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은숙은 이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그런 거야?”그리고 그녀는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덧붙였다.“우리 은혜 비록 공부는 잘 못하지만, 디자인 쪽에는 재능이 뛰어나. 이쪽에 노력하는건 전혀 아깝지 않아.”“저도 그렇게 생각해요.”고은서가 덧붙여 말했다.“외숙모, 은혜가 디자인을 그렇게 좋아하는데, 파리에 있는 유명한 디자인 학교에 보내 2년 동안 공부를 시킬 생각 없으신가요?”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아 씩씩대던 은혜는 고은서의 말을 들자, 순간 당황했다.그녀는 고은서가 부모님 앞에서 자신의 단점을 파헤칠 거로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해외 유학을 제안하였다.고은서가 언제부터 이렇게 친절해졌을까?“여자애가 무슨 유학을 하러 간다고 해, 만약 혼자 외국에 가 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는데!”단은숙은 아무 생각 없이 거절부터 했다.“은혜는 이제 나이가 많아서 스스로 돌볼 수 있어요. 게다가 지금은 비행기가 너무 편리해서 언제든 돌아오실 수 있고, 외숙모랑 삼촌도 언제든지 가실 수 있어요.”고은서는 외숙모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만 골라 했다.“해외에 가서 기술을 배우고 돌아오면, 유학을 했던 사람이라며 다들 높이 평가할 거예요.”“은혜는 이제 고 씨 집안의 딸이니 감히 누구도 얘를 함부로 얕볼 수 없어!”단은숙은 여전히 거절했다.“엄마, 저도 그쪽에 있는 디자인 학교가 마음에 들어요. 2년만 다니면 되는데, 절 다니게 해 주세요!”고은혜는 애교를 떨기 시작했다.단은숙을 설득하기는 물론 쉽지 않았다. 그녀는 고은혜에게 그곳에서 살게 되면 생기는 불편한 점, 걱정되는 점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그쪽에 제가 아는 친구가 몇 명 있으니 필요하면 제가 대신 소개해 드릴게요.”그 순간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고은혜의 눈은 즉시 밝아졌다. 그녀는 해외에 가고 싶었지만, 어머니께서 강하게 반대했다.그녀는 고은서가 자신을 도와 말을 해줄 뿐만 아니라 이젠 곽승재까지 자신을 도와줄 이야 예상하지 못했다!고은혜는 애원하며 어
고은혜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곧바로 웃으며 말했다.“내가 뭘 해야 할 것 같아? 할아버지께서 설마 나를 함부로 대할까?”“게다가 내가 정말 하려고 하는 게 있다면, 네가 국내에 있든 없든 별 차이가 있을까? 네가 비즈니스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아니면 M-Q에 관해 이야기할 수를 가?”“너!”고은혜는 기가 차서 잠시 얼굴이 붉어졌다.“원지훈한테서 들었는데, 당신이 그와 사적인 대화를 나눈다면서요, 혹시 그에게 다른 생각이 있는 건 아니죠?”원지훈이 물론 아무렇지 않게 언급한 사실이지만, 그녀는 고은서와 원지훈의 채팅 기록을 엿보았다.주차장에서의 그날을 떠올리며 원지훈은 그녀와 함께 놀자고 권했고,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고은서는 결국 동의하며 블랙카드를 꺼내 계산하겠다고 나섰다.원지훈이 체육관에 갔을 때 고은서도 그곳에 있었다.고은혜는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니?”고은서는 비웃었다.“뇌는 생각하는 데 쓰이는 것이지, 남이 뭐라고 해서 그대로 믿는 건 아니야.”“원지훈과 곽승재가 비길 가치라도 있을까? 내가 사적으로 연락을 할 가치가 있냐고?”이렇게 말하며 고은서는 그녀에게 자신의 휴대전화를 건네며 물었다.“잘 봐, 내가 무슨 얘기를 했지?”고은혜는 화면을 흘끗 보았다. 매번 원지훈이 먼저 연락을 보내는 것을 그녀는 확인할 수 있었다.채팅 내용은 평범하고 정중해 보였지만, 조금만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일부러 그녀를 흥분시키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고은서가 고은혜보다 더 부유하고 만만해 보였기 때문이다.고은혜는 고은서의 말투가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원지훈도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당신이 그를 쫓아다녔고, 전에 피로연에서 그는 당신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고 다른 여자를 품에 안고 나갔어! 그리고 당신은 그 과정에서 그를 짜증 나게 할 남자를 함부로 찾은 거고, 안 그래?”고은서는 기가 차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고은서의 눈썹과 위로 올라간 입꼬리를 본 곽승재의 첫 반응은 의외로 화가 나지 않았다.