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소영을 속인 건 맞지만, 그건 선의의 거짓말이었고 앞서 해명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여전히 용서할 수 없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나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약 진소영이 사리 분별이 된다면 언젠가는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비록 진소영과의 거리가 멀어졌지만, 그곳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소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참견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진정우의 동생이니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까지 사랑하는 셈 치고 참견했다.진소영은 그저 자신이 신뢰하던 사람에게 속아서 화났을 뿐이다.“누나.”통화는 안 됐지만, 소지훈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나는 휴대폰을 넣고 소지훈을 바라보았다. 묻지 않아도 왜 여기 있는지 알 수 있었다.분명 진소영을 만나러 온 것이다.진소영이 나한테도 그 정도 화났으면, 소지훈한테는 더 화났을 것이다.“소영이를 보러 온 건가요? 아니면 소영이 몸에 있는 심장이 신경 쓰이는 건가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잔인한 질문을 던졌다.침묵하는 소지훈을 보며 나는 비웃었다.“아직도 답을 못 찾았나 봐요.”“누나, 나도 너무 머리가 아파요.”퀭한 소지훈의 모습을 보아하니 요 며칠 동안 잘 지내지 못했을 것이다.스스로 만든 고민이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지만, 나는 그래도 한마디 충고했다.“고민을 해결하려면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부터 알아내세요.”말은 쉽지만, 만약 소지훈이 그걸 쉽게 구분할 수 있다면 오늘과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지훈 씨, 전에 소영이를 떠나겠다고 했잖아요.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이 기회에 머리를 좀 식히고 답을 찾아봐요.”“잘 알고 있지만, 조금 무서워요.”소지훈은 보기 드물게 남자의 연약한 면을 드러냈다.“뭐가 무서운데요?”소지훈은 입술을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누나, 소영이가 혹시 심장을 바꿔버리겠다고 안 했어요?”소지훈은 그게 두려워서 여기서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진소영이 홧김에 한 말을 소지훈은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정말 단순한 남자다.하지만 소지훈
강진혁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중요해요.”눈앞의 남자만 아니면 윤지원이 강유형과 갈라진 후, 분명 강진혁한테도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사실 강진혁은 한발 늦은 자신을 여태 탓하고 있었다. 만약 좀 더 일찍 돌아왔다면, 윤지원과 강유형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돌아왔다면 진정우가 낄 자리는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인생에 만약이란 없다. 강진혁은 이미 그 기회를 놓쳤고, 진정우가 그걸 잡았다.“영광스럽게도 강 실장님한테 중요한 사람이 되어버렸네요.”진정우의 말은 강진혁의 마음을 후벼팠다.강진혁은 입을 실룩거리다가 찾아온 의도를 밝혔다.“겉치레 소리는 그만하고 툭 터놓고 말해 봐요.”“뭘요?”진정우는 계속 못 알아듣는 척했다.“진정우 씨가 왜 다른 신분으로 위장하는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진정우 씨는 이미 BF를 떠났어요. 지금 끼어들어서 진정우 씨한테 좋을 건 없어요. 그리고... 진정우 씨 옆에 있는 사람한테도 득이 될 건 없죠.”강진혁은 터놓고 말했다.마지막 한마디는 진정우를 협박하는 것이다.이렇게 된 이상 진정우도 더 이상 모르쇠를 놓을 필요 없었다. 강진혁은 오늘 트집 잡으로 온 게 아니라 협상하러 온 것이었다.“그러니까요. 이미 BF 사람도 아닌데, 왜 저를 놓아주지 않는 거죠? 함정을 판 사람이 저를 놓아주지 않는데, 저도 그럼 협조해 줘야죠.”진정우의 대답에 강진혁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드러났다.그건 진정우가 방금 자기 신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진정우 씨를 끌어들인 건 그쪽 신분 때문이 아니에요.”진정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저를 죽일 생각이었는데, 저한테 다른 신분이 있는 줄 몰랐겠죠. 스스로 화를 불러왔으니, 본인들이 자초한 거예요.”진정우는 일반 전역 군인이 아니었다. 그는 부대에서 비밀 파견을 받고 BF의 일원이 되어 글로벌 범죄자들을 쫓는 일을 도맡았다. BF에 3년 동안 머물면서 전역할 때까지 비밀 신분을 유지했다.만약 휴링턴에서 윤지원을 만나 위험에 처하지 않았다면, 강진혁이 헤르나를 찾아 일을 키
