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증명서를 들고 구청 문 앞에 선 고은서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곽승재가 진짜 사인해주다니. 우리 정말 이혼한 거야? 나 이젠 자유의 몸인 거야?’“시그니엘 집문서와 열쇠야.”곽승재는 서류를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지난번에 그가 병원에 이 서류들을 놓고 가는 바람에 고은서는 퀵 서비스를 불러 그에게 돌려준 적이 있었다.그러나 여전히 그녀에게 주겠다고 고집부릴 줄은 미처 생각 못 했다.“안에 금액을 기입하지 않은 수표 한 장도 넣었어. 너랑 할아버지는 아무 재산도 필요 없다고 하는데 그래도 오 년 동안 함께 결혼생활을 해온 보상이라고 생각하고 받아.”곽승재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다시 예전의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모습으로 돌아왔다.“나한테 빚진 것도 없는 데 필요 없어.”고은서는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그녀가 이 결혼을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곽승재는 그녀에게 시달릴 필요도 없었다. 지금 그저 모든 걸 원점으로 돌려놓는 것뿐이다.이혼하기 전에는 곽승재한테서 백억 정도는 떼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지만 이혼 증명서를 손에 쥐고 나니 너무 홀가분한 나머지 그에게서 아무것도 가지고 싶지 않았다. 그저 최대한 그와 멀리하고 싶었다.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곽승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누군가가 곽씨 집안에서 널 홀대했다는 소릴 듣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고은서가 반박했다.“돈은 나 스스로 벌면 돼. 나도 우리 고씨 집안에서 딸을 판다는 소릴 듣기 싫어.”곽승재는 이를 악물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차에 올랐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자신한테 거절당한 것 때문에 불쾌해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는 그녀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현재 자유의 몸이 되었다.푸른 하늘 아래 서 있는 그녀는 공기가 이토록 상큼하고 햇살이 이토록 밝은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행복 지수가 순간 높아진 것 같았다.‘마침내 이혼했어! 지금부터
고은서는 길옆에 주차하고 자신을 기다리는 고준석을 향해 걸어갔다.“수속 다 끝났어?”고준석이 물었다.“네.”이혼 증명서를 들고 있는 고은서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고준석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이혼하고서도 결혼할 때처럼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고은서는 부끄럽다는 듯 고준석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제가 또 말썽부려서 미안해요, 할아버지.”고준석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답했다.“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네가 결혼생활을 하면서 상처만 받는 것보다 나으니까. 할아버지는 네가 말썽을 부려도 행복하기만 하다면 다 괜찮아.”“고마워요, 할아버지.”마음이 따뜻해 난 고은서는 고준석의 품에 안겨 애교를 부렸다.“아, 할아버지, 오늘 예원 별장은 왜 오신 거예요?”고은서의 물음을 들은 고준석은 순간 표정이 엄숙해졌다.고준석은 오전에 MQ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 친구한테 연락했는데 우연히 곽승재와 고은서에 관해 묻기에 조사해보니 두 사람 사이에 관한 소문이 자자한 걸 발견했다고 말했다.“은서야, 이렇게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왜 할아버지한테 얘기하지 않았어?”고준석이 그녀를 꾸짖었다.“그리고 입원했다는 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동영상에서 네 친구가 네가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하던데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거야?”고은서는 이미 지나간 일로 고준석을 속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애교 섞인 말투로 답했다.“별로 크게 다치지도 않았는데 지연이가 과장해서 말한 거예요.”그러나 고준석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계속 캐물었다.“너랑 곽승재 사이에 진짜 제삼자가 존재하는 거야? 이혼하겠다고 고집부리고 그 여자를 호수로 밀어 넣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이야?”고은서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전부는 아니지만 그 이유도 있어요.”그녀의 말을 들은 고준석은 이내 자초지종을 깨달았다. 그는 전부터 곽승재라면 환장하는 고은서가 왜 갑자기 이혼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그제야 그 의문이 풀렸
