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 너 정말 웃기는 사람이네. 백유미를 안고 떠났으면서도 거기서 잘 있지 않고 다시 이 침대에 와 자다니...’ “곽승재, 당신 이러고도 안 피곤해?”고은서가 물었다.그러자 곽승재는 고개를 들며 더 깊게 찡그린 미간을 보였다.“아침부터 싸우려고 그러는 거야?”고은서는 그를 무시한 채 침대에서 내려왔다.“오늘부터 이 방에서 자지 마. 나도 더 이상 정상적인 부부처럼 연기하고 싶지 않아.”“내가 여기서 자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아?”곽승재도 침대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어젯밤에 내 옷을 더럽힌 게 누구였지? 또 나한테 몸으로 갚으라고 했던 사람이 누구였더라?”“안 사준다 이거지? 좋아. 그럼 네 몸으로 갚아!”어젯밤의 그 말이 떠오르자 고은서는 얼굴이 뜨거워졌다.‘최근에 유치한 영상을 너무 많이 봤나? 그런 멍청하고 어리석은 말을 하다니...’“나 술 많이 마셔서 아무것도 기억 안 나.”고은서는 최대한 침착한 척하며 말했다.“당신이 밤에 날 깨우지만 않았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내가 왜 널 깨웠는지 정말 몰라?”곽승재는 차갑게 물었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어젯밤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소식들을 보고 나서 자신에게 따지려던 걸 알고 있었다.“결혼 문제를 일부러 언론에 흘린 것도 네가 한 짓이겠지? 명운에서 돈 벌려고 네가 아주 못하는 짓이 없구나?”곽승재는 계속해서 비꼬았다.비록 그녀가 직접 소문을 퍼뜨린 건 아니지만 그 소문에 협력한 것은 사실이니 억울할 이유도 없었다.그래서 고은서를 곽승재를 조롱하듯 말했다.“말투를 보니 기분이 별로인 것 같은데? 뭐야, 이혼이 임박했는데 갑자기 떠나기 아쉬워진 거야?”그러자 곽승재도 그녀를 냉랭하게 흘겨보았다.“네가 한 말을 너 스스로 믿고 있는 건 아니지? 난 네가 GS 그룹 사모님이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이런 식으로 크게 떠들어대는 게 거슬릴 뿐이야.”이렇게 말하고는 곽승재는 냉정한 표정으로 상의를 걸치지 않은 채 욕실로 들어갔다.그가 이런 대답을 할 거란 걸
‘내가 무슨 손해를 본다는 거지?’다음 순간, 이미숙의 말과 표정에서 고은서는 무슨 일이 오해된 것인지 깨달았다.아마도 어젯밤에 자신이 울고 소란을 피운 탓에 이미숙이 뭔가 잘못 이해한 것 같았다.“아줌마, 저 그런 거 아니에요.”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로 고은서가 부인했다.“어젯밤에 술에 취해서 조금 소란을 피웠나 봐요.”하지만 이미숙은 그녀가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사모님, 이제 대표님과 함께 지내는 게 부부 사이에 좋은 영향을 줄 거예요.”“거기 서서 뭐 하고 있어? 어서 와서 밥 먹어.”고은서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해하던 찰나, 곽승재가 무심하게 말했다.“맞아요, 사모님. 빨리 아침 드세요. 저는 이제 주방으로 갈게요.”이미숙이 떠나자마자 고은서는 곽승재를 노려보며 말했다.“왜 한마디도 해명하지 않은 거야?”그러자 곽승재가 그녀를 흘겨보았다.“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니까. 내가 무슨 해명을 하겠어?”‘이 개자식, 어젯밤의 취중 진담으로 나를 공격하다니.’어젯밤에 자신이 곽승재의 귀에 대고 한 말을 떠올리며, 고은서는 땅속으로라도 파고들어 가고 싶을 만큼 부끄러워졌다.‘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때 그렇게 큰 용기를 낸 거지? 나도 날 모르겠네.’“너 술만 마시면 남자들한테 치근대는 거야?”알 수 없는 곽승재의 말투에 고은서는 얼굴이 붉어지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난 아무것도 몰라, 기억도 안 나.”곽승재는 냉소를 지으며 무언가 더 말하려 했으나, 그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하더니 곧 그는 잠금화면을 밀어 열었다.상대방의 말을 듣고 곽승재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알았어. 좀 있다가 병원에 갈게.”곽승재가 병원에 누구를 보러 가는지는 고은서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갑자기 아침 식사를 할 마음이 사라진 그녀는 가방을 들고 나가려고 했다.“아침도 안 먹고 어디 가려고?”곽승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당신이 신장 문제로 병원 가기 싫어할까 봐 남성 클리닉에 예약해주러 가는 거야.”
