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강유형이 정말 용준호를 한 대 칠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난처한 사람은 나였다.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어 나는 휠체어도 버리고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진짜 하나같이...” 안리영이 주변 사람들을 싸잡아 욕하면서 내 쪽으로 다가와 조용히 내 팔을 잡아 부축했다.그녀는 나를 데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가서야 멈춰 섰다. “지원아, 아까 그 사람 목에 정말 점이 없었어? 혹시 일부러 없앤 거 아닐까? 흉터 같은 건 안 만져졌어?”그녀가 이렇게까지 묻는 건 여전히 배성재가 진정우일지도 모른다는 미련을 떨치지 못해서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 그의 목을 여러 번 확인했다. 혹시나 해서 손끝으로 몇 번이나 훑어봤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내 반응을 본 안리영은 헷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나를 의자에 앉히며 다시 물었다. “그럼 넌 어떻게 생각해? 그 사람이 정말 진정우 같아?”때때로 느낌이란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정확한 법이다. 처음에는 분명 신분을 바꾼 채 나를 일부러 외면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전,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그의 냉정한 태도와 차갑기 그지없는 눈빛을 보면서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진정우는 나를 사랑했다. 그는 나를 위해 직접 방울 팔찌를 만들었고 반지를 주문해 줬다. 나는 아직도 그걸 손에 끼고 있었고 만약 정말 진정우였다면 못 봤을 리가 없고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밀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지원아, 그냥 그 사람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안리영은 더 이상 나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안리영이 한숨을 쉬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DNA 검사를 하면 확실해질 거야. 그 사람, 분명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 진정우의 여동생이나, 아니면 진씨 가문 사람 중 누구랑 비교해 보면 되잖아.”“하지만 진영이랑은 친남매가 아니야.”그
“알았어요.”나는 짧게 하고 대답한 뒤,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묻지 않고 바로 회의실로 향했다.“잠깐만요.” 허진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어제 그 남자 모델, 진짜로 정우 씨 아니에요.”“알아요.” 나는 커피잔을 들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내가 직접 그를 땅에 묻었으니까.”허진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그냥 두겠다는 듯 다시 물러섰다. 나는 회의실 문을 열었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강유형은 마치 내 감정을 읽으려는 듯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하지만 오늘의 나는 요즘 중에서 가장 좋은 상태였다. 게다가 화장까지 하고 나왔으니 거울 속 내 모습이 꽤 근사해 보이기까지 했다.무엇보다도, 밤새 아팠던 다리도 거짓말처럼 나아 이제 걷는 것도 전혀 문제없었다.“좀 늦었네?” 강유형이 나를 훑어보더니 가벼운 농담처럼 말했다.“응, 근데 우리 대표님이 워낙 너그럽거든. 지각했다고 월급 깎지 않더라.”내 말에 강유형의 얼굴이 잠깐 굳어졌다.예전에 내가 KS그룹에 다닐 때, 지각이나 조퇴를 하면 누구든 벌금을 내야 했다. 나는 대표님의 약혼녀라는 타이틀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예외는 없었다.“어제 너한테 계속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 집까지 갔더니 불도 꺼져 있길래 걱정됐어.”강유형은 거침없이 걱정스러웠던 마음을 내비쳤다.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집에 가서 바로 잤어.”“그렇게 쉽게 잘 수 있었어?”“못 잘 이유라도 있어?” 나는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배성재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 사람, 진정우 아니야. 내가 직접 조사해 봤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하더니 바로 그때, 내 주머니 속 핸드폰이 가볍게 진동했다.“밤새 사람 시켜서 조사했어. 관련 자료 다 보냈으니까 확인해 봐.”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윤지원, 진정우는 이미 죽었어. 네가 직접 봤잖아.”나는 손에 쥔 커피잔을 가만히 돌리며 대답했다.“나도 알아. 그 사람이 죽었다는 거.
