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곽승재의 광기와 집념을 엿보고는 소리쳤다.“지금 나를 만진다면 정말 평생 미워하고 원망할 거야!”“미워할 거면 그렇게 해. 어차피 나랑 평생 살 생각 없잖아.”곽승재는 차가운 눈초리로 벨트를 내던지고 서슴없이 다가왔다.갑작스럽고 낯선 통증에 고은서는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면서 곽승재의 팔뚝을 물었다. 마치 살점을 뜯어낼 것처럼 말이다.곽승재는 한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강하게 움켜쥐어 고은서가 어쩔 수 없이 입을 풀게 했다.“곽승재,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너랑 같이 죽을 거야.”고은서가 눈물을 머금은 채 원망과 결심이 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 자식 아이를 그렇게까지 신경 쓰는 거야?”차갑게 말한 곽승재의 얼굴은 더욱 싸늘해졌고 그는 고은서의 두 다리를 더 꽉 조였다.병실 안은 순식간에 곽승재의 거친 숨결과 고은서의 오열로 가득 찼고 몇 마디의 질책도 뒤섞였다.얼마나 지났을까, 곽승재의 눈동자는 더욱 붉게 변했고 그는 몸을 숙여 고은서를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고은서, 아이는 지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 다시 시작하는 거야.”말할 힘까지 다 빠져버린 고은서는 눈물도 그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두었다....고은서는 갈증이 나서 잠에서 깼다.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물을 마시려고 했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움직이지 마.”박지연의 소리에 겨우 눈을 뜬 고은서는 비로소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박지연은 침대 옆에 앉아 있었는데 창밖으로 스며드는 햇살로 보건대 이미 대낮이었다.어젯밤 곽승재에게 들들 볶여 숨이 막혔던 고은서는 그대로 잠에 빠졌다.곽승재가 언제 갔는지 그녀는 몰랐고 박지연이 온 사실도 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물 마시려고? 따라줄게.”박지연은 그녀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고 그녀를 일으켜줬다.갈증이 났던 고은서는 물 한 잔을 다 마셔버렸다.“더 마실래?”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오늘 당직 아니잖아. 어쩐 일이야?”“곽승재가 불러서 왔어.
고은서는 더욱 이를 갈며 말했다.“정말 나한테 무슨 짓을 했다면 강간죄로 신고했을 거야! 근데 너는 우리가 안 했다는 걸 어떻게 알아?”고은서가 의문스럽게 물었다.박지연이 답했다.“곽승재가 혹시라도 내가 상황을 모르고 전신 검진을 받게 할까 봐 숨기지 못하더라고.”‘그랬구나.’지금 고은서의 모습은 검진을 받기 적합하지 않았다.“곽승재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널 신경 쓴다고 하기에는 한밤중에 와서 네가 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괴롭히고... 그렇다고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기에는 약 발라주고 날 불러서 너랑 같이 있어 달라고 하고...”박지연이 계속 투덜댔다.어젯밤 미친 듯이 행동한 곽승재를 떠올린 고은서는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그는 통제 불능인 짐승처럼 그녀를 산 채로 잡아먹고 싶어 하는 듯했다.특히 그녀의 목을 문 순간, 고은서는 정말 물려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곽승재가 받은 충격이 가볍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은서야, 곽승재한테 무슨 일 있어?”박지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아침에 봤을 때 뭔가 알 수 없는 갈등을 품고 있는 것 같았어. 뭐가 고민일까? 네가 깨어날 때까지 직접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냥 가더라고. 남의 아이를 임신했는데도 이혼하고 싶지 않은 건가?”어젯밤 곽승재가 그녀의 귓가에 했던 말이 다시 뇌리에 떠올랐다.“아이는 지워. 다시 시작하자.”곽승재의 성격상 이혼하지 않는 건 그녀를 괴롭히기 위해서인데 다시 시작하자는 제안을 해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아침에 서둘러 자리를 뜬 건 어쩌면 그런 말을 후회해서 그럴지도 몰랐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소송으로 갈 거야.”고은서는 민시후에게 변호사를 찾아달라고 한 부탁은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은서야, 곽승재가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면 소송으로도 이기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은 안 해본 거야?”박지연이 물었다.이 말은 민시후도 이전에 언급한 적이 있었다.“내가 왜 민시후한테 도움을 청한 것 같아?”고은서는 더
