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고은서의 눈썹과 위로 올라간 입꼬리를 본 곽승재의 첫 반응은 의외로 화가 나지 않았다.지난번에 그를 놀렸던 그녀의 차가운 미소와 비웃음, 승리의 웃음을 제외하면 곽승재는 오랫동안 그녀의 환한 미소를 보지 못했다.물론 지어낸 웃음이지만, 곽승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마치 너무나 흔한 일이 이제는 드문 일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그의 마음이 막연해지고 불편해지기 시작했다.“카드를 가지진 않았어도, 어차피 네 것이니까 근심하지 마.”곽승재는 반나절 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것을 본 고은서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고은서, 너 유치하다.”곽승재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난 방금 다 말했어, 너한테 준 물건은 이미 네 것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먼저 자리를 떠난다고 너한테 알려주러 왔어, 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주민기가 이미 처리했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그렇게 말한 후 곽승재는 긴 다리로 발걸음을 옮겼다.고은서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곽승재는 오늘 조금 이상했다.두 번이나 그녀를 위해 대변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고의적인 도발에 화도 내지 않았다.어쨌든 고은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어젯밤 일이 해결되었다는 곽승재의 말에 고은서는 마음속으로 안도했다.마침, 아름 언니가 전화를 걸어와 그녀에게도 좋은 소식을 전했다.“그래!”도아름이 말했다.“서인수의 와이너리가 오늘 공식적으로 개업했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해 리본 커팅식을 가졌어. 근데 리본 커팅식이 시작되기 직전에 경찰에 연행되었어.”“지금 커뮤니티에 소문이 퍼져 모두가 그가 사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망했다며, 후에는 더 잘 안될 거라고 비웃고 있어.”“은서, 곽 총무의 업무 효율이 정말 죽이는데, 어젯밤에 일어난 일을 오늘 처리했으니 아직도 널 아끼긴 하나 봐.”도아름은 지난날 칵테일파티에서 고은서가 술에 취한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연민을 느꼈다.물론 고은서의 술 취
고국성은 분에 차서 말했다. "만약 고씨 가문의 두 여식이 모두 곽승재한테 시집간다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뭐라고 비웃을까. 이혼은 꿈도 꾸지 말거라! 너의 외할아버지가 널 어여뻐해 네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지만 난 아니란다." "...... " 고은서도 식당에서까지 그들과 언쟁을 펼치고 싶진 않았다. 그들이 받아들인다면야 좋겠지만 설사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여도 고은서는 따로 뭐 어찌할 생각따위는 없다. 어차피 그녀는 이미 입장발표를 확실하게 하였고 외할아버지도 반대하지 않으셨으니 이젠 그 누구도 고은서를 막을 수 없다. ...... 오후에 고은서는 명운에 들렸다. 고은서는 인터넷에서 명운이 품질이 떨어지는 술을 고급술로 둔갑하여 판매했다고 주장했던 사람이 그건 오해였음을 인정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사람은 명운의 술이 아닌 다른 술을 마시고 알코올중독에 걸렸던 것이었다. 그 술은 그 사람 스스로 담근 술이었기에 술의 안전 여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명운의 술이 문제 있다고 오해하였다. "아마도 인수 씨가 경찰의 협조조사를 받았다는 소식에 놀라서 더 이상 행패 부릴 엄두가 나지 않았을 거예요." 도아름이 말했다. "지금이라도 진실이 밝혀졌으니 골칫거리 하나 사라진 셈이네요." 기분이 좋아진 고은서가 말했다. "전 아름언니가 시장을 크게 키우기를 기다리면서 출시 준비를 도모할게요!" 이말에 도아름 역시 두말없이 약조하였다.도아름과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던 와중 고은서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번호를 보니 그건 바로 며칠간 연락이 없던 주인혁이였다. "누나, 저희 초보 오디션을 순조롭게 통과했어요. 이제 방송녹화단계에 진입할 수 있게 되었어요!"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주인혁은 들뜬 목소리로 이 기쁜 소식을 들려주었다. 그 말에 고은서도 덩달아 기뻐났다. "이건 첫걸음일 뿐이에요. 인혁씬 꼭 경쟁에서 이겨서 결승전까지 무사히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누나, 저녁에 시간 있나요?" 주인혁이 물었다.
