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우는 침묵했다.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던 나는 그와 용설아의 일을 생각하니 화가 났다.“여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두려워하겠어?”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진정우를 보고 있자니 문득본 나는 쑥스러워서 고개를 숙였다.그에게 말하려던 순간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원아, 난 사실 이 네가 나를 멀리하는 것보다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이 더 두려워.”내가 그를 화나게 하고 오해해도 그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해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나를 멀리 밀쳐 밀어내고 있었다.그는 진심으로 나를 위하고 있었다.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지두려운 그 감정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나를 속였으면서, 꿀 발린 듣기 좋은 말만 하지 마!”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어떤 고난과 역경도 함께 이겨나가야 하기 때문이다.진정우는 나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나는 모든 것을 잃어도 너만은 잃으면 안 돼.”이런 직설적인 고백을 하지 않았던 그였기에 이런그의 말에 괜히 나는 마음이 약해졌다.헤어져 있었던 그 시간 동안 그에 대한 오해 때문에 그에게 모질게 굴었으며 심지어 그를 자극하려고 일부러 다른 사람을 만났었다. 그런 모습을 본 그도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말만 잘해, 분명히 네가 나를 밀어내고 나를 버렸어.”말하며 나는 입으로 그를 깨물었다.그의 턱과 수염 그리고 입술...나는 그 사이 모든 서운함을 모두 깨물며 보복했다.깨물다가 나는 자신이 너무 통제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그가 다쳤기에 마음대로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나는 멈췄다. 그리고 이마를 가슴에 파묻고 거칠게 호흡했다...나의 마음을 알고 있던 진정우는 가볍게 웃었다.“웃지 마!”나는 쑥스러워서 그에게 화냈다.그러나 그는 계속 웃었고 나는 그를 자극했다.“웃긴 뭘 웃어, 이게 다 네가 지금 하면 안 되기 때문이야.”그가 다치지만 않았어도 벌거벗겨 덥쳤을 것이다...진정우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고통은 강진혁이 가한 것이기에 나는 기억해 둘 것이다.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와 장난한 이 순간이 너무도 좋았다.중증 환자인 진정우가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척 연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나는 그에게 물었다.“언제까지 의식이 없는 척할 거야?”“내가 이미 의식이 돌아왔잖아, 이제는 안 할 거야.”진정우의 말을 들은 나는 웃었다.“그들을 가지고 노는 거야?”진정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할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들을 잘 데리고 놀 건데.”말투는 차분했으나 말끝마다 날카로웠다.논다고 말했으나 사실 이소희처럼 목숨으로 그들과 싸우고 있다.“소희 씨를 만났어...”이소희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팠던 진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리영이가 전에 소희 씨와 같은 일을 겪은 여자들을 치료한 적이 있대. 그래서 그녀들에게 연락해 더 많은 증거를 수집하게 도와주겠대.”진정우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왜?”나는 손을 흔들어 그의 주의를 돌렸다.“이것은 흑색 산업 체계야. 성매매뿐만 아니라 많은 업무가 해외와 연결되어 있어.”진정우의 설명을 듣고 나는 바로 이해했다.드래곤킹에서 성매매만 했다면 그가 이렇게 힘들게 죽은 척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너의 말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고 또 알고 싶지도 않아.다만 자신을 잘 보호하겠다고 약속해 줘.”내 친구가 피해를 보았고 진정우도 자신의 책임이 있기에 나는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그는 나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나는 네가 연루되어 피해를 보는 것이 두려웠지만 결국엔 너도 연루되었어. 너도 자신을 잘 보호해, 특히 진혁 씨를 조심해.”그렇다, 강진혁은 양의 탈을 쓴 늑대이다.나를 사랑할 때는 아껴주지만 얻을 수 없으면 망가뜨릴 것이다.진정우가 걱정할 것을 알기에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그와 알고 지낸 후부터 그는 줄곧 나를 보호해 줬기에 나는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나연 씨도 드래곤킹에 끌려갔어.”나는 조나연을 이용할 계획을 진정우에게 말했다.진정
