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당황했다. 할아버지가 준 200억은 민시후와의 협업에 사용할 예정이었고, 지난번 곽승재의 블랙카드는 한도를 다 써 버린 상태였다.요즘 수중에 현금이 많지 않아서 이 돈만 들어온다면 생활이 훨씬 나아질 것 같았다.어쨌든 그 계획서는 더 이상 그녀에게 쓸모가 없으니 판주에서 쓸 테면 쓰라지.하여 고은서는 태연하게 물었다.“2천만 원만 더 주면 안 돼?”“...” 곽승재가 그녀를 올려다봤다.“고은서, 그렇게 돈을 좋아하면서 전에는 왜 고고한 척 재산 한 푼도 필요 없다고 했어?”두 사람이 결혼했을 때 곽승재는 그녀에게 카드 한 장을 던졌다. 생활비는 충분히 줄 테니 결혼으로 자신을 묶어두지 말라면서.당시 고은서는 돈 때문에 결혼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 그의 카드를 거절했다.그래서 결혼 후부터는 곽승재에게 줄 선물을 사거나 생활비 일부를 자신의 돈으로 충당했다.아까워 죽겠네!“이제라도 보상해 주는 게 어때?” 고은서가 떠보듯 묻자 역시나 곽승재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나랑 이혼할 건데, 내가 왜 너한테 생활비를 줘?”사업가에겐 천성적으로 이익이 중요했기에 고은서도 더 따지지 않았다.“그냥 2억으로 해.”곽승재가 요구를 제기했다.“앞으로 프로젝트 진행에 참여하고 계획서와 관련된 데이터 수정도 책임져.”“곽승재, 나한테 돈 주기 싫은 거지?” 고은서가 화를 냈다.“난 판주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어. 판주 일에도 관여하지도 않을 거야!”곽승재는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규정을 어겨서라도 널 이 프로젝트에 투자자로 참여시킬 수 있어.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포기하면 나중에 할머니한테 부탁해도 소용없어.”“규정을 어겨가면서까지 끼워준다니, 넓은 아량에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야 하나?”곽승재의 분노에 찬 서늘한 표정에 고은서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 성의는 도로 집어넣어. 내가 할머니한테 가는 건 고사하고, 당신이 애원하러 와도 판주에 안 들어갈 거니까!”곽승재는 더
전미자는 구식 나무 의자에 앉아 있고 그 주위로 화려한 차림의 여성 여러 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할머니!” 고은서가 힘차게 외치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고 그녀를 본 전미자는 표정이 환해졌다.“은서 왔구나!”고은서와 곽승재가 함께 할머니에게 다가갔다.“할머니, 고모님들 안녕하세요.”곽승재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승재야, 넌 정말 효자구나. 항상 바쁘다고 하면서 안 오는 우리 집안 불효자들과 달리 매번 할머니를 찾아와주니!”“그래, 아무리 바빠도 승재보다 더 바쁠 수는 없지. 그렇게 큰 GS그룹을 책임지고 있으면서도 시간을 내는데 그냥 우리 늙은이들이 싫은 거야!”“역시 승재야. 능력도 있고 효성도 지극하고, 할머니는 복이 많으셔!”고모들의 칭찬을 들으며 곽승재는 잘생긴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지었고 고은서를 흘깃 쳐다보더니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과찬이십니다. 저도 평소에 할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많지 않아요. 대부분 은서가 곁에 있어 드리죠.”‘은서’라는 두 글자가 곽승재 입에서 나오자 고은서는 환청이 들리는 줄 알았다.아무리 겉치레일 뿐이라도 한번도 이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듯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곽승재의 잘생긴 얼굴은 아무런 동요 없이 태연한 표정이었다.할머니는 조용히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며 곽승재에게 말했다.“은서가 좋은 애라는 걸 아니까 다행이네.”“그래, 은서도 효녀지! 예쁘기도 해서 승재랑 천생연분이네!”여자들은 고은서를 칭찬하기 시작했고 칭찬이 쏟아지는 가운데 저쪽에 있던 당숙이 곽승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곽승재는 배려심 많은 남편처럼 고은서에게 말했다.“할머니랑 잠깐만 있어, 다녀올게.”이 정도 연기쯤이야, 고은서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그래.”“은서랑 승재는 갈수록 사이가 좋은 것 같네!”고모 중 한 명이 고은서에게 말했다.“너랑 승재는 언제 아기 낳을 거야, 그래야 우리도 기운 좀 받지! 그렇죠 여사님?”전미자는 웃으
