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어젯밤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었다.고은서의 가녀린 몸, 하얗다 못해 투명한 듯한 피부는 따뜻한 불빛 아래 부드러운 도자기처럼 빛나 넋을 잃게 했다.그는 자신의 욕망을 통제할 수 없었고 그저 그녀를 차지하고 몸 곳곳에 그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고은서는 그에게 괴롭힘을 당해 눈물까지 흘렸지만 끝까지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예쁜 눈에 분노를 담아 그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은 그로 하여금 더욱 힘껏 그녀를 괴롭혀 굴복시키고 싶었다.무의식적으로 침을 삼킨 곽승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고은서, 어젯밤 부단히 도발하던데 그 후과는 예상하고 한 거 아니야?”고은서는 곽승재의 파렴치함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짐승처럼 괴롭혀 놓고 내가 도발했다고?’“곽승재, 이 개자식아!”그 말을 들은 곽승재는 그녀를 차갑게 흘겨보았다.“또 건드리네. 한 번 더 하고 싶은 거야?”‘개자식일 뿐만 아니라 오만방자하기까지 하네.’곽승재의 뻔뻔함에 비할 수 없었던 고은서는 더 이상 그와 의미 없는 말싸움을 이어나가지 않았다.“나가. 이혼 외에는 당신이랑 할 말 없어.”곽승재는 분노를 억누르며 가방에 있던 서류를 고은서에게 내밀었다.고은서가 경계하며 물었다.“뭔데?”“네가 원하던 거.”고은서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이혼 서류야?”‘이제야 불륜을 용납하지 못해 이혼하려는 건가?’곽승재는 가벼운 냉소를 지으며 답했다.“직접 열어봐.”고은서는 곽승재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서류를 열었다.안에는 뜻밖에서 부동산 서류와 키가 들어있었다.“무슨 뜻이야?”고은서가 크게 실망하며 물었다.“이혼 서류라며?”“네 멋대로 생각한 거잖아.”곽승재는 담담한 말투로 답했다.“시그니엘이야. 인테리어는 당신이 전에 말했던 디자이너에게 부탁해서 했어. 퇴원하면 바로 입주할 수 있어.”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지난번 곽승재가 먼저 같이 밥을 먹으면 집을 준다고
곽승재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고은서, 날 배신한 건 너야. 너한테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도 줬는데 꼭 그렇게 애를 낳겠다고 고집을 부려야겠어?”‘별 같잖은 기회 따위...’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마음이 심란했다.“곽승재, 여기서 일방적인 희망을 품지 말아 줄래? 난 지금까지 기회를 바랐던 적이 없어. 아이는 내 아이니 당연히 낳아야지.”말문이 막힌 곽승재는 고은서를 한참 동안 쳐다보고 나서야 의미심장하게 물었다.“룸에서 다쳐서 불편하면서도 내가 접근하는 걸 거부하면서 민시후한테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한 건 왜 그런 거야?”‘왜 그랬겠어! 백유미가 있는 이상 네가 날 먼저 구할 리는 없으니 제일 먼저 민시후한테 도움을 청한 거지.’나중에는 단순히 임신한 사실을 들킬까 봐 그랬던 것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진실을 곽승재에게 알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냉소를 지으며 되물었다.“왜 그랬을 것 같아?”곽승재가 답하기 전에 고은서가 말을 이었다.“곽승재, 나와 민시후의 관계가 각별하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을 거야. 내가 시후를 도와 명운을 손에 넣고 미래 투자은행에 들어갔지. 그 후에 밥도 몇 번 같이 먹고 M국에서 돌아올 때 직접 데리러까지 갔어.”“됐어! 그만해!”곽승재는 더 이상 못 듣겠다는 듯이 싸늘한 표정으로 고은서의 말을 끊었다.“고은서, 내가 지금까지 참아왔던 건 널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야. 단지 할머니랑 외할아버지 체면을 생각해서 놔뒀던 거지. 하지만 당신이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더 이상 참지 않을 거야.”곽승재의 어두워진 안색과 사나운 눈매를 보고 고은서는 그가 자신의 말을 믿었음을 확신했다.“곽승재, 여기서 자신을 속일 필요는 없어. 난 한 번도 당신한테 참으라고 한 적 없어. 그리고 당신이 체면을 세워줄 필요도 없고. 내가 지금까지 원하는 건 이혼뿐이었어.”고은서는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하... 이혼하고 다른 남자 만나려고? 단념해! 충고하는데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싸늘
