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연이 서둘러 고은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곽승재가 막을 시간도 없이 너 찾으러 위로 올라갔어!”박지연이 불안한 마음에 덧붙였다.“은서야, 곽승재 씨 표정이 너무 안 좋았어. 제발 무리하지 마. 그 사람이랑 맞서지도 말고. 곧 올라갈게!”전화를 끊은 박지연은 엘리베이터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계단을 뛰어올랐다.병실에 있던 고은서가 핸드폰을 내려놓기도 전에 싸늘한 표정을 한 곽승재를 마주했다.“뭘 하려는 거야?”고은서는 경계심을 가지고 뒤로 물러나면서 침대 머리맡의 호출 버튼을 눌렀다.그 사이 곽승재가 긴 다리를 내뻗으며 그녀의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곽승재의 검은 눈동자는 차가운 빛을 내뿜었고 온몸에는 얼어붙을 듯한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모습이 여실히 느껴졌다.지난번 곽승재가 술에 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이후 고은서는 처음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난 곽승재의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었다.고은서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VIP 병실이라 그런지 아니면 이미 소문이 돌고 있어서 그런지 곧바로 한 간호사가 달려왔다.고은서는 구세주를 보듯 간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간호사님, 부탁이...”곽승재를 내보내달라고 말하기도 전에 곽승재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링거 빼주세요.”간호사는 차가운 기세에 눌려 잠시 멈칫하며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한 번 더 얘기해야 하나요?”곽승재의 싸늘한 시선이 간호사에게 닿자 간호사는 그제야 한기를 느끼며 병상 옆으로 다가가 고은서의 주삿바늘을 뽑기 시작했다.고은서의 불안감은 더 커졌다.그녀는 애써 불안한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곽승재,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아직 약도 다 들어가지 않았어.”곽승재는 별다른 말 없이 싸늘한 분위기를 내풍겼다.“너 진짜... 아!”고은서가 솜으로 바늘이 꽂혀있던 자리를 누르며 의도를 물으려고 한순간 몸이 가벼워졌다. 곽승재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린 것이다.간호사 역시 이 상황에 놀랐지만 곽승재의 강렬한 시선에 겁을 먹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안 그래도 박지연은 시부모님께 환영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만약 곽승재가 정말로 그녀의 시부모님을 끌어들인다면 그녀의 상황은 더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곽승재가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오는 이상 박지연도 더 이상 그를 막을 수 없었다.고은서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난 이 사람이랑 갈게. 넌 돌아가.”박지연이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먼저 말을 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는 괜찮아. 할머니를 봐서라도 날 어떻게 하진 않을 거야.”박지연은 그 말에 조금 근심을 덜었다.“알았어. 그럼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응.”그녀가 대답을 끝내자 곽승재는 곧바로 엘리베이터 문을 닫았다.고은서는 더 이상 저항하거나 소란 피우지 않고 차가운 눈으로 곽승재를 바라보며 물었다.“대체 날 어디로 데려가려고 그래?”곽승재는 그녀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도 그의 태도에 체념하며 눈을 감았다.병동 아래에 도착하자 기사가 준비하고 있었다.곽승재는 은서를 뒷자리에 앉힌 후 자신도 차에 올랐다.차 안에서 곽승재는 전화로 업무를 이어나가며 매우 바빠 보였다.고은서는 답답하고 화가 나 귀를 막고 구석에 웅크리며 불만을 드러냈다.곽승재는 그녀를 한 번 흘깃 쳐다보고는 통화를 멈추고 문자로 업무를 이어나갔다.약 30분 후, 차가 멈춰 섰다.눈을 뜬 고은서는 다른 병원에 도착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예원 별장이었다.“사모님, 드디어 돌아오셨네요.”인기척을 느낀 이미숙이 재빨리 달려 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사모님, 왜 이렇게 살도 빠지고 안색도 나빠지셨어요? 식사 잘 못 하신 거예요?”고은서는 이미숙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곽승재를 노려보았다.“이게 당신이 말한 조용히 쉴 수 있는 좋은 곳이야?”곽승재가 차에서 내려 그녀 곁으로 다가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는 차분히 답했다.“전문 의사와 간호사는 미리 대기시켜 뒀어. 여기보다 안전하고 조용한 곳은 없을 거야.”고은서가