‘주인님?’진정우의 말에 나는 깔깔 웃었다. 그에게 이렇게 유머러스한 면이 있을 줄이야.비록 농담이지만, 내 인생에서 이 두 글자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인생은 원래 예측불가한 것이니, 누구도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불확실한 미래에서 누구나 다크호스가 될 수 있는 것이다.진정우와 이소희 두 사람 다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지라, 나 혼자 두 사람을 돌보는 건 무리여서 간병인을 붙여주었다.진정우는 자신이 걷고 움직이고 먹고 마실 수만 있으면 간병인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면서, 기어코 도움받지 않았다.진정우는 낯선 사람이 옆에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 이곳에서 또 무슨 짓 할까 봐 신경 쓰이는 것 같아서 나도 가지 않았다.남자도 때로는 여자 못지않게 눈치가 매우 빠르다.지금의 진정우는 약간 나한테 많이 의지하면서 모처럼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소영이한테 가봐야겠어. 소지훈이 자신한테 접근한 목적을 알았으니 괴로울 거야.”나는 진정우를 달랬다.“걔도 이제 어른이니까 자기 감정 문제쯤은 스스로 처리해야지. 남자 하나 때문에 자포자기하면 그건 너무 나약해.”진정우는 말 속에 말이 있었다.진소영을 가리키는 동시에 나한테 하는 말이기도 했다.나는 진정우와 작은 병실 침대에 같이 비비고 앉아 있으면서 발로 그의 발을 건드렸다.“정우 씨가 날 포기해도, 생사의 고비가 있어도 난 다 견지했는데, 나 너무 씩씩하지 않아?”진정우는 내 손을 입술에 대고 살짝 물었다.“응. 우리 지원이는 슈퍼 몬스터야.”“어라? 내가 왜 몬스터야?”난 진정우에게 항의했다.내 항의는 갓 자란 어린 소녀처럼 조금 유치했다.하지만 사랑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여든이 넘어도 소녀처럼 행동한다.진정우는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몬스터지 그럼. 날 이길 수 있는 작은 몬스터.”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애칭은 정말 다양하지만, 나는 진정우가 지어준 애칭이 마음에 들었다.내가 진정우의 입술을 살짝 물자, 그는 툴툴거렸다.“
또 하나의 수수께끼인 것 같은데, 내가 아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안전하다.진정우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걱정 마. 나 자신을 잘 지킬게. 우리... 꼬마 몬스터한테 내가 필요하잖아.”‘꼬마 몬스터?!’귀여운 애칭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나는 그 자리에서 카톡 이름을 바로 바꾸었다.신지태가 가장 먼저 바뀐 이름을 발견하고 문자가 왔다.[누굴 공격하려고 그래?]몬스터는 누굴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누구한테도 짓밟히지 않는 것이다.신지태와는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휴링턴에서 돌아온 이후로 당구장을 양도했다는 말만 들었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휴링턴의 위험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터라, 신지태의 결정이 전혀 놀랍지 않았다.[악마!]나는 달랑 두 글자로 답장했다.이어서 또 새 문자가 도착했다.[요즘 잘 지내?]내가 잘 지내는지는 인터넷을 접하면 알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질문하는 걸 보니 잘 모르는 것 같았다.[그럼.][지원아, 미안해. 진작 너한테 사과했어야 하는데.]신지태의 문자에 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또 하나의 문자가 도착했다.[나 때문에 진정우가 그렇게 된 거야.]신지태는 모든 것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단지 이 모든 사건의 도화선이라는 걸 잘 모르는 것 같았다.[네 잘못 아니야. 모든 건 하늘의 뜻이자 가장 좋은 결과야.]신지태가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는 잘 모르지만, 혼란스러운 속세에서 벗어난 듯했다. 그게 아니면 나의 현재 상황을 모를 리가 없다.그렇다면 신지태에서 더 이상 고민거리를 제공해 줄 필요가 없다. 적어도 진정우가 살아있다는 건 말할 수 없었다.내가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것만 알려주면 된다.신지태는 답장이 없었고, 나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신지태와 짧은 대화를 마친 후, 나는 쇼핑을 좀 하고 진소영을 찾으러 유치원에 갔다. 진소영이 아닌 다른 선생님이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나는 그 선생님에게 진소영에 대해 물었다.“진소영