“어떻게 된 일이야?”고은서가 물었다.“그동안 아무 문제 없었다며?”“협업하기로 했던 병원 몇 군데가 갑자기 협업을 거절했어.”민시후가 모처럼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직원들이 그 사람들이랑 따지다가 말다툼이 벌어졌는데 몸싸움으로까지 번져 경찰에 연행됐어. 허 교수 연구소에서도 연락을 받고 이걸 이유로 투자 계획을 거절했어. 또한 회사 실력을 의심하면서 대리권 행사도 신중히 검토하겠다고 연락왔어.”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하나하나가 일반적인 사고 같았지만 고은서는 누구보다 곽승재의 작품일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어젯밤 곽승재는 그녀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 미래 투자은행은 아마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허 교수 쪽은 원래 곽승재의 체면을 봐서 그녀에게 대리권을 넘긴 것이었다. 하지만 미래 투자은행에서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그는 당당하게 대리권을 회수해 갈 것이었다.“경찰서에 가서 상황을 파악해 봤어. 현재 병원 측 태도는 강경해. 합의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아마 곽승재 작품이겠지.”민시후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곽승재는 항상 이렇게 비열해.”민시후도 곽승재의 작품이리라 짐작했다.고은서가 답했다.“곽승재한테 연락할게.”“이 일로 굳이 연락할 필요는 없어. 내가 전화한 건 그냥 너한테 이 사실을 알려주려고 한 거야. 이렇게 쉽게 곽승재한테 당하지는 않을 거야. 조금 전 나한테 무슨 말 하려고 했어?”민시후가 물었다.고은서는 그제야 용건을 기억해 내고는 답했다.“네가 소개해 준 변호사 아직도 안 왔어. 연락도 안 돼.”“응?”잠시 의아함을 느낀 민시후가 메시지라도 받은 듯 말했다.“잠시만.”이내 민시후가 고은서에게 말했다.“변호사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이 이혼 사건을 맡을 수 없다는데?”제인 제약 일이 먼저 터진 터라 고은서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어제 이 유명한 변호사는 곽승재의 세력을 무서워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고은서가 물었다.“그렇다고 해서 돈에 굴복하
“이번 달 상여금은 없어요! 이건 본보기를 보이는 거예요! 다시는 같은 실수하지 마세요.”황인혜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호랑이 없는 굴에서 여우가 왕 노릇 한다더니 딱 그 꼴이네. 비서실장 됐다고 아주 유세야.”조금 전 사과를 하던 여자가 투덜거렸다.“그러게 말이야. 회사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고 경력도 우리보다 짧으면서! 주 비서님께서 일부러 승진시킨 게 아니었다면 제 차례도 오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다른 한 여자가 맞장구를 쳤다.“목소리 좀 낮춰. 주 비서님이랑 특별한 사이일 수도 있어.”여자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지난번에 프런트에 서류 찾으러 가고 있었는데 마침 주 비서님을 마주쳐서 주 비서님이 임무를 줬대. 완성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승진했잖아.”두 여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고은서는 주먹을 꽉 쥐었다.‘어쩐지 그날 시원시원하게 이혼 서류에 사인한다 했어! 비서한테 시켜서 서류를 바꿔치기했구나.’고은서는 며칠 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자신이 조심성이 없어서 재수가 없어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이제 보니 그건 곽승재의 계략이었다.‘외삼촌과 외숙모가 사무실에 있던 것도 우연은 아니겠지.’“사모님, 왜 여기 서 계십니까? 대표님은 사무실에 계십니다.”그때 주민기가 걸어 나왔다.고은서는 평소처럼 주민기와 인사를 나누는 대신 싸늘한 얼굴을 한 채 곽승재의 사무실로 향했다.주민기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은서에게 무슨 미움을 샀는지 생각하고 있었다.프런트에서 미리 연락을 받은 그는 고은서가 한참이 지나도 안 오자 확인차 나온 것이었다.사무실에서 곽승재는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그는 의자에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햇빛이 창문을 통해 비치며 그의 주위를 금빛으로 물들였다.똑똑.고은서가 노크하고 바로 사무실로 들어섰다.곽승재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출현이 예상 범위 내에 있었다는 듯이 그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고은서는 곽승재 맞은편에 앉아 싸늘한 표정으로