고은서는 웃으며 말했다. "나이는 많지 않지만 경력만은 풍부하네요."무대쪽으로 다가가니 kk와 그의 무리가 고은서를 발견하곤 너도나도 그녀와 인사를 하였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주인혁의 팀이 무대에 올라 공연할 차례가 되었다. 그들은 여유 넘치면서도 이 순간을 즐기는 듯한 기색으로 무대위의 각자의 위치에 앉고는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메인보컬인 주인혁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들중에서 제일 빛나보였다. 심플하지만 포인트 있는 검정색 티셔츠에 잘생긴 이마를 살짝 들어낸 헤어스타일, 노래 부를 때 깔끔하고도 깊은 보이스와 맑고 깔끔한 눈빛은 주인혁이 마치 동화속 왕자님 같다는 느낌이 들게 하였다. 그들이 부르던 두 곡의 느린 절주의 사랑노래는 드럼소리와 함께 격정적인 반주곡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노래를 듣다보니 고은서의 지난 몇년간 잠들어 있었던 음악세포마저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하는듯 하였다. 10대시절 그녀는 학업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하여 몇년간 드럼을 배웠었는데 당시 선생님께선 그녀의 학습능력과 리듬감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녀는 대학신입생 장기자랑 때 무대에 올랐었는데 당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었다. 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가 말괄량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다는 소식에 이 취미마저 포기했다. 단정하고도 진취적인 모범생이 되여 곽승재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녀의 어떠한 노력에도 곽승재의 눈에 그녀따윈 없었다. "누나, 지난번에 저한데 얘기했었던 것 같은데, 드럼 칠줄 아신다고?"고은서가 지난 기억에 빠져있는 사이 주인혁은 어느샌가 노래를 마치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대의 기쁨을 흠뻑 만끽하고 와서인지 주인혁의 잘생긴 얼굴은 여유와 자신감으로 채워졌다. 그 모습에 고은서도 덩달아 흥분되는듯 하였다. "맞아요.""그럼 한 곡조 쳐보시는건 어때요?"무대우의 친근한 드럼과 주인혁의 기대감이 담긴 눈빛을 바라보노라니 고은서도 내심 연주해보고픈 맘이 생겼
고은서는 간지 나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슬쩍 뒤로 넘기며 물었다. "당연하죠, 저 방금 멋있지 않았나요?" 주인혁은 고은서의 행동에 웃음을 금치 못하면서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멋져요, 멋있고 말고요. 프로 드럼연주자와도 비겨 볼만한 실력이신데요!" "안목 좋으시네요." 고은서는 주인혁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가요, 누나가 술 사줄게요." "누나, 저희도요, 저희도 술 사주세요!" 밴드멤버들도 몰려왔다. 고은서는 기분이 좋아나서 손을 흔들며 통 크게 말했다. "마셔요, 우리 모두 같이 마셔요!" 무리의 사람들은 고은서를 클럽의 넓은 좌석으로 안배한 후 넉넉한 간식과 술을 주문한 뒤 그녀를 향한 아낌없는 칭찬을 하였다. "누나, 진짜 생각지도 못했어요. 보기엔 연약해 보였는데 드럼 연주할 때 엄청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더라고요." "그러니깐요, 드럼스틱으로 끼 부릴 때도 얼마나 멋있던지. 누나, 저희 밴드팀에 들어오실 생각 없으세요?" kk가 물었다. "지민이랑 같이 드럼 연주하면 관객들이 얼마나 난리가 날가요." "예, 맞아요. 만약 누나가 저희 밴드팀에 들어온다면 그땐 분명 주인혁보다 더 인기 있을 거예요." "그렇고 말고요. 제가 어떻게 감히 누나랑 비기겠어요." 주인혁도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열정으로 가득 넘치는 젊은 얼굴들을 보고 있노라니 고은서도 덩달아 흥분되는 듯하였다. 마지막으로 아무런 걱정 없이 마음껏 드럼을 쳤던 때는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였다.그때 당시에도 그녀는 많은 동학들의 칭찬을 받았고 심지어 한 유명한 음악교수님마저 그녀를 눈 여겨보아 제자로 삼고 싶어 하였다. 아쉽게도 당시 고은서는 곽승재가 싫어할 것을 염려해 그 기회를 거절하였다. 후에 그 교수님의 여러 명 제자들 모두 음악분야에서 일정한 성과를 이룩하였는데 만약 당시 그녀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그들 중의 한 명이 될수 있지 않았을가. "여러분들이 제가 밴드그룹에 참가하여 여러분들과 함께 밴드팀을