지난번에 그를 놀렸던 그녀의 차가운 미소와 비웃음, 승리의 웃음을 제외하면 곽승재는 오랫동안 그녀의 환한 미소를 보지 못했다.물론 지어낸 웃음이지만, 곽승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마치 너무나 흔한 일이 이제는 드문 일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그의 마음이 막연해지고 불편해지기 시작했다.“카드를 가지진 않았어도, 어차피 네 것이니까 근심하지 마.”곽승재는 반나절 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것을 본 고은서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고은서, 너 유치하다.”곽승재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난 방금 다 말했어, 너한테 준 물건은 이미 네 것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먼저 자리를 떠난다고 너한테 알려주러 왔어, 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주민기가 이미 처리했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그렇게 말한 후 곽승재는 긴 다리로 발걸음을 옮겼다.고은서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곽승재는 오늘 조금 이상했다.두 번이나 그녀를 위해 대변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고의적인 도발에 화도 내지 않았다.어쨌든 고은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어젯밤 일이 해결되었다는 곽승재의 말에 고은서는 마음속으로 안도했다.마침, 아름 언니가 전화를 걸어와 그녀에게도 좋은 소식을 전했다.“그래!”도아름이 말했다.“서인수의 와이너리가 오늘 공식적으로 개업했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해 리본 커팅식을 가졌어. 근데 리본 커팅식이 시작되기 직전에 경찰에 연행되었어.”“지금 커뮤니티에 소문이 퍼져 모두가 그가 사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망했다며, 후에는 더 잘 안될 거라고 비웃고 있어.”“은서, 곽 총무의 업무 효율이 정말 죽이는데, 어젯밤에 일어난 일을 오늘 처리했으니 아직도 널 아끼긴 하나 봐.”도아름은 지난날 칵테일파티에서 고은서가 술에 취한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연민을 느꼈다.물론 고은서의 술 취
고국성은 분에 차서 말했다. "만약 고씨 가문의 두 여식이 모두 곽승재한테 시집간다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뭐라고 비웃을까. 이혼은 꿈도 꾸지 말거라! 너의 외할아버지가 널 어여뻐해 네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지만 난 아니란다." "...... " 고은서도 식당에서까지 그들과 언쟁을 펼치고 싶진 않았다. 그들이 받아들인다면야 좋겠지만 설사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여도 고은서는 따로 뭐 어찌할 생각따위는 없다. 어차피 그녀는 이미 입장발표를 확실하게 하였고 외할아버지도 반대하지 않으셨으니 이젠 그 누구도 고은서를 막을 수 없다. ...... 오후에 고은서는 명운에 들렸다. 고은서는 인터넷에서 명운이 품질이 떨어지는 술을 고급술로 둔갑하여 판매했다고 주장했던 사람이 그건 오해였음을 인정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사람은 명운의 술이 아닌 다른 술을 마시고 알코올중독에 걸렸던 것이었다. 그 술은 그 사람 스스로 담근 술이었기에 술의 안전 여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명운의 술이 문제 있다고 오해하였다. "아마도 인수 씨가 경찰의 협조조사를 받았다는 소식에 놀라서 더 이상 행패 부릴 엄두가 나지 않았을 거예요." 도아름이 말했다. "지금이라도 진실이 밝혀졌으니 골칫거리 하나 사라진 셈이네요." 기분이 좋아진 고은서가 말했다. "전 아름언니가 시장을 크게 키우기를 기다리면서 출시 준비를 도모할게요!" 이말에 도아름 역시 두말없이 약조하였다.도아름과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던 와중 고은서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번호를 보니 그건 바로 며칠간 연락이 없던 주인혁이였다. "누나, 저희 초보 오디션을 순조롭게 통과했어요. 이제 방송녹화단계에 진입할 수 있게 되었어요!"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주인혁은 들뜬 목소리로 이 기쁜 소식을 들려주었다. 그 말에 고은서도 덩달아 기뻐났다. "이건 첫걸음일 뿐이에요. 인혁씬 꼭 경쟁에서 이겨서 결승전까지 무사히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누나, 저녁에 시간 있나요?" 주인혁이 물었다.