고은서와 박지연은 백유미가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고 옷을 걷어 올린 뒤 좋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아니요. 안 돼요.”고은서의 답을 들은 백유미는 화내지 않고 간병인에게 병실로 넣어달라고 하고는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사모님, 요 며칠 동안 허리가 너무 아파서 일어나지 못해 제때 보러 오지 못했습니다. 별일 없으시죠?”박지연은 참지 못하고 눈을 흘기며 말했다.“얼굴도 두껍네요. 은서가 환영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유미 씨, 사모님을 구하려다가 다쳤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백유미 옆에 있던 간병인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감사해하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못되게 구는 거예요?”갑작스러운 간병인의 참견에 어색해진 백유미는 부드럽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아주머니, 먼저 나가주세요. 사모님이랑 말씀 좀 나누게요.”“은서는 당신이랑 할 말 없어요. 그대로 나가세요!”박지연은 성모처럼 구는 백유미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정말 온 세상에 혼자만 좋은 사람인 것처럼 굴죠! 다 속셈을 품고 있다는 거 알아요!”박지연의 말을 듣고 백유미의 표정은 더 어색하게 굳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말을 이었다.“지연 씨랑 사모님이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요. 그대로 해명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어제 대표님이 주 비서님한테 아침을 보낸 건 그냥 겸사겸사 한 일이에요. 특별한 뜻은 없어요.”백유미가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사모님, 대표님께서는 사모님이 화나서 또 무슨 충동적인 행동을 할까 봐 이틀 동안 제 병실에도 오지 않으셨어요. 저랑 대표님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더 이상 오해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백유미 씨 뜻은 곽승재가 당신을 보러 갔다는 사실을 은서가 알면 죽기 살기로 난동을 부린다는 말인가요?”박지연이 참지 못하고 백유미의 말을 가로챘다.“그래서 곽승재는 그 이유때문에 당신한테 몰래 관심을 줄 수밖에 없었고?”백유미는 동요 없이 답했다.“그 뜻이 아니에요. 저는 단
“은서야,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유성준은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별일은 아니고요. 그냥 MQ에서 출근하는 게 어떤지 여쭤보고 싶어서 연락했어요.”유성준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좋아. 아저씨도 나를 믿어주시고 회사 직원들도 잘 협조해 줘.”“그럼 다행이네요.”고은서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하지만 네가 알아야 할 일이 있어.”유성준이 말을 이었다.“최근 MQ에 대해 알아봤는데 경영 상태 겉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은데 사실은 좋지 않아. MQ에서 이전에는 향수를 주력으로 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혁신이 없어서 시장에서 곧 밀려날 거야. 현재 샴푸와 린스, 에센스도 특별히 뛰어난 점이 없어서 경쟁업체를 뛰어넘을 수 없어.”“그럼 어떡해요?”고은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이번 생에 MQ가 위기에는 처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불안정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유성준이 위로했다.“발등에 불이 떨어진 급한 상황도 아니라 변화를 주더라도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해서 시간이 필요해.”“그래요. 바쁜 일만 끝나면 같이 외할아버지와 상의해요. 아니다. 그냥 저희끼리 대책을 논의해 봐요.”나이도 많고 건강도 좋지 않은 외할아버지가 MQ를 삼촌에게 맡긴 것은 더 이상 신경 쓸 여력이 없기 때문이었다.“그래, 난 언제든지 시간이 있으니 편할 때 연락해.”유성준이 온화하게 답했다.두 사람은 몇 마디 한담을 나누고 통화를 끝냈다.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할 때 카톡으로 원지훈이 보낸 음성메시지가 왔다. 고은혜의 안부를 묻는 내용이었다.회사 일로 바빠서 고은혜를 소홀히 했더니 화가 나서 그를 차단했다고 했다.고은서는 고은혜가 이번에는 원지훈에게 쉽게 속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지난 생처럼 비참하지 않겠지?’원지훈이 쓸모가 있다고 판단한 고은서가 답장했다.[미안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은혜가 나한테 모든 걸 얘기하는 건 아니야. 나도 은혜 행방을 잘 몰라.]고은서의 태도로 인해 원지훈은 손쉽다는 착각에 빠졌는지 다시 답장해