“솔직히 말해봐, 너 윤지원이랑 해봤어?”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와 막 들어가려던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문틈 사이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강유형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지원이가 먼저 다가왔지만 난 관심 없었어.”“강유형, 그렇게 사람 깎아내리지 마. 윤지원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 미인이야. 꽤 많은 사람들이 윤지원을 노리고 있다고.”말하는 사람은 강유형의 친구 신지태였다. 그는 나와 강유형의 10년 감정을 지켜본 증인이기도 했다.“너무 익숙해서 그래.” 강유형이 눈썹을 찌푸렸다.내가 14살 때 강씨 집안으로 보내졌고 그때 처음으로 강유형을 만났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앞으로 강유형과 결혼할 거라고.그 후로 우리는 함께 살았고 어느새 10년이 흘렀다.“그렇지. 너희 둘은 낮에는 한 회사에서 일하면서 얼굴 보고 밤에는 집에 와서 같은 식탁에서 밥 먹고. 아마 상대방이 하루에 몇 번 화장실 가는지까지 다 알겠어.”신지태가 농담을 던지고는 혀를 찼다. “지금은 오래 보면 정든다는 시대가 아니야. 남녀 사이엔 그래도 신선함이 있어야 하지.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그런 느낌, 그래야 감정이 생기고 자극적인 법이야.”강유형은 침묵했고 신지태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듯했다.“그래서 너 윤지원과 결혼할 거야?” 신지태의 질문에 내 숨이 멎는 것 같았다.강유형의 부모님은 우리에게 혼인신고를 하라고 하셨다. 그는 좋다고도, 싫다고도 하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 묻지 않았다. 그러니 신지태가 나 대신 물어본 셈이다.강유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신지태가 웃었다. “결혼하기 싫어?”“...그건 아니야.”“그럼 결혼은 하고 싶은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는 거지?” 신지태와 강유형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사이라 서로의 마음을 잘 알았다.“지태야, 이런 말 들어봤어?” 강유형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뭔데?”“먹자니 맛없고 버리자니 아깝고.” 강유형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강유형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고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굳이 보지 않아도 내 안색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어디 아파?”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나는 말없이 그의 책상 앞으로 걸어가 목구멍에 맺힌 쓴맛을 삼키며 말했다. “나랑 결혼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아주머니한테 말씀드릴게.”강유형의 미간 주름이 더 깊어졌다. 그는 내가 그와 신지태의 대화를 들었다는 걸 알아챘다.난 목이 메어 말을 잇기 힘들었다. “난 내가 먹자니 맛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존재가 될 줄은 몰랐어, 강유형...”“모든 사람들 눈에는 우린 이미 부부야.” 강유형이 내 말을 끊었다.‘그래서 뭐? 그 사람들 때문에 나랑 결혼하려는 건가?’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가 나를 사랑해서, 나와 평생을 함께 보내고 싶어서 결혼하는 거였다.‘탁’하는 소리와 함께 강유형의 손에 든 펜이 닫혔고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든 혼인 신고서에 머물렀다. “다음 주 수요일에 혼인신고 하러 가자.”이 말은 내가 듣고 싶었 거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가슴이 아팠다. 그것도 아주...난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강유형, 억지로 할 필요 없어. 나도 그럴 필요 없고.”“윤지원!” 그가 날카롭게 내 이름을 불렀다.나는 움찔했고 고개를 들어 그의 짜증 난 듯한 눈과 마주쳤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혼인 신고서를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그의 턱이 굳어졌다. “이리 줘.”나는 움직이지 않았고 분위기는 더욱 팽팽해졌다.몇 초 후, 그가 일어나 내게로 왔고 내 앞에 서더니 한숨을 살짝 내쉬며 말했다. “지태랑 한 얘기는 그냥 농담이었어. 넌 왜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야?”정말 농담이었을까?“너도 알잖아. 남자들에게 체면이 얼마나 중요한 거.” 그의 손이 내 팔을 잡더니 천천히 내려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혼인 신고서를 빼앗아 갔다.“앞으로는 남의 말 함부로 믿지 마.” 그가 돌아서서 혼인 신고서를 서랍에 넣고 옆에 있