고은서는 인기척이 드문 곳으로 이동한 뒤 전화를 받았다. "지금 클럽에서 친구들이랑 놀고 있는데, 무슨 일 있나요? " 아줌마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지금 11시가 되어가는데 사모님이 언제 오시나 해서요." 예전부터 아줌마는 간혹 자기 전에 고은서한테 돌아오는 시간을 묻곤 했었다. "잘 모르겠는데... 아줌마 먼저 쉬세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요." "사모님, 한 가지 일이 더 있는데요." 아줌마는 다시금 은서에게 말을 걸었다. "도련님께서 자주 입으시던 잠옷을 못 찾겠다고 하십니다." "자주 입던 잠옷을 찾지 못했으면 다른 옷으로 바꿔 입으면 되잖아요. 설마 저보고 집으로 돌아가서 찾아줘란 소리인가요? " "도련님께서 다른 옷은 불편하다고, 사모님께서 오늘 아침 도련님보다 후에 일어나셨으니 혹여 그 잠옷을 다른 옷장에 넣으신 건 아닌지 해서요." "전 곽승재의 물건에 손대기조차 귀찮거든요! 곽승재가 어젯밤 잤는지 아닌지조차 모르는데 그의 잠옷이 어디 있는지 알 턱도 없죠. 아줌마도 그만 신경 끄세요. 알아서 찾아 입든 말든." "하지만.... " "거기까지요 아줌마, 친구들이 불러서 이만 끊을게요." "고은서!" 고은서가 막 전화를 끊으려 할 때 귓가에서 곽승재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 몇 시인데, 언제까지 클럽에 있을 예정이야." '곽승재도 옆에 있었구나.아줌마가 걸어온 이 전화, 혹여 곽승재가 지시한 건 아닐까? 해가 서쪽에서 뜨겠어. 항상 고은서가 곽승재한테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물어봤었는데 살다 보니 곽승재가 고은서한테 물어보는 날이 오네?'"지금 너한테 묻고 있잖아!" 곽승재가 다시금 냉랭하게 말을 했다. 고은서는 과거의 곽승재와 같은 차가운 어투로 답했다. "몰라. 귀찮게 굴지 마." 그러고선 곽승재가 답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고은서는 곽승재가 부아가 치밀어 부들부들 떨고 있을 생각에 꽤 즐거워졌다. 드디어 곽승재도 할 말 채 하지 못한 채 전화가 끊기는 고통을
곽승재는 불쾌한 기색을 띠며 말했다. "잠옷을 못 찾겠어. 돌아가서 잠옷을 찾아줘."고은서는 의아했다. 그녀는 술기운에 머리가 좀 어지럽긴 했지만 정상적인 사고조차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곽승재가 이런 행동을 하는 건 그저 자신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서 화가 난 나머지 고의로 그녀한테 시비 거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내게 그럴 의무는 없어."고은서는 곽승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술잔 돌려줘!"고은서를 바라보는 곽승재의 미간이 무의식간에 좁혀졌다. "너 너무 많이 마셨어. 그만 마셔."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곽승재와 구면이였다. 지난번 곽승재가 밑도 끝도 없이 고은서를 끌고 나간 것을 보았었기에 이번엔 그녀가 다시 괴롭힘 당하는 것을 그저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이보세요, 아무리 은서누나가 당신의 아내라지만 술을 마시고 말고의 여부는 그쪽 권한이 아니지 않나요?""그니깐 말이에요. 너무 독단적이시다."그 말들을 들은 곽승재는 추호의 파동도 없는 눈길로 그들을 훑어보았다. 워낙 강렬한 아우라를 지닌 곽승재가 무표정으로 있으니 그 압박감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곽승재의 이런 시선에 방금 말을 꺼낸 사람들은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꼈다. "곽승재씨, 은서누나 술 그리 많이 드시지 않으셨어요. 만약 누나가 돌아가려 한다면 저희가 집까지 모셔드릴 겁니다. 당신은 누나를 강제적으로 데려갈 수 없어요." 주인혁이 입을 열었다. 곽승재는 시선은 주인혁으로부터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술잔으로 향했다.그는 두말 않고 고은서를 가로로 안아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나머지 고은서는 외마디 고함과 함께 두 팔은 무의식간에 곽승재의 목을 감아 안았다. 그녀의 이 동작은 꽤나 곽승재의 맘에 들었다. 곽승재는 그의 거리감 느껴지는 품위를 유지하면서 그들한테 말했다. "오늘 밤 모든 비용은 제가 쏠게요. 저의 아내와 재밌게 놀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이 말과 함께 곽승재는 블랙 카드를 복무원한테 건네곤 고은서를 안은채 자리를
고은서는 박지연의 뜬금없는 호들갑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뭐가 떠?”‘저번에 술 취했을 때의 주사는 이미 지나간 일 아니었나?’“누군가 네가 엊저녁에 클럽에서 드럼 친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렸는데 다들 네가 예쁘고 멋있다고 난리야!”박지연은 다급하게 이 사실을 고은서와 공유했다.“전화 끊지 말고 빨리 아이패드로 확인해 봐!”“...”고은서는 박지연의 말에 따라 아이패드로 비디오 플랫폼을 열었다. 박지연의 말 대로 고은서가 드럼을 치는 동영상이 많은 인기를 받고 있었다.동영상을 클릭해 보니, 앞뒤가 조금 잘리고 1분가량의 킬링 파트만 남아있었다.영상 속에서 고은서는 음악에 취해 두 팔을 벌리고 능수능란하게 드럼을 치고 있었다.시청자 각도에서 자신을 바라본 고은서도 자신이 확실히 예쁘고 멋있다고 인정했다.동영상 밑의 댓글 창에는 온통 ‘멋있어요’, ‘예뻐요’, ‘반했어요’ 등 칭찬으로 도배되었다.