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시후가 싸늘히 웃으며 답했다.“다른 이유가 있겠어? 송민아를 위해 나서서 나한테 경고하는 거 아니야?”송민준도 웃었다.“너희들을 소란스럽게 만들어서 나한테 무슨 도움이 되겠어? 민아는 그냥 너랑 결혼하고 싶은 거야. 그러면 우리 가족들도 그걸 고려하지 않을까?”민시후는 송민준의 말에 넋이 나갔다.송민준이 송민아의 결혼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나서서 소란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송민준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은 믿지 않았다.송민준은 감추는 게 많았고 평소 일 처리 방식도 독특했다.그는 아무 이유 없이 클럽에 가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공교롭게 고은서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송민준의 말이 사실이라면 임철원이 그렇게 빨리 사람을 데리고 복수하고 도망친 건 누가 뒤에서 도와준 거지?’“넌 내가 갑자기 찾아온 게 의아하지 않은 가 보네? 어젯밤 일에 대해서도 훤히 꿰뚫고 있고.”민시후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송민준은 평소처럼 여유로운 표정으로 답했다.“나도 관련 게시물을 봤거든. 네가 보면 오해할 것 같았어. 어제 클럽에 간 건 단순히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야. 그런데 그 친구가 갑자기 일이 생겨 먼저 갔는데 나도 더 이상 거기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지. 시후야, 오히려 내가 묻고 싶어.”송민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민시후는 긴장을 풀고 다른 의자에 다리를 걸치며 답했다.“물을 필요 없어. 고은서가 임신한 건 사실이야.”송민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네 애야?”“그럼?”“민아 쪽은 어떻게 할 예정이야?”“어차피 혼사는 너희들이 멋대로 결정한 거니 나랑은 상관없어. 나는 단 한 번도 민아랑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시후 오빠!”송민준이 뭐라 하기도 전에 화가 난 송민아가 찻집 병풍 뒤에서 뛰쳐나왔다.“고은서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그 여자 때문에 나랑 파혼하겠다는 거예요?”갑자기 나타난 송민아였음에도 민시후는 그저 놀란 표정을 지었을 뿐 이내 평소의 모습으로 되
민시후는 지긋지긋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민아가 스스로 혼나기를 자초한다면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야.”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찻집 문으로 향하며 나서기 전 고개를 돌렸다.“시후야, 고은서 씨의 아이가 너랑 관련이 있든 없든 무리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아저씨 쪽에서는 나만큼 말이 잘 통하지 않을 거야.”“지금 협박하는 거야?”민시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송민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답했다.“그저 충고야.”말을 마친 송민준이 긴 다리로 자리를 떴다.민시후는 멀어지는 송민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지만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늦은 밤 간병인을 돌려보낸 고은서는 침대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병실은 아무리 좋아도 병실이었다.지워지지 않는 소독약 냄새는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고은서는 핸드폰을 꺼내 주의를 분산시키려고 했다.동영상을 보고 있을 때 고은서는 주인혁이 참가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방송 중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편집한 영상에는 인기 많은 멤버가 몇 명 있었는데 주인혁도 그중에 포함되었다.주인혁은 제작인이 일률로 나눠준 훈련복을 입고 있었는데도 남들보다 훨씬 더 밝고 멋져 보였다.노래할 때 주인혁의 우월한 비주얼과 독특한 무대 매너는 더 눈에 띄었다.댓글에서도 주인혁의 정보를 묻는 사람이 많았고 또한 순정 만화 주인공과 같은 동시에 묘한 야성미가 느껴져 설렌다는 댓글들도 보였다.그러한 댓글에 고은서는 진심으로 주인혁을 위해 기뻐했다. 마치 친동생이 철들고 출세해서 느끼는 자부심과 우월감도 느꼈다.요즘 주인혁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아마 훈련으로 바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30위 안에 든 사람들을 위해 주최 측에서 축하 파티를 한다더니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고은서는 굳이 주인혁에게 메시지를 보내 방해하지 않고 앱에 들어가 그가 출연한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었다.전생에도 핫했던 오디션 프로그램답게 화질과 편집은 확실히 좋았고 참여자들도 저마다의 특색이 있었다.연속 두 편
