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시후는 지긋지긋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민아가 스스로 혼나기를 자초한다면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야.”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찻집 문으로 향하며 나서기 전 고개를 돌렸다.“시후야, 고은서 씨의 아이가 너랑 관련이 있든 없든 무리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아저씨 쪽에서는 나만큼 말이 잘 통하지 않을 거야.”“지금 협박하는 거야?”민시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송민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답했다.“그저 충고야.”말을 마친 송민준이 긴 다리로 자리를 떴다.민시후는 멀어지는 송민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지만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늦은 밤 간병인을 돌려보낸 고은서는 침대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병실은 아무리 좋아도 병실이었다.지워지지 않는 소독약 냄새는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고은서는 핸드폰을 꺼내 주의를 분산시키려고 했다.동영상을 보고 있을 때 고은서는 주인혁이 참가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방송 중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편집한 영상에는 인기 많은 멤버가 몇 명 있었는데 주인혁도 그중에 포함되었다.주인혁은 제작인이 일률로 나눠준 훈련복을 입고 있었는데도 남들보다 훨씬 더 밝고 멋져 보였다.노래할 때 주인혁의 우월한 비주얼과 독특한 무대 매너는 더 눈에 띄었다.댓글에서도 주인혁의 정보를 묻는 사람이 많았고 또한 순정 만화 주인공과 같은 동시에 묘한 야성미가 느껴져 설렌다는 댓글들도 보였다.그러한 댓글에 고은서는 진심으로 주인혁을 위해 기뻐했다. 마치 친동생이 철들고 출세해서 느끼는 자부심과 우월감도 느꼈다.요즘 주인혁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아마 훈련으로 바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30위 안에 든 사람들을 위해 주최 측에서 축하 파티를 한다더니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고은서는 굳이 주인혁에게 메시지를 보내 방해하지 않고 앱에 들어가 그가 출연한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었다.전생에도 핫했던 오디션 프로그램답게 화질과 편집은 확실히 좋았고 참여자들도 저마다의 특색이 있었다.연속 두 편
오후에 화가 나서 떠나고 저녁에 했던 통화에서도 매서웠던 곽승재의 기세에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지금 와서 따지려는 건 아니겠지?’고은서 혼자서는 곽승재를 이길 수 없었다.졸음에서 거의 깨어난 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벨을 눌러 간호사를 불러 곽승재를 쫓아내려고 했다.하지만 손을 다 뻗기도 전에 곽승재가 정확히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취한 것 같은데 왜 동작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거야?’“뭐 하려고?”곽승재가 싸늘히 웃으며 물었다.술에 취했는지 그의 말은 평소보다 느렸고 눈빛은 평소보다 더 제멋대로였고 평소보다 더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겼다.고은서는 모르는 척 합리적인 핑계를 댔다.“목말라서 간호사에게 도움을 청하려고.”곽승재가 긴 팔을 뻗어 침대맡에 놓여있던 컵을 그녀에게 내밀었다.“마셔.”곽승재에게 강하게 잡힌 고은서는 힘껏 발버둥 치지 못하고 나지막이 말했다.“이건 식었잖아. 따듯한 걸 마시고 싶어.”그 말을 들은 곽승재의 입가에 불현듯 요염한 미소가 번졌다.곽승재는 컵에 든 물을 마시고 고은서의 얼굴을 감싸 쥔 채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싫어!”곽승재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고은서는 얼른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성깔이 올라온 곽승재는 입을 가린 고은서의 손을 잡더니 기어코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목 안 말라!”그의 입이 닿은 순간 고은서는 급하게 외치며 고개를 돌렸다.곽승재의 입술은 그녀의 귓불에 닿았고 차갑고 물기 있는 입술이 귓가에 떨어지자 고은서는 전율을 참을 수 없었다.곽승재는 무언가 재밌는 일이라도 발견한 듯 차가운 입술로 그녀의 귓바퀴, 목, 쇄골을 훑으며 고은서를 자극했다. 그녀는 당황하면서 끊임없이 몸부림을 쳤다.“곽승재! 꺼져! 나쁜 놈!”수치심을 느낀 고은서가 분노에 차 외쳤다.그녀의 불편함을 느꼈는지 곽승재는 정말 움직임을 멈췄다.