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이 단순한 우연이라면 이보다 더 완벽한 우연은 없을 것이다....곽승재가 침실에 들어섰을 때, 고은서는 이미 침대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침대 옆 탁자에는 반쯤 비워진 해장국이 놓여 있었고 베개 옆에는 그녀의 핸드폰이 놓여 있었다.고은서의 얼굴은 술에 취해 붉게 물들어 있었고 불안한 듯 눈썹을 잔뜩 찡그린 채 깊이 잠들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숨결에서는 희미한 술 냄새가 났다.곽승재는 고은서의 이런 모습과 오늘 밤 그녀의 행동을 보자 가슴 속에 쌓였던 분노가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치밀어 올랐다.그는 고은서를 침대에서 강하게 끌어 올리며 말했다.“일어나. 자는 척하지 마!”고은서는 흐릿하게 눈을 뜨고 술에 취해 눈이 붉게 물든 채로 곽승재를 바라보았다.커다란 눈동자로 그의 차가운 얼굴을 한참 동안 멍하니 쳐다보던 고은서는 갑자기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흑, 왜 꿈속에서도 이렇게 나한테 못되게 굴어. 넌 진짜 나쁜 놈이야, 곽승재. 넌 대형 쓰레기야...”그렇게 말하고는 고은서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곽승재는 할 말을 잃었다.그는 고은서를 들어올려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말했다.“술에 취한 척하는 거지, 그렇지?”‘짧은 시간 안에 이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이렇게 취할 리가 없어!’하지만 지금의 고은서는 고개를 든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눈물을 머리카락 속으로 스며들었고 그녀는 코를 훌쩍이며 여전히 흐릿한 눈빛을 유지하고 있었다.곽승재는 잠시 동안 그녀가 진짜 취했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얼마나 마셨어?”물어보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입에서 나온 건 중요하지 않은 이 질문이었다.고은서는 눈을 깜빡이며 억울하다는 듯 하얀 손바닥을 펴 보이며 말했다.“네 병. 아, 네 개는 이렇게...”그녀는 중얼거리며 엄지손가락을 접고는 다시 손가락을 똑바로 세우며 자랑스러워했다.“이제 됐어!”“...”곽승재는 처음으로
곽승재의 얼굴이 순간 검게 변했다.“욕심도 크네. 열댓 명이나 찾겠다니!”하지만 고은서는 그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듯 다시 베개를 끌어안고 ‘흑흑’ 울기 시작했다.“까먹었네. 난 애초에 그 자식 돈이 필요 없잖아. 곽승재는 진짜 짠돌이야. 나한테 200억도 안 주면서...”곽승재는 더 이상 고은서와 말싸움하는 것을 포기했다.그는 화장실로 들어가 아무 수건이나 집어 들고 그다지 부드럽지 않은 손길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그런 다음 고은서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침대 옆 탁자에 남아있던 반 컵의 해장국을 그녀의 입술 근처에 대며 명령했다.“마셔.”그러자 고은서는 갑자기 순종적이 되어 마치 작은 고양이처럼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고개를 숙여 한 모금 마셨다.하지만 그녀는 한 모금을 삼키자마자 갑자기 기침하며 곽승재의 옷에 해장국을 흘렸다.“고은서.”곽승재는 화를 내며 말했다.“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그의 꾸짖음에 고은서는 붉어진 눈을 뜨고 다시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나 약 안 먹어. 나 밀크티 마시고 싶어... 그 밀크티 내가 한 시간 넘게 줄 서서 산 건데 왜 쓰레기통에 버려? 그거 다시 사줘!”보통 큰일에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곽승재였지만 지금은 고은서의 말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안 사준다 이거지? 좋아. 그럼 네 몸으로 갚아!”곽승재가 대답하지 않자 고은서는 다시 기운을 차리고 그의 옷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그러자 곽승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잘 봐. 내가 누군지 알아?”고은서는 눈물을 머금은 큰 눈을 깜박이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다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너 정말 잘생겼다. 여자친구 있어? 나 어때?”곽승재는 이를 꽉 깨물었다.“난 네가 남편이 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쉿. 너한테 비밀 하나 알려줄게.”고은서는 작은 여우처럼 그의 귀에 다가와 속삭였다.“내 남편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곧 이혼할 거야.”고은서는 말을 마치고 나서