오후에 화가 나서 떠나고 저녁에 했던 통화에서도 매서웠던 곽승재의 기세에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지금 와서 따지려는 건 아니겠지?’고은서 혼자서는 곽승재를 이길 수 없었다.졸음에서 거의 깨어난 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벨을 눌러 간호사를 불러 곽승재를 쫓아내려고 했다.하지만 손을 다 뻗기도 전에 곽승재가 정확히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취한 것 같은데 왜 동작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거야?’“뭐 하려고?”곽승재가 싸늘히 웃으며 물었다.술에 취했는지 그의 말은 평소보다 느렸고 눈빛은 평소보다 더 제멋대로였고 평소보다 더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겼다.고은서는 모르는 척 합리적인 핑계를 댔다.“목말라서 간호사에게 도움을 청하려고.”곽승재가 긴 팔을 뻗어 침대맡에 놓여있던 컵을 그녀에게 내밀었다.“마셔.”곽승재에게 강하게 잡힌 고은서는 힘껏 발버둥 치지 못하고 나지막이 말했다.“이건 식었잖아. 따듯한 걸 마시고 싶어.”그 말을 들은 곽승재의 입가에 불현듯 요염한 미소가 번졌다.곽승재는 컵에 든 물을 마시고 고은서의 얼굴을 감싸 쥔 채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싫어!”곽승재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고은서는 얼른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성깔이 올라온 곽승재는 입을 가린 고은서의 손을 잡더니 기어코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목 안 말라!”그의 입이 닿은 순간 고은서는 급하게 외치며 고개를 돌렸다.곽승재의 입술은 그녀의 귓불에 닿았고 차갑고 물기 있는 입술이 귓가에 떨어지자 고은서는 전율을 참을 수 없었다.곽승재는 무언가 재밌는 일이라도 발견한 듯 차가운 입술로 그녀의 귓바퀴, 목, 쇄골을 훑으며 고은서를 자극했다. 그녀는 당황하면서 끊임없이 몸부림을 쳤다.“곽승재! 꺼져! 나쁜 놈!”수치심을 느낀 고은서가 분노에 차 외쳤다.그녀의 불편함을 느꼈는지 곽승재는 정말 움직임을 멈췄다.하지만 고은서가 숨 돌릴 틈도 없이 뜨거운 눈동자가 반짝이더니 그는 그녀의 두 손을 침대 위로 누르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날카로운 통증이 전해졌고 고은서는 아파서 오열했다.그에 반해 곽승재는 평소보다 더 흥분하여 그녀의 긴 목덜미를 미친 듯이 유린했다.귓가에서 들려오는 곽승재의 숨결은 거칠고도 뜨거워 고은서는 자기가 호랑이 굴에 떨어진 약한 먹잇감처럼 느껴졌다. 굶주린 맹수에게 한입에 핥이고 삼켜질 것만 같았다.이때의 곽승재는 평소의 냉철함은 완전히 사라지고 입술과 손은 뜨거웠고 몸까지 뜨겁게 달아올랐다.고은서는 더 깊게 잠든 야성을 불러올까 두려워 감히 몸부림칠 생각도 하지 않고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었다.이내 곽승재는 키스에 만족하지 않고 손으로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약간 거친 손가락이 여린 피부를 스치자 고은서는 온 몸에 전기가 통한 것처럼 간지럽고 저릿했다. 곽승재는 두 팔로 그녀를 꼭 껴안았는데 마치 그녀를 품속에 가두고 싶은 듯한 모양새였다.단단히 붙들린 고은서의 체온도 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 이 상태를 유지하면 통제 불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아직 몸이 허약한 그녀는 이런 자극을 견딜 수 없었다.강한 태도로 곽승재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고은서는 태도를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눈물을 짜내며 자신을 불쌍하게 보이려 애썼다. 고은서는 숨을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승재 씨, 아파. 놔줘.”안쓰러운 그녀의 어조 때문인지 곽승재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눈꼬리가 붉어지고 눈빛이 뜨거워진 곽승재에게는 여전히 욕망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는데 그걸 본 고은서도 너무 뜨거워 뜨끔해졌다.“오빠....”고은서는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어 말했다.“나 놔주면 안 돼?”곽승재의 눈빛이 반짝이며 더없이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뭐라고 부른 거야?”그의 손바닥이 더 이상 아래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고은서가 가볍게 대꾸했다.“승재 오빠...”이 호칭을 들은 곽승재는 두 손으로 그녀를 더 꽉 껴안으며 기쁘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은서야, 나 좋아하잖아. 그런데 왜 허락하지
고은서는 곽승재의 광기와 집념을 엿보고는 소리쳤다.“지금 나를 만진다면 정말 평생 미워하고 원망할 거야!”“미워할 거면 그렇게 해. 어차피 나랑 평생 살 생각 없잖아.”곽승재는 차가운 눈초리로 벨트를 내던지고 서슴없이 다가왔다.갑작스럽고 낯선 통증에 고은서는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면서 곽승재의 팔뚝을 물었다. 마치 살점을 뜯어낼 것처럼 말이다.곽승재는 한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강하게 움켜쥐어 고은서가 어쩔 수 없이 입을 풀게 했다.“곽승재,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너랑 같이 죽을 거야.”고은서가 눈물을 머금은 채 원망과 결심이 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 자식 아이를 그렇게까지 신경 쓰는 거야?”