병원에 막 도착했을 때쯤 진정우의 전화를 받았다.“어디야?”진정우의 질문에 시간을 확인해 보니 헤어진 지 3시간밖에 안 됐다.“왜? 내가 보고 싶어?”진정우와는 입만 열면 이런 직설적이면서도 낯간지러운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내 모든 걸 포용해 주었고, 또 그런 말을 듣기 좋아했다. 전에 강유형과 같이 있을 때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거리감이 느껴지는 강유형의 모습에 나는 좋아하는 감정을 마음속으로만 간직하고 있었다.비교가 없으면 상처가 될 일도 없다. 진정우와 함께 지내면서 나는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응, 보고 싶어.”진정우도 애정 표현에 전혀 인색하지 않았다.“10분. 10분 지나면 날 볼 수 있을 거야.”나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지금 병원이야?”진정우는 내가 어디 있는지 짐작하는 것 같았다.막 대답하려는데 진정우가 계속 말했다.“강진혁이 왔다 갔어. 내 신분을 알아챘고, 내가 증거를 수집했다는 것도 알고 내놓으라고 협박했어.”나는 단번에 진정우의 뜻을 이해했다. 나보고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는 말이었다.“분명 내가 찾아올 거라는 걸 예상했을 거야.”“맞아. 그러니까 조심해.”진정우의 말투가 약간 무거워졌다.나도 따라서 신경을 곤두세우며 대답했다.“알겠어.”진정우가 수집한 건 강진혁과 강진혁 배후의 범죄 증거일 것이고, 이번이 두 사람의 마지막 대결이 될 것이다.“조심해서 다녀. 또 너까지 끌어들였네.”진정우는 나까지 이 일에 말려들까 봐 날 밀어냈지만, 결국은 피하지 못했다.“나를 끌어들이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날 한번 믿어 봐.”나는 진정우를 안심시켰다.진정우의 가짜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진정우를 위해 복수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소녀가 아니다.“그래. 일찍 돌아와.”통화를 마친 나는 잠시 멍을 때리다가 차에서 내렸다.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마침 강진혁과 마주쳤다. 정확히 말하면 강진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전에
“지원아, 진정우를 잃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지금 두 사람이 같이 있는데, 그 물건들을 내놓지 않으면 너까지 위험해져.”강진혁은 협박하기 시작했다.“없는 물건을 내가 어떻게 내놔요? 알잖아요. 전에 진정우임을 인정하지 않고 나랑 계속 연기했던 거.”나는 계속 잡아뗐다.내가 협조하지 않자, 강진혁의 표정이 무거워졌다.“지원아, 나는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 걸 원하지 않아. 정말 무슨 일이 발생하면, 나도 널 지켜줄 수 없어.”“진혁 오빠가 언제 날 지켜준 적 있어요?”내 질문에 강진혁은 말문이 막혔다.강진혁은 항상 계산적으로 나를 대했고, 그가 표방하는 사랑도 자신의 소유욕을 채우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나와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자, 강진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알아서 해.”강민혁은 화를 내며 떠났다.예전에 강민혁은 내 앞에서 항상 온화한 귀공자의 모습을 보이면서 예의를 지켰는데, 이제 드디어 본모습을 드러낸 것이다.자신을 위장할 겨를도 없는 것을 보니,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것 같았다.강민혁이 무섭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생각에 잠긴 나는 한눈을 팔면서 심지어 엘리베이터 층도 잘못 눌러 습관적으로 안리영의 산부인과가 있는 층으로 왔다.며칠째 연락을 못 했었기에, 나는 왔던 김에 안리영을 보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엘리베이터에서 막 나오는데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일반 울음소리와는 달라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나는 서둘러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어갔다.그곳에는 한 중년 여인이 바닥에 앉아 울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당신들이 우리 며느리와 손주를 해쳤으니, 목숨값을 갚아.”주위에는 구경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중년 여인의 가족들도 원장을 만나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안리영와 관련이 있을까 봐 걱정되어 곧바로 그녀의 사무실로 가려고 하는데, 내가 가기도 전에 안리영이 다가왔다.“리영아,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지?”나는 걱정하며 물었다.안리영은
