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곽승재를 한 눈 보고는 말했다.“당신 핸드폰 좀 빌려 쓸 수 있어?”“당신 핸드폰은? 배터리가 다 되었어?”“아니. 당신 핸드폰으로 인스타 좀 보려고. 걱정하지 마. 절대로 당신 사생활을 엿볼 생각은 없어.”고은서는 사실대로 말했다.“내 계정으로는 은혜 인스타를 볼 수가 없어. 당신 핸드폰으로 좀 보려고.”곽승재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핸드폰 잠금을 풀어서 고은서에게 건네주었다.“고마워.”핸드폰을 건네받은 고은서는 먼저 인스타를 열어 바로 고은혜의 계정을 검색하였다.안에는 고은혜가 곽승재에게 보낸 DM 안부 메시지도 있었다.하지만 곽승재는 그녀를 대꾸할 여념이 없었으며 한 번도 답장한 적이 없었다.고은혜의 인스타를 열어보니 역시나 곽승재는 차단하지 않았다.곽승재의 계정으로는 그녀의 모든 게시물을 다 볼 수 있었다!이런 차별 대우에 고은서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고은혜가 외할아버지의 친 외손녀인 것을 생각해서지, 아니면 고은서는 정말 고은혜의 일에 전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고은혜는 정말 인스타를 올리기 좋아했다. 거의 매일 올리다시피 했으며 아침에 먹은 것부터 해서 저녁에 잠자는 것까지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올렸다.하루 전의 게시물이 고은서의 눈길을 끌었다.[별똥별이 참 이쁘네요. 이런 일을 겪은 것도 참 아슬아슬했네요. 그래도 위험에서 벗어났으니 정말 다행이네요. 세상에는 참말로 내가 언뜻 한 말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네요. (귀엽)]밤하늘 사진을 몇 장 올렸으며 그중 한 장에는 은은하게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외숙모라면 아마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지만 고은서는 뒷모습으로 그 사람이 원지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래서 전날 밤에 은혜가 지훈 씨랑 같이 별 보러 갔었고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지?’고은서는 고은혜가 인스타에 올린 아슬아슬했다는 일이 사실은 원지훈이 계획한 일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지난번 그 일이 파괴되었으니 지훈 씨가 이번에 또 이런 일을 새로 벌인 거네. 그러니 은혜가 지훈 씨의
박스 크기를 봐서 액세서리 같아 보이지는 않았고 오히려 무슨 장식품 같았다.고은서는 걸어가서 박스를 열어보니 아주 특별하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토끼 모양의 스탠드였다.토끼는 크리스털로 만들어졌고 두 눈은 빨간 보석으로 장식되었다. 스위치를 누르니 토끼의 몸에서 온화하고 부드러운 흰색 광을 내뿜었으며 눈 주변에는 연한 빨간색을 띠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답고 정교했다.그날 저녁 레스토랑에서 고은서가 토끼 모양을 한 램프를 만지는 것을 보고 곽승재는 그녀가 토끼를 좋아하는 줄로 추측해서 그녀에게 데리고 온 것 같았다.비록 고은서는 곽승재의 물건을 받고 싶지 않았지만, 토끼가 너무 귀여운 걸 봐서 버리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은서는 결국 토끼 스탠드를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오후의 훈련이 너무 힘들었기에 고은서는 시원하게 반신욕을 하였다.욕실에서 나오자, 저녁 밥상이 준비 되었다고 이미숙이 말했다.고은서는 머리에 머릿수건을 두른 채 편안한 실내복을 입고 층계를 내려가려고 했다.마침, 서재에서 나오는 곽승재와 마주쳤으며 그는 고은서의 차림새를 보더니 그녀의 얼굴을 몇 번 흘겨보았다.고은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곽승재를 한 눈 째려보고는 말했다.“보긴 뭘 봐. 여자 생얼을 처음 보나!”말을 마친 뒤, 그녀는 슬리퍼를 끌고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고은서는 요즘 외출할 때 빼고는 집에서 거의 맨얼굴로 있었다. 차림새도 예전처럼 정교하고 완벽하게 꾸미진 않았다.곽승재도 당연히 그녀의 맨얼굴을 보았었다. 하지만 샤워를 마치고 나온 모습은 처음이었다.피부는 불그스름하고 촉촉했으며 분홍색 머릿수건을 두르고 있으니, 어딘가 모르게 장난기 있고 천진난만해 보였다.곽승재는 방금 왠지 모르게 고은서의 볼을 꼬집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아래층에서 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먼저 수저를 들었다. 그녀는 오른손에 숟가락을 들고 국을 마시고 있었고 왼손에 닭 다리를 쥐고 아주 신나게 먹고 있었다.게다가 입에는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아줌마, 어떻게 된