‘며칠 전만 해도 강제로 초대받아 내가 대신해 방패막이가 되어줬는데... 뭐가 그렇게 오랜만이라는 거야?’고은서는 민시후가 여기 있는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도아름이 웃으며 그녀를 불렀다.“은서 씨, 왔구나. 여기 와서 앉아요.”고은서는 도아름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민 대표님께서 여기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그러자 민시후는 다리를 꼬며 느긋하게 웃었다.“조은서 씨가 명운의 명성을 회복시킬 수 있다고 나와 내기를 했잖아요. 내가 투자하기로 약속했으니 이제 약속을 지키러 왔죠.”도아름은 고은서에게 설명을 덧붙였다.“은서 씨가 나한테 말했던 조건대로 민 대표님께서 명운에 투자할 거예요.”민시후의 속도가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명운의 인기가 겨우 어젯밤에 올라갔을 뿐인데 그는 주저하지 않고 투자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다. 게다가 기회를 악용해 지분을 더 높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민 대표님, 정말 괜찮으세요?”고은서는 다시 한번 물었다.“지금은 명운이 조금 반등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에요.”민시후는 그녀를 껄끄럽게 쳐다보며 말했다.“조은서 씨는 자기 자신이나 명운에 대해 자신이 없나요?”그러자 고은서는 단호하게 대답했다.“저는 제 자신과 명운 모두에 자신이 있어요!”이 말에 민시후도 씩 미소를 지었다.“그렇다면 내가 뭘 더 고민할 게 있겠습니까?”지금 상황으로 봤을 때, 명운이 이렇게 빨리 미래 투자은행의 투자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회사의 성장과 상장에 매우 유리한 일이다.고은서는 도아름에게 물었다.“언니, 언니 생각은 어때요?”민시후의 투자를 받아들인다면 명운이 더 잘 발전하더라도 다른 투자은행을 선택할 기회를 잃게 된다.도아름은 늘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었다.“저는 미래 투자은행의 투자를 받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지금 민 대표님께서 이렇게 투자의사를 밝혀주시는 거... 전 당연히 고맙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도아름이 동의했으니 고은서도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그들은 계약과 관련
이 말을 듣자 백유미의 눈에서 더욱 눈물이 쏟아졌다.“승재야, 내가 그때 찍은 사진 때문에 네가 아직도 마음이 불편해한다는 거 알아.”“인정할게, 그때 사진을 찍을 때 나도 개인적인 감정이 있었어. 네가 전에 내 면 요리가 어디보다 맛있다고 말한 적이 있어서 그걸 찍어서 친구들에게 공유하고 싶었어.”“하지만 네가 최근 나와 거리를 두려는 걸 느꼈기 때문에 그 사진을 올리면 네가 불편해할까 봐 바로 삭제했어. 근데 은서 씨가 그걸 그렇게 빨리 보고 저장할 줄은 몰랐어.”백유미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승재야, 은서 씨의 성격은 나도 잘 알아. 은서 씨가 나를 오해하는 건 상관없지만 너에게 오해받는 건 싫어... 난 어렸을 때의 우리의 정을 지키고 싶어.”백유미의 창백한 얼굴과 슬프게 해명하는 모습을 보며 곽승재는 조금 마음이 움직였다.곧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 난 너를 오해한 게 아니니까. 어제 은서가 그 일을 언급했을 때 상황을 잘 몰라서 너에게 물어본 것뿐이야.”“응.”백유미는 휴지를 꺼내 눈물을 닦으며 조금 쑥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날 웃기게 했네. 나도 평소엔 이렇게 감정적이지 않은데 아마 머리를 다쳐서 그런가 봐.”“대표님...”그때 주민기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더니 무언가 보고하려다 백유미가 눈물을 닦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말을 멈칫했다.백유미는 차분하게 말했다.“괜찮아요. 하실 말씀 하세요.”보고할 내용이 판주 투자은행 관련이었기 때문에 주민기는 백유미 앞에서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는 곽승재에게 보고했다.“방금 소식을 들었는데 미래 투자은행이 명운 기업에 계속 투자하기로 했다고 합니다.”이 말을 듣자 곽승재는 즉시 눈썹을 찌푸렸다.“언제 일어난 일인가요?”“오늘 아침 민시후가 직접 명운 기업에 가서 도 대표님과 초보적인 합의를 이뤘다고 들었습니다.”백유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민시후가 왜 갑자기 명운에 투자하는 거죠? 무슨 일이 있었나요?”어젯밤 그녀는