고은서의 작은 얼굴에 떠오른 비웃음을 보며 곽승재의 시선은 더 차가워졌다.곽승재도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어 고은서의 턱을 들어 올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고은서, 날 자극해서 당신한테 도움이 되진 않을 거야.”키가 큰 곽승재는 서 있을 때 기세가 더 강했다. 그는 모든 면에서 고은서를 압도했다.곽승재는 몇 차례 분노에 찬 상태로 그녀에게 강제로 키스했다. 이틀 전 병실에서 더 도를 넘어선 그였다. 그녀의 허벅지는 여전히 은은하게 아려왔다.고은서는 속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자신을 위해 더 이상 곽승재를 도발하지 않았다.그녀는 그의 손을 밀어내고 무심코 뒤로 두 발짝 물러서며 차갑게 말했다.“곽승재, 이혼은 꼭 해야겠어! 변호사를 매수했다고 해서 다시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해?”곽승재는 다시 의자에 앉아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민시후가 해성에서 쫓겨나길 바란다면 어디 계속 해 봐.”“정말 너무 비열해!”고은서가 분노에 차 외쳤다.미래의 민시후는 곽승재와 비등하게 겨룰 수 있었지만 현재 민시후의 실력은 곽승재에 훨씬 못 미쳤다.민씨 가문의 주요 산업은 모두 북제에 있었다. 아무리 강한 세력이라도 본거지가 아닌 타지에서 그 세력을 제대로 떨칠 수는 없었다. 곽승재가 정말 민시후를 물고 늘어지려고 한다면 민시후도 막아내기 벅찰 것이었다.가장 중요한 사실은 민시후와 상생하려는 것이지 그에게 폐를 끼치려는 것이 아니었다.“비열한 게 뭐 어때서?”분노하는 고은서를 바라보는 곽승재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고 목소리도 담담했다.“고은서, 내 마지노선은 침범하지 말라고 경고했잖아.”고은서는 정말 곽승재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네가 먼저 약속을 어겼잖아. 근데 왜 내가 네 마지노선을 침범한다고 해? 내가 어떻게 해야 그만둘 건데!”곽승재가 그녀를 조용히 돌아봤다.“퇴원하면 예원 별장으로 가. 그러면 민시후는 봐줄게.”마음속에 분노가 쌓인 고은서가 그를 냉담한 시선으로 보며 답했다.“그래서 당신은 내가 애를 지우길
병실을 나온 박지연은 조용한 곳을 찾아 육현석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일을 알렸다.육현석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형이 사랑을 강요하는 건가?’“지난번에 곽승재를 설득하겠다고 했잖아요. 어떻게 됐어요?”박지연이 물었다.박지연이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육현석은 고개를 저었다.“잘 안됐어요. 웬만한 일은 그대로 말릴 텐데 이 일은 정말 힘들어요.”“그럼 오늘 일은 더 말리기 힘든 거 아니에요?”“맞아요.”육현석이 한숨을 쉬며 답했다.“형은 어려서부터 가문의 후계자로 길러져서 성격이 포악하고 오만해요. 한번 결정을 내리면 누구의 의견도 듣지 않을 거라서 저도 도울 수 있는 게 없네요.”“그럼 어떡해요? 은서는 안 그대로 이혼하겠다고 하는데... 곽승재가 계속 이대로 하면 정말 원수가 될 것 같아요.”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말했다.그 말을 들은 육현석이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일단 형한테 연락해 볼게요. 하지만 99.99%의 확률로 소용없을 거예요. 지연 씨랑 형수님도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해요.”박지연이 다 이해한다는 듯이 답했다.“그렇다면 괜히 연락할 거 없어요. 굳이 매를 벌 필요는 없죠.”육현석이 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형수님을 위해서라면 한번 해보는 거죠 뭐.”“그럼 행운을 빌어요.”박지연과 통화를 마친 육현석은 바로 곽승재에게 연락했다.“무슨 일이야?”곽승재의 말투는 까칠했다.“형, 형수님한테 아이를 지우로 예원 별장으로 들어가라고 했다면서?”곽승재가 싸늘하게 답했다.“그래서? 뭐가 문제야?”“형수님이 미워할까 봐 무섭지 않아??”“지금은 사랑한대?”육현석은 말문이 막혔다.“형, 형수님과 이혼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알아.”“아쉬워하지 않아!”곽승재는 차갑게 육현석의 말을 끊었다.“이건 은서가 치러야 하는 대가야!”잠시 멈칫한 육현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승재 형...”“다시 한번 고은서 편을 든다면 너도 같이 정리할 거야!”곽승재는 육현석에게 더 이상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전화를 끊
