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연의 걱정은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곽승재가 고은서의 뜻대로 하게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 이후로부터 그는 이혼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고은서가 민시후의 아이를 가졌다고 자극해도, 여러 번 모진 말을 해도 곽승재는 일말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고 아이를 지우고 예원 별장으로 돌아가라고 할 뿐이었다.이제 아이마저 없어진 상황에서 고가승재는 더더욱 이혼을 승낙하지 않을 게 뻔했다.“은서야, 이혼하지 않고 그냥 사는 건 어때?”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물었다.“백유미는 너희 사이를 갈라놓고 본처 자리를 꿰차려고 하는 거잖아? 그 여자 뜻대로 되지 않게 버텨봐. 백유미는 속이 뒤집어질 거야.”고은서도 그 방법이 백유미의 화를 돋울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오히려 자신이 더 불편해질 것 같았다.“조언 고마워. 하지만 상대방에서 엿 먹이려고 나도 같이 고생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고은서의 표현에 박지연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은서야, 전에는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기억해?”고은서가 답했다.“그래서 더 빨리 벗어나서 진짜 행복을 찾고 싶어.”박지연은 말문이 막혔다.잠시 후 박지연은 링거를 챙기러 밖으로 향했다.고은서가 핸드폰을 꺼내 박지연의 어머니에게 귀국 여부를 물으려 했지만 핸드폰에 주인혁의 이체 기록이 떠 있었다.[누나, 저 드디어 매니지먼트랑 계약했어요. 광고 촬영도 해서 회사에서 상여금 받아서 조금 더 갚아요. 나머지는 천천히 갚을게요.]주인혁이 말하지 않았다면 고은서는 주인혁이 돈을 갚아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을 터였다.[급할 거 없어요. 나중에 갚아도 돼요. 대회 준비하며 돈 쓸 곳이 많을 텐데 그것부터 신경 쓰세요.]고은서가 답장을 보내자마자 주인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누나, 요즘 잘 지내셨어요? 저는 매일 훈련하고 대회 준비하느라 정신없어서 연락 못 드렸어요. 늦게 연락하면 방해될까 봐 조심스러웠어요.”고은서가 웃으며 답했다.“그냥 그렇죠 뭐. 나쁘지도 좋지도
고은서는 박지연의 말을 듣고 다소 의아해졌다.지난 생에서 백승엽은 곽승재를 등에 업고 사업을 원활히 이어나갔다.많은 사람들이 백유미와 곽승재가 친밀한 사이라는 말에 백승엽에게 붙어 잘 보이려 애썼다. 하여 백승엽은 그 누구보다 풍요롭고 기세등등하게 살아왔다.‘이번에는 곽승재가 백승엽과 관계를 끊는다고?’“듣자 하니 어제 백유미가 엄청나게 화내면서 병실 물건을 다 부쉈대. 백유미 아버지도 고개를 푹 숙이며 병든 닭처럼 돌아갔대.”백유미는 흥미롭게 소문을 전했다.간호사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은 신뢰성이 높았다.아무래도 곽승재가 백씨 가문에 강수를 둔 듯했다.“백씨 가문도 자업자득이지 뭐.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딱 그 꼴이야.”백지연이 계속하여 비꼬며 말을 이었다.“어제 백유미 아버지가 너 때릴뻔했잖아. 내가 말리게도 못하고... 곽승재가 제때 오지 않았다면 넌 그대로 맞았을 거야!”고은서가 답했다.“맞고만 있지 않았을 거야. 나도 반격할 준비는 해뒀어. 그때는 백승엽을 자극해서 실수를 유도하려고 했던 거야. 그래야 약점을 잡을 수 있을 테니까. 오히려 네가 허리를 다쳤잖아.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 아니면 온 닥터가 나한테 뭐라 했을걸?”말하며 고은서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그러고 보니 이틀이나 집에 안 갔잖아. 온 닥터한테 전화도 안 왔어?”“바빠.”박지연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미리 얘기해 둬서 내가 어디서 뭘 하는지 알아. 굳이 전화 안 해도 돼.”“매일 그렇게 바쁘면 너랑 대화할 시간도 없지 않아?”고은서가 물었다.“괜찮아. 나도 너무 질척거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해.”“여기서 담배 피우시면 안 됩니다.”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던 중, 복도에서 다른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박지연이 병실 문을 열자 곽승재가 복도에 서 있었다.곽승재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수려한 몸을 난간에 기댄 채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여기서 뭐 하세요?”박지연이 묻자 곽승재는 담배를 버리고 긴 다리로 성큼