민시후는 느긋하게 차를 들고 향을 맡은 후 가볍게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내가 은서 씨를 과소평가했었네요. 정말 대단하십니다.”민시후가 어젯밤 그녀가 술에 취한 척하면서 명운을 화젯거리로 만든 일을 말하는 걸 알고 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 도련님과 같은 명문가 자제들이 남을 과소평가하는 건 흔한 일이니까요.”“말투가 마치 온갖 고난을 겪은 신데렐라 같네요.”민시후는 혀를 차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주로 은서 씨가 너무 꽃병 같아서... 아름다움이 은서 씨의 머리를 망칠까 봐 걱정됐거든요.”고은서는 할 말이 없었다.“도련님, 칭찬 방식이 참 독특하시네요.”“은서 씨에게 특별할 가치가 있으니까 특별하게 칭찬한 거예요.”민시후는 고은서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못 본 척하며 흥미로운 듯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물었다.“어젯밤 그 일, 진짜로 곽승재에게 버림받은 거예요? 아니면 그 사람을 고발하려고 그런 겁니까?”민시후가 구경거리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고은서는 그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고 싶지 않았다.“미안하지만 사적인 일이라 말할 수 없네요.”그러자 민시후는 화를 내지 않고 느긋하게 몸을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판주를 무너뜨리겠다고 했던 은서 씨의 결심을 이제 믿게 되었어요. 앞으로 협력이 잘 되길 바라요.” 이전에 ‘미리 협력의 성공을 기원한다’라고 말한 것과 달리 이제는 협력을 확정 짓는 말이었다.고은서는 솔직하게 말했다. 자신이 미래 투자은행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 200억을 마련할 수 없다고 말이다.하지만 이에 대해 민시후는 전혀 놀라지 않는 듯했다.“그럼 먼저 빚으로 두고 나중에 은서 씨가 성사시킨 프로젝트와 배당금에서 내요.”“그럼 다음 달에 입사할게요.”몇 주 뒤면 할머니의 생신이기도 하고, 그 외에도 이혼 문제를 처리해야 하며 명운의 계약 서명 후에도 처리할 일이 많으니 다음 달에 입사하는 것이 적당했다.“좋아요.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을게요.”음식이 상에 차려진 후, 고은서
고은서는 몇 번이고 메시지를 확인한 후에야 그 메시지가 곽승재가 보낸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자기를 조롱했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먼저 물어봐?’곽승재가 이렇게 스스로 찾아와서 맞닥뜨리겠다고 하니 고은서도 주저하지 않았다.[의사 선생님께서 당신 상태가 너무 심각하다고 하더라. 먼저 뇌과를 가보는 게 좋겠대.]곧바로 곽승재가 메시지를 입력 중이라는 표시가 뜨긴 했지만 한참 동안 답장이 오지 않았다.그리고 때마침 주인혁이 바비큐 장소의 주소를 보내왔기에 고은서는 핸드폰을 꺼두었다.도아름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고은서는 차를 몰고 한 식물원에 도착했다.이미 도착해 있던 주인혁과 그의 일행은 잔디 위에 카펫을 깔고 간단한 테이블과 의자를 배치해 놓았다. 그 위에는 각종 음료수와 과자가 가득했다.근처에는 바비큐 그릴이 설치되어 있었고 누군가가 불을 피우느라 분주했다.그들은 모두 젊고 활기차며 이런 번거로운 일들을 하면서도 즐거워하며 웃음꽃을 피웠다.“여기예요!”주인혁이 그녀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그가 웃을 때 드러나는 하얀 치아와 소년다운 밝은 모습이 고은서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었다. 자신도 몇 년은 젊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바비큐를 준비하던 몇몇 젊은이들도 고은서에게 시선을 돌렸다.“설마 인혁이가 자주 말하는 선량한 마음씨를 가진 그 미모의 여성분이세요?”“진짜 예쁘시네요. 제가 본 많은 연예인들보다도 더 예뻐요!”“당연하지. 우리 인혁이가 매일 얘기하는 사람인데 그 정도는 돼야지!”“그만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주인혁이 급히 나서며 막으려 했다.“얘네들 말은 믿지 마세요. 그냥 장난치고 있는 거니까.”당황한 주인혁이 해명하는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일부러 머리를 살짝 넘기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전 원래 미모와 선량한 마음을 겸비한 작은 요정인데요? 이분들 말이 틀린 게 아니에요!”고은서의 농담 섞인 자기 자랑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고 주인혁은 민
스포츠 웨어를 입고 머리를 윤기 나게 빗은 마치 작은 부잣집 도련님 같은 남자는 바로 원지훈이었다.그는 지금 두 명의 허술해 보이는 남자들과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고은서는 무의식적으로 대나무 숲 쪽으로 몸을 숨겼다.“그 고씨네 친구 몇 명이 여기서 사진을 찍으려 한다는데 내가 따라오지 않을 수 있겠어?”원지훈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조급해하지 마. 너희들이 내 일을 처리해 주면 내가 클럽 쏠 테니까.”“무슨 일인데?”그중 한 사람이 물었다.“그 애를 어떻게든 호수로 밀어 넣어.”“뭐라고? 사람을 해치는 건 불법이잖아.”“뭐가 불법이야!”원지훈은 그 사람을 발로 차며 말했다.“난 그냥 너희들이 걔를 밀어 넣기만 하면 곧바로 구해낼 거야!”“흐흐, 알겠어. 이거 미녀를 구하는 영웅 연출인 거지? 미녀를 구해낸 후에는 인공호흡도 해주고 호텔에 데려가서 옷도 갈아입히고 몸도 녹여주고...”남자가 점점 더 지나치게 말했지만 원지훈은 부정하지 않고 담배꽁초를 밟아 껐다.“내가 몇 날 며칠을 공을 들였는데 전혀 반응이 없잖아. 그래서 좀 더 강력한 방법을 쓰려고.”“기억해. 반드시 사람이 없는 곳으로 유인하고 사고처럼 보이게 밀쳐야 해. 그래야 믿을 수 있으니까.”원지훈이 당부했다.“문제없어. 깔끔하게 처리해 줄게.”그들은 계획을 마친 후, 의기양양하게 대나무 숲을 떠났다.고은서는 그제서야 몸을 숨긴 곳에서 나올 수 있었다.지난번에 고은혜가 원지훈에게 별 관심이 없는 것을 봤을 때부터 의심스러웠다. 