고은서는 웃으며 말했다. "나이는 많지 않지만 경력만은 풍부하네요."무대쪽으로 다가가니 kk와 그의 무리가 고은서를 발견하곤 너도나도 그녀와 인사를 하였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주인혁의 팀이 무대에 올라 공연할 차례가 되었다. 그들은 여유 넘치면서도 이 순간을 즐기는 듯한 기색으로 무대위의 각자의 위치에 앉고는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메인보컬인 주인혁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들중에서 제일 빛나보였다. 심플하지만 포인트 있는 검정색 티셔츠에 잘생긴 이마를 살짝 들어낸 헤어스타일, 노래 부를 때 깔끔하고도 깊은 보이스와 맑고 깔끔한 눈빛은 주인혁이 마치 동화속 왕자님 같다는 느낌이 들게 하였다. 그들이 부르던 두 곡의 느린 절주의 사랑노래는 드럼소리와 함께 격정적인 반주곡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노래를 듣다보니 고은서의 지난 몇년간 잠들어 있었던 음악세포마저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하는듯 하였다. 10대시절 그녀는 학업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하여 몇년간 드럼을 배웠었는데 당시 선생님께선 그녀의 학습능력과 리듬감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녀는 대학신입생 장기자랑 때 무대에 올랐었는데 당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었다. 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가 말괄량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다는 소식에 이 취미마저 포기했다. 단정하고도 진취적인 모범생이 되여 곽승재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녀의 어떠한 노력에도 곽승재의 눈에 그녀따윈 없었다. "누나, 지난번에 저한데 얘기했었던 것 같은데, 드럼 칠줄 아신다고?"고은서가 지난 기억에 빠져있는 사이 주인혁은 어느샌가 노래를 마치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대의 기쁨을 흠뻑 만끽하고 와서인지 주인혁의 잘생긴 얼굴은 여유와 자신감으로 채워졌다. 그 모습에 고은서도 덩달아 흥분되는듯 하였다. "맞아요.""그럼 한 곡조 쳐보시는건 어때요?"무대우의 친근한 드럼과 주인혁의 기대감이 담긴 눈빛을 바라보노라니 고은서도 내심 연주해보고픈 맘이 생겼
고은서는 간지 나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슬쩍 뒤로 넘기며 물었다. "당연하죠, 저 방금 멋있지 않았나요?" 주인혁은 고은서의 행동에 웃음을 금치 못하면서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멋져요, 멋있고 말고요. 프로 드럼연주자와도 비겨 볼만한 실력이신데요!" "안목 좋으시네요." 고은서는 주인혁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가요, 누나가 술 사줄게요." "누나, 저희도요, 저희도 술 사주세요!" 밴드멤버들도 몰려왔다. 고은서는 기분이 좋아나서 손을 흔들며 통 크게 말했다. "마셔요, 우리 모두 같이 마셔요!" 무리의 사람들은 고은서를 클럽의 넓은 좌석으로 안배한 후 넉넉한 간식과 술을 주문한 뒤 그녀를 향한 아낌없는 칭찬을 하였다. "누나, 진짜 생각지도 못했어요. 보기엔 연약해 보였는데 드럼 연주할 때 엄청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더라고요." "그러니깐요, 드럼스틱으로 끼 부릴 때도 얼마나 멋있던지. 누나, 저희 밴드팀에 들어오실 생각 없으세요?" kk가 물었다. "지민이랑 같이 드럼 연주하면 관객들이 얼마나 난리가 날가요." "예, 맞아요. 만약 누나가 저희 밴드팀에 들어온다면 그땐 분명 주인혁보다 더 인기 있을 거예요." "그렇고 말고요. 제가 어떻게 감히 누나랑 비기겠어요." 주인혁도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열정으로 가득 넘치는 젊은 얼굴들을 보고 있노라니 고은서도 덩달아 흥분되는 듯하였다. 마지막으로 아무런 걱정 없이 마음껏 드럼을 쳤던 때는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였다.그때 당시에도 그녀는 많은 동학들의 칭찬을 받았고 심지어 한 유명한 음악교수님마저 그녀를 눈 여겨보아 제자로 삼고 싶어 하였다. 아쉽게도 당시 고은서는 곽승재가 싫어할 것을 염려해 그 기회를 거절하였다. 후에 그 교수님의 여러 명 제자들 모두 음악분야에서 일정한 성과를 이룩하였는데 만약 당시 그녀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그들 중의 한 명이 될수 있지 않았을가. "여러분들이 제가 밴드그룹에 참가하여 여러분들과 함께 밴드팀을