곽승재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어젯밤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었다.고은서의 가녀린 몸, 하얗다 못해 투명한 듯한 피부는 따뜻한 불빛 아래 부드러운 도자기처럼 빛나 넋을 잃게 했다.그는 자신의 욕망을 통제할 수 없었고 그저 그녀를 차지하고 몸 곳곳에 그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고은서는 그에게 괴롭힘을 당해 눈물까지 흘렸지만 끝까지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예쁜 눈에 분노를 담아 그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은 그로 하여금 더욱 힘껏 그녀를 괴롭혀 굴복시키고 싶었다.무의식적으로 침을 삼킨 곽승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고은서, 어젯밤 부단히 도발하던데 그 후과는 예상하고 한 거 아니야?”고은서는 곽승재의 파렴치함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짐승처럼 괴롭혀 놓고 내가 도발했다고?’“곽승재, 이 개자식아!”그 말을 들은 곽승재는 그녀를 차갑게 흘겨보았다.“또 건드리네. 한 번 더 하고 싶은 거야?”‘개자식일 뿐만 아니라 오만방자하기까지 하네.’곽승재의 뻔뻔함에 비할 수 없었던 고은서는 더 이상 그와 의미 없는 말싸움을 이어나가지 않았다.“나가. 이혼 외에는 당신이랑 할 말 없어.”곽승재는 분노를 억누르며 가방에 있던 서류를 고은서에게 내밀었다.고은서가 경계하며 물었다.“뭔데?”“네가 원하던 거.”고은서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이혼 서류야?”‘이제야 불륜을 용납하지 못해 이혼하려는 건가?’곽승재는 가벼운 냉소를 지으며 답했다.“직접 열어봐.”고은서는 곽승재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서류를 열었다.안에는 뜻밖에서 부동산 서류와 키가 들어있었다.“무슨 뜻이야?”고은서가 크게 실망하며 물었다.“이혼 서류라며?”“네 멋대로 생각한 거잖아.”곽승재는 담담한 말투로 답했다.“시그니엘이야. 인테리어는 당신이 전에 말했던 디자이너에게 부탁해서 했어. 퇴원하면 바로 입주할 수 있어.”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지난번 곽승재가 먼저 같이 밥을 먹으면 집을 준다고
곽승재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고은서, 날 배신한 건 너야. 너한테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도 줬는데 꼭 그렇게 애를 낳겠다고 고집을 부려야겠어?”‘별 같잖은 기회 따위...’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마음이 심란했다.“곽승재, 여기서 일방적인 희망을 품지 말아 줄래? 난 지금까지 기회를 바랐던 적이 없어. 아이는 내 아이니 당연히 낳아야지.”말문이 막힌 곽승재는 고은서를 한참 동안 쳐다보고 나서야 의미심장하게 물었다.“룸에서 다쳐서 불편하면서도 내가 접근하는 걸 거부하면서 민시후한테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한 건 왜 그런 거야?”‘왜 그랬겠어! 백유미가 있는 이상 네가 날 먼저 구할 리는 없으니 제일 먼저 민시후한테 도움을 청한 거지.’나중에는 단순히 임신한 사실을 들킬까 봐 그랬던 것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진실을 곽승재에게 알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냉소를 지으며 되물었다.“왜 그랬을 것 같아?”곽승재가 답하기 전에 고은서가 말을 이었다.“곽승재, 나와 민시후의 관계가 각별하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을 거야. 내가 시후를 도와 명운을 손에 넣고 미래 투자은행에 들어갔지. 그 후에 밥도 몇 번 같이 먹고 M국에서 돌아올 때 직접 데리러까지 갔어.”“됐어! 그만해!”곽승재는 더 이상 못 듣겠다는 듯이 싸늘한 표정으로 고은서의 말을 끊었다.“고은서, 내가 지금까지 참아왔던 건 널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야. 단지 할머니랑 외할아버지 체면을 생각해서 놔뒀던 거지. 하지만 당신이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더 이상 참지 않을 거야.”곽승재의 어두워진 안색과 사나운 눈매를 보고 고은서는 그가 자신의 말을 믿었음을 확신했다.“곽승재, 여기서 자신을 속일 필요는 없어. 난 한 번도 당신한테 참으라고 한 적 없어. 그리고 당신이 체면을 세워줄 필요도 없고. 내가 지금까지 원하는 건 이혼뿐이었어.”고은서는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하... 이혼하고 다른 남자 만나려고? 단념해! 충고하는데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싸늘
“어떻게 된 일이야?”고은서가 물었다.“그동안 아무 문제 없었다며?”“협업하기로 했던 병원 몇 군데가 갑자기 협업을 거절했어.”민시후가 모처럼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직원들이 그 사람들이랑 따지다가 말다툼이 벌어졌는데 몸싸움으로까지 번져 경찰에 연행됐어. 허 교수 연구소에서도 연락을 받고 이걸 이유로 투자 계획을 거절했어. 또한 회사 실력을 의심하면서 대리권 행사도 신중히 검토하겠다고 연락왔어.”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하나하나가 일반적인 사고 같았지만 고은서는 누구보다 곽승재의 작품일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어젯밤 곽승재는 그녀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 미래 투자은행은 아마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허 교수 쪽은 원래 곽승재의 체면을 봐서 그녀에게 대리권을 넘긴 것이었다. 하지만 미래 투자은행에서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그는 당당하게 대리권을 회수해 갈 것이었다.