곽승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다시 고은서를 안아 위층으로 향했다.고은서를 침대에 내려놓자 의사가 다가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이미 그녀의 병력을 확인한 듯 간호사는 차분하게 그녀에게 수액을 놓았다.고은서가 수액을 맞는 동안 의사와 간호사는 약을 정리하러 갔고 곽승재는 여전히 바쁜지 밖에서 통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고은서가 침실을 둘러보자 침구류가 추가된 것을 제외하고는 그녀가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그녀가 두고 간 몇 개의 쿠션, 얇은 담요, 털 슬리퍼 등 잡동사니들은 그대로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사모님, 시장하시죠? 죽이랑 반찬, 국 준비했는데 조금 드셔보세요.”그때 쟁반을 든 이미숙이 다가왔다.조심스러워하는 이미숙이었지만 고은서는 그녀의 말투에서 자신의 복귀를 무척 반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은서는 화가 났지만 그 화를 이미숙에게 풀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아줌마. 하지만 아직 별로 입맛이 없네요. 그냥 놔두세요.”“사모님, 입맛이 없으시더라도 조금은 드셔야죠.”이미숙이 안타까워하며 거듭 권했다.“안 그래도 날씬하셨는데 지금은 더 마르셨어요.”이미숙의 호의에 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죽만 조금 먹을게요.”“네! 사모님!”이미숙이 곧 따뜻한 죽 한 그릇을 가져와 그녀에게 떠먹여 주었다.“사모님, 손이 불편하시니 제가 먹여드릴게요.”이미숙의 정성을 마다할 수 없었던 고은서는 거부하지 않고 그녀가 하려는 대로 내버려두었다.죽 한 그릇을 다 먹자 이미숙은 다시 한번 반찬을 권하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사모님, 식사를 잘하셔야 빨리 회복하시죠.”곽승재가 이미숙에게 그녀의 일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은서는 물어볼 기분도 아니었다.“아줌마. 나중에 제 핸드폰 어디 있는지 물어봐 주세요. 통화 좀 하고 싶네요.”민시후의 번호는 핸드폰에만 저장되어 있었다. 곽승재에게 억지로 안겨 끌려온 고은서는 제때 핸드폰을 챙길 수 없었다.‘사람
고은서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곽승재에게 던지며 말했다.“내가 누구를 찾든 무슨 상관이야! 내 핸드폰이나 돌려줘.”핸드폰은 곽승재의 몸을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곽승재가 떨어진 핸드폰을 잠시 바라보고 주워들었다.그는 고은서를 내려다보며 비웃듯 말했다.“왜? 민시후한테 연락하려고? 꿈도 꾸지 마. 새 핸드폰이 필요 없다면 여기서 조용히 몸이나 회복해. 밖에 나가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손해 보는 건 너뿐일 테니까.”싸늘하게 말을 마친 곽승재가 더 이상 고은서를 신경 쓰지 않고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곽승재! 미쳤으면 의사한테 진단이나 받아! 미쳐서 날 괴롭히지 말고!”고은서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문 닫히는 소리뿐이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고은서는 그대로 뒤로 넘어갈 것만 같았다.‘빌어먹을 곽승재! 민시후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날 여기로 데려왔지! 난 이혼하고 싶었을 뿐인데 일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그 후 이틀간, 고은서는 예원 별장에서 요양했다.의사의 세심한 관리와 이미숙의 보양식 덕분에 그녀의 몸은 많이 회복되었다.비록 아직 기력이 부족해서 격렬한 운동은 할 수 없었지만 기본적인 활동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그녀는 더 이상 수액할 필요도 없이 약만 복용하면 되었다.몸은 차츰 회복되었지만 고은서의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하고 초조해졌다.이틀 동안 그녀는 방향을 잃은 나침판처럼 외부와의 연락이 모두 차단된 채 답답하게 방에만 갇혀 있었다.그녀는 바깥 상황이 궁금했다.또한 서연정의 귀국 여부로 궁금했다.하지만 그녀에게는 핸드폰이 없었고 빌려줄 사람도 없었다.곽승재는 그날 문을 닫고 나간 뒤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별장에 사람들을 배치해 그녀가 밖에 나가지 못하게 단속했다.고은서는 그날 곽승재가 차에서 내리며 너무 이른 시기에 욕했다는 말을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곽승재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야! 나쁜 놈보다 더해! 정말 미친놈이야!’“사모님, 화내지 마세
