 사람이 아니야.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고준석은 약을 건네받고 삼키면서 말했다.방금전 화단으로 떨어질 때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고준석의 모습과 그의 고함소리를 떠올린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코가 찡해 나더니 눈물을 흘렸다.“은서야, 깼어?”눈을 뜬 고은서를 발견한 오춘식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소리를 들은 고준석도 이내 고은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고준석은 정신을 차린 그녀를 보자마자 순간 얼굴빛이 환해졌다.“은서야, 괜찮아? 어디 아픈 곳은 없어?”“할아버지...”고은서는 자신을 걱정하는 고준석을 바라보더니 순간 울먹이면서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울지마, 울지 마. 할아버지 여기 있어.”고준석은 눈물을 흘리는 고은서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면서 그녀를 달랬다.“이 계집애야, 힘든 일이 있으면 할아버지한테 말했어야지. 이런 위험한 행동은 이번이 마지막이야, 알겠어? 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할아버지는 어쩌라는 거야?”“할아버지, 미안해요. 또 걱정하게 만들어서 정말 미안해요...”고은서는 흐느끼면서 말했다.“괜찮아, 할아버지한테 뭐가 미안할 게 있다고...”고준석도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그까짓 이혼 할아버지가 지지해줄게. 다른 건 중요치 않아. 그저 은서 네가 건강하고 무사하면 돼.”고준석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항상 고은서 편이었다.
“고은서, 모든 일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는 이상 이혼은 절대 동의 못 해.”“곽승재!”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화내려고 했다.“이놈의 자식!”전미자는 지팡이로 곽승재를 내리치며 호통했다.“아직도 계속 은서를 화나게 할 예정이야? 네가 은서를 어느 궁지까지 몰아갔으면 은서가 저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겠어?”곽승재는 입술을 꽉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은서야, 승재랑 얘기 한 번 더 나눠보는 건 어떻니?”전미자가 고은서에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할머니가 네 시어머니랑 여기까지 온 게 다 너희 두 사람 이혼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서야. 네가 무슨 결정을 내리든 우리는 다 널 지지할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은서야, 얘기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할아버지는 더는 네가 속상해하는 모습을 못 보겠어.”고준석이 말했다.고은서는 순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누군가가 내 편을 들어준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할아버지, 저 곽승재랑 얘기 나눠볼게요.”고은서는 전미자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곽승재가 이혼하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이상 그 누구도 그의 생각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고준석은 당연하게도 고은서의 선택을 존중했다.“그럼 할아버지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네.”어른들이 밖으로 나간 후 곽승재는 고은서 곁으로 다가갔다.고은서는 그제서야 그의 옷에 진흙 자국이 있는 걸 발견했다. 심지어 다치기라도 했는지 걸으면서 눈에 띄게 미간을 찌푸리곤 했다. 그러나 다 그녀랑 상관없는 일이었다.고은서는 차가운 눈길로 곽승재를 바라보며 물었다.“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아까 그 아이가 내 아이라고 했었잖아. 사실이야?”조명 때문인지 곧게 서 있는 그의 이목구비가 더 뚜렷해 보였다. 그의 눈에서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이고 있는 듯했다.고은서는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계속 물어본다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 내가 무슨 답을 하든 당신은 믿지 않을 테니까.”“고은서, 나는 네가 하는 말이 어디까지가
“이후에 서로 아무 관계가 없는 낯선 사이가 된다고 해도 상관없어?”곽승재가 계속 캐물었다.‘이혼 한 마당에 무슨 관계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거야?’고은서는 아주 단호하게 답했다.“상관없어.”“고은서, 우리가 결혼한 지 벌써 오 년이야. 그런데 어떻게 이혼이라는 한 마디로 모든 걸 부정하려고 할 수가 있어?”곽승재는 순간 화가 났다. 그러나 고은서 눈에는 이 상황이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정확히 말하자면 오 년 동안 당신이 나한테 퍼부은 감정이 얼마나 된다고 그래? 우리 사이엔 원래부터 아무런 감정이 없었잖아.”“감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곽승재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전에 없었다고 해도 지금 생겼다잖아. 나도 널 좋아하게 됐다고. 