고은서는 전미자의 말뜻을 알았지만 스스로 희망 고문을 하고 싶지 않았다.“할머니, 저를 위로해 주실 필요 없어요. 곽승재의 마음은 제가 잘 알아요.”그가 여전히 자신에게 못되게 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설사 마음을 바꾼다고 해도 더 이상 그에 대한 환상을 품을 수는 없었다.그와 백유미 사이의 암묵적인 이해와 감정, 이번 생에서는 다시 엮이고 싶지 않았다.전미자는 고은서의 결연한 표정을 보고 더 이상 그녀를 설득할 수 없었다.그녀가 저렇게 단호할 만큼 슬픔과 실망이 쌓였을 테니까.부디 그 망할 놈이 빨리 정신을 차리고 은서의 마음을 되돌려야 할 텐데....라운지에서는 몇몇 여성들이 자식들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우리 아들 생일이 곧 다가오는데 여기서 제작한 옷이 좋다고 하더라고요. 브랜드 사이트에 사진이 몇 장 있는데 다들 한번 골라주세요!”그중 한 명이 아이패드를 꺼내자 여러 사람이 이리저리 살펴보았고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곽승재도 화면을 흘깃 쳐다보았다.“승재 너는 옷도 잘 입고 눈썰미도 좋으니까 고모 좀 도와줄래?”여자가 먼저 제안했고 곽승재가 거절할 줄 알았는데 아이패드를 집어 들었다.그는 첫 페이지에 있는 신상을 훑어보다가 6천만 원 이하의 옷들 중 스크롤을 내려 5760만 원짜리 검은색 캐주얼 정장을 찾았다. “승재야, 너만큼은 아니어도 고모네 집안 형편으로 이 정도 가격대 옷을 살 필요는 없어.”여자가 웃으며 말하자 곽승재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홈페이지 상단의 2억짜리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개인적으로 이게 괜찮은 것 같네요.”“그래, 예쁘네! 우아하면서도 트렌디해. 여러분도 와서 보세요!”여자들이 다가오자 곽승재는 아이패드를 돌려주고 정원으로 향했다.할머니는 나무 의자에 앉아 있고 고은서는 그녀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그렇게 계속 웃으세요, 좋아요, 할머니 너무 아름다우셔!”할머니는 칭찬에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고은서의 말에 따라 좌우로 머리를 움직였다.곽승재는 고은서가 평소 사탕 발린 말로 할머
가기도 전에 길가에 피어 있는 난초에 이끌려 몸을 숙이고 냄새를 맡았다. 고은서는 꽃향기가 너무 좋아서인지 순식간에 이마가 펴지고 입꼬리가 올라갔다.그 순간 그녀의 머리와 주변은 햇살에 둘러싸여 있었고, 가녀린 작은 얼굴이 하얀 난초 앞에 가까이 가자 곽승재는 꽃과 사람 중 누가 더 아름다운지 순간 분간할 수 없었다.저도 모르게 멍하니 자신의 휴대폰으로 그 모습을 찍었다.오후 반나절의 자유 시간이 지난 후 연회가 시작되었고 20여 명이 테이블에 둘러앉은 분위기는 꽤 화기애애했다.전미자와 숙부님은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라 참석한 청년, 중장년층에 비해 기력이 떨어지셔서 일찍 자리를 뜨셔야 했다.곽승재는 삼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고은서는 할머니가 차에 타는 것을 도왔다.차가 사라지는 것을 본 고은서는 돌아가서 곽승재와 다정한 척 연기하기 싫어서 주위를 돌아다녔다.장막이 깃들고 정원 잔디밭에는 형형색색의 조명이 켜져 있어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고은서는 방 근처 작은 대나무 숲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앞쪽보다 더 조용하고 한적한 이곳은 방 바깥에 경호원 같은 두 사람이 서 있었다.고은서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던 중 마른 체구의 남자가 젊고 앳되어 보이는 여자 몇 명과 함께 방 쪽으로 걸어오며 진지하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오늘 거물급 손님이 오셨으니 잘 모셔야 해. 안 그러면 너희들 가만 안 둬!”그중에 몸매 좋은 한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몸이 좀 안 좋은데 술은 안 마시면 안 될까요?”“헛소리 집어치워! 술 마시는 게 뭐가 어때서? 너희들이 이렇게 비싼 휴대폰을 쓰고 이렇게 좋은 옷을 입을 수 있는 돈이 어디서 나오겠어? 서 대표님께 잘 보이면 앞으로 팔자가 핀다고!”‘서 대표’라는 말을 들은 고은서는 무의식적으로 그들이 들어선 방을 바라보았다.마침 문이 열렸고 방 안에는 두세 명의 남자가 있었는데 모두 상석에 앉은 살집이 있는 남자에게 술을 따르며 공손한 모습이었다.어딘가 낯이 익은 그 남자는 그가 최근
고은서는 자신에게 되뇌었다.또다시 멍청하게 저 미모에 홀려선 안 된다.고은서는 곽승재를 차갑게 바라보았다.“왜 여기 서 있어, 사람 놀라게!”곽승재는 화를 내는 대신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할머니 배웅한다면서 여긴 왜 왔어, 한참 찾았잖아...”고은서는 그가 내뱉은 말과 표정에서 술에 취한 것을 확신했다.평소 고고하고 날카로운 그가 이렇게 무디게 반응하며 자신을 찾았다는 끔찍한 말도 할 리가 없었다.지난 생에도 그가 술을 많이 마신 적이 있었는데 집에 오면 침대에 누워 잠만 자고 별다른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고은서는 다소 마음을 내려놓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민기에게 연락해 데리러 와 달라고 부탁했다.“알겠습니다 사모님.”주민기가 전화를 끊었다.“여기 왜 왔냐고, 아직 대답 안 했어.” 곽승재가 고은서의 팔을 붙잡고 대답을 재촉했다.고은서는 박지연이 술에 취한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기에 실랑이를 벌이지 않고 대답했다.“답답해서 좀 걸었어.”“왜 답답한데?” 그녀를 바라보는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는 안개가 낀 듯 몽롱했지만 묻는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고은서는 생각했다. 