차갑게 말한 곽승재의 얼굴은 더욱 싸늘해졌고 그는 고은서의 두 다리를 더 꽉 조였다.병실 안은 순식간에 곽승재의 거친 숨결과 고은서의 오열로 가득 찼고 몇 마디의 질책도 뒤섞였다.얼마나 지났을까, 곽승재의 눈동자는 더욱 붉게 변했고 그는 몸을 숙여 고은서를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고은서, 아이는 지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 다시 시작하는 거야.”말할 힘까지 다 빠져버린 고은서는 눈물도 그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두었다....고은서는 갈증이 나서 잠에서 깼다.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물을 마시려고 했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움직이지 마.”박지연의 소리에 겨우 눈을 뜬 고은서는 비로소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박지연은 침대 옆에 앉아 있었는데 창밖으로 스며드는 햇살로 보건대 이미 대낮이었다.어젯밤 곽승재에게 들들 볶여 숨이 막혔던 고은서는 그대로 잠에 빠졌다.곽승재가 언제 갔는지 그녀는 몰랐고 박지연이 온 사실도 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물 마시려고? 따라줄게.”박지연은 그녀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고 그녀를 일으켜줬다.갈증이 났던 고은서는 물 한 잔을 다 마셔버렸다.“더 마실래?”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오늘 당직 아니잖아. 어쩐 일이야?”“곽승재가 불러서 왔어.
고은서는 더욱 이를 갈며 말했다.“정말 나한테 무슨 짓을 했다면 강간죄로 신고했을 거야! 근데 너는 우리가 안 했다는 걸 어떻게 알아?”고은서가 의문스럽게 물었다.박지연이 답했다.“곽승재가 혹시라도 내가 상황을 모르고 전신 검진을 받게 할까 봐 숨기지 못하더라고.”‘그랬구나.’지금 고은서의 모습은 검진을 받기 적합하지 않았다.“곽승재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널 신경 쓴다고 하기에는 한밤중에 와서 네가 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괴롭히고... 그렇다고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기에는 약 발라주고 날 불러서 너랑 같이 있어 달라고 하고...”박지연이 계속 투덜댔다.어젯밤 미친 듯이 행동한 곽승재를 떠올린 고은서는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그는 통제 불능인 짐승처럼 그녀를 산 채로 잡아먹고 싶어 하는 듯했다.특히 그녀의 목을 문 순간, 고은서는 정말 물려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곽승재가 받은 충격이 가볍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은서야, 곽승재한테 무슨 일 있어?”박지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아침에 봤을 때 뭔가 알 수 없는 갈등을 품고 있는 것 같았어. 뭐가 고민일까? 네가 깨어날 때까지 직접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냥 가더라고. 남의 아이를 임신했는데도 이혼하고 싶지 않은 건가?”어젯밤 곽승재가 그녀의 귓가에 했던 말이 다시 뇌리에 떠올랐다.“아이는 지워. 다시 시작하자.”곽승재의 성격상 이혼하지 않는 건 그녀를 괴롭히기 위해서인데 다시 시작하자는 제안을 해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아침에 서둘러 자리를 뜬 건 어쩌면 그런 말을 후회해서 그럴지도 몰랐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소송으로 갈 거야.”고은서는 민시후에게 변호사를 찾아달라고 한 부탁은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은서야, 곽승재가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면 소송으로도 이기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은 안 해본 거야?”박지연이 물었다.이 말은 민시후도 이전에 언급한 적이 있었다.“내가 왜 민시후한테 도움을 청한 것 같아?”고은서는 더
고은서와 박지연은 백유미가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고 옷을 걷어 올린 뒤 좋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아니요. 안 돼요.”고은서의 답을 들은 백유미는 화내지 않고 간병인에게 병실로 넣어달라고 하고는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사모님, 요 며칠 동안 허리가 너무 아파서 일어나지 못해 제때 보러 오지 못했습니다. 별일 없으시죠?”박지연은 참지 못하고 눈을 흘기며 말했다.“얼굴도 두껍네요. 은서가 환영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유미 씨, 사모님을 구하려다가 다쳤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백유미 옆에 있던 간병인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감사해하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못되게 구는 거예요?”갑작스러운 간병인의 참견에 어색해진 백유미는 부드럽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아주머니, 먼저 나가주세요. 사모님이랑 말씀 좀 나누게요.”“은서는 당신이랑 할 말 없어요. 그대로 나가세요!”