곽승재의 이유는 꽤 정당했다.고은서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사인하면 끝나는 일인데 뭐가 번거로워? 그리고 당신 조건이라면 마누라가 되겠다는 사람이 줄을 설 텐데.”고은서는 일부러 백유미를 언급하지 않았다. 곽승재가 또 백유미를 빌미로 말한다고 생각할까 봐서였다.“당신 새 아내는 분명 나보다 할머니에게 잘할 거야. 그럼 할머니 기분 나쁠 일도 없겠지.”전미자가 그녀를 아꼈지만 그건 모두 손자며느리라는 신분 때문이라는 걸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곽승재는 그녀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고은서, 우리 결혼생활에 뭐가 갑자기 그렇게 불만이라서 서둘러 끝내지 못해 안달이야?”5주년 기념일에 함께 하지 못해서 그녀에게 혼자 선물을 사라고 했고, 곽승재가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서 요즘은 최대한 많이 돌아오려고 노력하고 있고, 옷도 옷방에 옮겨 입고, 잠도 안방에서 자고 있다.이 모든 것은 전부 고은서의 요구사항이었고 그가 지금 다 해내고 있는데 왜 그녀는 여전히 불만일까?남자가 따져 묻자 고은서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내 불만을 당신이 모르는 게 가장 큰 불만이야.”곽승재는 할 말을 잃었다.더 이상 고은서와 입씨름하지 않고 젓가락을 들어 밥을 먹기 시작했다.그야말로 싱거운 한 끼 식사였지만 물론 그건 곽승재의 일방적인 생각이었다.고은서는 그래도 맛있게 잘 먹었다. 고기도 많이 먹고 국물도 많이 마시고 죽도 한 그릇 싹 비웠다.배불리 먹고 나서 그녀는 동그란 아랫배를 토닥이며 말했다.“아주머니, 나 산책하러 가요!”말을 마친 그녀는 긴 외투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문을 나섰다.날이 이미 어두워져 사방의 불빛이 밝아졌다.별장 구역의 녹화가 잘 되어 있어 곳곳에 잔디와 나무가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 작은 호수도 있었다.고은서는 풍경을 감상하면서 천천히 소화를 시켰다.그녀가 호숫가의 한적한 곳을 걷고 있을 때, 검은 캡을 쓴 두 남자가 갑자기 그녀의 길을 막았다.“당신들 뭐야?”고은서가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다.갑자기 훈련관 밖에서 누군
그러자 남자는 뭐라고 적힌 종이 한 장을 고은서 앞에 내밀었다.고은서는 물론 함부로 서명할 엄두가 나지 않아 동의하며 종이를 받아 그들이 긴장을 풀게 한 뒤 휴대전화로 경찰에 신고하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휴대전화에 손을 대는 순간 등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뒤로 밀었다.“악!”고은서는 놀라서 비명을 지르고 주먹을 휘두르고 다리를 허우적대며 상대와 싸우려 했다.“잘 봐. 나야!”익숙한 곽승재의 목소리에 고은서는 그제야 몸부림을 멈췄다.그녀가 고개를 들자 과연 곽승재의 얼굴이 보였다.하지만 여기는 좀 외지고 가로등 불빛도 어두워 고은서는 곽승재의 표정이 잘 안 보였다.“당신이 여긴 어쩐 일이야? 방금 그 사람들은?”고은서가 겁이 나서 고개를 돌려 보니 그림자도 없었다.“도망갔어.”곽승재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산책한다더니 왜 여기까지 왔어?”방금 날카롭게 세웠던 긴장감이 갑자기 풀리고 나니 고은서는 다리가 나른해져서 아예 옆에 있는 돌에 털썩 주저앉았다.“그냥 생각 없이 걷다가 여기까지 왔어. 그런데 저런 사람들을 마주칠 줄 어떻게 알았겠어. 신고해! 얼른 경찰에 신고해.”고은서가 휴대전화를 꺼내자 곽승재가 엄숙하게 말했다.“됐어. 경찰이 와도 이미 아무런 증거도 없어. 내가 사람 시켜서 조사할게.”“증거가 왜 없어?”고은서는 그 종이를 들어 올리려고 보니 손이 텅 비어 있었다.곽승재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채고 차근차근 설명했다.“딱 봐도 베테랑이야. 눈치 채고 종이를 뺏어 도망쳤는데 무슨 증거를 남겼겠어?”고은서는 휴대전화를 꺼내 경찰에 신고하는 데 여념이 없어 곽승재의 접근도 눈치채지 못했다.“일단 가자.”곽승재가 재촉하자 고은서가 고개를 저었다.“잠깐. 다리에 힘이 풀려서 좀 더 쉬어야겠어.”곽승재가 무슨 표정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는지 모르지만 뜻밖에도 그녀 앞에 반쯤 쪼그려 앉았다.고은서는 그의 이 동작의 뜻이 좀 믿기지 않았다.“빨리 안 올라와?”곽승재가 인내심을 잃고 재촉하자 고은
고은서는 지금 그와 말다툼할 기분이 아니었다.그가 자신을 엎고 싶어 하든 아니든 어쨌든 힘든 건 그녀가 아니었다.오랫동안 그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으니 이번에는 그녀가 누리는 복리후생이라 생각하기로 했다.그러자 고은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곽승재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 몸을 뒤로 젖혀 그를 노동자로 여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곽승재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잠시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랐다.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정해 보이면서도 왠지 모르게 거리감 있는 자세로 집에 도착했다.고은서가 내려가 신발을 갈아 신으려는데 곽승재가 여전히 그녀를 업고 있다.“나 업고 위층에 올라가려고?”“어차피 여기까지 업고 왔는데 뭐.”말하면서 그는 그녀를 업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인기척을 듣고 나온 이미숙이 부부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활짝 웃더니 급히 부엌으로 숨었다.그녀의 행동을 전부 지켜본 고은서는 할 말을 잃었다.방에 돌아와서야 곽승재는 고은서를 내려놓았다.오랫동안 여자를 업은 그는 팔이 좀 시큰거려서 손을 뻗어 주물렀다.