‘곽승재, 너 정말 웃기는 사람이네. 백유미를 안고 떠났으면서도 거기서 잘 있지 않고 다시 이 침대에 와 자다니...’ “곽승재, 당신 이러고도 안 피곤해?”고은서가 물었다.그러자 곽승재는 고개를 들며 더 깊게 찡그린 미간을 보였다.“아침부터 싸우려고 그러는 거야?”고은서는 그를 무시한 채 침대에서 내려왔다.“오늘부터 이 방에서 자지 마. 나도 더 이상 정상적인 부부처럼 연기하고 싶지 않아.”“내가 여기서 자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아?”곽승재도 침대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어젯밤에 내 옷을 더럽힌 게 누구였지? 또 나한테 몸으로 갚으라고 했던 사람이 누구였더라?”“안 사준다 이거지? 좋아. 그럼 네 몸으로 갚아!”어젯밤의 그 말이 떠오르자 고은서는 얼굴이 뜨거워졌다.‘최근에 유치한 영상을 너무 많이 봤나? 그런 멍청하고 어리석은 말을 하다니...’“나 술 많이 마셔서 아무것도 기억 안 나.”고은서는 최대한 침착한 척하며 말했다.“당신이 밤에 날 깨우지만 않았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내가 왜 널 깨웠는지 정말 몰라?”곽승재는 차갑게 물었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어젯밤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소식들을 보고 나서 자신에게 따지려던 걸 알고 있었다.“결혼 문제를 일부러 언론에 흘린 것도 네가 한 짓이겠지? 명운에서 돈 벌려고 네가 아주 못하는 짓이 없구나?”곽승재는 계속해서 비꼬았다.비록 그녀가 직접 소문을 퍼뜨린 건 아니지만 그 소문에 협력한 것은 사실이니 억울할 이유도 없었다.그래서 고은서를 곽승재를 조롱하듯 말했다.“말투를 보니 기분이 별로인 것 같은데? 뭐야, 이혼이 임박했는데 갑자기 떠나기 아쉬워진 거야?”그러자 곽승재도 그녀를 냉랭하게 흘겨보았다.“네가 한 말을 너 스스로 믿고 있는 건 아니지? 난 네가 GS 그룹 사모님이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이런 식으로 크게 떠들어대는 게 거슬릴 뿐이야.”이렇게 말하고는 곽승재는 냉정한 표정으로 상의를 걸치지 않은 채 욕실로 들어갔다.그가 이런 대답을 할 거란 걸
‘내가 무슨 손해를 본다는 거지?’다음 순간, 이미숙의 말과 표정에서 고은서는 무슨 일이 오해된 것인지 깨달았다.아마도 어젯밤에 자신이 울고 소란을 피운 탓에 이미숙이 뭔가 잘못 이해한 것 같았다.“아줌마, 저 그런 거 아니에요.”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로 고은서가 부인했다.“어젯밤에 술에 취해서 조금 소란을 피웠나 봐요.”하지만 이미숙은 그녀가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사모님, 이제 대표님과 함께 지내는 게 부부 사이에 좋은 영향을 줄 거예요.”“거기 서서 뭐 하고 있어? 어서 와서 밥 먹어.”고은서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해하던 찰나, 곽승재가 무심하게 말했다.“맞아요, 사모님. 빨리 아침 드세요. 저는 이제 주방으로 갈게요.”이미숙이 떠나자마자 고은서는 곽승재를 노려보며 말했다.“왜 한마디도 해명하지 않은 거야?”그러자 곽승재가 그녀를 흘겨보았다.“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니까. 내가 무슨 해명을 하겠어?”‘이 개자식, 어젯밤의 취중 진담으로 나를 공격하다니.’어젯밤에 자신이 곽승재의 귀에 대고 한 말을 떠올리며, 고은서는 땅속으로라도 파고들어 가고 싶을 만큼 부끄러워졌다.‘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때 그렇게 큰 용기를 낸 거지? 나도 날 모르겠네.’“너 술만 마시면 남자들한테 치근대는 거야?”알 수 없는 곽승재의 말투에 고은서는 얼굴이 붉어지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난 아무것도 몰라, 기억도 안 나.”곽승재는 냉소를 지으며 무언가 더 말하려 했으나, 그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하더니 곧 그는 잠금화면을 밀어 열었다.상대방의 말을 듣고 곽승재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알았어. 좀 있다가 병원에 갈게.”곽승재가 병원에 누구를 보러 가는지는 고은서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갑자기 아침 식사를 할 마음이 사라진 그녀는 가방을 들고 나가려고 했다.“아침도 안 먹고 어디 가려고?”곽승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당신이 신장 문제로 병원 가기 싫어할까 봐 남성 클리닉에 예약해주러 가는 거야.”