“아파?”조시언은 무의미한 질문을 던졌다.안리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시언 앞에서 안리영은 순종적인 아이 같았다.하지만 두 사람의 나이는 얼마 차이 나지 않는다.“응. 그만 움직여.”안리영이 팔을 빼려고 했지만, 조시언은 놓아주지 않았다.“가서 MRI 한번 찍어 봐.”안리영은 놀라 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냥 근육 통증일 뿐인데 MRI를 찍으라니.안리영은 속으로 조시언이 정말 상식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거절했다.“괜찮아. 그럴 필요 없어.”“괜찮으면 안 아파야지. 아프면 괜찮지 않은 거야.”맞는 말이긴 했다.나는 문 앞에 서서 아무런 반박도 못 하는 안리영의 모습에 몰래 웃었다. 전에는 구안석과 안리영을 보면서 흐뭇한 웃음을 지었는데, 지금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니 츤데레 대표 남친과 순진한 토끼 같은 여친의 모습인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삼촌.”기어코 MRI를 찍으라는 조시언의 말에 안리영은 부드럽게 말했다.“약간 주먹에 스쳤다고 MRI 찍으러 가는 게 어딨어? 거기 과실 의사들도 다 직장 동료인데 분명 날 비웃을 거야.”안리영은 그냥 사실대로 말했지만, 말투가 부드러워 애교처럼 들렸다.조시언의 눈빛이 약간 수그러들었다. 안리영의 다정한 눈빛에 조시언은 결국 타협했다.“정말 괜찮아?”“그럼. 못 믿겠으면 한번 봐봐.”안리영은 팔을 돌리며 괜찮다는 걸 증명해 보이려다가 통증에 잠깐 숨을 멈추었다.“그만 움직여.”조시언은 낮은 소리로 화를 냈다.안리영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팔을 가볍게 주물렀다. 조시언도 말이 없었고,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르면서, 조금은 야릇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삼촌, 난 괜찮으니까 가서 일 봐.”안리영은 이유를 찾으면서 조시언을 쫓았다.조시언은 알겠다고 했지만, 가지 않고 한마디 더 당부했다.“의료 사고가 나면 환자 가족들은 다 이성을 잃어. 다시는 그렇게 무모하게 나서지 마. 그리고 둘 다 동의해서 교대한 거니까,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 해도 네 잘못은 없어.”
안리영과는 오랜 친구였지만, 출산 중 일을 들려주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사고에 관한 일이라 들으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안리영이 지금까지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환자 가족도 동시에 두 목숨을 잃었으니, 고통이 말이 아닐 것이다.하지만 그건 의사의 책임도 아니다. 안리영과는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그녀가 생명을 얼마나 경외하는지 잘 알고 있다. 한 가닥의 희망이 있어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그러니까 집도의 선생님도 전혀 책임이 없다는 말이지?”“응. 하지만 환자가 사망했으니까 가족들도 저러는 거야. 들어올 때는 아무 문제 없었는데, 우리가 죽였다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답하면서도 괴로운 표정이었다.의료 사고에 관한 기사를 많이 접했지만, 이런 일이 발생하면 의사에게는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도 선생님은 이미 정직당하고 조사를 받고 있어. 이 일이 도 선생님과 무관하더라도 큰 타격이 있을 거야.”안리영은 한숨을 내쉬었다.안리영이 왜 자책하는지 이해가 됐다. 두 사람이 근무를 교대하지 않았다면, 도 선생님이 이 수술을 책임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이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을 것이다.“이런 일이 발생할 줄은 아무도 몰랐잖아.”내가 위로하자 안리영은 한숨을 쉬었다.“방법이 없지 뭐. 그냥 지켜보는 수밖에.”“이소희 상황은 괜찮아. 아마 곧 회복할 수 있을 거야. 심리 상태도 좋은 것 같아. 전에 상처를 입었던 여자애들은 어느 정도 심리적인 문제가 있거든.”이소희가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마음의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진정우는? 아직도 혼수 상태인 척하고 있어?”안리영이 물었다.“깼어.”나는 안리영이 다른 일 때문에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안리영은 수심에 싸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료 사고 때문에 걱정하는 걸 알고는 있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없었다. 이 일은 그녀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난 괜찮아. 그냥 널 보러 온
