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 모든 일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는 이상 이혼은 절대 동의 못 해.”“곽승재!”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화내려고 했다.“이놈의 자식!”전미자는 지팡이로 곽승재를 내리치며 호통했다.“아직도 계속 은서를 화나게 할 예정이야? 네가 은서를 어느 궁지까지 몰아갔으면 은서가 저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겠어?”곽승재는 입술을 꽉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은서야, 승재랑 얘기 한 번 더 나눠보는 건 어떻니?”전미자가 고은서에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할머니가 네 시어머니랑 여기까지 온 게 다 너희 두 사람 이혼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서야. 네가 무슨 결정을 내리든 우리는 다 널 지지할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은서야, 얘기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할아버지는 더는 네가 속상해하는 모습을 못 보겠어.”고준석이 말했다.고은서는 순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누군가가 내 편을 들어준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할아버지, 저 곽승재랑 얘기 나눠볼게요.”고은서는 전미자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곽승재가 이혼하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이상 그 누구도 그의 생각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고준석은 당연하게도 고은서의 선택을 존중했다.“그럼 할아버지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네.”어른들이 밖으로 나간 후 곽승재는 고은서 곁으로 다가갔다.고은서는 그제서야 그의 옷에 진흙 자국이 있는 걸 발견했다. 심지어 다치기라도 했는지 걸으면서 눈에 띄게 미간을 찌푸리곤 했다. 그러나 다 그녀랑 상관없는 일이었다.고은서는 차가운 눈길로 곽승재를 바라보며 물었다.“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아까 그 아이가 내 아이라고 했었잖아. 사실이야?”조명 때문인지 곧게 서 있는 그의 이목구비가 더 뚜렷해 보였다. 그의 눈에서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이고 있는 듯했다.고은서는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계속 물어본다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 내가 무슨 답을 하든 당신은 믿지 않을 테니까.”“고은서, 나는 네가 하는 말이 어디까지가
“이후에 서로 아무 관계가 없는 낯선 사이가 된다고 해도 상관없어?”곽승재가 계속 캐물었다.‘이혼 한 마당에 무슨 관계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거야?’고은서는 아주 단호하게 답했다.“상관없어.”“고은서, 우리가 결혼한 지 벌써 오 년이야. 그런데 어떻게 이혼이라는 한 마디로 모든 걸 부정하려고 할 수가 있어?”곽승재는 순간 화가 났다. 그러나 고은서 눈에는 이 상황이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정확히 말하자면 오 년 동안 당신이 나한테 퍼부은 감정이 얼마나 된다고 그래? 우리 사이엔 원래부터 아무런 감정이 없었잖아.”“감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곽승재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전에 없었다고 해도 지금 생겼다잖아. 나도 널 좋아하게 됐다고. 그런데 왜 자꾸 날 거절하려고 하는 건데?”“왜 거절하면 안 되는 건데?”고은서가 되물었다.“전에 내가 당신을 좋아할 때는 내가 당신 눈앞에 더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할 정도로 날 싫어했잖아. 그런데 내가 더는 좋아하지 않는다니까 갑자기 날 곁에 잡아두려고 하는 이유가 뭐야? 내가 당신 감정을 꼭 받아줘야 하는 법은 없잖아.”“왜 갑자기 날 좋아하지 않게 된 건데? 적어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알려줘야 할 거 아니야!”곽승재는 화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고은서는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좋아하지 않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오 년 동안 나를 극혐해 하다가 내가 이혼하려고 하니까 날 좋아하게 되었다고? 너무 어이없지 않아?”곽승재는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이혼하기 싫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이혼하기 점점 더 싫어졌다. 이젠 이혼이라는 두 글자만 들어도 역겨울 정도였다.“사실 따지고 보면 당신은 단 한 번도 날 존중해준 적이 없어.”고은서가 그를 대신해 답해줬다.“당신은 내가 평생 당신 곁에 붙어서 안 떠날 거라고 믿고 있는 거지? 당신이 날 좋아하지 않는 건 모든 게 다 내 탓이고 내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이고 당신이 날 좋아하