‘며칠 전만 해도 강제로 초대받아 내가 대신해 방패막이가 되어줬는데... 뭐가 그렇게 오랜만이라는 거야?’고은서는 민시후가 여기 있는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도아름이 웃으며 그녀를 불렀다.“은서 씨, 왔구나. 여기 와서 앉아요.”고은서는 도아름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민 대표님께서 여기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그러자 민시후는 다리를 꼬며 느긋하게 웃었다.“조은서 씨가 명운의 명성을 회복시킬 수 있다고 나와 내기를 했잖아요. 내가 투자하기로 약속했으니 이제 약속을 지키러 왔죠.”도아름은 고은서에게 설명을 덧붙였다.“은서 씨가 나한테 말했던 조건대로 민 대표님께서 명운에 투자할 거예요.”민시후의 속도가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명운의 인기가 겨우 어젯밤에 올라갔을 뿐인데 그는 주저하지 않고 투자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다. 게다가 기회를 악용해 지분을 더 높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민 대표님, 정말 괜찮으세요?”고은서는 다시 한번 물었다.“지금은 명운이 조금 반등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에요.”민시후는 그녀를 껄끄럽게 쳐다보며 말했다.“조은서 씨는 자기 자신이나 명운에 대해 자신이 없나요?”그러자 고은서는 단호하게 대답했다.“저는 제 자신과 명운 모두에 자신이 있어요!”이 말에 민시후도 씩 미소를 지었다.“그렇다면 내가 뭘 더 고민할 게 있겠습니까?”지금 상황으로 봤을 때, 명운이 이렇게 빨리 미래 투자은행의 투자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회사의 성장과 상장에 매우 유리한 일이다.고은서는 도아름에게 물었다.“언니, 언니 생각은 어때요?”민시후의 투자를 받아들인다면 명운이 더 잘 발전하더라도 다른 투자은행을 선택할 기회를 잃게 된다.도아름은 늘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었다.“저는 미래 투자은행의 투자를 받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지금 민 대표님께서 이렇게 투자의사를 밝혀주시는 거... 전 당연히 고맙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도아름이 동의했으니 고은서도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그들은 계약과 관련
이 말을 듣자 백유미의 눈에서 더욱 눈물이 쏟아졌다.“승재야, 내가 그때 찍은 사진 때문에 네가 아직도 마음이 불편해한다는 거 알아.”“인정할게, 그때 사진을 찍을 때 나도 개인적인 감정이 있었어. 네가 전에 내 면 요리가 어디보다 맛있다고 말한 적이 있어서 그걸 찍어서 친구들에게 공유하고 싶었어.”“하지만 네가 최근 나와 거리를 두려는 걸 느꼈기 때문에 그 사진을 올리면 네가 불편해할까 봐 바로 삭제했어. 근데 은서 씨가 그걸 그렇게 빨리 보고 저장할 줄은 몰랐어.”백유미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승재야, 은서 씨의 성격은 나도 잘 알아. 은서 씨가 나를 오해하는 건 상관없지만 너에게 오해받는 건 싫어... 난 어렸을 때의 우리의 정을 지키고 싶어.”백유미의 창백한 얼굴과 슬프게 해명하는 모습을 보며 곽승재는 조금 마음이 움직였다.곧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 난 너를 오해한 게 아니니까. 어제 은서가 그 일을 언급했을 때 상황을 잘 몰라서 너에게 물어본 것뿐이야.”“응.”백유미는 휴지를 꺼내 눈물을 닦으며 조금 쑥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날 웃기게 했네. 나도 평소엔 이렇게 감정적이지 않은데 아마 머리를 다쳐서 그런가 봐.”“대표님...”그때 주민기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더니 무언가 보고하려다 백유미가 눈물을 닦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말을 멈칫했다.백유미는 차분하게 말했다.“괜찮아요. 하실 말씀 하세요.”보고할 내용이 판주 투자은행 관련이었기 때문에 주민기는 백유미 앞에서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는 곽승재에게 보고했다.“방금 소식을 들었는데 미래 투자은행이 명운 기업에 계속 투자하기로 했다고 합니다.”이 말을 듣자 곽승재는 즉시 눈썹을 찌푸렸다.“언제 일어난 일인가요?”“오늘 아침 민시후가 직접 명운 기업에 가서 도 대표님과 초보적인 합의를 이뤘다고 들었습니다.”백유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민시후가 왜 갑자기 명운에 투자하는 거죠? 무슨 일이 있었나요?”어젯밤 그녀는