진소영을 속인 건 맞지만, 그건 선의의 거짓말이었고 앞서 해명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여전히 용서할 수 없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나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약 진소영이 사리 분별이 된다면 언젠가는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비록 진소영과의 거리가 멀어졌지만, 그곳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소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참견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진정우의 동생이니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까지 사랑하는 셈 치고 참견했다.진소영은 그저 자신이 신뢰하던 사람에게 속아서 화났을 뿐이다.“누나.”통화는 안 됐지만, 소지훈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나는 휴대폰을 넣고 소지훈을 바라보았다. 묻지 않아도 왜 여기 있는지 알 수 있었다.분명 진소영을 만나러 온 것이다.진소영이 나한테도 그 정도 화났으면, 소지훈한테는 더 화났을 것이다.“소영이를 보러 온 건가요? 아니면 소영이 몸에 있는 심장이 신경 쓰이는 건가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잔인한 질문을 던졌다.침묵하는 소지훈을 보며 나는 비웃었다.“아직도 답을 못 찾았나 봐요.”“누나, 나도 너무 머리가 아파요.”퀭한 소지훈의 모습을 보아하니 요 며칠 동안 잘 지내지 못했을 것이다.스스로 만든 고민이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지만, 나는 그래도 한마디 충고했다.“고민을 해결하려면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부터 알아내세요.”말은 쉽지만, 만약 소지훈이 그걸 쉽게 구분할 수 있다면 오늘과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지훈 씨, 전에 소영이를 떠나겠다고 했잖아요.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이 기회에 머리를 좀 식히고 답을 찾아봐요.”“잘 알고 있지만, 조금 무서워요.”소지훈은 보기 드물게 남자의 연약한 면을 드러냈다.“뭐가 무서운데요?”소지훈은 입술을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누나, 소영이가 혹시 심장을 바꿔버리겠다고 안 했어요?”소지훈은 그게 두려워서 여기서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진소영이 홧김에 한 말을 소지훈은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정말 단순한 남자다.하지만 소지훈
강진혁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중요해요.”눈앞의 남자만 아니면 윤지원이 강유형과 갈라진 후, 분명 강진혁한테도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사실 강진혁은 한발 늦은 자신을 여태 탓하고 있었다. 만약 좀 더 일찍 돌아왔다면, 윤지원과 강유형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돌아왔다면 진정우가 낄 자리는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인생에 만약이란 없다. 강진혁은 이미 그 기회를 놓쳤고, 진정우가 그걸 잡았다.“영광스럽게도 강 실장님한테 중요한 사람이 되어버렸네요.”진정우의 말은 강진혁의 마음을 후벼팠다.강진혁은 입을 실룩거리다가 찾아온 의도를 밝혔다.“겉치레 소리는 그만하고 툭 터놓고 말해 봐요.”“뭘요?”진정우는 계속 못 알아듣는 척했다.“진정우 씨가 왜 다른 신분으로 위장하는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진정우 씨는 이미 BF를 떠났어요. 지금 끼어들어서 진정우 씨한테 좋을 건 없어요. 그리고... 진정우 씨 옆에 있는 사람한테도 득이 될 건 없죠.”강진혁은 터놓고 말했다.마지막 한마디는 진정우를 협박하는 것이다.이렇게 된 이상 진정우도 더 이상 모르쇠를 놓을 필요 없었다. 강진혁은 오늘 트집 잡으로 온 게 아니라 협상하러 온 것이었다.“그러니까요. 이미 BF 사람도 아닌데, 왜 저를 놓아주지 않는 거죠? 함정을 판 사람이 저를 놓아주지 않는데, 저도 그럼 협조해 줘야죠.”진정우의 대답에 강진혁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드러났다.그건 진정우가 방금 자기 신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진정우 씨를 끌어들인 건 그쪽 신분 때문이 아니에요.”진정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저를 죽일 생각이었는데, 저한테 다른 신분이 있는 줄 몰랐겠죠. 스스로 화를 불러왔으니, 본인들이 자초한 거예요.”진정우는 일반 전역 군인이 아니었다. 그는 부대에서 비밀 파견을 받고 BF의 일원이 되어 글로벌 범죄자들을 쫓는 일을 도맡았다. BF에 3년 동안 머물면서 전역할 때까지 비밀 신분을 유지했다.만약 휴링턴에서 윤지원을 만나 위험에 처하지 않았다면, 강진혁이 헤르나를 찾아 일을 키