‘지나가는 길이었다고?’조시언이 떠난 후에도 안리영은 그의 대답을 계속 되새겼다.이곳은 산부인과인데, 조시언이 여기를 지나간다는 게 말이 안 됐다.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조시언의 여자친구가 이곳에 진료받으러 왔다는 것이다.말이 되는 추측이다. 조시언은 학교 다닐 때부터 따르는 여자들이 많았고, 안리영이 대신 연애편지를 받아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젠 성숙한 남자의 느낌까지 더해졌으니, 조시언처럼 잘생기고 분위기 있는 남자가 여자친구가 없을 리 없다.이번 의료 사고는 영향이 컸다. 산모 가족들이 영상을 인터넷에 올렸기에, 안리영의 부모님까지 알게 되었다.“리영아, 너희 과실에 사고가 생겼다며? 영상을 봤는데 너도 연루되어 있는 건 아니지?”“엄마, 아빠. 난 괜찮아.”안리영은 부모님을 진정시켰다.“우리를 속이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말해. 우리 같이 방법을 생각해 보자.”“정말 괜찮아.”안리영은 다시 한번 부정하며 말을 돌렸다.“엄마, 삼촌한테 여자친구 생겼어?”조민영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리둥절했다.“몰라. 평소 말수가 적은 데다가 우리랑 나이 차이가 커서 너처럼 속에 있는 말을 잘 안 해.”한바탕 잔소리를 한 후, 조민영이 되물었다.“그건 왜 물어? 만나봤어? 어떤 여자였어? 안 그래도 외할머니가 많이 걱정하고 있어.”“그건 아니고, 그냥 물어본 거야.”안리영은 난처한 상황을 만들기 싫었다. 직접 본 건 아니라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내가 널 몰라? 분명 뭔가 본 게 있겠지. 안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애가 아니야. 얼른 엄마한테 말해봐.”조민영의 질문에 안리영은 조시언이 산부인과에 왔던 일을 말했다.조민영은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여친 있는 게 맞네. 안 그러면 남자가 산부인과에 갈 일이 뭐 있어? 기회가 되면 물어봐야겠어.”조민영 말처럼 만약 조시언한테 여자친구가 생긴다면, 제일 기뻐할 사람은 외할머니다. 외할머니가 기뻐하면 조민영도 기쁠 것이고, 조민영이 기뻐하면 안리영네 가족들도 기분이
함소은 울면서 용은서 없어진 과정을 말했다.“유치원 수업이 끝난 후에 백화점에 데리고 갔어요. 물건을 고를 때까지 제 옆에 있었는데, 전화를 받고 보니까 없어졌더라고요.”그 말을 들으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백화점 CCTV를 확인해 봤어요?”“확인해 봤는데 누군가를 쫓아가더라고요. 어딘가 지원 씨와 많이 닮아 보였어요.”함소은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저는 최근에 계속 병원에 있었고, 백화점에 간 적도 없어요.”“지원 씨가 아닌 걸 알아요. 그냥 CCTV를 봤는데 지원 씨와 많이 비슷하더라고요. 은서도 지원 씨인 줄 알고 쫓아갔을 수 있어요.”“...”그 말을 듣고 있노라니 말문이 막혔다. 집에서 가만히 있어도 재앙이 들이닥친다는 게 딱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하지만 함소은의 말에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왜 은서가 쫓아간 사람이 나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가 의문이었다.‘우연일까? 아니면 누군가 일부러 그런 걸까?’“지원 씨, 혹시 친척이나 친구 중에 지원 씨랑 비슷한 사람 없어요? 한번 잘 생각해 봐요.”함소은은 나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나는 고아인데 가족이 있을 리 없다.유희연의 부모님이 삼촌과 외숙모인 것도 얼마 전에 금방 알았고, 유일하게 조금 닮은 자매도 하늘나라로 가서 아는 사람 중에 나와 비슷한 사람은 없었다.“소은 씨,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현상금도 걸었고 경찰도 모든 인력을 동원해 찾고 있고, 그리고 네티즌들도 다들 관심하고 있으니까 곧 찾을 수 있을 거예요.”나는 이렇게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내가 어떻게 조급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은서는 제 딸이에요. 제 친딸.”함소은은 나한테 소리쳤다.딸 걱정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서 그런다는 걸 알고 있기에, 나는 그냥 전화를 귓가에서 조금 멀리 떼고 있다가 함소은의 다 말하자 전화를 끊었다.“지금 널 의심하는 거야?”바로 옆에 있던 진정우는 자연스럽게 모든 통화 내용을 다 들었다.함소은의 말에 나는 생각에 잠겼다.“날 의심하
나는 진정우가 강진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었다.내가 경찰에 끌려와서 구속까지 당했기 때문이다.나는 변호사는 아니지만, 법을 좀 알고는 있다. 기껏해야 용의자일 뿐이라 조사에 협조만 하면 구속할 수는 없다.진정우는 분명 나를 안전한 곳에 가두고 보호할 생각인 것이다. 미리 말해줬기에 나는 긴장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조용히 있었다.처음으로 날 보러 온 사람은 허진호였다. 그는 오자마자 농담했다.“윤 부장, 이번 달 월급은 경찰 아저씨한테서 받아야겠네요.”회사에서의 직급과 최근 근무 상황을 생각하니 조금 부끄러웠다.“부대표님, 저 지금 구두로 사직 신청할게요. 그리고 이제 여기서 나가면 회사에 정식으로 수속 밟으러 갈게요.”“사직하라고 강요하러 온 게 아니니까,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세요.”“알고 있어요. 제가 미안해서요. 제가 사장이면 저 같은 직원은 진작 잘라버렸을 거예요.”허진호는 눈썹을 찡긋하면서 말했다.“윤 부장은 고위층 직속 라인인데 그럴 일은 없죠.”허진호는 드디어 대놓고 말했다. 