민시후는 느긋하게 차를 들고 향을 맡은 후 가볍게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내가 은서 씨를 과소평가했었네요. 정말 대단하십니다.”민시후가 어젯밤 그녀가 술에 취한 척하면서 명운을 화젯거리로 만든 일을 말하는 걸 알고 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 도련님과 같은 명문가 자제들이 남을 과소평가하는 건 흔한 일이니까요.”“말투가 마치 온갖 고난을 겪은 신데렐라 같네요.”민시후는 혀를 차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주로 은서 씨가 너무 꽃병 같아서... 아름다움이 은서 씨의 머리를 망칠까 봐 걱정됐거든요.”고은서는 할 말이 없었다.“도련님, 칭찬 방식이 참 독특하시네요.”“은서 씨에게 특별할 가치가 있으니까 특별하게 칭찬한 거예요.”민시후는 고은서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못 본 척하며 흥미로운 듯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물었다.“어젯밤 그 일, 진짜로 곽승재에게 버림받은 거예요? 아니면 그 사람을 고발하려고 그런 겁니까?”민시후가 구경거리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고은서는 그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고 싶지 않았다.“미안하지만 사적인 일이라 말할 수 없네요.”그러자 민시후는 화를 내지 않고 느긋하게 몸을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판주를 무너뜨리겠다고 했던 은서 씨의 결심을 이제 믿게 되었어요. 앞으로 협력이 잘 되길 바라요.” 이전에 ‘미리 협력의 성공을 기원한다’라고 말한 것과 달리 이제는 협력을 확정 짓는 말이었다.고은서는 솔직하게 말했다. 자신이 미래 투자은행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 200억을 마련할 수 없다고 말이다.하지만 이에 대해 민시후는 전혀 놀라지 않는 듯했다.“그럼 먼저 빚으로 두고 나중에 은서 씨가 성사시킨 프로젝트와 배당금에서 내요.”“그럼 다음 달에 입사할게요.”몇 주 뒤면 할머니의 생신이기도 하고, 그 외에도 이혼 문제를 처리해야 하며 명운의 계약 서명 후에도 처리할 일이 많으니 다음 달에 입사하는 것이 적당했다.“좋아요.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을게요.”음식이 상에 차려진 후, 고은서
고은서는 몇 번이고 메시지를 확인한 후에야 그 메시지가 곽승재가 보낸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자기를 조롱했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먼저 물어봐?’곽승재가 이렇게 스스로 찾아와서 맞닥뜨리겠다고 하니 고은서도 주저하지 않았다.[의사 선생님께서 당신 상태가 너무 심각하다고 하더라. 먼저 뇌과를 가보는 게 좋겠대.]곧바로 곽승재가 메시지를 입력 중이라는 표시가 뜨긴 했지만 한참 동안 답장이 오지 않았다.그리고 때마침 주인혁이 바비큐 장소의 주소를 보내왔기에 고은서는 핸드폰을 꺼두었다.도아름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고은서는 차를 몰고 한 식물원에 도착했다.이미 도착해 있던 주인혁과 그의 일행은 잔디 위에 카펫을 깔고 간단한 테이블과 의자를 배치해 놓았다. 그 위에는 각종 음료수와 과자가 가득했다.근처에는 바비큐 그릴이 설치되어 있었고 누군가가 불을 피우느라 분주했다.그들은 모두 젊고 활기차며 이런 번거로운 일들을 하면서도 즐거워하며 웃음꽃을 피웠다.“여기예요!”주인혁이 그녀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그가 웃을 때 드러나는 하얀 치아와 소년다운 밝은 모습이 고은서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었다. 자신도 몇 년은 젊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바비큐를 준비하던 몇몇 젊은이들도 고은서에게 시선을 돌렸다.“설마 인혁이가 자주 말하는 선량한 마음씨를 가진 그 미모의 여성분이세요?”“진짜 예쁘시네요. 제가 본 많은 연예인들보다도 더 예뻐요!”“당연하지. 우리 인혁이가 매일 얘기하는 사람인데 그 정도는 돼야지!”“그만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주인혁이 급히 나서며 막으려 했다.“얘네들 말은 믿지 마세요. 그냥 장난치고 있는 거니까.”당황한 주인혁이 해명하는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일부러 머리를 살짝 넘기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전 원래 미모와 선량한 마음을 겸비한 작은 요정인데요? 이분들 말이 틀린 게 아니에요!”고은서의 농담 섞인 자기 자랑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고 주인혁은 민
옆에서 손을 거들던 장정들도 그 모습에 자극이라도 받은 듯 백유미를 희롱하는 행렬에 끼어들었다.이내 백유미의 입에 물려있던 수건이 떨어졌지만 그녀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다른 것으로 입이 가득 차 버렸다.남자들의 음탕한 신음과 여자의 흐느낌 소리가 순식간에 창고를 채웠다.모든 일든 불과 일이 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고은서는 구석에 숨어서 원지훈이 차버린 쇠막대기와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떨리는 심장은 평온을 되찾을 수 없었다.몇 명의 남자들이 각 방향에서 백유미를 희롱하고 있었다.고은서는 모든 장면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내가 원지훈을 회유하지 않았더라면 저기에 누워있는 건 나였겠지.’백유미는 동정받을 처지가 아니었다.