“경찰서에 가서 상황을 파악해 봤어. 현재 병원 측 태도는 강경해. 합의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아마 곽승재 작품이겠지.”민시후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곽승재는 항상 이렇게 비열해.”민시후도 곽승재의 작품이리라 짐작했다.고은서가 답했다.“곽승재한테 연락할게.”“이 일로 굳이 연락할 필요는 없어. 내가 전화한 건 그냥 너한테 이 사실을 알려주려고 한 거야. 이렇게 쉽게 곽승재한테 당하지는 않을 거야. 조금 전 나한테 무슨 말 하려고 했어?”민시후가 물었다.고은서는 그제야 용건을 기억해 내고는 답했다.“네가 소개해 준 변호사 아직도 안 왔어. 연락도 안 돼.”“응?”잠시 의아함을 느낀 민시후가 메시지라도 받은 듯 말했다.“잠시만.”이내 민시후가 고은서에게 말했다.“변호사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이 이혼 사건을 맡을 수 없다는데?”제인 제약 일이 먼저 터진 터라 고은서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어제 이 유명한 변호사는 곽승재의 세력을 무서워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고은서가 물었다.“그렇다고 해서 돈에 굴복하
“이번 달 상여금은 없어요! 이건 본보기를 보이는 거예요! 다시는 같은 실수하지 마세요.”황인혜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호랑이 없는 굴에서 여우가 왕 노릇 한다더니 딱 그 꼴이네. 비서실장 됐다고 아주 유세야.”조금 전 사과를 하던 여자가 투덜거렸다.“그러게 말이야. 회사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고 경력도 우리보다 짧으면서! 주 비서님께서 일부러 승진시킨 게 아니었다면 제 차례도 오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다른 한 여자가 맞장구를 쳤다.“목소리 좀 낮춰. 주 비서님이랑 특별한 사이일 수도 있어.”여자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지난번에 프런트에 서류 찾으러 가고 있었는데 마침 주 비서님을 마주쳐서 주 비서님이 임무를 줬대. 완성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승진했잖아.”두 여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고은서는 주먹을 꽉 쥐었다.‘어쩐지 그날 시원시원하게 이혼 서류에 사인한다 했어! 비서한테 시켜서 서류를 바꿔치기했구나.’고은서는 며칠 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자신이 조심성이 없어서 재수가 없어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이제 보니 그건 곽승재의 계략이었다.‘외삼촌과 외숙모가 사무실에 있던 것도 우연은 아니겠지.’“사모님, 왜 여기 서 계십니까? 대표님은 사무실에 계십니다.”그때 주민기가 걸어 나왔다.고은서는 평소처럼 주민기와 인사를 나누는 대신 싸늘한 얼굴을 한 채 곽승재의 사무실로 향했다.주민기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은서에게 무슨 미움을 샀는지 생각하고 있었다.프런트에서 미리 연락을 받은 그는 고은서가 한참이 지나도 안 오자 확인차 나온 것이었다.사무실에서 곽승재는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그는 의자에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햇빛이 창문을 통해 비치며 그의 주위를 금빛으로 물들였다.똑똑.고은서가 노크하고 바로 사무실로 들어섰다.곽승재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출현이 예상 범위 내에 있었다는 듯이 그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고은서는 곽승재 맞은편에 앉아 싸늘한 표정으로
고은서의 제안에 여시은이 반응하기도 전에 곽승재가 차갑게 말했다.“미안하지만 바쁩니다.”여시은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곽 대표님, 한가해도 저랑 가지 않을 거잖아요! 곽 대표님 안목을 믿을 수가 있어야죠.”말을 마친 여시은이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은서야, 곽 대표님이 고양이 돌보게 두고 넌 나랑 같이 가자. 다른 고양이한테 정신 팔려서 쿠아를 소홀히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결국 고은서는 여시은과 함께 삼색 고양이를 보러 갔다.고양이는 귀여웠지만 쿠아는 그 고양이를 경계하며 가까이 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살짝 겁을 먹은 듯 보였다.“삼색 고양이는 고양이 세계의 미녀라 누구든 보면 좋아한다고 하던데 왜 쿠아는 싫어하는 거지?”여시은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쿠아가 아직 이 환경에 적응을 못 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그러네. 그럼 그냥 쿠아를 혼자 두는 게 낫겠다. 괜히 다른 고양이를 들여서 외롭다고 느끼게 만들면 안 되잖아.”여시은은 그렇게 말하며 쿠아의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녀의 애틋한 표정을 보며 고은서는 문득 자신의 판단이 맞는지 혼란스러워졌다.‘여시은이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일까?’일부러 SNS에 사진을 올려 곽승재를 현장으로 불러내 그 앞에서 친밀하게 행동했지만 정작 여시은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정말 곽승재에게 관심이 없는 걸까? 아니면 연기력이 뛰어난 걸까?’고은서는 그 진위를 가늠할 수 없었다.오후가 되어서야 일정이 마무리되었고 여시은은 곽승재에게 고은서를 데려다 줄 것을 부탁하며 그녀는 쿠아를 데리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퀸은 한없이 애교를 부렸다.고은서가 안고 있으면 자꾸만 얼굴에 몸을 부비며 애교를 부리는 탓에 마음이 무너져내린 고은서는 결국 곽승재의 차를 타기로 했다.가는 길에 고은서는 무심하게 곽승연의 근황을 물었다.‘호원 저택에 가 있긴 하지만 어머니가 자주 본가로 데리고 나와. 게다가 심리 상담도 받고 아로마 테라피도 병행하는 중이라 상태는 나쁘지 않아.’
