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유진은 단톡방의 내용을 보고 졸음이 싹 달아났다.그녀는 더이상 채팅내용을 볼 자신이 없어 침대 옆 서랍에서 태블릿 pc를 꺼내 어제 저녁에 방영된 ≪ 궁금한 스토리 Y ≫을 재생했다.조건웅의 부모는 ‘사연자’ 신분으로 스투디오에 앉아있었다.두 사람은 고상한 모습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초췌해 보였다.조 씨 어머니의 두 눈은 눈물로 벌겋게 부어있었으며 눈에는 실핏줄이 서있었다.사회자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두 분께서는 왜 이 방송을 신청하신거죠?”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 씨 어머니는 고개를 숙이고 소리 없이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그냥…… 우리 며느리에게 사과를 하고 싶습니다……”조씨 아버지는 그녀의 등을 두드리고 있었으며 얼굴에는 서글픈 표정이 역력했다.사회자는 티슈를 두 장 뽑아 그녀에게 건넸다.“그만 진정하시고, 어떤 일로 사과를 하고 싶으신지 상황 설명이 필요한 것 같네요.”조씨 어머니는 얼굴의 눈물을 닦고는 몇 분 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사실 이 일은 모두 제 탓입니다.”“어머님 탓이라고요?”“잘나가는 증권회사의 기술부 팀장인 우리 아들이 호텔 매니저인 지금의 며느리를 만났고, 두 사람은 빠르게 서로에게 빠졌다고 들었어요. 며느리가 예쁘거든요.”“아, 예.”“아들이 누굴 만나는지 저희는 전혀 몰랐거든요…… 근데 어느날 갑자기 지금 며느리를 데리고 와서는 결혼을 하겠다고, 두 사람은 이미 결혼을 마음 먹었다고 하더라고요.”“그렇군요.”“사실 제가 아들을 애지중지 키웠어요. 좋은 것 먹이고 좋은 것 입히고…… 제 눈에는 아직도 아기같은 아들이 결혼을 하겠다니까, 솔직히 달갑지만은 않았습니다. 이건 아들 키우는 엄마라면 다들 공감하실겁니다.”“음……”“그래서 제가 며느리에게 살갑지 못했어요. 그게 며느리와 제가 멀어지게 된 계기가 됐죠. 사실 저와 제 남편이 둘 다 무뚝뚝한 성격이거든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아들이 좋다는데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혼하겠다고 하는데 시켜야죠.”“그래서 반대하는
“아들은 매일 며느리 눈치보기에 바빴던 것 같아요. 아마 고부갈등을 중재하느라 힘들었을 겁니다…… 며느리가 좀 까다로운 편이라, 매번 이게 별로다, 저게 별로다 불평불만을 해도 전 다 참았어요. 왜냐고요? 제 아들이 좋아하니까요. 아들이 좋다는데 제가 뭘 어쩌겠습니까……”“아드님이 힘드셨겠네요.”“어느날 아들이 전화가 와서는 저 때문에 자기 와이프가 자신을 차갑게 대한다며 저한테 뭐라고 하더라고요.”심유진은 기가막혀서 태블릿 pc에 대고 큰소리로 욕했다.“저게 말이야 방귀야!”심유진은 조씨의 어머니가 눈하나 깜빡 않고 거짓말을 하자 피가 거꾸로 솓는 기분이 들었다.사실 그의 어머니의 말에 얼추 사실이 섞여있었는데 원인은 조씨의 어머니가 한 말과는 전혀 달랐다. 설을 보내고 와서 그에게 차갑게 대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나 그에 부모에 대한 불만 때문이 아니라 맡은 호텔 프로젝트에 진척이 없으니 신경 쓸 일이 많아 그런 것 뿐이었다. 조건웅은 착한 아들 코스프레를 하려고 그녀를 판 것이 분명했다.“그후로는 며느리가 무서워서 저도 마음에 안드는 것은 흐린눈하며 별 말 안하고 큰 갈등 없이 지냈어요. 근데…… 아이고 내 아들 불쌍해…… 아이고 내 팔자야!”“울지 마 여보…… 울면 녹화가 안되잖아. 녹화 다 되면 울어!”사회자는 어딘가 이상한 조씨 아버지의 행동에 미간이 찌푸려졌다.조씨 어머니는 또 한바탕 울부짖고 나서야 멈추었다.“우리 아들이 지난달에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차에 허리를 부딪혀 척추 뼈가 크게 손상이 됐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침대에 누워 살 거라고……”“저런…… 안타깝게 됐네요.”“교통사고 이후 수술부터 중환자실, 일반병실로 옮겨질 때까지 며느리는 병원 한 번 찾아온 적이 없어요. 우리가 전화를 걸어도 매번 통화가 안돼서 어쩔 수 없이 제가 며느리 일하는 호텔에 일주일 내내 찾아갔죠. 매일 장대비가 쏟아지던 장마 기간에도 전 며느리에게 사정하러 호텔에 찾아갔어요. 제가 매일 같이 가는 걸 본 거기 직원이 제 며