고은서는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비록 돈으로 매수했다고는 하나 약에 취해 있는 사람들이 시선을 그녀에게 돌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또한 밖에 백유미가 데려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뭔가 이상함이라도 눈치채고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고은서는 자신의 안전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고은서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백유미의 핸드폰을 켜려고 했지만 땅에 부딪히며 떨어질 때 전원이 나가버렸다.그녀는 몇 번이나 시도한 끝에 겨우 핸드폰을 켤 수 있었지만 비밀번호에 막혀 뭔가를 할 수가 없었다.고은서는 백유미의 생일, 곽승재의 생일을 입력했지만 비밀번호는 맞지 않았다.절정에 다다르고 있는 남자들이었기에 고은서는 소리를 내어 그들의 시선을 끌 수조차 없었고 백유미에게 비밀번호를 물을 수조차 없었다.고은서는 긴급버튼을 눌렀지만 백유미는 긴급 연락망을 따로 작성하지 않은 상태였고 국내의 비상 번호는 해외에서 사용할 수 없었다.‘어떡하지?’고은서가 원지훈을 불러 도박하려고 할 때 백유미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핸드폰에는 알파벳 C만 떠 있을 뿐이었다.잠시 생각한 고은서가 전화를 받았지만 상대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고은서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핸드폰을 움켜쥐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
“끈은 혼자서 칼로 푼 것 같아요. 제가 얼른 다시 묶을게요! 이번에는 절대 풀 수 없을 거예요.”말을 마친 원지훈이 밧줄을 챙겨 고은서에게 다가가려 했다.“됐어!”백유미가 원지훈을 제지했다.“누나, 왜 그래요?”백유미는 쇠막대기를 거두며 얼굴에 음험한 미소를 떠올렸다.“챙겨온 술은 다 마셨어?”원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네, 고마워요. 누나.”“뭔가 치밀어 오르는 충동이거나 특별한 감각은 없고?”백유미가 물었다.그 말을 들은 원지훈은 바로 백유미가 술에 최음제를 탔음을 눈치챘고 달아오르는 몸을 느꼈다.“안 그래도 조금 덥네요.”“그렇다면 뭘 기다리고 있어? 저기 해소할 만한 사람 하나 있잖아?”원지훈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지만 그는 다시 한번 물었다.“누나, 후에 데려온 두 사람 먼저 들여보낼까요? 하지만 두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은 것 같던데요.”“그 사람들은 놔두고 먼저 온 사람들만 들여보내.”백유미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30분 줄게. 죽이지만 않으면 되니까 원하는 대로 해.”원지훈은 고은서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부랴부랴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불렀다.백유미는 원망과 경멸 섞인 시선으로 칼을 손에 쥔 채 구석에서 떨고 있는 고은서를 바라보았다.“밖에 있는 남자들은 네가 유흥가로 가기 전에 적응하는 단계라고 생각해.”고은서가 경악하며 물었다.“백유미,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아니면?”백유미의 얼굴에 서린 경멸의 빛이 더욱 짙어졌다.“고은서, 어차피 곽승재랑도 많이 잤잖아. 유산까지 해본 사람이면 닳을 대로 닳은 여자잖아. 여기까지 와서 왜 성녀라도 되는 것처럼 하고 있어? 있는 대로 즐겨.”그때 밖에서 남자들이 걸어들어왔다.그들의 벨트는 이미 풀려있었고 흉한 뱃살과 속옷도 내놓고 있었다.원지훈은 밖에 있던 두 사람과 말을 나눈 후 이내 창고 문을 닫았다.“그래, 이참에 너도 잘 즐겨야지.”고은서는 작은 틈을 이용해 침대 위에 있던 낡은 수건을 재빨리 백유미의 입에 쑤셔넣었다.
백유미가 입을 열었다.“고은서, 여기서는 사람을 가축처럼 팔아버릴 수도 있다는 걸 몰랐어?”백유미는 마치 애완동물을 파는 이야기를 하듯 가볍게 말했다.“운이 좋으면 유흥가로 팔려 가겠지. 네 몸매와 얼굴로 부잣집 딸이라는 자존심만 내려놓으면 손님을 받기는 쉬울 거야. 운이 나쁘면 손발이 잘리고 신장이나 간이 적출되어 거지가 되거나 장난감 취급을 받을 수도 있겠지. 결과는 네 운명에 달렸어.”백유미의 부드러운 말투는 고은서에게 오히려 독을 품은 뱀이 주는 온기로 느껴졌다.그녀는 가식적인 백유미의 모습에 속이 울렁거리며 팔에 소름이 돋아났다.“미쳤어? 내가 무슨 일을 당하면 너라고 무사할 줄 알아?”백유미는 싸늘한 웃음을 흘리며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쇠막대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는 그것을 한 단씩 늘려 고정한 뒤 고은서의 가느다란 목에 겨눴다.“고은서, 곽승재를 언급했지? 그 사람이 널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차가운 쇠막대가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몸을 움찔했다.백유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곽승재가 소식을 들을 때쯤이면 넌 이미 팔려 가고 난 후일 거야. 