더 이상 이미숙의 말을 듣기 싫었던 고은서가 그녀의 말을 끊으려고 한 순간, 이미숙의 핸드폰이 울렸다. 밖에 있는 경호원에게서 온 연락이었다.“지금 밖에 박지연 아가씨께서 사모님을 찾아오셨는데 아무리 말씀드려도 돌아가려고 하지 않으셔서 연락드렸습니다.”경호원이 말했다.“들여보내세요!”박지연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고은서는 이미숙의 핸드폰을 집어 들어 경호원에게 외쳤다.하지만 경호원은 망설였다.“그럼 제가 나갈게요!”말을 마친 고은서가 밖으로 나가려 하자 이미숙은 그녀의 앞을 막아서지는 못하고 조바심을 내며 뒤를 따라갔다.“사모님, 천천히 가세요. 너무 빠르세요!”고은서가 서둘러 별장 문 앞까지 나가자 정말 박지연이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은서야!”박지연이 고은서를 보자마자 들어오려 했지만 이준이 앞을 막아섰다.“누가 감히 지연이를 막으라고 했어요!”고은서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지연이를 못 들어오게 한다면 제가 나가겠어요. 알아서 하세요!”곽승재가 고은서는 신경 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이준이 한참을 망설이다 박지연의 앞에서 물러섰다.별장 안으로 들어온 박지연이 고은서의 손을 잡고 그녀를 위아래로 살폈다.“괜찮아? 전화는 왜 안 받아?”고은서는 이미숙을 집 안으로 들여보내고 박지연과 함께 온실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곽승재 그 미친놈이 내 핸드폰을 빼앗고 나가지도 못하게 했어.”고은서는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어쩐지... 며칠 동안 네 상황을 물으려고 곽승재한테 연락했는데 항상 비서가 받더라고. 네 상황을 알리기 싫었던 거네.”“병원에서 나온 날 너한테 연락했는데 핸드폰이 꺼져있더라?”고은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박지연이 답했다.“그날 병원에서 한 사람이랑 부딪히는 바람에 핸드폰이 망가져서 어제저녁에 새로 샀어.”비록 너무 공교로운 상황이었는지만 고은서는 더 이상 따질 겨를이 없었다.“민시후는 어때? 또 곽승재를 찾아가 시비 걸지는 않았겠지?”“그러진 않았을 거야.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영상 있어? 보여줘!”고은서가 다급히 물었다.박지연이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을 재생했다.영상에는 고국성이 제복을 입은 몇 명의 직원들에게 연행되는 장면이 찍혀있었다.그 뒤에는 울부짖고 있는 단은숙과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유성준이 서 있었다.“세금 관련 심각한 문제가 터졌대. 세무 쪽에서도 이미 상당한 증거를 확보했다고 하더라.”박지연이 말했다.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지난 생에 비록 MQ가 점차 쇠퇴했다고 해도 세금 문제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MQ에 정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면 백유미가 그걸 가만히 놔뒀을 리가 없는데...’이번 일은 십중팔구 곽승재가 개입한 것이 틀림없었다.“은서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박지연이 걱정스레 물었다.“곽승재와 관련 없다고 해도 네 삼촌 쪽 문제는 빨리 해결해야 해. 미룰수록 안 좋은 소문이 퍼지며 고씨 가문 명성에도 크게 피해줄 거야.”고은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조씨 가문의 사업은 불안정한 상태였는데 누군가가 이 일을 빌미로 MQ를 공격한다면 큰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컸다.“차라리 곽승재한테 사실을 얘기하고 도움을 청하는 게 어때? 이대로 서로 상처를 주다가는 끝도 없어. 두 사람 모두 만신창이가 될 거야.”박지연이 제안했지만 고은서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지금 곽승재에게 그의 아이였다고 말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거야. 오히려 고씨 가문과 민시후를 위해 거짓말한다고 생각하겠지.’고은서가 원하는 건 이혼해서 곽승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지 화해가 아니었다.잠시 생각을 하던 고은서가 결단을 내렸다.“지연아. 부탁 좀 해도 될까? 곽씨 가문 본가로 가서 할머니 좀 모셔 와줘.”박지연이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좋은 방법인 것 같네. 할머니는 항상 널 아끼셨으니 네 일을 모르는 체하시지 않을 거야. 곽승재도 할머니 말은 듣겠지.”고은서가 덧붙였다.“그리고 민시후에게도 연락해서 곽승재와 대립하지 말라고 전해줘.”“민시후 걱정까지 하
