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와 박지연은 백유미가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고 옷을 걷어 올린 뒤 좋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아니요. 안 돼요.”고은서의 답을 들은 백유미는 화내지 않고 간병인에게 병실로 넣어달라고 하고는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사모님, 요 며칠 동안 허리가 너무 아파서 일어나지 못해 제때 보러 오지 못했습니다. 별일 없으시죠?”박지연은 참지 못하고 눈을 흘기며 말했다.“얼굴도 두껍네요. 은서가 환영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유미 씨, 사모님을 구하려다가 다쳤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백유미 옆에 있던 간병인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감사해하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못되게 구는 거예요?”갑작스러운 간병인의 참견에 어색해진 백유미는 부드럽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아주머니, 먼저 나가주세요. 사모님이랑 말씀 좀 나누게요.”“은서는 당신이랑 할 말 없어요. 그대로 나가세요!”박지연은 성모처럼 구는 백유미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정말 온 세상에 혼자만 좋은 사람인 것처럼 굴죠! 다 속셈을 품고 있다는 거 알아요!”박지연의 말을 듣고 백유미의 표정은 더 어색하게 굳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말을 이었다.“지연 씨랑 사모님이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요. 그대로 해명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어제 대표님이 주 비서님한테 아침을 보낸 건 그냥 겸사겸사 한 일이에요. 특별한 뜻은 없어요.”백유미가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사모님, 대표님께서는 사모님이 화나서 또 무슨 충동적인 행동을 할까 봐 이틀 동안 제 병실에도 오지 않으셨어요. 저랑 대표님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더 이상 오해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백유미 씨 뜻은 곽승재가 당신을 보러 갔다는 사실을 은서가 알면 죽기 살기로 난동을 부린다는 말인가요?”박지연이 참지 못하고 백유미의 말을 가로챘다.“그래서 곽승재는 그 이유때문에 당신한테 몰래 관심을 줄 수밖에 없었고?”백유미는 동요 없이 답했다.“그 뜻이 아니에요. 저는 단
“은서야,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유성준은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별일은 아니고요. 그냥 MQ에서 출근하는 게 어떤지 여쭤보고 싶어서 연락했어요.”유성준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좋아. 아저씨도 나를 믿어주시고 회사 직원들도 잘 협조해 줘.”“그럼 다행이네요.”고은서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하지만 네가 알아야 할 일이 있어.”유성준이 말을 이었다.“최근 MQ에 대해 알아봤는데 경영 상태 겉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은데 사실은 좋지 않아. MQ에서 이전에는 향수를 주력으로 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혁신이 없어서 시장에서 곧 밀려날 거야. 현재 샴푸와 린스, 에센스도 특별히 뛰어난 점이 없어서 경쟁업체를 뛰어넘을 수 없어.”“그럼 어떡해요?”고은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이번 생에 MQ가 위기에는 처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불안정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유성준이 위로했다.“발등에 불이 떨어진 급한 상황도 아니라 변화를 주더라도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해서 시간이 필요해.”“그래요. 바쁜 일만 끝나면 같이 외할아버지와 상의해요. 아니다. 그냥 저희끼리 대책을 논의해 봐요.”나이도 많고 건강도 좋지 않은 외할아버지가 MQ를 삼촌에게 맡긴 것은 더 이상 신경 쓸 여력이 없기 때문이었다.“그래, 난 언제든지 시간이 있으니 편할 때 연락해.”유성준이 온화하게 답했다.두 사람은 몇 마디 한담을 나누고 통화를 끝냈다.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할 때 카톡으로 원지훈이 보낸 음성메시지가 왔다. 고은혜의 안부를 묻는 내용이었다.회사 일로 바빠서 고은혜를 소홀히 했더니 화가 나서 그를 차단했다고 했다.고은서는 고은혜가 이번에는 원지훈에게 쉽게 속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지난 생처럼 비참하지 않겠지?’원지훈이 쓸모가 있다고 판단한 고은서가 답장했다.[미안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은혜가 나한테 모든 걸 얘기하는 건 아니야. 나도 은혜 행방을 잘 몰라.]고은서의 태도로 인해 원지훈은 손쉽다는 착각에 빠졌는지 다시 답장해