조씨 어머니는 또 고개를 숙이고 흐느껴 울었고 조씨 아버지는 시종 일관 그녀의 옆에서 그녀를 다독였다.카메라 렌즈는 사회자를 향했고, 사회자는 렌즈를 바라보며 말했다.“여러분, 방금 신청자께서 말씀하신 내용에 진위여부를 파헤치기 위해 저희 궁금한 스토리Y에서는 신청자의 며느리를 찾아가봤는데요. 다음 영상에서 그녀의 태도를 보시죠.”화면이 전환되고, 익숙한 배경이 보이자 심유진은 입을 틀어막았다.“세상에 저긴 내 사무실이잖아! 몰래 촬영을 했던 거야?”녹화 시간을 보니 세 사람이 사무실로 찾아왔던 그때 찍은 영상이 분명했다. 방송에는 ‘증거 확보를 위해 특수 촬영이 되었습니다.’ 라는 자막이 불법 촬영을 합리화하고 있었고, 게다가 동영상은 미묘하게 편집되어 있었다. 그들이 무작정 쳐들어온 장면은 삭제되어 있었고, 심유진이 그 사람들에게 나가라고 하는 장면만 방송에 노출되었다. “이런 악마 편집같으니라고!” 심유진은 하마터면 태블릿을 던져버릴 뻔했다.게다가 동영상에는 호텔 로고가 모자이크 되어있지 않았으며, 심유진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가 봐도 그녀라는 것을 알 법했다.“저희 궁금한 스토리Y에서는 앞으로 신청자와 며느리분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상세하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만약 며느리 분께서 이 방송을 보신다면 속히 남편이나 남편의 가족에게 연락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이번 회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심유진은 방송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나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조씨 집안과 얽히는 게 아니었어……”심유진은 계속해서 울리는 핸드폰을 보며 눈물이 났다.그녀는 용기를 내어 핸드폰에 톡 내용을 하나하나 살폈다.[심 매니저가 방송에서 비춰지는 것처럼 못된 사람이 아니야!][매니저님, 전에 저 할머니가 호텔 로비에서 행패부린 사람 아닌가요?][심 매니저님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거 우리 호텔 사람들이 다 알고 있어요!]심유진은 의외의 응원 톡들을 보고 폭풍같던 마음이 조금 진정됨을 느꼈다.**심유진은 가만히 있는 것. 무대
심유진은 총지배인의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했다.“지배인님, 제가 아무리 억울하다고 해도 더이상 이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호텔에게도 지배인님께도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CY 그룹 펜트하우스 총재 사무실 내.여형민는 휴대폰으로 ≪ 궁금한 스토리Y ≫ 방송 후 달린 네티즌들의 댓글은 읽고 있었다.“이거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네. 심 매니저한테 들은 내용하고는 완전 달라! 완전 사기네 사기!”허태준은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여형민을 싸늘하게 흘겨보았다.“심유진한테 관심이 많네?”“나은희 환심 사려고 내 번호 판 것보단 내가 낫지. 그나저나 네티즌들이 로열 호텔하고 YT 그룹에 심유진을 해고하라고 난리라는데, 유진 씨 도와줘야 하는 거 아냐?”허태준은 방금 올려받은 문서를 힐끗 보았다.“아니, 그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 허태준은 거만한 표정으로 살짝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방송 한 번으로 이런 파장을 일으킬 수는 없는데, 분명 배후가 언론은 조종하고 있는 게 분명해. 그게 밝혀진다면……”**심유진은 방송이 나간 후로 되도록 인터넷을 하지 않았다.로열 호텔 본사에서는 총지배인에게 호텔 이미지를 위해서 심유진을 해고하라고 압박했지만, 총지배인은 온 힘을 다하여 압박을 막아냈고, 심유진에게 한 달 무급휴직 처분만 주었다.조씨 부모는 여러 방송사에 심유진을 비난하는 인터뷰를 했고, 이는 네티즌들을 선동했다.“제 아들의 돈은 며느리가 다 가져갔어요.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서 돈을 벌겠어요? 아들의 병원비조차 낼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병원에서 비용 납부 독촉장을 한 뭉치 보냈어요. 간호사가 말했어요. ‘더 이상 돈을 내지 않으면 내 아들 약을 중단하고, 내 아들을 병원에서 쫓아내겠다.’ 고 말입니다…… 이제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흑흑……”인터넷에서는 조씨 부모의 눈물 섞인 인터뷰를 보며 조건웅 병원비 기부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심지어 심유진은 지인이 인스타 스토리에 조건웅 병원비 기부 링크를