알고 보니 원지훈이 진짜로 속임수를 쓰려 했던 것이다.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면 원지훈에게 들킬까 봐 고은서는 화장실로 다시 돌아갔다.그러고는 핸드폰을 꺼내 단은숙에게 전화를 걸려 했지만 그전에 곽승재가 보낸 메시지가 보였다.[너 할 말 없어?]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왜 내가 당신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곽승재의 메시지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고은서는 단은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때 주인혁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고 고은서는 화장실에서 나왔다.주인혁은 약간 당황한 듯 설명했다.“너무 오래 안 나와서 길을 잃은 건 아닌지 걱정돼서 와봤어요.”고은서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방금 전화 받느라 좀 늦어졌어요. 가요.”촬영 구역과 바비큐 구역이 다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고은서는 원지훈과 고은혜 일행을 마주치지 않았다.그동안 KK와 다른 이들은 고기를 굽고 있었고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과자를 먹고 맥주를 마시며 또 다른 누군가는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분위기는 가볍고 자유로웠다.“맥주 한잔할래요?”주인혁이 묻자 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제가 차를 몰고 와서요.”어젯밤의 술 취한 경험이 유쾌하지 않았기에 고은서는 조심하기로 했다.주인혁은 그녀에게 신선한 과일 주스를 건넸고 자신도 한 병을 들고 잔디에 함께 앉았다.고은서는 잠시 감상에 잠겼다.“젊음이란 참 좋네요. 자유롭게 꿈을 추구할 수 있으니까요.”그러자 주인혁은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누님도 충분히 젊어요. 언제든지 자신의 꿈을 추구할 수 있죠.”고은서는 살짝 웃으며 생각했다.‘내 꿈이 뭐였더라?’어릴 땐 그녀의 엄마처럼 조향사가 되고 싶었고 좀 더 커서는 드럼에 관심이 생겨 드러머가 되고 싶었다. 대학에서는 금융을 전공하면서 최고의 투자 전문가가 되겠다고 다짐했었다.하지만 결국 이 모든 꿈을 포기하고 고은서는 곽승재를 쫓아다니며 그가 싫어하는 ‘GS 그룹 사모님'이 되려고 애썼다.그렇게 결국 정신 병원에서 비참하게 끝을 맺고 말았다.고은서가 잠시 멍해지자 주인혁은 그녀가 속으로 괴로워하고 있다고 오해하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제가 관련된 뉴스를 좀 봤는데 정말 마음이 힘들다면 억지로 웃지 않아도 돼요. 오늘 부른 건 누나가 마음 편히 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니까.”고은서는 주인혁의 맑고 순수한 눈빛을 보며 진심 어린 위로에 감사함을 느꼈다.햇살이 나무 틈으로 스며들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고은서는 손을 들어 이마
투약한 간호사도 전에 이미 곽승재에 의해 경찰서로 넘겨졌는데 그녀의 증언에도 진희숙만 언급되었다.고은서는 이 모든 결과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백유미의 신중함을 탄복했다. 그녀가 경각심을 낮추지 않고 제때 녹음하면서 증거를 남겼더라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당사자로서 고은서는 경찰 조사에 협조한 후 나머지 일을 변호사에게 맡겼다.“걱정하지 마세요. 증거가 확실하니까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송민준이 말했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대가를 치르길 바라는 사람은 백유미이지 대신 누명을 쓴 진희숙과 간호사가 아니었다.“우리 민아도 잘못한 곳이 있으니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원하는 보상이라도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보상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송민준이 말을 이어갔다.“보상은 필요 없어요. 괜찮다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죠.”고은서가 말했다.“무슨 부탁이요?”“백씨 집안에서 요즘 여러 프로젝트를 도맡아 하고 있다던데, 그 프로젝트들을 저 대신 산통 깨주세요.”고은서도 민시후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곽수혁이 GS그룹 일에 끼어들면서 백씨 집안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그녀의 말을 들은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송민아 보고 나한테도 그만 집적거리고 해. 나도 스트레스 그만 받고 싶어.”옆에 있던 민시후가 갑자기 말을 보태었다.송민준은 민시후를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시후야, 민아가 어릴 적부터 널 좋아한 걸 너도 알고 있잖아. 민아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도 곁에서 어쩔 수 없어.”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직설적으로 말했다.