하루 종일 이 문제를 고민했지만 오후에 그가 나를 부를 때까지도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난 그를 따라나섰다.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10년이란 시간 동안 나는 그에게, 그리고 퇴근 후 강씨 집안으로 돌아가는 일에 익숙해져 버렸다.“왜 말이 없어?”돌아가는 길에 강유형이 내 기분이 좋지 않음을 눈치챘는지 먼저 물었다.나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강유형, 우리 그냥...”뒷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휴대폰이 울리면서 차량 디스플레이에 이름 없는 번호가 떴고 강유형의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그가 긴장했다.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이미 재빨리 차량 스피커를 끄고 블루투스로 전환했다. “여보세요... 네, 지금 가고 있습니다.”통화 시간은 짧았다. 그는 전화를 끊고 나를 보며 말했다. “지원아, 급한 일이 생겨서 집에 데려다줄 수가 없겠어.”사실 그가 말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나를 내버려두고 갈 거라는 걸. 이미 처음이 아니었으니까.그래도 그가 말하기 전까지는 나를 먼저 데려다줄 거라고 기대했었다.가슴 한구석이 갑자기 텅 비어 아파왔고 나는 서운함을 억누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강유형의 턱이 굳어졌다. 그는 대답 대신 밖을 보며 말했다. “저기서 내려줄게. 택시 타고 돌아가.”설명조차 해주지 않고 이미 다 결정해 놓은 듯했다. 그러니 내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더 묻고 떼를 쓰는 건 스스로 망신당하는 일일 뿐이다.“집에 도착하면 전화... 메시지 보내.” 강유형이 당부하는 사이 핸들은 이미 돌아가 도로변 임시 주차장에 멈춰 섰다.나는 가방을 꼭 쥐고 차에서 내렸다.내가 예민한 게 아니다. 그가 발신번호를 본 후의 이상한 반응부터 차량 스피커로 통화하지 않으려 한 것까지, 이미 예감이 왔다.다만 묻지도 말하지도 않았을 뿐이다.어떤 일들은 묻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그대로 두고 자기 위안을 할 수 있으니.“조심해서 가!” 서두르는 와중에
평생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성추행 혐의로 경찰서에 끌려올 줄이야.그날 내가 부딪힌 건 고작 열일곱 살의 미성년자였다. 그 녀석은 내가 자기를 더럽게 만졌다고 우겼고 내가 아무리 부인해도 소용없었다.“어디를 만졌다는 거죠?” 경찰이 꼼꼼하게 물었다.조태혁이라는 소년은 나를 노려보며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더니 허리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요, 여기... 이 여자가 다 만졌어요.”‘개소리하지 마, 이 자식아!’나는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강유형 같은 미남도 못 만져본 내가 겨우 털도 다 안 난 꼬맹이를 만진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경찰이 다시 나를 쳐다보자 난 그가 묻기도 전에 먼저 부인했다. “전 그 애를 만지지 않았어요. 그저 실수로 부딪쳤을 뿐이에요.”“술 드셨나요?” 경찰의 눈빛이 의미심장했다.이 사회에서 남자가 술에 찌들어 사는 건 정상이지만 여자가 술을 마시면 대부분 품행이 의심받게 된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셨어요.”“얼마나 드셨죠?” 경찰의 이 질문이 지금 상황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맥주 한 병이요.”경찰은 믿지 않는 눈빛을 보였다. 난 즉시 내 친구 안리영이 증인이 돼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 꼬맹이와 내가 다투고 있을 때 안리영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출혈 중인 산모를 구하러 병원으로 긴급 소환됐다고.난 경찰의 의도를 이해하고 다시 한번 설명했다. “전 취하지 않았어요. 술 핑계로 이 꼬맹이를 건드릴 이유도 없고요.”경찰은 내 말을 기록하고 조태혁을 바라봤다. “저 여성분께서 만졌다고 확신해요? 거짓말이나 무고는 법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당연히 확실하죠” 조태혁은 정말 고집불통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일어나 그를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조태혁의 눈이 갑자기 반짝였다. “누나, 왔어?”그가 미성년자니 당연히 보호자를 불렀을 거다. 나는 그의 가족에게 설명하려고 고개를