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니, 고은서는 당연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인터넷의 인기는 이삼일만 지나면 줄어드는 거라 그녀는 재미로 여기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내가 직접 보지 못했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박지연은 원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이 계집애야, 남한테 보여주면서 왜 나는 안 불렀어!”박지연은 고은서보다 2살 많은 데다가 고은서와 같은 대학도 아니었다. 근데 잘생긴 신입생을 만나기 위해 박지연은 고은서가 다니던 대학에 몰래 갔었다.결국, 그곳에서 잘생긴 남자를 만나지 못했고, 오히려 고은서의 멋진 모습에 반해 주동적으로 그녀의 연락처를 받으면서 두 사람이 점차 친구가 되었던 것이었다.다만 그 이후로 고은서는 드럼을 치지 않았기에 박지연도 더는 눈요기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동영상을 보자마자, 박지연은 신이 나서 고은서에게 연락했다.“지금 몇 년이 지났는데 너의 드럼 실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 같아.”박지연이 말했다.“혹시 클럽에서 매일 공연할 생각 없어? 그럼 내가 매일매일 가서 응원해 줄게!”고은서는 공기에 대고
원래는 자신의 늠름한 얼굴을 감상하려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부스스한 머리, 얼굴은 깨끗한 편이지만, 눈가에는 메이크업 흔적이 조금 남아있는 모습을 보았다.고은서는 어젯밤 차 안에서 바로 잠들었기에 곽승재가 자신을 안고 방까지 올라왔는데 화장 지우는 법을 모르니까 수건으로 얼굴만 대충 닦아준 모양이었다.그렇다 한들 고은서는 여전히 이 상황이 믿겨 지지 않았다.‘어젯밤, 곽승재가 클럽에 찾아왔을 때 기분이 분명 안 좋아 보였는데, 정색해서 날 책문하지 않았을뿐더러 이렇게 인내심을 가지고 나의 얼굴을 닦아주었다고?’근데 고은서가 감격해야 할 것도 없었다.고은서도 술에 취한 곽승재를 보살피느라 그의 얼굴이랑 몸을 닦아주고 옷도 갈아 입힌 적이 있었다...옷!고은서는 갑자기 자신이 지금 잠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곽승재가 옷도 갈아 입혀준 거야?!’고은서는 화가 나서 밖으로 나가 곽승재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자신의 목 뒤에 수상쩍은 빨간 점이 있는 걸 발견했다.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들어 올려 자세히 살펴보았다.빨간 점은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여서 머리카락에 가려졌을 때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렇게 불빛에 비치니 아주 눈에 띄었다.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리며 빨간 점을 만져 보았다. 통증도 없고 가려움도 없었다.그녀는 쪼가리를 받아본 적이 없지만, 예전에 룸메이트가 남자친구에게 받은 쪼가리를 본 적이 있었다.진한 빨간 점은 컨실러로 커버되지 않으며 누르면 약간의 통증도 느껴진다고 했었다.고은서의 빨간 점은 쪼가리가 아닌 게 분명했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벌레가 물었나 보네. 곽승재는 내가 취했을 때 슬그머니 내 몸에 손댈 정도로 비열하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잠옷은...’고은서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이미숙에게 물었다.“아줌마가 어젯밤에 제 옷을 갈아 입혀준 건가요?”이미숙은 상을 치우면서 대답했다.“네. 사모님이 어제 취해서 깨지 못하니까 도련님이 저보고 잠옷으로 갈아 입히
“아니요, 은서 정말 능력 있어요.”“할아버지.”곽승재는 더 이상 듣지 않고 고준석을 부르며 고국성 부부에게 인사를 건넸다.“삼촌, 생신 축하합니다. 제가 준비한 작은 선물인데 받아 ㅜ세요.”곽승재는 고국성에게 자수정 상자를 건넸다.단은숙이 고국성을 대신해 선물을 받아 열어보았고 그것은 고국성이 좋아하는 고급 담배통이었다.고국성도 선물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고맙다. 승재야. 마음 많이 써주었구나.”“삼촌이 좋아하실 것 같아 지난번 경매에서 보고 괜찮은 것 같아 바로 사 왔어요.”곽승재도 담담히 웃으며 답했다.“은서야, 너는 무슨 선물 준비했어?”곽승재가 자연스럽게 고은서에게 물었다.고은서는 그를 째려보았다.‘일부러 이러는 거야!’그녀가 준비한 선물도 담배통이었는데 백화점에서 산 것이어서 곽승재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곽승재가 먼저 선수를 친 상황에서 그녀는 준비한 선물을 자신 있게 꺼내 보일 수 없었다.“저희가 준비한 선물은 너무 커서 들고 다니기 어려워요.”민시후가 고은서의 기분을 눈치채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었다.민시후가 눈빛을 보내자 운전기사가 선물을 들고 들어왔다.