곽승재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어젯밤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었다.고은서의 가녀린 몸, 하얗다 못해 투명한 듯한 피부는 따뜻한 불빛 아래 부드러운 도자기처럼 빛나 넋을 잃게 했다.그는 자신의 욕망을 통제할 수 없었고 그저 그녀를 차지하고 몸 곳곳에 그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고은서는 그에게 괴롭힘을 당해 눈물까지 흘렸지만 끝까지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예쁜 눈에 분노를 담아 그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은 그로 하여금 더욱 힘껏 그녀를 괴롭혀 굴복시키고 싶었다.무의식적으로 침을 삼킨 곽승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고은서, 어젯밤 부단히 도발하던데 그 후과는 예상하고 한 거 아니야?”고은서는 곽승재의 파렴치함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짐승처럼 괴롭혀 놓고 내가 도발했다고?’“곽승재, 이 개자식아!”그 말을 들은 곽승재는 그녀를 차갑게 흘겨보았다.“또 건드리네. 한 번 더 하고 싶은 거야?”‘개자식일 뿐만 아니라 오만방자하기까지 하네.’곽승재의 뻔뻔함에 비할 수 없었던 고은서는 더 이상 그와 의미 없는 말싸움을 이어나가지 않았다.“나가. 이혼 외에는 당신이랑 할 말 없어.”곽승재는 분노를 억누르며 가방에 있던 서류를 고은서에게 내밀었다.고은서가 경계하며 물었다.“뭔데?”“네가 원하던 거.”고은서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이혼 서류야?”‘이제야 불륜을 용납하지 못해 이혼하려는 건가?’곽승재는 가벼운 냉소를 지으며 답했다.“직접 열어봐.”고은서는 곽승재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서류를 열었다.안에는 뜻밖에서 부동산 서류와 키가 들어있었다.“무슨 뜻이야?”고은서가 크게 실망하며 물었다.“이혼 서류라며?”“네 멋대로 생각한 거잖아.”곽승재는 담담한 말투로 답했다.“시그니엘이야. 인테리어는 당신이 전에 말했던 디자이너에게 부탁해서 했어. 퇴원하면 바로 입주할 수 있어.”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지난번 곽승재가 먼저 같이 밥을 먹으면 집을 준다고
곽승재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고은서, 날 배신한 건 너야. 너한테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도 줬는데 꼭 그렇게 애를 낳겠다고 고집을 부려야겠어?”‘별 같잖은 기회 따위...’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마음이 심란했다.“곽승재, 여기서 일방적인 희망을 품지 말아 줄래? 난 지금까지 기회를 바랐던 적이 없어. 아이는 내 아이니 당연히 낳아야지.”말문이 막힌 곽승재는 고은서를 한참 동안 쳐다보고 나서야 의미심장하게 물었다.“룸에서 다쳐서 불편하면서도 내가 접근하는 걸 거부하면서 민시후한테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한 건 왜 그런 거야?”‘왜 그랬겠어! 백유미가 있는 이상 네가 날 먼저 구할 리는 없으니 제일 먼저 민시후한테 도움을 청한 거지.’나중에는 단순히 임신한 사실을 들킬까 봐 그랬던 것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진실을 곽승재에게 알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냉소를 지으며 되물었다.“왜 그랬을 것 같아?”곽승재가 답하기 전에 고은서가 말을 이었다.“곽승재, 나와 민시후의 관계가 각별하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을 거야. 내가 시후를 도와 명운을 손에 넣고 미래 투자은행에 들어갔지. 그 후에 밥도 몇 번 같이 먹고 M국에서 돌아올 때 직접 데리러까지 갔어.”“됐어! 그만해!”곽승재는 더 이상 못 듣겠다는 듯이 싸늘한 표정으로 고은서의 말을 끊었다.“고은서, 내가 지금까지 참아왔던 건 널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야. 단지 할머니랑 외할아버지 체면을 생각해서 놔뒀던 거지. 하지만 당신이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더 이상 참지 않을 거야.”곽승재의 어두워진 안색과 사나운 눈매를 보고 고은서는 그가 자신의 말을 믿었음을 확신했다.“곽승재, 여기서 자신을 속일 필요는 없어. 난 한 번도 당신한테 참으라고 한 적 없어. 그리고 당신이 체면을 세워줄 필요도 없고. 내가 지금까지 원하는 건 이혼뿐이었어.”고은서는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하... 이혼하고 다른 남자 만나려고? 단념해! 충고하는데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싸늘