일부러 그녀가 들으라고 큰 목소리로 말했던 탓에 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을 수 있었다.“내가 걱정하던 대로야. 곽승재는 바로 네가 했다는 걸 알아차렸어. 태도도 강경해. 곽승재가 나서면 화제성도 금방 잠잠해질 거야.”고은서가 병상에 누운 채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박지연의 어머니 윤성희에게서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귀국 중인 것 같았다.“안색이 왜 그렇게 어두워? 이혼 문제 때문에 그래? 아니면 약을 탄 사람이 백유미가 아니라는 걸 들어서 그래?”박지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고은서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곽승재가 백유미와 간호사 사이에 아무 관련도 없다고 단언한 순간, 고은서의 마음은 허탈해졌다.백유미는 언제나 곽승재의 신임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곽승재가 백씨 가문과의 거래를 중단한 건 시작일 뿐이었다.시간이 지나 백유미와 백승엽이 처량한 표정을 지으며 신세 한탄을 하면 곽승재는 다시 백씨 가문 사업을 도와줄 가능성이 높았다.지난 생에서 고은서는 백유미의 그늘 속에서 살았다. 비록 이번 생의 곽승재에게 변화가 생겼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백유미에 대한 옛정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고은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둘 사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그때 박지연의 핸드폰이 울렸다.“언니! 병동 아래에서 싸움 났어요.”박지연이 전화를 받자 상대방이 다급하게 말했다.박지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환자 가족이 소란을 피우는 건가요? 왜 보안팀에 연락하지 않았죠?”“환자 가족이 아니라 언니 친구의 남편, 곽 대표님과 다른 남자가 싸우고 있어요. 내려와 보시는 게 어떠세요? 어제 원장님이 곽씨 가문 일에는 간섭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잖아요. 그래서 나서는 사람이 없어요. 저도 몰래 연락하는 거예요.”“알겠어요. 바로 내려갈게요.”고은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민시후가 왔나 보네. 나도 같이 내려갈게.”곽승재가 엄한 사랑과 시비가 붙을 리는 없었다. 아마 병원을 나서며 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박지연의 단호한 외침에 곽승재와 민시후는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았다.“곽 대표님, 이게 무슨 뜻이죠? 왜 민 대표님을 막으시는 건가요?”표정이 어두워진 곽승재가 답했다.“지연 씨는 저희 사이의 일에 관여하지 말아 주세요.”“그럼 나는? 나는 참견해도 돼?”고은서가 싸늘하게 말했다.박지연은 얼른 핸드폰을 들어 고은서가 곽승재와 직접 말할 수 있게 했다.“민시후 놔줘. 만나야겠어.”고은서가 말했다.곽승재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고은서,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아직 건강이 좋지 않으니 넘어가는 거지 그렇다고 계속 참아줄 생각은 없어.”‘날 봐준다고?’고은서가 싸늘하게 웃으며 답했다.“내가 누굴 만나든 당신 허락이 필요해?”곽승재가 단호히 답했다.“다른 사람은 다 돼도 민시후는 안 돼.”“곽승재. 지금이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그런 강압적인 방식이 통할 것 같아?”민시후가 도발적으로 웃었다.“나랑 은서는 살아 있는 사람이야. 만나려고 한다면 언제 어디서든 만날 수 있지. 매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그 말을 드은 곽승재는 안색이 어두워지며 자비 없이 민시후에게 주먹을 날렸다.“그만해!”고은서는 곽승재의 의도를 간파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곽 대표님, 진정하세요.”박지연도 다급하게 말했다.“은서 안 그래도 상태가 좋지 않아서 움직이는 게 힘들어요. 조금 전에도 같이 내려오겠다고 하는 걸 겨우 말렸어요. 지금 민 대표님께 주먹을 휘두르시면 은서는 자기 몸 생각지도 않고 뛰쳐내려올 거예요.”곽승재가 이를 악물며 경호원에게 명령했다.“민시후는 미래 투자은행 문 앞에 던져주세요. 그리고 고은서 병실 밖에서 사람을 배치해 민시후가 보이면 바로 쫓아내도록 하세요.”경호원은 그 명령을 듣고 바로 민시후를 주차장으로 끌고 갔다.옆에서 사투하고 있던 민시후의 운전기사는 그 장면을 보고 결국 백기를 들어 민시후와 마찬가지로 곽승재의 사람에게 제압당했다.“고은서! 걱정하지 마! 사람 불러
박지연이 서둘러 고은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곽승재가 막을 시간도 없이 너 찾으러 위로 올라갔어!”박지연이 불안한 마음에 덧붙였다.“은서야, 곽승재 씨 표정이 너무 안 좋았어. 제발 무리하지 마. 그 사람이랑 맞서지도 말고. 곧 올라갈게!”전화를 끊은 박지연은 엘리베이터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계단을 뛰어올랐다.병실에 있던 고은서가 핸드폰을 내려놓기도 전에 싸늘한 표정을 한 곽승재를 마주했다.“뭘 하려는 거야?”고은서는 경계심을 가지고 뒤로 물러나면서 침대 머리맡의 호출 버튼을 눌렀다.그 사이 곽승재가 긴 다리를 내뻗으며 그녀의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곽승재의 검은 눈동자는 차가운 빛을 내뿜었고 온몸에는 얼어붙을 듯한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모습이 여실히 느껴졌다.