“난 어릴 적부터 송민아가 싫었다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데는 진짜 짝이 없다니까.”송민준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고은서에게로 돌리며 물었다.“이혼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시후랑 함께 있을 생각이신가요?”‘소식이 빠르네.’이혼한 지 며칠 되지도 않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민아 데리고 오지 않았으니까.”송민준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혹시나 또 고집부리면서 기분 나쁘게 할까 봐 오늘 너희랑 만난다는고 얘기하지 않았어.”민시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발 좀 북제로 데려가. 해성에 계속 있게 하지 말고.”송민준은 나긋한 미소를 보이면서 답했다.“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게다가 이미 ZY 그룹으로 출근하기로 했다던데.”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눈살을 더 세게 찌푸렸다.“우리 아버지가 송민아를 강제로 ZY 그룹에 밀어 넣은 건 나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데 나중에 또 고은서를 해치려 하거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 또다시 너랑 우리 아버지 때문에 봐주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고은서는 민시후를 쏘아보았다.‘나랑 송민준을 원수 사이로 만들 생각인 거야?’“뭘 쏘아봐?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민시후는 점점 더 흥분해 하며 말했다.“전에도 몇 번이고 널 협박했잖아. 심지어 간호사를 교사하여 우리 아이까지 잃게 한 사람이야. 네가 날 막지만 않았으면 내가 송민아를 가만둘 거 같아?”“...”고은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전에 유산한 경과를 민시후에게 간단히 알려주면서 송민아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걸 이렇게 이용할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씩씩거리는 민시후를 보면서 고은서는 그가 배우를 하지 않은 게 너무 아쉽다고 속으로 감탄했다.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도 전문가에게 나가보라 하고 직접 민시후에게 차를 따라줬다.“전에 병원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해. 오늘 만나자고 한 것도 그 일 때문이야.”송민준이 말하기를 진희숙은 송민아를 친딸로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돌봐온 사람으로서 그녀가 두 사람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런 모험을 했다고 한다.그리고 송민아가 간호사랑 만난 모습이 포착된 사진은 진희숙이 그녀를 불러내 우연하게 찍힌 사진이라고 한다.“민아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형, 형수님이 민시후한테 별다른 마음은 없어 보이는데 걱정하지마.”“내가 무슨 걱정을 한다고 그래?”곽승재가 약간 어색해하며 말했다.“이미 이혼한 사이인데 고은서가 누구한테 마음이 가든 누구랑 있든 나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야.”“아까 썩은 표정을 하고 경적을 울린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네.”육현석이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그러나 갑자기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애써 웃으면서 변명거리를 찾았다.“맞아, 맞아. 형 말이 맞아. 형수님이 누구랑 있든 형이랑 이젠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 역시 이혼 같은 작은 일 때문에 속상해하는 일은 전혀 없는 우리 형, 상남자답다니까.”곽승재의 얼굴빛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걸 발견한 육현석은 이내 입을 화제를 돌렸다.“형, 형수님이 형을 보기 싫어하는 것도 화나서 그러는 거잖아. 계속 이렇게 자존심 때문에 고집부려서는 안 된다니까. 형수님한테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존재감을 나타내야 할 거 아니야.”그의 말을 들은 곽승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네가 말했다시피 날 싫어하잖아. 그런데 무슨 존재감을 나타내라는 거야?”“지금 상대방을 잊지 못하고 놓아주기 싫은 사람은 형이잖아.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형수님이 스스로 돌아올 것 같아? 형, 자존심 따위 버리지 않으면 형수님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육현석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전에 낯선 사람 사이로 지내도 되냐고 물었을 때 아주 흔쾌히 된다고 답하던 고은서의 모습이 떠올랐다.어제 점심, 그가 스케줄을 바꾸면서까지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고은서가 이혼해서 무척 기쁘다고 하면서 자신의 뒤담화를 하는 걸 들었다.그러나 방금전 민시후와 다정하게 장난치면서 자신을 보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녀를 생각하면 이건 자존심을 내려놓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은서가 이젠 진짜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곽승재는 눈살을 질끈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언제 고은서랑 다시 화해하고 싶다고 했어? 인제
