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다시 고은서를 안아 위층으로 향했다.고은서를 침대에 내려놓자 의사가 다가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이미 그녀의 병력을 확인한 듯 간호사는 차분하게 그녀에게 수액을 놓았다.고은서가 수액을 맞는 동안 의사와 간호사는 약을 정리하러 갔고 곽승재는 여전히 바쁜지 밖에서 통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고은서가 침실을 둘러보자 침구류가 추가된 것을 제외하고는 그녀가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그녀가 두고 간 몇 개의 쿠션, 얇은 담요, 털 슬리퍼 등 잡동사니들은 그대로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사모님, 시장하시죠? 죽이랑 반찬, 국 준비했는데 조금 드셔보세요.”그때 쟁반을 든 이미숙이 다가왔다.조심스러워하는 이미숙이었지만 고은서는 그녀의 말투에서 자신의 복귀를 무척 반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은서는 화가 났지만 그 화를 이미숙에게 풀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아줌마. 하지만 아직 별로 입맛이 없네요. 그냥 놔두세요.”“사모님, 입맛이 없으시더라도 조금은 드셔야죠.”이미숙이 안타까워하며 거듭 권했다.“안 그래도 날씬하셨는데 지금은 더 마르셨어요.”이미숙의 호의에 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죽만 조금 먹을게요.”“네! 사모님!”이미숙이 곧 따뜻한 죽 한 그릇을 가져와 그녀에게 떠먹여 주었다.“사모님, 손이 불편하시니 제가 먹여드릴게요.”이미숙의 정성을 마다할 수 없었던 고은서는 거부하지 않고 그녀가 하려는 대로 내버려두었다.죽 한 그릇을 다 먹자 이미숙은 다시 한번 반찬을 권하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사모님, 식사를 잘하셔야 빨리 회복하시죠.”곽승재가 이미숙에게 그녀의 일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은서는 물어볼 기분도 아니었다.“아줌마. 나중에 제 핸드폰 어디 있는지 물어봐 주세요. 통화 좀 하고 싶네요.”민시후의 번호는 핸드폰에만 저장되어 있었다. 곽승재에게 억지로 안겨 끌려온 고은서는 제때 핸드폰을 챙길 수 없었다.‘사람
고은서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곽승재에게 던지며 말했다.“내가 누구를 찾든 무슨 상관이야! 내 핸드폰이나 돌려줘.”핸드폰은 곽승재의 몸을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곽승재가 떨어진 핸드폰을 잠시 바라보고 주워들었다.그는 고은서를 내려다보며 비웃듯 말했다.“왜? 민시후한테 연락하려고? 꿈도 꾸지 마. 새 핸드폰이 필요 없다면 여기서 조용히 몸이나 회복해. 밖에 나가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손해 보는 건 너뿐일 테니까.”싸늘하게 말을 마친 곽승재가 더 이상 고은서를 신경 쓰지 않고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곽승재! 미쳤으면 의사한테 진단이나 받아! 미쳐서 날 괴롭히지 말고!”고은서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문 닫히는 소리뿐이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고은서는 그대로 뒤로 넘어갈 것만 같았다.‘빌어먹을 곽승재! 민시후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날 여기로 데려왔지! 난 이혼하고 싶었을 뿐인데 일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그 후 이틀간, 고은서는 예원 별장에서 요양했다.의사의 세심한 관리와 이미숙의 보양식 덕분에 그녀의 몸은 많이 회복되었다.비록 아직 기력이 부족해서 격렬한 운동은 할 수 없었지만 기본적인 활동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그녀는 더 이상 수액할 필요도 없이 약만 복용하면 되었다.몸은 차츰 회복되었지만 고은서의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하고 초조해졌다.이틀 동안 그녀는 방향을 잃은 나침판처럼 외부와의 연락이 모두 차단된 채 답답하게 방에만 갇혀 있었다.그녀는 바깥 상황이 궁금했다.또한 서연정의 귀국 여부로 궁금했다.하지만 그녀에게는 핸드폰이 없었고 빌려줄 사람도 없었다.곽승재는 그날 문을 닫고 나간 뒤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별장에 사람들을 배치해 그녀가 밖에 나가지 못하게 단속했다.고은서는 그날 곽승재가 차에서 내리며 너무 이른 시기에 욕했다는 말을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곽승재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야! 나쁜 놈보다 더해! 정말 미친놈이야!’“사모님, 화내지 마세