하지만 고은서가 숨 돌릴 틈도 없이 뜨거운 눈동자가 반짝이더니 그는 그녀의 두 손을 침대 위로 누르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날카로운 통증이 전해졌고 고은서는 아파서 오열했다.그에 반해 곽승재는 평소보다 더 흥분하여 그녀의 긴 목덜미를 미친 듯이 유린했다.귓가에서 들려오는 곽승재의 숨결은 거칠고도 뜨거워 고은서는 자기가 호랑이 굴에 떨어진 약한 먹잇감처럼 느껴졌다. 굶주린 맹수에게 한입에 핥이고 삼켜질 것만 같았다.이때의 곽승재는 평소의 냉철함은 완전히 사라지고 입술과 손은 뜨거웠고 몸까지 뜨겁게 달아올랐다.고은서는 더 깊게 잠든 야성을 불러올까 두려워 감히 몸부림칠 생각도 하지 않고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었다.이내 곽승재는 키스에 만족하지 않고 손으로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약간 거친 손가락이 여린 피부를 스치자 고은서는 온 몸에 전기가 통한 것처럼 간지럽고 저릿했다. 곽승재는 두 팔로 그녀를 꼭 껴안았는데 마치 그녀를 품속에 가두고 싶은 듯한 모양새였다.단단히 붙들린 고은서의 체온도 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 이 상태를 유지하면 통제 불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아직 몸이 허약한 그녀는 이런 자극을 견딜 수 없었다.강한 태도로 곽승재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고은서는 태도를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눈물을 짜내며 자신을 불쌍하게 보이려 애썼다. 고은서는 숨을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승재 씨, 아파. 놔줘.”안쓰러운 그녀의 어조 때문인지 곽승재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눈꼬리가 붉어지고 눈빛이 뜨거워진 곽승재에게는 여전히 욕망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는데 그걸 본 고은서도 너무 뜨거워 뜨끔해졌다.“오빠....”고은서는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어 말했다.“나 놔주면 안 돼?”곽승재의 눈빛이 반짝이며 더없이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뭐라고 부른 거야?”그의 손바닥이 더 이상 아래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고은서가 가볍게 대꾸했다.“승재 오빠...”이 호칭을 들은 곽승재는 두 손으로 그녀를 더 꽉 껴안으며 기쁘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은서야, 나 좋아하잖아. 그런데 왜 허락하지
고은서는 곽승재의 광기와 집념을 엿보고는 소리쳤다.“지금 나를 만진다면 정말 평생 미워하고 원망할 거야!”“미워할 거면 그렇게 해. 어차피 나랑 평생 살 생각 없잖아.”곽승재는 차가운 눈초리로 벨트를 내던지고 서슴없이 다가왔다.갑작스럽고 낯선 통증에 고은서는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면서 곽승재의 팔뚝을 물었다. 마치 살점을 뜯어낼 것처럼 말이다.곽승재는 한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강하게 움켜쥐어 고은서가 어쩔 수 없이 입을 풀게 했다.“곽승재,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너랑 같이 죽을 거야.”고은서가 눈물을 머금은 채 원망과 결심이 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 자식 아이를 그렇게까지 신경 쓰는 거야?”차갑게 말한 곽승재의 얼굴은 더욱 싸늘해졌고 그는 고은서의 두 다리를 더 꽉 조였다.병실 안은 순식간에 곽승재의 거친 숨결과 고은서의 오열로 가득 찼고 몇 마디의 질책도 뒤섞였다.얼마나 지났을까, 곽승재의 눈동자는 더욱 붉게 변했고 그는 몸을 숙여 고은서를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고은서, 아이는 지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 다시 시작하는 거야.”말할 힘까지 다 빠져버린 고은서는 눈물도 그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두었다....고은서는 갈증이 나서 잠에서 깼다.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물을 마시려고 했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움직이지 마.”박지연의 소리에 겨우 눈을 뜬 고은서는 비로소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박지연은 침대 옆에 앉아 있었는데 창밖으로 스며드는 햇살로 보건대 이미 대낮이었다.어젯밤 곽승재에게 들들 볶여 숨이 막혔던 고은서는 그대로 잠에 빠졌다.곽승재가 언제 갔는지 그녀는 몰랐고 박지연이 온 사실도 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물 마시려고? 따라줄게.”박지연은 그녀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고 그녀를 일으켜줬다.갈증이 났던 고은서는 물 한 잔을 다 마셔버렸다.“더 마실래?”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오늘 당직 아니잖아. 어쩐 일이야?”“곽승재가 불러서 왔어.