민시후는 그가 입을 열길 기다리고 있는 고은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오글거려 죽겠네.”고은서는 끝내 참지 못하고 방금전 손을 닦던 물티슈를 그를 향해 던졌다.“누가 오글거린다는 거야! 사람 호기심 불러일으켜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 짜증 나는 자식아!”“고은서!”물티슈에 얼굴을 맞은 민시후가 물티슈를 다시 주어 그녀를 향해 던지려고 할 때 뒤에서 갑자기 빵빵하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와 민시후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고급 SUV 한 대가 뒤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운전석에는 육현석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곽승재였다.육현석은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손을 저으며 옆에 있는 곽승재를 힐끔힐끔 보았다. 방금 경적 소리를 낸 게 그가 아니라 곽승재인 것이 분명했다.SUV 차량 높이가 꽤 있었기에 아마 방금전에 그녀와 민시후가 장난치는 걸 본 모양이다.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앉아있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몸을 홱 돌리면서 민시후에게 말했다.“초록불이야. 안 가고 뭐 해?”민시후도 차 안에 앉아있는 육현석과 곽승재를 보았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액셀을 밟기는커녕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백미러를 쳐다보았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여기에서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전에 두 사람이 운전하면서 맞부딪친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꼭 쥐고 말했다.“민시후, 우리 약속 있는 거 잊은 거 아니지? 이상한 짓 하지마.”민시후는 불쾌하다는 듯 그녀를 보며 말했다.“이상한 짓이라니. 전에 내 차를 먼저 박은 사람은 곽승재거든.”‘네가 곽승재 차 앞에 막아서서 시비 걸지 않았으면 곽승재가 널 박을 리도 없었거든.’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시후가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러면 나 먼저 차에서 내려도 돼?”“너 언제부터
민시후는 송민준과 찻집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맑은 하늘에 눈 부신 햇살, 날씨가 참 좋았다.민시후는 기사 대신 직접 하늘색 스포츠카를 운전했다.고은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는 스포츠카를 보며 말했다.“민 도련님, 패션 워크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레스토랑 가는 것뿐인데 굳이 이렇게 눈에 띄는 차를 운전해야 할까요?”“그냥 평범한 스포츠카일 뿐인데 어디가 눈에 띈다는 거야? 잔말 말고 얼른 타. 내가 직접 운전한다는데 영광으로 생각하라고.”민시후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탔다.스포츠카가 유독 눈에 띄기는 했지만 길에 차들이 적었던 탓에 다행히도 너무 큰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가는 도중에 ZY 그룹 근황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곽승재가 ZY 그룹을 타깃으로 삶고 짓누르려고 할 때 민시후가 제때 빠르게 대응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허 교수님 쪽에 의약 프로젝트가 아주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어. 후기도 꽤 괜찮고. 연구소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민시후는 회사 일을 얘기할 때만은 진지했다.“대리권도 네가 쟁취해 온 거니까 융자에 관한 일도 네가 책임지고 잘 해봐.”고은서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백유미에게 맡길 예정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는지 의문스러웠다.그녀는 궁금증을 덜기 위해 민시후에게 물었다.“곽승재 아버지가 얼마 전에 귀국하셨는데 회사 일에 참여하려 했다가 곽승재한테 거절당했다고 하더라고. 아마 이번 일도 곽승재가 아버지 건의를 거절하고 직접 내린 결정일 거야.”‘그렇구나. 그런데 회장님이신 자기 아버지랑 맞붙는 거 보아서는 아마 두 사람도 사이가 별로인가 보네.’고은서는 이내 민시후 아버지가 전에 편찮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아버지는 괜찮으셔?”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민시후는 피곤하다는