더 이상 이미숙의 말을 듣기 싫었던 고은서가 그녀의 말을 끊으려고 한 순간, 이미숙의 핸드폰이 울렸다. 밖에 있는 경호원에게서 온 연락이었다.“지금 밖에 박지연 아가씨께서 사모님을 찾아오셨는데 아무리 말씀드려도 돌아가려고 하지 않으셔서 연락드렸습니다.”경호원이 말했다.“들여보내세요!”박지연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고은서는 이미숙의 핸드폰을 집어 들어 경호원에게 외쳤다.하지만 경호원은 망설였다.“그럼 제가 나갈게요!”말을 마친 고은서가 밖으로 나가려 하자 이미숙은 그녀의 앞을 막아서지는 못하고 조바심을 내며 뒤를 따라갔다.“사모님, 천천히 가세요. 너무 빠르세요!”고은서가 서둘러 별장 문 앞까지 나가자 정말 박지연이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은서야!”박지연이 고은서를 보자마자 들어오려 했지만 이준이 앞을 막아섰다.“누가 감히 지연이를 막으라고 했어요!”고은서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지연이를 못 들어오게 한다면 제가 나가겠어요. 알아서 하세요!”곽승재가 고은서는 신경 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이준이 한참을 망설이다 박지연의 앞에서 물러섰다.별장 안으로 들어온 박지연이 고은서의 손을 잡고 그녀를 위아래로 살폈다.“괜찮아? 전화는 왜 안 받아?”고은서는 이미숙을 집 안으로 들여보내고 박지연과 함께 온실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곽승재 그 미친놈이 내 핸드폰을 빼앗고 나가지도 못하게 했어.”고은서는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어쩐지... 며칠 동안 네 상황을 물으려고 곽승재한테 연락했는데 항상 비서가 받더라고. 네 상황을 알리기 싫었던 거네.”“병원에서 나온 날 너한테 연락했는데 핸드폰이 꺼져있더라?”고은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박지연이 답했다.“그날 병원에서 한 사람이랑 부딪히는 바람에 핸드폰이 망가져서 어제저녁에 새로 샀어.”비록 너무 공교로운 상황이었는지만 고은서는 더 이상 따질 겨를이 없었다.“민시후는 어때? 또 곽승재를 찾아가 시비 걸지는 않았겠지?”“그러진 않았을 거야.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영상 있어? 보여줘!”고은서가 다급히 물었다.박지연이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을 재생했다.영상에는 고국성이 제복을 입은 몇 명의 직원들에게 연행되는 장면이 찍혀있었다.그 뒤에는 울부짖고 있는 단은숙과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유성준이 서 있었다.“세금 관련 심각한 문제가 터졌대. 세무 쪽에서도 이미 상당한 증거를 확보했다고 하더라.”박지연이 말했다.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지난 생에 비록 MQ가 점차 쇠퇴했다고 해도 세금 문제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MQ에 정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면 백유미가 그걸 가만히 놔뒀을 리가 없는데...’이번 일은 십중팔구 곽승재가 개입한 것이 틀림없었다.“은서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박지연이 걱정스레 물었다.“곽승재와 관련 없다고 해도 네 삼촌 쪽 문제는 빨리 해결해야 해. 미룰수록 안 좋은 소문이 퍼지며 고씨 가문 명성에도 크게 피해줄 거야.”고은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조씨 가문의 사업은 불안정한 상태였는데 누군가가 이 일을 빌미로 MQ를 공격한다면 큰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컸다.“차라리 곽승재한테 사실을 얘기하고 도움을 청하는 게 어때? 이대로 서로 상처를 주다가는 끝도 없어. 두 사람 모두 만신창이가 될 거야.”박지연이 제안했지만 고은서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지금 곽승재에게 그의 아이였다고 말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거야. 오히려 고씨 가문과 민시후를 위해 거짓말한다고 생각하겠지.’고은서가 원하는 건 이혼해서 곽승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지 화해가 아니었다.잠시 생각을 하던 고은서가 결단을 내렸다.“지연아. 부탁 좀 해도 될까? 곽씨 가문 본가로 가서 할머니 좀 모셔 와줘.”박지연이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좋은 방법인 것 같네. 할머니는 항상 널 아끼셨으니 네 일을 모르는 체하시지 않을 거야. 곽승재도 할머니 말은 듣겠지.”고은서가 덧붙였다.“그리고 민시후에게도 연락해서 곽승재와 대립하지 말라고 전해줘.”“민시후 걱정까지 하
이미숙은 황급히 설명했다.“제가 사모님 개인적인 일을 캐묻는 게 아니라 도련님께서 물어보실까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예요.”고은서는 리클라이너에 다시 누우면서 말했다.“괜찮아요. 제가 지금 행패 부린다고 빨리 돌아오라고 전하세요.”“하지만...”이미숙은 편히 누워있는 고은서를 보며 약간 망설여졌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는 고은서가 행패 부린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곽승재에게 꾸지람이라도 받을까 봐 걱정되었다.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고은서가 말했다.“곽승재가 믿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진짜 행패 부릴 수 있는데, 한 번 해볼까요?”“...”이미숙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곽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전화를 끊고 뒤돌아봤을 때 고은서는 리클라이너에 누워 졸고 있었다.“사모님, 아무리 햇볕이 쨍쨍하다고 해도 여기서 주무시면 안 돼요. 감기 걸려요.”이미숙이 그녀를 걱정했다.고은서는 몸을 옆으로 돌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담요 하나 가져다주세요.”“네, 금방 가져다드릴게요.”그러나 이미숙이 담요를 가지고 다시 돌아왔을 때 고은서는 누워있는 대신 테라스에 있는 유리 가드 옆에 서 있었다.“사모님, 방금전까지 주무시려고 하셨잖아요. 볼 일이라도 생겼나요?”이미숙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아니에요.”고은서는 다시 리클라이너에 누웠다.십 분쯤 지났을 때, 밖에서 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이미숙은 내려다보며 확인하고는 고은서에게 알렸다.“도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지금 돌아온 걸 보아서는 아마 전화를 받자마자 돌아오신 것 같습니다.”그러나 이미숙과 달리 고은서는 아주 담담했다.“아주머니, 내려가서 곽승재 혼자 올라오라고 전하세요. 제가 따로 할 말이 있어서요.”이미숙은 전혀 의심하지 않고 내려갔다.별장으로 들어온 곽승재는 위층에서 내려오는 이미숙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고은서는 괜찮아요?”“사모님께선 별일 없으세요. 지금 테라스에서 햇볕 쪼임을 하고 계시는데 도련님께 따로 하실 말씀이 있다고 도련님보고 올라