진정우와 배성재의 신분도 진작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한 것이다.나는 허진호를 놀려보기로 했다.“무슨 직속 라인이요? 진정우 씨 말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이미 재가 됐어요.”허진호는 입을 실룩거렸다.“윤 부장, 저는 남이 아니니 농담 그만 하세요.”“농담이라니요?”나는 계속 모른 척했다.그런 내 모습에 허진호의 표정이 풍부해졌다. 결국 허진호는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독순술로 말했다.“진정우 씨가 걱정하지 말래요. 여기 며칠만 있으면 될 거예요.”며칠만 있으면 나갈 수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너무 심심했다.지난번에 경찰에게 체포된 건 조나연의 남동생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그 망할 놈의 소식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심술을 부렸을 때 강진혁이 데려갔으니, 아마 지금쯤 강진혁 밑에서 일할 것이다.너무 지루하던 차에 누군가 찾아왔으니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허진호를 계속 놀렸다.“진정우가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는 약하고 상처받고 있는 것 같다.옛날에는 이득을 챙기기 위해 시집을 보냈고, 전쟁 시기에는 위안부로 끌려갔으며, 지금은 상품으로 거래되고 있다.나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남자 모델이라며. 그럼 남자 모델도 고퀄리티로 고르는 거야?”진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남자든 여자든 다 똑같은 기준이야.”이제야 왜 용준호한테 가짜라는 걸 들키려 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드래곤킹은 가장 큰 수출 집단이다. 만약 배성재가 사칭이라는 걸 알면 진정우는 아무것도 조사해 낼 수가 없다.“강진혁은 이미 진짜 신분을 알았는데, 왜 용준호한테 말하지 않았을까? 일이 생기면 자신도 연루될 수 있을 텐데.”나는 그 점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그게 강진혁이 똑똑한 곳이야. 드래곤킹에 강진혁 몫도 있다지만, 강진혁에 관한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으니까 두려울 게 없는 거야. 그리고...”진정우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계속 말을 이어갔다.“드래곤킹에 일이 생기길 바랄 거야.”나는 강진혁이 어느 정도 야망을 품고 있는지를 떠올렸다.“드래곤킹에 일이 나면 국내 루트를 혼자 독점하려는 거겠지?”진정우는 웃으며 대답했다.“똑똑하네.”“진우 씨가 이쪽 산업을 통째로 뽑아버리면 어쩌려고?”나는 진정우한테 계속 질문했다. 이런 불법 산업은 여러 단계별로 긴밀한 협력이 필요했다. 진정우가 몰래 잠입한 것도 그들을 송두리째 뿌리까지 뽑아버리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진정우는 절대 작은 불씨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강진혁은 이미 해외에 있는 브라운과 헤르나와 결탁했어. 그자들은 신세대 불법 산업의 대표 주자들이야. 내가 이 낡은 루트를 완전히 망가뜨린다고 해도, 강진혁은 다시 자기만의 새 루트를 만들면 돼.”진정우는 강진혁이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방관하고 있는 이유를 밝혔다.“그럼 강진혁부터 처리해야지. 다시 일어날 수 없게.”나는 오만한 강진혁의 생각에 참을 수 없었다.“그래. 강진혁을 처리하는 것도 내가 맡은 임무 중 하나야.”진정우는 나를
진정우는 손가락으로 내 코끝을 두 번 세게 눌렀다.“너무 똑똑해서 탈이라니까.”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진정우의 손을 피했다.“피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봐.”진정우는 내 머리를 감싸고 말했다.“그만 흔들어. 더 흔들면 어지러워.”“그럼 이유를 말해봐.”나는 진정우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진정우는 거짓말을 할 때면 눈동자에 빛이 없다. 전에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 때 나는 미처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교통사고를 낸 진짜 범인이 누구인 건 알고 있지?”진정우는 내 속눈썹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진정우도 잘 알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지원아, 너 속눈썹이 엄청 길구나. 어렸을 때랑 똑같네.”진정우가 또 화제를 돌렸지만, 나는 계속해서 내 생각을 말했다.“그 말은 용준호한테 보여주는 상처란 말이야?”“맞아. 내가 가짜 배성재라는 걸 용준호가 알게 해선 안 돼.”진정우는 그제야 인정했다.“근데 강진혁은 알잖아.”말을 꺼내자마자 강진혁과 용준호가 한 편은 아니라는 걸 떠올렸다. 강진혁이 진정우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다고 해도 용준호에게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배성재는 무슨 신분이야?”