곽승재의 이 멍청한 모습을 찍어서 200억 정도 당길 수 있지 않을까?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본 곽승재는 오히려 손을 뻗어 그녀를 감쌌다.“왜 아무 말도 안 해?”“곽승재, 이거 놔!”고은서가 벗어나려고 했지만 곽승재가 그녀의 팔을 더 단단히 감싸며 기분 나쁜 듯 말했다.“예의 없게, 이젠 오빠라고 부르지도 않네. 지금 한번 불러봐.”이 말을 들은 고은서는 처음엔 당황하다가 웃기면서도 마음이 저릿했고 나중에는 화가 났다.“곽승재, 술 먹고 미친 척하는 게 재밌어?” 고은서는 그를 힘껏 밀어냈다.“아니면 내가 요즘은 매일 쫓아다니지 않아서 적응이 안 돼?”오빠는 무슨, 예전에 그렇게 오빠라고 부르며 따라다닐 땐 신경이라도 썼나.미간에 누구 하나 끼여 죽일 기세로 인상을 팍 쓰고 이제 와서 오빠라
고은서는 곽승재가 평소의 말투와 태도로 돌아온 것을 보고, 그가 자신을 속이려고 술에 취한 척한 거라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그녀는 너무 화가 나서 곽승재를 뒤로한 채 재빨리 앞으로 걸어갔다.은은한 향기가 스쳐 지나가며 고은서의 뒷모습은 이미 멀어져 있었다.곽승재는 육현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LH그룹 걸프 프로젝트의 협력 제안서 기각.]그는 육현석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고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보스가 너무 취한 것이 걱정된 주민기는 운전기사와 함께 레스토랑으로 그를 데리러 갔고 운전기사보고 기다리라고 한 뒤 주민기는 고급스러운 방문으로 걸어갔다.이때 보스는 방의 벤치에 앉아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컨디션이 좋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를 부르려던 찰나 고은서가 한 손에 수건을, 다른 한 손에는 무언가 수건 밑으로 감추고 식탁에서 보스 곁으로 다가가는 게 보였다.주민기는 눈치껏 입을 다물고 고은서가 수건으로 보스의 이마를 부드럽게 닦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고은서의 다정함에 감탄하기도 전에 그녀가 다른 한 손에 있는 물건을 ‘실수로’ 보스의 옷 안쪽에 던지는 것을 보았고, 그 물건이 피부에 닿자 보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그 움직임이 너무 커서 방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승재야, 괜찮아?” 사모님 중 한 명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엇, 옷이 왜 젖었어, 바지도...”여인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그의 셔츠와 바지에 쏠렸다.파란색 셔츠에는 젖은 자국이 몇 군데 있었고 바지의 민망한 부분은 흠뻑 젖어 있었다 ...어처구니없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모두 암묵적으로 침묵을 선택했다.그도 바지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얼굴이 새까맣게 상기된 채 차가운 눈빛으로 고은서를 노려보았지만 고은서는 걱정스럽고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당, 당신 술 정말 많이 마셨나 봐. 그걸... 못 참은 거야?”그녀는 일부러 민망한 단어를 생략했다.“그래도 괜찮아, 창피해할 필요 없어!” 고은서
이젠 아예 배를 부여잡고 웃기까지 했다.이를 본 주민기는 무모하게 달려드는 고은서 때문에 남몰래 식은땀을 흘렸고, 괜히 불똥이 튀지 않도록 조용히 가림판을 올렸다.곽승재는 자신의 협박에도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고은서를 바라봤다.휘어진 눈가에는 물기가 살짝 묻어 있었고 살짝 붉게 물든 얼굴에는 불만도, 차가움도, 심술도, 싫은 기색도 없이 명랑한 미소만 남아 있었다.그녀의 하얀 손목은 여전히 그의 손에 잡혀 있었고 그녀의 따뜻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분명 화가 났던 곽승재는 이상하게도 분노가 사그라드는 대신 갈증과 열기가 밀려왔다.그는 갈증을 해소해야 했다.고은서의 앵두 같은 입술을 보자 그녀의 온몸을 끌어당겨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그녀가 벗어나지 않도록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부터 위쪽을 꽉 눌러 밀착시켰다.갑작스러운 키스에 고은서는 당황스럽고도 화가 났다.하지만 곽승재의 두 팔이 쇠붙이처럼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벗어날 수 없었다.그는 옆으로 앉아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녀의 입안을 헤집는 동시에 그녀를 들어 올려 자기 무릎 위에 앉혔다.이 야릇하고 친밀한 자세에 고은서는 너무 화가 나서 목구멍으로 소리를 냈다.“읍!”그녀는 필사적으로 손을 빼서 곽승재의 뺨을 때리려고 했지만 술에 취한 곽승재의 힘은 평소보다 더 강했다.그는 저항하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온몸을 의자 등받이에 밀어붙였다.