이미숙은 황급히 설명했다.“제가 사모님 개인적인 일을 캐묻는 게 아니라 도련님께서 물어보실까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예요.”고은서는 리클라이너에 다시 누우면서 말했다.“괜찮아요. 제가 지금 행패 부린다고 빨리 돌아오라고 전하세요.”“하지만...”이미숙은 편히 누워있는 고은서를 보며 약간 망설여졌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는 고은서가 행패 부린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곽승재에게 꾸지람이라도 받을까 봐 걱정되었다.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고은서가 말했다.“곽승재가 믿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진짜 행패 부릴 수 있는데, 한 번 해볼까요?”“...”이미숙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곽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전화를 끊고 뒤돌아봤을 때 고은서는 리클라이너에 누워 졸고 있었다.“사모님, 아무리 햇볕이 쨍쨍하다고 해도 여기서 주무시면 안 돼요. 감기 걸려요.”이미숙이 그녀를 걱정했다.고은서는 몸을 옆으로 돌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담요 하나 가져다주세요.”“네, 금방 가져다드릴게요.”그러나 이미숙이 담요를 가지고 다시 돌아왔을 때 고은서는 누워있는 대신 테라스에 있는 유리 가드 옆에 서 있었다.“사모님, 방금전까지 주무시려고 하셨잖아요. 볼 일이라도 생겼나요?”이미숙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아니에요.”고은서는 다시 리클라이너에 누웠다.십 분쯤 지났을 때, 밖에서 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이미숙은 내려다보며 확인하고는 고은서에게 알렸다.“도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지금 돌아온 걸 보아서는 아마 전화를 받자마자 돌아오신 것 같습니다.”그러나 이미숙과 달리 고은서는 아주 담담했다.“아주머니, 내려가서 곽승재 혼자 올라오라고 전하세요. 제가 따로 할 말이 있어서요.”이미숙은 전혀 의심하지 않고 내려갔다.별장으로 들어온 곽승재는 위층에서 내려오는 이미숙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고은서는 괜찮아요?”“사모님께선 별일 없으세요. 지금 테라스에서 햇볕 쪼임을 하고 계시는데 도련님께 따로 하실 말씀이 있다고 도련님보고 올라
분노와 한기로 가득 찬 곽승재의 눈빛을 보며 고은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이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박지연은 아이에 관한 사실을 곽승재에게 알려주면 모든 일이 좋게 끝날 것이라고 믿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곽승재, 우리 그냥 이혼하자. 더는 끌지 말고.”고은서는 다리 하나를 가드 밖으로 내밀면서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뛰어내릴 거야.”“고은서, 지금 또 뛰어내리겠다면서 날 협박하는 거야?”이를 악물고 말하는 곽승재의 얼굴빛은 섬뜩할 정도로 어두웠다. 심지어 그로부터 차가운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네가 뛰어내리면 민시후도 마찬가지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내렸다.“스읍!”그러나 뛰어내리는 순간 고은서는 팔로부터 오는 고통을 느꼈다. 다름이 아니라 곽승재가 뛰어와 그녀를 잡았던 것이다.하지만 관성 때문에 고은서는 여전히 밑으로 떨어지려고 했다. 곽승재는 허리 굽혀 그녀의 다른 한쪽 손까지 잡고 화를 내며 말했다.“손 놓지 말고 꽉 잡아!”반쯤 거의 떨어지려고 하는 고은서의 귓가에는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자신을 잡고 있는 곽승재를 보며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전에 그의 사랑과 관심을 얻으려고 이 층에서 뛰어내린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또다시 테라스에서 뛰어내리게 될 줄은 그녀 자신도 생각 못 했다.‘이 결혼을 강구한 대가를 치르는 셈이네.’“널 끌어올릴 테니까 내 손 꽉 잡아!”곽승재의 목소리를 들은 고은서는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아마 거꾸로 봐서였을까, 고은서는 그의 눈빛으로부터 분노뿐만이 아니라 조급함도 보아낼 수 있었다.그녀가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걱정하는 듯했다.그러나 고은서는 중력 때문에 팔이 점점 더 아파왔고 눈도 깔깔해져 곽승재의 모습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곽승재의 손을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