박지연은 한참 지나서야 전화를 받았다.“은서야.”고은서는 눈에 띄게 시무룩한 박지연의 목소리를 듣고 걱정이 되었다.“지연아, 왜 그래? 전화는 왜 이렇게 늦게 받아? 무슨 일 있어?”“내가 무슨 일이 있겠어. 연락 못 해서 미안해. 본가에 가자마자 시어머니가 편찮으시다고 해서 먼저 나왔어. 그리고 이것저것 하면서 분주히 보내다 보니까 미처 너한테 연락하지도 못했고.”“미안할 게 뭐가 있어. 당연히 네 일을 먼저 처리해야지. 맞다, 좋은 소식 하나 있는데 나 오늘 이혼했어!”고은서가 그녀에게 마음에 두지 말라고 말했다.“진짜 이혼했어?”박지연은 깜짝 놀랐다.“응!”고은서는 이혼한 얘기를 꺼낼 때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이혼 증명서도 금방 가졌는데 아직도 따끈따끈하다. 다 네가 본가로 가서 할머니한테 소식을 전해준 덕분이야.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순리롭게 이혼도 못 했을 거야.”비록 곽승재가 스스로 동의한 일이지만 전미자가 옆에서 그녀를 지지해주지 않았더라면 오늘처럼 일이 쉽게 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사실 내가 오늘 찾아가지 않아도 할머니랑 사모님께서 예원 별장으로 갔을 거야. 내가 본가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거든.”고은서는 순간 의아했다. 그녀는 전미자가 박지연이 본가까지 찾아간 덕분에 예원 별장으로 온 거라고 생각했었다. 전에 이미 찾아가리라고 마음먹었다고는 미처 생각도 못 했다.‘아줌마가 곽승재를 타이르다가 도무지 방법이 없어서 할머니를 찾아가신 건가? 이러고 보면 아줌마가 약속을 어긴 게 아니네. 며칠 쉬다가 직접 가서 감사하다고 인사해야겠어.’“지연아, 나 먼저 할아버지 집에 가서 쉬고 있을게. 시어머님 몸도 괜찮아지고 하면 우리 만나서 축하파티라도 열자.”“그래, 알겠어.”박지연이 답했다.고은서는 박지연과 통화를 마친 후 민시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아버지는 괜찮으셔? 아직도 북제에 있는 거야?]메시지가 발송된 지 몇 초도 되지 않아 민시후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고은서가 전
똑똑.곽현수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면서 말했다.“승재야, 내가 말하는 거 들었어?”곽승재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는 담배를 끄고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세요?”“할머니가 말씀하시길 고은서랑 이혼했다며?”곽현수가 물었다.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어루만졌다.“왜 이러는 거야? 멍 때리며 피우지 않던 담배도 피우고. 사내가 그까짓 이혼을 했다고 이렇게 기죽어 있어서 쓰겠니?”“지금 절 훈계하러 들어오신 거예요?”곽승재가 물었다.“너...”곽현수는 잠깐 말문이 막혀 하다가 이내 말을 이어갔다.“허 교수가 개발한 약품 대리권은 왜 유미한테 주지 않은 거야? 그리고 융자에 관한 일은 왜 유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맡긴 거지?”곽승재는 미간을 어루만지던 손을 내려놓고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답했다.“백 이사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이런 일을 책임질 여력이 되지 않아요. 이처럼 중요한 일을 맡기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요.”“뭐가 적절하지 않다는 거야? 융자에 관한 일을 고은서에게 맡기고 유미를 밀어내려고 그러는 거지?”곽현수는 불만만 점점 더 쌓여갔다. 그러나 곽승재는 부인하지 않고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듯 말했다.“아버지. 회사 일을 저한테 전적으로 맡기셨으면 저도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해 운영하도록 할 테니 제 결정에 간섭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곽승재, 너 지금 그 자리에 앉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아버지한테 무슨 말버릇이야?”곽현수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너 요즘 고은서 때문에 골탕을 먹은 게 한두 번이야? 심지어 GS그룹 주식까지 영향받게 했잖아. 내가 제때 귀국하고 이사회에서 네 편을 들어주지 않았으면 넌 지금 이 자리에 못 있어!”곽현수는 점점 더 흥분해 했다.“그런데 나한테 감사하기는커녕 내가 안배한 일까지 거역하려는 거야?”곽승재는 이마를 짚고 담담하게 말했다.“귀국하시지 않아도 이사회 주주들은 제가
폰을 들고 확인해 보니 육현석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아마 이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황 파악을 하려고 전화를 건 모양인 것 같았다.그러나 그녀는 육현석이 자신의 기쁨을 함께 공감해 줄 적합한 상대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그녀가 전화를 끊고 다시 자려고 할 때 육현석한테서 또 전화가 걸려왔다.‘웬 고집이래?’요즘 육현석의 태도가 꽤 마음에 들었던 고은서는 고민하다가 끝내는 전화를 받았다.“육현석 씨,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요?”수화기 너머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형수님, 형이랑 다퉜어요? 형이 오늘따라 좀 이상해 보여서 걱정되는데 혹시 형한테 전화 한 통만 걸어줄 수 있을까요?”