설령 널 찾더라도 너는 이미 망가진 상태일 텐데 그 남자가 여전히 널 원하겠어?”고은서가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곽승재가 날 원하든 말든 상관없어. 하지만 네가 이런 짓을 한 걸 알게 되면 분명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내가 뭘 했는데?”백유미는 마치 작은 강아지를 놀리듯 쇠막대로 고은서의 목을 쿡 찌르며 물었다.“나는 T 국에 사업차 온 거야. 증인도 있고 증거도 있어. 네가 무슨 일을 당했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고은서는 목에서 통증이 느껴졌다.그녀는 쇠막대기를 뿌리치고 백유미를 제압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백유미가 새로 데려온 두 사람이 바로 문밖에 있었고 그들은 무기도 소지한 듯해 보였다.혹시라도 백유미를 단번에 제압하지 못한다면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다행히 백유미는 아직 고은서가 반격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뜨리지는 않았다.고은서는 고통
원지훈도 백유미를 증오하고 있었기에 고은서의 제안을 듣자마자 바로 동의했다.“알았어. 그때는 내가 제일 먼저 나설게.”‘역시 원지훈은 믿지 못할 놈이야. 백유미가 먼 친척 누나라는 자각은 있나? 이런 생각을 품는다는 게 놀랍네. 아니지. 지금은 이럴 생각할 시간이 없어.’고은서는 속에서 올라오는 혐오감을 참으며 말했다.“시간 없어. 얼른 내 가방에 들어있는 호신용 무기 가져와 줘.”백유미가 다른 사람을 더 데리고 올지, 앞으로 어떤 계획으로 움직일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그래서 밖에 있는 몇몇 사람들을 매수했다고 해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원지훈도 곧 도착할 백유미를 두려워하며 고은서의 손에 묶인 밧줄을 풀어주고 그녀에게 호신용 도구를 건넸다.밖으로 나가기 전 원지훈은 고은서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너도 알아서 살아남아. 상황이 안 좋으면 약속했던 건 나도 못 지켜.”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었다.고은서도 단지 원지훈을 이용해 백유미의 시간을 더 끌어보려 했을 뿐이었다.그렇게 하면 민시후가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해 사람을 데리고 그녀를 구하러 올 수 있을 것으로 믿었으니 말이다.돈으로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했던가, 돈의 힘으로 원지훈은 손쉽게 밖에 있던 사람들을 다시 매수했다.바로 그때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백유미가 도착했나 보네.’손에 묶인 밧줄은 느슨하게 풀어졌지만 고은서는 여전히 손발이 묶인 척하며 침대 한구석에서 긴장한 모습으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누나, 드디어 오셨네요! 고은서도 이제 깨어났어요. 방금 들어가서 살짝 경고 줬는데 정말 입에 독침이라도 품었는지 험한 말을 서슴지 않더라고요.”원지훈은 아첨하는 듯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누나 기분 상하게 하면 언제든지 부르세요. 제가 대신 혼내줄게요!”“수고했어. 차에 먹을 것과 마실 것 준비해 놓았으니 가서 가져와. 조금 있다 너희 도움이 필요할 거야.”“고마워요, 누나.”곧 창고 문이 열리고 백유미가 하이힐을 신은 채
고은서의 말에 원지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핵심을 찔렀다는 것을 눈치챈 고은서는 계속 차분한 말로 설득했다.“같이 해외로 나왔으니 같은 사건에 휘말렸다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겠어? 우리 둘을 같이 제거하면 백유미는 아무런 손해도 입지 않고 여전히 평온한 나날들을 보낼 수 있을 거야. 백유미에게는 아버지가 있고 백씨 가문 산업이 있지만 너는 애꿎은 목숨 하나 날리는 거지.”고은서가 말을 이었다.“정말 백 보 물러나서 백유미가 너를 살려준다고 해도 너는 평생 숨어지내야 할 텐데 어머니는 어떻게 할 거야? 너도 그런 생활에 만족할 수 있겠어?”원지훈은 사색에 잠겼다.전에 내비치던 우월감과 경멸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고은서는 속으로 초조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여유로운 척하며 말했다.“백유미가 곧 도착할 거야. 그러니 얼른 결정을 내려야 해.”마침내 고개를 든 원지훈이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백유미 말을 따르지 않고도 살아남을 길이 있다고? 내가 너를 이런 곳에 데려왔는데 네가 날 용서해 줄 리가 있겠어?”고은서가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네가 나를 배신한 건 정말 화가 나. 앞으로도 널 신뢰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네가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을 했다는 건 이해해. 그리고 나는 뻔뻔하게 널 괴롭힐 생각은 없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큰돈을 줄게. 