고은서는 더욱 이를 갈며 말했다.“정말 나한테 무슨 짓을 했다면 강간죄로 신고했을 거야! 근데 너는 우리가 안 했다는 걸 어떻게 알아?”고은서가 의문스럽게 물었다.박지연이 답했다.“곽승재가 혹시라도 내가 상황을 모르고 전신 검진을 받게 할까 봐 숨기지 못하더라고.”‘그랬구나.’지금 고은서의 모습은 검진을 받기 적합하지 않았다.“곽승재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널 신경 쓴다고 하기에는 한밤중에 와서 네가 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괴롭히고... 그렇다고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기에는 약 발라주고 날 불러서 너랑 같이 있어 달라고 하고...”박지연이 계속 투덜댔다.어젯밤 미친 듯이 행동한 곽승재를 떠올린 고은서는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그는 통제 불능인 짐승처럼 그녀를 산 채로 잡아먹고 싶어 하는 듯했다.특히 그녀의 목을 문 순간, 고은서는 정말 물려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곽승재가 받은 충격이 가볍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은서야, 곽승재한테 무슨 일 있어?”박지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아침에 봤을 때 뭔가 알 수 없는 갈등을 품고 있는 것 같았어. 뭐가 고민일까? 네가 깨어날 때까지 직접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냥 가더라고. 남의 아이를 임신했는데도 이혼하고 싶지 않은 건가?”어젯밤 곽승재가 그녀의 귓가에 했던 말이 다시 뇌리에 떠올랐다.“아이는 지워. 다시 시작하자.”곽승재의 성격상 이혼하지 않는 건 그녀를 괴롭히기 위해서인데 다시 시작하자는 제안을 해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아침에 서둘러 자리를 뜬 건 어쩌면 그런 말을 후회해서 그럴지도 몰랐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소송으로 갈 거야.”고은서는 민시후에게 변호사를 찾아달라고 한 부탁은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은서야, 곽승재가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면 소송으로도 이기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은 안 해본 거야?”박지연이 물었다.이 말은 민시후도 이전에 언급한 적이 있었다.“내가 왜 민시후한테 도움을 청한 것 같아?”고은서는 더
고은서와 박지연은 백유미가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고 옷을 걷어 올린 뒤 좋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아니요. 안 돼요.”고은서의 답을 들은 백유미는 화내지 않고 간병인에게 병실로 넣어달라고 하고는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사모님, 요 며칠 동안 허리가 너무 아파서 일어나지 못해 제때 보러 오지 못했습니다. 별일 없으시죠?”박지연은 참지 못하고 눈을 흘기며 말했다.“얼굴도 두껍네요. 은서가 환영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유미 씨, 사모님을 구하려다가 다쳤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백유미 옆에 있던 간병인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감사해하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못되게 구는 거예요?”갑작스러운 간병인의 참견에 어색해진 백유미는 부드럽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아주머니, 먼저 나가주세요. 사모님이랑 말씀 좀 나누게요.”“은서는 당신이랑 할 말 없어요. 그대로 나가세요!”박지연은 성모처럼 구는 백유미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정말 온 세상에 혼자만 좋은 사람인 것처럼 굴죠! 다 속셈을 품고 있다는 거 알아요!”박지연의 말을 듣고 백유미의 표정은 더 어색하게 굳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말을 이었다.“지연 씨랑 사모님이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요. 그대로 해명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어제 대표님이 주 비서님한테 아침을 보낸 건 그냥 겸사겸사 한 일이에요. 특별한 뜻은 없어요.”백유미가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사모님, 대표님께서는 사모님이 화나서 또 무슨 충동적인 행동을 할까 봐 이틀 동안 제 병실에도 오지 않으셨어요. 저랑 대표님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더 이상 오해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백유미 씨 뜻은 곽승재가 당신을 보러 갔다는 사실을 은서가 알면 죽기 살기로 난동을 부린다는 말인가요?”박지연이 참지 못하고 백유미의 말을 가로챘다.“그래서 곽승재는 그 이유때문에 당신한테 몰래 관심을 줄 수밖에 없었고?”백유미는 동요 없이 답했다.“그 뜻이 아니에요. 저는 단