지난번 곽승재가 술에 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이후 고은서는 처음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난 곽승재의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었다.고은서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VIP 병실이라 그런지 아니면 이미 소문이 돌고 있어서 그런지 곧바로 한 간호사가 달려왔다.고은서는 구세주를 보듯 간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간호사님, 부탁이...”곽승재를 내보내달라고 말하기도 전에 곽승재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링거 빼주세요.”간호사는 차가운 기세에 눌려 잠시 멈칫하며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한 번 더 얘기해야 하나요?”곽승재의 싸늘한 시선이 간호사에게 닿자 간호사는 그제야 한기를 느끼며 병상 옆으로 다가가 고은서의 주삿바늘을 뽑기 시작했다.고은서의 불안감은 더 커졌다.그녀는 애써 불안한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곽승재,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아직 약도 다 들어가지 않았어.”곽승재는 별다른 말 없이 싸늘한 분위기를 내풍겼다.“너 진짜... 아!”고은서가 솜으로 바늘이 꽂혀있던 자리를 누르며 의도를 물으려고 한순간 몸이 가벼워졌다. 곽승재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린 것이다.간호사 역시 이 상황에 놀랐지만 곽승재의 강렬한 시선에 겁을 먹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안 그래도 박지연은 시부모님께 환영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만약 곽승재가 정말로 그녀의 시부모님을 끌어들인다면 그녀의 상황은 더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곽승재가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오는 이상 박지연도 더 이상 그를 막을 수 없었다.고은서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난 이 사람이랑 갈게. 넌 돌아가.”박지연이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먼저 말을 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는 괜찮아. 할머니를 봐서라도 날 어떻게 하진 않을 거야.”박지연은 그 말에 조금 근심을 덜었다.“알았어. 그럼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응.”그녀가 대답을 끝내자 곽승재는 곧바로 엘리베이터 문을 닫았다.고은서는 더 이상 저항하거나 소란 피우지 않고 차가운 눈으로 곽승재를 바라보며 물었다.“대체 날 어디로 데려가려고 그래?”곽승재는 그녀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도 그의 태도에 체념하며 눈을 감았다.병동 아래에 도착하자 기사가 준비하고 있었다.곽승재는 은서를 뒷자리에 앉힌 후 자신도 차에 올랐다.차 안에서 곽승재는 전화로 업무를 이어나가며 매우 바빠 보였다.고은서는 답답하고 화가 나 귀를 막고 구석에 웅크리며 불만을 드러냈다.곽승재는 그녀를 한 번 흘깃 쳐다보고는 통화를 멈추고 문자로 업무를 이어나갔다.약 30분 후, 차가 멈춰 섰다.눈을 뜬 고은서는 다른 병원에 도착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예원 별장이었다.“사모님, 드디어 돌아오셨네요.”인기척을 느낀 이미숙이 재빨리 달려 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사모님, 왜 이렇게 살도 빠지고 안색도 나빠지셨어요? 식사 잘 못 하신 거예요?”고은서는 이미숙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곽승재를 노려보았다.“이게 당신이 말한 조용히 쉴 수 있는 좋은 곳이야?”곽승재가 차에서 내려 그녀 곁으로 다가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는 차분히 답했다.“전문 의사와 간호사는 미리 대기시켜 뒀어. 여기보다 안전하고 조용한 곳은 없을 거야.”고은서가
곽승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다시 고은서를 안아 위층으로 향했다.고은서를 침대에 내려놓자 의사가 다가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이미 그녀의 병력을 확인한 듯 간호사는 차분하게 그녀에게 수액을 놓았다.고은서가 수액을 맞는 동안 의사와 간호사는 약을 정리하러 갔고 곽승재는 여전히 바쁜지 밖에서 통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고은서가 침실을 둘러보자 침구류가 추가된 것을 제외하고는 그녀가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그녀가 두고 간 몇 개의 쿠션, 얇은 담요, 털 슬리퍼 등 잡동사니들은 그대로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사모님, 시장하시죠? 죽이랑 반찬, 국 준비했는데 조금 드셔보세요.”그때 쟁반을 든 이미숙이 다가왔다.