“어떻게 된 일이야?”고은서가 물었다.“그동안 아무 문제 없었다며?”“협업하기로 했던 병원 몇 군데가 갑자기 협업을 거절했어.”민시후가 모처럼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직원들이 그 사람들이랑 따지다가 말다툼이 벌어졌는데 몸싸움으로까지 번져 경찰에 연행됐어. 허 교수 연구소에서도 연락을 받고 이걸 이유로 투자 계획을 거절했어. 또한 회사 실력을 의심하면서 대리권 행사도 신중히 검토하겠다고 연락왔어.”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하나하나가 일반적인 사고 같았지만 고은서는 누구보다 곽승재의 작품일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어젯밤 곽승재는 그녀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 미래 투자은행은 아마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허 교수 쪽은 원래 곽승재의 체면을 봐서 그녀에게 대리권을 넘긴 것이었다. 하지만 미래 투자은행에서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그는 당당하게 대리권을 회수해 갈 것이었다.“경찰서에 가서 상황을 파악해 봤어. 현재 병원 측 태도는 강경해. 합의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아마 곽승재 작품이겠지.”민시후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곽승재는 항상 이렇게 비열해.”민시후도 곽승재의 작품이리라 짐작했다.고은서가 답했다.“곽승재한테 연락할게.”“이 일로 굳이 연락할 필요는 없어. 내가 전화한 건 그냥 너한테 이 사실을 알려주려고 한 거야. 이렇게 쉽게 곽승재한테 당하지는 않을 거야. 조금 전 나한테 무슨 말 하려고 했어?”민시후가 물었다.고은서는 그제야 용건을 기억해 내고는 답했다.“네가 소개해 준 변호사 아직도 안 왔어. 연락도 안 돼.”“응?”잠시 의아함을 느낀 민시후가 메시지라도 받은 듯 말했다.“잠시만.”이내 민시후가 고은서에게 말했다.“변호사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이 이혼 사건을 맡을 수 없다는데?”제인 제약 일이 먼저 터진 터라 고은서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어제 이 유명한 변호사는 곽승재의 세력을 무서워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고은서가 물었다.“그렇다고 해서 돈에 굴복하
“이번 달 상여금은 없어요! 이건 본보기를 보이는 거예요! 다시는 같은 실수하지 마세요.”황인혜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호랑이 없는 굴에서 여우가 왕 노릇 한다더니 딱 그 꼴이네. 비서실장 됐다고 아주 유세야.”조금 전 사과를 하던 여자가 투덜거렸다.“그러게 말이야. 회사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고 경력도 우리보다 짧으면서! 주 비서님께서 일부러 승진시킨 게 아니었다면 제 차례도 오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다른 한 여자가 맞장구를 쳤다.“목소리 좀 낮춰. 주 비서님이랑 특별한 사이일 수도 있어.”여자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지난번에 프런트에 서류 찾으러 가고 있었는데 마침 주 비서님을 마주쳐서 주 비서님이 임무를 줬대. 완성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승진했잖아.”두 여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고은서는 주먹을 꽉 쥐었다.‘어쩐지 그날 시원시원하게 이혼 서류에 사인한다 했어! 비서한테 시켜서 서류를 바꿔치기했구나.’고은서는 며칠 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자신이 조심성이 없어서 재수가 없어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이제 보니 그건 곽승재의 계략이었다.‘외삼촌과 외숙모가 사무실에 있던 것도 우연은 아니겠지.’“사모님, 왜 여기 서 계십니까? 대표님은 사무실에 계십니다.”그때 주민기가 걸어 나왔다.고은서는 평소처럼 주민기와 인사를 나누는 대신 싸늘한 얼굴을 한 채 곽승재의 사무실로 향했다.주민기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은서에게 무슨 미움을 샀는지 생각하고 있었다.프런트에서 미리 연락을 받은 그는 고은서가 한참이 지나도 안 오자 확인차 나온 것이었다.사무실에서 곽승재는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그는 의자에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햇빛이 창문을 통해 비치며 그의 주위를 금빛으로 물들였다.똑똑.고은서가 노크하고 바로 사무실로 들어섰다.곽승재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출현이 예상 범위 내에 있었다는 듯이 그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고은서는 곽승재 맞은편에 앉아 싸늘한 표정으로
고은서의 작은 얼굴에 떠오른 비웃음을 보며 곽승재의 시선은 더 차가워졌다.곽승재도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어 고은서의 턱을 들어 올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고은서, 날 자극해서 당신한테 도움이 되진 않을 거야.”키가 큰 곽승재는 서 있을 때 기세가 더 강했다. 그는 모든 면에서 고은서를 압도했다.곽승재는 몇 차례 분노에 찬 상태로 그녀에게 강제로 키스했다. 이틀 전 병실에서 더 도를 넘어선 그였다. 그녀의 허벅지는 여전히 은은하게 아려왔다.고은서는 속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자신을 위해 더 이상 곽승재를 도발하지 않았다.그녀는 그의 손을 밀어내고 무심코 뒤로 두 발짝 물러서며 차갑게 말했다.“곽승재, 이혼은 꼭 해야겠어! 변호사를 매수했다고 해서 다시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해?”곽승재는 다시 의자에 앉아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민시후가 해성에서 쫓겨나길 바란다면 어디 계속 해 봐.”“정말 너무 비열해!”고은서가 분노에 차 외쳤다.미래의 민시후는 곽승재와 비등하게 겨룰 수 있었지만 현재 민시후의 실력은 곽승재에 훨씬 못 미쳤다.