고급 영양제뿐만 아니라 술, 담배 그리고 유명한 화가의 그림도 들어 있었다.고국성은 예술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우아함을 자랑하고 싶어 했고 특히 이런 고급스럽고 보기 드문 그림을 좋아했다.“시후, 안목이 좋네. 이 그림 정말 마음에 들어.”고국성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호칭마저 바꾸며 기쁜 마음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고국성이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좋은 선물이구나. 이제 외삼촌한테 효도할 줄도 아네.”고은서는 민시후의 도움에 감사했다.하지만 곽승재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그는 고은서가 이런 자리에 민시후를 데려올 줄도 몰랐고 민시후가 이렇게까지 철저히 준비할 줄도 몰랐다.선물 경쟁에서 민시후는 완벽히 승리한 셈이었다.민시후는 고국성에게 그림을 선물했을 뿐만 아니라 단은숙에게 피부에 좋은 영양제를 고준석에게는 고급 옥돌
갑작스러운 힘에 고은서는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그녀는 갑작스럽게 넓은 품에 안기게 되었다.익숙한 향기가 풍겨오자 고개를 돌린 고은서는 곽승재임을 확인했다.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린 것인지 곽승재는 어두운 표정을 한 채 싸늘한 눈빛으로 민시후를 응시하고 있었다.“누구 허락받고 만지는 거야?”곽승재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민시후도 싸늘한 표정으로 답했다.“무슨 상관인데? 너는 왜 고은서를 당기는데.”그 상황을 본 고은서는 곽승재의 품에서 벗어나 민시후 옆으로 서서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여기 있어?”고은서의 물음에 곽승재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세심하게 꾸민 고은서는 평소보다 더 빛났다.심플하면서도 정교한 디자인에 몸에 맞는 흰색 드레스는 그녀를 완벽하게 감쌌다.드레스는 무릎까지 내려왔고 그녀의 가냘프고 흰 작은 다리가 드러났다. 그런 고은서의 모습은 마치 요정 같았다.흰색 정장을 입은 민시후와 함께 서 있으니 두 사람은 잘 어울리며 보기 좋았다.하지만 곽승재는 가슴 한편에서 묘한 답답함과 불편함을 느꼈다.“삼촌 생일이라 초대받아서 왔는데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어?”곽승재가 차갑게 말하자 고은서는 콧방귀를 뀌었다.작년에 아직 이혼하지 않았을 때 그녀는 곽승재와 함께 외삼촌 생일 파티에 참석하려 했으나 곽승재는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었다.그런데 이혼하고 나서 곽승재는 이제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되는 곳에 와있었다.정말 한심하고 우스꽝스러웠다.“고은서, 왔으면서 왜 들어오지 않고 여기 서 있어?”그때 고은혜가 연회장에서 나와 고은서에게 인사를 건넸다.동시에 고은혜는 민시후와 곽승재를 발견했다.민시후는 흰색 정장을 입고 굉장히 잘생기고 매혹적인 모습이었고 곽승재는 전형적인 검은색 고급 정장을 입고 차가우면서도 잘 생겼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고은혜는 두 사람을 보고 상황을 짐작하고는 조심스럽게 고은서에게 물었다.“둘이 어떻게 같이 온 거야? 싸우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네.”고은서는 고은혜를 흘깃 쳐다
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고은서, 함정 파려고 하지 마. 내가 사기꾼도 아니고 어떻게 널 가르쳐?”두 사람이 말다툼하는 동안 한 직원이 부러워하며 말했다.“대표님, 여자 친구분과 사이가 정말 좋아 보이네요.”“저는...”“말 잘하네. 전부 다 살게.”기분 좋아진 민시후가 큰손다운 기질을 발휘했다. 그 말에 직원들은 하나같이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은서는 해명하려 했지만 끼어들 수 없어서 그냥 포기했다.민시후는 그런 고은서를 보며 더욱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옷을 갈아입고 액세서리와 메이크업을 하자 두세 시간이 지나갔다.고은서는 거울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전문적인 손길이 그녀의 모든 장점을 부각해 놓았다.민시후는 흰색 정장을 입고 머리를 뒤로 빗어 올린 채 나타났다.다른 사람이 입는다면 소화하기 힘든 스타일을 민시후가 입으니 타고난 고급스러움과 매혹적인 느낌을 발산했다.두 사람은 출발 시간이 되어갈 즘 준비를 끝마쳤다.민시후의 비서는 여러 개의 선물을 들고 그들을 따라 주차장으로 향했다.고국성의 생일 파티는 오성급 호텔에서 열릴 예정이었다.운전기사가 호텔 정문에 차를 세우자 곧 호텔 직원들이 다가와서 차 문을 열어줬다.차에서 내린 민시후가 고은서를 향해 팔을 내밀며 팔짱을 끼라는 신호를 보냈다.비록 파티에 걸맞은 행동일 뿐이지만 오늘 파티는 고씨 집안 모든 사람과 친분이 있는 친구들과 고객들이 모이는 자리였다.고은서가 민시후와 팔짱을 끼고 들어가면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될 것은 뻔했다.“민시후, 오늘 외삼촌 생일이니 그분이 주인공이야. 우리가 주목받는 건 좀 아닌 것 같아.”고은서는 어제 박지연이 흥분하며 했던 말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리고 말조심해 줘.”자신이 한 말들이 민시후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이라는 걸 안 고은서가 덧붙였다.“오해하지 마. 네가 예의를 모른다고 강조하는 게 아니라 그저 어색한 상황이 되는 걸 원하지 않아서 그래. 너를 향한 내 마음에 확신이 생긴다면