“은서야,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유성준은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별일은 아니고요. 그냥 MQ에서 출근하는 게 어떤지 여쭤보고 싶어서 연락했어요.”유성준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좋아. 아저씨도 나를 믿어주시고 회사 직원들도 잘 협조해 줘.”“그럼 다행이네요.”고은서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하지만 네가 알아야 할 일이 있어.”유성준이 말을 이었다.“최근 MQ에 대해 알아봤는데 경영 상태 겉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은데 사실은 좋지 않아. MQ에서 이전에는 향수를 주력으로 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혁신이 없어서 시장에서 곧 밀려날 거야. 현재 샴푸와 린스, 에센스도 특별히 뛰어난 점이 없어서 경쟁업체를 뛰어넘을 수 없어.”“그럼 어떡해요?”고은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이번 생에 MQ가 위기에는 처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불안정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유성준이 위로했다.“발등에 불이 떨어진 급한 상황도 아니라 변화를 주더라도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해서 시간이 필요해.”“그래요. 바쁜 일만 끝나면 같이 외할아버지와 상의해요. 아니다. 그냥 저희끼리 대책을 논의해 봐요.”나이도 많고 건강도 좋지 않은 외할아버지가 MQ를 삼촌에게 맡긴 것은 더 이상 신경 쓸 여력이 없기 때문이었다.“그래, 난 언제든지 시간이 있으니 편할 때 연락해.”유성준이 온화하게 답했다.두 사람은 몇 마디 한담을 나누고 통화를 끝냈다.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할 때 카톡으로 원지훈이 보낸 음성메시지가 왔다. 고은혜의 안부를 묻는 내용이었다.회사 일로 바빠서 고은혜를 소홀히 했더니 화가 나서 그를 차단했다고 했다.고은서는 고은혜가 이번에는 원지훈에게 쉽게 속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지난 생처럼 비참하지 않겠지?’원지훈이 쓸모가 있다고 판단한 고은서가 답장했다.[미안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은혜가 나한테 모든 걸 얘기하는 건 아니야. 나도 은혜 행방을 잘 몰라.]고은서의 태도로 인해 원지훈은 손쉽다는 착각에 빠졌는지 다시 답장해
곽승재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어젯밤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었다.고은서의 가녀린 몸, 하얗다 못해 투명한 듯한 피부는 따뜻한 불빛 아래 부드러운 도자기처럼 빛나 넋을 잃게 했다.그는 자신의 욕망을 통제할 수 없었고 그저 그녀를 차지하고 몸 곳곳에 그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고은서는 그에게 괴롭힘을 당해 눈물까지 흘렸지만 끝까지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예쁜 눈에 분노를 담아 그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은 그로 하여금 더욱 힘껏 그녀를 괴롭혀 굴복시키고 싶었다.무의식적으로 침을 삼킨 곽승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고은서, 어젯밤 부단히 도발하던데 그 후과는 예상하고 한 거 아니야?”고은서는 곽승재의 파렴치함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짐승처럼 괴롭혀 놓고 내가 도발했다고?’“곽승재, 이 개자식아!”그 말을 들은 곽승재는 그녀를 차갑게 흘겨보았다.“또 건드리네. 한 번 더 하고 싶은 거야?”‘개자식일 뿐만 아니라 오만방자하기까지 하네.’곽승재의 뻔뻔함에 비할 수 없었던 고은서는 더 이상 그와 의미 없는 말싸움을 이어나가지 않았다.“나가. 이혼 외에는 당신이랑 할 말 없어.”곽승재는 분노를 억누르며 가방에 있던 서류를 고은서에게 내밀었다.고은서가 경계하며 물었다.“뭔데?”“네가 원하던 거.”고은서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이혼 서류야?”‘이제야 불륜을 용납하지 못해 이혼하려는 건가?’곽승재는 가벼운 냉소를 지으며 답했다.“직접 열어봐.”고은서는 곽승재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서류를 열었다.안에는 뜻밖에서 부동산 서류와 키가 들어있었다.“무슨 뜻이야?”고은서가 크게 실망하며 물었다.“이혼 서류라며?”“네 멋대로 생각한 거잖아.”곽승재는 담담한 말투로 답했다.“시그니엘이야. 인테리어는 당신이 전에 말했던 디자이너에게 부탁해서 했어. 퇴원하면 바로 입주할 수 있어.”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지난번 곽승재가 먼저 같이 밥을 먹으면 집을 준다고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