민씨 가문의 주요 산업은 모두 북제에 있었다. 아무리 강한 세력이라도 본거지가 아닌 타지에서 그 세력을 제대로 떨칠 수는 없었다. 곽승재가 정말 민시후를 물고 늘어지려고 한다면 민시후도 막아내기 벅찰 것이었다.가장 중요한 사실은 민시후와 상생하려는 것이지 그에게 폐를 끼치려는 것이 아니었다.“비열한 게 뭐 어때서?”분노하는 고은서를 바라보는 곽승재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고 목소리도 담담했다.“고은서, 내 마지노선은 침범하지 말라고 경고했잖아.”고은서는 정말 곽승재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네가 먼저 약속을 어겼잖아. 근데 왜 내가 네 마지노선을 침범한다고 해? 내가 어떻게 해야 그만둘 건데!”곽승재가 그녀를 조용히 돌아봤다.“퇴원하면 예원 별장으로 가. 그러면 민시후는 봐줄게.”마음속에 분노가 쌓인 고은서가 그를 냉담한 시선으로 보며 답했다.“그래서 당신은 내가 애를 지우길
병실을 나온 박지연은 조용한 곳을 찾아 육현석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일을 알렸다.육현석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형이 사랑을 강요하는 건가?’“지난번에 곽승재를 설득하겠다고 했잖아요. 어떻게 됐어요?”박지연이 물었다.박지연이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육현석은 고개를 저었다.“잘 안됐어요. 웬만한 일은 그대로 말릴 텐데 이 일은 정말 힘들어요.”“그럼 오늘 일은 더 말리기 힘든 거 아니에요?”“맞아요.”육현석이 한숨을 쉬며 답했다.“형은 어려서부터 가문의 후계자로 길러져서 성격이 포악하고 오만해요. 한번 결정을 내리면 누구의 의견도 듣지 않을 거라서 저도 도울 수 있는 게 없네요.”“그럼 어떡해요? 은서는 안 그대로 이혼하겠다고 하는데... 곽승재가 계속 이대로 하면 정말 원수가 될 것 같아요.”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말했다.그 말을 들은 육현석이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일단 형한테 연락해 볼게요. 하지만 99.99%의 확률로 소용없을 거예요. 지연 씨랑 형수님도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해요.”박지연이 다 이해한다는 듯이 답했다.“그렇다면 괜히 연락할 거 없어요. 굳이 매를 벌 필요는 없죠.”육현석이 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형수님을 위해서라면 한번 해보는 거죠 뭐.”“그럼 행운을 빌어요.”박지연과 통화를 마친 육현석은 바로 곽승재에게 연락했다.“무슨 일이야?”곽승재의 말투는 까칠했다.“형, 형수님한테 아이를 지우로 예원 별장으로 들어가라고 했다면서?”곽승재가 싸늘하게 답했다.“그래서? 뭐가 문제야?”“형수님이 미워할까 봐 무섭지 않아??”“지금은 사랑한대?”육현석은 말문이 막혔다.“형, 형수님과 이혼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알아.”“아쉬워하지 않아!”곽승재는 차갑게 육현석의 말을 끊었다.“이건 은서가 치러야 하는 대가야!”잠시 멈칫한 육현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승재 형...”“다시 한번 고은서 편을 든다면 너도 같이 정리할 거야!”곽승재는 육현석에게 더 이상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전화를 끊
투약한 간호사도 전에 이미 곽승재에 의해 경찰서로 넘겨졌는데 그녀의 증언에도 진희숙만 언급되었다.고은서는 이 모든 결과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백유미의 신중함을 탄복했다. 그녀가 경각심을 낮추지 않고 제때 녹음하면서 증거를 남겼더라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당사자로서 고은서는 경찰 조사에 협조한 후 나머지 일을 변호사에게 맡겼다.“걱정하지 마세요. 증거가 확실하니까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송민준이 말했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대가를 치르길 바라는 사람은 백유미이지 대신 누명을 쓴 진희숙과 간호사가 아니었다.“우리 민아도 잘못한 곳이 있으니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원하는 보상이라도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보상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송민준이 말을 이어갔다.“보상은 필요 없어요. 괜찮다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죠.”고은서가 말했다.“무슨 부탁이요?”“백씨 집안에서 요즘 여러 프로젝트를 도맡아 하고 있다던데, 그 프로젝트들을 저 대신 산통 깨주세요.”고은서도 민시후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곽수혁이 GS그룹 일에 끼어들면서 백씨 집안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그녀의 말을 들은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송민아 보고 나한테도 그만 집적거리고 해. 나도 스트레스 그만 받고 싶어.”옆에 있던 민시후가 갑자기 말을 보태었다.송민준은 민시후를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시후야, 민아가 어릴 적부터 널 좋아한 걸 너도 알고 있잖아. 민아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도 곁에서 어쩔 수 없어.”