‘아직 이혼한 사실을 모르는 건가?’“죄송하지만 저 곽승재랑 이혼했어요. 더는 곽승재 일로 저한테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저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니까요.”육현석은 고은서의 말에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이내 조용한 곳을 찾아 그녀에게 자세히 물었다.“형수님, 거짓말이죠? 이혼했다뇨? 형이 왜 형수님이랑 이혼해요? 지금 장난치는 거죠?”육현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복해서 물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요 며칠 두 사람에 관한 기사를 보았었다. 그러나 기사의 여론이 곽승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걸 확인한 그는 이내 기사를 퍼뜨린 사람이 고은서라는 걸 깨달았다.그 누구의 편을 들어도 합당하지 않은 타이밍이었기에 그는 그저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기사가 올라온 지 삼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두 사람이 벌써 이혼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제가 이런 일로 장난칠 이유가 없잖아요. 그리고 저 이젠 육현석 씨 형수가 아니니까 호칭을 바꿔줬으면 좋겠어요. 이후로 은서 씨라고 편하게 불러주세요.”“형...”육현석은 차마 은서 씨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왜 갑자기 이혼한 거예요? 설마 배 속의 아이 때문이에요?”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고은서의 아이를 강제로 없애려고 한
현재 낯선 여자의 터치도 거절하지 않는 걸 보아서는 곽승재가 큰 충격을 받은 게 확실했다.육현석은 한숨을 내쉬었다,평소에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마다 약간 밉상이긴 했지만 막상 상처를 받고도 웃으면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그를 보게 되니 육현석도 따라 기분이 시원찮았다.“가, 다 저리 나가. 다 옆 방에서 가서 놀아. 비용은 내가 낼게.”육현석은 룸에 있는 사람들을 밖으로 내쫓기 시작했다. 그는 곽승재 옆에 있는 여자를 강제로 밀어내고 그의 옆에 앉았다.그 여자는 불만스럽다는 눈길로 육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곽 대표님도 가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는데 당신이 뭐라고 날 쫓아요?”“가라면 갈 것이지 뭔 쓸데없는 소리가 그렇게 많아.”육현석은 성가시다는 듯 그녀를 계속 내쫓으려 했다.“그리고 헛된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야. 우리 형 아내가 있는 몸이라고!”“누가 아내가 있다고 그래!”여자가 입을 열기도 전에 곽승재가 먼저 불쾌하다는 듯 육현석을 반박했다.그런데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취했는지 그는 평소와 달리 말을 또박또박 하지 못했다.“이리 와서 계속 마셔!”곽승재는 여자를 향해 손짓했다.그의 말을 들은 여자의 얼굴에는 순간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이내 곽승재의 곁에 다가가 그의 팔에 딱 붙을 정도로 가까이 앉았다.육현석은 순간 다급해 났다.“똑바로 앉아, 뼈 없는 사람처럼 앉지 말고!”“대체 왜 그래요? 대표님께서 같이 술 마시자고 해서 앉은 건데 뭐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왜 자꾸 절 쫓아내지 못해 안달이세요?”여자가 그를 반박했다.“너...”“술 마실 생각 없으면 나가. 분위기 망치지 말고.”곽승재가 차가운 눈길로 육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여자도 육현석을 향해 콧방귀를 뀌고는 계속해서 곽승재에게 술을 따랐다.“...”육현석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나도 이젠 지친다. 형이 알아서 하겠지 뭐.’육현석은 그와 멀리 떨어진 자리를 찾아 앉고서는 홀로 술을 마시면서 여자와 함께 끊임없이 술을 들이켜는 그를 바라
곽승재의 기분이 최악에 달했다는 걸 느낀 육현석은 더는 그를 자극하지 않았다.육현석은 술잔을 들고 곽승재 옆에 앉으며 말했다.“전에는 형수님이 형을 평생 원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이혼하지 않겠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이혼을 동의한 거야?”술잔을 들고 있는 곽승재의 얼굴빛이 엄청 어두웠다.“누가 이혼하지 않는다고 했어? 이 세상에 여자가 고은서 한 명밖에 없어? 전에는 그저 벌을 준 것뿐이야.”“...”육현석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암튼 이혼도 이미 다 했는데 고집부려봤자 달라지는 건 없지.’육현석은 그를 반박하는 대신 그에게 물었다.“그럼 벌도 다 주고 했는데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똥이라도 밟은 것처럼 불쾌한 표정을 하고 있어?”곽승재는 술을 들이켜면서 답하지 않았다.육현석은 그를 보면서 갑자기 겁도 없이 장난치기 시작했다.“형, 세상에 여자가 형수님 하나뿐인 건 아니지만 남자도 형 하나뿐인 게 아니잖아. 형이 잡지 않으면 형수님 다른 남자 찾을지도... 아악!”육현석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다름이 아니라 옆에서 듣고 있던 곽승재가 그의 무릎을 힘껏 차버린 것이다.