고은서는 어릴 적 드럼을 배우면서 자신만의 멋진 별명을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퀸이었다.예전에 곽승재를 쫓아다닐 때 재미 삼아 이 이야기를 그에게 한 적이 있었다.당시 곽승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었다.‘갑자기 그 얘기를 꺼낸 걸 보면 기억하는 걸까?’그가 기억하든 말든 고은서는 굳이 확인할 생각이 없었다.“마음대로 해.”어차피 그 별명은 중2병 시절에 장난으로 붙인 거였고 이제는 고양이 이름으로 써도 나쁘지 않았다.고은서는 시선을 거두려다 뜻밖에도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단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서연정이었다.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그녀는 곽승연을 데리고 나오는 대신 오십 대쯤 되어 보이는 무테안경을 쓴 남자와 함께하고 있었다.남자는 세련되게 차려입었고 성숙한 남성 특유의 차분함이 느껴졌다.우연히 마주친 건지 일부러 약속을 잡은 건지 남자의 표정에는 은근한 기쁨이 묻어나 있었다.서연정이 등을 돌린 채 서 있어서 그녀의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여자의 직감이 그 남자는 서연정의 구애자라고 말해주고 있었다.“왜 그래?”곽승재는 한참 동안 반응 없는 고은서를 보며 어디에 정신이 팔린 건지 궁금해했다.“곽승재!”곽승재가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고은서가 그를 불러 세웠다.곽승재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고은서는 두어 번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얼른 핑계를 지어냈다.“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아. 좀 봐줄래?”그러면서 그녀는 동그랗게 눈을 크게 뜨고 곽승재에게 다가섰다.“어느 쪽?”“오른쪽!”곽승재는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그 안에 물결이 일렁이는 듯했고 햇빛이 비치는 그녀의 하얀 얼굴은 가느다란 솜털까지 선명하게 드러냈다.연분홍빛 입술도 살짝 벌어져 있었는데 그 모습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곽승재는 갑자기 목이 바짝 말랐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키다 결국 참지 못하고 고은서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촉촉한 감촉이 입술에 닿자 고은서는 깜짝 놀라 곽승재를
생각을 마친 고은서는 작게 숨을 들이마시고 품에 안고 있던 아기 고양이가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깨물어 놀란 척하며 곽승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곽승재는 재빠르게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그녀의 팔 부상이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걸 신경 쓰는 듯 먼저 팔을 지탱했다가 곧 허리 쪽으로 손을 옮겼다.옷을 사이에 두고도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느껴졌다.코끝에는 익숙한 삼나무 향이 은은하게 스쳤다.고은서는 불쾌감을 참아내며 그릴 밀쳐내는 대신 오히려 그의 품에서 살짝 고개를 돌려 뒤쪽을 확인했다.하지만 여시은은 쿠아에게만 신경을 쓰며 조용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을 뿐 두 사람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아, 망했다. 괜히 연기했네. 완전 헛수고잖아.”그 순간 곽승재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손은 괜찮아?”그는 그녀의 손을 직접 잡아 올리며 상태를 확인했다.고은서는 자연스럽게 손을 빼내며 한 걸음 물러섰다.“괜찮아. 아기 고양이라 이가 아직 덜 자라서 가볍게 물렸을 뿐이야.”그렇게 말한 뒤 고은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쪽으로 걸어갔다.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온기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손끝을 살짝 문지르고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무대 쪽에는 행사 주최 측뿐만 아니라 고양이 사육 전문가들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곽승재는 워낙 유명한 인물인지라 이런 자리에서도 그를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한편 고은서는 사육 전문가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쿠아가 심하게 낯을 가리는 문제가 떠올라 전문가에게 문의했다.전문가는 차분히 설명했다.“고양이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다쳤다면 종종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어요. 이럴 땐 장난감과 간식을 준비해 주고 주인이 충분히 함께 시간을 보내 주면 서서히 나아질 겁니다.”장난감과 간식은 여시은이 충분히 준비해 둔 것으로 보였고 함께 있는 시간도 많아 보였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이어갔다.“그런데 다친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깜짝 놀라거나 털을 세