이렇게 명백한 암시 동작, 고은서는 당연히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예전의 고은서였으면 마음 아파하며 주물러주며 많이 힘들었냐고 수줍게 물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고은서는 덤덤하게 그를 밀쳐내고 말했다.“비켜줄래? 나 화장실 갈래.”곽승재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고은서, 내가 너 업고 여기까지 왔는데 기본적인 예의도 없어?”큰 공을 세운 건 아니어도 노고를 치렀는데 고은서가 대충 넘어가는 건 좀 아니었다.고은서가 씩 웃더니 말했다.“고생했어. 근데 나 업어달라고 강요한 적 없어. 혼자 걷겠다는데 당신이 고집한 거야. 그러니까 팔이 아픈 건 당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지 내가 주물러 줄 의무는 없어.”마치 이전의 그녀가 곽승재를 위해 차를 날라주고 관심과 안부를 전했던 것처럼 곽승재는 그녀에게 그렇게 하도록 강요한 적이 없었다.그녀 스스로 그렇게 하면 그를 감동시킬 수 있다고 여겼을 뿐
도아름이 괜찮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고은서는 아까의 일을 그녀에게 말했다.“서인수가 보낸 사람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만약을 대비해 언니도 오늘은 외출하지 마세요.”“그 인간이 감히 은서 씨한테 손을 대요? 반드시 사람을 보내 혼내야겠어요!”도아름은 고은서가 협박받았다는 말을 듣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고은서가 황급히 말렸다.“언니가 물어도 어차피 인정하지 않을 거니까 오히려 꼬투리 잡힐지도 몰라요. 난 그저 언니가 서인수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하라고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에요.”“그 인간 감히 나 못 건드려요!”“내 손에 그 인간 약점이 한두 개가 아니거든요. 그래도 한때 부부였고 우리 애 아빠이니 살살 다룬 건데. 만약 정말 은서 씨한테 그런 짓을 했다면 나 그 인간이랑 끝까지 싸울 거예요!”고은서는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다.도아름과 나이 차이는 있지만 그녀는 사랑한 만큼 미워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으니 사귈 만 한 친구였다.“아름 언니, 화내지 마세요. 곽승재가 이 일을 조사하겠다고 했으니 소식 있으면 알려줄게요.”두 사람은 몇 마디 더 한 후에야 전화를 끊었다.그날 밤 고은서가 잠들 때까지 곽승재는 침실로 돌아가지 않았다.아마 그녀에게 화가 났을 것이다.줄곧 그를 쫓아다니며, 그의 희로를 자신의 희로로 여겼던 사람이 갑자기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누구나 속으로 불편할 것이다.외할아버지가 말씀한 곽승재의 변화는 대개 그런 불편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그가 불편하든 아니든 그녀만 기쁘면 된다.다음날, 고은서는 일어나도 곽승재를 만나지 못했는데 어젯밤 그 두 남자에 관한 단서를 찾았는지 모르겠다.시간을 보고 고은서는 외삼촌과 외숙모랑 식사하기로 했다.그들을 통해 고은혜가 출국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려는 것도 있고 그들과 이혼에 대해 결단을 내고 싶은 것도 있었다. 그녀는 결코 힘 있는 곽씨 가문의 사모님이 아니었으니 이혼하는 일은 그들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그녀의 요청에 외삼촌 내외는 거절하지 않았다.외숙모에
“네 할아버지가 말하길, 지난번에 승재에게 주려고 산 선물인데 깜빡하고 집에 두고 여태 주지를 못했어, 내가 널 보러 온다는 걸 알고 특별히 건네준 거야.”곽승재는 외숙모의 손에 들린 상자를 흘끗 쳐다보다가 다시 고은서쪽으로 눈길을 돌렸다.“….”무슨 선물이 있다고, 집에 두고 올 수 있을까?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곽승재에게 고대 벼루를 받은 후, 곽승재에게 선물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당시 곽승재는 별 생각 없이 동의했다. 그녀는 그 일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할아버지께서 직접 선물을 사고 자신의 명의하에 곽승재에게 선물을 주다니, 이렇게 마음을 쓰실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할아버지가 상황을 만들어놓고, 곽승재도 마침 여기 있었기 때문에 고은서는 분위기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외숙모의 손에 든 상자를 받아 곽승재에게 건네며 말했다.“여기.”“뭐지?”곽승재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고은서도 무표정으로 답했다.“직접 열어보면 알잖아.”“좋아, 너희들 일은 나중에 돌아가서 얘기하자, 일단 앉아서 밥부터 먹자!”그들이 서둘러 자리를 내주었다.신선한 재료를 요리사들이 직접 갖다주며 현장에서 조리하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그들은 먼저 주문해야 했다.식사는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일정이었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먹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고은서는 자리에 앉았고, 곽승재도 그 옆에 앉았다.