“닥쳐!”“형, 너무 하는 거 아니야? 이혼해서 기분이 안 좋다는 건 이해하겠는데 왜 나한테 화풀이하는 거야? 전에도 형수님이 형을 원망할 거라고 말했었는데 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잖아. 형수님이 떠난 게 다 형 탓이야!”육현석은 말하면서 행여나 곽승재에게 또 한 번 맞을까 봐 그와 일 미터가량 떨어진 자리로 피신했다.그러나 곽승재는 입을 꾹 다물고 제자리에 앉아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자극이라도 받은 듯 방금전까지만 해도 느껴지던 살기가 사그라들면서 어두웠던 얼굴빛도 변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쓸쓸해 하는 듯했다.육현석은 순간 자신이 말을 너무 심하게 했다는 걸 깨달았다.‘방금전까지만 해도 애써 참고 있었던 모양이네. 내가 한 말 때문에 더 힘들어하는 것 같은데 어떡하지?’“형, 나...”육현석이 그를 위안하려
고국성은 잠시 별문제 없이 나와도 됐지만 유관 부문에서 자세한 부분에 관해 계속 조사해야 했기에 모든 조사가 끝나기 전까지는 협조해야 했다.고은서가 MQ 세금 문제를 제보한 사람이 누굴까 하고 생각에 잠겨있을 때, 도우미가 올라와 그녀에게 손님이 오셨다고 할아버지께서 내려오라고 하신다고 전했다.‘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외투 하나를 걸치고 아래로 내려갔다.거실로 내려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서연정이 와 있었다.그녀는 철색의 원피스에 벨트를 매고 검은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비녀로 올림머리를 하고 이쁜 목선을 드러냈다.오십이 넘었는데도 서연정한테서는 세월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단아하게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고은서는 이혼한 당일에 문자를 보낸 후로 서연정에게 연락한 적이 없는데 이렇게 직접 고씨 집안 저택으로 찾아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 했다.테이블 위에는 선물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아마 그녀가 들고 온 것인 듯했다.“은서야, 왔어? 사모님과 얘기 나눠. 나는 나가서 산책 좀 하고 올게.”고준석이 위층에서 내려오는 고은서를 보고 당부했다.“네.”그녀는 고준석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고준석이 밖으로 나간 후 고은서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사모님, 여기까진 어떻게 오셨어요?”“은서야, 몸은 괜찮아?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서연정은 물음에 답해주는 대신 도리어 고은서에게 되물었다.“네, 이젠 거의 다 회복되었어요. 의사 선생님도 매일 검사해주시는데 별문제 없대요.”고은서가 말했다.“마침 요 며칠 할머니랑 사모님을 찾아뵈러 가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직접 오실 거라고는 미처 생각 못 했어요.”서연정은 온화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오랫동안 해외에 있다 보니까 어르신도 제때 찾아뵙지 못해서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 그래서 내일 Y 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 번 들렀어.”고은서는 전에 서연정이 단아하고 온화하며 박식한 전형적인 부잣집 아가씨라고 전
투약한 간호사도 전에 이미 곽승재에 의해 경찰서로 넘겨졌는데 그녀의 증언에도 진희숙만 언급되었다.고은서는 이 모든 결과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백유미의 신중함을 탄복했다. 그녀가 경각심을 낮추지 않고 제때 녹음하면서 증거를 남겼더라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당사자로서 고은서는 경찰 조사에 협조한 후 나머지 일을 변호사에게 맡겼다.“걱정하지 마세요. 증거가 확실하니까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송민준이 말했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대가를 치르길 바라는 사람은 백유미이지 대신 누명을 쓴 진희숙과 간호사가 아니었다.“우리 민아도 잘못한 곳이 있으니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원하는 보상이라도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보상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송민준이 말을 이어갔다.“보상은 필요 없어요. 괜찮다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죠.”고은서가 말했다.“무슨 부탁이요?”“백씨 집안에서 요즘 여러 프로젝트를 도맡아 하고 있다던데, 그 프로젝트들을 저 대신 산통 깨주세요.”고은서도 민시후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곽수혁이 GS그룹 일에 끼어들면서 백씨 집안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그녀의 말을 들은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송민아 보고 나한테도 그만 집적거리고 해. 나도 스트레스 그만 받고 싶어.”옆에 있던 민시후가 갑자기 말을 보태었다.송민준은 민시후를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시후야, 민아가 어릴 적부터 널 좋아한 걸 너도 알고 있잖아. 