송민아는 불만으로 가득 찬 표정을 하고 기세등등하게 걸어왔다.“송민아 씨가 여긴 웬일로 오셨어요?”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당신 대체 시후 오빠를 언제까지 해칠 생각이야? 지금 당신 때문에 ZY 그룹이 얼마나 큰 곤경에 처했는지 알아?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여기에서 여유롭게 햇볕이나 쬐고 있냐고!”‘ZY 그룹 일로 온 거구나.’“민시후가 알아서 처리한다고 했어요.”고은서가 담담하게 답했다.“시후 오빠가 알아서 처리한다고 했다고 그냥 모르는 척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랑 엮인 후로 시후 오빠한테 안 좋은 일만 계속 일어나고 있는 거 알고 있어요? 밀회한 일로 망신당한 것도 모자라 얼마나 힘겹게 그 일을 처리했는데 또 당신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잖아요!”고은서는 자신도 잘못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한 마디 반박조차 하지 않았다.그러나 송민아는 고은서가 자신을 일부러 무시한다고 오해하면서 계속 그녀를 향해 쏘아붙였다.“지금 무슨 태도에요? 억울하기라도 하다는 거예요? 대체 당신이 어디가 좋다고 시후 오빠가 계속 도와주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니까. 당신은 시후 오빠 곁에 있을 자격도 없어!”고은서가 차근차근 설명했다.“송민아 씨, 이번 일은 확실히 저 때문에 발생한 일이 맞아요. 그런데 그룹을 운영하면서 이런저런 상황을 피면 할 수 없는 법이에요. 민시후가 그룹을 계승 받은 이상 이런 일쯤은 잘 처리할 능력이 있다고 믿어주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요.”“쓸데없는 소린 집어치워요. 시후 오빠는 속여도 난 못 속여! 조금이나마 양심이 있다면 배 속에 아이 없애고 시후 오빠 곁을 떠나요.”송민아가 배 속의 아이를 타깃으로 삶으려고 하자 고은서는 이 대화를 빨리 끝내고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별다른 일이 없으면 먼저 병실로 돌아갈게요.”“어딜 가려는 거야! 전에도 이미 아이를 없애라고 경고했었는데 언제까지 끌 생각이에요? 내가 직접 손을 쓰기라도 바라는 거예요?”그녀의 말을 들은 고은서의 눈빛이 순간 매
백유미는 숨이 막혀 얼굴이 빨개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발버둥 치는 척하면서 입으로 계속 고은서를 자극했다.“네가 승재랑 자고 임신했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야... 아무튼 지키지 못하는데...”“독한 년!”고은서는 미친 듯이 백유미의 목을 졸랐다. 백유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절망과 원망으로 가득했다.“네가 이 아이가 곽승재 아이라는 걸 어떻게 알아.”“네가... 운이 나쁜 거지... 누가 너한테 미용실에서... 박지연이랑 그 얘기를 하라고 했어...”고은서는 그제야 그날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옆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걸 떠올렸다.‘백유미도 그날 그 미용실에 있었단 말이야?’고은서는 백유미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곽승재랑 곧 이혼할 건데 왜 날 가만두지 않는 건데!”“근원을 없애야지 않겠어? 하하하...”백유미는 숨이 차 하면서도 크게 웃어댔다.“미친년, 너도 죽어!”고은서는 더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 지르며 있는 힘껏 백유미를 목을 졸라 죽이려고 했다. 그녀의 손톱이 백유미의 살을 파고들면서 피가 흘렀다. 백유미는 점차 눈동자가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얼굴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고은서 지금 뭐 하는 거야?”백유미가 곧 질식하려고 할 때 뒤에서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송민아가 황급히 달려왔다.이를 본 백유미는 살려달라고 발버둥 치면서 한쪽으로는 비아냥거리는 듯한 눈빛으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마치 고은서가 자신을 죽일 수 없다고 비웃는 듯했다.“아악! 죽어!”고은서는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조르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한 번 더 뺨을 내리치려고 할 때 곽승재가 다가오며 그녀를 막았다.“고은서, 얼른 손 놓아!”곽승재가 고은서의 손을 강제로 백유미의 목에서 떼어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백유미는 숨을 고르면서도 고통스러운 듯한 신음소리를 냈다.“부축해서 휠체어에 앉히세요.”곽승재는 옆에 있던 의사에게 말했다.“피!”바로 이때,