주민기는 속으로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대체 여기 왜 왔을까.집에서 편히 쉬면서 고양이와 놀았을걸.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제압당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체격과 체력의 격차 때문에 그녀는 곽승재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띠링띠링, 귀염둥이 전화 왔어요~”바로 그때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고 시끄러워서인지, 아니면 이성이 돌아와서인지 곽승재는 결국 공격을 멈췄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물리칠 힘이 없었기에 숨을 헐떡이며 낮게 말했다.“전화 받아야 해.”술에 취해 붉게 물든 곽승재의 눈동자에는
곽승재에게 이렇게 고약한 취향이 많다는 걸 왜 전에는 몰랐을까?그 순간, 고은서의 전화벨이 끊겼고 곽승재는 다시 그녀를 꽉 껴안았다.“안 받아도 되네...”고은서가 그를 때리려는 순간 칸막이가 내려가며 주민기가 시선을 내리고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대표님, 백 이사님께서 대표님 휴대폰이 꺼져 있다면서 할 얘기가 있으시답니다.”곽승재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주민기의 전화기에 손을 뻗었고, 고은서는 짜증스럽게 곽승재를 밀어내고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백유미의 부재중 전화였다.백유미는 정말 곽승재의 행방을 손바닥 보듯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에게까지 연락을 하다니.“무슨 일이야?” 곽승재는 옷깃을 잡아당기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승재야, 목소리가 왜 그래, 술 많이 마셨어?”백유미가 걱정하자 곽승재는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무슨 일이야?”“여기로 올 수 있어? 만나서 얘기해. 내가 거기로 가도 되고. 급한 상황이라 전화로는 얘기하기 어려워.”곽승재는 고은서를 흘깃 쳐다보았고, 그녀의 작은 얼굴은 이 순간 다시 낯설고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갔다.“내가 갈게.”그렇게 말한 뒤 곽승재는 전화를 끊었다.“차 세워, 택시 타고 갈래.”고은서가 눈치껏 말했지만 곽승재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고, 숨결에는 아직도 술 냄새와 취기가 묻어났다. “기사님한테 데려다 달라고 해. 우리가 택시 타고 가면 돼.”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쳐내자 곽승재는 눈빛이 어두워지면서도 차를 세우게 했다.곽승재와 주민기가 모두 차에서 내린 후 고은서는 민시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밤 식당에서 서인수를 본 것에 대해 말하며 서인수의 사생활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명운 대표로서 인성에 문제가 있으면 앞으로 상장에도 영향을 미칠 테니까.투자 문제에 관해서는 협조적이었던 민시후가 오케이 이모티콘을 보냈다.예원 별장으로 돌아온 고은서는 수건으로 입술을 세게 문질렀다.곽승재 그 변태 자식이 술을 많이 마시면 미칠 줄이야!전생에는 분명
구경꾼들은 그다지 좋지 않은 시선으로 고은서를 쏘아보기 시작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옆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이쁘게 생겨서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다른 사람 고양이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벤치까지 발로 차고 이 정도면 공공시설 훼손 아니야?”“그러니까 말이야. 요즘 여자애들이 너무 오냐오냐하게 자라서 하나둘씩 공주병이라니까.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저러는 거지.”“언니는 아무 잘못 없어요! 그리고 공주병도 아니에요!”곽승연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언니는 다른 고양이를 뺏는 나쁜 사람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발로 차는 사람도 아니에요!”“뒤로 넘어진 걸 우리가 다 봤는데 뭐가 아니라는 거야.”구경꾼 중의 누군가가 피식 웃으면서 비아냥거렸다.곽승연은 급한 마음에 눈시울이 빨개졌다.“거짓말 아니에요. 언닌 좋은 사람이에요.”고은서는 애써 두려움을 참고 자신을 위해 나서주는 곽승연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여시은 때문에 치밀어 올랐던 화도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듯했다.“승연아, 언니는 괜찮으니까 저 사람들이랑 시간 낭비하지 않아도 돼.”고은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언니는 처리할 일이 있으니까 기사한테 너를 민아 언니한테 데려다주라고 말해 둘게.”곽승연은 고은서가 조금 전에 신고한 걸 알고 있었다.그리고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게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고은서를 차마 혼자 두고 갈 수 없었기에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언니, 나도 같이 갈래요.”“언니 정말 괜찮아.”고은서는 말하면서 주차장에서 대기 중인 기사에게 연락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가 도착했다.동시에 경찰들도 신고를 받고 현장으로 왔다.곽승연은 용기 내 여시은을 가리키면서 경찰들을 향해 말했다.“경찰 아저씨, 저 여자 나쁜 사람이에요. 우리 언닌 그저 저 여자가 고양이를 학대하는 걸 막으려다가 실수로 밀친 것뿐이에요. 얼른 저 여자를 잡아요.”여시은 순간