고은서는 인기척이 드문 곳으로 이동한 뒤 전화를 받았다. "지금 클럽에서 친구들이랑 놀고 있는데, 무슨 일 있나요? " 아줌마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지금 11시가 되어가는데 사모님이 언제 오시나 해서요." 예전부터 아줌마는 간혹 자기 전에 고은서한테 돌아오는 시간을 묻곤 했었다. "잘 모르겠는데... 아줌마 먼저 쉬세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요." "사모님, 한 가지 일이 더 있는데요." 아줌마는 다시금 은서에게 말을 걸었다. "도련님께서 자주 입으시던 잠옷을 못 찾겠다고 하십니다." "자주 입던 잠옷을 찾지 못했으면 다른 옷으로 바꿔 입으면 되잖아요. 설마 저보고 집으로 돌아가서 찾아줘란 소리인가요? " "도련님께서 다른 옷은 불편하다고, 사모님께서 오늘 아침 도련님보다 후에 일어나셨으니 혹여 그 잠옷을 다른 옷장에 넣으신 건 아닌지 해서요." "전 곽승재의 물건에 손대기조차 귀찮거든요! 곽승재가 어젯밤 잤는지 아닌지조차 모르는데 그의 잠옷이 어디 있는지 알 턱도 없죠. 아줌마도 그만 신경 끄세요. 알아서 찾아 입든 말든." "하지만.... " "거기까지요 아줌마, 친구들이 불러서 이만 끊을게요." "고은서!" 고은서가 막 전화를 끊으려 할 때 귓가에서 곽승재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 몇 시인데, 언제까지 클럽에 있을 예정이야." '곽승재도 옆에 있었구나.아줌마가 걸어온 이 전화, 혹여 곽승재가 지시한 건 아닐까? 해가 서쪽에서 뜨겠어. 항상 고은서가 곽승재한테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물어봤었는데 살다 보니 곽승재가 고은서한테 물어보는 날이 오네?'"지금 너한테 묻고 있잖아!" 곽승재가 다시금 냉랭하게 말을 했다. 고은서는 과거의 곽승재와 같은 차가운 어투로 답했다. "몰라. 귀찮게 굴지 마." 그러고선 곽승재가 답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고은서는 곽승재가 부아가 치밀어 부들부들 떨고 있을 생각에 꽤 즐거워졌다. 드디어 곽승재도 할 말 채 하지 못한 채 전화가 끊기는 고통을
곽승재는 불쾌한 기색을 띠며 말했다. "잠옷을 못 찾겠어. 돌아가서 잠옷을 찾아줘."고은서는 의아했다. 그녀는 술기운에 머리가 좀 어지럽긴 했지만 정상적인 사고조차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곽승재가 이런 행동을 하는 건 그저 자신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서 화가 난 나머지 고의로 그녀한테 시비 거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내게 그럴 의무는 없어."고은서는 곽승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술잔 돌려줘!"고은서를 바라보는 곽승재의 미간이 무의식간에 좁혀졌다. "너 너무 많이 마셨어. 그만 마셔."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곽승재와 구면이였다. 지난번 곽승재가 밑도 끝도 없이 고은서를 끌고 나간 것을 보았었기에 이번엔 그녀가 다시 괴롭힘 당하는 것을 그저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이보세요, 아무리 은서누나가 당신의 아내라지만 술을 마시고 말고의 여부는 그쪽 권한이 아니지 않나요?""그니깐 말이에요. 너무 독단적이시다."그 말들을 들은 곽승재는 추호의 파동도 없는 눈길로 그들을 훑어보았다. 워낙 강렬한 아우라를 지닌 곽승재가 무표정으로 있으니 그 압박감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곽승재의 이런 시선에 방금 말을 꺼낸 사람들은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꼈다. "곽승재씨, 은서누나 술 그리 많이 드시지 않으셨어요. 만약 누나가 돌아가려 한다면 저희가 집까지 모셔드릴 겁니다. 당신은 누나를 강제적으로 데려갈 수 없어요." 주인혁이 입을 열었다. 곽승재는 시선은 주인혁으로부터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술잔으로 향했다.그는 두말 않고 고은서를 가로로 안아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나머지 고은서는 외마디 고함과 함께 두 팔은 무의식간에 곽승재의 목을 감아 안았다. 그녀의 이 동작은 꽤나 곽승재의 맘에 들었다. 곽승재는 그의 거리감 느껴지는 품위를 유지하면서 그들한테 말했다. "오늘 밤 모든 비용은 제가 쏠게요. 저의 아내와 재밌게 놀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이 말과 함께 곽승재는 블랙 카드를 복무원한테 건네곤 고은서를 안은채 자리를
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와 고은서는 깜짝 놀라며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송민준이 사무실 문 앞에 서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고은서는 순간 어색함이 밀려왔다. 남의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함부로 만진 데다 지어는 내용까지 훔쳐보다가 주인에게 딱 걸렸으니 말이다.얼굴이 확 붉어진 고은서가 입을 열려는 순간, 송민아가 먼저 물었다.“오빠, 오빠 컴퓨터에 왜 지난번 은서와 여시은 씨가 물에 빠진 영상이 있는 거야?”송민준에게 사과하려는 고은서의 말을 끊은 채 송민아는 재차 추궁했다.“누구한테서 받은 거야? 왜 나한테는 말도 안 해줬어?”고은서 역시 궁금했기에 민망함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답을 기다렸다.송민준은 차분히 걸어와 영상을 끈 뒤 담담히 물었다.“민아야, 누가 내 컴퓨터를 함부로 만져도 된다고 허락했어?”송민아도 민망하긴 마찬가지였던지라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그냥 비밀번호가 맞나 확인해보려다가... 미안해. 이 일은 나중에 사과할게. 우선 이 영상 어디서 난 건지부터 말해봐.”송민준은 고은서를 보며 입을 열었다.“은서야, 지난번 곽 대표가 농장 사고를 수사한다는 말을 듣고 나도 사람을 시켜 조사해 봤어. 