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허태준은 다시 한번 말했다.그는 반짝거리는 두 눈으로 심유진을 쳐다봤다.처음으로 여보 소리를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새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심유진은 일부러 허태준의 눈을 피했다. 그녀는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투덜거렸다.“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뭐라는 거예요.”“계속하고 싶었던 말이 있는데 못했어요.”허태준은 여우처럼 반달 같은 눈에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꺼냈다.그의 수상한 모습에 심유진은 괜히 긴장되었다.“내 옆으로 와봐요.”허태준은 목소리를 내리깔고 그녀를 불렀다.그의 부름에 심유진은 저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갔다.거리가 좁혀지자 허태준은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재빨리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악!”심유진은 맥없이 튼튼한 그의 가슴 근육에 부딪혔다.허태준은 그녀를 꽉 껴안아 그의 따뜻하고 촉촉한 콧김이 그녀의 볼에 부딪혔다.그는 자주 이런 투박한 방식으로 심유진을 껴안았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심유진은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짜증 냈다.“좀 부드럽게 안아 줄래요?”언뜻 화난 것 같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애교가 섞여 있다.“알겠어요.”허태준은 평소와 달리 온화한 태도로 수긍했다.“많이 아팠어요?”그는 고개를 숙여 심유진의 손목을 “호호” 불어줬다.그의 입바람은 산들바람처럼 간질간질했다.심유진은 그를 빤히 쳐다봤다.허태준의 긴 속눈썹을 너머로 마음 아파하는 눈빛이 보였다.정말 태양이 서쪽에서 뜨지 않고서야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여보.”허태준은 멈칫했다.몇초의 정적이 흐른 후, 허태준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허태준은 믿을 수 없어 입은 파르르 떨렸다. 그의 모습은 조금 우스꽝스럽기도 했다.“다, 다시 한번 불러봐 줘요!”허태준은 감정이 벅차올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의 마음은 하늘로 치솟듯 기뻤다.그의 반응에 심유진의 얼굴도 덩달아 붉어졌다.심유진은 얼렁뚱땅 상황을 피하려 했지만 허태준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다시 불러줘요
“저희가 이혼한 적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심유진은 병원에서 쓰러졌을 때 여형민이 건넨 이혼합의서에 사인을 한 기억이 있다.당시 심유진은 술에 취해 있었고 허태준과 정소월 때문에 신경이 예민했었다. 그녀는 서류를 제대로 확인 할 겨를도 없이 바로 마지막 페이지에 사인을 했다.“형민이가 준 건 이혼합의서가 아니고 재산 양도 계약서예요. 그리고 저는 이혼합의서에 사인한 적도 없고요.”허태준은 자신의 작전이 성공해서 매우 흐뭇했다. 그는 심유진의 귀를 살짝 깨물었다.심유진은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그녀는 이혼이 성립되었는지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출국했다. 하지만 심유진과 허태준은 6년 동안이나 별거했었고 몸이 멀어지니 마음도 멀어진 건 사실이었다. 하여 여형민이 건넨 서류가 당연히 이혼서류일 거라고 생각했다.게다가 그녀와 이혼을 하지 않으면 정소월과 결혼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자연스러운 절차라고 생각하고 사인했다.“뭔 재산 양도 계약서요?”허태준의 인성과 재력을 봤을 때 전혀 조건웅처럼 재산을 뺏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금전에 관한 얘기에 심유진도 어쩔 수 없이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유진 씨는 모르겠지만...”허태준은 차가운 입술을 심유진의 입술에 포개며 말했다.