분노와 한기로 가득 찬 곽승재의 눈빛을 보며 고은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이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박지연은 아이에 관한 사실을 곽승재에게 알려주면 모든 일이 좋게 끝날 것이라고 믿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곽승재, 우리 그냥 이혼하자. 더는 끌지 말고.”고은서는 다리 하나를 가드 밖으로 내밀면서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뛰어내릴 거야.”“고은서, 지금 또 뛰어내리겠다면서 날 협박하는 거야?”이를 악물고 말하는 곽승재의 얼굴빛은 섬뜩할 정도로 어두웠다. 심지어 그로부터 차가운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네가 뛰어내리면 민시후도 마찬가지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내렸다.“스읍!”그러나 뛰어내리는 순간 고은서는 팔로부터 오는 고통을 느꼈다. 다름이 아니라 곽승재가 뛰어와 그녀를 잡았던 것이다.하지만 관성 때문에 고은서는 여전히 밑으로 떨어지려고 했다. 곽승재는 허리 굽혀 그녀의 다른 한쪽 손까지 잡고 화를 내며 말했다.“손 놓지 말고 꽉 잡아!”반쯤 거의 떨어지려고 하는 고은서의 귓가에는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자신을 잡고 있는 곽승재를 보며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전에 그의 사랑과 관심을 얻으려고 이 층에서 뛰어내린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또다시 테라스에서 뛰어내리게 될 줄은 그녀 자신도 생각 못 했다.‘이 결혼을 강구한 대가를 치르는 셈이네.’“널 끌어올릴 테니까 내 손 꽉 잡아!”곽승재의 목소리를 들은 고은서는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아마 거꾸로 봐서였을까, 고은서는 그의 눈빛으로부터 분노뿐만이 아니라 조급함도 보아낼 수 있었다.그녀가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걱정하는 듯했다.그러나 고은서는 중력 때문에 팔이 점점 더 아파왔고 눈도 깔깔해져 곽승재의 모습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곽승재의 손을
고은서가 깨어났을 땐 이미 침실 안이었다.고준석과 오춘식이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는데 백발이 성성한 고준석은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근심 걱정으로 가득 찬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많이 피곤해 보였다.오춘식은 그에게 약과 물을 챙겨다 주면서 그를 달랬다.“어르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께서 너무 흥분하는 바람에 정신을 잃은 거라고 했으니 괜찮을 거예요. 곧 깨어날 겁니다. 그리고 어르신도 몸 주의하셔야죠. 방금전처럼 은서한테 뛰어가시다가 넘어지기라도 하시면 어쩌려고 그러세요.”“나 그렇게 쉽게 넘어질 사람이 아니야.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고준석은 약을 건네받고 삼키면서 말했다.방금전 화단으로 떨어질 때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고준석의 모습과 그의 고함소리를 떠올린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코가 찡해 나더니 눈물을 흘렸다.“은서야, 깼어?”눈을 뜬 고은서를 발견한 오춘식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소리를 들은 고준석도 이내 고은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고준석은 정신을 차린 그녀를 보자마자 순간 얼굴빛이 환해졌다.“은서야, 괜찮아? 어디 아픈 곳은 없어?”“할아버지...”고은서는 자신을 걱정하는 고준석을 바라보더니 순간 울먹이면서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울지마, 울지 마. 할아버지 여기 있어.”고준석은 눈물을 흘리는 고은서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면서 그녀를 달랬다.“이 계집애야, 힘든 일이 있으면 할아버지한테 말했어야지. 이런 위험한 행동은 이번이 마지막이야, 알겠어? 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할아버지는 어쩌라는 거야?”“할아버지, 미안해요. 또 걱정하게 만들어서 정말 미안해요...”고은서는 흐느끼면서 말했다.“괜찮아, 할아버지한테 뭐가 미안할 게 있다고...”고준석도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그까짓 이혼 할아버지가 지지해줄게. 다른 건 중요치 않아. 그저 은서 네가 건강하고 무사하면 돼.”고준석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항상 고은서 편이었다.