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직설적으로 말했다.“난 어릴 적부터 송민아가 싫었다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데는 진짜 짝이 없다니까.”송민준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고은서에게로 돌리며 물었다.“이혼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시후랑 함께 있을 생각이신가요?”‘소식이 빠르네.’이혼한 지 며칠 되지도 않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민아 데리고 오지 않았으니까.”송민준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혹시나 또 고집부리면서 기분 나쁘게 할까 봐 오늘 너희랑 만난다는고 얘기하지 않았어.”민시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발 좀 북제로 데려가. 해성에 계속 있게 하지 말고.”송민준은 나긋한 미소를 보이면서 답했다.“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게다가 이미 ZY 그룹으로 출근하기로 했다던데.”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눈살을 더 세게 찌푸렸다.“우리 아버지가 송민아를 강제로 ZY 그룹에 밀어 넣은 건 나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데 나중에 또 고은서를 해치려 하거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 또다시 너랑 우리 아버지 때문에 봐주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고은서는 민시후를 쏘아보았다.‘나랑 송민준을 원수 사이로 만들 생각인 거야?’“뭘 쏘아봐?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민시후는 점점 더 흥분해 하며 말했다.“전에도 몇 번이고 널 협박했잖아. 심지어 간호사를 교사하여 우리 아이까지 잃게 한 사람이야. 네가 날 막지만 않았으면 내가 송민아를 가만둘 거 같아?”“...”고은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전에 유산한 경과를 민시후에게 간단히 알려주면서 송민아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걸 이렇게 이용할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씩씩거리는 민시후를 보면서 고은서는 그가 배우를 하지 않은 게 너무 아쉽다고 속으로 감탄했다.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도 전문가에게 나가보라 하고 직접 민시후에게 차를 따라줬다.“전에 병원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해. 오늘 만나자고 한 것도 그 일 때문이야.”송민준이 말하기를 진희숙은 송민아를 친딸로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돌봐온 사람으로서 그녀가 두 사람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런 모험을 했다고 한다.그리고 송민아가 간호사랑 만난 모습이 포착된 사진은 진희숙이 그녀를 불러내 우연하게 찍힌 사진이라고 한다.“민아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형, 형수님이 민시후한테 별다른 마음은 없어 보이는데 걱정하지마.”“내가 무슨 걱정을 한다고 그래?”곽승재가 약간 어색해하며 말했다.“이미 이혼한 사이인데 고은서가 누구한테 마음이 가든 누구랑 있든 나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야.”“아까 썩은 표정을 하고 경적을 울린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네.”육현석이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그러나 갑자기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애써 웃으면서 변명거리를 찾았다.“맞아, 맞아. 형 말이 맞아. 형수님이 누구랑 있든 형이랑 이젠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 역시 이혼 같은 작은 일 때문에 속상해하는 일은 전혀 없는 우리 형, 상남자답다니까.”곽승재의 얼굴빛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걸 발견한 육현석은 이내 입을 화제를 돌렸다.“형, 형수님이 형을 보기 싫어하는 것도 화나서 그러는 거잖아. 계속 이렇게 자존심 때문에 고집부려서는 안 된다니까. 형수님한테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존재감을 나타내야 할 거 아니야.”그의 말을 들은 곽승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네가 말했다시피 날 싫어하잖아. 그런데 무슨 존재감을 나타내라는 거야?”“지금 상대방을 잊지 못하고 놓아주기 싫은 사람은 형이잖아.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형수님이 스스로 돌아올 것 같아? 형, 자존심 따위 버리지 않으면 형수님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육현석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전에 낯선 사람 사이로 지내도 되냐고 물었을 때 아주 흔쾌히 된다고 답하던 고은서의 모습이 떠올랐다.어제 점심, 그가 스케줄을 바꾸면서까지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고은서가 이혼해서 무척 기쁘다고 하면서 자신의 뒤담화를 하는 걸 들었다.그러나 방금전 민시후와 다정하게 장난치면서 자신을 보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녀를 생각하면 이건 자존심을 내려놓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은서가 이젠 진짜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곽승재는 눈살을 질끈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언제 고은서랑 다시 화해하고 싶다고 했어? 인제