마침 그날 농장에 있던 관광객이 풍경 촬영 중 우연히 사고 장면을 찍어두었더라고.”송민준은 그 관광객이 급한 일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최근에서야 해성시로 돌아와 그날의 사고 수사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설명했다.“그럼 왜 나한테는 안 알려줬어?”송민아가 불만스럽게 묻자, 송민준은 오늘 아침에야 받은 결과라고 답했다.“안 그래도 은서에게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너희가 먼저 발견해 버렸네.”이 말을 들은 고은서는 이내 사과했다.“정말 미안해. 민준 오빠....”“비밀번호 푼 것도, 영상 연 것도 나야. 뭐라 할 거면 나한테 해.”송민아가 의리 있게 나서자, 송민준은 의자에 앉아있는 여동생을 흘깃 보며 받아쳤다.“요즘 부모님께 칭찬만 듣다 보니
고은서는 아무리 두 사람이 남매라고 해도 상대방의 사무실에 들어와서 컴퓨터를 다치는 게 무례한 행위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송민아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말했다.“그냥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뭘?”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해 났다.“오빠가 하도 경각심이 높은 사람이라 폰이랑 컴퓨터에 다 비밀번호가 걸려있거든. 그리고 평소엔 손도 못 대게 한다니까. 그런데 내가 전에 몰래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걸 훔쳐보고 있었다는 것까진 모를걸. 그래서 혹시 사무실 컴퓨터도 같은 비밀번호인지 확인해 보려고.”‘이건 또 뭔 호기심이래?’“민아야, 그냥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개인 프라이버시와 연관된 일이잖아.”고은서가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그러나 송민아는 그녀의 말을 별로 개의치 않았다.“괜찮아. 내가 기밀문서를 찾아보는 것도 아닌데. 그냥 비밀번호만 확인해 보는 거잖아. 우리 둘 다 비밀로 하면 오빠도 영원히 모를 거야.”“...”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송민아는 이내 비밀번호를 입력하기 시작했다.한 글자, 두 글자, 세 글자...“열렸어!”송민아는 흥분해 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칭찬하기 시작했다.“이러고 보면 내 시력하고 기억력이 다 어마어마하네.”“네네네. 세상 제일로 가는 시력과 기억력을 가지셨어요.”고은서는 이 상황이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오빠가 조금 이따 곧 올 건데 얼른 다시 잠가. 발각되어서 욕먹지 말고.”“알겠어.”송민아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마우스로 이리저리 눌러 보았다.그러나 마우스가 손에 익지 않은 탓에 실수로 동영상 파일 하나를 클릭하게 되었다.갑작스레 재생된 동영상에 깜짝 놀란 송민아는 인츰 꺼버리려고 했다.그러나 그녀는 저도 모르게 동영상 내용을 보게 되었고 이내 황급히 고은서를 불렀다.“고은서, 얼른 와서 봐봐. 이거 우리가 갔던 농장 아니야?”‘송민준의 컴퓨터에 농장 동영상이 저장되어 있다고?’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의를 따지던 고은서는 모든 걸
“좋은 소식 기다릴게요.”고은서가 담담하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송민아는 WOR에서 나오자마자 여시은에 관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입으로만 계속 아버지 도움을 받지 않는다고 하면서 좋은 아버지를 뒀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려 드는 사람이 누군데. 우리가 WOR을 투자했다는 걸 분명히 알면서 찾아오는 이유가 뻔하잖아. 우린 안중에도 없다는 거겠지.”“네 말처럼 능력 있는 아버지를 배후에 두고 있는데 우리가 뭘 어쩌겠어. 게다가 그냥 알아보러 온 거라고 말한 사람을 내쫓을 수도 없잖아.”고은서가 웃으면서 그녀를 달랬다.“다 우리 아빠 탓이야. 여시은한테 지다니 너무 분해.”송민아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고은서는 그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우리가 굳이 아버지한테 의지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자아 발전에 중심을 두면 되지. 게다가 넌 훌륭한 오빠를 뒀잖아. 북성에서 ST그룹 송민준이라면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송민아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이내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하긴. 오빠가 능력이 뛰어나긴 하지. 그보다 고은서, 우리 오빠 찾으러 가자. 오빠가 전에 꽤 괜찮은 프로젝트가 있다고 해서 내가 며칠 동안 떼쓰며 빌었는데 어제 겨우 나한테 넘기겠다고 했거든. 오빠가 마음 바꾸기 전에 얼른 가자.”“이미 약속한 일인데 괜찮지 않을까?“그럴 리가. 오빠가 이런 면에서는 엄청 까다로운 사람이거든. 높은 이익만 거두어들일 수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사인한다니까. 나중에 핑계 대며 모른다고 하면 나만 손해잖아. 그러니까 잔말 말고 얼른 가자. 지금쯤 사무실에 있을 거야.”송민아는 재촉하면서 고은서를 끌고 차에 탔다. 그리고 이내 기사한테 ST그룹 해성 지사로 가달라고 부탁했다.“미리 전화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고은서가 물었다.“아니. 그냥 쳐들어갈 거야. 그리고 가는 김에 밥도 한 끼 얻어먹어야지.”“...”고은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날 백유미가 송민준을 의심하고 있다고 했는데 곽승재도 확실한 증거