조심스러워하는 이미숙이었지만 고은서는 그녀의 말투에서 자신의 복귀를 무척 반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은서는 화가 났지만 그 화를 이미숙에게 풀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아줌마. 하지만 아직 별로 입맛이 없네요. 그냥 놔두세요.”“사모님, 입맛이 없으시더라도 조금은 드셔야죠.”이미숙이 안타까워하며 거듭 권했다.“안 그래도 날씬하셨는데 지금은 더 마르셨어요.”이미숙의 호의에 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죽만 조금 먹을게요.”“네! 사모님!”이미숙이 곧 따뜻한 죽 한 그릇을 가져와 그녀에게 떠먹여 주었다.“사모님, 손이 불편하시니 제가 먹여드릴게요.”이미숙의 정성을 마다할 수 없었던 고은서는 거부하지 않고 그녀가 하려는 대로 내버려두었다.죽 한 그릇을 다 먹자 이미숙은 다시 한번 반찬을 권하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사모님, 식사를 잘하셔야 빨리 회복하시죠.”곽승재가 이미숙에게 그녀의 일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은서는 물어볼 기분도 아니었다.“아줌마. 나중에 제 핸드폰 어디 있는지 물어봐 주세요. 통화 좀 하고 싶네요.”민시후의 번호는 핸드폰에만 저장되어 있었다. 곽승재에게 억지로 안겨 끌려온 고은서는 제때 핸드폰을 챙길 수 없었다.‘사람
고은서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곽승재에게 던지며 말했다.“내가 누구를 찾든 무슨 상관이야! 내 핸드폰이나 돌려줘.”핸드폰은 곽승재의 몸을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곽승재가 떨어진 핸드폰을 잠시 바라보고 주워들었다.그는 고은서를 내려다보며 비웃듯 말했다.“왜? 민시후한테 연락하려고? 꿈도 꾸지 마. 새 핸드폰이 필요 없다면 여기서 조용히 몸이나 회복해. 밖에 나가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손해 보는 건 너뿐일 테니까.”싸늘하게 말을 마친 곽승재가 더 이상 고은서를 신경 쓰지 않고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곽승재! 미쳤으면 의사한테 진단이나 받아! 미쳐서 날 괴롭히지 말고!”고은서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문 닫히는 소리뿐이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고은서는 그대로 뒤로 넘어갈 것만 같았다.‘빌어먹을 곽승재! 민시후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날 여기로 데려왔지! 난 이혼하고 싶었을 뿐인데 일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그 후 이틀간, 고은서는 예원 별장에서 요양했다.의사의 세심한 관리와 이미숙의 보양식 덕분에 그녀의 몸은 많이 회복되었다.비록 아직 기력이 부족해서 격렬한 운동은 할 수 없었지만 기본적인 활동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그녀는 더 이상 수액할 필요도 없이 약만 복용하면 되었다.몸은 차츰 회복되었지만 고은서의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하고 초조해졌다.이틀 동안 그녀는 방향을 잃은 나침판처럼 외부와의 연락이 모두 차단된 채 답답하게 방에만 갇혀 있었다.그녀는 바깥 상황이 궁금했다.또한 서연정의 귀국 여부로 궁금했다.하지만 그녀에게는 핸드폰이 없었고 빌려줄 사람도 없었다.곽승재는 그날 문을 닫고 나간 뒤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별장에 사람들을 배치해 그녀가 밖에 나가지 못하게 단속했다.고은서는 그날 곽승재가 차에서 내리며 너무 이른 시기에 욕했다는 말을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곽승재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야! 나쁜 놈보다 더해! 정말 미친놈이야!’“사모님, 화내지 마세
이때 민시후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고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감정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고은서조차도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약간 흔들렸다.고은서는 민시후가 겉으로는 가볍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감정을 내세우며 곽승재와 대립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민시후는 정말 날 좋아하는 거야.’단순히 오빠 같은 존재로 여겨지는 유성준과 달리 민시후의 진심 어린 고백은 고은서의 마음에 파란을 일으켰다.하지만 고은서는 새로운 감정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그녀는 잠시 고민한 뒤 말했다.“민시후, 시간을 좀 줘.”그녀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실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고은서, 그 말을 나한테도 기회가 있다는 거지?”고은서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이제 국 마실 거야?”