민시후는 그가 입을 열길 기다리고 있는 고은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오글거려 죽겠네.”고은서는 끝내 참지 못하고 방금전 손을 닦던 물티슈를 그를 향해 던졌다.“누가 오글거린다는 거야! 사람 호기심 불러일으켜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 짜증 나는 자식아!”“고은서!”물티슈에 얼굴을 맞은 민시후가 물티슈를 다시 주어 그녀를 향해 던지려고 할 때 뒤에서 갑자기 빵빵하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와 민시후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고급 SUV 한 대가 뒤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운전석에는 육현석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곽승재였다.육현석은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손을 저으며 옆에 있는 곽승재를 힐끔힐끔 보았다. 방금 경적 소리를 낸 게 그가 아니라 곽승재인 것이 분명했다.SUV 차량 높이가 꽤 있었기에 아마 방금전에 그녀와 민시후가 장난치는 걸 본 모양이다.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앉아있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몸을 홱 돌리면서 민시후에게 말했다.“초록불이야. 안 가고 뭐 해?”민시후도 차 안에 앉아있는 육현석과 곽승재를 보았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액셀을 밟기는커녕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백미러를 쳐다보았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여기에서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전에 두 사람이 운전하면서 맞부딪친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꼭 쥐고 말했다.“민시후, 우리 약속 있는 거 잊은 거 아니지? 이상한 짓 하지마.”민시후는 불쾌하다는 듯 그녀를 보며 말했다.“이상한 짓이라니. 전에 내 차를 먼저 박은 사람은 곽승재거든.”‘네가 곽승재 차 앞에 막아서서 시비 걸지 않았으면 곽승재가 널 박을 리도 없었거든.’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시후가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러면 나 먼저 차에서 내려도 돼?”“너 언제부터
민시후는 송민준과 찻집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맑은 하늘에 눈 부신 햇살, 날씨가 참 좋았다.민시후는 기사 대신 직접 하늘색 스포츠카를 운전했다.고은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는 스포츠카를 보며 말했다.“민 도련님, 패션 워크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레스토랑 가는 것뿐인데 굳이 이렇게 눈에 띄는 차를 운전해야 할까요?”“그냥 평범한 스포츠카일 뿐인데 어디가 눈에 띈다는 거야? 잔말 말고 얼른 타. 내가 직접 운전한다는데 영광으로 생각하라고.”민시후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탔다.스포츠카가 유독 눈에 띄기는 했지만 길에 차들이 적었던 탓에 다행히도 너무 큰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가는 도중에 ZY 그룹 근황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곽승재가 ZY 그룹을 타깃으로 삶고 짓누르려고 할 때 민시후가 제때 빠르게 대응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허 교수님 쪽에 의약 프로젝트가 아주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어. 후기도 꽤 괜찮고. 연구소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민시후는 회사 일을 얘기할 때만은 진지했다.“대리권도 네가 쟁취해 온 거니까 융자에 관한 일도 네가 책임지고 잘 해봐.”고은서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백유미에게 맡길 예정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는지 의문스러웠다.그녀는 궁금증을 덜기 위해 민시후에게 물었다.“곽승재 아버지가 얼마 전에 귀국하셨는데 회사 일에 참여하려 했다가 곽승재한테 거절당했다고 하더라고. 아마 이번 일도 곽승재가 아버지 건의를 거절하고 직접 내린 결정일 거야.”‘그렇구나. 그런데 회장님이신 자기 아버지랑 맞붙는 거 보아서는 아마 두 사람도 사이가 별로인가 보네.’고은서는 이내 민시후 아버지가 전에 편찮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아버지는 괜찮으셔?”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민시후는 피곤하다는