내 손이 아플 정도로 꽉 잡혔다. 분명 그가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이게 질투인 걸까?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 강유형은 내 손을 놓았고 그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윤지원, 내가 한마디 했다고 이렇게 복수하려는 거야?”나는 순간 당황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으니까.“아니 난...” 설명하려는 내 말은 도중에 끊겼다.“너 정말로 그 녀석을 만졌어? 정말로 그곳을?” 강유형의 턱이 굳어졌고 그의 눈에는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은 무서운 빛이 서렸다.이런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는데 역시 질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순간 내 마음속의 불편함이 많이 사라졌다. 그가 나를 여전히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만약 그가 나를 단순히 여동생이나 친구로만 여겼다면 내가 다른 남자를 만졌다고 해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아니야.” 나는 다시 한번 부인했다.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조태혁이 안에서 나왔고, 나를 향해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변태 아줌마, 또 우리 매형 꼬시려고?”사람 성격 쉽게 안 변한다더니 정말 그랬다.조태혁이 나를 바라보는 그 비열한 표정은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졌나 싶을 정도였다.이쪽으로 걸어오는 남매를 보면서, 특히 조나연의 그 순수한 모습과 그녀가 강유형을 만졌던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손을 들어 강유형의 팔을 감쌌다.하지만 그의 근육이 순간 굳어지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또 거짓말이지.” 조나연이 조태혁의 귀를 꼬집으며 다가왔다.그녀는 우리 앞에 서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유형 씨, 지원 씨, 정말 미안해요.”“네 잘못 아니야.” 강유형이 조태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에 또 이런 짓 하면 아무도 널 구해주지 않을 거야.”“흥.” 조태혁이 불만스럽게 강유형을 흘겨보았다. “당신이 누군데요? 뭔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해요? 당신이 우리 새 매형이 되겠다면 말 들을게요.”“조태혁!”조나연이 꾸짖으며 그를 한 번 더 때렸고 조태혁은 피하며 말했다. “누나, 저 사람
조나연은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아이는 무사했고 그녀는 병실로 돌아왔다. 창백한 얼굴에 붉어진 눈, 거기에 하얀 달빛까지 더해져 정말 애처롭고 가련해 보였다.“너무 걱정하지 마. 아이는 괜찮아.” 강유형이 위로했다.“유형 씨, 나 너무 무서웠어.” 조나연이 울음을 터뜨렸다. 강유형이 휴지를 건네자 조나연은 그것을 받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그의 손등에 기댔다.비록 가엾긴 하지만 그렇다고 남의 약혼자를 자기 남자처럼 대해도 되는 걸까?나는 다가가 말했다. “나연 씨,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가 흥분하면 태아에게 좋지 않대요. 겨우 아이를 지키셨는데 이렇게 울다가 또 문제가 생기면 곤란해질 거예요.”말하면서 난 그녀를 부축하며 강유형과 살짝 떼어놓았다. 하지만 강유형의 손등에 남은 눈물자국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 것이 다른 사람에 의해 더럽혀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깨끗한 걸 좋아한다. 일상에서도 그렇고 감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조나연은 내가 이렇게 말한 것에 놀란 듯했다. 그녀는 얼굴색이 확 변했다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로 잡았다.“유형 씨, 미안해. 내가 이렇게...”그녀가 휴지를 집어 강유형의 손을 닦으려 하자 내가 가로막았다. “나연 씨, 지금은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요.”조나연의 표정이 굳었다. 눈물 고인 눈으로 강유형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분명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병실을 나오자마자 나는 강유형에게 물었다. “나연 씨가 널 좋아하나 봐?”“아니야!”강유형이 부인했다.“그럼 넌? 나연 씨를 좋아해?”한 번에 확실히 물어보고 싶었다. 애매하게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으니까.강유형의 표정이 굳어졌다. 몇 초 후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그저 친구일 뿐이야...”정말 그저 친구일까?“석진이가 세상을 떠날 때 내 손을 잡고 나연이를 돌봐달라고 했어...” 강유형의 목소리가 떨렸고 늘어뜨린 손도 마찬가지였다.임석진의 죽음을 언급할 때마다 그는 항상 이렇게 격앙되