이혼 증명서를 들고 구청 문 앞에 선 고은서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곽승재가 진짜 사인해주다니. 우리 정말 이혼한 거야? 나 이젠 자유의 몸인 거야?’“시그니엘 집문서와 열쇠야.”곽승재는 서류를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지난번에 그가 병원에 이 서류들을 놓고 가는 바람에 고은서는 퀵 서비스를 불러 그에게 돌려준 적이 있었다.그러나 여전히 그녀에게 주겠다고 고집부릴 줄은 미처 생각 못 했다.“안에 금액을 기입하지 않은 수표 한 장도 넣었어. 너랑 할아버지는 아무 재산도 필요 없다고 하는데 그래도 오 년 동안 함께 결혼생활을 해온 보상이라고 생각하고 받아.”곽승재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다시 예전의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모습으로 돌아왔다.“나한테 빚진 것도 없는 데 필요 없어.”고은서는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그녀가 이 결혼을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곽승재는 그녀에게 시달릴 필요도 없었다. 지금 그저 모든 걸 원점으로 돌려놓는 것뿐이다.이혼하기 전에는 곽승재한테서 백억 정도는 떼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지만 이혼 증명서를 손에 쥐고 나니 너무 홀가분한 나머지 그에게서 아무것도 가지고 싶지 않았다. 그저 최대한 그와 멀리하고 싶었다.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곽승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누군가가 곽씨 집안에서 널 홀대했다는 소릴 듣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고은서가 반박했다.“돈은 나 스스로 벌면 돼. 나도 우리 고씨 집안에서 딸을 판다는 소릴 듣기 싫어.”곽승재는 이를 악물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차에 올랐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자신한테 거절당한 것 때문에 불쾌해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는 그녀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현재 자유의 몸이 되었다.푸른 하늘 아래 서 있는 그녀는 공기가 이토록 상큼하고 햇살이 이토록 밝은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행복 지수가 순간 높아진 것 같았다.‘마침내 이혼했어! 지금부터
고은서는 길옆에 주차하고 자신을 기다리는 고준석을 향해 걸어갔다.“수속 다 끝났어?”고준석이 물었다.“네.”이혼 증명서를 들고 있는 고은서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고준석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이혼하고서도 결혼할 때처럼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고은서는 부끄럽다는 듯 고준석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제가 또 말썽부려서 미안해요, 할아버지.”고준석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답했다.“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네가 결혼생활을 하면서 상처만 받는 것보다 나으니까. 할아버지는 네가 말썽을 부려도 행복하기만 하다면 다 괜찮아.”“고마워요, 할아버지.”마음이 따뜻해 난 고은서는 고준석의 품에 안겨 애교를 부렸다.“아, 할아버지, 오늘 예원 별장은 왜 오신 거예요?”고은서의 물음을 들은 고준석은 순간 표정이 엄숙해졌다.고준석은 오전에 MQ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 친구한테 연락했는데 우연히 곽승재와 고은서에 관해 묻기에 조사해보니 두 사람 사이에 관한 소문이 자자한 걸 발견했다고 말했다.“은서야, 이렇게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왜 할아버지한테 얘기하지 않았어?”고준석이 그녀를 꾸짖었다.“그리고 입원했다는 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동영상에서 네 친구가 네가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하던데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거야?”고은서는 이미 지나간 일로 고준석을 속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애교 섞인 말투로 답했다.“별로 크게 다치지도 않았는데 지연이가 과장해서 말한 거예요.”그러나 고준석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계속 캐물었다.“너랑 곽승재 사이에 진짜 제삼자가 존재하는 거야? 이혼하겠다고 고집부리고 그 여자를 호수로 밀어 넣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이야?”고은서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전부는 아니지만 그 이유도 있어요.”그녀의 말을 들은 고준석은 이내 자초지종을 깨달았다. 그는 전부터 곽승재라면 환장하는 고은서가 왜 갑자기 이혼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그제야 그 의문이 풀렸