외숙모는 찐한 맛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녀는 해산물을 엄청나게 주문하고 요리사에게 매콤하고 마늘 향이 나도록 구워달라고 부탁했다.“외숙모, 승재는 매운 음식을 안 먹어요.”고은서의 머릿속은 여전히 할아버지가 사준 선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이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나왔다.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녀는 옆에 있던 승재의 입꼬리가 어렴풋이 올라가는 것을 알아차렸다.고은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곽승재는 까다로운 식성을 가지고 있었고, 먹지 않는 음식이 많았으며, 그녀는 그런 그를 위해 큰 노력
고은혜가 방금 한 말은 원래 고은서를 당황하게 하려고 한 것이었다.고은서는 평소 부유한 여성답게 수천만 대의 자동차를 몰고 다니고, 수백만 개의 가방을 가지고 다니며, 블랙카드를 사용하지만, 개인적으로 보석을 판매하기도 했다.만약 곽승재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는 수치심을 느끼고 짜증을 냈을 것이다.그러나 고은혜의 예상과 달리 고은서는 그녀의 말을 듣고 일말의 당혹감도 없이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나야. 그걸 알아차리다니, 그리 멍청하지는 않네.”어제 캡처를 할 때 그녀는 일부러 판매 정보의 절반만 잘라냈고, 고은혜는 한두 눈 만에 귀걸이를 팔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그렇게 되면 고은혜는 원지훈이 그가 자랑했던 것만큼 부자가 아니고 허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이제 막 호감이 들기 시작했지만 금방 식을 것이 분명했다.고은서의 말을 들은 고은혜는 화가 나서 계속 트집을 잡았다.“아니, 돈이 그렇게 모자래요? 보석을 팔 정도로?”고은서가 웃었다.“그건 틀린 말이야. 다 내가 검소하고 가족을 중시하기 때문에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물건을 다시 주워서 돈을 받고 파는 거지.”“휴지통에 버리다니!”고은혜는 이 말을 듣자마자 순간 귀가 더러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서둘러 귀를 닦았다.어제 그녀는 하루 종일 들떠서 귀걸이를 차고 다녔다.오후에 고은서가 중고 웹사이트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면, 그녀는 이미 친구들에게 자랑하고도 남았을 것이다.고은서가 쓰레기통에서 이 귀걸이를 발견했다고?아니다.“귀걸이가 어떻게 쓰레기통에 있어요?”고은혜는 고은서가 일부러 자신을 엿 먹이려 한다고 생각했다.“내가 던졌어.”고은서가 말했다.“원래는 내 것이 아닌 것은 쓰레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재활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더라고.”“내 눈에는 별거 아닌 것이 너한테는 소중한 존재였구나.”이 말을 들은 고은혜는 더욱 화가 났다.고은서에게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싶었지만, 결과는 아무런 문제도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고은서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아니.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아.”곽승재가 고개를 저으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고은서는 도리어 자기 아이디어가 인정받았다는 거에 내심 기뻐했다.곽승재는 GS그룹을 물려받을 때부터 엘리트라고 불리면서 많은 기사에 떴었는데 그의 인정을 받았다는 건 꽤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은서는 이어 곽승재와 여시은에 관해 더 자세히 토론한 후 시간이 늦어지자 먼저 가보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먼저 갈게. 나중에라도 일이 있으면 다시 연락해.”“은서야.”그러나 곽승재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왜?”고은서가 머리를 갸우뚱하며 물었다.곽승재는 멈칫하더니 이내 말을 이어갔다.“배는 괜찮아?”“다 나았어. 전에 나한테 문자로 물어봤었잖아.”곽승재는 그녀가 조금 더 머물 수 있게끔 새로운 화젯거리를 찾고 싶었지만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잘 자.”“응.”‘이상하게 왜 저러는 거야?’고은서는 약간 의문이 들긴 했지만 더 머무르지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이튿날.고은서는 먼저 회사에서 긴급한 서류들을 처리한 후 송민아와 함께 WOR 게임 회사로 갔다.게임 회사는 전보다 더 밝고 넓은 곳으로 이사하였고 규모도 훨씬 더 커졌다.그러나 분위기만은 변함없이 활력이 넘쳤다.아무래도 젊은이끼리 자체로 팀을 묶어 제작한 게임이라 그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자기 친자식과 다름없었는 존재였다.책임자는 고은서와 송민아를 보자마자 아주 열정적으로 맞이해 주면서 프로젝트가 잘 진행되고 있다면서 곧 테스팅을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테스팅이 순리롭게 진행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출시도 가능했다.듣기만 해도 격동되는 순간이었다.책임자는 두 사람한테 얘기하면서 매우 흥분해 했다.송민아는 여러 가지 절차를 확인하러 가고 고은서는 책임자와 함께 접대실에 앉아 어제저녁 곽승재가 말했던 일에 관해 의논했다.“정말 이런 밑지는