고은서가 담담하게 말했다.“설령 곽승재가 직접 이 프로젝트를 담당한다고 해도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야. 난 이미 아무 감정도 없거든.”민시후는 여전히 불안해하며 말했다.“우리 다른 프로젝트로 바꾸자. 신재생에너지 쪽도 괜찮아 보이잖아.”“신재생에너지도 좋지. 하지만 왜 제인 제약을 포기해야 해?”고은서가 말을 이었다.“네 말대로 곽승재가 나 때문에 이 프로젝트에 끼어든 거라면 내가 신재생에너지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끼어들지 않을까? 그럼 우린 매번 다 된 프로젝트를 포기하게?”민시후가 태연하게 답했다.“너를 양보하는 것만 아니라면 프로젝트는 상관없어.”고은서가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세상에 소문난 난봉꾼인 민 도련님이 이런 순진한 연애 바보였다니.”민시후가 고은서에게 다가가 중점만 잡아내며 말했다.“고은서, 네 말은 우리 사이가 연인 관계라는 거지?”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장난하지 말고 인제 제약 프로젝트는 포기할 수 없어.”고은서가 결정을 내리며 말했다.“송민아한테 계약서와 계획서를 수정하게 하고 내일 투자부 직원들을 모아 회의를 열 거야.”판주 투자은행과 공동투자를 하더라도 제인 제약은 매우 좋은 프로젝트였다. 고은서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민시후는 고은서를 바라보며 다소 아쉬운 듯 말했다.“그렇다면 내일 회의는 내가 주재할게. 나도 직접 참여해야겠어.”고은서가 어이없다는 듯 답했다.“민시후, 최근에 다쳐서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을 텐데 이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그건 안 돼. 곽승재는 교활한 사람이야. 방심하고 있을 수는 없지.”민시후는 단호히 거절했다.그 말을 들은 고은서는 웃기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좋아. 네 말대로 하자. 그럼 난 먼저 사무실로 돌아갈게.”고은서가 돌아가려고 하자 민시후가 그녀를 불러세웠다.“잠깐만.”“왜?”고은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이따 네 외삼촌 생일 파티에 가야 하잖아. 옷 좀 골라줘.”민시후는 말을 마치고 전화를 걸
“비록 이혼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지연이뿐이야.”온승준이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유혜린도 자존심이 있었기에 온승준에게 여러 차례 거절당하자 입을 틀어막으며 자리를 떴다.온승준은 그녀를 쫓지도 않고 신경 쓰지도 않은 채 피곤한 모습으로 복도에 앉았다....고은서는 박지연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이후의 상황을 물었다.육현석이 박지연에게 고백했다는 말을 듣고 고은서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내가 뭐랬어! 너를 좋아하는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요즘 아무것도 안 하고 일에만 집중했을까?”박지연은 육현석이 했던 말을 고은서에게 전했다.고은서도 육현석의 행동에 감동하며 말했다.“정말 대단하다. 모든 걸 다 생각해 놓았잖아. 지연아, 너도 받아들여. 비록 곽승재의 친구이긴 하지만 곽승재보다 훨씬 믿음직스러워. 나는 두 사람이 잘되길 응원해.”박지연이 소파에 누우며 답했다.“나는 육현석과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어. 오늘 그 사람 말 듣고 정말 놀랐어. 바로 결정 내리기는 힘들 것 같아.”“왜? 아직 온 선생님께 미련이라도 남았어?”고은서가 묻자 박지연은 고개를 저으며 오늘 온승준과 있었던 일들도 고은서에게 얘기해 주었다.“생각해 보니 참 슬프더라. 결혼해서 2년 넘게 살았는데 내 억울함을 전혀 몰랐다는 게 말이야. 애먼 사람한테 괜한 기대를 했어.”“지연아, 지금까지 너무 힘들고 고된 시간을 보냈잖아. 이제 놓아버리고 새 삶을 맞이해.”고은서가 안타까워하며 격려했다.박지연도 미소 지으며 말했다.“응. 노력할게.”“맞다. 외삼촌 선물은 뭐 샀어? 내일 민시후랑 같이 집에 갈 거라며? 어떻게 소개하려고?”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묻자 고은서가 답했다.“친구라고 평범하게 소개하려고.”“집안 모임에 데려가는데 친구라도 해도 평범한 친구는 아니지 않아?”박지연이 갑자기 기대에 찬 듯 말했다.“민시후가 이 기회에 또 고백하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시간 좀 달라고 했으니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을 거야.”...다음날은