박지연은 한참 지나서야 전화를 받았다.“은서야.”고은서는 눈에 띄게 시무룩한 박지연의 목소리를 듣고 걱정이 되었다.“지연아, 왜 그래? 전화는 왜 이렇게 늦게 받아? 무슨 일 있어?”“내가 무슨 일이 있겠어. 연락 못 해서 미안해. 본가에 가자마자 시어머니가 편찮으시다고 해서 먼저 나왔어. 그리고 이것저것 하면서 분주히 보내다 보니까 미처 너한테 연락하지도 못했고.”“미안할 게 뭐가 있어. 당연히 네 일을 먼저 처리해야지. 맞다, 좋은 소식 하나 있는데 나 오늘 이혼했어!”고은서가 그녀에게 마음에 두지 말라고 말했다.“진짜 이혼했어?”박지연은 깜짝 놀랐다.“응!”고은서는 이혼한 얘기를 꺼낼 때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이혼 증명서도 금방 가졌는데 아직도 따끈따끈하다. 다 네가 본가로 가서 할머니한테 소식을 전해준 덕분이야.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순리롭게 이혼도 못 했을 거야.”비록 곽승재가 스스로 동의한 일이지만 전미자가 옆에서 그녀를 지지해주지 않았더라면 오늘처럼 일이 쉽게 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사실 내가 오늘 찾아가지 않아도 할머니랑 사모님께서 예원 별장으로 갔을 거야. 내가 본가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거든.”고은서는 순간 의아했다. 그녀는 전미자가 박지연이 본가까지 찾아간 덕분에 예원 별장으로 온 거라고 생각했었다. 전에 이미 찾아가리라고 마음먹었다고는 미처 생각도 못 했다.‘아줌마가 곽승재를 타이르다가 도무지 방법이 없어서 할머니를 찾아가신 건가? 이러고 보면 아줌마가 약속을 어긴 게 아니네. 며칠 쉬다가 직접 가서 감사하다고 인사해야겠어.’“지연아, 나 먼저 할아버지 집에 가서 쉬고 있을게. 시어머님 몸도 괜찮아지고 하면 우리 만나서 축하파티라도 열자.”“그래, 알겠어.”박지연이 답했다.고은서는 박지연과 통화를 마친 후 민시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아버지는 괜찮으셔? 아직도 북제에 있는 거야?]메시지가 발송된 지 몇 초도 되지 않아 민시후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고은서가 전
똑똑.곽현수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면서 말했다.“승재야, 내가 말하는 거 들었어?”곽승재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는 담배를 끄고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세요?”“할머니가 말씀하시길 고은서랑 이혼했다며?”곽현수가 물었다.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어루만졌다.“왜 이러는 거야? 멍 때리며 피우지 않던 담배도 피우고. 사내가 그까짓 이혼을 했다고 이렇게 기죽어 있어서 쓰겠니?”“지금 절 훈계하러 들어오신 거예요?”곽승재가 물었다.“너...”곽현수는 잠깐 말문이 막혀 하다가 이내 말을 이어갔다.“허 교수가 개발한 약품 대리권은 왜 유미한테 주지 않은 거야? 그리고 융자에 관한 일은 왜 유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맡긴 거지?”곽승재는 미간을 어루만지던 손을 내려놓고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답했다.“백 이사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이런 일을 책임질 여력이 되지 않아요. 이처럼 중요한 일을 맡기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요.”“뭐가 적절하지 않다는 거야? 융자에 관한 일을 고은서에게 맡기고 유미를 밀어내려고 그러는 거지?”곽현수는 불만만 점점 더 쌓여갔다. 그러나 곽승재는 부인하지 않고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듯 말했다.“아버지. 회사 일을 저한테 전적으로 맡기셨으면 저도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해 운영하도록 할 테니 제 결정에 간섭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곽승재, 너 지금 그 자리에 앉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아버지한테 무슨 말버릇이야?”곽현수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너 요즘 고은서 때문에 골탕을 먹은 게 한두 번이야? 심지어 GS그룹 주식까지 영향받게 했잖아. 내가 제때 귀국하고 이사회에서 네 편을 들어주지 않았으면 넌 지금 이 자리에 못 있어!”곽현수는 점점 더 흥분해 했다.“그런데 나한테 감사하기는커녕 내가 안배한 일까지 거역하려는 거야?”곽승재는 이마를 짚고 담담하게 말했다.“귀국하시지 않아도 이사회 주주들은 제가
폰을 들고 확인해 보니 육현석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아마 이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황 파악을 하려고 전화를 건 모양인 것 같았다.그러나 그녀는 육현석이 자신의 기쁨을 함께 공감해 줄 적합한 상대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그녀가 전화를 끊고 다시 자려고 할 때 육현석한테서 또 전화가 걸려왔다.‘웬 고집이래?’요즘 육현석의 태도가 꽤 마음에 들었던 고은서는 고민하다가 끝내는 전화를 받았다.“육현석 씨,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요?”수화기 너머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형수님, 형이랑 다퉜어요? 형이 오늘따라 좀 이상해 보여서 걱정되는데 혹시 형한테 전화 한 통만 걸어줄 수 있을까요?”