고은서는 몽롱한 상태에서 상대방의 품이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너무 허약한 탓에 차갑기만 하던 그녀의 몸도 따라서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그 사람은 등 뒤로 조심스럽게 그녀를 꼭 끌어안으면서 얼굴을 그녀 이마 가까이 붙였다.체온이 하도 높아서 불편함을 느낀 고은서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상대방은 더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지만 등이 점점 더 뜨거워 난 고은서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잠에서 제대로 깨지 못한 탓에 제대로 벗어날 수가 없었다.얼마 후, 그 사람은 그녀를 다시 꼭 끌어안으면서 손으로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흐느끼는 듯 몸을 떨기 시작했다.심상치 않음을 느낀 고은서는 눈을 번쩍 떴다.그러나 뒤돌아 확인하려고 할 때 그가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는 바람에 몸을 돌릴 수가 없었다.“은서야, 미안해...”귓가에서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예전처럼 발버둥 치며 화를 내면서 그를 내쫓는 대신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놔.”곽승재는 여전히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약간 울먹이면서 말했다.“은서야, 미안해.”고은서는 곽승재가 오후에 박지연한테서 들은 말 때문에 이런다는 걸 알고 있었다.“지연이 혼자만의 생각이니까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돼.”고은서의 말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당신 아버지랑 백승엽까지 여기로 온 이상 당신도 어쩔 수가 없었겠지. 할 만큼 했다는 거 나도 알아.”곽승재는 그녀를 놓아주기는커녕 방금전보다 더 세게 끌어안았다.고은서는 목 쪽으로 뜨거운 액체가 떨어지는 걸 느꼈다.“은서야, 차라리 욕이라도 해...”곽승재의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에서 그가 무척 후회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러나 고은서는 여전히 담담했다.“곽승재, 굳이 이러지 않아도 돼. 난 당신이 한 말을 애초에 믿은 적이 없으니까.”곽승재는 순간 몸이 굳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치 이번이 그녀를 안아볼
병실로 들어오자마자 이 광경을 주민기는 황급히 벨을 누르며 의사를 불렀다.“의사 선생님...”...고은서의 병실로 다시 돌아간 박지연은 방금전 씩씩거리며 나가던 모습과 별다른 점이 없어 보였다.“거봐, 내가 가지 말라고 했지?”고은서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녀를 위안했다.“화 풀고 나랑 내일 귀국할 준비 하자. 돌아가고 나서 나 밥 사줘. 그리고 SPA도 하고 싶은데 네가 쏠 거지?”박지연은 한참 동안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다가 끝내는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은서야, 곽승재한테 목매지 말고 우리 다른 남자 찾아보자. 넌 곽승재가 아니어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어.”박지연은 평소에 이런 오글거리는 행동을 별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이런 행위를 볼 때마다 혀를 끌끌 차곤 했었다.‘곽승재한테 찾아가더니 화가 많이 난 모양이네.’“알겠어.”고은서가 박지연의 등을 토닥이며 웃으면서 답했다.민시후도 어느새 백유미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백유미 정신질환 진단서에 관해서는 이미 조사해보라고 사람 시켰어. 민시현한테도 원지훈 사망 사건에 관해 다시 조사하게끔 당지 경찰 측에 말해달라고 부탁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마.”“괜찮아. 이미 결론이 난 사건이라서 큰 변화는 없을 거야. 그러니까 다시 조사해달라고 형을 귀찮게 굴지 않아도 돼.”고은서가 답했다.“해줄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는 데 써먹을 수 있을 때 써야지.”민시후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난 네 형한테 불리워 가서 밥 먹기 싫어.”고은서가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 말싸움을 했다.“민시후, 비록 네 선택이기는 하지만 다신 이런 일에 끼어들지 마. 나 때문에 네가 다치는 일은 더는 없었으면 좋겠어.”민시후는 이번 일로 며칠 동안 병상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지금도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됐다.그녀가 보기에도 엄청 안쓰러운데 그의 가족들은 오죽할까.“네가 다치는 일이 없는 한 이건 약속 못 하겠는데.”