행사는 공원에서 진행됐다.이미 무대가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는 다양한 게임 부스와 음료, 간식들이 마련되어 있었다.고양이 가방과 케이지 대여 서비스도 제공되고 있었다.고양이들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에서 고은서와 여시은은 쿠아를 안고 몇 장의 사진을 찍은 뒤 SNS에 게시했다.행사는 즐길 거리가 풍부하고 체계적이고 질서 있게 진행되고 있었다.고은서와 여시은은 고양이를 키우는 여러 친구와 교류하며 시간을 보냈다.또한 많은 고양이 아빠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다른 사람들에게 안긴 고양이 혹은 기품 있어 보이거나 귀여워 보이는 고양이에 비해 쿠아는 평범한 축에 속했다. 어쩌면 이 행사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 같았다.평범한 믹스묘인데 다쳐서 털도 완전히 자라지 않아 쿠아의 모습은 더욱 초라해 보였다.심지어 케이지에 있는 길고양이들보다도 평범해 보였다.하지만 여시은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피곤해 보이는 쿠아를 품에 안고 행사장을 둘러보았다.고은서는 그런 그녀를 따라다니면서도 은근히 주변을 살폈다.여시은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풀리기 전까지는 방심할 수 없었다.하지만 행사 내내 별다른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고 여시은은 그저 평소처럼 고양이를 구경하며 자연스럽게 행동했다.“어머나! 저 남자 좀 봐. 너무 잘생겼어.”그때 여자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키도 크고 손도 예술이다! 저 손으로 머리 한 번 쓰다듬어주면 진짜 행복할 것 같아.”“그러니까 말이야! 저 남자가 들고 있는 케이지 속 고양이가 되고 싶다.”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가자 곽승재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평소와 달리 짙은 회색 캐주얼 차림에 흰색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햇살이 그의 머리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아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다.그의 손에는 고양이 케이지가 들려 있었는데 안에는 얼마 전 그가 입양한 새하얀 아기 고양이가 있었다.차가운 이상의 남자와 작고 보들보들한 새끼 고양이의 조합
쿠아의 이마 한쪽에는 털이 빠져 있어 붉은 피부가 드러나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전에는 부드럽고 포동포동했던 쿠아는 이제 털도 엉망이 되고 마른 데다 전보다 겁도 더 많아져 있었다.고은서가 손을 뻗자 쿠아는 긴장한 나머지 털을 바짝 세우고 낮게 경고하는 소리를 냈다.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입을 벌릴 때 보니 이가 하나 빠져 있었고 예전에 다쳤던 입가에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그녀의 고양이는 아니었지만 고은서는 마음이 몹시 아팠다.“쿠아가 지난번에 떨어져 다친 이후로 점점 더 겁이 많아졌어요. 아무도 못 만지게 해요. 저도 좋아하는 간식을 많이 줘서야 겨우 가까이 갈 수 있었어요.”여시은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쿠아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래서 오늘은 바깥에 데리고 나와 기분 전환도 시키고 친구를 한 마리 골라주려고요. 그러면 덜 외롭지 않을까 해서요.”여시은의 손길에도 쿠아는 진정하지 못하고 계속 사납게 굴었다.여시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은서 씨, 일단 차에 타요. 차 안에 간식 있어요.”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차 안에서 쿠아에게 간식을 줘도 진정되지 않았고 계속 뒷자리로 물러나며 발톱을 날카롭게 세웠다.보다 못한 고은서가 말했다.“시은 씨, 제가 쿠아를 안고 있을 테니 직접 먹여볼래요?”여시은은 흔쾌히 수락했다.“좋아요.”쿠아를 조심스레 안아 무릎에 올릴 때 보니 쿠아는 예상보다 훨씬 가벼웠다.쿠아의 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자 쿠아는 서서히 진정했고 한참 지나자 피곤했는지 눈도 감아버렸다.“은서 씨는 정말 인기가 많네요. 구애자도 많은데 쿠아까지 은서 씨를 좋아하네요.”여시은이 웃으며 말했다.고은서는 쿠아를 계속 쓰다듬으며 무심히 말했다.“시은 씨도 인기가 많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미 좋아하시는 분이 있으셔서 사람에게 신경을 안 쓰는 것뿐이겠죠.”여시은은 한순간 멍하니 있더니 이내 깔깔 웃었다.“은서 씨, 제가 했던 농담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저 좋아하는 사람 같은 거 없어요. 그때 은서