그 돈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가. 비록 영광스러운 귀향은 아니겠지만 풍족하고 걱정 없는 삶을 살 수 있을 테니 지금 상황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고은서는 이어 원지훈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고향은 너에게 익숙한 곳이고 백씨 가문과는 어쨌든 친척 관계잖아. 해성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백유미도 굳이 너희를 어떻게 하진 않을 거야.”고은서의 말에 원지훈의 마음은 기울기 시작했다.백유미의 잔혹함으로 보건대 고은서가 말한 일들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이번에 백유미를 배신한다면 죽을 길밖에 없겠지만 배신하지 않아도 좋은 날을 없을 거야. 어차피 죽을 거라면 고은
“백유미가 제가 누나한테 돈을 받고 누나를 도와준다는 사실을 알고 사람을 시켜서 저를 한바탕 때렸어요. 갈비뼈 두 대가 부러져서 지금도 기침하면 아파요. 그리고 엄마도 매일 개장 안에 갇혀 몇 시간 동안 무릎 꿇는 자세를 강요받고 있어요. 시간을 못 채우면 풀어주지도 않는데 제가 백유미 말을 안 들을 수 있겠어요?”고은서는 많이 놀랐다.‘역시 백유미는 원지훈이 나한테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하지만 고은서는 백유미가 원지훈 모자에게 그렇게까지 가혹한 수를 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원지훈에게 반박할 힘이 없다는 사실도, 그녀에게 이 사실을 전혀 티 내지 않은 것도 충격적이었다.“전에 고은혜에게 연락해서 만나자고 한 것도 백유미가 시킨 거야?”고은서가 묻자 원지훈은 음흉하게 웃으며 자신의 의도를 솔직히 얘기했다.“그건 제 생각이었죠. 지난번 대원에서 발생해야 했던 일을 현실화시킨다면 백유미가 저를 그냥 놔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거든요.”‘정말 짐승만도 못한 놈이야.’지금 이 일로 화를 낼 겨를도 없었던 고은서가 진지한 태도로 물었다.“이렇게 큰 문제를 겪고 있었는데 왜 나한테 말해서 함께 해결할 방법을 찾지 않았어?”“절 위해 해결책을 찾는다고요? 누나가 원하는 건 제가 더 망가지는 거 아니에요?”원지훈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제가 모를 것 같아요? 누나는 속으로 저를 무시하며 저를 이용하고 있는 것뿐이잖아요.”원지훈이 말하는 무시는 고은혜와 관련된 일을 지적하는 것이 분명했다.고은서가 답했다.“네가 은혜랑 잘되길 원하지 않았던 건 맞아. 우리 사이도 결국 이익 관계니까. 하지만 이익으로 묶여 있기에 넌 더 나를 믿어야 했어!”원지훈이 갑자기 폭발하며 소리쳤다.“믿지 않아! 그 누구도 믿지 않아! 너희 중 누구도 좋은 사람은 없어! 고은서! 내가 들어 온 것도 너에게 백유미가 곧 도착할 거라고 알려주기 위해서야. 오늘 살아서 나갈 생각은 하지 말라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둬. 그리고 누구도 널 구해줄 거란 기대는 하지
“괜한 힘 빼지 마요.”조수석에 앉아 있던 원지훈이 냉소적으로 말했다.“아까 물 줬는데 안 마신 건 누나 탓이죠.”온몸에 힘이 빠진 고은서는 머리도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너...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가 보면 알겠죠.”원지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자신이 위험에 빠졌음을 직감했다.그녀는 차 뒷좌석에 무기력하게 주저앉은 채 마지막 힘을 다해 가방 속 핸드폰을 더듬어 찾았다.그리고 그녀는 힘껏 옆면에 있는 긴급 전화 버튼을 눌렀다.이는 경호원들과 미리 문제가 생기면 즉시 연락하겠다는 신호이기도 했다.고은서는 어지럽고 무기력한 상태에서도 원지훈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그녀는 혀를 꽉 깨물며 간신히 의식을 유지했다.희미해진 시야로 화면을 바라보며 SOS 번호를 누르려 했으나 제대로 눌렀는지 통화가 연결됐는지는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차는 계속 질주했고 고은서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 나갈 기력조차 남지 않았다.혀를 깨물 힘마저 사라진 그녀는 결국 의식을 잃고 말았다....고은서가 다시 깨어났을 때 그녀는 허름한 창고의 방 안에 누워 있었다.주위는 매우 더러웠고 악취마저 풍겼다.고은서는 손과 발이 꽁꽁 묶인 채로 나무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밖에서는 몇몇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현지어를 사용하는 것 같았는데 간혹 한국어가 섞여 있기도 했다.‘원지훈 혼자서 T 국 사람들과 이런 일을 꾸밀 수는 없어. 백유미의 지시를 따르고 있는 게 분명해. 온갖 방법으로 해외로 데려온 이유는 국내에서는 쉽게 구해질 것 같아서인가? 의식을 잃은 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경호원들은 위험을 눈치챘나? 민시후도 T 국에 온다고 했는데 호텔에 도착하지 않은 걸 알게 되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눈치채겠지?’생각을 마친 고은서는 얼마간 안심이 되었다.몸을 움직여보니 체력이 조금 돌아왔음을 느꼈지만 손발이 꽉 묶여 있던 터라 뼛속까지 욱신거리며 통증이 심했다.겨우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켜 앉으려던 순간 침대 옆의 낡은 서랍장을 건드렸다