그런데 왜 자꾸 날 거절하려고 하는 건데?”“왜 거절하면 안 되는 건데?”고은서가 되물었다.“전에 내가 당신을 좋아할 때는 내가 당신 눈앞에 더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할 정도로 날 싫어했잖아. 그런데 내가 더는 좋아하지 않는다니까 갑자기 날 곁에 잡아두려고 하는 이유가 뭐야? 내가 당신 감정을 꼭 받아줘야 하는 법은 없잖아.”“왜 갑자기 날 좋아하지 않게 된 건데? 적어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알려줘야 할 거 아니야!”곽승재는 화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고은서는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좋아하지 않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오 년 동안 나를 극혐해 하다가 내가 이혼하려고 하니까 날 좋아하게 되었다고? 너무 어이없지 않아?”곽승재는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이혼하기 싫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이혼하기 점점 더 싫어졌다. 이젠 이혼이라는 두 글자만 들어도 역겨울 정도였다.“사실 따지고 보면 당신은 단 한 번도 날 존중해준 적이 없어.”고은서가 그를 대신해 답해줬다.“당신은 내가 평생 당신 곁에 붙어서 안 떠날 거라고 믿고 있는 거지? 당신이 날 좋아하지 않는 건 모든 게 다 내 탓이고 내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이고 당신이 날 좋아하
이혼 증명서를 들고 구청 문 앞에 선 고은서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곽승재가 진짜 사인해주다니. 우리 정말 이혼한 거야? 나 이젠 자유의 몸인 거야?’“시그니엘 집문서와 열쇠야.”곽승재는 서류를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지난번에 그가 병원에 이 서류들을 놓고 가는 바람에 고은서는 퀵 서비스를 불러 그에게 돌려준 적이 있었다.그러나 여전히 그녀에게 주겠다고 고집부릴 줄은 미처 생각 못 했다.“안에 금액을 기입하지 않은 수표 한 장도 넣었어. 너랑 할아버지는 아무 재산도 필요 없다고 하는데 그래도 오 년 동안 함께 결혼생활을 해온 보상이라고 생각하고 받아.”곽승재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다시 예전의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모습으로 돌아왔다.“나한테 빚진 것도 없는 데 필요 없어.”고은서는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그녀가 이 결혼을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곽승재는 그녀에게 시달릴 필요도 없었다. 지금 그저 모든 걸 원점으로 돌려놓는 것뿐이다.이혼하기 전에는 곽승재한테서 백억 정도는 떼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지만 이혼 증명서를 손에 쥐고 나니 너무 홀가분한 나머지 그에게서 아무것도 가지고 싶지 않았다. 그저 최대한 그와 멀리하고 싶었다.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곽승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누군가가 곽씨 집안에서 널 홀대했다는 소릴 듣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고은서가 반박했다.“돈은 나 스스로 벌면 돼. 나도 우리 고씨 집안에서 딸을 판다는 소릴 듣기 싫어.”곽승재는 이를 악물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차에 올랐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자신한테 거절당한 것 때문에 불쾌해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는 그녀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현재 자유의 몸이 되었다.푸른 하늘 아래 서 있는 그녀는 공기가 이토록 상큼하고 햇살이 이토록 밝은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행복 지수가 순간 높아진 것 같았다.‘마침내 이혼했어! 지금부터
투약한 간호사도 전에 이미 곽승재에 의해 경찰서로 넘겨졌는데 그녀의 증언에도 진희숙만 언급되었다.고은서는 이 모든 결과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백유미의 신중함을 탄복했다. 그녀가 경각심을 낮추지 않고 제때 녹음하면서 증거를 남겼더라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당사자로서 고은서는 경찰 조사에 협조한 후 나머지 일을 변호사에게 맡겼다.“걱정하지 마세요. 증거가 확실하니까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송민준이 말했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대가를 치르길 바라는 사람은 백유미이지 대신 누명을 쓴 진희숙과 간호사가 아니었다.“우리 민아도 잘못한 곳이 있으니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원하는 보상이라도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보상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송민준이 말을 이어갔다.“보상은 필요 없어요. 괜찮다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죠.”고은서가 말했다.“무슨 부탁이요?”“백씨 집안에서 요즘 여러 프로젝트를 도맡아 하고 있다던데, 그 프로젝트들을 저 대신 산통 깨주세요.”