곽승재의 물음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갔어. 우연히 마주치기까지 했지.”여시은이 그들이 있는 곳을 알고 일부러 찾아왔을 것이라는 의심이 확 들었다.곽승재는 여시은이 WOR 게임 회사에 협력 제의를 했으나 주 개발자에게 거절당했다고 알려주었다.여시은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유혹을 던지는 걸 보면, 고은서가 이 일을 알게 만들어 화나게 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했다.고은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은서야, 무슨 얘기 하려고 했어?” 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일단 여시은의 이 문제를 접어두고, 오늘 송민준의 사무실에서 그의 컴퓨터에 있는 농장 영상을 발견한 일을 설명했다.곽승재는 표정이 복잡해지며 말했다.“송민준이 그렇게 방심할 사람이야? 아니면... 당신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뜻이야?”스스로 질문한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는 씁쓸하게 물어왔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말뜻을 알면서도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송민아가 비밀번호를 알아낸 과정을 설명했다.그녀와 송민준의 관계가 생각처럼 그리 가깝지 않음을 확인한 곽승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송민준이 어떤 반응을 보였어?”고은서는 들은 대로 전했다.“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고은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잘 모르겠어. 만약 그 이유가 아니라면, 송민준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했을까?”송민준이 C 선생이라 해도 농장과는 무관한 일, 조사 동기가 불분명했다.곽승재는 입술을 깨물며 분석을 이어갔다. “우리가 농장 사건을 파헤친 건 시은 씨가 너를 모함해 여 대표님마저 널 의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잖아.”“내 사람들이 샅샅이 조사했지만 결정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어. 전에도 말했지만, 시은 씨가 미리 손쓴 거 같아.”“만약 송민준이 너를 위해 조사한 게 아니라... 이미 그 영상을 확보한 상태였다면?”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고은서가 뭔가 깨달은 듯 소리쳤다. “설마 민준 오빠가 시은이 혐의를 숨겨준 장본인이라는 뜻이야?”곽승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
고은서는 송민준의 반듯한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민준 오빠가 정말 뒤에서 나를 죽이려는 사람일까?’통화를 마친 송민아가 들어오면서 둘의 대화는 자연스레 끊겼다. 송민아가 애교 부리며 조른 끝에 송민준의 손에서 의향서를 가질 수 있었다.점심이 거의 끝날 무렵, 고은서가 먼저 계산을 했다.송민준이 한 끼 식사값 정도 낸다고 문제 될 건 없겠지만, 의향서까지 받은 마당에 식사까지 대접받는 건 좀 민망했다.송민준은 고은서가 계산을 한 걸 알고도 기분 상해하지 않고, 오히려 기분 좋게 받아쳤다. “은서야, 그럼 다음번엔 내가 살 기회를 줘.”...의향서는 손에 넣었다지만 그래도 처리할 일은 여전히 많았다.고은서가 일을 마치고 라이트 문 아파트에 돌아온 건 밤 10시가 다 되어서었다.쑤신 팔을 주무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고은서가 집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검은 쓰레기봉투를 든 곽승재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진한 색 셔츠를 입은 곽승재의 옷자락은 허리에 대충 걸쳐져 있었는데 정장 바지와 긴 다리, 쭉 뻗은 체격에서 귀공자의 기품이 풍겨왔다.하지만 그에 비해 낯색은 별로였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손에 꽉 움켜쥔 검은 쓰레기봉투가 불조화를 이루었다.고은서의 시선을 느낀 곽승재가 고개를 들었다.이 시간에 마주칠 줄 몰랐던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척 지나가기가 더 어색하다고 느낀 고은서가 말을 건넸다.“쓰레기 버리러?”곽승재는 슬그머니 검은 봉투를 뒤로 숨기며 대답했다.“청소 아주머니가 교체하는 걸 깜빡해서 직접 내다 버리려고.”순간 송민준에게서 받은 영상이 생각난 고은서가 물었다.“지금 별일 없지? 너랑 할 이야기가 좀 있어.”말을 마친 고은서가 곽승재 방으로 가려 하자 곽승재가 막아서며 말했다.“너한테로 가자. 내 방이 좀 지저분해서 그래.”청소 아주머니가 다녀갔다면서 방이 지저분하다는 말에 고은서는 의문스러웠지만 더 묻지 않았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재빨리 쓰레기 버리러 계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