곽승재는 고은서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다리에 덮을만한 담요 하나를 가져오면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해성이 기후가 좋기로 유명하긴 했지만 초겨울엔 날씨가 으스스했다.히터를 켜놓은 동시에 통풍을 위해 창문을 열어놓았기에 행여나 고은서가 추워할까 봐 걱정되었던 모양이다.“의사 선생님께서 따뜻하게 하고 다니랬잖아.”곽승재가 덤덤한 얼굴로 설명했다.‘그건 생리할 때 따뜻하게 하고 다니란 뜻이었는데.’고은서는 속으로만 중얼거릴 뿐 겉으론 티 내지 않고 담요를 다리에 덮었다.곽승재는 이내 그녀에게 따뜻한 물을 따라주었다.“좀 마셔.”그러나 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괜찮아. 목이 별로 마르지 않아서. 얼른 할 얘기나 해.”“그럼 따뜻하게 손에 쥐고 있어.”곽승재는 물잔을 강제로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서야 소파에 앉았다.“...”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담요를 덮고 따뜻한 물을 손에 쥔 채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손에 꽤 괜찮은 프로젝트 하나 있지?”고은서는 그의 물음을 듣자마자 표정이 엄숙해졌다.“응. 왜? 문제라도 있어?“여시은이 요즘 들어 유사한 프로젝트에 관심 있는지 연관 분야 사람들과 많이 접촉하고 있어.”고은서는 이미 여시은이 그럴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여시은이 회사를 설립한 목적 자체가 그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였기에 유일 투자 은행과 경쟁하려 드는 게 아주 정상적인 일이었다.“같은 업계에 있는 한 경쟁은 피할 수 없잖아. 예상했던 바야.”그러나 곽승재가 덤덤하게 설명을 보태었다.“투자한 게임 회사가 규모도 크지 않고 팀 내에 집안 배경이 뛰어난 사람도 없다며?”고은서는 멈칫하더니 이내 그의 뜻을 깨달았다.“지금 그 사람들이 여시은한테 수매 당해 우리 회사와의 계약을 해제하려고 할까 봐 걱정하는 거야?”곽승재는 고개를 끄덕였다.“투자 업계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 지 너도 알고 있잖아. 예상치 못한 일들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어. 현재 게임 회사가 출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
“은서야, 데려다줄게.”육현석이 차창 너머로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그러나 그녀는 사양했다.“고맙지만 커플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아서 사양할게요. 그리고 저도 차 가지고 왔어요.”그러자 육현석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그럼 운전 조심하고 집 들어가면 지연이한테 문자해.”“알겠어요. 절대 지연이 걱정시키는 일은 안 할 테니까 시름 놓으세요.”육현석과 박지연은 고은서의 재촉 하에 더는 머무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고은서는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폰을 확인해 보았는데 곽승재가 얼마 전에 자신에게 전화한 걸 발견했다.마침 박지연과 함께 폰을 사물함에 넣은 채 한창 스파를 즐기고 있을 때라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했다.곽승재한테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바쁜지 한참이 지나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녀는 더는 신경 쓰지 않고 라이트문으로 돌아갔다.마침 주차하고 차에서 내렸을 때 곽승재한테서 다시 연락이 왔다.“방금 화장실에 있어서 전화 못 받았어.”“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여시은 투자 은행에 관해 얘기해줄 게 있어서 전화했어. 라이트문에 왔는데 네가 집에 없다고 해서 전화를 했던 거야.”“알겠어. 내가 당신 집으로 갈게.”고은서는 말하면서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엘리베이터는 이내 두 사람이 사는 층에 멈춰 섰고 고은서는 곽승재의 집 문을 두드렸다.이내 일상복을 입은 곽승재가 문을 열어주었다.금방 샤워했는지 그의 머리카락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돌아오는 길에 먼지가 좀 묻어서 샤워하고 옷 갈아입었어.”곽승재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자신의 현재 상황에 관해 설명했다.그는 전에도 약간의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원 별장에 있을 때도 몸에 먼지가 묻거나 이상한 냄새가 배면 꼭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거실로 걸어갔다.집 구조가 그녀의 집과 조금 달랐는데 거실이 좀 더 넓어 보였다.소파에 앉은 고은서는 갑자기 집에서 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부엌에서 요리라도 했어? 뭔가 탄 것 같은데.