“고은서, 모든 일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는 이상 이혼은 절대 동의 못 해.”“곽승재!”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화내려고 했다.“이놈의 자식!”전미자는 지팡이로 곽승재를 내리치며 호통했다.“아직도 계속 은서를 화나게 할 예정이야? 네가 은서를 어느 궁지까지 몰아갔으면 은서가 저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겠어?”곽승재는 입술을 꽉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은서야, 승재랑 얘기 한 번 더 나눠보는 건 어떻니?”전미자가 고은서에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할머니가 네 시어머니랑 여기까지 온 게 다 너희 두 사람 이혼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서야. 네가 무슨 결정을 내리든 우리는 다 널 지지할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은서야, 얘기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할아버지는 더는 네가 속상해하는 모습을 못 보겠어.”고준석이 말했다.고은서는 순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누군가가 내 편을 들어준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할아버지, 저 곽승재랑 얘기 나눠볼게요.”고은서는 전미자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곽승재가 이혼하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이상 그 누구도 그의 생각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고준석은 당연하게도 고은서의 선택을 존중했다.“그럼 할아버지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네.”어른들이 밖으로 나간 후 곽승재는 고은서 곁으로 다가갔다.고은서는 그제서야 그의 옷에 진흙 자국이 있는 걸 발견했다. 심지어 다치기라도 했는지 걸으면서 눈에 띄게 미간을 찌푸리곤 했다. 그러나 다 그녀랑 상관없는 일이었다.고은서는 차가운 눈길로 곽승재를 바라보며 물었다.“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아까 그 아이가 내 아이라고 했었잖아. 사실이야?”조명 때문인지 곧게 서 있는 그의 이목구비가 더 뚜렷해 보였다. 그의 눈에서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이고 있는 듯했다.고은서는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계속 물어본다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 내가 무슨 답을 하든 당신은 믿지 않을 테니까.”“고은서, 나는 네가 하는 말이 어디까지가
“당연히 되지!”민시후가 이내 좋아하면서 답했다.“손에 있는 일을 다 끝내자마자 해성으로 돌아갈게.”“...”어이가 없어진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화를 끊은 후 그녀는 박지연한테 같이 밥 먹자고 연락했다.그러나 박지연이 처리할 일이 있다고 거절하는 바람에 다음에 다시 약속 잡기로 했다.박지연은 오늘 온범준이 할 얘기가 있다고 조수연 병실로 올 수 없냐고 하는 전화를 받았다.“할 말은 이혼하기 전에 이미 다 한 거로 알고 있는데요. 저는 그쪽이랑 할 얘기가 더는 없는데요.”박지연이 거절했다.그러자 온범준이 이레 병원 원장이 온승준이 두 병원을 바삐 오가는 걸 보고 조수연을 이레 병원으로 옮겨주겠다고 얘기했다고 말했다.박지연은 이내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직접 만나러 가든지 혹은 이레 병원에서 만나든지 두 가지 선택뿐이었다.박지연은 당연하게도 직접 만나러 가는 걸 선택했다.그녀는 가기 전에 온승준한테 연락했는데 수술 중인지 전화를 받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문자를 남기고 조수연이 있는 병원으로 홀로 갔다.병실로 들어가기 전에 박지연은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여러 번 한 다음 허리를 곧게 펴고 아주 떳떳한 자태로 걸어 들어갔다.그러나 예상 밖으로 온범준과 조수연은 전처럼 그녀를 향해 비아냥거리지 않았다.“지연이 왔니?”온범준이 아주 평온한 말투로 먼저 인사했다.이를 본 박지연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온범준은 수많은 제자를 아래에 둔 교수로서 뼛속까지 오만함으로 차 넘치는 사람이었다.이혼하기 전에 조수연처럼 그녀를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항시 엄숙한 표정으로 그녀를 깔보는 자태를 하고 있었다.그러나 오늘따라 자존심을 내려놓고 그녀를 향해 먼저 인사를 한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아무리 그래도 어른인데 인사하면 받아줘야 하는 거 아니야?”조수연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저를 왜 찾으신 거죠?”박지연도 똑같은 말투로 되물었다.조수연은 박지연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온범준과 오늘 절대 화를 내