‘아직 이혼한 사실을 모르는 건가?’“죄송하지만 저 곽승재랑 이혼했어요. 더는 곽승재 일로 저한테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저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니까요.”육현석은 고은서의 말에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이내 조용한 곳을 찾아 그녀에게 자세히 물었다.“형수님, 거짓말이죠? 이혼했다뇨? 형이 왜 형수님이랑 이혼해요? 지금 장난치는 거죠?”육현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복해서 물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요 며칠 두 사람에 관한 기사를 보았었다. 그러나 기사의 여론이 곽승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걸 확인한 그는 이내 기사를 퍼뜨린 사람이 고은서라는 걸 깨달았다.그 누구의 편을 들어도 합당하지 않은 타이밍이었기에 그는 그저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기사가 올라온 지 삼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두 사람이 벌써 이혼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제가 이런 일로 장난칠 이유가 없잖아요. 그리고 저 이젠 육현석 씨 형수가 아니니까 호칭을 바꿔줬으면 좋겠어요. 이후로 은서 씨라고 편하게 불러주세요.”“형...”육현석은 차마 은서 씨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왜 갑자기 이혼한 거예요? 설마 배 속의 아이 때문이에요?”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고은서의 아이를 강제로 없애려고 한
현재 낯선 여자의 터치도 거절하지 않는 걸 보아서는 곽승재가 큰 충격을 받은 게 확실했다.육현석은 한숨을 내쉬었다,평소에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마다 약간 밉상이긴 했지만 막상 상처를 받고도 웃으면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그를 보게 되니 육현석도 따라 기분이 시원찮았다.“가, 다 저리 나가. 다 옆 방에서 가서 놀아. 비용은 내가 낼게.”육현석은 룸에 있는 사람들을 밖으로 내쫓기 시작했다. 그는 곽승재 옆에 있는 여자를 강제로 밀어내고 그의 옆에 앉았다.그 여자는 불만스럽다는 눈길로 육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곽 대표님도 가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는데 당신이 뭐라고 날 쫓아요?”“가라면 갈 것이지 뭔 쓸데없는 소리가 그렇게 많아.”육현석은 성가시다는 듯 그녀를 계속 내쫓으려 했다.“그리고 헛된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야. 우리 형 아내가 있는 몸이라고!”“누가 아내가 있다고 그래!”여자가 입을 열기도 전에 곽승재가 먼저 불쾌하다는 듯 육현석을 반박했다.그런데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취했는지 그는 평소와 달리 말을 또박또박 하지 못했다.“이리 와서 계속 마셔!”곽승재는 여자를 향해 손짓했다.그의 말을 들은 여자의 얼굴에는 순간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이내 곽승재의 곁에 다가가 그의 팔에 딱 붙을 정도로 가까이 앉았다.육현석은 순간 다급해 났다.“똑바로 앉아, 뼈 없는 사람처럼 앉지 말고!”“대체 왜 그래요? 대표님께서 같이 술 마시자고 해서 앉은 건데 뭐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왜 자꾸 절 쫓아내지 못해 안달이세요?”여자가 그를 반박했다.“너...”“술 마실 생각 없으면 나가. 분위기 망치지 말고.”곽승재가 차가운 눈길로 육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여자도 육현석을 향해 콧방귀를 뀌고는 계속해서 곽승재에게 술을 따랐다.“...”육현석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나도 이젠 지친다. 형이 알아서 하겠지 뭐.’육현석은 그와 멀리 떨어진 자리를 찾아 앉고서는 홀로 술을 마시면서 여자와 함께 끊임없이 술을 들이켜는 그를 바라
노을의 황금빛이 호수 위로 내려앉으며 물결이 반짝이는 보석처럼 빛났다.장난기가 발동한 고은서가 두 손을 벋어 저 멀리 호수 위의 부서진 다이아몬드 조각과 햇살을 한데 모아 손안에 담으려는 듯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차에서 내리던 민시후가 그 장면을 보게 되었다.고은서는 고풍스러운 회랑 위에 흰색 니트에 연한 색의 롱스커트를 입고 긴 머리는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가녀린 손을 뻗으며 무언가를 잡으려는 그녀의 모습은 저녁노을이 드리운 호수 풍경과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주황빛 석양이 그녀의 얼굴과 머리카락까지 물들여 그녀의 존재 자체가 빛을 머금은 듯한 아름다움을 뿜어냈다.그 순간 민시후는 먼 훗날 이 장면을 떠올리더라도 여전히 설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민시후, 거기서 뭐 해?”앞쪽에서 들려온 고은서의 청아한 목소리에 민시후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로 걸어갔다.“미안, 늦었지.”“괜찮아, 나도 방금 왔어.”“은서야, 손을 뻗어서 잡은 게 뭐야? 나도 좀 나눠 줄래?”