곽승재가 요 며칠 바쁜 건 사실이었다.여시은의 투자은행이 곧 개업할 거라 준비할 일이 산더미였기 때문이었다.여재훈이 믿음직한 비서를 붙여줬지만, 사업에 생소했던 여시은은 여전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했다.곽현수는 이 틈을 타 곽승재에게 당분간 여시은의 회사에 가서 자리를 지켜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부탁대로만 해주면 GS 그룹 본사 복귀도 고려해 보겠다고 덧붙였다. 말은 부탁이었지만, 실상은 협박이었다.GS그룹으로 급히 돌아갈 필요는 없었지만 고은서와 함께 C선생을 잡아내고 여시은에 관해 조사하려거든 많은 시간과 수단이 필요했기에 곽현수와 다투면서 필요 없는 손해를 보는 걸 최대한 피면 하는 게 좋았다.곽현수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곽승재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게다가 여시은을 도우면서 가까이에서 그녀를 관찰하고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에 나쁠 것도 없었다.고은서는 곽승재한테서 미리 소식을 접한 덕분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그러나 고은서는 이 모든 내막을 그대로 박지연한테 알려줄 수 없었다.곽승재가 제안을 수락한 건 혹시 곽현수가 또 고씨 가문에 무슨 일을 꾸밀까 우려해서일지도 모른다고만 했다.“또라니? 고씨 가문에 해가 되는 조짐이 보였어?”박지연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고은서는 지금까지 고국성 일을 꾸민 사람이 곽현수라는 사실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하지만 앞으로 곽승재와 자주 연락할 일이 생길 테고, 괜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번엔 솔직히 털어놓았다.“곽승재의 아버지가 우리 둘이 재결합하는 걸 막으려고 일부러 우리 삼촌을 해친 거야.”“그럼 곽승재가 너랑 거리를 둔 것도 네 삼촌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였겠네?”비록 박지연 말처럼 쉽게 해결된 건 아니었지만 굳이 부인할 필요가 없었다.“그렇게 보면 돼.”박지연은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럼 그 스캔들도 아버지의 눈을 피하려고 일부러 수습하지 않은 거야?”‘눈치 백단이네.’고은서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맞아. 모든 스
룸에서 유혜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주 보기 싫으면 얼마든지 더 소란 피워 봐요. 좋기든 온 해성 사람들이 다 알게끔 일을 크게 만드세요. 저야 아이를 없애고 이혼하면 그만이에요.”조수연은 이내 흠 잡힌 사람처럼 조용해졌다.“아무튼 당신 아들도 전처만 좋아하잖아요. 출국한 지 이렇게 오래되도록 나한텐 전화 한 통도 없잖아요!”조수연은 기세만 수그러들었을 뿐 입으로는 전혀 지려고 하지 않았다.“지연이를 더 좋아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 효녀인 데다가 말도 곧잘 들어. 너와 달리 승준이도 잘 보살펴줬거든. 넌 집안일도 하지 않고 사람을 돌볼 줄도 모르잖아. 심지어 나와서...”유혜린이 안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조수연은 이내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바로 이때, 레스토랑 웨이터가 경찰을 데리고 룸 앞으로 다가왔다.고은서와 박지연도 더는 머물지 않고 자신의 룸으로 돌아갔다.“이곳에서 막장 드라마 한 편을 보게 되다니. 한때 유혜린을 그렇게 좋아하더니만 당하고 나니 또 네가 좋아 보이나 봐.”조수연이 조금 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 고은서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반면 박지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그렇게까지 참고 견뎠는데, 그 정도 소리도 못 들으면 허무하지.”“정말 이혼하고 나와서 다행이야. 계속 참다가 활발하던 애가 우울증을 앓겠어.”고은서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그런데 유혜린도 정말 만만하지 않던데. 똑같이 되갚는 거 봤어? 아무리 그래도 시어머니인데 서슴없이 내려치던데?”전에 주차장에서 만났을 땐 그저 기사에게 차로 데려가라고 했을 뿐이지 오늘처럼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다.유혜린은 조수연의 체면을 단 한 번도 고려해 준 적이 없었고 또한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해서도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정말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니까. 전생에 지연이가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어.’“다 조수연 업보지.”박지연이 차를 따르면서 말했다.“자기 아들이 뭐 왕이라도 되는 줄 알고, 아무 여자나 마음대로 고