“유진 씨 지금 CY그룹의 51퍼센트 지분을 가진 최대 주주예요. 제가 유진 씨 기분 상하게 하면 언제든지 저를 회사에서 내쫓을 수 있어요.”이 충격적인 사실을 들은 심유진은 입을 닫지 못했다.“태준 씨, 그런 심각한 일로 장난치지 말아요.”심유진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허태준한테 경고했다.“저 장난치는 것 아니에요.”허태준은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하지만 심유진이 때리기라도 할까 봐 너무 멀리 떨어지진 않았다.“못 믿겠다면 서류를 가져다줄까요?”“보여줘 봐요.”심유진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말했다.“잠깐 기다려요.”심유진이 때리려고 하지 않자 허태준은 그제야 마음 놓고 서재로 향했다.그의 모든 중요한 서류는 모두 서재
허 아주머니는 밤낮으로 출퇴근하느라 바쁜 허태준과 심유진을 대신해 별이를 돌보는 경우가 많아졌다.심유진은 그나마 시간이 여유로운 편이었다. 가끔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허 아주머니랑 마주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허 아주머니는 스쳐 지나가듯 언제 결혼할 것인지 물었다.재혼하게 되는 심유진은 다시 결혼식을 올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었다.이전에 조건웅과의 결혼식은 화려하진 않지만 꽤 그럴듯했다.아마 인생의 목표를 어느 정도 도달한 상태였기에 결혼식에 대한 로망이 없어진 것일 수도 있다.심유진한테 결혼식은 그저 시간 낭비, 돈 낭비, 체력 낭비였다. 그녀는 더 이상 결혼식에 대한 동경과 환상을 잃은 지 오래였다.그녀는 최대한 완곡하게 자기 생각을 표현했다.하지만 너무 완곡했던 탓인지 허 아주머니는 계속 눈치를 채기는커녕 끝없이 밀어붙였다.하는 수 없이 심유진은 허태준과 상의했다.“태준 씨가 아주머니한테 결혼식 안 올린다고 말해줄래요?”허태준은 심유진이 일하느라 바쁜 점을 고려했다. 그는 한 번도 심유진 앞에서 결혼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심유진이 먼저 결혼 얘기를 꺼내자 허태준은 의아하기도 했지만 섭섭하기도 했다.“왜 결혼식을 올리지 않겠다는 거예요?”허태준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저와 유진 씨의 관계를 숨기고 싶은 거예요?”허태준은 아직도 심유진이 가짜 이혼을 하자는 것에 대해 따지고 싶었다.“아니에요!”심유진은 허태준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사실대로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결혼식을 올리는 게 너무 귀찮고 힘든 일이잖아요.”“뭐가 귀찮아요?”허태준은 바로 반박해 나섰다.“제일 유명한 웨딩 플랜 회사에 의뢰할 거예요. 그분들이 알아서 다 준비할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심유진은 사실 예쁘게 단장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만 하면 된다.“그렇게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요?”심유진은 끝내 허태준한테 물었다.허태준은 입을 꾹 다물고 심유진을 뚫어져라 쳐다봤
현재는 2월 중순, 5월에 결혼식을 올리려면 시간이 빠듯했다.허태준은 웨딩업계에서 유명하고 평판이 좋은 팀에게 준비를 맡겼다.그는 일주일간 상의를 거쳐 그의 생각과 요구를 제기했다.웨딩 계획팀에서 그의 요구를 모두 만족하기에는 난이도가 높았지만 최선을 다해서 결혼식을 완성하겠다고 했다....한편.허태준은 친구의 도움으로 하은설과 별이의 입양 관계를 풀어주고 별이의 이름을 허태민으로 바꿔 자신의 호적에 올렸다.하지만 심유진은 허태민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허 씨에 태민이라는 이름을 붙이니 뭔가 조화롭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심유진은 별이가 정식으로 호적에 오르기 전, 이름 성을 육으로 바꿔야 하지 않냐며 허태준과 실랑이를 벌였다.결국 그들은 선택권을 별이한테 주었다.그는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저는 아빠 성을 따를래요!”그 말을 들은 심유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모자 관계를 끊을까도 생각했다....일 년 중 가장 큰 공휴일인 설날.