고은서는 곽승재의 좋지 못한 안색을 무시한 채 담담하게 말했다.“여씨 가문에서 결혼 제안을 동의했다는 건 그만큼 당신이 마음에 들었다는 거겠지. 그리고 당신 아버지도 여시은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던데. 두 집안의 동의를 다 거친 결혼이라면 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정말 여씨 가문을 괜찮다고 생각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아니면 얼른 나한테서 벗어나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함정으로 가득 한 물음이었지만 고은서는 깊이 따지고 싶지 않았다.“둘 다야.”곽승재의 눈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고은서, 내가 너랑 민시후 사이를 방해할까 봐 그러는 거야?”민시후까지 나온 이상 더 말해 보았자 일만 커질 뿐, 고은서는 너무 피곤한 탓에 곽승재와 별로 다투고 싶지 않았다.“나 먼저 올라갈게.”그녀는 담담하게 한 마디만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다.곽승재는 묵묵히 고은서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과거의 고은서라면 누군가 그에게 접근하려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GS그룹으로 달려가 그 사람을 어떻게서든 멀리 쫓아내려고 난동을 부렸을 것이다.‘그런데 왜 지금은 도리어 날 결혼하라고 달래는 거지? 심지어 아무렇지 않아 보여. 방금전 본가에서는 나를 걱정하며 끌어당기기까지 했잖아. 그리고 내 손을 뿌리치는 대신 순순히 내 품에 안겼었잖아.’그러나 곽승재는 자기 생각을 입 밖에 내는 순간 고은서가 모든 걸 부인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차마 입을 뗄 용기가 나지 않았다....며칠 후.고은서는 직원들과 제인 제약 프로젝트에 관한 일들을 의논하고 중요한 이메일 여러 개를 처리한 후 여시은 집들이 선물을 사러 갔다.‘집들이인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지.’그녀는 유명한 옥방에 가서 좋은 의미가 담긴 옥 장식품 하나를 샀다.그리고 그곳에서 정교하게 만든 영롱하고 귀엽게 생긴 옥토끼도 함께 구매했는데 곽승연에게 선물할 생각이었다.그녀가 결산을 마치고 나가려고 할 때 익숙한 사람 한 명
고은서는 곽승재의 품에 나오면서 고개를 저었다.“괜찮아.”곽승재는 품이 갑자기 허전해 나면서 약간 속상하긴 했으나 티 내지 않았다.“내려가자.”소란 소리를 들은 서연정과 전미자도 계단 쪽으로 다가왔다.“승재야, 무슨 일이니? 네 아버지랑 회사 일에 관한 얘기를 나눈다고 하더니 왜 갑자기 다투기 시작한 거야?”“의견이 맞지 않아서 말다툼 좀 한 것뿐이에요.”전미자한테 걱정 끼치기 싫었던 곽승재는 아주 간결하게 답했다.“어디 다친 곳은 없어?”서연정이 걱정하면서 물었다.“없어요.”곽승재는 약간 어색해하며 답하고는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먼저 은서를 데려다주고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나 차 가지고 왔어. 힘들게 데려다주지 않아도 돼. 할머니와 어머니랑 얘기 나눠.”고은서는 그와 거리를 두며 거절했다.“은서야, 시간도 늦었고 한데 네 차는 본가에 두고 그냥 승재 차에 가. 내일 기사한테 네 차를 가져다주라고 할게. 금방 아버지랑 싸웠는데 널 데려다주면서 바람이라도 쐬게 해.”전미자가 고은서를 달랬다.“걱정하지마. 나도 예원 별장으로 돌아갈 건데 그저 가는 김에 널 데려다주는 것뿐이야.”곽승재가 말하면서 먼저 밖으로 나갔다.“저 자식이. 고집 하나는 세 가지고.”전미자가 혀를 끌끌 차며 고은서에게 말했다.“은서야, 얼른 가 봐. 사실 승재도 네가 본가로 온 걸 이미 알고 있었어. 그런데 네가 꺼려할까 봐 참고 돌아오지 않았던 거야.”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미자와 서연정에게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곽승재는 이미 차를 문 앞에 세우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녀도 더는 고집부리지 않고 조수석에 올라탔다.그는 약속한 대로 가는 길에 그녀한테 말을 걸지 않고 운전만 했다.고은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차창에 기대어 휴식을 취했다.종일 바쁘게 보낸 탓인지 아니면 차 안의 노래가 너무 유유한 탓인지 그저 눈만 감고 휴식하려던 고은서는 어느새 진짜 잠들어버렸다.깨어났을 때 그녀는 은은한 설송향이 나는 검은 외