박지연은 성모처럼 구는 백유미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정말 온 세상에 혼자만 좋은 사람인 것처럼 굴죠! 다 속셈을 품고 있다는 거 알아요!”박지연의 말을 듣고 백유미의 표정은 더 어색하게 굳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말을 이었다.“지연 씨랑 사모님이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요. 그대로 해명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어제 대표님이 주 비서님한테 아침을 보낸 건 그냥 겸사겸사 한 일이에요. 특별한 뜻은 없어요.”백유미가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사모님, 대표님께서는 사모님이 화나서 또 무슨 충동적인 행동을 할까 봐 이틀 동안 제 병실에도 오지 않으셨어요. 저랑 대표님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더 이상 오해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백유미 씨 뜻은 곽승재가 당신을 보러 갔다는 사실을 은서가 알면 죽기 살기로 난동을 부린다는 말인가요?”박지연이 참지 못하고 백유미의 말을 가로챘다.“그래서 곽승재는 그 이유때문에 당신한테 몰래 관심을 줄 수밖에 없었고?”백유미는 동요 없이 답했다.“그 뜻이 아니에요. 저는 단
“은서야,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유성준은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별일은 아니고요. 그냥 MQ에서 출근하는 게 어떤지 여쭤보고 싶어서 연락했어요.”유성준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좋아. 아저씨도 나를 믿어주시고 회사 직원들도 잘 협조해 줘.”“그럼 다행이네요.”고은서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하지만 네가 알아야 할 일이 있어.”유성준이 말을 이었다.“최근 MQ에 대해 알아봤는데 경영 상태 겉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은데 사실은 좋지 않아. MQ에서 이전에는 향수를 주력으로 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혁신이 없어서 시장에서 곧 밀려날 거야. 현재 샴푸와 린스, 에센스도 특별히 뛰어난 점이 없어서 경쟁업체를 뛰어넘을 수 없어.”“그럼 어떡해요?”고은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이번 생에 MQ가 위기에는 처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불안정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유성준이 위로했다.“발등에 불이 떨어진 급한 상황도 아니라 변화를 주더라도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해서 시간이 필요해.”“그래요. 바쁜 일만 끝나면 같이 외할아버지와 상의해요. 아니다. 그냥 저희끼리 대책을 논의해 봐요.”나이도 많고 건강도 좋지 않은 외할아버지가 MQ를 삼촌에게 맡긴 것은 더 이상 신경 쓸 여력이 없기 때문이었다.“그래, 난 언제든지 시간이 있으니 편할 때 연락해.”유성준이 온화하게 답했다.두 사람은 몇 마디 한담을 나누고 통화를 끝냈다.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할 때 카톡으로 원지훈이 보낸 음성메시지가 왔다. 고은혜의 안부를 묻는 내용이었다.회사 일로 바빠서 고은혜를 소홀히 했더니 화가 나서 그를 차단했다고 했다.고은서는 고은혜가 이번에는 원지훈에게 쉽게 속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지난 생처럼 비참하지 않겠지?’원지훈이 쓸모가 있다고 판단한 고은서가 답장했다.[미안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은혜가 나한테 모든 걸 얘기하는 건 아니야. 나도 은혜 행방을 잘 몰라.]고은서의 태도로 인해 원지훈은 손쉽다는 착각에 빠졌는지 다시 답장해
투약한 간호사도 전에 이미 곽승재에 의해 경찰서로 넘겨졌는데 그녀의 증언에도 진희숙만 언급되었다.고은서는 이 모든 결과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백유미의 신중함을 탄복했다. 그녀가 경각심을 낮추지 않고 제때 녹음하면서 증거를 남겼더라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당사자로서 고은서는 경찰 조사에 협조한 후 나머지 일을 변호사에게 맡겼다.“걱정하지 마세요. 증거가 확실하니까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송민준이 말했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대가를 치르길 바라는 사람은 백유미이지 대신 누명을 쓴 진희숙과 간호사가 아니었다.“우리 민아도 잘못한 곳이 있으니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원하는 보상이라도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보상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송민준이 말을 이어갔다.“보상은 필요 없어요. 괜찮다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죠.”고은서가 말했다.“무슨 부탁이요?”“백씨 집안에서 요즘 여러 프로젝트를 도맡아 하고 있다던데, 그 프로젝트들을 저 대신 산통 깨주세요.”고은서도 민시후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곽수혁이 GS그룹 일에 끼어들면서 백씨 집안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그녀의 말을 들은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송민아 보고 나한테도 그만 집적거리고 해. 