백유미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사람 시켜 조사중이니 곧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너도 말했다시피 이미 일은 발생했고 손실도 점점 더 커지고 있어. 이 말인즉슨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야. 프로젝트가 대박 나면 넌 명예랑 돈을 얻고 망하면 너랑 아무 상관이 없다? 일이 그렇게 쉬울 것 같아?”백유미가 차가운 눈빛으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프로젝트 서류에 사인한 사람은 너야. 그리고 회사 최고 결책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너고. 어떤 일이 발생하든 네가 다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네 인생은 여기서 끝이야. 너랑 네 엄마 감방으로 보내서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만들 거야.”원지훈은 백유미가 화난 김에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가 그를 하늘 정상으로 보낼 능력이 있는 만큼 다시 그를 나락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요?”원지훈이 물었다.백유미는 독사처럼 살기 가득한 눈길로 그를 보며 말했다.“돈은 당연히 감당하지 못할 테고. 그런데 그 대신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방금전까지 덤덤하던 원지훈도 점점 섬뜩해졌다.“무슨 일인데요?”“당연히 이 손해를 메꿀만한 일이지.”원지훈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이 일을 별 탈 없이 해주면 이번 손해는 그냥 넘어가 줄게. 혹은 네 엄마랑 함께 죽을 때까지 감방에 들어가 있든가. 한 가지만 선택해. 삼 일 줄게. 사흘 후에 확답을 주지 않으면 너도 어떤 후과가 있을지 알고 있을 거야.”백유미는 말하고 이내 떠났다.그녀가 떠난 후, 범가온이 부랴부랴 룸으로 들어오면서 물었다.“지훈아, 괜찮아? 유미가 또 너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고 날 나가 있으라고 한 거지?”그러나 원지훈은 대답 대신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지금 음식이 넘어가?”범가온은 호통치고는 슬쩍 문 쪽을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네가 계약 체결할 때 따로 돈 받
“고은서 눈에 네가 들어오기나 하겠어?”백유미는 곽승재도 사랑하지 않은 고은서가 원지훈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전혀 믿지 않았다.“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니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못한 곳이 어디가 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거예요? 게다가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왜 저를 위해 음식까지 주문해주면서 저를 먼저 찾아오겠어요?”“그래, 유미야. 지훈이가 옛날부터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어. 지방에서 살 때도 여러 여자애들이 얘가 좋다고 쫓아다녔는데 창업한 이후로 더 많은 여자들이 지훈이를 가지지 못해 안달이나 한다니까.”범가온은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백유미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고 원지훈에게 캐물었다.“고은서가 오늘 널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뭔데?”원지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별일 아니었어요. 너무 오래 못 봤다고 밥 사준다고 만나자 했는데 시간 없다고 했어요.”백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예전의 그녀였다면 지금 원지훈이 하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고은서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변해버렸다. 전에는 툭 건들기만 하면 펄쩍 뛰면서 화내는 사람이었는데 요즘 따라 곽승재가 무슨 일을 해도 전혀 관심 없는 태도를 보였다.심지어 민시후와 무척 가까이 지냈는데 아이가 곽승재의 아이라고 해도 두 사람이 호텔로 간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현재 원지훈과 연락을 맺고 있다는 게 너무도 수상했다.‘곽승재의 이목을 끌고 그에게 새로운 인상을 남기려는 수단인 건가?’“설마 이미 고은서에게 들킨 건 아니지?”백유미가 의심스럽다는 눈길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원지훈은 약간 당황하긴 했으나 티를 내지 않고 성가시다는 듯 답했다.“뭐가 들켰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누나랑 친한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내가 심심해서 고은서 앞에서 누나 얘기를 꺼내겠어요? 게다가 사람 뒷조사하는 거에 능하잖아요. 의심되면 조사해보면 될 거 아니에요.”