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아가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그 종이는 흰색의 A1용지에 인쇄되어 있어 A4용지보다 훨씬 컸다.종이에는 아무런 무늬나 모양이 없었으며, 손글씨로 무언가 적혀 있었다. 글씨체는 균일하며 힘이 넘쳐 아름답게 느껴질 지경이었다.“건축사자격시험의 개념들과 요점 정리 본이야. 이번 모의고사에서 나올 법한 문제들을 추려봤어. 당신은 틀림없이 이번 모의고사를 잘 볼 수 있을 거야.”소남이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그는 시험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원아는 그에게서 자료를 건네받고 훑어보았다. 내일 시험을 치르게 될 ‘대
지윤은 씁쓸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누구보다 대표님을 원아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스킨십을 하며, 가진 열정을 쏟아붓는 것을 두 눈으로 보는 것만큼 잔인한 일도 없었다. 지윤은 소남이 자신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그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비록 둘만의 식사 자리가 생겨도 업무에 관련한 일 외에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꼬박 십 년 동안이나 문소남을 짝사랑해 왔다.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젊은 시절, 사랑을 동경하던 소녀에서 오늘날
“알겠습니다, 부장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해했습니다.” 서현은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하지윤이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했는데도 못 알아듣는 건 바보나 다름없었다. 설계부서의 차장은 많은 사람이 눈독을 들이는 자리였다. 게다가 설계부서에는 인재가 많았고, 김훈과 주소은 모두 그녀에 뒤지지 않는 실력자들이었다. 서현 자신의 힘으로 그 자리에 올라가려면 몇 년이 걸려도 힘든 일이었다. 그녀는 계획을 잘 세워서 내일 일을 성공한 후에, 반드시 원아를 T그룹에서 사라지게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환
영은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쏟아졌다.주희진은 그녀를 안고 함께 울었다.한쪽에 서 있는 임문정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영은은 그가 십여 년간 길러온 딸로서 정이 많이 들었다. 다만 그가 감정 표현에 서툴러 잘 표현하지 못할 뿐이었다. 영은의 상태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을 본 그는 더는 묻지 않았다. ‘천천히 조사하면 언젠가는 밝혀질 거야.’‘임문정의 딸이 악당들에게 납치되었는데,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이 말이 돼?’‘어이가 없군!’한참을 흐느낀 영은은 이내 피곤이 몰려왔다.요 며칠 동안 그녀는 악
퇴근 무렵, 원아의 고모 원민지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 노인이 손녀를 보고 싶어 하기도 하고, 건강이 잘 회복되고 있는지도 궁금해하시니 언제 한 번 찾아오라는 전화였다. 또 훈아와 원원을 보고 싶어 하신다고도 했다. 최근 원아는 일이 바빴을 뿐만 아니라, 다쳤던 몸이 회복 중이어서 원 노인과는 전화나 영상통화로만 연락했었다. 그녀는 고모의 전화를 받고 이번에는 꼭 할아버지를 뵈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원아는 쌍둥이와 함께 가고 싶었지만 지금 문씨 고택에 있는데다, 소남 역시 다른 지역으로 출장을 간 상황이어서 난감했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원아는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려왔다. 달콤하면서도 시큰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원아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알아요, 할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소남 씨와 결혼하면 이사할 거고, 시어머니와는 함께 살지 않을 거예요. 평소에 자주 만나지 않으면 갈등도 별로 없을 거예요. 참! 그리고 소남 씨는 저에게 아주 잘해 줘요. 저를 괴롭히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요. 만약에 누가 누구를 괴롭힌다고 한다면 제가 소남 씨를 항상 괴롭히고 있
원민지는 혹시라도 원아가 볼까 봐 재빨리 손가락으로 코를 눌렀다. 그리고는 얼른 물을 틀어 주걱에 떨어진 피를 씻어냈다.그녀의 동작은 유난히 빠르고 능숙해서 이미 습관이 된 것 같았다.다행히, 요리 중인 팬에는 피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원아와 등지고 있어 아픈 모습을 들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그녀는 의사가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원 여사님, 여사님의 면역력은 지금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지체하다가는 병만 키우고 결국, 생명이 위험해질 수
시험을 앞둔 원아를 위해 원민지는 아침 일찍 식사를 준비했다. 그녀는 원아가 밥을 다 먹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기사에게 부탁해 시험장까지 데려다 주도록 했다. 원아의 시험장은 어느 명문대에 있었다.시험장 부근은 시험을 치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들 중 대부분은 남자였고, 여자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은 하나같이 손에 문제집을 들고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꾸준히 준비해온 사람도, 벼락치기로 공부한 사람도 모두 진지한 표정이었다. 수험생이 많은 것을 본 운전기사 장민석은 원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