나도 스트레스 그만 받고 싶어.”옆에 있던 민시후가 갑자기 말을 보태었다.송민준은 민시후를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시후야, 민아가 어릴 적부터 널 좋아한 걸 너도 알고 있잖아. 민아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도 곁에서 어쩔 수 없어.”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직설적으로 말했다.“난 어릴 적부터 송민아가 싫었다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데는 진짜 짝이 없다니까.”송민준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고은서에게로 돌리며 물었다.“이혼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시후랑 함께 있을 생각이신가요?”‘소식이 빠르네.’이혼한 지 며칠 되지도 않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민아 데리고 오지 않았으니까.”송민준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혹시나 또 고집부리면서 기분 나쁘게 할까 봐 오늘 너희랑 만난다는고 얘기하지 않았어.”민시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발 좀 북제로 데려가. 해성에 계속 있게 하지 말고.”송민준은 나긋한 미소를 보이면서 답했다.“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게다가 이미 ZY 그룹으로 출근하기로 했다던데.”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눈살을 더 세게 찌푸렸다.“우리 아버지가 송민아를 강제로 ZY 그룹에 밀어 넣은 건 나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데 나중에 또 고은서를 해치려 하거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 또다시 너랑 우리 아버지 때문에 봐주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고은서는 민시후를 쏘아보았다.‘나랑 송민준을 원수 사이로 만들 생각인 거야?’“뭘 쏘아봐?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민시후는 점점 더 흥분해 하며 말했다.“전에도 몇 번이고 널 협박했잖아. 심지어 간호사를 교사하여 우리 아이까지 잃게 한 사람이야. 네가 날 막지만 않았으면 내가 송민아를 가만둘 거 같아?”“...”고은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전에 유산한 경과를 민시후에게 간단히 알려주면서 송민아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걸 이렇게 이용할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씩씩거리는 민시후를 보면서 고은서는 그가 배우를 하지 않은 게 너무 아쉽다고 속으로 감탄했다.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도 전문가에게 나가보라 하고 직접 민시후에게 차를 따라줬다.“전에 병원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해. 오늘 만나자고 한 것도 그 일 때문이야.”송민준이 말하기를 진희숙은 송민아를 친딸로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돌봐온 사람으로서 그녀가 두 사람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런 모험을 했다고 한다.그리고 송민아가 간호사랑 만난 모습이 포착된 사진은 진희숙이 그녀를 불러내 우연하게 찍힌 사진이라고 한다.“민아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형, 형수님이 민시후한테 별다른 마음은 없어 보이는데 걱정하지마.”“내가 무슨 걱정을 한다고 그래?”곽승재가 약간 어색해하며 말했다.“이미 이혼한 사이인데 고은서가 누구한테 마음이 가든 누구랑 있든 나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야.”“아까 썩은 표정을 하고 경적을 울린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네.”육현석이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그러나 갑자기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애써 웃으면서 변명거리를 찾았다.“맞아, 맞아. 형 말이 맞아. 형수님이 누구랑 있든 형이랑 이젠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 역시 이혼 같은 작은 일 때문에 속상해하는 일은 전혀 없는 우리 형, 상남자답다니까.”곽승재의 얼굴빛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걸 발견한 육현석은 이내 입을 화제를 돌렸다.“형, 형수님이 형을 보기 싫어하는 것도 화나서 그러는 거잖아. 계속 이렇게 자존심 때문에 고집부려서는 안 된다니까. 형수님한테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존재감을 나타내야 할 거 아니야.”그의 말을 들은 곽승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네가 말했다시피 날 싫어하잖아. 그런데 무슨 존재감을 나타내라는 거야?”“지금 상대방을 잊지 못하고 놓아주기 싫은 사람은 형이잖아.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형수님이 스스로 돌아올 것 같아? 