송민아의 말투에 묻어난 야유를 고은서가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송민아는 송민준이 고은서에 대한 호감 때문에 몰래 조사를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고은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고 여겼다. 송민준과는 특별한 접점이 없을뿐더러 호감이라 하기엔 애매했다. 게다가 송민준은 묵묵히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었다.‘그렇다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한 걸까?’“그날 은서가 당한 사고가 항상 마음에 걸렸었어.”송민준이 송민아의 질문에 답했다.“그날 내가 늦지 않고 계속 함께 있었다면 은서가 물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거야. 게다가 여 대표가 은서가 시은 씨를 밀었다고 의심했다는 말에 내가 더 미안해서...”송민준이 사과의 뜻을 전했다.“다만 몇 분이라도 빨리 도착했더라면, 적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봤을 텐데 말이야.”이 설명에도 송민아는 만족스럽지 못한 뉘앙스를 풍겼다.“단지 죄책감 때문이야?”고은서는 송민아가 더 엉뚱한 소리를 해댈까 봐 서둘러 말을 끊었다.“민준 오빠, 그날 일은 어떤 각도로 봐도 오빠 잘못이 아니야. 전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어쨌든 진상을 밝혀줘서 고마워. 이 영상 나한테 보내주실 수 있어?”고은서가 조심스레 물었다.“물론이지. 원래도 너 주려고 했었어.”송민준이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이걸 바로 여 대표님께 보여줄 거야?”송민아가 물었다.송민준의 의도가 불분명한 시점에 고은서는 완전히 경계심을 풀 수가 없었다.“아마 재훈 씨는 최근 시은이 회사 설립으로 바쁘실 거야. 이 관건적인 시기에 드리면 내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서 아무래도 개업 축하 파티가 끝나고 나서 다시 얘기하는 게 좋을 거 같아.”“분명 시은 씨가 널 물에 빠뜨리고, 여 대표님의 오해까지 받았는데 넌 뭐 하러 그 사람들을 배려해!”송민아가 화내며 말했다.“내가 봤을 땐 그냥 영상을 보여주고 너를 오해했다는 걸 인지시켜야 해! 오빠, 어떻게 생각해?”송민준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은서도 자기 생각이 있을 거야. 은서의 판단
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와 고은서는 깜짝 놀라며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송민준이 사무실 문 앞에 서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고은서는 순간 어색함이 밀려왔다. 남의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함부로 만진 데다 지어는 내용까지 훔쳐보다가 주인에게 딱 걸렸으니 말이다.얼굴이 확 붉어진 고은서가 입을 열려는 순간, 송민아가 먼저 물었다.“오빠, 오빠 컴퓨터에 왜 지난번 은서와 여시은 씨가 물에 빠진 영상이 있는 거야?”송민준에게 사과하려는 고은서의 말을 끊은 채 송민아는 재차 추궁했다.“누구한테서 받은 거야? 왜 나한테는 말도 안 해줬어?”고은서 역시 궁금했기에 민망함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답을 기다렸다.송민준은 차분히 걸어와 영상을 끈 뒤 담담히 물었다.“민아야, 누가 내 컴퓨터를 함부로 만져도 된다고 허락했어?”송민아도 민망하긴 마찬가지였던지라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그냥 비밀번호가 맞나 확인해보려다가... 미안해. 이 일은 나중에 사과할게. 우선 이 영상 어디서 난 건지부터 말해봐.”송민준은 고은서를 보며 입을 열었다.“은서야, 지난번 곽 대표가 농장 사고를 수사한다는 말을 듣고 나도 사람을 시켜 조사해 봤어. 마침 그날 농장에 있던 관광객이 풍경 촬영 중 우연히 사고 장면을 찍어두었더라고.”송민준은 그 관광객이 급한 일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최근에서야 해성시로 돌아와 그날의 사고 수사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설명했다.“그럼 왜 나한테는 안 알려줬어?”송민아가 불만스럽게 묻자, 송민준은 오늘 아침에야 받은 결과라고 답했다.“안 그래도 은서에게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너희가 먼저 발견해 버렸네.”이 말을 들은 고은서는 이내 사과했다.“정말 미안해. 민준 오빠....”“비밀번호 푼 것도, 영상 연 것도 나야. 뭐라 할 거면 나한테 해.”송민아가 의리 있게 나서자, 송민준은 의자에 앉아있는 여동생을 흘깃 보며 받아쳤다.“요즘 부모님께 칭찬만 듣다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