민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럼, 물론이지.”박지연은 이 소식을 듣고 당장 폭죽이라도 터뜨릴 기세로 기뻐했다.“은서야, 드디어 마음을 정리했구나.”박지연이 기뻐하며 말을 이었다.“안 되겠어. 이 소식을 육현석에게 알려서 곽승재와 너를 다시 만나게 하려는 노력은 하지 말라고 해야겠어.”“그렇게 유치하게 굴지 말아 줄래?”고은서가 박지연을 말렸다.“내가 민시후의 마음을 받아들이든 들이지 않든 그건 육현석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 굳이 그 사람한테 알릴 필요 없어.”육현석에게 알리는 것은 곽승재에게 알리는 것과 다름없었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자신이 백유미 일 때문에 그와 감정싸움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비록 박지연은 당장 육현석에게 이 소식을 알려 곽승재가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원치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았다.“알았어. 말 안 할게. 어차피 사귀게 되면 다 알게 될 테니까.”고은서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다음 날 고은서는 고씨 가문으로 향했다.유성준도 그 소식을 듣고 집으로 왔다.“은서야, 너 요즘 너
고은서가 말을 이었다.“우리가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매번 술집이나 클럽에서 마주쳤잖아. 그때마다 양옆에 여자들을 끼고 있었잖아.”그 말을 들은 민시후는 대꾸하지 않고 매력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고은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왜 그렇게 봐? 내가 없는 말 했어?”“아니, 틀린 말도 아니야.”민시후는 얼굴에서 불쾌한 기색을 지우,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예전에 주위에 여자가 많았던 건 맞아. 하지만 그건 그저 보여주기 위한 식일 뿐이었고 진지한 관계도 없었고 부적절한 행위도 없었어.”고은서는 믿지 않았다.“M 국에 있을 때 어떤 섹시한 여자랑 데이트했잖아. 아무 일도 없었어?”민시후의 미소는 더욱 깊어졌고 그의 눈빛은 빛나기 시작했다.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자랑스러운 일인가? 왜 저렇게 웃지?’민시후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고은서, 혹시 질투야?”고은서는 그제야 자신이 민시후의 과거 연애사를 묻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오해하지 마. 그냥 네가 민아 일로 화내는 게 웃겨서 예로 든 거야.”고은서가 단호히 답했다.그러나 민시후는 여전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고은서, 뭔가 걸리는 구석이 있으니까 괜히 설명하는 거야. 평소 내가 이렇게 물었으면 넌 주먹부터 날렸을 거야.”고은서는 지금 당장 그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헛소리 그만해. 네 연애사가 나랑 무슨 상관이야? 별 관심 없어.”“괜찮아. 네가 신경 쓰든 안 쓰든 모두 솔직하게 얘기해 줄게. M 국의 그 여자는 내 친구야. 그날 우리는 다른 친구를 만나러 가던 중이었는데 네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 친구는 기다리는 게 지겨워서 몇 번 재촉했을 뿐이야. 외국은 보통 오픈 마인드 잖아. 그래서 호칭도 더 친근했을 뿐인데 우린 순수한 친구 관계였어.”민시후의 눈빛은 너무 반짝여서 고은서가 눈을 돌리며 기침했다.“이미 말했잖아. 나랑 상관없다고.”“상관있어.”민시후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고은서, 나는
민시후가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눈빛으로 거절하자 고은서가 설득했다.“조금 전에 뭐 좀 먹어서 배가 부르네. 네가 마셔. 버릴 순 없잖아.”민시후는 그녀를 보며 일부러 말했다.“네가 먹여주면 한 번 생각해 볼게.”고은서는 화가 난 듯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숟가락 드는 데는 아무 지장 없잖아.”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고은서,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진짜 화내는 거 보고 싶어?”화가 난 고은서는 결국 직접 국을 다 마셔버렸다.“민아야, 이거 정말 맛있네. 어떤 사람은 즐길 줄 모르는 것 같아. 복이 없는 거지 뭐.”송민아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고은서, 너도 정말 유치하다.”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그만해. 난 그냥 병문안 온 거야. 무사한 거 봤으면 됐어. 먼저 가볼게.”송민아가 가려고 하자 고은서는 그녀를 배웅했다.복도로 나온 송민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은서야, 나 정말 시후 오빠 포기했어. 그러니까 앞으로 이렇게 도와주지 않아도 돼. 오빠 다친 거 너 때문이지?”송민아도 T 국에서 있었던 일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오빠 겉으로는 제멋대로인 것 같아도 꽤 믿을 만한 사람이야. 