형, 자존심 따위 버리지 않으면 형수님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육현석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전에 낯선 사람 사이로 지내도 되냐고 물었을 때 아주 흔쾌히 된다고 답하던 고은서의 모습이 떠올랐다.어제 점심, 그가 스케줄을 바꾸면서까지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고은서가 이혼해서 무척 기쁘다고 하면서 자신의 뒤담화를 하는 걸 들었다.그러나 방금전 민시후와 다정하게 장난치면서 자신을 보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녀를 생각하면 이건 자존심을 내려놓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은서가 이젠 진짜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곽승재는 눈살을 질끈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언제 고은서랑 다시 화해하고 싶다고 했어? 인제
민시후는 그가 입을 열길 기다리고 있는 고은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오글거려 죽겠네.”고은서는 끝내 참지 못하고 방금전 손을 닦던 물티슈를 그를 향해 던졌다.“누가 오글거린다는 거야! 사람 호기심 불러일으켜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 짜증 나는 자식아!”“고은서!”물티슈에 얼굴을 맞은 민시후가 물티슈를 다시 주어 그녀를 향해 던지려고 할 때 뒤에서 갑자기 빵빵하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와 민시후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고급 SUV 한 대가 뒤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운전석에는 육현석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곽승재였다.육현석은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손을 저으며 옆에 있는 곽승재를 힐끔힐끔 보았다. 방금 경적 소리를 낸 게 그가 아니라 곽승재인 것이 분명했다.SUV 차량 높이가 꽤 있었기에 아마 방금전에 그녀와 민시후가 장난치는 걸 본 모양이다.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앉아있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몸을 홱 돌리면서 민시후에게 말했다.“초록불이야. 안 가고 뭐 해?”민시후도 차 안에 앉아있는 육현석과 곽승재를 보았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액셀을 밟기는커녕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백미러를 쳐다보았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여기에서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전에 두 사람이 운전하면서 맞부딪친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꼭 쥐고 말했다.“민시후, 우리 약속 있는 거 잊은 거 아니지? 이상한 짓 하지마.”민시후는 불쾌하다는 듯 그녀를 보며 말했다.“이상한 짓이라니. 전에 내 차를 먼저 박은 사람은 곽승재거든.”‘네가 곽승재 차 앞에 막아서서 시비 걸지 않았으면 곽승재가 널 박을 리도 없었거든.’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시후가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러면 나 먼저 차에서 내려도 돼?”“너 언제부터
민시후는 송민준과 찻집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맑은 하늘에 눈 부신 햇살, 날씨가 참 좋았다.민시후는 기사 대신 직접 하늘색 스포츠카를 운전했다.고은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는 스포츠카를 보며 말했다.“민 도련님, 패션 워크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레스토랑 가는 것뿐인데 굳이 이렇게 눈에 띄는 차를 운전해야 할까요?”“그냥 평범한 스포츠카일 뿐인데 어디가 눈에 띈다는 거야? 잔말 말고 얼른 타. 내가 직접 운전한다는데 영광으로 생각하라고.”민시후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탔다.스포츠카가 유독 눈에 띄기는 했지만 길에 차들이 적었던 탓에 다행히도 너무 큰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가는 도중에 ZY 그룹 근황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곽승재가 ZY 그룹을 타깃으로 삶고 짓누르려고 할 때 민시후가 제때 빠르게 대응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허 교수님 쪽에 의약 프로젝트가 아주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어. 후기도 꽤 괜찮고. 연구소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민시후는 회사 일을 얘기할 때만은 진지했다.“대리권도 네가 쟁취해 온 거니까 융자에 관한 일도 네가 책임지고 잘 해봐.”고은서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백유미에게 맡길 예정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는지 의문스러웠다.그녀는 궁금증을 덜기 위해 민시후에게 물었다.“곽승재 아버지가 얼마 전에 귀국하셨는데 회사 일에 참여하려 했다가 곽승재한테 거절당했다고 하더라고. 아마 이번 일도 곽승재가 아버지 건의를 거절하고 직접 내린 결정일 거야.”‘그렇구나. 그런데 회장님이신 자기 아버지랑 맞붙는 거 보아서는 아마 두 사람도 사이가 별로인가 보네.’고은서는 이내 민시후 아버지가 전에 편찮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아버지는 괜찮으셔?”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민시후는 피곤하다는