곽승재는 눈앞에 놓인 종이를 보며 그대로 얼어붙었다.박지연은 콧방귀를 뀌면서 곽승재한테 고은서가 유산한 날 동료한테 부탁해서 그가 썼던 수건에 있던 머리카락으로 유전자검사를 했다면서 알려줬다.“고은서가 계속 마음에 못을 박는 소리를 해왔지만 당신을 좋아하는 마음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어요. 원래는 당신이 고은서의 마음을 되돌리고 두 사람이 재혼하게 되는 그날에 이 모든 걸 알려주면서 은서는 단 한 번도 당신에게 미안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당신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당신은 진짜 구제불능인 것 같네요. 어떻게 자기 아내랑 아이를 죽이려고 했던 범인을 이대로 놓아줄 수가 있죠? 당신은 은서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박지연이 화를 내며 호통쳤다.고은서가 유산했을 때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구슬프게 우는 모습을 떠올린 박지연은 지금이라도 곽승재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다.“은서가 그 아이가 태어나길 얼마나 기대했는지 알아요? 어떻게 하면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애가 행복하게 클 수 있는지를 얼마나 고민해왔는데. 그런데 결국에는 백유미 그 악독한 여자가 이 모든 걸 망쳐버렸잖아요.”박지연은 말하면서 울먹이기 시작했다.“아이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당신이 은서를 굳게 믿었다면 굳이 이혼할 일도 없었을 거예요. 아마 지금쯤 두 사람이 아이를 함께 키우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요.”곽승재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은서가 당신 같은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것부터 아주 큰 착오였어. 당신은 단 한 번도 은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 보지 않았잖아요. 단 한 번도 은서 입장에 서서 고려해본 적이 없잖아요! 민시후가 계속 눈에 거슬린다고 했죠? 그런데 민시후가 당신보다 백 배는 나아요. 적어도 은서를 웃게 하려고 노력하고 안전감을 주려고 노력하잖아요. 고은서가 무슨 일이 있든 항상 발 벗고 나서주잖아요.”박지연은 계속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은 그의 마음에 칼을 꽂았다.“고은서가 백유미한테 반격하려는 일을 민시후한테
박지연은 종래로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항상 깊은 사고를 거친 후에야 결정을 내리는 타입이었다.그뿐만 아니라 고은서와 마찬가지로 결정한 일이라면 꼭 해야 하는 성격이었다.고은서는 아무리 설득해도 그녀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당부했다.“적당히 해. 화내면서 눈물 흘리며 찾아오기 없기야.”박지연은 고은서의 농담을 뒤로 한 채 마치 곽승재를 후회하게 만들 히든카드라도 손에 쥐고 있는 듯 아주 결연한 표정으로 병실을 나섰다.고은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육현석이 아침에 어머니한테 불리워 해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조금이나마 나랑 함께 지연이를 설득할 수 있었을 텐데. 됐어. 당하고 나면 알아서 정신 차리겠지 뭐.’...박지연은 이내 곽승재가 있는 병실에 도착했다.어깨 상처가 아직 낫지 않은 탓인지 그의 얼굴은 아직도 창백해 보였다. 그녀가 병실로 들어갈 때 그는 병상에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옆에는 비서 주민기가 서 있었다.주민기는 그녀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눈치 있게 자리를 피해줬다.곽승재는 그녀가 찾아올 거라는 걸 먼저 예상이라도 한 건지 아주 덤덤한 표정을 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박지연 씨가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죠?”박지연은 냉소를 흘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곽 대표님, 백유미가 은서한테 얼마 악독한 짓을 했는지 알면서도 고작 정신병원 진단서 하나 때문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건가요?”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은서한테 백유미를 대가 치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면서요. 이게 곽 대표님이 말한 그 대가인가요?”박지연이 계속 캐물었다.곽승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해성으로 돌아간 후 정신병원으로 보낼 거예요.”“거참. 고작 정신병원 하나로 끝내겠단 말씀이세요?”박지연이 헛웃음을 치면서 말했다.“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다 백유미가 아무런 병이 없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지금 그저 핑