전에 오빠한테 감정적으로 더 상처를 주라고 말했던 건 그냥 화가 나서 한 말이었어. 너도 마음이 있다면 그냥 오빠 받아줘. 내 생각은 하지 않아도 돼.”고은서가 웃으며 답했다.“네가 민시후를 도와준다는 걸 민시후가 알면 네게 그렇게 까칠하게 굴었던 걸 후회하겠네.”송민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도와주려고 하는 말 아니야. 그냥 내가 아직 오빠를 좋아한다고 오해하면서 난감해할까 봐 그러는 거야.”고은서는 다시 한번 웃을 뿐 별다른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들어가 봐. 민준 오빠가 북성 간식들을 좀 보내줬어. 얼른 먹고 싶어서 눈에 아른거리네. 이제 그만 갈게.”고은서는 그녀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하며 무심코 말했다.“네 오빠는 널 잘 챙기네.”‘귀찮은 일도 처리해 주고 클럽까지 데리러 와주고 심지어 먹
이 사실은 전에 뛰어내리겠다고 곽승재를 협박할 때 고은서도 얘기한 적이 있었지만 그는 전혀 믿지 않았다.‘지연이는 어떻게 믿게 만든 거지?’고은서는 자신의 의문을 숨김없이 말했고 박지연도 오늘에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다 말해줬다.“유전자검사는 언제 한 거야? 난 모르고 있었는데.”고은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속상해하는 너를 보면서 어떻게 말을 꺼내.”박지연이 답했다.아무리 시간이 오래 지났다고 해도 고은서는 그 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파왔다.당시 고은서는 백유미를 구하러 호수에 뛰어든 곽승재를 보며 이혼할 때 이 사실을 그에게 알려주면서 후회하게 만들 거라고 다짐했었다.그러나 막상 후회하는 그의 모습을 보게 되니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는 게 틀린 소리는 아니네.’이튿날, 고은서와 박지연은 귀국하기 위해 공항으로 갔다.아직도 거동이 불편한 민시후는 인파를 피면하기 위해 전용기로 귀국할 예정이었다.두 사람도 그와 동행했다.공항으로 가기 전에 고은서는 병원 로비에서 곽현수와 백승엽을 만났다.곽현수는 그녀를 보자마자 성가시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고 휠체어에 앉아있던 백승엽은 악의로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째려만 볼뿐 자신의 감정을 함부로 드러낼 용기조차 없었는지 그녀와의 눈 맞춤을 피했다.“쯧.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범죄자를 감싸는 주제에 왜 저리 거만하게 구는 거야.”민시후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비록 이름을 직접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곽현수와 백승엽의 표정이 다 굳어졌다.뻔뻔함을 타고난 사람들도 있다잖아요.”박지연은 맞장구를 치고는 이내 민시후의 휠체어를 밀고 밖으로 나갔다.고은서는 곽현수를 무시한 채 두 사람 뒤를 따라갔다.해성으로 돌아간 후, 민시후는 박지연이 출근하고 있는 이레 병원에서 계속 치료를 받기로 했다.고은서는 푹 쉬고 경찰서로 찾아가 T국에서 있었던 일에 관한 증거 자료를 제출하면서 백유미의 법적 책임을 묻겠다
고은서는 몽롱한 상태에서 상대방의 품이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너무 허약한 탓에 차갑기만 하던 그녀의 몸도 따라서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그 사람은 등 뒤로 조심스럽게 그녀를 꼭 끌어안으면서 얼굴을 그녀 이마 가까이 붙였다.체온이 하도 높아서 불편함을 느낀 고은서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상대방은 더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지만 등이 점점 더 뜨거워 난 고은서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잠에서 제대로 깨지 못한 탓에 제대로 벗어날 수가 없었다.얼마 후, 그 사람은 그녀를 다시 꼭 끌어안으면서 손으로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흐느끼는 듯 몸을 떨기 시작했다.심상치 않음을 느낀 고은서는 눈을 번쩍 떴다.그러나 뒤돌아 확인하려고 할 때 그가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는 바람에 몸을 돌릴 수가 없었다.“은서야, 미안해...”귓가에서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예전처럼 발버둥 치며 화를 내면서 그를 내쫓는 대신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놔.”곽승재는 여전히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약간 울먹이면서 말했다.“은서야, 미안해.”고은서는 곽승재가 오후에 박지연한테서 들은 말 때문에 이런다는 걸 알고 있었다.“지연이 혼자만의 생각이니까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돼.”고은서의 말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당신 아버지랑 백승엽까지 여기로 온 이상 당신도 어쩔 수가 없었겠지. 할 만큼 했다는 거 나도 알아.”곽승재는 그녀를 놓아주기는커녕 방금전보다 더 세게 끌어안았다.고은서는 목 쪽으로 뜨거운 액체가 떨어지는 걸 느꼈다.“은서야, 차라리 욕이라도 해...”곽승재의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에서 그가 무척 후회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러나 고은서는 여전히 담담했다.“곽승재, 굳이 이러지 않아도 돼. 난 당신이 한 말을 애초에 믿은 적이 없으니까.”곽승재는 순간 몸이 굳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치 이번이 그녀를 안아볼