백유미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사람 시켜 조사중이니 곧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너도 말했다시피 이미 일은 발생했고 손실도 점점 더 커지고 있어. 이 말인즉슨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야. 프로젝트가 대박 나면 넌 명예랑 돈을 얻고 망하면 너랑 아무 상관이 없다? 일이 그렇게 쉬울 것 같아?”백유미가 차가운 눈빛으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프로젝트 서류에 사인한 사람은 너야. 그리고 회사 최고 결책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너고. 어떤 일이 발생하든 네가 다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네 인생은 여기서 끝이야. 너랑 네 엄마 감방으로 보내서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만들 거야.”원지훈은 백유미가 화난 김에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가 그를 하늘 정상으로 보낼 능력이 있는 만큼 다시 그를 나락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요?”원지훈이 물었다.백유미는 독사처럼 살기 가득한 눈길로 그를 보며 말했다.“돈은 당연히 감당하지 못할 테고. 그런데 그 대신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방금전까지 덤덤하던 원지훈도 점점 섬뜩해졌다.“무슨 일인데요?”“당연히 이 손해를 메꿀만한 일이지.”원지훈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이 일을 별 탈 없이 해주면 이번 손해는 그냥 넘어가 줄게. 혹은 네 엄마랑 함께 죽을 때까지 감방에 들어가 있든가. 한 가지만 선택해. 삼 일 줄게. 사흘 후에 확답을 주지 않으면 너도 어떤 후과가 있을지 알고 있을 거야.”백유미는 말하고 이내 떠났다.그녀가 떠난 후, 범가온이 부랴부랴 룸으로 들어오면서 물었다.“지훈아, 괜찮아? 유미가 또 너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고 날 나가 있으라고 한 거지?”그러나 원지훈은 대답 대신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지금 음식이 넘어가?”범가온은 호통치고는 슬쩍 문 쪽을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네가 계약 체결할 때 따로 돈 받
“고은서 눈에 네가 들어오기나 하겠어?”백유미는 곽승재도 사랑하지 않은 고은서가 원지훈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전혀 믿지 않았다.“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니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못한 곳이 어디가 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거예요? 게다가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왜 저를 위해 음식까지 주문해주면서 저를 먼저 찾아오겠어요?”“그래, 유미야. 지훈이가 옛날부터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어. 지방에서 살 때도 여러 여자애들이 얘가 좋다고 쫓아다녔는데 창업한 이후로 더 많은 여자들이 지훈이를 가지지 못해 안달이나 한다니까.”범가온은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백유미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고 원지훈에게 캐물었다.“고은서가 오늘 널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뭔데?”원지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별일 아니었어요. 너무 오래 못 봤다고 밥 사준다고 만나자 했는데 시간 없다고 했어요.”백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예전의 그녀였다면 지금 원지훈이 하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고은서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변해버렸다. 전에는 툭 건들기만 하면 펄쩍 뛰면서 화내는 사람이었는데 요즘 따라 곽승재가 무슨 일을 해도 전혀 관심 없는 태도를 보였다.심지어 민시후와 무척 가까이 지냈는데 아이가 곽승재의 아이라고 해도 두 사람이 호텔로 간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현재 원지훈과 연락을 맺고 있다는 게 너무도 수상했다.‘곽승재의 이목을 끌고 그에게 새로운 인상을 남기려는 수단인 건가?’“설마 이미 고은서에게 들킨 건 아니지?”백유미가 의심스럽다는 눈길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원지훈은 약간 당황하긴 했으나 티를 내지 않고 성가시다는 듯 답했다.“뭐가 들켰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누나랑 친한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내가 심심해서 고은서 앞에서 누나 얘기를 꺼내겠어요? 