병원에 막 도착했을 때쯤 진정우의 전화를 받았다.“어디야?”진정우의 질문에 시간을 확인해 보니 헤어진 지 3시간밖에 안 됐다.“왜? 내가 보고 싶어?”진정우와는 입만 열면 이런 직설적이면서도 낯간지러운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내 모든 걸 포용해 주었고, 또 그런 말을 듣기 좋아했다. 전에 강유형과 같이 있을 때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거리감이 느껴지는 강유형의 모습에 나는 좋아하는 감정을 마음속으로만 간직하고 있었다.비교가 없으면 상처가 될 일도 없다. 진정우와 함께 지내면서 나는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응, 보고 싶어.”진정우도 애정 표현에 전혀 인색하지 않았다.“10분. 10분 지나면 날 볼 수 있을 거야.”나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지금 병원이야?”진정우는 내가 어디 있는지 짐작하는 것 같았다.막 대답하려는데 진정우가 계속 말했다.“강진혁이 왔다 갔어. 내 신분을 알아챘고, 내가 증거를 수집했다는 것도 알고 내놓으라고 협박했어.”나는 단번에 진정우의 뜻을 이해했다. 나보고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는 말이었다.“분명 내가 찾아올 거라는 걸 예상했을 거야.”“맞아. 그러니까 조심해.”진정우의 말투가 약간 무거워졌다.나도 따라서 신경을 곤두세우며 대답했다.“알겠어.”진정우가 수집한 건 강진혁과 강진혁 배후의 범죄 증거일 것이고, 이번이 두 사람의 마지막 대결이 될 것이다.“조심해서 다녀. 또 너까지 끌어들였네.”진정우는 나까지 이 일에 말려들까 봐 날 밀어냈지만, 결국은 피하지 못했다.“나를 끌어들이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날 한번 믿어 봐.”나는 진정우를 안심시켰다.진정우의 가짜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진정우를 위해 복수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소녀가 아니다.“그래. 일찍 돌아와.”통화를 마친 나는 잠시 멍을 때리다가 차에서 내렸다.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마침 강진혁과 마주쳤다. 정확히 말하면 강진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전에
“지원아, 진정우를 잃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지금 두 사람이 같이 있는데, 그 물건들을 내놓지 않으면 너까지 위험해져.”강진혁은 협박하기 시작했다.“없는 물건을 내가 어떻게 내놔요? 알잖아요. 전에 진정우임을 인정하지 않고 나랑 계속 연기했던 거.”나는 계속 잡아뗐다.내가 협조하지 않자, 강진혁의 표정이 무거워졌다.“지원아, 나는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 걸 원하지 않아. 정말 무슨 일이 발생하면, 나도 널 지켜줄 수 없어.”“진혁 오빠가 언제 날 지켜준 적 있어요?”내 질문에 강진혁은 말문이 막혔다.강진혁은 항상 계산적으로 나를 대했고, 그가 표방하는 사랑도 자신의 소유욕을 채우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나와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자, 강진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알아서 해.”강민혁은 화를 내며 떠났다.예전에 강민혁은 내 앞에서 항상 온화한 귀공자의 모습을 보이면서 예의를 지켰는데, 이제 드디어 본모습을 드러낸 것이다.자신을 위장할 겨를도 없는 것을 보니,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것 같았다.강민혁이 무섭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생각에 잠긴 나는 한눈을 팔면서 심지어 엘리베이터 층도 잘못 눌러 습관적으로 안리영의 산부인과가 있는 층으로 왔다.며칠째 연락을 못 했었기에, 나는 왔던 김에 안리영을 보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엘리베이터에서 막 나오는데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일반 울음소리와는 달라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나는 서둘러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어갔다.그곳에는 한 중년 여인이 바닥에 앉아 울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당신들이 우리 며느리와 손주를 해쳤으니, 목숨값을 갚아.”주위에는 구경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중년 여인의 가족들도 원장을 만나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안리영와 관련이 있을까 봐 걱정되어 곧바로 그녀의 사무실로 가려고 하는데, 내가 가기도 전에 안리영이 다가왔다.“리영아,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지?”나는 걱정하며 물었다.안리영은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