고은서도 민시후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곽수혁이 GS그룹 일에 끼어들면서 백씨 집안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그녀의 말을 들은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송민아 보고 나한테도 그만 집적거리고 해. 나도 스트레스 그만 받고 싶어.”옆에 있던 민시후가 갑자기 말을 보태었다.송민준은 민시후를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시후야, 민아가 어릴 적부터 널 좋아한 걸 너도 알고 있잖아. 민아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도 곁에서 어쩔 수 없어.”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직설적으로 말했다.“난 어릴 적부터 송민아가 싫었다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데는 진짜 짝이 없다니까.”송민준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고은서에게로 돌리며 물었다.“이혼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시후랑 함께 있을 생각이신가요?”‘소식이 빠르네.’이혼한 지 며칠 되지도 않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민아 데리고 오지 않았으니까.”송민준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혹시나 또 고집부리면서 기분 나쁘게 할까 봐 오늘 너희랑 만난다는고 얘기하지 않았어.”민시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발 좀 북제로 데려가. 해성에 계속 있게 하지 말고.”송민준은 나긋한 미소를 보이면서 답했다.“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게다가 이미 ZY 그룹으로 출근하기로 했다던데.”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눈살을 더 세게 찌푸렸다.“우리 아버지가 송민아를 강제로 ZY 그룹에 밀어 넣은 건 나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데 나중에 또 고은서를 해치려 하거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 또다시 너랑 우리 아버지 때문에 봐주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고은서는 민시후를 쏘아보았다.‘나랑 송민준을 원수 사이로 만들 생각인 거야?’“뭘 쏘아봐?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민시후는 점점 더 흥분해 하며 말했다.“전에도 몇 번이고 널 협박했잖아. 심지어 간호사를 교사하여 우리 아이까지 잃게 한 사람이야. 네가 날 막지만 않았으면 내가 송민아를 가만둘 거 같아?”“...”고은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전에 유산한 경과를 민시후에게 간단히 알려주면서 송민아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걸 이렇게 이용할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씩씩거리는 민시후를 보면서 고은서는 그가 배우를 하지 않은 게 너무 아쉽다고 속으로 감탄했다.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도 전문가에게 나가보라 하고 직접 민시후에게 차를 따라줬다.“전에 병원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해. 오늘 만나자고 한 것도 그 일 때문이야.”송민준이 말하기를 진희숙은 송민아를 친딸로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돌봐온 사람으로서 그녀가 두 사람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런 모험을 했다고 한다.그리고 송민아가 간호사랑 만난 모습이 포착된 사진은 진희숙이 그녀를 불러내 우연하게 찍힌 사진이라고 한다.“민아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형, 형수님이 민시후한테 별다른 마음은 없어 보이는데 걱정하지마.”“내가 무슨 걱정을 한다고 그래?”곽승재가 약간 어색해하며 말했다.“이미 이혼한 사이인데 고은서가 누구한테 마음이 가든 누구랑 있든 나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야.”“아까 썩은 표정을 하고 경적을 울린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네.”육현석이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그러나 갑자기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애써 웃으면서 변명거리를 찾았다.“맞아, 맞아. 형 말이 맞아. 형수님이 누구랑 있든 형이랑 이젠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 역시 이혼 같은 작은 일 때문에 속상해하는 일은 전혀 없는 우리 형, 상남자답다니까.”곽승재의 얼굴빛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걸 발견한 육현석은 이내 입을 화제를 돌렸다.“형, 형수님이 형을 보기 싫어하는 것도 화나서 그러는 거잖아. 계속 이렇게 자존심 때문에 고집부려서는 안 된다니까. 형수님한테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존재감을 나타내야 할 거 아니야.”그의 말을 들은 곽승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네가 말했다시피 날 싫어하잖아. 그런데 무슨 존재감을 나타내라는 거야?”“지금 상대방을 잊지 못하고 놓아주기 싫은 사람은 형이잖아.