게다가 사람 뒷조사하는 거에 능하잖아요. 의심되면 조사해보면 될 거 아니에요.”나중에 조사는 해볼 것이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갑자기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비서는 선 자리에 그댈 얼어붙었다.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가 어두운 얼굴빛을 하고 서 있었다.“대... 대표님, 제가 그 뜻이 아니라...”“그럼 무슨 뜻인데?”곽승재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내가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해 보이는데 알고 보니 쓰레기라는 뜻이 아닌가?”‘갑자기 쓰레기라는 소리가 왜 나오는 거지? 내가 하는 얘기랑 완전 다른 얘기잖아.’비서는 말문이 막혔다.“대표님, 인혜 씨는 그 뜻이 아니라...”옆에서 보고 있던 주민기가 마지못해 대신 설명하려고 할 때 곽승재가 그를 쏘아보았다.“너도 이번 달 보너스 취소야!”‘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 보너스까지 취소하는 거야?’주민기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레스토랑 룸.원지훈이 룸으로 들어갔을 때, 룸 안에는 차가운 표정을 한 백유미와 범가온이 앉아있었다.테이블에는 여러 음식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 누구도 입을 대지 않은 듯했다.“유미야, 우리 지훈이 화내지 마. 이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해. 지훈이가 널 배신할 리가 없어.”범가온은 백유미에게 끊임없이 사과했다.반면 백유미는 걸어들어오는 원지훈을 혐오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지훈아, 왜 이제야 왔어. 얼른 유미한테 설명해. 요즘 회사 일로 바삐 보낼 뿐, 유미를 배신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원지훈은 성큼성큼 테이블로 다가가 앉으면서 말했다.“누나, 또 왜 그러는 거예요? 밥 먹자고 부른 거 아니었어요?”“밥 같은 소릴 하고 있네. 너 지금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백유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사진 한 뭉치와 여러 서류들을 원지훈을 향해 던지면서 말했다.“너 대체 고은서랑 무슨 사이야? 고은서랑 개인적으로 연락한 이유는 또 뭐고?”원지훈이 서류와 사진을 들고 확인해 보니 그중에는 오늘 그가 고은서 사무실을 찾아간 모습과 전에 고은서와 복싱관에서 만난 모습이 찍혀있었다.이외에도 그가 고은서에게 연락했던 통화기록과 그녀가 그를 위
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에 차가운 시선을 하고 있었다.고은서는 어젯밤 곽승재가 앞으로는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고은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어차피 모르는 사람인데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겠지.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곽승재는 계속 백유미에게 여지를 주면서도 나랑 이혼하기 싫다는 모습을 비췄잖아. 그렇게 보면 쓰레기 같은 본성을 지녔다는 건 사실이잖아.’“대표님, 조리실 구경해 보실 건가요?”누군가가 곽승재에게 물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답변을 듣지 못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던 서늘한 기운이 사라진거로 봐서는 일행이 자리를 떴다고 생각했다.“주인공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험담하는 건 어떤 기분이야?”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박지연을 향해 눈을 흘기며 답했다.“들으면 듣는 거지 뭐. 난 험담한 게 아니라 사실을 얘기한 거야.”“GS 그룹에서 시찰 나오는 게 오늘일 줄은 몰랐네. 그것도 곽승재가 직접. 은서야, 혹시 네가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온 거 아닐까?”고은서는 바로 부정했다.“아니야.”박지연이 말했다.“그래도 인연인가 보네.”“그런 인연은 필요 없어.”곽승재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깨진 상황에서 고은서는 더 이상 박지연을 설득하지 않았다.박지연은 언제나 자신의 주관이 뚜렷했다.또한 사람이라는 게, 남을 설득하는 것은 쉬워도 정작 자신이 같은 상황에 놓여있을 때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법이었다.마치 전생의 고은서와 곽승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GS 그룹 대표실에서 주민기는 곽승재에게서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감지했다.요즘 곽승재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화를 누르며 가엾은 직원들에게 화풀이하지 않았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곽승재는 갑자기 병원 실사를 진행하겠다고 일정을 변경했다.실사를 마치고 돌아온 곽승재의 표정은 이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대표실 전체에 한파가 닥친 듯했다.비서가 서류를 챙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