고은서는 민시후의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그 눈빛을 보고 자신이 아까 허공에 손을 뻗었던 모습을 떠올렸다.순간 얼굴이 뜨거워진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눈을 흘겼다.“공기야. 줄까?”그러자 민시후는 두 손을 공손히 내밀며 진지하게 말했다.“네가 주는 거라면 뭐든 좋아.”고은서는 어이없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시후야, 은서 씨?”그 순간 회랑 너머에서 익숙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가 고개를 돌려보자 송민준의 옆에는 강한 위압감을 풍기는 민시현도 함께 있었다.그들 뒤로는 레스토랑 직원들과 비서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따라오고 있었다.고은서가 반응할 틈도 없이 민시후는 재빠르게 고은서를 등 뒤로 감쌌다.“여긴 무슨 일이야?”민시후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졌다.‘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레스토랑으로 예약할걸. 좋던 분위기 다 깨졌네.’민시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송민준이 다른 사람에게 먼저 자리를 뜨라고 제스처를 보낸 뒤
서연정의 질문에 고은서는 왠지 모르게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어제 그 남자는 분명 서연정을 향해 호감을 보였고 당시 고은서는 곽승재가 그 장면을 보고 불필요한 오해를 할까 봐 무의식적으로 그 사실을 숨겼다.“죄송해요, 어머니.”서연정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널 탓하는 건 아니야. 넌 착한 아이니 나랑 승재의 관계가 썩 좋지 않다는 걸 알고 혹시 불필요한 오해로 갈등이 깊어질까 봐 말하지 않은 거겠지.”서연정이 말을 이었다.“어제 그 친구와는 꽤 오랜 인연이 있어. 예전에 Y 국에서 일했는데 최근에야 귀국했어.”서연정이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고은서는 그 남자가 서연정 때문에 귀국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걸 눈치챘다.담담하면서도 온화한 서연정의 표정을 바라보며 고은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어머니, 그분 혹시 어머니 좋아하시나요?”서연정은 가볍게 웃었다.“우리 나이쯤 되면 좋아한다는 감정에 그리 열정적이거나 충동적이지 않아. 그 사람은 젊을 때 우리 아버지의 신세를 졌고 오랜 세월 나를 가족처럼 생각해 왔어.”고은서는 순간 곽현수도 알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또한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게 그 사람 때문인지도 묻고 싶었지만 고은서는 궁금증을 꾹 참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서연정은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랑 승재 아버지 사이의 문제는 다른 사람이랑 상관없어.”고은서도 두 사람의 갈등이 단순한 오해나 제삼자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라 훨씬 깊고 복잡한 문제 같았다.그때 곽승연이 다가오며 둘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끝났다.전시회 관람을 마치자 이미 오후였다.서연정이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제안할 때 마침 고은서의 전화가 울렸다.민시후에게서 온 연락이었다.“은서야, 나 출장 끝나고 돌아왔어.”민시후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그리고 네게 전할 소식이 하나 있어.”“무슨 소식인데?”고은서가 묻자 민시후는 장난스럽게 말했다.“궁금하면 시간 내서 이 도련님이랑 밥이
그 말에 서연정의 얼굴에서 모든 감정이 사라졌고 담담하고 냉랭한 표정으로 위층으로 올라갔다....다음 날 일요일 아침 고은서는 서연정의 연락을 받았다.그녀는 해성에서 그림 전시회가 열리는데 곽승연을 데려가 보고 싶다며 함께 갈 시간이 있는지 물어왔다.서연정이 곽승연을 데리고 호원 저택으로 옮긴 이후로 고은서는 두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게다가 서연정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해 보여서 고은서는 함께 가기로 했다.고은서가 전시장에 도착했을 때 서연정과 곽승연은 이미 와 있었다.“언니!”오랜만에 만난 곽승연은 그녀를 보자 기뻐했다.“승연아, 어머니.”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언니! 이거 제가 그린 그림인데 선물로 줄게요.”곽승연은 그림을 내밀었다.고은서가 받아 보니 그것은 지난번 본가에서 자신이 드럼을 치던 장면을 그린 것이었다.비록 단순한 그림이었지만 당당한 그녀의 자태가 잘 표현되어 있었다.“고마워, 승연아. 정말 잘 그렸네. 너무 마음에 들어.”고은서는 그림을 소중히 가방에 넣었다.“갖고 싶은 선물 있으면 언니가 사줄게.”곽승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그냥 빨리 건강을 회복해서 언니처럼 내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고은서는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승연아, 금방 좋아질 거야. 우리 들어가서 전시회 보자.”그림을 좋아하는 곽승연은 난해해 보이는 예술 작품도 깊이 빠져들어 감상했다.그녀가 몰입해서 감상하는 동안 고은서와 서연정은 휴게 공간에 있는 작은 카페로 향했다.“은서야, 승재 통해 보낸 캔들 잘 받았어. 고마워.”서연정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네가 요즘 바쁜 것 같아서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어.”고은서도 웃으며 답했다.“어머니, 방해라니요. 그런 말씀 마세요.”두 사람이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커피가 나왔다.고은서는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은서야, 혹시 지난번 고양이 행사에 갔었어?”서연정이 갑자기 묻자 고은서는