고은서는 순간 흠칫했다.‘곽승재랑 여시은을 결혼시키려는 거야? 그런데 아주 마땅한 일이긴 하지. 여씨 가문이 가지고 있는 힘과 배경으로 두 가문이 사돈을 맺게 되면 서로 아주 큰 이익을 얻게 될 거야.’“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해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오직 고은서뿐이에요.”곽승재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단순한 협력이라면 저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어요. 하지만 사돈을 맺으려 하거든 꿈 깨세요.”“곽승재, 너 지금 그게 무슨 태도야! 감히 나랑 대들어?”곽현수가 단단히 화난 모양이다.“사내애가 각종 기회를 이용해서 가문 기업을 더 크게 이끌어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종일 사랑에 빠져있다는 게 말이 돼? 대체 언제쯤 철이 들 거야?”“철이 든다는 게 아버지께서 제안하신 결혼을 받아들이는 건가요? 결혼을 무기로 이용하려 한다는 게 하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곽승재가 반박했다.“너!”곽현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젠 아버지까지 무시하려 드는 거야? 네가 백씨 부녀한테 한 짓들은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 줬잖아. 다 널 위해서 이러는 건데 왜 자꾸 나랑 맞서지 못해서 안달이나 하는 건데!”“정말 저를 위해서 생각하신다면 다신 저한테 아무와 결혼하라는 소리 하지 마세요.”곽승재의 목소리가 점점 더 차가워졌다.“아버지만 아니었으면 백유미가 왜 그렇게 겁도 없이 흉악 무독한 짓을 저질렀겠어요.”“내가 도와준 게 뭐 어때서! 네 승엽이 아저씨가 지금까지 날 위해 해준 일이 얼만데. 큰 공로는 없어도 고생만은 수없이 많이 했어. 내가 도와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진짜 아저씨만 도와주신 거예요?”곽승재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백유미를 해성으로 들이고 돈까지 주면서 저와 고은서 사이를 이간질하게 했잖아요. 대체 왜 그러신 거예요?”고은서도 곽현수가 왜 자신을 싫어하는지 왜 백유미를 도와 자신을 해치려 하는 건지 너무 궁금해서 이내 발걸음을 멈췄다.“고씨 가문이 뭐가 볼 데가 있다고. 그리고 고은서한테 별 감정도 없으면서
다행히도 넘어지진 않았지만 고은서는 순간 자신이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내가 굳이 숨바꼭질을 하나 이기겠다고 이럴 필요가 있나? 행여나 다치기라도 하면 완전 웃음거리가 되는 거잖아. 그래도 본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야.’고은서가 한숨을 내쉬면서 서랍을 닫으려고 할 때 서랍 안에 있던 나무 상자 하나가 떨어져 나왔는데 그 안에는 아주 익숙한 물건 하나가 있었다.보라색 크리스탈로 만든 반달 모양의 머리핀이었는데 그녀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머리핀 같은 액세서리를 하도 좋아해서 열여덟 살 생일 때 고준석이 여러 가지 크리스탈 머리핀들을 그녀에게 선물해주기 위해 특별히 디자이너를 찾기까지 했는데 그 머리핀들 중 하나인 것 같았다.그런데 이것저것 바꿔 쓰면서 잃어버린 것도 많았는데 특히 반달 모양의 액세서리는 이미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진 지 몇 년이 되었다.‘내 머리핀인가? 아니면 누가 똑같은 걸 사서 여기에 놔둔 건가? 어머니랑 할머니는 이런 색깔 모양의 액세서리를 별로 쓰지 않는데. 그리고 곽승연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 해외로 가는 바람에 이런 낡은 물건을 여기에 둘 리가 없고. 하인이 머리핀을 나무 상자에 넣어서 여기에 두었다는 건 더 불가능할 텐데.’호기심이 생긴 고은서가 머리핀을 들고 확인해 봤는데 끝부분에 대문자 Q라는 문양이 박혀 있었는데 당시 디자이너한테 특별히 부탁한 것이었다.‘진짜 내 머리핀이잖아.’“고은서 씨, 여기 계셨어요?”고은서가 한창 생각에 잠겨있을 때 하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승연이가 은서 씨를 찾고 있어요. 책상 아래 있는 작은 찬장 안에 숨으셨구나. 그래서 승연이가 찾지 못했던 거네요.”하인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은서 씨, 왜 그러세요? 뭘 보고 계시는 거예요?”‘본가에서 오랫동안 일 한 하인이라면 알지도.’고은서가 책상을 가리키며 물었다.“이 책상 주인이 누군지 아세요?”“도련님 책상인데요. 여기 있는 물건들이 대부분 다 도련님 물건들이에요. 어르신께서 버리기