“알았어요.”나는 짧게 하고 대답한 뒤,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묻지 않고 바로 회의실로 향했다.“잠깐만요.” 허진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어제 그 남자 모델, 진짜로 정우 씨 아니에요.”“알아요.” 나는 커피잔을 들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내가 직접 그를 땅에 묻었으니까.”허진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그냥 두겠다는 듯 다시 물러섰다. 나는 회의실 문을 열었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강유형은 마치 내 감정을 읽으려는 듯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하지만 오늘의 나는 요즘 중에서 가장 좋은 상태였다. 게다가 화장까지 하고 나왔으니 거울 속 내 모습이 꽤 근사해 보이기까지 했다.무엇보다도, 밤새 아팠던 다리도 거짓말처럼 나아 이제 걷는 것도 전혀 문제없었다.“좀 늦었네?” 강유형이 나를 훑어보더니 가벼운 농담처럼 말했다.“응, 근데 우리 대표님이 워낙 너그럽거든. 지각했다고 월급 깎지 않더라.”내 말에 강유형의 얼굴이 잠깐 굳어졌다.예전에 내가 KS그룹에 다닐 때, 지각이나 조퇴를 하면 누구든 벌금을 내야 했다. 나는 대표님의 약혼녀라는 타이틀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예외는 없었다.“어제 너한테 계속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 집까지 갔더니 불도 꺼져 있길래 걱정됐어.”강유형은 거침없이 걱정스러웠던 마음을 내비쳤다.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집에 가서 바로 잤어.”“그렇게 쉽게 잘 수 있었어?”“못 잘 이유라도 있어?” 나는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배성재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 사람, 진정우 아니야. 내가 직접 조사해 봤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하더니 바로 그때, 내 주머니 속 핸드폰이 가볍게 진동했다.“밤새 사람 시켜서 조사했어. 관련 자료 다 보냈으니까 확인해 봐.”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윤지원, 진정우는 이미 죽었어. 네가 직접 봤잖아.”나는 손에 쥔 커피잔을 가만히 돌리며 대답했다.“나도 알아. 그 사람이 죽었다는 거.
나는 강유형이 정말 용준호를 한 대 칠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난처한 사람은 나였다.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어 나는 휠체어도 버리고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진짜 하나같이...” 안리영이 주변 사람들을 싸잡아 욕하면서 내 쪽으로 다가와 조용히 내 팔을 잡아 부축했다.그녀는 나를 데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가서야 멈춰 섰다. “지원아, 아까 그 사람 목에 정말 점이 없었어? 혹시 일부러 없앤 거 아닐까? 흉터 같은 건 안 만져졌어?”그녀가 이렇게까지 묻는 건 여전히 배성재가 진정우일지도 모른다는 미련을 떨치지 못해서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 그의 목을 여러 번 확인했다. 혹시나 해서 손끝으로 몇 번이나 훑어봤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내 반응을 본 안리영은 헷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나를 의자에 앉히며 다시 물었다. “그럼 넌 어떻게 생각해? 그 사람이 정말 진정우 같아?”때때로 느낌이란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정확한 법이다. 처음에는 분명 신분을 바꾼 채 나를 일부러 외면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전,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그의 냉정한 태도와 차갑기 그지없는 눈빛을 보면서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진정우는 나를 사랑했다. 그는 나를 위해 직접 방울 팔찌를 만들었고 반지를 주문해 줬다. 나는 아직도 그걸 손에 끼고 있었고 만약 정말 진정우였다면 못 봤을 리가 없고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밀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지원아, 그냥 그 사람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안리영은 더 이상 나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안리영이 한숨을 쉬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DNA 검사를 하면 확실해질 거야. 그 사람, 분명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 진정우의 여동생이나, 아니면 진씨 가문 사람 중 누구랑 비교해 보면 되잖아.”“하지만 진영이랑은 친남매가 아니야.”그