전에도 물었지만 진정우는 많은 걸 알려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배성재가 관건인 것 같아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포주. 뭔 말인지 알겠어?”진정우의 말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무슨 말인지는 당연히 알겠지만, 진정우가 그동안 포주 일을 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어쩐지 이소희가 드래곤킹에서의 일을 쉽게 조사해 내더라니.“배성재가 그냥 일반 모델인 줄 알았는데, 가장 큰 범죄의 원천이었네.”“가장 높은 신분은 아니야. 위에 또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이 진정한 거물이고, 부하들이 전 세계 수십 개국에 퍼져 있어.”진정우는 엄숙한 표정으로 보태어 설명했다.여러 국가가 연루된 국제 범죄인 만큼, 배후의 실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알 수 있었다.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움을 망치려는 벌레들은 항
용준호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그거야 지원 씨가 잘 알겠지.”내가 한 짓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지, 아직 의도를 파악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강진혁과 한배를 타긴 했지만, 두 사람은 같은 편은 아니었다.진정우의 교통사고도 용준호의 소행이지만, 사람들이 강진혁으로 오해하게끔 처리한 것이다. 다른 사람 손을 빌려서 사람을 죽이는 참 음흉한 놈이다.“제가 못마땅해서 놀리고 싶은 사람이 있나 봐요.”나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나한테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건 안 용준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그럼 원한 관계가 있거나, 의심 가는 사람이 생각나면 나한테 말해. 남은 건 지원 씨가 신경 쓸 필요 없어.”“네.”나는 흔쾌히 대답했다.용준호는 몸을 일으키더니 떠나기 전에 한마디 했다.“은서는 단 한 번도 고생한 적 없는데,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네.”용은서의 신분을 생각하면서 나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여동생으로 인정하는 거예요?”“그럼. 귀엽잖아.”용준호는 입꼬리를 올리며 애정 담긴 표정을 지었다.연기인 것 같지 않은 용준호의 반응에 나는 조금 놀랐다.사람은 누구나 착한 면이 있고, 아마 이게 소위 말하는 혈육의 정인 것 같다.용은서의 실종이 진정우 말대로 함소은 짓이라면 아무 위험도 없고 고생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난 여전히 걱정되어 악몽까지 꾸었다.용은서가 누군가에게 붙잡혀 매달려 있는 꿈을 꾸었다. 브라운이 나를 악어 호수에 매달았을 때처럼, 꿈속에서 용은서는 계속 울면서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며 나를 불렀다.“언니, 살려줘요. 언니, 살려줘요 제발...”“은서야, 은서야...”“지원아, 깨어나 봐.”진정우가 나를 악몽에서 끌어냈다.나는 숨을 헐떡이며 진정우를 보았다.진정우는 나를 꼭 안으며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그의 심장 박동을 들었다.“꿈에 은서를 봤는데 매달려 있었어...”“꿈은 다 반대니까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 걔 엄마 짓인데 설마 자기 딸을 해치겠
경찰보다 용준호가 먼저 찾아왔다.지금 용씨 가문 일은 모두 용준호가 나서서 처리하고, 용진표는 뒤에서 안일하게 모든 걸 누리고만 있다.“은서는 어디 있어?”용준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함소은은 단지 나와 비슷한 모습이라고만 했지만, 용준호는 내 짓이라고 단정 짓는 것 같았다.내 모습을 못 알아보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나라고 생각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몰라요.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나도 직설적으로 내가 아니라고 부인했다.“내가 널 찾아온 데는 다 이유가 있어. 돈을 원하면 말해. 사람만 돌려주면 원하는 걸 줄게.”용준호는 이번에는 내가 돈을 밝히는 여자인 것처럼 말했다.하긴,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자산이 외부인들 눈에는 강유형과 헤어지면서 받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심지어 인터넷에 내가 사람 감정으로 거래한다고 비난하는 악플러들도 수두룩했다.“준호 씨는 왜 은서를 원하세요?”나는 더 이상 내가 은서의 실종과 무관하다고 부인하지 않고, 용준호의 의도가 궁금해서 물었다.“지원 씨가 알 바 아니야.”용준호는 진짜 의도를 밝히지 않았다.나는 입을 실룩거리며 계속 물었다.“내가 맞혀볼까요? 용은서를 손에 넣고 함소은을 짓누르려는 거예요? 아니면 용은서를 계속 찾지 못하면 그 여론이 드래곤킹에까지 영향을 미칠까 봐 그래요? 그것도 아니면...”