나중에 조사는 해볼 것이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갑자기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비서는 선 자리에 그댈 얼어붙었다.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가 어두운 얼굴빛을 하고 서 있었다.“대... 대표님, 제가 그 뜻이 아니라...”“그럼 무슨 뜻인데?”곽승재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내가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해 보이는데 알고 보니 쓰레기라는 뜻이 아닌가?”‘갑자기 쓰레기라는 소리가 왜 나오는 거지? 내가 하는 얘기랑 완전 다른 얘기잖아.’비서는 말문이 막혔다.“대표님, 인혜 씨는 그 뜻이 아니라...”옆에서 보고 있던 주민기가 마지못해 대신 설명하려고 할 때 곽승재가 그를 쏘아보았다.“너도 이번 달 보너스 취소야!”‘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 보너스까지 취소하는 거야?’주민기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레스토랑 룸.원지훈이 룸으로 들어갔을 때, 룸 안에는 차가운 표정을 한 백유미와 범가온이 앉아있었다.테이블에는 여러 음식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 누구도 입을 대지 않은 듯했다.“유미야, 우리 지훈이 화내지 마. 이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해. 지훈이가 널 배신할 리가 없어.”범가온은 백유미에게 끊임없이 사과했다.반면 백유미는 걸어들어오는 원지훈을 혐오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지훈아, 왜 이제야 왔어. 얼른 유미한테 설명해. 요즘 회사 일로 바삐 보낼 뿐, 유미를 배신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원지훈은 성큼성큼 테이블로 다가가 앉으면서 말했다.“누나, 또 왜 그러는 거예요? 밥 먹자고 부른 거 아니었어요?”“밥 같은 소릴 하고 있네. 너 지금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백유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사진 한 뭉치와 여러 서류들을 원지훈을 향해 던지면서 말했다.“너 대체 고은서랑 무슨 사이야? 고은서랑 개인적으로 연락한 이유는 또 뭐고?”원지훈이 서류와 사진을 들고 확인해 보니 그중에는 오늘 그가 고은서 사무실을 찾아간 모습과 전에 고은서와 복싱관에서 만난 모습이 찍혀있었다.이외에도 그가 고은서에게 연락했던 통화기록과 그녀가 그를 위
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에 차가운 시선을 하고 있었다.고은서는 어젯밤 곽승재가 앞으로는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고은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어차피 모르는 사람인데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겠지.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곽승재는 계속 백유미에게 여지를 주면서도 나랑 이혼하기 싫다는 모습을 비췄잖아. 그렇게 보면 쓰레기 같은 본성을 지녔다는 건 사실이잖아.’“대표님, 조리실 구경해 보실 건가요?”누군가가 곽승재에게 물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답변을 듣지 못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던 서늘한 기운이 사라진거로 봐서는 일행이 자리를 떴다고 생각했다.“주인공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험담하는 건 어떤 기분이야?”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박지연을 향해 눈을 흘기며 답했다.“들으면 듣는 거지 뭐. 난 험담한 게 아니라 사실을 얘기한 거야.”“GS 그룹에서 시찰 나오는 게 오늘일 줄은 몰랐네. 그것도 곽승재가 직접. 은서야, 혹시 네가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온 거 아닐까?”고은서는 바로 부정했다.“아니야.”박지연이 말했다.“그래도 인연인가 보네.”“그런 인연은 필요 없어.”곽승재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깨진 상황에서 고은서는 더 이상 박지연을 설득하지 않았다.박지연은 언제나 자신의 주관이 뚜렷했다.또한 사람이라는 게, 남을 설득하는 것은 쉬워도 정작 자신이 같은 상황에 놓여있을 때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법이었다.마치 전생의 고은서와 곽승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GS 그룹 대표실에서 주민기는 곽승재에게서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감지했다.요즘 곽승재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화를 누르며 가엾은 직원들에게 화풀이하지 않았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곽승재는 갑자기 병원 실사를 진행하겠다고 일정을 변경했다.실사를 마치고 돌아온 곽승재의 표정은 이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대표실 전체에 한파가 닥친 듯했다.비서가 서류를 챙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