“어떻게 알았어?”민시후가 조금 우쭐해하며 말을 이었다.“설마 내 일정 몰래 캐고 다니는 거야? 몰래 하지 않아도 돼. 비서에게 매일 일정을 너한테 보내라고 할게.”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았다.“며칠 전 진 비서가 나한테 전화한 거 잊은 거야? 네가 하루하루 더 바빠져서 토요일에도 출장을 간다고 하더라.”“진 비서가 그런 것까지 너한테 말했어?”민시후는 불만스러운 듯했다.고은서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네가 따로 시킨 게 아니라면 나한테 연락할 리가 있겠어?”들킨 민시후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ㄴ“나는 그렇게 자세히 말하라고 하진 않았어. 그냥 내가 빈둥거리는 게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만 전하라고 했다고.”고은서는 약간 야윈 듯한 민시후의 얼굴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넌 분명히 성공할 거야.”“은서야, 네가 그런 표정으로 나한테 얘기하면 나 발이 안 떨어져.”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그 후 이틀 동안 고은서는 게임 회사 프로젝트를 챙기는 한편 동료들과 다른 실현 가능한 프로젝트들도 논의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회사에 운전기사 두 명을 고용했는데 두 사람은 운전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필요할 경우 보디가드 역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고은서가 게임 회사 쪽에 도착해 보니 골목과 아파트 단지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고 보안 수준이 대폭 향상되어 있었다.“어떤 사람이 사비로 설치한 거예요.”게임 회사 직원이 설명했다.“이 낡은 아파트에는 관리자조차 없어서 CCTV 달아달라는 신청도 여러 번 했지만 계속 반려됐거든요. 다행히 이번에 누군가가 사비를 들여 설치해 줬어요. 아니었으면 기대도 못 했겠죠.”“사비를 들여서 이런 공익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요?”고은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어떤 그룹 대표라고 하던데요? 성이 뭐더라, 곽이었나? 고였나? 그런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선행을 해도 이름을 남기거나 과시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더 신기해요.”고은서는 순간 멍해졌다.
민시후의 의문에 고은서는 솔직하게 답했다.“여시은을 떠볼 기회를 찾고 싶어서.”“뭘 떠보고 싶은데?”고은서가 차분히 설명했다.“예전에 여시은이 나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 그런데 해성에 온 지도 꽤 됐는데 그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어.”보통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예전의 그녀가 곽승재에게 그랬듯이 그리고 지금의 민시후가 그녀에게 그러하듯이 하루라도 빨리 상대를 보고 싶어 했다.하지만 여시은은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초조하거나 그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좋아하는 사람에 관하여 얘기할 때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상대방이 자신의 감정을 모르고 있다고 하기도 했다.“그래서 난 여시은이 곽승재와의 정략 결혼설을 막지 않는 이유가 두 가지일 거로 생각해.”고은서는 차분히 분석했다.“첫째, 여시은이 그 소문을 이용해 좋아하는 남자가 긴장하고 다가오도록 유도하는 것. 둘째는 여시은이 좋아하는 사람이 곽승재일 가능성이야.”처음 서운에서 만났을 때 여시은은 곽승재를 한눈에 알아봤다.여시은이 1년 전 어느 술자리에서 봤다고 했지만 곽승재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그에 반해 여시은은 술자리에서의 일을 너무나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어쩌면 그때부터 곽승재에게 마음이 있었을지도 몰랐다.민시후는 고은서의 추측을 부정하는 대신 물었다.“너는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는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여시은이 처음부터 곽승재를 좋아했다면 나를 경쟁자로 생각했을 거야. 그렇다면 여시은이 지금껏 보인 호의도 진심이 아닐 확률이 높지. 그리고 어젯밤 일도 여시은이 했을 확률이 더 높아지는 거지.”민시후는 그녀의 말을 듣고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은서야, 너 말이야. 곽승재를 좋아할지도 모르는 여자에 관해 얘기하면서도 무척 덤덤해. 이제 정말 곽승재를 완전히 내려놓은 거야? 그렇다면 나한테도 기회가 있는 거잖아.”고은서는 민시후를 흘겨보며 말했다.“난 지금 사랑에는 관심이 없어. 돈 버는 데만 집중할