병실로 들어오자마자 이 광경을 주민기는 황급히 벨을 누르며 의사를 불렀다.“의사 선생님...”...고은서의 병실로 다시 돌아간 박지연은 방금전 씩씩거리며 나가던 모습과 별다른 점이 없어 보였다.“거봐, 내가 가지 말라고 했지?”고은서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녀를 위안했다.“화 풀고 나랑 내일 귀국할 준비 하자. 돌아가고 나서 나 밥 사줘. 그리고 SPA도 하고 싶은데 네가 쏠 거지?”박지연은 한참 동안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다가 끝내는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은서야, 곽승재한테 목매지 말고 우리 다른 남자 찾아보자. 넌 곽승재가 아니어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어.”박지연은 평소에 이런 오글거리는 행동을 별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이런 행위를 볼 때마다 혀를 끌끌 차곤 했었다.‘곽승재한테 찾아가더니 화가 많이 난 모양이네.’“알겠어.”고은서가 박지연의 등을 토닥이며 웃으면서 답했다.민시후도 어느새 백유미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백유미 정신질환 진단서에 관해서는 이미 조사해보라고 사람 시켰어. 민시현한테도 원지훈 사망 사건에 관해 다시 조사하게끔 당지 경찰 측에 말해달라고 부탁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마.”“괜찮아. 이미 결론이 난 사건이라서 큰 변화는 없을 거야. 그러니까 다시 조사해달라고 형을 귀찮게 굴지 않아도 돼.”고은서가 답했다.“해줄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는 데 써먹을 수 있을 때 써야지.”민시후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난 네 형한테 불리워 가서 밥 먹기 싫어.”고은서가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 말싸움을 했다.“민시후, 비록 네 선택이기는 하지만 다신 이런 일에 끼어들지 마. 나 때문에 네가 다치는 일은 더는 없었으면 좋겠어.”민시후는 이번 일로 며칠 동안 병상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지금도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됐다.그녀가 보기에도 엄청 안쓰러운데 그의 가족들은 오죽할까.“네가 다치는 일이 없는 한 이건 약속 못 하겠는데.”
곽승재는 눈앞에 놓인 종이를 보며 그대로 얼어붙었다.박지연은 콧방귀를 뀌면서 곽승재한테 고은서가 유산한 날 동료한테 부탁해서 그가 썼던 수건에 있던 머리카락으로 유전자검사를 했다면서 알려줬다.“고은서가 계속 마음에 못을 박는 소리를 해왔지만 당신을 좋아하는 마음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어요. 원래는 당신이 고은서의 마음을 되돌리고 두 사람이 재혼하게 되는 그날에 이 모든 걸 알려주면서 은서는 단 한 번도 당신에게 미안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당신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당신은 진짜 구제불능인 것 같네요. 어떻게 자기 아내랑 아이를 죽이려고 했던 범인을 이대로 놓아줄 수가 있죠? 당신은 은서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박지연이 화를 내며 호통쳤다.고은서가 유산했을 때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구슬프게 우는 모습을 떠올린 박지연은 지금이라도 곽승재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다.“은서가 그 아이가 태어나길 얼마나 기대했는지 알아요? 어떻게 하면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애가 행복하게 클 수 있는지를 얼마나 고민해왔는데. 그런데 결국에는 백유미 그 악독한 여자가 이 모든 걸 망쳐버렸잖아요.”박지연은 말하면서 울먹이기 시작했다.“아이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당신이 은서를 굳게 믿었다면 굳이 이혼할 일도 없었을 거예요. 아마 지금쯤 두 사람이 아이를 함께 키우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요.”곽승재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은서가 당신 같은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것부터 아주 큰 착오였어. 당신은 단 한 번도 은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 보지 않았잖아요. 단 한 번도 은서 입장에 서서 고려해본 적이 없잖아요! 민시후가 계속 눈에 거슬린다고 했죠? 그런데 민시후가 당신보다 백 배는 나아요. 적어도 은서를 웃게 하려고 노력하고 안전감을 주려고 노력하잖아요. 고은서가 무슨 일이 있든 항상 발 벗고 나서주잖아요.”박지연은 계속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은 그의 마음에 칼을 꽂았다.“고은서가 백유미한테 반격하려는 일을 민시후한테