나는 오직 그녀만을 믿었다.“괜찮아. 초음파 사진 봤어. 아기는 아주 건강해.”안리영의 곱고 단정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저 그렇게 미묘하게 번진 웃음 하나가 내겐 믿음을 주는 보약처럼 느껴졌다.“리영아, 제발 이 아이만은 꼭 지킬 수 있게 도와줘.”나는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듯 말했다.“당연하지. 이건 너랑 정우 씨의 사랑의 결실이잖아.”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강유형은 고개를 돌렸다. 감춰지지 못한 외로움이 스쳐 지나갔다.그와의 관계에서 나는 이미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 역시 이별을 받아들였다고 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했다.안리영 덕분에 나는 병실에, 그것도 VIP 병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당직실이 아니라 정식 병실이었다.아랫배의 통증도 가라앉았고 출혈도 점점 잦아들었다. 마음이 조금 놓이자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그 강 선생님이라는 사람, 갑자기 부임한 거라면서? 어떻게 된 일이야?”안리영은 반 박자쯤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소희연의 고모인가 이모인가 그래.”이 말을 듣고 나는 바로 눈치를 챘다. 슬쩍 그녀의 표정을 살폈지만 전과 다를 건 없었다. 다만 얼굴이 조금 더 야위어 보였다.그녀는 구안석과 헤어졌다. 게다가 먼저 끝내자고 한 것도 그녀였다. 실망이 극에 달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구안석은 그녀가 오랜 세월 마음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그 오랜 감정을 끊어낸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나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그런 감정은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위로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히 말했다.“강유형이 병원장한테 얘기할 것 같아.”“고자질할 만하면 해야지.”안리영은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가만히 당해줄 호구도 아니었다.나는 웃음이 터졌다.“의사 선생님답네. 칼 쥐고 돈 받는 직업이라 그런가 마음도 차갑기 그지없군.”“남한테 괜히 마음 써봤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셈이나
“유산 조짐이 있습니다.”그 말을 듣자 나는 마치 환청이라도 들은 듯 얼이 빠졌다.‘유산이라니?’“의사 선생님, 저 임신한 거예요?”놀라움과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의사의 가운을 붙잡았다.“몰랐어요?”의사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곧 못마땅하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요즘 젊은이들은 쾌락만 즐기고 책임질 생각을 전혀 안 한다니까요.”의사는 나와 강유형을 연인으로 착각하고는 설교를 퍼부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걸 해명할 정신도, 그의 핀잔에 대응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재차 물었다.“선생님, 저 정말 임신한 거 맞죠?”“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산 조짐이 보여요. 아이를 지킬 수 있을지는 아직 몰라요.”의사의 말에 나는 그의 가운을 더 꽉 움켜쥐었다.“제발 부탁드릴게요. 아이를 지켜 주세요.”흥분에 겨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요즘 들어 이유 없이 아이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선물처럼 안겨 오다니 꿈만 같은 소식이었다.그런데도 나는 멍청하게 지금까지 아무것도 몰랐었고 그로 인해 아이를 놀라게 하고 말았다.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아가야, 아무 일 없어야 해. 꼭...’“우선은 보태부터 시작할게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화장실을 가는 것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누워 있어야 해요. 일주일 정도 상태를 지켜본 후에 다시 판단할 겁니다. 계속 출혈이 있으면 아이는 지키기 힘들지도 몰라요.”의사는 이미 키보드를 두드리며 처방전을 작성하고 있었다.“선생님, 여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을 수 있을까요?”나는 지금 몸을 함부로 움직이기 두려웠고 그저 병원 안에 머무르고 싶었다.이 병원엔 안리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산부인과 과장이기도 하다.지금은 또 수술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도와줬을 것이 분명했다.“지금은 남는 병상이 없어요. 일단 집에서 안정을