곽승재의 물음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갔어. 우연히 마주치기까지 했지.”여시은이 그들이 있는 곳을 알고 일부러 찾아왔을 것이라는 의심이 확 들었다.곽승재는 여시은이 WOR 게임 회사에 협력 제의를 했으나 주 개발자에게 거절당했다고 알려주었다.여시은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유혹을 던지는 걸 보면, 고은서가 이 일을 알게 만들어 화나게 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했다.고은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은서야, 무슨 얘기 하려고 했어?” 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일단 여시은의 이 문제를 접어두고, 오늘 송민준의 사무실에서 그의 컴퓨터에 있는 농장 영상을 발견한 일을 설명했다.곽승재는 표정이 복잡해지며 말했다.“송민준이 그렇게 방심할 사람이야? 아니면... 당신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뜻이야?”스스로 질문한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는 씁쓸하게 물어왔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말뜻을 알면서도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송민아가 비밀번호를 알아낸 과정을 설명했다.그녀와 송민준의 관계가 생각처럼 그리 가깝지 않음을 확인한 곽승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송민준이 어떤 반응을 보였어?”고은서는 들은 대로 전했다.“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고은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잘 모르겠어. 만약 그 이유가 아니라면, 송민준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했을까?”송민준이 C 선생이라 해도 농장과는 무관한 일, 조사 동기가 불분명했다.곽승재는 입술을 깨물며 분석을 이어갔다. “우리가 농장 사건을 파헤친 건 시은 씨가 너를 모함해 여 대표님마저 널 의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잖아.”“내 사람들이 샅샅이 조사했지만 결정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어. 전에도 말했지만, 시은 씨가 미리 손쓴 거 같아.”“만약 송민준이 너를 위해 조사한 게 아니라... 이미 그 영상을 확보한 상태였다면?”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고은서가 뭔가 깨달은 듯 소리쳤다. “설마 민준 오빠가 시은이 혐의를 숨겨준 장본인이라는 뜻이야?”곽승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
고은서는 송민준의 반듯한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민준 오빠가 정말 뒤에서 나를 죽이려는 사람일까?’통화를 마친 송민아가 들어오면서 둘의 대화는 자연스레 끊겼다. 송민아가 애교 부리며 조른 끝에 송민준의 손에서 의향서를 가질 수 있었다.점심이 거의 끝날 무렵, 고은서가 먼저 계산을 했다.송민준이 한 끼 식사값 정도 낸다고 문제 될 건 없겠지만, 의향서까지 받은 마당에 식사까지 대접받는 건 좀 민망했다.송민준은 고은서가 계산을 한 걸 알고도 기분 상해하지 않고, 오히려 기분 좋게 받아쳤다. “은서야, 그럼 다음번엔 내가 살 기회를 줘.”...의향서는 손에 넣었다지만 그래도 처리할 일은 여전히 많았다.고은서가 일을 마치고 라이트 문 아파트에 돌아온 건 밤 10시가 다 되어서었다.쑤신 팔을 주무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고은서가 집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검은 쓰레기봉투를 든 곽승재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진한 색 셔츠를 입은 곽승재의 옷자락은 허리에 대충 걸쳐져 있었는데 정장 바지와 긴 다리, 쭉 뻗은 체격에서 귀공자의 기품이 풍겨왔다.하지만 그에 비해 낯색은 별로였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손에 꽉 움켜쥔 검은 쓰레기봉투가 불조화를 이루었다.고은서의 시선을 느낀 곽승재가 고개를 들었다.이 시간에 마주칠 줄 몰랐던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척 지나가기가 더 어색하다고 느낀 고은서가 말을 건넸다.“쓰레기 버리러?”곽승재는 슬그머니 검은 봉투를 뒤로 숨기며 대답했다.“청소 아주머니가 교체하는 걸 깜빡해서 직접 내다 버리려고.”순간 송민준에게서 받은 영상이 생각난 고은서가 물었다.“지금 별일 없지? 너랑 할 이야기가 좀 있어.”말을 마친 고은서가 곽승재 방으로 가려 하자 곽승재가 막아서며 말했다.“너한테로 가자. 내 방이 좀 지저분해서 그래.”청소 아주머니가 다녀갔다면서 방이 지저분하다는 말에 고은서는 의문스러웠지만 더 묻지 않았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재빨리 쓰레기 버리러 계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