민아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도 곁에서 어쩔 수 없어.”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직설적으로 말했다.“난 어릴 적부터 송민아가 싫었다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데는 진짜 짝이 없다니까.”송민준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고은서에게로 돌리며 물었다.“이혼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시후랑 함께 있을 생각이신가요?”‘소식이 빠르네.’이혼한 지 며칠 되지도 않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민아 데리고 오지 않았으니까.”송민준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혹시나 또 고집부리면서 기분 나쁘게 할까 봐 오늘 너희랑 만난다는고 얘기하지 않았어.”민시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발 좀 북제로 데려가. 해성에 계속 있게 하지 말고.”송민준은 나긋한 미소를 보이면서 답했다.“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게다가 이미 ZY 그룹으로 출근하기로 했다던데.”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눈살을 더 세게 찌푸렸다.“우리 아버지가 송민아를 강제로 ZY 그룹에 밀어 넣은 건 나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데 나중에 또 고은서를 해치려 하거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 또다시 너랑 우리 아버지 때문에 봐주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고은서는 민시후를 쏘아보았다.‘나랑 송민준을 원수 사이로 만들 생각인 거야?’“뭘 쏘아봐?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민시후는 점점 더 흥분해 하며 말했다.“전에도 몇 번이고 널 협박했잖아. 심지어 간호사를 교사하여 우리 아이까지 잃게 한 사람이야. 네가 날 막지만 않았으면 내가 송민아를 가만둘 거 같아?”“...”고은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전에 유산한 경과를 민시후에게 간단히 알려주면서 송민아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걸 이렇게 이용할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씩씩거리는 민시후를 보면서 고은서는 그가 배우를 하지 않은 게 너무 아쉽다고 속으로 감탄했다.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도 전문가에게 나가보라 하고 직접 민시후에게 차를 따라줬다.“전에 병원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해. 오늘 만나자고 한 것도 그 일 때문이야.”송민준이 말하기를 진희숙은 송민아를 친딸로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돌봐온 사람으로서 그녀가 두 사람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런 모험을 했다고 한다.그리고 송민아가 간호사랑 만난 모습이 포착된 사진은 진희숙이 그녀를 불러내 우연하게 찍힌 사진이라고 한다.“민아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형, 형수님이 민시후한테 별다른 마음은 없어 보이는데 걱정하지마.”“내가 무슨 걱정을 한다고 그래?”곽승재가 약간 어색해하며 말했다.“이미 이혼한 사이인데 고은서가 누구한테 마음이 가든 누구랑 있든 나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야.”“아까 썩은 표정을 하고 경적을 울린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네.”육현석이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그러나 갑자기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애써 웃으면서 변명거리를 찾았다.“맞아, 맞아. 형 말이 맞아. 형수님이 누구랑 있든 형이랑 이젠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 역시 이혼 같은 작은 일 때문에 속상해하는 일은 전혀 없는 우리 형, 상남자답다니까.”곽승재의 얼굴빛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걸 발견한 육현석은 이내 입을 화제를 돌렸다.“형, 형수님이 형을 보기 싫어하는 것도 화나서 그러는 거잖아. 계속 이렇게 자존심 때문에 고집부려서는 안 된다니까. 형수님한테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존재감을 나타내야 할 거 아니야.”그의 말을 들은 곽승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네가 말했다시피 날 싫어하잖아. 그런데 무슨 존재감을 나타내라는 거야?”“지금 상대방을 잊지 못하고 놓아주기 싫은 사람은 형이잖아.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형수님이 스스로 돌아올 것 같아? 형, 자존심 따위 버리지 않으면 형수님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육현석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전에 낯선 사람 사이로 지내도 되냐고 물었을 때 아주 흔쾌히 된다고 답하던 고은서의 모습이 떠올랐다.어제 점심, 그가 스케줄을 바꾸면서까지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고은서가 이혼해서 무척 기쁘다고 하면서 자신의 뒤담화를 하는 걸 들었다.그러나 방금전 민시후와 다정하게 장난치면서 자신을 보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녀를 생각하면 이건 자존심을 내려놓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은서가 이젠 진짜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곽승재는 눈살을 질끈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언제 고은서랑 다시 화해하고 싶다고 했어? 인제