백유미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사람 시켜 조사중이니 곧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너도 말했다시피 이미 일은 발생했고 손실도 점점 더 커지고 있어. 이 말인즉슨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야. 프로젝트가 대박 나면 넌 명예랑 돈을 얻고 망하면 너랑 아무 상관이 없다? 일이 그렇게 쉬울 것 같아?”백유미가 차가운 눈빛으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프로젝트 서류에 사인한 사람은 너야. 그리고 회사 최고 결책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너고. 어떤 일이 발생하든 네가 다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네 인생은 여기서 끝이야. 너랑 네 엄마 감방으로 보내서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만들 거야.”원지훈은 백유미가 화난 김에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가 그를 하늘 정상으로 보낼 능력이 있는 만큼 다시 그를 나락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요?”원지훈이 물었다.백유미는 독사처럼 살기 가득한 눈길로 그를 보며 말했다.“돈은 당연히 감당하지 못할 테고. 그런데 그 대신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방금전까지 덤덤하던 원지훈도 점점 섬뜩해졌다.“무슨 일인데요?”“당연히 이 손해를 메꿀만한 일이지.”원지훈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이 일을 별 탈 없이 해주면 이번 손해는 그냥 넘어가 줄게. 혹은 네 엄마랑 함께 죽을 때까지 감방에 들어가 있든가. 한 가지만 선택해. 삼 일 줄게. 사흘 후에 확답을 주지 않으면 너도 어떤 후과가 있을지 알고 있을 거야.”백유미는 말하고 이내 떠났다.그녀가 떠난 후, 범가온이 부랴부랴 룸으로 들어오면서 물었다.“지훈아, 괜찮아? 유미가 또 너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고 날 나가 있으라고 한 거지?”그러나 원지훈은 대답 대신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지금 음식이 넘어가?”범가온은 호통치고는 슬쩍 문 쪽을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네가 계약 체결할 때 따로 돈 받
“고은서 눈에 네가 들어오기나 하겠어?”백유미는 곽승재도 사랑하지 않은 고은서가 원지훈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전혀 믿지 않았다.“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니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못한 곳이 어디가 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거예요? 게다가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왜 저를 위해 음식까지 주문해주면서 저를 먼저 찾아오겠어요?”“그래, 유미야. 지훈이가 옛날부터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어. 지방에서 살 때도 여러 여자애들이 얘가 좋다고 쫓아다녔는데 창업한 이후로 더 많은 여자들이 지훈이를 가지지 못해 안달이나 한다니까.”범가온은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백유미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고 원지훈에게 캐물었다.“고은서가 오늘 널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뭔데?”원지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별일 아니었어요. 너무 오래 못 봤다고 밥 사준다고 만나자 했는데 시간 없다고 했어요.”백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예전의 그녀였다면 지금 원지훈이 하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고은서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변해버렸다. 전에는 툭 건들기만 하면 펄쩍 뛰면서 화내는 사람이었는데 요즘 따라 곽승재가 무슨 일을 해도 전혀 관심 없는 태도를 보였다.심지어 민시후와 무척 가까이 지냈는데 아이가 곽승재의 아이라고 해도 두 사람이 호텔로 간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현재 원지훈과 연락을 맺고 있다는 게 너무도 수상했다.‘곽승재의 이목을 끌고 그에게 새로운 인상을 남기려는 수단인 건가?’“설마 이미 고은서에게 들킨 건 아니지?”백유미가 의심스럽다는 눈길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원지훈은 약간 당황하긴 했으나 티를 내지 않고 성가시다는 듯 답했다.“뭐가 들켰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누나랑 친한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내가 심심해서 고은서 앞에서 누나 얘기를 꺼내겠어요? 게다가 사람 뒷조사하는 거에 능하잖아요. 의심되면 조사해보면 될 거 아니에요.”