여자의 비명소리에 이어 욕설을 퍼붓는 나이 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고은서와 박지연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마주 보았다.“구경하러 가고 싶은데.”고은서가 흥미진진해 하며 답했다.“나도.”두 사람은 이내 일어서서 문 쪽으로 다가가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이미 구경꾼들이 적지 않게 몰려들어 있었는데 복도가 북적북적했다.유혜린의 룸에서는 욕설을 주고받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내부 광경이 잘 보이지 않았던 터라 고은서와 박지연은 더 좋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두 사람은 구경꾼들 사이에 서서 몰래 룸 안을 들여다보았다.조수연은 룸 안에 서서 유혜린을 손가락질하면서 입에 담기도 힘들 정도로 험한 욕을 퍼붓고 있었다.유혜린은 뺨을 맞았는지 손으로 얼굴 한쪽을 가린 채 남자 앞에 서 있었다.“유혜린, 의사라는 사람이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해도 되는 거야? 임신했으면 집에 가만히 있을 것이지 감히 나와서 몰래 바람을 피워?”조수연이 호통쳤다.“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친구랑 밥 한 끼 먹었을 뿐인데 바람이라뇨?”유혜린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친구는 무슨. 개 같은 자식들이 내가 모를 줄 알아? 이미 폰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바람을 피웠잖아.”조수연이 화내며 소리쳤다.“아까 들어왔을 때 저 남자가 다정하게 네 어깨에 손까지 올려놓고 있었는데 내가 찾아왔으니 망정이지 안 그러면 여기서 더 한 짓이라도... 아악!”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명소리가 들려왔다.얼굴이 일그러진 유혜린이 다가와 그녀의 뺨을 내리친 것이다.그녀는 가녀린 몸과 다르게 힘은 무척 셌다.조수연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뒷걸음을 쳤다.도중에 상을 잡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땅에 넘어졌을 것이다.한 번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없던 조수연은 한참 동안 멍해져 있다가 이내 미친 듯이 달려가 유혜린의 머리채를 잡았다.“이 빌어먹을 년이 감히 시어머니한테 손을 대? 오늘 내 손에 한 번 죽어 봐!”조수연은 소리를 지르면서 유
이미숙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더 긴장해 했다.“은서 씨, 더는 이렇게 무리하게 일하면 안 돼요. 건강도 챙겨야죠. 그러다 몸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고은서에게 있어서 이미숙은 거의 가족과 다름없었다.그녀의 관심에 고은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후로 고은서는 이틀 동안 이미숙의 요구대로 집에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화장실을 가고 밥 먹는 것 외에는 거의 침대에서 내려올 일이 없었다.사실 이미숙은 밥까지 침대로 가져다줄 생각이었는데 고은서가 거절하는 바람에 그 생각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재택근무라도 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곧 폐인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아줌마, 저 진짜 괜찮아요. 그냥 조금 불편한 것 빼곤 아무렇지 않아요. 게다가 이틀 동안 누워 있어서 이젠 다 나았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얼른 볼일 보러 가세요. 그리고 저녁엔 지연이랑 밥약이 있어서 제 저녁은 준비하지 않아도 돼요.”고은서가 이미숙을 달랬다.정식으로 병원에서 나오기까지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던지라 박지연은 이틀 동안 계속 병원 업무에 시달려 있었다.따라서 고은서 또한 그녀에게 정신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전할 기회가 없었다.오늘 마침 두 사람 다 시간이 있어서 같이 밖에서 밥을 먹으면서 기분 전환이라도 하려고 미리 약속을 잡아두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끝없는 당부를 들으면서 준비하고 약속 장소로 갔다.의사가 음식을 가려 먹으라고 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유기농 식재료를 사용하는 홍콩식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했다.웨이터는 고은서를 이 층으로 안내했다.마침 다른 웨이터가 옆 룸에 음식을 올리고 있었는데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힐끔 안을 들여보았다.그런데 룸 안에서 익숙한 사람을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온승준의 현 와이프 유혜린이었다.남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간단히 위로 묶어 올린 유혜린은 성숙미가 넘쳐흘렀다.유혜린 옆에는 사십 대 좌우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남자 한 명이 앉아 있었는데 꽤 괜찮게 생긴 듯했다.남