“이 난장판에 끼어들 생각은 없어요. 대단하신 지원 양이 알아서 해봐요.”함소은은 그렇게 말하며 용은서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자. 준호 오빠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너랑 놀아줄 틈 없어”“싫어요! 나랑 안 놀아줄 거면 저 언니를 내려놓으라고 해요! 언니가 나랑 놀아주면 되잖아요!”이 아이는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그래, 그럼 여기서 계속 붙잡고 있어. 난 먼저 간다.”함소은은 아이의 손을 놓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용준호에게 한마디 던졌다.“이번엔 너한테 맡긴다. 제대로 잘 봐. 잃어버리기만 해봐, 아주 그냥.”그러고는 정말로 가버렸다. 그것도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아주 태연하게 말이다.이 여자는 정말 대단했다. 아이는 그렇게 내버려둔 채로 신경도 안 쓰고 가버렸다.하긴 자신의 딸을 납치까지 했던 사람이니 용준호한테 애를 맡기는 건 별일도 아닐 게 분명했다.하지만 그녀의 행동이 내게는 도움이 됐다. 용은서가 용준호를 붙잡고 있는 덕분에 날 업고 도망가기는 어렵게 됐으니 말이다.함소은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유형이 도착했다.코피는 이미 멈췄지만 낯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용준호, 윤지원 놓아줘. 아니면 오늘 나랑 끝을 보든지 해.”강유형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용준호랑 한패도 아니었고 평소에 저렇게 거칠게 말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코피도 아직 덜 닦았구먼 왜 또 여기서 영웅 행세야?”용준호가 빈정거리듯 말했다.“오빠 피도 아직 안 말랐거든.”용준호가 날 어깨에 짊어지고 있어 답답하긴 했지만 한마디는 해야겠다 싶었다.용준호는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한 채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강유형, 이 여자는 이미 딴 남자랑 잤어. 이제 너랑은 아무 관계 없는 여자라고.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남이 쓰던 걸 다시 쓰고 싶냐고.”‘이 자식이 지금 날 뭐라고 한 거야? 지금 붙잡혀 있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렸을 텐데.’“내려놓으라고 했어. 헛소리는 그만하지?”강유형은 더 이상 말다툼할 가치도 없다
사람들이 나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모두 의혹 가득한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멀찍이 서서 바라볼 뿐이었다.용준호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어느 새끼가 감히 널 구하려는지 두고 보자고!”그는 너무나도 오만방자했다.“오빠!”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용준호가 걸음을 멈추었다. 뒤집힌 시야 속에서 만두 머리를 한 여자아이를 보았다.바로 용은서였다.내가 이 여자아이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용준호는 콧방귀를 뀌었다.“저리 썩 꺼져.”살벌한 목소리에 평범한 아이였다면 벌써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하지만 용은서는 그의 혈육이었고 평소에도 늘 호통에 익숙했는지 전혀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물었다.“왜 사람을 업고 있어? 강도 같아!”대담한 발언이었다.“꺼지라니까.”용준호는 음을 길게 끌며 말했다.“사람 말을 못 알아듣나? 집에서 안 가르쳐줬어?”용은서는 눈을 흘기며 받아쳤다.“오빤 맨날 이렇게 화내.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용준호가 다시 호통을 치려는 순간 용은서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오빠, 나 할 말 있어.”용은서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내가 제대로 서 있기만 했어도 당장 품에 안아서 볼에 뽀뽀를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하지만 용준호는 여전히 사나웠다.“꺼지라고 했지. 말 안 들으면 발로 차버린다.”혈육에게 말이 너무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하지만 용은서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오히려 그의 바지 끝을 움켜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은서야, 언니 구해줘!”나는 목소리를 냈지만 어린아이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 소꿉장난처럼 느껴져 부끄럽기 그지없었다.“윤지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한테 도움을 청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냐?” 용준호는 나에게도 으르렁댔다.지금의 그는 미친개처럼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중이었다.“오빠, 왜 언니를 업고 있어? 다쳐서 걷지 못해?”용은서의 질문은 철없는 아이다운 순수함이 묻어났다.용준호의 인내심은 바닥을