“그만해!”쿠아의 비명과 함께 고은서는 여시은 손에 있는 캣스틱을 빼앗아 땅에 내팽개쳤다.“당신 정말 머리에 문제 있는 거 아니에요? 이건 명백한 학대라고요.”쿠아의 입가에는 빨간 핏자국이 생겼고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발버둥을 치면서 여시은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다.그러나 여시은은 쿠아를 꼭 잡고 억울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저는 그냥 간식을 주다가 부주의로 살짝 찍은 것뿐이데요.”고은서는 발버둥 치는 쿠아를 보면서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동물병원 의사가 전에 쿠아의 상태를 검사하면서 학대받은 것 같다고 했었는데 정말 당신이었어.”여시은은 고은서의 화난 모습에 더 환하게 웃어 보이며 쿠아의 털을 쓰다듬었다.“은서 씨, 전에도 말했잖아요. 저를 기분 나쁘게 만든 사람은 꼭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요.”마침 쿠아가 전에 심하게 다쳤던 날에 유일 투자 은행이 개업했다.여시은은 후에 돌아가자마자 쿠아가 심하게 다친 채 땅에 누워 있었다면서 사진까지 보여줬었는데 사진 속의 쿠아는 초점을 잃은 동공에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이발도 다 빠져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고은서는 그 사진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그때 그 사진을 보여준 것도 나 기분 나빠 하라고 보여준 거였어. 그런데 개업식 날에 난 여시은이랑 여재훈을 건드린 적이 없는데. 곽승재랑도 간단히 인사만 나누었을 뿐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런데 왜 기분 나쁘다고 뒤돌아 쿠아를 괴롭히는 거지?’“여시은 씨, 저한테 화가 난 거라면 직접 저를 찾아와 말했어야죠. 왜 쿠아한테 화풀이하는 거예요?”고은서는 여시은의 행위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쿠아는 당신 애완묘잖아요. 어떻게 이리 약하고 가여운 생명한테 손을 댈 수가 있어요?”여시은은 무지 기쁘다는 듯 소리 내 웃으면서 답했다.“누가 쿠아 보고 은서 씨를 좋아하래요? 지금 은서 씨의 반응을 보니 저도 틀린 판단을 한 건 아니네요.”“변태!”더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
송민아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민시후 하나로도 충분하거든. 더는 어느 남자 뒤를 쫓아다니고 싶지 않아. 주인혁처럼 인기 있는 사람과 연애하려거든 내가 더 피곤해질걸.”감정이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정말 생각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주인혁한테 말해볼게.”“아니. 필요 없어. 지금 상태가 제일 좋거든. 쓸데없는 감정에 얽히고 싶지 않아.”송민아가 단호하게 거절했다.고은서도 더는 강요하지 않고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주겠다고 말했다.그날 오후.고은서가 처리할 일들을 다 처리하고 곽승연의 요구대로 비둘기한테 먹이 주러 공원으로 향했다.공원은 널찍한 데다가 환경도 깨끗하고 좋았다.광장에 도착한 후 고은서는 비둘기 먹이를 사서 곽승연한테 쥐여주고는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예전부터 비둘기를 좋아했던 곽승연은 인내심 있게 천천히 그들에게 먹이를 뿌려주었다.이곳의 비둘기 또한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곽승연의 손에 날아오르기까지 했는데 그녀는 거부하는 대신 환한 미소를 드러냈다.고은서는 이 장면을 촬영해 서연정한테 보내주었다.서연정은 연신 고은서한테 고맙다고 인사했다.두 사람이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고은서는 아주 익숙한 향기를 맡았다.이는 고은서가 여시은을 위해 제작한 우드향 퍼퓸 향이 분명했다.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여시은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여시은은 명품 브랜드 원피스를 입고 고양이 가방을 멘 채 쿠아를 안고 있었다.그녀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쿠아가 전보다 훨씬 약해진 데다가 털도 윤기를 잃은 것 같았다. 심지어 눈빛도 전과 달리 흐리멍덩해 보였다.“하인한테 투약 당한 후로부터 기죽어 있는데 제대로 먹지도 않아서 걱정이에요.”고은서의 시선을 느낀 여시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다 여시은이 혼자 꾸민 일이잖아. 그러니까 하인이 쿠아한테 투약한 것도 여시은의 지시를 받은 거겠네.’고은서는 몰래 녹음 버튼을 누르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여시은 씨, 쿠아는 여리고 작은 동물일 뿐이