이어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곽 회장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렸다.‘곽현수가 여긴 어쩐 일로 온 거지?’그녀는 본가에서 곽현수와 마주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그저 서연정과 사이가 안 좋아서 본가로 안 오나 하고 생각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언니, 우리 사진 찍자.”곽승연이 좋아하며 그녀를 불렀다.고은서는 곽승연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웃으면서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반 시간 후, 서연정이 곽승연에게 먹일 약과 물을 들고 정원으로 찾아왔다.곽승연은 별다른 불만 없이 약을 먹고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채 기뻐하며 고은서한테 함께 숨바꼭질을 놀자고 졸랐다.고은서는 곽승연이 이리도 유치한 유희를 놀자고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필경 그녀에게 있어서는 초등학교 때까지만 놀던 유희였으니까 말이다.“집에 있는 하인들이 승연이를 어린아이로 대하면서 함께 숨바꼭질을 한 적이 있는데 아마 재미를 들인 모양이야.”서연정이 대신 설명해줬다.고은서는 곽승연과 놀아주고 싶었지만 그보다 곽현수와 마주치면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서연정이 나긋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승연이 아빠는 어머니한테 불리워 가서 마주칠 일 없을 거야.”고은서는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본가 안으로 돌아갔을 때 서연정 말대로 곽현수와 전미자가 보이지 않았다.곽승연이 평소에 이 층에서 지내면서 이 층과 삼 층에서 많이 놀곤 해서 고은서는 그녀를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숨바꼭질을 할 방과 범위를 정한 다음 그들은 함께 게임을 할 하인 몇 명을 더 불렀다.“승연이를 너무 얕보지 마. 사람 찾는데 엄청 능해.”게임 시작 전에 서연정이 고은서에게 미리 말해줬다.고은서는 처음에 서연정의 말을 별로 새겨듣지 않았는데 곽승연한테 여러 번 잡힌 이후로 서연정이 그냥 해본 소리가 아니었다는 걸 믿게 되었다.승부욕이 생긴 고은서는 이번엔 확실하게 꽁꽁 숨겠다고 마음먹었다.이 층에 있는 방들
그러나 바로 그때, 서연정이 곽승연이 고은서를 보고싶어 한다면서 본가로 와줄 수 없냐면서 연락이 왔다.그날 이후로 곽승연의 상태가 좋았다가 나빴다 했는데 모처럼 자신을 만나고 싶다는 그녀를 거절할 리가 없었다.곽승재는 의외로 고은서가 제인 제약에서 나올 때까지 그녀한테 말을 걸지도 않았고 미팅이 끝난 이후로 그녀의 눈앞에 나타나지도 않았다.아직 시간이 많았기에 고은서는 송민아를 먼저 회사로 데려다주기로 했다.“고은서, 곽승재가 아직도 너한테 미련 남아 있어 하는 것 같던데. 그렇지 않고서야 제인 제약 같은 프로젝트에 직접 나설 필요가 없잖아.”송민아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냈다.“그래?”“그렇다니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앉아있으면서도 네가 발언하러 올라갈 때부터 너한테서 시선을 뗀 적이 없다니까. 엄청 미련 담긴 눈빛으로 널 바라보고 있었어. 엄숙한 자리만 아니었으면 동영상이라도 찍어서 민시후한테 보내주는 건데.”고은서는 어이없다는 눈길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두 사람 사이 안 좋은 거 알잖아. 그만 약 올려.”“약 올리다니? 민시후한테 약간의 압력을 주려는 것뿐이야. 그렇지 않으면 종일 자신밖에 모르면서 거만하게 군다니까. 잠깐만. 그러니까 너 지금 두 사람 사이가 안 좋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거야?”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에 함께 어머니 묘에 다녀왔어.”송민아는 멈칫하더니 자세를 바꾸며 등을 좌석에 붙이면서 말을 이어갔다.“아줌마가 거의 사십 세가 되어서 민시후를 낳아서 엄청 이뻐했거든. 아줌마가 돌아가셨을 때 나이가 어리긴 했지만 나도 장례식에 갔었어. 그리고 그곳에서 민시후가 슬퍼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전엔 누구한테도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어. 너한테 주동적으로 알려줬다는 건 널 신임하고 있다는 뜻일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장난스러운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너처럼 힘든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얘길 다 하고 그러는 거야?”송민아는 피식 웃으면서 답