민시후는 그가 입을 열길 기다리고 있는 고은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오글거려 죽겠네.”고은서는 끝내 참지 못하고 방금전 손을 닦던 물티슈를 그를 향해 던졌다.“누가 오글거린다는 거야! 사람 호기심 불러일으켜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 짜증 나는 자식아!”“고은서!”물티슈에 얼굴을 맞은 민시후가 물티슈를 다시 주어 그녀를 향해 던지려고 할 때 뒤에서 갑자기 빵빵하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와 민시후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고급 SUV 한 대가 뒤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운전석에는 육현석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곽승재였다.육현석은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손을 저으며 옆에 있는 곽승재를 힐끔힐끔 보았다. 방금 경적 소리를 낸 게 그가 아니라 곽승재인 것이 분명했다.SUV 차량 높이가 꽤 있었기에 아마 방금전에 그녀와 민시후가 장난치는 걸 본 모양이다.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앉아있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몸을 홱 돌리면서 민시후에게 말했다.“초록불이야. 안 가고 뭐 해?”민시후도 차 안에 앉아있는 육현석과 곽승재를 보았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액셀을 밟기는커녕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백미러를 쳐다보았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여기에서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전에 두 사람이 운전하면서 맞부딪친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꼭 쥐고 말했다.“민시후, 우리 약속 있는 거 잊은 거 아니지? 이상한 짓 하지마.”민시후는 불쾌하다는 듯 그녀를 보며 말했다.“이상한 짓이라니. 전에 내 차를 먼저 박은 사람은 곽승재거든.”‘네가 곽승재 차 앞에 막아서서 시비 걸지 않았으면 곽승재가 널 박을 리도 없었거든.’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시후가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러면 나 먼저 차에서 내려도 돼?”“너 언제부터
민시후는 송민준과 찻집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맑은 하늘에 눈 부신 햇살, 날씨가 참 좋았다.민시후는 기사 대신 직접 하늘색 스포츠카를 운전했다.고은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는 스포츠카를 보며 말했다.“민 도련님, 패션 워크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레스토랑 가는 것뿐인데 굳이 이렇게 눈에 띄는 차를 운전해야 할까요?”“그냥 평범한 스포츠카일 뿐인데 어디가 눈에 띈다는 거야? 잔말 말고 얼른 타. 내가 직접 운전한다는데 영광으로 생각하라고.”민시후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탔다.스포츠카가 유독 눈에 띄기는 했지만 길에 차들이 적었던 탓에 다행히도 너무 큰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가는 도중에 ZY 그룹 근황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곽승재가 ZY 그룹을 타깃으로 삶고 짓누르려고 할 때 민시후가 제때 빠르게 대응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허 교수님 쪽에 의약 프로젝트가 아주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어. 후기도 꽤 괜찮고. 연구소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민시후는 회사 일을 얘기할 때만은 진지했다.“대리권도 네가 쟁취해 온 거니까 융자에 관한 일도 네가 책임지고 잘 해봐.”고은서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백유미에게 맡길 예정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는지 의문스러웠다.그녀는 궁금증을 덜기 위해 민시후에게 물었다.“곽승재 아버지가 얼마 전에 귀국하셨는데 회사 일에 참여하려 했다가 곽승재한테 거절당했다고 하더라고. 아마 이번 일도 곽승재가 아버지 건의를 거절하고 직접 내린 결정일 거야.”‘그렇구나. 그런데 회장님이신 자기 아버지랑 맞붙는 거 보아서는 아마 두 사람도 사이가 별로인가 보네.’고은서는 이내 민시후 아버지가 전에 편찮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아버지는 괜찮으셔?”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민시후는 피곤하다는