고은서와 곽승재는 동시에 곽승연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아주 긴장된 상태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방금 부모님의 싸움 현장을 겪은 곽승연은 아직도 긴장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애썼고 그도 눈치 있게 그녀를 놓아주었다.그녀는 곽승연 곁으로 다가가 웃어 보이며 그녀를 위안했다.“승연아, 우린 괜찮아.”“정말이에요?”곽승연이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곽승재는 표정 관리를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오빠가 언니한테 장난 좀 친 것뿐이야.”곽승연은 그제야 시름을 놓고 고은서 따라 부엌을 나왔다.“언니, 아까 오빠랑 뽀뽀 유희를 한 거예요?”곽승연이 갑자기 천진한 목소리로 물음을 제기했다.“...”고은서는 순간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그러니까 아까 곽승재가 나한테 키스하는 모습을 봤단 말이지? 곽승재는 정말 머리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 전엔 화내며 가더니만 왜 갑자기 또 나한테 키스하고 난리야.’고은서는 이내 곽승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인했다.“승연이가 잘못 본 거야. 아무 일도 없었어.”곽승연은 더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고은서가 부끄러워서 답을 피할 뿐 절대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고 굳게 믿었다.고은서가 곽승연을 욕실로 들여보낸 뒤 곽승재도 부엌에서 나왔다.옷이 덜 마른 탓에 그는 옷소매를 위로 거두면서 굵은 팔뚝을 드러냈다.“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돌아가서 쉬어. 승연이는 내가 돌볼게.”“승연이 잘 부탁해.”곽승재는 머뭇거리다가 한 마디 남기고는 캐리어를 들고 떠났다.고은서는 부엌을 힐끗 들여다보았는데 그릇은 이미 다 씻겨 있었지만 싱크대와 바닥은 물과 거품으로 가득했다.‘아줌마가 보면 곽승재 설거지했다고 감동할지 아니면 이 아수라장이 된 부엌을 보고 환장할지 은근히 기대되네.’...이튿날, 고은서가 눈을 떴을 때 곽승연은 이미 깨어 있었다.어제보다 상태가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집으로 돌아가는 걸 거부했다.“언니,
면을 먹은 후 곽승연은 방금전보다 상태가 훨씬 나아진 듯했다.고은서는 그녀와 함께 소파에 앉아 아이패드를 보면서 화젯거리를 찾았다.단 한 번도 부엌에 들어가 본 적이 없던 곽승재는 그릇을 거두더니 자연스레 설거지까지 해놓을 생각이었다.쨍그랑!고은서와 곽승연이 한창 재미나게 패드를 보고 있을 때 부엌에서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곽승연한테 소파에 가만히 있으라고 당부한 뒤 부엌으로 걸어갔다.아니나 다를까, 그릇 조각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는 데다가 세제 덮개는 열려 있었고 싱크대와 곽승재의 손은 거품투성이였다.“세제를 물로 쓰는 거야?”곽승재는 평소에 당당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던 모습과 달리 약간 주춤하더니 어색한 듯 헛기침을 한 번 했다.“처음 해보는 거라서 많이 따랐나 봐.”“더 따르지 그랬어? 그럼 안에 들어가서 수영해도 될 텐데.”“...”곽승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이 작은 구멍이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 한 번도 생각 안 해 봤어? 딱 봐도 세제를 짜는 데 쓰이는 거잖아.”고은서는 덮개를 들고 곽승재를 비난하기 시작했다.부엌에 단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던 곽승재는 생활 지식이 결핍했던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그가 땅에 있는 그릇 조각들을 주우려고 할 때 고은서가 황급히 제지했다.“잠시만! 빗자루로 쓸면 돼. 손으로 줍다가 상할 수도 있으니까. 또 손을 다쳤다고 이런저런 요구를 제기하면 그땐 정말 쫓아낼 거야.”곽승재는 반박하지 않고 빗자루를 들고 평소에 사인만 하던 손으로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땅을 쓸기 시작했다.“당신이 청소할 줄 안다고 생각한 내가 바보지.”그 모습을 본 고은서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육현석은 각양각색의 음식을 다 할 줄 알던데 당신은 왜 이런 거야? 세제도 쓸 줄 모르고 아무리 집안 배경이 좋고 잘생겼다고 한들 이러고 누가 당신한테 시집을 가겠어.”고은서는 투덜거리면서 곽승재 손에 있는 빗자루를 빼앗으려 했다.그러나 곽승재가 그