“그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아니면 제대로 못 봐서 가까이서 다시 한번 봐야겠어?”용준호가 말하며 손짓을 하자, 배성재는 조금 더 다가갔다. 그가 강진혁과 강유형 앞에 거의 얼굴을 맞댈 정도로 가까이 서자, 이제 그들은 그의 모공까지도 볼 수 있었다.물론 나도 그 장면을 똑똑히 봤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무조건 진정우가 맞다고 확신했다.“용준호, 정말 대단해. 이런 사람을 어디서 구해왔어?” 강유형이 낮게 비웃었다. 그러자 용준호는 차분하게 미소 지었다. “운명 같은 거지.”그리고 나를 보며 물었다. “그렇죠, 지원아?”나는 진정우가 맞는지 확인하려고 뚫어지게 배성재를 바라보았다.“성재야, 지원 씨가 네가 좋다며 너를 데려가고 싶대. 괜찮겠어?” 용준호가 조금 귀찮은 듯 말하며 본격적으로 질문을 던졌다.“도련님, 제 원칙 알잖아요. 저는 몸을 팔지 않아요.” 배성재는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했다. 그 말에 강진혁과 강유형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용준호가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봐봐. 내가 말했지? 절대 동의 안 한다고.”“다른 일 없으면 전 돌아갈게요.” 배성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려 했다. 그때 내 어깨가 살짝 무거워지더니 안리영이 내 팔을 짚으며 손끝으로 내게 신호를 보냈다.“잠깐만요.” 나는 배성재를 불렀고 일어나서 두 걸음 걸어 그에게 다가갔다. 나는 팔로 그의 목을 감싸며 발끝을 들고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윤지원, 너 뭐 하는 거야?” 강진혁이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외쳤고 안리영도 얼른 덧붙였다. “지원이가 지금 사람을 홀리고 있어요.”그 틈에 나는 손을 배성재의 목덜미에 가져갔지만 그곳은 부드럽고 매끄러워, 아무것도 없었다.나는 실망감에 빠져서 다시 한번 그곳을 더듬어 보았다. 뒷머리까지 만져보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진정우에게 있던 그 점, 손끝으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분명했던 그 자국은 여기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그가 진정우가 아님을 깨달았다.팔을 풀고 물러
“네가 끝났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지. 강유형은 널 잊지 못한 것 같은데. 너밖에 신경 안 쓰이는 것 같아.” 안리영이 시원하게 한마디 했다.조시언이 자리에 앉으면서 드디어 조명이 켜지고 공연이 시작됐다. 50분이 넘는 공연 동안 조명이 하나도 반복되지 않았고 특히 마지막에 나온 남성 모델들의 몸을 이용한 조명 쇼는 관객들에게 우리 회사의 창의력과 연구 개발 능력을 제대로 보여줬다.쇼가 끝날 때, 우리 회사 로고가 크게 빛을 내며 등장했고 관객들은 뜨겁게 박수를 보냈다.“정말 창의적이고 신선하네요, 특히 마지막 조명 쇼가 인상 깊었어요.” 고객인 조시언은 매우 높이 평가했다.“이건 저희 마케팅 부서 윤지원 부장님의 기획이에요.” 허진호는 나에게 공을 돌리며 칭찬했다.모두가 나를 향해 박수를 쳤고 용준호는 농담처럼 한마디 했다. “윤지원 부장님의 기획도 좋지만 우리 남자 모델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죠.”“맞아요, 그래서 준호 씨의 지원에 감사해요.” 나는 고마움을 표현했다.“윤지원 부장님을 돕게 되어 영광이죠.” 용준호는 그렇게 말하며 강진혁과 강유형을 쳐다봤다.“두 분, 맞죠?”용준호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사건을 키우는 걸 좋아했다. 나는 그가 강진혁과 강유형을 자극하려는 의도임을 잘 알았다.그들이 지금 이 순간에 이 사람과 협력한 걸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느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그저 배성재가 진정우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배성재는 용준호 사람이라, 용준호를 빼고는 그를 빼낼 방법이 없었다.“준호 씨, 그 배성재 모델 제가 데리고 있어도 될까요?”용준호가 웃으며 말했다. “마음에 들어?”“네!”나는 당당하게 대답했지만 내 한마디에 강유형과 강진혁의 표정은 확실히 어두워졌다.용준호는 그들을 보고 잠시 웃더니 다시 말했다. “안돼. 우리 클럽의 남자 모델들은 모두 규칙을 지키며 일요. 고객을 위한 서비스는 제공하지만 그 이상의 서비스는 제공하지 않아.”