고은서는 소식을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어제 금방 곽승재한테서 여시은도 게임 회사에 관심 있어 한다고 주의하라는 소릴 들었는데 오늘 바로 찾아온다고?’“여긴 무슨 일로 온 거래?”고은서의 물음에 송민아는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 비서랑 같이 온 것 같던데 보자마자 너한테 전하러 달려왔어.”“한번 나가 보자.”고은서는 송민아랑 책임자와 함께 여시은을 만나러 갔다.WOR 게임 회사 직원은 이미 그녀를 또 다른 접대실로 데려갔다.고은서가 들어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여시은과 비서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평소의 귀여운 옷차림 대신 여시은은 맞춤 정장을 입고 있었다.그러나 원래도 귀엽게 생긴 데다가 항상 천진하고 무구한 눈빛으로 사람을 대해서인지 정장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어머, 은서 씨 아니에요. 여기에서 은서 씨를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여시은은 고은서를 보자마자 의외라는 듯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몰랐을 리가.’“여시은 씨는 여기에 무슨 일로 오신 거죠?”고은서가 직설적으로 물었다.그러자 여시은이 눈을 깜빡이면서 웃으며 입을 열었다.“요즘 WOR 게임 회사에서 개발하고 있는 게임에 흥취가 생겨서 더 자세히 알아보려고 찾아왔어요. 기회가 된다면 저도 사업 파트너 관계를 맺고 싶어서요.”여시은은 숨김없이 그대로 말했다.“WOR이 우리 유일에서 투자한 프로젝트라는 걸 알고 계실 텐데요.”옆에 있던 송민아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알고 있어요. 괜찮으시다면 유일과도 합작하면 되죠.”여시은이 미소를 유지하며 답했다.송민아는 화가 나긴 했지만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드러내고 반박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죄송하지만 우린 WOR 프로젝트에 관해서 아직 다른 회사와 합작할 생각이 없습니다.”고은서가 담담하게 말했다.WOR 책임자도 유일 투자 은행과 단독 계약을 체결한 터라 다른 회사와 합작할 의향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그러나 예상 밖으로 여시은은 전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고은서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아니.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아.”곽승재가 고개를 저으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고은서는 도리어 자기 아이디어가 인정받았다는 거에 내심 기뻐했다.곽승재는 GS그룹을 물려받을 때부터 엘리트라고 불리면서 많은 기사에 떴었는데 그의 인정을 받았다는 건 꽤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은서는 이어 곽승재와 여시은에 관해 더 자세히 토론한 후 시간이 늦어지자 먼저 가보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먼저 갈게. 나중에라도 일이 있으면 다시 연락해.”“은서야.”그러나 곽승재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왜?”고은서가 머리를 갸우뚱하며 물었다.곽승재는 멈칫하더니 이내 말을 이어갔다.“배는 괜찮아?”“다 나았어. 전에 나한테 문자로 물어봤었잖아.”곽승재는 그녀가 조금 더 머물 수 있게끔 새로운 화젯거리를 찾고 싶었지만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잘 자.”“응.”‘이상하게 왜 저러는 거야?’고은서는 약간 의문이 들긴 했지만 더 머무르지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이튿날.고은서는 먼저 회사에서 긴급한 서류들을 처리한 후 송민아와 함께 WOR 게임 회사로 갔다.게임 회사는 전보다 더 밝고 넓은 곳으로 이사하였고 규모도 훨씬 더 커졌다.그러나 분위기만은 변함없이 활력이 넘쳤다.아무래도 젊은이끼리 자체로 팀을 묶어 제작한 게임이라 그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자기 친자식과 다름없었는 존재였다.책임자는 고은서와 송민아를 보자마자 아주 열정적으로 맞이해 주면서 프로젝트가 잘 진행되고 있다면서 곧 테스팅을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테스팅이 순리롭게 진행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출시도 가능했다.듣기만 해도 격동되는 순간이었다.책임자는 두 사람한테 얘기하면서 매우 흥분해 했다.송민아는 여러 가지 절차를 확인하러 가고 고은서는 책임자와 함께 접대실에 앉아 어제저녁 곽승재가 말했던 일에 관해 의논했다.“정말 이런 밑지는