원지훈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별일 아니에요. 비즈니스석이 처음이라서 조금 어색하네요.”비행기에서 내리니 시차 때문에 T 국은 아직 어두워지지 않았다.고은서가 핸드폰 전원을 켜자마자 민시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원지훈에게 먼저 가서 차를 잡으라고 한 뒤 고은서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고은서, 어디 갔어? 송민아 말로는 이틀 동안 회사에 안 나온다던데?”고은서는 T 국에서 볼일이 있다고 솔직히 알렸다.“백씨 가문과 관련된 그 프로젝트?”민시후는 바로 눈치챘다.고은서는 부정하지 않았다.“담당자랑 만나서 얘기 나누기로 했어. 일이 끝나면 바로 돌아갈게.”“호텔 위치 보내. 조금 있다 갈게.”“네가 와서 뭐 하게?”“다른 나라에서 너랑 나 둘뿐인데 내가 뭘 하고 싶을 것 같아?”“그럼 주소는 안 보낼래.”“고은서, 지금 누구를 경계하는 거야? T 국에서 가서 특색 요리 좀 먹으려고 그런다.”고은서는 민시후가 십중팔구 그녀가 혼자 감당하지 못할까 봐 걱정해서 오는 것임을 알았다.게다가 그가 오기로 결심했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을 것이었다.민시후의 끈질긴 전화 공세를 막기 위해 고은서는 결국 호텔 이름을 그에게 보냈다.[방 하나 더 예약해 줄게.][고은서,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만 속으로는 나랑 같은 방 쓰고 싶었던 거야?][자꾸 그러면 차단할 거야.][알았어. 알았어. 내가 졌어.]“은서 누나. 우리 차례예요. 가시죠.”원지훈이 앞쪽의 택시를 가리키며 말했다.경호원들이 고은서에게 비행기에서 내려 몰래 뒤따라오고 있다고 문자를 보내왔다.고은서는 문자를 확인한 후 핸드폰을 넣고 원지훈과 함께 택시에 탔다.운전기사는 현지인인 듯했다. 그는 서툰 한국어로 대화를 시도했다.고은서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원지훈은 비행기에서의 긴장이 사라진 듯 몇 가지 지역 특산품에 관해 물어봤다.“누나, 목마르지 않아요? 물 좀 마실래요?”원지훈은 말하며 개봉하지 않은 생수병을 건넸지만 고은서는 받지 않았다.“괜찮아.”원지훈은
고준석이 입을 열었다.“우리 집에 와서 잠깐 바둑을 둘 때 네가 할머니 보러 가서 브로치를 놓고 왔다면서 마침 전해주더라구나.”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곽승재 정말 대단하네. 오전에 할머니 댁에 보낸 브로치를 오후에 외할아버지 댁으로 가져오다니. 조금 전 골동품 가게에서 마주쳤을 때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으면서...’“은서야, 왜 말이 없어? 또 할아버지가 승재랑 만났다고 화내는 거야?”고준석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전에도 말했지만 너희가 이혼했다 뿐이지 원수가 된 건 아니잖니. 날 보러 왔다는데 그냥 내쫓을 수는 없잖아.”고준석이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고은서는 별다른 설명 없이 애교 몇 마디로 웃어넘기고는 전화를 끊었다.잠시 고민한 고은서는 굳이 곽승재에게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브로치를 가져갈 생각이 없다면 다시 경매에 올려서 돈으로 송금해 주면 되지 뭐.’...다음 날, 고은서는 원지훈의 연락을 받았다.원지훈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상대방이 최후통첩했어요. 이틀 안에 계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하네요.”상대방의 진짜 의도를 파악하려면 직접 만나서 얘기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어제 민시후는 원지훈에게서 특별히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백유미는 최근 판주 투자은행에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매일 고군분투하고 있어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고은서는 원지훈과 함께 T 국에 있는 클라이언트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은서 누나, 조금 전에 알아봤는데 점심 항공편이 있대요. 그걸로 가면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원지훈이 말했다.“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건 어려울 것 같네. 신분증 보내주면 다 처리하고 나서 항공편 알려줄게.”‘원지훈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어. 혹시 클라이언트랑 음모라도 꾸며서 나한테 사기 치는 거라면 미리 충분한 대비를 해야 해. 출장 일정도 완전히 맡길 수는 없어. 안 그래도 욕심이 많은 사람인데 비행기 티켓까지 나한테 맡기지 않는 건 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