“안리영, 너 왜 이렇게 네 삼촌을 무서워해? 혹시 그 사람한테 뭔가 잘못한 거 있냐?”내가 휠체어를 타고 천천히 가는 동안 참지 못하고 물어봤다.안리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다시 물었다.“정말 뭐가 있긴 한 거지?”“우리 그 얘기 그만하자.”안리영의 말을 듣자 나는 뭔가 비밀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나는 손으로 안리영을 톡톡 쳤다.“내가 한번 맞춰볼까? 혹시 네가 그 사람 잘생긴 얼굴에 홀려서 뭔가 더 과한 짓을 한 거 아니야?”“무슨 말이야, 내 삼촌이라고.” 안리영이 내 머리를 가볍게 쳤다.“그럼 왜 그를 보면 그렇게 떨고 겁을 먹고 있어?”나는 정말 궁금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의 안리영이 이렇게 떨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별거 아니야, 그냥 내가 한 번 우연히 삼촌이 샤워하는 걸 봤거든.” 안리영의 말에 나는 놀라서 멈췄다.“뭐라고? 어디서 봤어? 다 봤어?”안리영이 눈을 감았다. “그만 말해.”“왜?”그 말에 안리영은 한숨을 내쉬고 결국 솔직히 말했다.“욕실에서... 다 봤어.”“뭐야! 대박!”나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혹시 술 취해서 실수로 들어간 거 아니야?”“아니야.” 안리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날 내가 외할머니 집에 갔었고 그 집엔 아무도 없었어. 나는 땀을 흘려서 씻고 싶어서 위층에 올라갔고 그 방에 들어갔어. 그리고 욕실로 가서...”그 뒤 이야기는 말하지 않아도 나는 다 짐작이 갔다.“그 욕실에서 물소리 안 들렸어?”안리영이 한숨을 쉬었다. “그때 내가 이어폰 끼고 음악 듣고 있었어.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갔지.”“잠깐만!” 내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너 옷 벗고 욕실에 들어갔다고? 그러면... 너도 그 사람처럼 전부 다 보여준 거네?”안리영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하하.” 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화가 난 안리영은 내 머리를 쳤다. “그럼 너도 이제 신경 쓸 필요 없겠네, 다 봤으니 서로 부끄러울 것도 없잖아?”“나야말로 부
안리영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왜 이렇게 소심해. 손 한 번 만지는 것도 안 되나요?”배성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죄송합니다. 저는 몸은 팔지 않아요. 부담스럽네요.”그렇게 똑 부러지면서도 예의 바른 남자를 마주하자 안리영은 더 이상 그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손을 빼며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올해 몇 살이에요?”“스물아홉입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얼굴을 잠시 올려다보며 물었다.“키는요?”“183.7cm예요.”안리영은 또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대학교는 다녔나요?”“네, 청수대 인공지능 전공입니다.”“음, 요즘 그 전공 많이 인기 있죠.” 그 말은, 이렇게 좋은 전공을 하고도 남자 모델을 한다는 게 아깝다는 뜻이었다.“이건 제 알바예요.”배성재가 덧붙였다.안리영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요즘 사람들은 이렇게 바쁘게 살고 있나? 제대로 된 본업도 있으면서 왜 알바를 할까?’그와 같은 열정적인 사람과 비교하니 나는 내 자신이 정말 게으른 사람 같았다.“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이네요.”안리영이 감탄하며 말했다. 배성재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해 안리영에게 말했다.“가자, 공연 곧 시작해.”안리영은 배성재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부모님이 아이를 잃어본 적 있어요?”“저는 외동이에요.”안리영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부모님 유전자 정말 좋네요.”그녀는 나를 밀며 조용히 속삭였다.