고은서의 제안에 여시은이 반응하기도 전에 곽승재가 차갑게 말했다.“미안하지만 바쁩니다.”여시은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곽 대표님, 한가해도 저랑 가지 않을 거잖아요! 곽 대표님 안목을 믿을 수가 있어야죠.”말을 마친 여시은이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은서야, 곽 대표님이 고양이 돌보게 두고 넌 나랑 같이 가자. 다른 고양이한테 정신 팔려서 쿠아를 소홀히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결국 고은서는 여시은과 함께 삼색 고양이를 보러 갔다.고양이는 귀여웠지만 쿠아는 그 고양이를 경계하며 가까이 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살짝 겁을 먹은 듯 보였다.“삼색 고양이는 고양이 세계의 미녀라 누구든 보면 좋아한다고 하던데 왜 쿠아는 싫어하는 거지?”여시은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쿠아가 아직 이 환경에 적응을 못 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그러네. 그럼 그냥 쿠아를 혼자 두는 게 낫겠다. 괜히 다른 고양이를 들여서 외롭다고 느끼게 만들면 안 되잖아.”여시은은 그렇게 말하며 쿠아의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녀의 애틋한 표정을 보며 고은서는 문득 자신의 판단이 맞는지 혼란스러워졌다.‘여시은이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일까?’일부러 SNS에 사진을 올려 곽승재를 현장으로 불러내 그 앞에서 친밀하게 행동했지만 정작 여시은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정말 곽승재에게 관심이 없는 걸까? 아니면 연기력이 뛰어난 걸까?’고은서는 그 진위를 가늠할 수 없었다.오후가 되어서야 일정이 마무리되었고 여시은은 곽승재에게 고은서를 데려다 줄 것을 부탁하며 그녀는 쿠아를 데리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퀸은 한없이 애교를 부렸다.고은서가 안고 있으면 자꾸만 얼굴에 몸을 부비며 애교를 부리는 탓에 마음이 무너져내린 고은서는 결국 곽승재의 차를 타기로 했다.가는 길에 고은서는 무심하게 곽승연의 근황을 물었다.‘호원 저택에 가 있긴 하지만 어머니가 자주 본가로 데리고 나와. 게다가 심리 상담도 받고 아로마 테라피도 병행하는 중이라 상태는 나쁘지 않아.’
고은서는 어릴 적 드럼을 배우면서 자신만의 멋진 별명을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퀸이었다.예전에 곽승재를 쫓아다닐 때 재미 삼아 이 이야기를 그에게 한 적이 있었다.당시 곽승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었다.‘갑자기 그 얘기를 꺼낸 걸 보면 기억하는 걸까?’그가 기억하든 말든 고은서는 굳이 확인할 생각이 없었다.“마음대로 해.”어차피 그 별명은 중2병 시절에 장난으로 붙인 거였고 이제는 고양이 이름으로 써도 나쁘지 않았다.고은서는 시선을 거두려다 뜻밖에도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단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서연정이었다.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그녀는 곽승연을 데리고 나오는 대신 오십 대쯤 되어 보이는 무테안경을 쓴 남자와 함께하고 있었다.남자는 세련되게 차려입었고 성숙한 남성 특유의 차분함이 느껴졌다.우연히 마주친 건지 일부러 약속을 잡은 건지 남자의 표정에는 은근한 기쁨이 묻어나 있었다.서연정이 등을 돌린 채 서 있어서 그녀의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여자의 직감이 그 남자는 서연정의 구애자라고 말해주고 있었다.“왜 그래?”곽승재는 한참 동안 반응 없는 고은서를 보며 어디에 정신이 팔린 건지 궁금해했다.“곽승재!”곽승재가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고은서가 그를 불러 세웠다.곽승재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고은서는 두어 번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얼른 핑계를 지어냈다.“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아. 좀 봐줄래?”그러면서 그녀는 동그랗게 눈을 크게 뜨고 곽승재에게 다가섰다.“어느 쪽?”“오른쪽!”곽승재는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그 안에 물결이 일렁이는 듯했고 햇빛이 비치는 그녀의 하얀 얼굴은 가느다란 솜털까지 선명하게 드러냈다.연분홍빛 입술도 살짝 벌어져 있었는데 그 모습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곽승재는 갑자기 목이 바짝 말랐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키다 결국 참지 못하고 고은서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촉촉한 감촉이 입술에 닿자 고은서는 깜짝 놀라 곽승재를