곽승재는 고은서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다리에 덮을만한 담요 하나를 가져오면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해성이 기후가 좋기로 유명하긴 했지만 초겨울엔 날씨가 으스스했다.히터를 켜놓은 동시에 통풍을 위해 창문을 열어놓았기에 행여나 고은서가 추워할까 봐 걱정되었던 모양이다.“의사 선생님께서 따뜻하게 하고 다니랬잖아.”곽승재가 덤덤한 얼굴로 설명했다.‘그건 생리할 때 따뜻하게 하고 다니란 뜻이었는데.’고은서는 속으로만 중얼거릴 뿐 겉으론 티 내지 않고 담요를 다리에 덮었다.곽승재는 이내 그녀에게 따뜻한 물을 따라주었다.“좀 마셔.”그러나 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괜찮아. 목이 별로 마르지 않아서. 얼른 할 얘기나 해.”“그럼 따뜻하게 손에 쥐고 있어.”곽승재는 물잔을 강제로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서야 소파에 앉았다.“...”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담요를 덮고 따뜻한 물을 손에 쥔 채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손에 꽤 괜찮은 프로젝트 하나 있지?”고은서는 그의 물음을 듣자마자 표정이 엄숙해졌다.“응. 왜? 문제라도 있어?“여시은이 요즘 들어 유사한 프로젝트에 관심 있는지 연관 분야 사람들과 많이 접촉하고 있어.”고은서는 이미 여시은이 그럴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여시은이 회사를 설립한 목적 자체가 그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였기에 유일 투자 은행과 경쟁하려 드는 게 아주 정상적인 일이었다.“같은 업계에 있는 한 경쟁은 피할 수 없잖아. 예상했던 바야.”그러나 곽승재가 덤덤하게 설명을 보태었다.“투자한 게임 회사가 규모도 크지 않고 팀 내에 집안 배경이 뛰어난 사람도 없다며?”고은서는 멈칫하더니 이내 그의 뜻을 깨달았다.“지금 그 사람들이 여시은한테 수매 당해 우리 회사와의 계약을 해제하려고 할까 봐 걱정하는 거야?”곽승재는 고개를 끄덕였다.“투자 업계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 지 너도 알고 있잖아. 예상치 못한 일들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어. 현재 게임 회사가 출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
“은서야, 데려다줄게.”육현석이 차창 너머로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그러나 그녀는 사양했다.“고맙지만 커플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아서 사양할게요. 그리고 저도 차 가지고 왔어요.”그러자 육현석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그럼 운전 조심하고 집 들어가면 지연이한테 문자해.”“알겠어요. 절대 지연이 걱정시키는 일은 안 할 테니까 시름 놓으세요.”육현석과 박지연은 고은서의 재촉 하에 더는 머무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고은서는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폰을 확인해 보았는데 곽승재가 얼마 전에 자신에게 전화한 걸 발견했다.마침 박지연과 함께 폰을 사물함에 넣은 채 한창 스파를 즐기고 있을 때라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했다.곽승재한테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바쁜지 한참이 지나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녀는 더는 신경 쓰지 않고 라이트문으로 돌아갔다.마침 주차하고 차에서 내렸을 때 곽승재한테서 다시 연락이 왔다.“방금 화장실에 있어서 전화 못 받았어.”“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여시은 투자 은행에 관해 얘기해줄 게 있어서 전화했어. 라이트문에 왔는데 네가 집에 없다고 해서 전화를 했던 거야.”“알겠어. 내가 당신 집으로 갈게.”고은서는 말하면서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엘리베이터는 이내 두 사람이 사는 층에 멈춰 섰고 고은서는 곽승재의 집 문을 두드렸다.이내 일상복을 입은 곽승재가 문을 열어주었다.금방 샤워했는지 그의 머리카락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돌아오는 길에 먼지가 좀 묻어서 샤워하고 옷 갈아입었어.”곽승재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자신의 현재 상황에 관해 설명했다.그는 전에도 약간의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원 별장에 있을 때도 몸에 먼지가 묻거나 이상한 냄새가 배면 꼭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거실로 걸어갔다.집 구조가 그녀의 집과 조금 달랐는데 거실이 좀 더 넓어 보였다.소파에 앉은 고은서는 갑자기 집에서 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부엌에서 요리라도 했어? 뭔가 탄 것 같은데.