“싸움이 났어요, 밖에서 누가 싸우고 있어요!”복도에서 급히 들어온 누군가의 외침에 나는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리고 그 순간 용준호의 주먹이 강유형을 향해 뻗어가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그만둬! 준호 오빠, 당장 멈춰!”나는 소리치며 달려가 그를 말렸다.하지만 그는 내 손을 뿌리치더니 힘껏 내던졌다. 나는 벽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하얘짐을 느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킨 것처럼 어질어질해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그동안 단 한 번도 반격하지 않던 강유형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애틋했다. 걱정이 담긴 목소리였다.“지원아...”그는 내 이름을 부르자마자 곧장 용준호에게 주먹을 날렸다. 곧이어 두 사람은 완전히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두 사람을 바라보다 결국 누군가에게 부탁해 경호원을 불러달라고 했다.몸싸움을 겨우 뜯어말렸을 땐 이미 멍과 상처가 두 사람의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강유형은 계속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한 손으로 코를 막으며 고개를 젖혀 코피를 거꾸로 흐르게 했다.이들이 왜 갑자기 싸운 건지 너무 궁금했지만 강유형의 코피가 너무 심하게 나서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하는 수밖에 없었다.“강유형, 병원으로 들어가자.”그는 꼼짝도 하지 않더니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너는 괜찮아?”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끌었다.“나랑 같이 들어가자”“괜찮아. 금방 멈출 거야.”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내가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찰나 용준호가 고함을 질렀다.“강유형, 이 개자식아! 우리 엄마 어딨어? 당장 우리 엄마 데려와!”나는 멍하니 굳어버렸다. 분명 그의 어머니는 화재로 숨졌다고 했는데 왜 강유형한테서 어머니를 찾는지 알 수가 없었다.“준호 오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나는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봤다.“네가 직접 물어보든지.”“신경 쓰지 마. 미쳐서 그래.”강유형은 단호하게 말했다.
강유형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의 눈가엔 슬픔이 가득했다.수정 스님은 행각승이었다가 법운사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누구도 그의 고향이나 가족을 알지 못했다.굳이 혈육을 꼽으라면 강유형이 유일한 존재일 터였다.그는 어릴 적부터 수정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하며 경을 들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지원아, 먼저 부상자들부터 도와줘.”강유형이 내 슬픔을 잠재우듯 말했다.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나는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화재는 갑자기 일어난 거야? 너 그때 절에 있었어? 이상한 점은 없었고?”강유형의 눈빛이 짙어졌다.“지원아, 그건 내가 조사할 테니 네가 나설 필요 없어.”그 말에서 나는 그가 무언가를 의심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내가 위험에서 멀어지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강유형, 나도 모르는 척 편히 있으려 했지만 이 불은 나를 노리고 온 것 같아서 말이지.”내가 추측을 내뱉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위로의 말이 오리라 예상한 찰나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진정우, 곧 돌아오지?”맞았다. 강진혁이 직접 알려준 소식이었다.“이 화재가 진정우랑 관련 있다는 거야?”내 물음에 그는 담담히 말했다.“네가 방금 너 자신이 표적이라 말했으니 네 일은 곧 그의 일과 마찬가지인 셈이지.”하긴 지금 내 존재는 진정우의 약점이자 방패나 다름없었다.“지금은 급박한 때야. 조심해.”강유형은 문득 말을 멈추더니 이내 덧붙였다.“가능하다면 내 곁에 있어.”그가 나를 지키려는 의도임을 알았다.그래도 나는 되물었다.“진짜로 내가 표적이라면 네 힘만으로는 부족할 텐데.”법운사에 불을 지른 자들은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다. 수정 스님마저 피해자로 만들 정도로 그들은 광기에 사로잡혔던 것이다.김지영이 역시 불길에 휩싸일 줄은 용씨 가문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업보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 따뜻한 분께서 이런 재앙을 마주했다니, 안타까울 뿐이었다.용진표의 혼란스러운 이성 관계가 떠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