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형수님이 스스로 돌아올 것 같아? 형, 자존심 따위 버리지 않으면 형수님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육현석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전에 낯선 사람 사이로 지내도 되냐고 물었을 때 아주 흔쾌히 된다고 답하던 고은서의 모습이 떠올랐다.어제 점심, 그가 스케줄을 바꾸면서까지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고은서가 이혼해서 무척 기쁘다고 하면서 자신의 뒤담화를 하는 걸 들었다.그러나 방금전 민시후와 다정하게 장난치면서 자신을 보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녀를 생각하면 이건 자존심을 내려놓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은서가 이젠 진짜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곽승재는 눈살을 질끈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언제 고은서랑 다시 화해하고 싶다고 했어? 인제
민시후는 그가 입을 열길 기다리고 있는 고은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오글거려 죽겠네.”고은서는 끝내 참지 못하고 방금전 손을 닦던 물티슈를 그를 향해 던졌다.“누가 오글거린다는 거야! 사람 호기심 불러일으켜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 짜증 나는 자식아!”“고은서!”물티슈에 얼굴을 맞은 민시후가 물티슈를 다시 주어 그녀를 향해 던지려고 할 때 뒤에서 갑자기 빵빵하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와 민시후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고급 SUV 한 대가 뒤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운전석에는 육현석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곽승재였다.육현석은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손을 저으며 옆에 있는 곽승재를 힐끔힐끔 보았다. 방금 경적 소리를 낸 게 그가 아니라 곽승재인 것이 분명했다.SUV 차량 높이가 꽤 있었기에 아마 방금전에 그녀와 민시후가 장난치는 걸 본 모양이다.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앉아있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몸을 홱 돌리면서 민시후에게 말했다.“초록불이야. 안 가고 뭐 해?”민시후도 차 안에 앉아있는 육현석과 곽승재를 보았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액셀을 밟기는커녕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백미러를 쳐다보았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여기에서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전에 두 사람이 운전하면서 맞부딪친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꼭 쥐고 말했다.“민시후, 우리 약속 있는 거 잊은 거 아니지? 이상한 짓 하지마.”민시후는 불쾌하다는 듯 그녀를 보며 말했다.“이상한 짓이라니. 전에 내 차를 먼저 박은 사람은 곽승재거든.”‘네가 곽승재 차 앞에 막아서서 시비 걸지 않았으면 곽승재가 널 박을 리도 없었거든.’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시후가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러면 나 먼저 차에서 내려도 돼?”“너 언제부터
민시후는 송민준과 찻집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맑은 하늘에 눈 부신 햇살, 날씨가 참 좋았다.민시후는 기사 대신 직접 하늘색 스포츠카를 운전했다.고은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는 스포츠카를 보며 말했다.“민 도련님, 패션 워크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레스토랑 가는 것뿐인데 굳이 이렇게 눈에 띄는 차를 운전해야 할까요?”“그냥 평범한 스포츠카일 뿐인데 어디가 눈에 띈다는 거야? 잔말 말고 얼른 타. 내가 직접 운전한다는데 영광으로 생각하라고.”민시후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탔다.스포츠카가 유독 눈에 띄기는 했지만 길에 차들이 적었던 탓에 다행히도 너무 큰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가는 도중에 ZY 그룹 근황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곽승재가 ZY 그룹을 타깃으로 삶고 짓누르려고 할 때 민시후가 제때 빠르게 대응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허 교수님 쪽에 의약 프로젝트가 아주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어. 후기도 꽤 괜찮고. 연구소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민시후는 회사 일을 얘기할 때만은 진지했다.“대리권도 네가 쟁취해 온 거니까 융자에 관한 일도 네가 책임지고 잘 해봐.”고은서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백유미에게 맡길 예정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는지 의문스러웠다.그녀는 궁금증을 덜기 위해 민시후에게 물었다.“곽승재 아버지가 얼마 전에 귀국하셨는데 회사 일에 참여하려 했다가 곽승재한테 거절당했다고 하더라고. 아마 이번 일도 곽승재가 아버지 건의를 거절하고 직접 내린 결정일 거야.”‘그렇구나. 그런데 회장님이신 자기 아버지랑 맞붙는 거 보아서는 아마 두 사람도 사이가 별로인가 보네.’고은서는 이내 민시후 아버지가 전에 편찮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아버지는 괜찮으셔?”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민시후는 피곤하다는