박지연은 종래로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항상 깊은 사고를 거친 후에야 결정을 내리는 타입이었다.그뿐만 아니라 고은서와 마찬가지로 결정한 일이라면 꼭 해야 하는 성격이었다.고은서는 아무리 설득해도 그녀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당부했다.“적당히 해. 화내면서 눈물 흘리며 찾아오기 없기야.”박지연은 고은서의 농담을 뒤로 한 채 마치 곽승재를 후회하게 만들 히든카드라도 손에 쥐고 있는 듯 아주 결연한 표정으로 병실을 나섰다.고은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육현석이 아침에 어머니한테 불리워 해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조금이나마 나랑 함께 지연이를 설득할 수 있었을 텐데. 됐어. 당하고 나면 알아서 정신 차리겠지 뭐.’...박지연은 이내 곽승재가 있는 병실에 도착했다.어깨 상처가 아직 낫지 않은 탓인지 그의 얼굴은 아직도 창백해 보였다. 그녀가 병실로 들어갈 때 그는 병상에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옆에는 비서 주민기가 서 있었다.주민기는 그녀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눈치 있게 자리를 피해줬다.곽승재는 그녀가 찾아올 거라는 걸 먼저 예상이라도 한 건지 아주 덤덤한 표정을 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박지연 씨가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죠?”박지연은 냉소를 흘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곽 대표님, 백유미가 은서한테 얼마 악독한 짓을 했는지 알면서도 고작 정신병원 진단서 하나 때문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건가요?”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은서한테 백유미를 대가 치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면서요. 이게 곽 대표님이 말한 그 대가인가요?”박지연이 계속 캐물었다.곽승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해성으로 돌아간 후 정신병원으로 보낼 거예요.”“거참. 고작 정신병원 하나로 끝내겠단 말씀이세요?”박지연이 헛웃음을 치면서 말했다.“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다 백유미가 아무런 병이 없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지금 그저 핑
박지연은 또 다른 한 가지 소식을 고은서에게 전했다.범가온이 원지훈 유품을 확인할 때 그의 폰에서 백유미가 성폭행당하는 동영상을 발견했다고 한다.아마 원지훈이 자신의 앞날을 위해 그 동영상으로 백유미를 협박하려고 했던 모양이다.동영상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이었다.백유미한테는 기필코 아주 큰 타격이 될 것이다.범가온은 동영상을 확인한 후 아들의 죄를 덮어주기는커녕 사람을 찾아 그 동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했다고 한다.그 동영상은 업데이트되자마자 많은 사람의 주목을 끌었고 여론이 점점 커져갔다.“조회수가 어마어마하대. 특히 외국 사이트는 심사가 별로 엄하지 않아서 벌써 T국 여러 사이트 실검에 올랐어. 비록 국내에서는 동영상 풀버전을 볼 수는 없지만 전파 속도가 하도 빨라서 이미 본 사람들이 꽤 많을 거야. 백유미 이번엔 진짜 끝장이야.”그러나 고은서는 마음이 별로 놓이지 않았다.백유미에겐 곽현수라는 조력자가 있었고 그가 직접 나선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그 누구도 보장하지 못한다.아니나 다를까, 오후쯤이 되어서 고은서는 휠체어에 앉은 백승엽과 곽현수가 T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비록 이미 GS그룹 경영권을 곽승재에게 물려주고 회사 일에서 손을 뗐다고 하지만 T국 상류계층 사람들마저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 명성은 여전했다.그 사람들과 곽현수의 참견으로 T국 경찰 측에서는 얼마 되지 않아 원지훈을 죽인 백유미의 행위가 정당방위라는 조사결과를 공포했다.왜냐하면 원지훈이 찍은 동영상에서 백유미를 죽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그의 목소리가 함께 녹음되었기 때문이다.그래서 경찰 측에서는 원지훈이 앙심을 품고 백유미를 죽이려 하다가 도리어 칼을 들고 정당방위 하는 그녀에게 목이 찔려 죽었다고 판단했다.고은서 납치 사건에 관해서는 녹음 파일과 증인이 다 있었기에 백유미는 거의 유죄 선고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그러나 백승엽이 이름 있는 정신병원 진단서를 내밀며 백유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