“지원 씨, 그건 우리 집안일이니 신경 꺼.”용준호는 내 말을 끊었다.하지만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용준호 입에서 뭔가는 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궁금했던 것들을 다 털어냈다.“아니면 준호 씨 어머님이 시켰어요?”용준호의 얼굴에 드디어 표정 변화가 약간 생겼다. 조금 의외였다. 용은서를 찾는 게 용준호 어머니의 뜻이었다니.“우리 집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네.”용준호는 조롱하는 말투로 나를 비웃었다.나는 여전히 신경 쓰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은서 일은 저와 전혀 상관없어요. 준호 씨도 제가 요즘 어디 있었는지 잘 알고 있잖아요. 그리고 제가 은서를 납치해서 뭐 하겠
함소은 울면서 용은서 없어진 과정을 말했다.“유치원 수업이 끝난 후에 백화점에 데리고 갔어요. 물건을 고를 때까지 제 옆에 있었는데, 전화를 받고 보니까 없어졌더라고요.”그 말을 들으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백화점 CCTV를 확인해 봤어요?”“확인해 봤는데 누군가를 쫓아가더라고요. 어딘가 지원 씨와 많이 닮아 보였어요.”함소은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저는 최근에 계속 병원에 있었고, 백화점에 간 적도 없어요.”“지원 씨가 아닌 걸 알아요. 그냥 CCTV를 봤는데 지원 씨와 많이 비슷하더라고요. 은서도 지원 씨인 줄 알고 쫓아갔을 수 있어요.”“...”그 말을 듣고 있노라니 말문이 막혔다. 집에서 가만히 있어도 재앙이 들이닥친다는 게 딱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하지만 함소은의 말에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왜 은서가 쫓아간 사람이 나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가 의문이었다.‘우연일까? 아니면 누군가 일부러 그런 걸까?’“지원 씨, 혹시 친척이나 친구 중에 지원 씨랑 비슷한 사람 없어요? 한번 잘 생각해 봐요.”함소은은 나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나는 고아인데 가족이 있을 리 없다.유희연의 부모님이 삼촌과 외숙모인 것도 얼마 전에 금방 알았고, 유일하게 조금 닮은 자매도 하늘나라로 가서 아는 사람 중에 나와 비슷한 사람은 없었다.“소은 씨,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현상금도 걸었고 경찰도 모든 인력을 동원해 찾고 있고, 그리고 네티즌들도 다들 관심하고 있으니까 곧 찾을 수 있을 거예요.”나는 이렇게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내가 어떻게 조급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은서는 제 딸이에요. 제 친딸.”함소은은 나한테 소리쳤다.딸 걱정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서 그런다는 걸 알고 있기에, 나는 그냥 전화를 귓가에서 조금 멀리 떼고 있다가 함소은의 다 말하자 전화를 끊었다.“지금 널 의심하는 거야?”바로 옆에 있던 진정우는 자연스럽게 모든 통화 내용을 다 들었다.함소은의 말에 나는 생각에 잠겼다.“날 의심하
‘지나가는 길이었다고?’조시언이 떠난 후에도 안리영은 그의 대답을 계속 되새겼다.이곳은 산부인과인데, 조시언이 여기를 지나간다는 게 말이 안 됐다.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조시언의 여자친구가 이곳에 진료받으러 왔다는 것이다.말이 되는 추측이다. 조시언은 학교 다닐 때부터 따르는 여자들이 많았고, 안리영이 대신 연애편지를 받아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젠 성숙한 남자의 느낌까지 더해졌으니, 조시언처럼 잘생기고 분위기 있는 남자가 여자친구가 없을 리 없다.이번 의료 사고는 영향이 컸다. 산모 가족들이 영상을 인터넷에 올렸기에, 안리영의 부모님까지 알게 되었다.“리영아, 너희 과실에 사고가 생겼다며? 영상을 봤는데 너도 연루되어 있는 건 아니지?”“엄마, 아빠. 난 괜찮아.”안리영은 부모님을 진정시켰다.“우리를 속이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말해. 우리 같이 방법을 생각해 보자.”“정말 괜찮아.”안리영은 다시 한번 부정하며 말을 돌렸다.“엄마, 삼촌한테 여자친구 생겼어?”조민영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리둥절했다.“몰라. 평소 말수가 적은 데다가 우리랑 나이 차이가 커서 너처럼 속에 있는 말을 잘 안 해.”한바탕 잔소리를 한 후, 조민영이 되물었다.“그건 왜 물어? 만나봤어? 어떤 여자였어? 안 그래도 외할머니가 많이 걱정하고 있어.”“그건 아니고, 그냥 물어본 거야.”안리영은 난처한 상황을 만들기 싫었다. 직접 본 건 아니라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내가 널 몰라? 분명 뭔가 본 게 있겠지. 안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애가 아니야. 얼른 엄마한테 말해봐.”조민영의 질문에 안리영은 조시언이 산부인과에 왔던 일을 말했다.조민영은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여친 있는 게 맞네. 안 그러면 남자가 산부인과에 갈 일이 뭐 있어? 기회가 되면 물어봐야겠어.”조민영 말처럼 만약 조시언한테 여자친구가 생긴다면, 제일 기뻐할 사람은 외할머니다. 외할머니가 기뻐하면 조민영도 기쁠 것이고, 조민영이 기뻐하면 안리영네 가족들도 기분이