곽승재가 요 며칠 바쁜 건 사실이었다.여시은의 투자은행이 곧 개업할 거라 준비할 일이 산더미였기 때문이었다.여재훈이 믿음직한 비서를 붙여줬지만, 사업에 생소했던 여시은은 여전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했다.곽현수는 이 틈을 타 곽승재에게 당분간 여시은의 회사에 가서 자리를 지켜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부탁대로만 해주면 GS 그룹 본사 복귀도 고려해 보겠다고 덧붙였다. 말은 부탁이었지만, 실상은 협박이었다.GS그룹으로 급히 돌아갈 필요는 없었지만 고은서와 함께 C선생을 잡아내고 여시은에 관해 조사하려거든 많은 시간과 수단이 필요했기에 곽현수와 다투면서 필요 없는 손해를 보는 걸 최대한 피면 하는 게 좋았다.곽현수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곽승재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게다가 여시은을 도우면서 가까이에서 그녀를 관찰하고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에 나쁠 것도 없었다.고은서는 곽승재한테서 미리 소식을 접한 덕분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그러나 고은서는 이 모든 내막을 그대로 박지연한테 알려줄 수 없었다.곽승재가 제안을 수락한 건 혹시 곽현수가 또 고씨 가문에 무슨 일을 꾸밀까 우려해서일지도 모른다고만 했다.“또라니? 고씨 가문에 해가 되는 조짐이 보였어?”박지연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고은서는 지금까지 고국성 일을 꾸민 사람이 곽현수라는 사실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하지만 앞으로 곽승재와 자주 연락할 일이 생길 테고, 괜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번엔 솔직히 털어놓았다.“곽승재의 아버지가 우리 둘이 재결합하는 걸 막으려고 일부러 우리 삼촌을 해친 거야.”“그럼 곽승재가 너랑 거리를 둔 것도 네 삼촌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였겠네?”비록 박지연 말처럼 쉽게 해결된 건 아니었지만 굳이 부인할 필요가 없었다.“그렇게 보면 돼.”박지연은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럼 그 스캔들도 아버지의 눈을 피하려고 일부러 수습하지 않은 거야?”‘눈치 백단이네.’고은서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맞아. 모든 스
룸에서 유혜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주 보기 싫으면 얼마든지 더 소란 피워 봐요. 좋기든 온 해성 사람들이 다 알게끔 일을 크게 만드세요. 저야 아이를 없애고 이혼하면 그만이에요.”조수연은 이내 흠 잡힌 사람처럼 조용해졌다.“아무튼 당신 아들도 전처만 좋아하잖아요. 출국한 지 이렇게 오래되도록 나한텐 전화 한 통도 없잖아요!”조수연은 기세만 수그러들었을 뿐 입으로는 전혀 지려고 하지 않았다.“지연이를 더 좋아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 효녀인 데다가 말도 곧잘 들어. 너와 달리 승준이도 잘 보살펴줬거든. 넌 집안일도 하지 않고 사람을 돌볼 줄도 모르잖아. 심지어 나와서...”유혜린이 안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조수연은 이내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바로 이때, 레스토랑 웨이터가 경찰을 데리고 룸 앞으로 다가왔다.고은서와 박지연도 더는 머물지 않고 자신의 룸으로 돌아갔다.“이곳에서 막장 드라마 한 편을 보게 되다니. 한때 유혜린을 그렇게 좋아하더니만 당하고 나니 또 네가 좋아 보이나 봐.”조수연이 조금 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 고은서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반면 박지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그렇게까지 참고 견뎠는데, 그 정도 소리도 못 들으면 허무하지.”“정말 이혼하고 나와서 다행이야. 계속 참다가 활발하던 애가 우울증을 앓겠어.”고은서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그런데 유혜린도 정말 만만하지 않던데. 똑같이 되갚는 거 봤어? 아무리 그래도 시어머니인데 서슴없이 내려치던데?”전에 주차장에서 만났을 땐 그저 기사에게 차로 데려가라고 했을 뿐이지 오늘처럼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다.유혜린은 조수연의 체면을 단 한 번도 고려해 준 적이 없었고 또한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해서도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정말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니까. 전생에 지연이가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어.’“다 조수연 업보지.”박지연이 차를 따르면서 말했다.“자기 아들이 뭐 왕이라도 되는 줄 알고, 아무 여자나 마음대로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