조수연의 불쾌한 표정을 마주하고도 온승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혜린이 적절한 타이밍에 작별을 고하며 말했다.“어머님, 시간이 꽤 늦었네요.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내일은 굳이 오지 않아도 돼. 어머니를 위해 간병인 구할 거야.”온승준이 바로 말했다.유혜린은 잠시 멈칫했지만 아무 말 없이 가방을 들고 병실을 나섰다.조수연은 몹시 불쾌해하며 말했다.“승준아, 너 도대체 뭐 하는 거니! 혜린이 또 뭘 잘못했다고 그래!”온승준이 싸늘하게 답했다.“예전에 지연이가 밤낮으로 어머니를 돌봤을 때는 한 번도 고맙다는 말 하지 않으셨잖아요.”“뭘 고마워해야 해? 아픈 시어머니를 돌보는 건 당연한 일 아니야?”조수연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손에 든 건 뭐야? 어디서 났어?”말을 마친 조수연은 온승준 손에 들려있는 선물 상자를 보고 불현듯 깨달았다.“박지연이 다녀갔니? 뭐야, 겨우 볼품없는 물건 가져와 놓고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거야? 얼굴 한 번 비추지 않고 가버린 건 양심에 찔려서 그런 거 아니야?”“제가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요.”“왜?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너 정말 그 애를 지나치게 감싸고 도는구나.”조수연이 화를 냈다.온승준은 조수연과 다투지 않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아버지, 어머니. 오늘 밤 일은 이대로 끝낼 거예요. 저는 누구의 책임도 묻지 않을 거고 경찰서에 가서 사건을 철회할 생각이에요.”온승준은 두 사람에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그리고 다시는 집 비밀번호 타인에게 알려주는 일 없도록 하세요. 집 비밀번호 교체하겠습니다. 제 허락 없이는 누구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을 겁니다.”“너... 너... 지금 내가 혜린이에게 비밀번호 알려준 거에 불만을 품고 이러는 거야?”화가 난 조수연은 상처가 아파졌다.“박지연 때문에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술을 마신 너를 혜린이가 착하게도 집에 데려다준 건데 비밀번호도 알려주지 않으면 집은 어떻게 들어가? 그리고 혜린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던 박지연이 말했다.“더 할 말 없으면 먼저 가볼게.”“아직 할 말 있어!”온승준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그날 내가 술에 취했던 날 밤, 차 안에서 잠들어 버렸어. 유 닥터가 운전기사에게 날 부축해 집으로 올려보내라고 했어. 나는 유 닥터가 돌아가지 않은 줄도 몰랐어. 그저 침대 옆에 앉아 밤을 보냈을 뿐 우린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온승준이 드물게 상황을 설명했다.박지연은 지금 이 상황이 우스웠다.“왜 나한테 설명하는 거야? 우리 지금 아무 사이도 아니야.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나랑 무슨 상관이야?”온승준은 박지연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끝까지 하고 싶던 말을 이어갔다.“지연아, 네가 우리 관계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혹시라도 널 찾으러 가면 폐를 끼칠까 봐 요즘 너를 찾지 않았어. 하지만 이 일은 꼭 말해주고 싶었어.”온승준은 평소 잘 하지 않던 긴말을 이어가며 다소 급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려 애쓰는 것이 눈에 보였다.박지연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온승준, 이미 이혼한 사이에 무슨 해명이야? 이혼 하기 전에는 이런 얘기 하지도 않았잖아. 그때는 내가 오해할지 걱정도 하지 않았지?”온승준이 솔직히 답했다.“내가 그런 부분에 소홀했어. 난 우리가 꽤 잘 지낸다고 생각했어. 네가 그렇게 많은 걸 참고 있었는지는 몰랐어.”“몰랐다고?”박지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따지듯 말했다.“당신 어머니가 유혜린을 집에 부르고 날 불러 요리시켰던 날 내가 손을 데었을 때 당신은 날 병원에 데려다주지도 않고 내 상태를 물어보지도 않았어. 그런데 우리 사이가 원만했다고? 내가 정말 서운하지 않았을 거로 생각한 거야? 온승준, 모든 걸 둔감했던 탓이라고 돌리지 마. 넌 내가 알아서 나을 거로 생각했겠지. 그래서 나에게 시간 쓰는 걸 낭비라고 여긴 거야.”온승준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지연아, 그런 게 아니라 그때 내가 병원에 같이 가겠다고 고집