박지연은 또 다른 한 가지 소식을 고은서에게 전했다.범가온이 원지훈 유품을 확인할 때 그의 폰에서 백유미가 성폭행당하는 동영상을 발견했다고 한다.아마 원지훈이 자신의 앞날을 위해 그 동영상으로 백유미를 협박하려고 했던 모양이다.동영상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이었다.백유미한테는 기필코 아주 큰 타격이 될 것이다.범가온은 동영상을 확인한 후 아들의 죄를 덮어주기는커녕 사람을 찾아 그 동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했다고 한다.그 동영상은 업데이트되자마자 많은 사람의 주목을 끌었고 여론이 점점 커져갔다.“조회수가 어마어마하대. 특히 외국 사이트는 심사가 별로 엄하지 않아서 벌써 T국 여러 사이트 실검에 올랐어. 비록 국내에서는 동영상 풀버전을 볼 수는 없지만 전파 속도가 하도 빨라서 이미 본 사람들이 꽤 많을 거야. 백유미 이번엔 진짜 끝장이야.”그러나 고은서는 마음이 별로 놓이지 않았다.백유미에겐 곽현수라는 조력자가 있었고 그가 직접 나선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그 누구도 보장하지 못한다.아니나 다를까, 오후쯤이 되어서 고은서는 휠체어에 앉은 백승엽과 곽현수가 T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비록 이미 GS그룹 경영권을 곽승재에게 물려주고 회사 일에서 손을 뗐다고 하지만 T국 상류계층 사람들마저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 명성은 여전했다.그 사람들과 곽현수의 참견으로 T국 경찰 측에서는 얼마 되지 않아 원지훈을 죽인 백유미의 행위가 정당방위라는 조사결과를 공포했다.왜냐하면 원지훈이 찍은 동영상에서 백유미를 죽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그의 목소리가 함께 녹음되었기 때문이다.그래서 경찰 측에서는 원지훈이 앙심을 품고 백유미를 죽이려 하다가 도리어 칼을 들고 정당방위 하는 그녀에게 목이 찔려 죽었다고 판단했다.고은서 납치 사건에 관해서는 녹음 파일과 증인이 다 있었기에 백유미는 거의 유죄 선고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그러나 백승엽이 이름 있는 정신병원 진단서를 내밀며 백유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는 차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았다.“형, 전생이 존재한다는 게 말이 돼? 요즘 스트레스 너무 받아서 그저 악몽 꾼 걸 거야.”비록 고은서의 변화와 곽승재의 말들을 잘 되새겨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육현석 또한 전생이 존재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형수님처럼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가 자살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자신의 주장도 과감하게 제기할 줄 알고 또 하고 싶은 일도 한다면 하는 사람인 데다가 자신을 꾸미는 것도 좋아하고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사는 사람이 왜 자살을 한다는 거야?”그러나 곽승재는 전혀 위안이 되지 않은 듯했다.‘육현석의 말대로 고은서는 자신을 꾸미는 것도 좋아하고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지.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자살한다는 건 얼마나 큰 절망을 느껴서였을까?’“형, 방금전에 백유미 찾아가지 않았어? 어떻게 됐어?”육현석이 일부러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손에 있는 증거를 경찰 측에 넘기면 되잖아. 왜 굳이 직접 찾아간 거야?”곽승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증거가 나타난 타이밍이 너무 수상해.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자꾸 누군가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뭐? 누군데?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 건데?”육현석은 놀라움을 참지 못했다.“그저 내 직감일뿐이야. 자세한 건 더 조사해봐야 해.”곽승재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이튿날, 고은서는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약 효과가 아직도 남아있는 탓인지 머리가 계속 띄엄띄엄 어지러워 났다.“고은서!”그녀가 누워서 좀 더 쉬려고 할 때 박지연이 흥분해 하며 병실로 달려 들어왔다.“빅뉴스야!”반면 고은서는 약간 풀이 죽어 있었다.“뭔데?”“백유미가 다른 사람한테 맞아서 지금 중환자실에 들어갔대.”고은서는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누가 때린 건데?”“누가 때렸는지 한 번 맞춰봐.”박지연이 웃으면서 일부러 뜸을 들였다.고은서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T국에 있는 백유미랑
곽승재는 육현석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아직도 아침의 그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했다.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현실적으로 느껴졌다.고은서는 정신병원 환자복을 입고 있었는데 뼈밖에 안 보일 정도로 살이 빠져있었고 얼굴도 전과 다르게 핼쑥해져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그가 알고 있는 그녀의 똘망똘망한 눈빛과 다르게 꿈속의 그녀는 절망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냉소를 흘리면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고은서는 이미 피바다 속에 쓰러져있었다.그 순간 그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형, 왜 그래...”육현석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내가 잘못 본 거겠지. 형 지금 눈시울이 빨개진 거야?’오랫동안 곽승재와 지내오면서 그의 이런 모습은 육현석도 처음이었다.마치 하나뿐인 동반자를 잃은 늑대처럼 처절하고 비참하면서도 후회막심해 보였다.“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육현석이 위안했다.곽승재는 또다시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목이 쉰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어제 백유미가 칼을 들고 자살하려고 할 때 유난히 당황스러웠어. 마치 백유미를 막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아침에 이 꿈을 꾸고 난 후로 그 이유를 알겠더라. 고은서도 똑같은 일을 겪었는데 그땐 내가 미처 구하지 못했다는 걸.”“그러니까 지금 전생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거지? 방금전에 말한 일도 전생에 발생한 일이고.”육현석이 물었다.그러나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또한 전생이 존재한다는 게 아주 황당한 생각이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꿈에서 봤던 일들이 진짜 현실에서 발생한 것처럼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졌다.육현석은 곽승재의 이런 모습이 약간 적응되지 않았다.항상 강인한 모습만 보이며 할 줄 모르는 게 거의 없었던 곽승재가 갑자기 전생이라는 말을 꺼내면서 이토록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형, 그저 꿈일 뿐이야. 너무 자책하지마.”육현석이 애써 그를 위안