응접실에 있는 곽승재를 본 송민아는 고은서를 힐끗 보았다.그러나 고은서는 그녀의 시선을 뒤로 한 채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민시후가 전에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직접 책임질 거라고 했는데 사실이었네.’곽승재는 제인 제약 응접실에서도 분망하게 주민기가 건네주는 서류들을 처리하고 있었다.“고 매니저님, 오셨어요? 회의실 이미 다 준비되었으니까 먼저 들어가 계세요.”제인 제약의 직원이 고은서한테 인사하며 말했다.곽승재도 고 매니저라는 소리에 고개를 들고 그녀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아직 근무 상태에 빠져 있어서인지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차가운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차마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모습이었다.고은서를 본 그의 눈빛이 조금이나마 녹아내리는 듯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 고 매니저님.”주민기가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다시 삼키고 제인 제약 직원을 따라 그녀를 고 매니저라고 불렀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송민아를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갔다.“고은서 씨!”문을 들어서려던 순간 여시은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고은서는 송민아를 먼저 회의실로 들여보내고 의아해하며 여시은을 향해 물었다.“시은 씨도 제인 제약 프로젝트에 참여했나요?”여시은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저 이런 방면에 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어요. 그저 아빠가 곧 GS그룹이랑 협력하게 되는데 미리 곽 대표님 곁에서 회사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해서 따라온 것뿐이에요.”여시은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저도 어쩔 수 없이 서류를 작성해서 곽 대표님한테 봐달라고 했는데 오후에 시간이 없으시다고 하는 바람에 직접 이곳으로 가져온 거예요.”‘민시후가 전에 여씨 가문이랑 GS그룹이 협력한다고 알려줬었는데 순리롭게 진행된 모양이네.’“곽승재 저기 있으니까 얼른 가봐요. 저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고은서가 웃으면서 말했다.“은서 씨, 혹시 토요일에 시간 되나요? 제가 해성에서 집을 마련해서 토요일에 집들이하려고 하는데 은서 씨도 초대하고
민시후는 진심 반 농담 반으로 말했다.“경고하는데 날 넘보지 마. 나 당신 매부가 될 생각 없어. 그리고 얼른 고은서한테 나랑 송민아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약혼도 그저 해본 소리라고 설명해줘.”“그만해.”고은서가 민시후를 쏘아보며 말했다.그녀는 단 한 번도 그와 송민아 사이를 의심한 적이 없었다.아마 송민아가 그에게 미련이 남아있을까 봐 이런 말을 하는 듯했다.민시후는 고은서의 꾸지람 소리에도 화내지 않고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알겠어. 네 말 들을게. 안 말하면 되지?”방금전까지만 해도 껄렁대던 그가 갑자기 처음 보는 온순한 모습으로 변하는 바람에 송민아와 송민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고은서도 할 말을 잃었다.저녁 식사는 예상 밖으로 평화롭게 끝났다.민시후는 시도 때도 없이 남친처럼 고은서에게 음식을 집어주었다.도중에 민시후는 손 씻으러 룸 안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고 송민아도 마침 웨이터를 부르러 밖으로 나가는 바람에 룸 안에 송민준과 고은서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송민준은 웃으면서 고은서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은서 씨, 시후가 여자애한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은 저도 처음이에요. 은서 씨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는 것 같네요.”고은서는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혹시 민아 때문에 지금까지 사귀지 않는 건가요?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민아가 내려놓겠다고 말한 이상 더는 시후한테 집착하지 않을 거예요. 비록 고집이 세긴 하지만 마음씨는 착한 애예요.”“민아 때문이 아니에요. 그저 민시후랑 더 깊이 알아가려고 그러는 거예요.”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마침 민시후가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두 사람의 대화는 중단되었다.“송 대표님, 요즘 해성에서 사업한다고 들었는데 이젠 해성으로 들어오려고 결정 내린 거야?”민시후가 자리에 앉으면서 물었다.“그저 괜찮은 프로젝트가 있어서 시도해보려 한 것뿐이야. 해성으로 들어오려거든 아직 너무 이르잖아.”송민준이 웃으면서 답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