심유진과 하은설이 외국에서 같이 거주한 곳은 한인들이 많은 구역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경주에 있었을 때의 설날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심지어 가끔은 설날인 것을 잊고 평일처럼 지나 보낸 적도 있었다.하지만 올해는 달랐다.허태준의 부모님은 전통을 대대로 지켜온 분들이다.설날까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자 허 아주머니는 매일 별이를 데리고 마트에 갔다. 매번 그들은 트렁크가 가득 차도록 장 봤다.휴일을 마음껏 만끽하기 위해 그들은 서둘러 별이가 다닐 유치원을 찾지 않았다. 그동안 별이는 허 아주머니와 함께 다니며 설날 분위기를 즐겼다.그러다 심유진은 문득 별이가 마트에서 흘러나오는 설날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심유진은 매일 요구대로 업무보고를 써서 김욱의 메일로 보냈다. 가끔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은 화상채팅을 걸어 설명하다가 근황에 대해 얘기하기도 했다.설날이 점점 가까워지자 심유진은 김욱과 육윤엽의 설
섣달그믐날.CY 그룹에도 설 연휴가 찾아왔다. 심유진은 직원들의 급여 정산을 마치고 보너스도 줬다.연휴 첫날 오전, 허태준은 심유진과 별이를 데리고 집 청소를 한 후, 각자 짐을 싸고 허 씨네 별장으로 향했다.허 아주머니는 일주일 내내 본가로 내려와 설을 쇠라고 했다.그녀의 간절한 부탁에 심유진은 거절할 수 없었다. 허태준도 본가에 내려가기 싫었지만 심유진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허 씨네 별장에 도착하자 현관 양옆에는 한국 전통이 묻어있는 태극부채가 걸려있었다.별이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신나서 토끼처럼 뛰어다녔다.“이 부채 제가 직접 건 거예요.”별이는 부채를 가리키며 심유진한테 자랑했다.“그리고 여기 연에 태극마크도 제가 직접 그린 거예요.”별이는 현관문 안쪽에 붙여진 연을 보여주며 말했다.일찍이 허 아주머니는 별이가 예술적 소질을 발휘해 집 장식을 했다고 심유진한테 말했었다.심유진은 신난 별이의 모습에 이미 습관 되어 있었다.별이는 어릴 적부터 명절의 북적거리는 분위기를 좋아했었다. 매해 크리스마스 때에도 별이는 하은설과 함께 뒤뜰에서 나무를 캐고 집에 가져와 각종 장식품으로 장식하여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었다.하지만 별이가 설날을 제대로 즐기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심유진은 이번 설을 통해 별이가 직접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어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한편, 허 아주머니와 허 아주버님은 주방에서 전을 부치고 있었다.여러 가지 전이 식탁에 가득 쌓여있는 것을 보고 심유진은 허 할아버지 집에 갔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설 전날, 심유진은 허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애호박 전을 가득 부쳐줬었다.하지만... 허 할아버지는 젓가락조차 들지 않았었다.“무슨 생각 해요?”허태준은 깊은 생각에 빠진 심유진을 보고 손을 저었다.심유진은 씁쓸한 웃음을 내비쳤다.“그냥 갑자기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요...”허태준은 잠깐 뜸 들이다가 금방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그때 제가 할아버지 좋아하시는 애호박전 부쳐드렸는데 한 입도 안 드셨
심유진은 허태준을 안아주며 위로를 건넸다.“내일 저랑 같이 납골당에 갈까요? 우리 전 좀 싸서 할아버지 뵈러 가요.”허태준은 심유진을 꼭 안았다. 그는 겨우 울음을 참고 입을 뗐다.“그래요.”허 아주머니와 허 아주버님은 일찍이 거실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둘을 발견했지만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흐뭇하게 웃었다.허태준이 겨우 진정된 후 심유진은 그의 손을 잡고 당당히 주방에 들어섰다.“아저씨, 아주머니.”심유진은 예의 바르게 그들을 불렀다.이윽고 허태준은 애초에 심유진과 이혼하지 않은 사실을 고백했다.허 아주머니는 장난스레 심유진을 혼냈다.“근데 계속 아저씨, 아주머니라고 불러?”