“죄송해요, 심유진 씨.”상대방은 비록 사과했지만 말투에서는 짙은 오기가 느껴졌다.“심유진 씨 시부모님께서 참여하셨던 프로그램이 핫해지면서 저희 제작팀에게 오는 연락이 하루에 수십 개는 넘어요. 현재 우리 프로그램 녹화 일정은 이미 연말까지 잡힌 상태에요. 방송 시간이 늦어도 괜찮다면 먼저 등기할 수는 있어요. 때가 되면 제작진이 심유진 씨에게 구체적인 녹화 시간을 알려드릴 거예요.”심유진은 저번에 자신의 언행이 제작팀 모두에게 피해를 줬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상대방이 일부러 그녀의 트집을 잡는 것도 예상 그대로였다.“괜찮아요.”그녀가 말했다.편집자에게 연락한 것도 시도해 보려는 마음이었다. 성사되면 좋긴 하겠지만 성사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았다. 그녀에겐 또 다른 대책도 있었기 때문이다.호텔업에 종사하면 무척 힘든 것도 사실이었지만 가장 좋은 점은 인맥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로열 호텔 손님은 대부분 7급 재벌들이었다.심유진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연락했다.“내일 혹시 라이브 방송해? 방송 끝나고 한 시간 정도 시간 빌릴 수 있을까?”**제로는 한때 국내 유명한 e스포츠팀 쿠아즈의 멤버 중 한 명이자 e스포츠 업계에 가장 빨리 입문한 여 프로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전성기 시절 쿠아즈를 이끌고 많은 국제 대회에서 대상을 거머쥐게 되면서 많은 현역 선수들의 롤모델로 등극하였다.1년 전 e스포츠 업계에서 퇴역한 뒤 아리 라이브와 계약을 체결하여 현재 BJ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뛰어난 토크 능력과 유머러스한 스타일로 많은 팬들을 얻어 현재 모든 랭킹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BJ 플랫폼의 맏언니로 자리매김했다.심유진과 제로가 처음 만나게 된 건 3년 전이었다. 쿠아즈가 대구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주최 측에서 안배한 호텔이 바로 로열 호텔이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친해지게 된 건 뜻밖의 상황 때문이었다.제로가 호신용 부적처럼 몸에 지니고 다니던 행운의 귀걸이를 방에서 잃어버린
“회사에서 제공해 준 작업실이거든, 아리 라이브가 바로 CY 그룹 소속이야.”제로가 해명했다.**CY 빌딩은 총 70층이었고 이는 대구에서 가장 높은 A급 오피스 빌딩이었다. 모던한 외형과 꼭대기의 투명한 파노라마 전망대는 대구의 랜드마크 중 하나로 유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이번에 심유진이 처음 방문하는 것이었다.저녁 6시 반, 퇴근 시간은 이미 한참 지났고 주위 은행들도 문을 닫았다. 오직 CY 빌딩만이 밤하늘의 별처럼 환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아마 모든 IT 회사들에겐 흔한 광경일 것이다.조건웅이 한때 미친 듯이 야근하던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심유진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빌딩을 무덤덤하게 바라보았다.그녀의 옆에 있던 두 사람도 그녀의 반응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모두 파란만장을 겪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심유진은 제로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도착했어.]제로가 곧바로 답장했다.[지금 바로 내려갈게!]CY 빌딩의 보안시스템은 아주 엄격했고 다들 워크카드와 방문 카드를 가져야만 출입이 가능했다.제로가 입구까지 나온 이유가 바로 그녀에게 방문 카드를 건네주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심유진은 10분 넘게 기다렸지만 그녀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다시 제로에게 연락하려고 할 때 그녀가 보낸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미안해, 언니! 지금 식당에서 저녁 식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엘리베이터가 좀 늦어. ㅠㅠ]심유진은 입술을 꽉 깨문 채 답장했다.[천천히 와.]저녁 바람은 아주 쌀쌀했다. CY 빌딩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세 사람을 길 가던 사람들과 경호원들이 위아래로 훑어보니 그들은 민망하기 그지없었다.옆 스타벅스가 아직 문이 열려있는 걸 확인한 심유진이 말했다.“따뜻한 커피 한잔할래요?”나머지 두 사람도 동의했다.“나도 한 잔 줘요.”심유진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입구에 여형민이 서 있었다.그의 옆에는 휴대폰을 든 채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있는 허태준이 서 있었다.