안리영과는 오랜 친구였지만, 출산 중 일을 들려주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사고에 관한 일이라 들으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안리영이 지금까지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환자 가족도 동시에 두 목숨을 잃었으니, 고통이 말이 아닐 것이다.하지만 그건 의사의 책임도 아니다. 안리영과는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그녀가 생명을 얼마나 경외하는지 잘 알고 있다. 한 가닥의 희망이 있어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그러니까 집도의 선생님도 전혀 책임이 없다는 말이지?”“응. 하지만 환자가 사망했으니까 가족들도 저러는 거야. 들어올 때는 아무 문제 없었는데, 우리가 죽였다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답하면서도 괴로운 표정이었다.의료 사고에 관한 기사를 많이 접했지만, 이런 일이 발생하면 의사에게는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도 선생님은 이미 정직당하고 조사를 받고 있어. 이 일이 도 선생님과 무관하더라도 큰 타격이 있을 거야.”안리영은 한숨을 내쉬었다.안리영이 왜 자책하는지 이해가 됐다. 두 사람이 근무를 교대하지 않았다면, 도 선생님이 이 수술을 책임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이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을 것이다.“이런 일이 발생할 줄은 아무도 몰랐잖아.”내가 위로하자 안리영은 한숨을 쉬었다.“방법이 없지 뭐. 그냥 지켜보는 수밖에.”“이소희 상황은 괜찮아. 아마 곧 회복할 수 있을 거야. 심리 상태도 좋은 것 같아. 전에 상처를 입었던 여자애들은 어느 정도 심리적인 문제가 있거든.”이소희가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마음의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진정우는? 아직도 혼수 상태인 척하고 있어?”안리영이 물었다.“깼어.”나는 안리영이 다른 일 때문에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안리영은 수심에 싸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료 사고 때문에 걱정하는 걸 알고는 있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없었다. 이 일은 그녀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난 괜찮아. 그냥 널 보러 온
“아파?”조시언은 무의미한 질문을 던졌다.안리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시언 앞에서 안리영은 순종적인 아이 같았다.하지만 두 사람의 나이는 얼마 차이 나지 않는다.“응. 그만 움직여.”안리영이 팔을 빼려고 했지만, 조시언은 놓아주지 않았다.“가서 MRI 한번 찍어 봐.”안리영은 놀라 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냥 근육 통증일 뿐인데 MRI를 찍으라니.안리영은 속으로 조시언이 정말 상식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거절했다.“괜찮아. 그럴 필요 없어.”“괜찮으면 안 아파야지. 아프면 괜찮지 않은 거야.”맞는 말이긴 했다.나는 문 앞에 서서 아무런 반박도 못 하는 안리영의 모습에 몰래 웃었다. 전에는 구안석과 안리영을 보면서 흐뭇한 웃음을 지었는데, 지금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니 츤데레 대표 남친과 순진한 토끼 같은 여친의 모습인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삼촌.”기어코 MRI를 찍으라는 조시언의 말에 안리영은 부드럽게 말했다.“약간 주먹에 스쳤다고 MRI 찍으러 가는 게 어딨어? 거기 과실 의사들도 다 직장 동료인데 분명 날 비웃을 거야.”안리영은 그냥 사실대로 말했지만, 말투가 부드러워 애교처럼 들렸다.조시언의 눈빛이 약간 수그러들었다. 안리영의 다정한 눈빛에 조시언은 결국 타협했다.“정말 괜찮아?”“그럼. 못 믿겠으면 한번 봐봐.”안리영은 팔을 돌리며 괜찮다는 걸 증명해 보이려다가 통증에 잠깐 숨을 멈추었다.“그만 움직여.”조시언은 낮은 소리로 화를 냈다.안리영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팔을 가볍게 주물렀다. 조시언도 말이 없었고,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르면서, 조금은 야릇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삼촌, 난 괜찮으니까 가서 일 봐.”안리영은 이유를 찾으면서 조시언을 쫓았다.조시언은 알겠다고 했지만, 가지 않고 한마디 더 당부했다.“의료 사고가 나면 환자 가족들은 다 이성을 잃어. 다시는 그렇게 무모하게 나서지 마. 그리고 둘 다 동의해서 교대한 거니까,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 해도 네 잘못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