나중에 조사는 해볼 것이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갑자기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비서는 선 자리에 그댈 얼어붙었다.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가 어두운 얼굴빛을 하고 서 있었다.“대... 대표님, 제가 그 뜻이 아니라...”“그럼 무슨 뜻인데?”곽승재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내가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해 보이는데 알고 보니 쓰레기라는 뜻이 아닌가?”‘갑자기 쓰레기라는 소리가 왜 나오는 거지? 내가 하는 얘기랑 완전 다른 얘기잖아.’비서는 말문이 막혔다.“대표님, 인혜 씨는 그 뜻이 아니라...”옆에서 보고 있던 주민기가 마지못해 대신 설명하려고 할 때 곽승재가 그를 쏘아보았다.“너도 이번 달 보너스 취소야!”‘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 보너스까지 취소하는 거야?’주민기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레스토랑 룸.원지훈이 룸으로 들어갔을 때, 룸 안에는 차가운 표정을 한 백유미와 범가온이 앉아있었다.테이블에는 여러 음식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 누구도 입을 대지 않은 듯했다.“유미야, 우리 지훈이 화내지 마. 이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해. 지훈이가 널 배신할 리가 없어.”범가온은 백유미에게 끊임없이 사과했다.반면 백유미는 걸어들어오는 원지훈을 혐오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지훈아, 왜 이제야 왔어. 얼른 유미한테 설명해. 요즘 회사 일로 바삐 보낼 뿐, 유미를 배신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원지훈은 성큼성큼 테이블로 다가가 앉으면서 말했다.“누나, 또 왜 그러는 거예요? 밥 먹자고 부른 거 아니었어요?”“밥 같은 소릴 하고 있네. 너 지금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백유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사진 한 뭉치와 여러 서류들을 원지훈을 향해 던지면서 말했다.“너 대체 고은서랑 무슨 사이야? 고은서랑 개인적으로 연락한 이유는 또 뭐고?”원지훈이 서류와 사진을 들고 확인해 보니 그중에는 오늘 그가 고은서 사무실을 찾아간 모습과 전에 고은서와 복싱관에서 만난 모습이 찍혀있었다.이외에도 그가 고은서에게 연락했던 통화기록과 그녀가 그를 위
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에 차가운 시선을 하고 있었다.고은서는 어젯밤 곽승재가 앞으로는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고은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어차피 모르는 사람인데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겠지.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곽승재는 계속 백유미에게 여지를 주면서도 나랑 이혼하기 싫다는 모습을 비췄잖아. 그렇게 보면 쓰레기 같은 본성을 지녔다는 건 사실이잖아.’“대표님, 조리실 구경해 보실 건가요?”누군가가 곽승재에게 물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답변을 듣지 못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던 서늘한 기운이 사라진거로 봐서는 일행이 자리를 떴다고 생각했다.“주인공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험담하는 건 어떤 기분이야?”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박지연을 향해 눈을 흘기며 답했다.“들으면 듣는 거지 뭐. 난 험담한 게 아니라 사실을 얘기한 거야.”“GS 그룹에서 시찰 나오는 게 오늘일 줄은 몰랐네. 그것도 곽승재가 직접. 은서야, 혹시 네가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온 거 아닐까?”고은서는 바로 부정했다.“아니야.”박지연이 말했다.“그래도 인연인가 보네.”“그런 인연은 필요 없어.”곽승재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깨진 상황에서 고은서는 더 이상 박지연을 설득하지 않았다.박지연은 언제나 자신의 주관이 뚜렷했다.또한 사람이라는 게, 남을 설득하는 것은 쉬워도 정작 자신이 같은 상황에 놓여있을 때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법이었다.마치 전생의 고은서와 곽승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GS 그룹 대표실에서 주민기는 곽승재에게서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감지했다.요즘 곽승재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화를 누르며 가엾은 직원들에게 화풀이하지 않았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곽승재는 갑자기 병원 실사를 진행하겠다고 일정을 변경했다.실사를 마치고 돌아온 곽승재의 표정은 이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대표실 전체에 한파가 닥친 듯했다.비서가 서류를 챙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