의아해하는 고은서와 달리 곽승재는 아주 덤덤해 보였다.“지금 중요한 건 배후에 있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과 네 안전을 보장하는 거잖아. GS그룹에서 나왔다고 해서 나한테 해가 될 일은 없어. 그전보다 한가한 시간도 더 많아지고 해서 차라리 더 좋아.”고은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육현석이 전에 그녀한테 곽승재가 GS그룹에 있은 지도 꽤 오래되고 또 그를 지지하는 사람도 적지 않게 있는 데 왜 이리 쉽게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모든 게 다 그의 계획의 일부분이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곽승재와 아무런 다툼도 없는 잔잔한 대화를 이토록 오래 이어간 게 얼마 만이지?’전에는 남은 생에 더는 곽승재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과 고씨 가문이 전생의 비극적인 결말을 또다시 맞이하는 걸 막기 위해 모든 원한을 내려놓고 그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곽승재 또한 고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고은서와 재결합하고 싶은 건 맞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게 우선이었다.두 사람은 해결 대책에 관해 간단히 토론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체력이 고갈되었다.배가 아픈 데다가 낮에 회의하고 병 보이러 가고 또 정신병원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두통까지 생겼다.그녀가 피곤해한다는 걸 발견한 곽승재는 온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가 데려다줄게. 먼저 돌아가서 쉬어. 나머지는 나중에 만나서 다시 얘기해.”고은서는 더는 고집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곽승재는 차창을 내리고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경호원을 향해 와서 운전하라고 손짓했다.도중에 곽승재가 고은서의 배를 어루만져주려고 했으나 그녀에게 거절당하고 말았다.“날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그래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줬으면 좋겠어. 나를 여성 파트너로만 생각해 줘. 선 넘는 일은 삼가해주고.”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거절을 마다하지 않고 고은서의 배를 어루만져주기
“그때 그 목소리 엄청 익숙했는데 혹시 백유미 목소리였어?”고은서의 물음에 곽승재도 이내 그날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육현석이 종래로 중요한 일로 연락이 온 적이 없었던데다가 당시 마침 백유미를 심문하고 있었던지라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이고 박지연의 전화는 행여나 고은서한테 문제라도 생겼을까 봐 잊지 않고 받은 것이었다.이 가능성을 고려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곽승재한테 직접 들으니 마음이 자꾸 저도 모르게 흔들렸다.곽승재는 과거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눈에 띄게 변해 있었다.전에는 고은서를 자신을 성가시게 만드는 존재라고만 여기던 사람이 지금에 와서는 그녀를 관심해 주고 지켜주는 사람이 되었다.“고마워.”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감사 인사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가까운 사이라면 굳이 고맙다고 인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곽승재는 고은서가 자신을 피하지 않고 도움을 받으려 하면서 그와 함께 C선생에 관해 의논한다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사이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징조라고 생각했다.반면 고은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백유미한테 약을 먹인 사람에 관해서 계속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아. 그런데 나랑 고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이 누군지 짐작이 가는 혐의 대상이 한 명이 있긴 해.”“여시은을 말하는 거야?”곽승재가 알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그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에 대해 약간 놀라긴 했지만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겉으로 보기에는 순진해 보이지만 속이 아주 깊은 사람이야.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나한테 접근한 거고.”“전에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면서 나더러 여시은과 정략결혼까지 하라고 했잖아.”곽승재가 덤덤하게 말했다.“전에는 당신 아버지 때문에 그런 거야.”곽승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은서와 쟁론하고 싶지 않았다.“아버지는 정략결혼을 통해 우리 회사를 더 강하게 만들 생각으로 그런 거야. 그런데 난 단 한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