목소리가 별로 크진 않았지만 민시후는 아주 똑똑히 들었다.그는 육현석을 힐끗 째려보고는 고은서를 향해 아양을 떨며 말했다.“은서야, 방금 깎아준 사과 엄청 달고 맛있는데 한 조각만 더 먹여주면 안 될까?”나머지 세 사람은 충격적인 그의 모습에 입을 쩍 벌렸다.육현석은 진저리를 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민 대표님, 은서랑 얘기 더 나누세요. 저는 먼저 밥 먹으러 가볼게요.”박지연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하고는 쌩하고 달아났다.병실 안에는 고은서와 민시후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나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러는데 다음에는 연기하기 전에 나한테 미리 따로 신호 보내주면 안 될까?”고은서는 아직도 방금전의 놀라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곽승재 껌딱지 새끼를 가만두면 안 되지.”민시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한 시간 후, 육현석은 곽승재가 있는 병실로 찾아갔다.“형, 민시후 그 새끼 진짜 사람 약 올리는 데는 짝이 없어. 형수님 옆에 꼭 붙어있으면서 심지어 사과까지 먹여달라고 한다니까.”방금전 민시후의 모습을 떠올린 육현석은 씩씩거리며 말했다.“형수님을 바라보는 눈길은 또 어찌나 오글거리던지. 형수님을 완전히 자기 소유로 생각하고 있다니까. 환자만 아니었으면 정말 달려가서 한 대 치는 건데.”그는 말하면 말할수록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그 많은 여자 중에서 왜 하필 형수님을 좋아한다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다니까.”그러다 육현석은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형, 내 말 듣고 있어? 형은 화 안 나?”곽승재는 방금전부터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육현석의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형,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하필 그 위급한 상황에 백유미를 구하려고 한 거야?”육현석은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답답해 났다.“그 많은 인력과 재력을 소모하면서 힘겹게 형수님을 찾았으면 당시 상황이 어떻든지를 막론하고 형수님 곁
민시후는 순간 어리둥절해졌다.“뭐가?”고은서는 고개를 들고 의문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우리 서로 알고 지낸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잖아.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매력이 철철 넘쳐흐르는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날 좋아하게 된 거야?”“왜 갑자기 널 좋아하게 됐다니?”민시후는 거동만 불편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이라도 일어나 그녀의 이마를 한 대 콩하고 치고 싶었다.“그러니까 지금 내 마음을 의심하는 거야? 지금까지 내가 널 좋아한다는 말을 거짓말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고은서는 헛기침을 하면서 대답했다.“종일 껄렁대고 다니는데 뭐가 진심이고 뭐가 거짓말인지 어떻게 구분해.”“고은서, 너 진짜 한 대 맞을래?”민시후가 화를 내면서 얼굴을 홱 돌렸다.고은서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알고 있었다.민시후가 그녀를 도와 백유미한테 함정을 파줄 뿐만 아니라 집까지 사주고 또 서운도 함께 가주고 심지어 동물원까지 선물하는 걸 봐서는 그는 처음부터 진심이었다.그저 그녀가 계속 의심하면서 그의 진심을 의심했을 뿐.고은서는 씩씩거리고 있는 민시후를 보면서 조심스레 사과 한 조각을 그의 입 가까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맛 좀 보지 않을래?”“싫어.”민시후가 그녀를 째려보며 말을 이어갔다.“고은서, 넌 확실히 너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매력적이기는커녕 보는 사람 화날 정도로 멍청해. 내가 순간 눈이 멀고 머리에 문제가 생겨서 널 좋아하게 되었나 봐. 됐지?”“...”고은서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넌 왜 자꾸 너 자신을 비하하는 거야? 대체 곽승재한테서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으면 자신을 그 정도로 내리까냐고.”민시후가 씩씩거리며 물었다.“어느 남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다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겠어? 최선을 다해 그 여자를 지키려 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 그런데 왜 너는 자꾸 그걸 부담으로 생각하는 건데?”민시후는 자책하는 고은서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