“오빠요.”곽승연이 답했다.‘아마 어머니한테서 승연이가 내 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겠지.’고은서는 더는 상관하지 않았다.“얼른 손 씻고 밥 먹자.”“네.”곽승연은 손 씻으러 가고 고은서는 물을 따르러 갔다. 그러나 바로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고은서가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오빠일 거예요. 방금 언니 집에 있다고 했는데 금방 오겠다고 했어요.”손 씻고 나온 곽승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언니, 나 혹시 뭐 잘못했어요?”곽승연은 두 사람이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고 또 전에 만날 때마다 서로 모순이 생겨 다툰 것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녀는 고은서가 자신을 탓하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곽승연의 생각을 알아차린 고은서는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아니. 승연이는 아무 잘못이 없어. 오빠도 승연이가 걱정되어서 보러 온 걸 거야. 먼저 먹고 있어. 언니가 문 열게.”“네.”곽승연은 이내 식탁 앞에 앉고 고은서는 문을 열어주러 갔다.아니나 다를까 곽승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금방 출장을 마치고 온 그는 작은 캐리어를 끌고 외투를 팔에 걸치고 있었는데 약간 피곤해 보였다.“승연이 여기 있어?”“응. 들어와.”고은서는 이내 들어오라고 옆으로 비켜주면서 답했다.곽승연은 그를 보자마자 오빠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내 시선을 고은서한테로 돌리면서 기뻐하며 말했다.“언니, 쫄면 너무 맛있어요. 저 이렇게 맛있는 쫄면은 처음이에요.”“언니가 한 게 맛있는 게 아니라 승연이 네가 너무 배고파서 뭐 먹어도 맛있게 느껴지는 거야.”음식 냄새를 맡은 곽승재도 저도 모르게 배가 고파 났다.그러나 식탁 위에 놓인 면을 보면서 차마 자기도 먹고 싶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고은서는 면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곽승재를 보면서 말했다.“마침 한 그릇 남았는데 배고프면 먹어.”원래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그는 이혼한 이후로 고은서가 해준 음식을 먹은 적이 없었다.전미자의 부탁으로 그를 보
호전된 곽승연이 또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걸 원치 않았던 서연정은 그녀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알겠어. 울지 마. 그럼 오늘은 돌아가지 말고 언니 집에 있자.”고은서는 곽승연의 어깨를 토닥여주면서 그녀를 달랬다.“그래그래. 오늘은 언니랑 같이 있자.”곽승연은 그제야 서서히 진정되는 듯했다.“은서야, 그럼 승연이를 부탁할게.”서연정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고은서는 서연정이 상처받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도 위안이 될 것 같지 않았다.“괜찮아요, 어머니. 승연이는 제가 잘 돌볼게요.”서연정은 곽승연을 안고 한참 동안 달래면서 그녀가 진심으로 집으로 돌아가길 원치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뒤돌아 떠났다.서연정이 배웅해 준 후 고은서는 곽승연 곁에 다시 앉았다.그녀는 잠이 깼는지 혼자 소파에 앉아 인형을 안고 멍때리고 있었다.“승연아, 배 안 고파? 언니가 밥해줄까?”“배 안 고파요.”곽승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그러나 이내 그녀의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뭐 먹고 싶어? 만두? 면? 아니면 죽?”“다 돼요.”곽승연은 어색한지 얼굴이 빨개졌다.고은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말했다.“그럼 언니가 먹을 것 좀 해올게. 언니 집에서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마음껏 돌아봐.”곽승연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서는 냉장고에서 여러 가지 채소와 계란을 꺼내 쫄면과 스크램블을 요리할 생각이었다.전에 곽승재의 관심을 얻기 위해 요리를 배우면서 시간 날 때마다 밥상을 푸짐하게 차리고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었다.하지만 곽승재는 무심하게도 거의 집에 돌아오는 일이 없었다.가끔 그녀가 해준 밥을 먹으면서 단 한 번도 칭찬이라곤 해주지 않았다.그러나 예전의 고은서는 그가 자신이 해주는 밥을 먹어주기만 해도 흥분해 하며 좋아했다.‘전에는 정말 왜 그랬지? 곽승재가 없으면 못 사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했는지 몰라. 그런