민시후는 사무실 문을 닫고 고은서에게 말했다.“어젯밤 우리가 떠난 후 타이어 수리 업체가 현장에 도착했어. 업체 사람들은 예비 타이어로 교체한 후 차를 정비소로 가져갔어. 그런데 오늘 아침 확인해 보니 네 타이어 단순히 못이나 돌을 밟아서 찢어진 게 아니었어. 누군가 일부러 찔러 손상한 거야. 게다가 꽤 깊이 베였더라.”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어젯밤 그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계획적인 행동이었다는 뜻인가?’먼저 그녀의 타이어를 망가뜨리고 두 떠돌이 남성이 꼭 지나칠 쓰레기통에 약을 탄 술과 음식을 배치했다. 고은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약기운이 돌기 시작한 떠돌이들이 딱 맞춰 반응하도록 말이다.‘도대체 누가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해치려고 하는 거지?’“타이어를 망가뜨린 사람 찾을 방법 있을까?”민시후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 골목에는 CCTV가 없어. 뒤편은 전부 주택가라서 범인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아.”“여시은 한번 조사해 보는 건 어때?”고은서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비록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어젯밤 여시은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민시후는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은서야, 우리 정말 통하나 봐. 나도 여시은이 등장이 의심스러워서 사람 시켜 조사하고 있거든.”고은서가 민시후의 말에 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여시은의 이름을 확인한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핸드폰을 보여주며 말했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더니 이게 딱 그런 경우인가?’민시후가 콧방귀를 뀌었다.“대단한 배포네. 밖에서는 곽승재와 곧 정략결혼할 거라는 소문이 퍼졌는데도 너랑은 또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 걸 보면 말이야.”사실 고은서도 그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여시은은 줄곧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해 왔고 심지어 그녀와 곽승재를 이어주려고까지 했다.그러면서 곽승재와의 결혼설은 부정한 적이 없었다.여시은이 정말 원하지 않았다면 소문을 잠재울 방법은 얼마든지
고은서뿐만 아니라 송민아와 송민준도 민시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살짝 놀랐다.민시후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고은서에게 붉은 장미 꽃다발을 내밀었다.화려하고 싱싱한 장미를 보고 고은서는 어리둥절해졌다.“이게 뭐야?”민시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나 결심했어. 다시 은서 씨를 쫓아다닐 거야!”“은서 씨도 말했잖아, 어차피 1년 후에도 우리 가족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그럼 굳이 1년을 헛되이 보낼 필요 없잖아!”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자신의 거절이 오히려 민시후를 더 자극할 줄은 몰랐다.그때, 송민준이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민아야, 차에 고객이 선물한 체리가 있던데 가져와서 다 같이 나눠 먹자.”송민아는 오빠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송민준은 동생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불편할까 봐 배려해 준 것이다. 사실 ZY그룹에 있을 때도 민시후는 고은서에게 꽃다발을 준 적이 있었기에 송민아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시후가 과거에 송민아와 약혼했던 사람이라서, 이 자리가 확실히 어색했다.“알겠어.”송민아는 더 말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여전히 장미를 들고 서 있던 민시후는 송민준을 발견하고 불쾌한 목소리로 물었다.“뭐야, 송 가주가 왜 또 여기 있는 거지?”송민준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민아를 보러 왔다가 마침 은서 씨랑 밖에서 만났어.”민시후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고은서에게 장미를 내밀었다.“장미가 마음에 안 들면 밑에 다른 꽃들도 준비해 놨으니까,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볼래?”고은서는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됐어.”이 꽃 한 다발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과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주목받고 싶지 않아 조용히 꽃을 받아들였다.“고마워.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렇게 부담스럽게 하지 마.”민시후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좋아하는 여자한테 꽃 선물하는 건 당연한 거야. 익숙해져야지!”그때 송민준이 의미심장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