하지만 여형민은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친구분 아직 내려오지 않았죠?”그는 씩 웃더니 마치 모든 걸 꿰뚫어 본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심유진은 그의 질문에 흠칫 놀랐다가 본능적으로 되물었다.“그건 어떻게 알았어요?”“지금 시간이면 아마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이 꽉 찼을 거예요. 45층이면... 아마 내려오는 층마다 다 걸릴 거예요.”그리고 조금 전 그녀가 문자메시지를 확인했을 때의 반응 곧바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커피를 사러 간다는 건 기다리는 시간이 더욱 길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친구분 그냥 내려오지 말라고 해요. 우리한테 커피 사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가 심유진 씨 데려다줄게요. 우리 회사 커피는 다른 카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이 좋아요!”여형민이 자신만만한 말투로 말했다.심유진은 마지못해 동의하며 말했다.“스타벅스에 잠깐 앉아서 기다리면 돼요. 여 변호사님과 허 대표님은 볼일 보세요!”“우린 그냥 산책하러 나온 것뿐이에요, 하나도 안 바빠요.”여형민은 사뭇 진지한 말투로 대답했다. 하지만 심유진은 그의 말의 진실성이 의심됐다.아무리 봐도 이곳은 산책과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녀가 생각에 잠기기도 전에 여형민은 몸을 돌려 다짜고짜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회전문 너머로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빨리 들어와요!”심유진과 기타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뒤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입구의 게이트는 반드시 카드를 긁어야 문이 열렸다.허태준과 여형민은 단 한 번도 워크카드를 몸에 지니지 않았다. 그들은 줄곧 경호원이 관리하는 특수 통로로 드나들곤 했다.여형민은 심유진을 가리키며 경호원에게 말했다.“심유진 씨 기억해 두세요. 앞으로 우리 회사에 오면 곧바로 문 열어줘요.”경호원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심유진은 신세 지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하고 싶었으나 여형민의 마음을 저버리는 것 같아 경호원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옆
엘리베이터는 중간에 멈추지 않은 탓에 올라가는 속도가 아주 빨랐다. 1층에서 45층까지 올라가는 데 2분도 걸리지 않았다.심유진은 제로에게 직접 올라간다고 얘기한 탓에 제로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한참 돌아가 그녀를 찾았다.제로는 허태준과 여형민을 알지 못했기에 그들 일행이 다 함께 걸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그녀는 심유진에게 물었다.“언니, 두 사람만 더 데려온다고 하지 않았어?”심유진은 피식 웃더니 허태준과 여형민을 가리키며 말했다.“이 두 분은 CY 그룹에서 일하는 친구들이야. 조금 전 회사 앞에서 마주쳐서 우릴 여기까지 바래다줬어.”친구라는 두 글자에 허태준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아아아!”제로도 의심하지 않고 고개 숙여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다급히 말했다.“7시 넘었어, 빨리 작업실로 가자, 라이브 이미 지각이야!”바로 그때 여형민이 물었다.“우리도 가서 봐도 돼요? 현장에서 라이브 본 적은 없거든요!”그가 잔뜩 기대하는 말투로 묻자 제로는 그가 심유진의 지인이라는 이유로 단번에 동의했다.“당연하죠!”CY 빌딩의 45층은 아리 라이브 소속이었는데 A동은 내부 직원들의 사무 존이였고 B동은 BJ 작업실로 개조되었다.매 작업실마다 두 칸으로 나뉘어졌는데 안은 온갖 설비들을 갖춘 라이브룸이었고 밖은 BJ들과 매니저들이 미팅하고 휴식할 때 사용될 미팅룸이 구비되어 있었다.제로의 작업실 안에는 그녀의 조수밖에 없었다.“빨리요! 빨리요!”조수는 서둘러 제로를 라이브룸으로 밀어 넣으며 재촉했다.“5분이나 지각했어요! 팬들 모두 난리가 났다고요!”제로는 고개를 돌려 심유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언니, 나랑 같이 들어가자.”“응?”심유진은 흠칫 놀랐다.“내가 뭣 하러 이토록 일찍 들어가?”그녀들이 약속한 시간은 제로가 라이브를 마친 다음이었다. 그다음 그녀의 계정을 빌려 얘기하려던 것이었다.제로는 두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나랑 같이해야지! 어쩌다가 한 번 왔는데 당연히 내 옆에 앉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