심유진은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어머니, 아버님!”“그렇지!”허 아주머니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답했다. 허 아주버님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아침부터 대청소하느라 힘들었지? 너희 먼저 방에 올라가서 쉬고 있어. 밥이 다 되면 부를게.”허 아주머니는 다정하게 말했다.“안 그러셔도 돼요.”심유진은 싱크대에서 손을 씻고는 팔을 걷어 올렸다.“제가 전을 부칠게요!”네 사람은 각자 할 일을 나누고 밥을 차리기 시작했다.허 아주버님과 허태준은 잡채와 밥을 짓고 심유진과 허 아주머니는 전을 부쳤다.허태준은 잡채에 들어갈 채소를 다 한 그릇에 담아놓고 간을 하면 별이는 진흙 놀이 하듯 골고루 비볐다.모두 화기애애하게 식사 준비를 하는 와중에 심유진의 휴대폰이 울렸다.심유진은 손에 묻은 기름을 앞치마에 대충 닦고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김욱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심유진은 반가워서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응. 오빠!”“지금 시간 돼?”김욱은 물었다.“시간 있지.”심유진은 그가 회사 일로 전화 온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들한테 양해를 구하고 다급히 이층에 올라갔다.“무슨 일이야?”김욱 주변은 시끌벅적했다. 시끄러운 소리에서 희미하게 경주 사투리가 들려왔다.심유진은 걸음을 멈추고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경주에 온
심유진은 그 두 사람을 그녀의 집에 재울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지내고 있는 집은 사실 허태준의 집이었다.심유진과 허태준이 지내는 집은 워낙 넓어서 두 사람쯤 더 들어와 지내도 될 크기였다. 하지만 육윤엽이 아직 허태준을 못마땅해하는지라 두 사람이 한 침실을 썼다간 불필요한 트러블이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심유진은 조용히 김욱을 한쪽으로 끌고 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진짜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려고? 아버지랑 태준 씨가 싸우기라도 하면 어떡해.”“너 걱정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김욱은 심유진의 이마를 톡톡 치며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삼촌 이미 현실을 다 받아들인 상태야. 예전처럼 폭력적이지 않아.”“진짜지?”심유진은 김욱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내 전 재산을 걸고 장담할게.”김욱은 손을 들고 맹세했다.심유진은 주춤하다가 고민 끝에 겨우 입을 뗐다.“그래. 하지만... 우리는 태준 씨 본가에서 이틀 동안 지내야 해.”심유진은 말하면서 고민에 빠졌다.한쪽은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친아버지와 오빠이고, 다른 한쪽은 함께 설을 쇠기를 고대하던 시부모님 사이에서 누구를 모셔야 할지 선택하기 어려웠다.김욱은 심유진의 사정을 육윤엽한테 전했다.자초지종을 들은 육윤엽은 고개를 돌려 허태준한테 물었다.“나와 김욱이가 자네 본가에 가서 실례해도 되겠나?”“그럼요, 언제든지 오셔도 됩니다!”허태준은 머뭇거리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먼저 우리를 둘이 사는 집으로 데려다주게. 내일 나와 욱이가 자네 본가에 가서 같이 설날을 지내는 게 좋을 것 같네.”“네! 알겠습니다.”육윤엽의 명령에 허태준은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마침 아침에 대청소를 해서 집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덕분에 심유진은 어깨를 펴고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객실은 평소 비어있어서 좀 누추해요”허태준은 그 둘이 마음에 들지 않은 곳이 있을까 봐 조바심을 냈다.“불편한 곳 있으면 언제든지 저한테 말해주세요.”“괜찮네.”육윤엽은 온화한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