백유미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사람 시켜 조사중이니 곧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너도 말했다시피 이미 일은 발생했고 손실도 점점 더 커지고 있어. 이 말인즉슨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야. 프로젝트가 대박 나면 넌 명예랑 돈을 얻고 망하면 너랑 아무 상관이 없다? 일이 그렇게 쉬울 것 같아?”백유미가 차가운 눈빛으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프로젝트 서류에 사인한 사람은 너야. 그리고 회사 최고 결책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너고. 어떤 일이 발생하든 네가 다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네 인생은 여기서 끝이야. 너랑 네 엄마 감방으로 보내서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만들 거야.”원지훈은 백유미가 화난 김에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가 그를 하늘 정상으로 보낼 능력이 있는 만큼 다시 그를 나락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요?”원지훈이 물었다.백유미는 독사처럼 살기 가득한 눈길로 그를 보며 말했다.“돈은 당연히 감당하지 못할 테고. 그런데 그 대신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방금전까지 덤덤하던 원지훈도 점점 섬뜩해졌다.“무슨 일인데요?”“당연히 이 손해를 메꿀만한 일이지.”원지훈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이 일을 별 탈 없이 해주면 이번 손해는 그냥 넘어가 줄게. 혹은 네 엄마랑 함께 죽을 때까지 감방에 들어가 있든가. 한 가지만 선택해. 삼 일 줄게. 사흘 후에 확답을 주지 않으면 너도 어떤 후과가 있을지 알고 있을 거야.”백유미는 말하고 이내 떠났다.그녀가 떠난 후, 범가온이 부랴부랴 룸으로 들어오면서 물었다.“지훈아, 괜찮아? 유미가 또 너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고 날 나가 있으라고 한 거지?”그러나 원지훈은 대답 대신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지금 음식이 넘어가?”범가온은 호통치고는 슬쩍 문 쪽을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네가 계약 체결할 때 따로 돈 받
“고은서 눈에 네가 들어오기나 하겠어?”백유미는 곽승재도 사랑하지 않은 고은서가 원지훈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전혀 믿지 않았다.“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니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못한 곳이 어디가 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거예요? 게다가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왜 저를 위해 음식까지 주문해주면서 저를 먼저 찾아오겠어요?”“그래, 유미야. 지훈이가 옛날부터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어. 지방에서 살 때도 여러 여자애들이 얘가 좋다고 쫓아다녔는데 창업한 이후로 더 많은 여자들이 지훈이를 가지지 못해 안달이나 한다니까.”범가온은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백유미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고 원지훈에게 캐물었다.“고은서가 오늘 널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뭔데?”원지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별일 아니었어요. 너무 오래 못 봤다고 밥 사준다고 만나자 했는데 시간 없다고 했어요.”백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예전의 그녀였다면 지금 원지훈이 하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고은서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변해버렸다. 전에는 툭 건들기만 하면 펄쩍 뛰면서 화내는 사람이었는데 요즘 따라 곽승재가 무슨 일을 해도 전혀 관심 없는 태도를 보였다.심지어 민시후와 무척 가까이 지냈는데 아이가 곽승재의 아이라고 해도 두 사람이 호텔로 간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현재 원지훈과 연락을 맺고 있다는 게 너무도 수상했다.‘곽승재의 이목을 끌고 그에게 새로운 인상을 남기려는 수단인 건가?’“설마 이미 고은서에게 들킨 건 아니지?”백유미가 의심스럽다는 눈길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원지훈은 약간 당황하긴 했으나 티를 내지 않고 성가시다는 듯 답했다.“뭐가 들켰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누나랑 친한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내가 심심해서 고은서 앞에서 누나 얘기를 꺼내겠어요? 