백유미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사람 시켜 조사중이니 곧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너도 말했다시피 이미 일은 발생했고 손실도 점점 더 커지고 있어. 이 말인즉슨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야. 프로젝트가 대박 나면 넌 명예랑 돈을 얻고 망하면 너랑 아무 상관이 없다? 일이 그렇게 쉬울 것 같아?”백유미가 차가운 눈빛으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프로젝트 서류에 사인한 사람은 너야. 그리고 회사 최고 결책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너고. 어떤 일이 발생하든 네가 다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네 인생은 여기서 끝이야. 너랑 네 엄마 감방으로 보내서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만들 거야.”원지훈은 백유미가 화난 김에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가 그를 하늘 정상으로 보낼 능력이 있는 만큼 다시 그를 나락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요?”원지훈이 물었다.백유미는 독사처럼 살기 가득한 눈길로 그를 보며 말했다.“돈은 당연히 감당하지 못할 테고. 그런데 그 대신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방금전까지 덤덤하던 원지훈도 점점 섬뜩해졌다.“무슨 일인데요?”“당연히 이 손해를 메꿀만한 일이지.”원지훈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이 일을 별 탈 없이 해주면 이번 손해는 그냥 넘어가 줄게. 혹은 네 엄마랑 함께 죽을 때까지 감방에 들어가 있든가. 한 가지만 선택해. 삼 일 줄게. 사흘 후에 확답을 주지 않으면 너도 어떤 후과가 있을지 알고 있을 거야.”백유미는 말하고 이내 떠났다.그녀가 떠난 후, 범가온이 부랴부랴 룸으로 들어오면서 물었다.“지훈아, 괜찮아? 유미가 또 너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고 날 나가 있으라고 한 거지?”그러나 원지훈은 대답 대신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지금 음식이 넘어가?”범가온은 호통치고는 슬쩍 문 쪽을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네가 계약 체결할 때 따로 돈 받
“고은서 눈에 네가 들어오기나 하겠어?”백유미는 곽승재도 사랑하지 않은 고은서가 원지훈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전혀 믿지 않았다.“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니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못한 곳이 어디가 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거예요? 게다가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왜 저를 위해 음식까지 주문해주면서 저를 먼저 찾아오겠어요?”“그래, 유미야. 지훈이가 옛날부터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어. 지방에서 살 때도 여러 여자애들이 얘가 좋다고 쫓아다녔는데 창업한 이후로 더 많은 여자들이 지훈이를 가지지 못해 안달이나 한다니까.”범가온은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백유미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고 원지훈에게 캐물었다.“고은서가 오늘 널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뭔데?”원지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별일 아니었어요. 너무 오래 못 봤다고 밥 사준다고 만나자 했는데 시간 없다고 했어요.”백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예전의 그녀였다면 지금 원지훈이 하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고은서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변해버렸다. 전에는 툭 건들기만 하면 펄쩍 뛰면서 화내는 사람이었는데 요즘 따라 곽승재가 무슨 일을 해도 전혀 관심 없는 태도를 보였다.심지어 민시후와 무척 가까이 지냈는데 아이가 곽승재의 아이라고 해도 두 사람이 호텔로 간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현재 원지훈과 연락을 맺고 있다는 게 너무도 수상했다.‘곽승재의 이목을 끌고 그에게 새로운 인상을 남기려는 수단인 건가?’“설마 이미 고은서에게 들킨 건 아니지?”백유미가 의심스럽다는 눈길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원지훈은 약간 당황하긴 했으나 티를 내지 않고 성가시다는 듯 답했다.“뭐가 들켰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누나랑 친한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내가 심심해서 고은서 앞에서 누나 얘기를 꺼내겠어요? 게다가 사람 뒷조사하는 거에 능하잖아요. 