생각을 마친 고은서는 작게 숨을 들이마시고 품에 안고 있던 아기 고양이가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깨물어 놀란 척하며 곽승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곽승재는 재빠르게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그녀의 팔 부상이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걸 신경 쓰는 듯 먼저 팔을 지탱했다가 곧 허리 쪽으로 손을 옮겼다.옷을 사이에 두고도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느껴졌다.코끝에는 익숙한 삼나무 향이 은은하게 스쳤다.고은서는 불쾌감을 참아내며 그릴 밀쳐내는 대신 오히려 그의 품에서 살짝 고개를 돌려 뒤쪽을 확인했다.하지만 여시은은 쿠아에게만 신경을 쓰며 조용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을 뿐 두 사람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아, 망했다. 괜히 연기했네. 완전 헛수고잖아.”그 순간 곽승재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손은 괜찮아?”그는 그녀의 손을 직접 잡아 올리며 상태를 확인했다.고은서는 자연스럽게 손을 빼내며 한 걸음 물러섰다.“괜찮아. 아기 고양이라 이가 아직 덜 자라서 가볍게 물렸을 뿐이야.”그렇게 말한 뒤 고은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쪽으로 걸어갔다.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온기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손끝을 살짝 문지르고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무대 쪽에는 행사 주최 측뿐만 아니라 고양이 사육 전문가들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곽승재는 워낙 유명한 인물인지라 이런 자리에서도 그를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한편 고은서는 사육 전문가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쿠아가 심하게 낯을 가리는 문제가 떠올라 전문가에게 문의했다.전문가는 차분히 설명했다.“고양이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다쳤다면 종종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어요. 이럴 땐 장난감과 간식을 준비해 주고 주인이 충분히 함께 시간을 보내 주면 서서히 나아질 겁니다.”장난감과 간식은 여시은이 충분히 준비해 둔 것으로 보였고 함께 있는 시간도 많아 보였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이어갔다.“그런데 다친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깜짝 놀라거나 털을 세
행사는 공원에서 진행됐다.이미 무대가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는 다양한 게임 부스와 음료, 간식들이 마련되어 있었다.고양이 가방과 케이지 대여 서비스도 제공되고 있었다.고양이들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에서 고은서와 여시은은 쿠아를 안고 몇 장의 사진을 찍은 뒤 SNS에 게시했다.행사는 즐길 거리가 풍부하고 체계적이고 질서 있게 진행되고 있었다.고은서와 여시은은 고양이를 키우는 여러 친구와 교류하며 시간을 보냈다.또한 많은 고양이 아빠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다른 사람들에게 안긴 고양이 혹은 기품 있어 보이거나 귀여워 보이는 고양이에 비해 쿠아는 평범한 축에 속했다. 어쩌면 이 행사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 같았다.평범한 믹스묘인데 다쳐서 털도 완전히 자라지 않아 쿠아의 모습은 더욱 초라해 보였다.심지어 케이지에 있는 길고양이들보다도 평범해 보였다.하지만 여시은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피곤해 보이는 쿠아를 품에 안고 행사장을 둘러보았다.고은서는 그런 그녀를 따라다니면서도 은근히 주변을 살폈다.여시은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풀리기 전까지는 방심할 수 없었다.하지만 행사 내내 별다른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고 여시은은 그저 평소처럼 고양이를 구경하며 자연스럽게 행동했다.“어머나! 저 남자 좀 봐. 너무 잘생겼어.”그때 여자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키도 크고 손도 예술이다! 저 손으로 머리 한 번 쓰다듬어주면 진짜 행복할 것 같아.”“그러니까 말이야! 저 남자가 들고 있는 케이지 속 고양이가 되고 싶다.”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가자 곽승재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평소와 달리 짙은 회색 캐주얼 차림에 흰색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햇살이 그의 머리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아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다.그의 손에는 고양이 케이지가 들려 있었는데 안에는 얼마 전 그가 입양한 새하얀 아기 고양이가 있었다.차가운 이상의 남자와 작고 보들보들한 새끼 고양이의 조합