게다가 사람 뒷조사하는 거에 능하잖아요. 의심되면 조사해보면 될 거 아니에요.”나중에 조사는 해볼 것이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갑자기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비서는 선 자리에 그댈 얼어붙었다.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가 어두운 얼굴빛을 하고 서 있었다.“대... 대표님, 제가 그 뜻이 아니라...”“그럼 무슨 뜻인데?”곽승재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내가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해 보이는데 알고 보니 쓰레기라는 뜻이 아닌가?”‘갑자기 쓰레기라는 소리가 왜 나오는 거지? 내가 하는 얘기랑 완전 다른 얘기잖아.’비서는 말문이 막혔다.“대표님, 인혜 씨는 그 뜻이 아니라...”옆에서 보고 있던 주민기가 마지못해 대신 설명하려고 할 때 곽승재가 그를 쏘아보았다.“너도 이번 달 보너스 취소야!”‘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 보너스까지 취소하는 거야?’주민기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레스토랑 룸.원지훈이 룸으로 들어갔을 때, 룸 안에는 차가운 표정을 한 백유미와 범가온이 앉아있었다.테이블에는 여러 음식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 누구도 입을 대지 않은 듯했다.“유미야, 우리 지훈이 화내지 마. 이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해. 지훈이가 널 배신할 리가 없어.”범가온은 백유미에게 끊임없이 사과했다.반면 백유미는 걸어들어오는 원지훈을 혐오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지훈아, 왜 이제야 왔어. 얼른 유미한테 설명해. 요즘 회사 일로 바삐 보낼 뿐, 유미를 배신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원지훈은 성큼성큼 테이블로 다가가 앉으면서 말했다.“누나, 또 왜 그러는 거예요? 밥 먹자고 부른 거 아니었어요?”“밥 같은 소릴 하고 있네. 너 지금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백유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사진 한 뭉치와 여러 서류들을 원지훈을 향해 던지면서 말했다.“너 대체 고은서랑 무슨 사이야? 고은서랑 개인적으로 연락한 이유는 또 뭐고?”원지훈이 서류와 사진을 들고 확인해 보니 그중에는 오늘 그가 고은서 사무실을 찾아간 모습과 전에 고은서와 복싱관에서 만난 모습이 찍혀있었다.이외에도 그가 고은서에게 연락했던 통화기록과 그녀가 그를 위
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에 차가운 시선을 하고 있었다.고은서는 어젯밤 곽승재가 앞으로는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고은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어차피 모르는 사람인데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겠지.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곽승재는 계속 백유미에게 여지를 주면서도 나랑 이혼하기 싫다는 모습을 비췄잖아. 그렇게 보면 쓰레기 같은 본성을 지녔다는 건 사실이잖아.’“대표님, 조리실 구경해 보실 건가요?”누군가가 곽승재에게 물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답변을 듣지 못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던 서늘한 기운이 사라진거로 봐서는 일행이 자리를 떴다고 생각했다.“주인공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험담하는 건 어떤 기분이야?”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박지연을 향해 눈을 흘기며 답했다.“들으면 듣는 거지 뭐. 난 험담한 게 아니라 사실을 얘기한 거야.”“GS 그룹에서 시찰 나오는 게 오늘일 줄은 몰랐네. 그것도 곽승재가 직접. 은서야, 혹시 네가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온 거 아닐까?”고은서는 바로 부정했다.“아니야.”박지연이 말했다.“그래도 인연인가 보네.”“그런 인연은 필요 없어.”곽승재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깨진 상황에서 고은서는 더 이상 박지연을 설득하지 않았다.박지연은 언제나 자신의 주관이 뚜렷했다.또한 사람이라는 게, 남을 설득하는 것은 쉬워도 정작 자신이 같은 상황에 놓여있을 때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법이었다.마치 전생의 고은서와 곽승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GS 그룹 대표실에서 주민기는 곽승재에게서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감지했다.요즘 곽승재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화를 누르며 가엾은 직원들에게 화풀이하지 않았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곽승재는 갑자기 병원 실사를 진행하겠다고 일정을 변경했다.실사를 마치고 돌아온 곽승재의 표정은 이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대표실 전체에 한파가 닥친 듯했다.비서가 서류를 챙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