의심되면 조사해보면 될 거 아니에요.”나중에 조사는 해볼 것이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갑자기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비서는 선 자리에 그댈 얼어붙었다.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가 어두운 얼굴빛을 하고 서 있었다.“대... 대표님, 제가 그 뜻이 아니라...”“그럼 무슨 뜻인데?”곽승재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내가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해 보이는데 알고 보니 쓰레기라는 뜻이 아닌가?”‘갑자기 쓰레기라는 소리가 왜 나오는 거지? 내가 하는 얘기랑 완전 다른 얘기잖아.’비서는 말문이 막혔다.“대표님, 인혜 씨는 그 뜻이 아니라...”옆에서 보고 있던 주민기가 마지못해 대신 설명하려고 할 때 곽승재가 그를 쏘아보았다.“너도 이번 달 보너스 취소야!”‘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 보너스까지 취소하는 거야?’주민기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레스토랑 룸.원지훈이 룸으로 들어갔을 때, 룸 안에는 차가운 표정을 한 백유미와 범가온이 앉아있었다.테이블에는 여러 음식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 누구도 입을 대지 않은 듯했다.“유미야, 우리 지훈이 화내지 마. 이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해. 지훈이가 널 배신할 리가 없어.”범가온은 백유미에게 끊임없이 사과했다.반면 백유미는 걸어들어오는 원지훈을 혐오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지훈아, 왜 이제야 왔어. 얼른 유미한테 설명해. 요즘 회사 일로 바삐 보낼 뿐, 유미를 배신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원지훈은 성큼성큼 테이블로 다가가 앉으면서 말했다.“누나, 또 왜 그러는 거예요? 밥 먹자고 부른 거 아니었어요?”“밥 같은 소릴 하고 있네. 너 지금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백유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사진 한 뭉치와 여러 서류들을 원지훈을 향해 던지면서 말했다.“너 대체 고은서랑 무슨 사이야? 고은서랑 개인적으로 연락한 이유는 또 뭐고?”원지훈이 서류와 사진을 들고 확인해 보니 그중에는 오늘 그가 고은서 사무실을 찾아간 모습과 전에 고은서와 복싱관에서 만난 모습이 찍혀있었다.이외에도 그가 고은서에게 연락했던 통화기록과 그녀가 그를 위
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에 차가운 시선을 하고 있었다.고은서는 어젯밤 곽승재가 앞으로는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고은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어차피 모르는 사람인데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겠지.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곽승재는 계속 백유미에게 여지를 주면서도 나랑 이혼하기 싫다는 모습을 비췄잖아. 그렇게 보면 쓰레기 같은 본성을 지녔다는 건 사실이잖아.’“대표님, 조리실 구경해 보실 건가요?”누군가가 곽승재에게 물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답변을 듣지 못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던 서늘한 기운이 사라진거로 봐서는 일행이 자리를 떴다고 생각했다.“주인공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험담하는 건 어떤 기분이야?”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박지연을 향해 눈을 흘기며 답했다.“들으면 듣는 거지 뭐. 난 험담한 게 아니라 사실을 얘기한 거야.”“GS 그룹에서 시찰 나오는 게 오늘일 줄은 몰랐네. 그것도 곽승재가 직접. 은서야, 혹시 네가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온 거 아닐까?”고은서는 바로 부정했다.“아니야.”박지연이 말했다.“그래도 인연인가 보네.”“그런 인연은 필요 없어.”곽승재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깨진 상황에서 고은서는 더 이상 박지연을 설득하지 않았다.박지연은 언제나 자신의 주관이 뚜렷했다.또한 사람이라는 게, 남을 설득하는 것은 쉬워도 정작 자신이 같은 상황에 놓여있을 때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법이었다.마치 전생의 고은서와 곽승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GS 그룹 대표실에서 주민기는 곽승재에게서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감지했다.요즘 곽승재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화를 누르며 가엾은 직원들에게 화풀이하지 않았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곽승재는 갑자기 병원 실사를 진행하겠다고 일정을 변경했다.실사를 마치고 돌아온 곽승재의 표정은 이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대표실 전체에 한파가 닥친 듯했다.비서가 서류를 챙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