서로 다투던 광경이 떠올랐는지 평소엔 온화하고 담담해 보이던 서연정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승연이는 우리가 밥 먹을 때부터 정원에서 혼자 놀고 있었는데 아마 애 아빠가 상을 엎는 소리가 하도 커서 놀랐던 것 같아.”서연정은 말하면서 곽승연을 바라보았다.“내가 정신 차리고 승연을 찾으러 갔을 땐 이미 사라진 후였고.”하인들도 곽승연이 어디 갔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은 탓에 나중에 CCTV 동영상을 돌려보고서야 그녀가 뒷문으로 달려 나간 걸 발견했다고 한다.그리고 하인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 한참 동안 찾아보았지만 곽승연은 보이지 않았고 고은서가 전화했을 땐 마침 신고하려던 참이었다고 설명을 보탰다.그녀는 서연정이 얼마나 다급해하고 절망스러워했는지 상상이 갔다.“저도 오늘 평소보다 집에 늦게 들어오고 또 마침 도우미 아줌마가 휴가를 내는 바람에 집이 비어 있었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승연이를 더 빨리 만나서 어머니한테 연락드릴 수 있었을 텐데.”“아니야, 네 잘못은 하나도 없어. 내가 급한 마음에 승연이 해성에서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너 아니면 승재라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서연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고은서는 피곤해 보이는 서연정을 보며 물었다.“어머니, 곽 회장님과 사이가 그토록 좋지 않은데 왜 이혼하고 승연이를 혼자 데리고 살지 않는 건가요? 아무리 어르신들의 약속을 대신 지켜드리기 위해 이혼하지 않는 거라고 하지만 할머니께선 어머니가 행복하게 사는 게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이혼하신다고 해도 절대 반대하지 않으실 거예요.”자기보다 어른인 데다가 예전엔 시어머니였던 사람을 이혼하라고 달래는 게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고은서는 서연정이 이미 벼랑 끝에 맞닿은 결혼생활을 굳이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었다.그녀의 말을 들은 서연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지금까지 계속 이렇게 살아왔는데 이혼하든 말든 달라지는 건 없어. 그나마 이혼하지 않으면 GS그룹
“몰라요. 엄마 아빠가 싸워서 무서워서 오빠랑 언니 찾으러 온 건데 다 집에 없었어요...”곽승연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낮아졌다.고은서는 아무 말도 없이 혼자 달아나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아냐고 그녀를 꾸짖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시간은 저녁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서연정은 아마 곽승연이 사라진 걸 발견하고 미친 듯이 찾고 있을 것이다.고은서가 전화를 걸자마자 서연정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승연이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아. 혹시 너한테 간 거니?”“어머니, 먼저 진정하세요. 승연이는 제가 데리고 있어요.”고은서가 그녀를 위안했다.서연정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야. 내가 지금 데리러 갈게.”고은서는 전화를 끊고 곽승연 곁에 앉아 물었다.“승연아,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차엔 어떻게 오른 거야?”곽승연은 인형 호주머니에 넣어둔 용돈으로 택시를 타고 온 거라고 사실대로 답했다.고은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녀를 교육했다.“다음부턴 무슨 일 있으면 먼저 언니한테 전화해. 이렇게 함부로 뛰쳐나왔다가 나쁜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떡하려고 그래.”곽승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혼자 밖에서 오랫동안 앉아있은 탓인지 눈에 띄게 피곤해 보였고 아직 조금 전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고은서는 계속해 비난하는 대신 그녀를 꼭 껴안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달래주었다.덕분에 긴장이 풀린 곽승연은 스르르 잠에 들었다.반 시간 후, 밖에서 서연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조용히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눈가가 빨개진 서연정은 소파에 누워 잠든 곽승연을 향해 다가가더니 그녀가 다친 곳은 없는지 자세히 살펴보았다.곽승연이 괜찮다는 걸 확인한 서연정은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옆에 있던 고은서는 그녀에게 종이를 건네주었다.“어머니, 승연이는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서연정은 종이로 눈물을 닦으면서 연시 고맙다고 인사했다.“은서야, 정말 고마워.”고은서는 서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