박지연과 육현석은 병원에서 먼저 의사로부터 조수연의 상태를 확인했다.조수연은 이마에 타박상을 입었고 팔꿈치와 몸 여러 곳에 찰과상이 있었다. 가장 심각한 것은 허리와 다리로 다양한 정도의 골절을 입어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야 했다.다행히 에스컬레이터 높이가 높지 않았고 조수연이 머리부터 떨어지지 않아 내상을 입지 않았다.상태를 확인한 후 병실로 병문안 가려던 박지연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온승준을 발견했다.캐주얼한 옷을 입은 온승준은 큰 키에 곧은 체형을 가지고 있었다. 늘 무표정하던 잘생긴 얼굴에는 약간의 피곤함마저 느껴졌다.육현석이 먼저 앞으로 나서며 부하가 준비한 선물 상자를 온승준에게 건넸다.“온승준 씨, 오늘 밤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어머님의 치료비와 관련 비용은 백화점에서 책임지겠습니다. 혹시 어머님께서 다른 요구가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세요.”“너무 무리한 요구는 하지 말아야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니 백화점 측에서도 즉각 대처하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이야.”박지연이 덧붙였다.조수연은 자신을 귀부인으로 여기는 사람이어서 돈을 뜯어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화풀이 삼아 끝까지 물고 늘어질 가능성은 있었다.박지연의 말을 듣고도 온승준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육현석의 선물도 받지 않고 입을 열었다.“육현석 씨, 경찰을 통해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오늘 밤은 저희 어머니가 잘못한 일이니 여러분과는 무관합니다. 이 얘기를 하려고 나온 거예요. 그러니 그 어떤 배상도 책임도 필요 없습니다.”“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희가 져야 할 책임은 반드시 지겠습니다. 경찰 쪽은 제 변호사가 처리 중이고 이후 문제도 변호사를 통해 협의하도록 하시죠. 저희는 여사님을 방문하여 직접 사과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온승준이 완곡히 거절했다.“괜찮습니다. 어머니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깨어나시면 다녀가셨다고 전해 드리겠습니다.”온승준의 말을 듣고 박지연은 조수연이 사실 잠들지 않았음을 바로 알아차렸다.‘오
그러나 박지연은 실패했다.그 후로 박지연은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두려워졌다.하지만 지금 육현석은 그녀의 옆에 앉아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었다.그는 그녀의 모든 걱정을 고려하고 해결책까지 내놓았다.심지어 그녀가 성공한 남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하기까지 했다.이런 진심 어린 마음에 어떤 여자가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박지연은 드물게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육현석, 나는 네가 이렇게까지 좋아해 줄 만한 사람이 아니야. 네가 실망할까 봐 두려워.”육현석이 낮게 웃으며 답했다.“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널 좋아한 건 내 선택이야. 넌 그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 없고 다른 사람이랑 널 비교할 필요도 없어. 지연아, 너는 이미 그 자체로도 훌륭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야.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한 번의 실패한 결혼 때문에 너 자신을 의심하지 마.”육현석의 말에 박지연은 다시 마음이 따뜻해졌다.그녀는 지금껏 자신을 이렇게 감동하게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육현석이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아니면 여자를 많이 만나본 사람답게 능숙한 말솜씨로 현혹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박지연은 그저 그에게 감사했다.박지연도 진심을 담아 입을 열었다.“육현석, 고마워. 네 말처럼 나는 방금 실패한 결혼에서 벗어난 상태라 이렇게 빨리 새로운 감정을 시작할 용기가 없어. 네가 한 말들은 정말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나 때문에 너를 바꾸지는 마. 사업하기 싫으면 굳이 억지로 하지 않아도 돼. 성공적인 사업가라는 이미지가 남자의 매력을 더해주는 건 맞지만 내가 배우자를 선택하는 기준이 단지 그것만은 아니야. 네가 무리하면 오히려 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육현석이 웃으며 답했다.“사실 꼭 너 때문에 변하려는 건 아니야. 우리 아버지도 이제 곧 환갑이잖아. 이미 오래전부터 내가 가업을 물려받길 바라셨어. 그동안은 좀 더 놀고 싶어서 미뤘던 건데 이제는 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