쿠아의 이마 한쪽에는 털이 빠져 있어 붉은 피부가 드러나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전에는 부드럽고 포동포동했던 쿠아는 이제 털도 엉망이 되고 마른 데다 전보다 겁도 더 많아져 있었다.고은서가 손을 뻗자 쿠아는 긴장한 나머지 털을 바짝 세우고 낮게 경고하는 소리를 냈다.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입을 벌릴 때 보니 이가 하나 빠져 있었고 예전에 다쳤던 입가에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그녀의 고양이는 아니었지만 고은서는 마음이 몹시 아팠다.“쿠아가 지난번에 떨어져 다친 이후로 점점 더 겁이 많아졌어요. 아무도 못 만지게 해요. 저도 좋아하는 간식을 많이 줘서야 겨우 가까이 갈 수 있었어요.”여시은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쿠아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래서 오늘은 바깥에 데리고 나와 기분 전환도 시키고 친구를 한 마리 골라주려고요. 그러면 덜 외롭지 않을까 해서요.”여시은의 손길에도 쿠아는 진정하지 못하고 계속 사납게 굴었다.여시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은서 씨, 일단 차에 타요. 차 안에 간식 있어요.”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차 안에서 쿠아에게 간식을 줘도 진정되지 않았고 계속 뒷자리로 물러나며 발톱을 날카롭게 세웠다.보다 못한 고은서가 말했다.“시은 씨, 제가 쿠아를 안고 있을 테니 직접 먹여볼래요?”여시은은 흔쾌히 수락했다.“좋아요.”쿠아를 조심스레 안아 무릎에 올릴 때 보니 쿠아는 예상보다 훨씬 가벼웠다.쿠아의 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자 쿠아는 서서히 진정했고 한참 지나자 피곤했는지 눈도 감아버렸다.“은서 씨는 정말 인기가 많네요. 구애자도 많은데 쿠아까지 은서 씨를 좋아하네요.”여시은이 웃으며 말했다.고은서는 쿠아를 계속 쓰다듬으며 무심히 말했다.“시은 씨도 인기가 많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미 좋아하시는 분이 있으셔서 사람에게 신경을 안 쓰는 것뿐이겠죠.”여시은은 한순간 멍하니 있더니 이내 깔깔 웃었다.“은서 씨, 제가 했던 농담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저 좋아하는 사람 같은 거 없어요. 그때 은서
“어떻게 알았어?”민시후가 조금 우쭐해하며 말을 이었다.“설마 내 일정 몰래 캐고 다니는 거야? 몰래 하지 않아도 돼. 비서에게 매일 일정을 너한테 보내라고 할게.”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았다.“며칠 전 진 비서가 나한테 전화한 거 잊은 거야? 네가 하루하루 더 바빠져서 토요일에도 출장을 간다고 하더라.”“진 비서가 그런 것까지 너한테 말했어?”민시후는 불만스러운 듯했다.고은서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네가 따로 시킨 게 아니라면 나한테 연락할 리가 있겠어?”들킨 민시후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ㄴ“나는 그렇게 자세히 말하라고 하진 않았어. 그냥 내가 빈둥거리는 게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만 전하라고 했다고.”고은서는 약간 야윈 듯한 민시후의 얼굴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넌 분명히 성공할 거야.”“은서야, 네가 그런 표정으로 나한테 얘기하면 나 발이 안 떨어져.”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그 후 이틀 동안 고은서는 게임 회사 프로젝트를 챙기는 한편 동료들과 다른 실현 가능한 프로젝트들도 논의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회사에 운전기사 두 명을 고용했는데 두 사람은 운전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필요할 경우 보디가드 역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고은서가 게임 회사 쪽에 도착해 보니 골목과 아파트 단지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고 보안 수준이 대폭 향상되어 있었다.“어떤 사람이 사비로 설치한 거예요.”게임 회사 직원이 설명했다.“이 낡은 아파트에는 관리자조차 없어서 CCTV 달아달라는 신청도 여러 번 했지만 계속 반려됐거든요. 다행히 이번에 누군가가 사비를 들여 설치해 줬어요. 아니었으면 기대도 못 했겠죠.”“사비를 들여서 이런 공익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요?”고은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어떤 그룹 대표라고 하던데요? 성이 뭐더라, 곽이었나? 고였나? 그런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선행을 해도 이름을 남기거나 과시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더 신기해요.”고은서는 순간 멍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