송민아의 말투에 묻어난 야유를 고은서가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송민아는 송민준이 고은서에 대한 호감 때문에 몰래 조사를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고은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고 여겼다. 송민준과는 특별한 접점이 없을뿐더러 호감이라 하기엔 애매했다. 게다가 송민준은 묵묵히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었다.‘그렇다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한 걸까?’“그날 은서가 당한 사고가 항상 마음에 걸렸었어.”송민준이 송민아의 질문에 답했다.“그날 내가 늦지 않고 계속 함께 있었다면 은서가 물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거야. 게다가 여 대표가 은서가 시은 씨를 밀었다고 의심했다는 말에 내가 더 미안해서...”송민준이 사과의 뜻을 전했다.“다만 몇 분이라도 빨리 도착했더라면, 적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봤을 텐데 말이야.”이 설명에도 송민아는 만족스럽지 못한 뉘앙스를 풍겼다.“단지 죄책감 때문이야?”고은서는 송민아가 더 엉뚱한 소리를 해댈까 봐 서둘러 말을 끊었다.“민준 오빠, 그날 일은 어떤 각도로 봐도 오빠 잘못이 아니야. 전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어쨌든 진상을 밝혀줘서 고마워. 이 영상 나한테 보내주실 수 있어?”고은서가 조심스레 물었다.“물론이지. 원래도 너 주려고 했었어.”송민준이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이걸 바로 여 대표님께 보여줄 거야?”송민아가 물었다.송민준의 의도가 불분명한 시점에 고은서는 완전히 경계심을 풀 수가 없었다.“아마 재훈 씨는 최근 시은이 회사 설립으로 바쁘실 거야. 이 관건적인 시기에 드리면 내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서 아무래도 개업 축하 파티가 끝나고 나서 다시 얘기하는 게 좋을 거 같아.”“분명 시은 씨가 널 물에 빠뜨리고, 여 대표님의 오해까지 받았는데 넌 뭐 하러 그 사람들을 배려해!”송민아가 화내며 말했다.“내가 봤을 땐 그냥 영상을 보여주고 너를 오해했다는 걸 인지시켜야 해! 오빠, 어떻게 생각해?”송민준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은서도 자기 생각이 있을 거야. 은서의 판단
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와 고은서는 깜짝 놀라며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송민준이 사무실 문 앞에 서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고은서는 순간 어색함이 밀려왔다. 남의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함부로 만진 데다 지어는 내용까지 훔쳐보다가 주인에게 딱 걸렸으니 말이다.얼굴이 확 붉어진 고은서가 입을 열려는 순간, 송민아가 먼저 물었다.“오빠, 오빠 컴퓨터에 왜 지난번 은서와 여시은 씨가 물에 빠진 영상이 있는 거야?”송민준에게 사과하려는 고은서의 말을 끊은 채 송민아는 재차 추궁했다.“누구한테서 받은 거야? 왜 나한테는 말도 안 해줬어?”고은서 역시 궁금했기에 민망함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답을 기다렸다.송민준은 차분히 걸어와 영상을 끈 뒤 담담히 물었다.“민아야, 누가 내 컴퓨터를 함부로 만져도 된다고 허락했어?”송민아도 민망하긴 마찬가지였던지라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그냥 비밀번호가 맞나 확인해보려다가... 미안해. 이 일은 나중에 사과할게. 우선 이 영상 어디서 난 건지부터 말해봐.”송민준은 고은서를 보며 입을 열었다.“은서야, 지난번 곽 대표가 농장 사고를 수사한다는 말을 듣고 나도 사람을 시켜 조사해 봤어. 마침 그날 농장에 있던 관광객이 풍경 촬영 중 우연히 사고 장면을 찍어두었더라고.”송민준은 그 관광객이 급한 일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최근에서야 해성시로 돌아와 그날의 사고 수사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설명했다.“그럼 왜 나한테는 안 알려줬어?”송민아가 불만스럽게 묻자, 송민준은 오늘 아침에야 받은 결과라고 답했다.“안 그래도 은서에게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너희가 먼저 발견해 버렸네.”이 말을 들은 고은서는 이내 사과했다.“정말 미안해. 민준 오빠....”“비밀번호 푼 것도, 영상 연 것도 나야. 뭐라 할 거면 나한테 해.”송민아가 의리 있게 나서자, 송민준은 의자에 앉아있는 여동생을 흘깃 보며 받아쳤다.“요즘 부모님께 칭찬만 듣다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