“아까 말한 것 중에 진정우랑 겹치는 부분이 있어?”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 외에는 진정우와 일치하는 점이 전혀 없었다.“그 사람이 진정우가 아니라고 하는데 얼굴은 진짜 똑같고 목소리도 아니고 정보도 다르고... 진짜 진정우인지 모르겠어.” 안리영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나는 아무 말 없이 침묵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 남자를 어떻게 더 시험해 볼지 고민하고 있었다. 진정우가 아니라고 한다면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윤지원, 왜 휠체어에 앉아 있어?”강유형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자 고개를 돌리니 그와 조시언이 다가오고 있었다.두 사람은 각각 흰색 셔츠와 검은 셔츠를 입고 흑백 조합이 시선을 사로잡았다.“오늘 정말 시끌시끌하네, 하나같이 다 왔네.”안리영이 작게 투덜거렸다. 이렇게 작은 조명 쇼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릴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안리영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조시언이 오기 싫어서였겠지만 그는 고객이었고 이번 쇼를 보러 온 사람 중 하나였다.강유형이 내 쪽으로 걸어오며 내 다리를 쳐다봤다. “어디 다친 거야?”“무릎을 살짝 긁혔어. 별일 아니야.”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강유형은 믿지 않았다. “별일 아니라는 사람은 휠체어에 앉지 않아.”“정말 괜찮아요. 강진혁 씨가 너무 걱정해서 휠체어를 가져온 거예요. 지원이도 안 타려고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된 거죠.” 안리영이 대신 설명했다. 안리영 덕분에 강유형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물론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그럴 만도 했다.안리영은 강유형의 반응을 무시하고 내게 덧붙였다. “하지만 이 휠체어는 꽤 괜찮아. 이렇게 밀고 다니면 다리가 좀 더 편하겠네. 널 세심하게 챙기고 다니는 건 확실히 강유형보다 나아.”그러자 강유형이 턱을 굳게 다물었 그 옆에서 조시언이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풀어줬다.“너희 어디 가는 거야?”“멋진 남자들 보러 가요.”안리영이 대답했다. 그 말에 강유형은 한숨을 쉬었지만 우리는 그저 그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백스테이지에 들어서자 마자 대기 중인 남자 모델들이 보였다. 모두 이미 의상을 갈아입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다들 비슷한 체형에 못지않게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와, 이 몸매들 정말 장난 아니네!” 안리영은 역시 중요한 포인트를 잘 찝었다.“몸매보다는 얼굴이 중요하지.” 나는 살짝 눈치를 주며 말했다.“그거야 알지만 자세히 볼 수 있으면 좋겠네.” 안리영은 발끝으로 서서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봤다.그때, 무대 감
“그가 이 일을 시작한 지 2년이나 됐다고요?” 나는 놀라움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더 큰 실망감을 느꼈다.진정우가 사고를 당한 지 몇달 밖에 안 되었으니 무대 위에 서 있는 사람은 분명히 진정우가 아니다.그런데 왜 이 사람은 진정우랑 이렇게 똑같이 생긴 걸까?혹시 이 사람과 진정우의 관계는, 내가 유희연과 같은 관계처럼 비슷한 건가?나는 그 사람을 유심히 쳐다보며 머릿속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강진혁이 내 이름을 부를 때까지 그가 왔다는 것도 몰랐다. “너, 얼굴이 안 좋다. 어디 아파?” 강진혁은 나의 상태를 바로 알아챘다.“다쳤어.” 용준호가 그 말을 대신했다.하지만 그가 말한‘다쳤다’는 내 몸의 상처뿐 아니라, 내 마음의 상처도 포함된 말이었다. 용준호가 이렇게 진정우랑 닮은 사람을 일부러 데려다 놓은 건, 분명히 나를 괴롭히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무릎을 다쳤어요.” 이번엔 허진호가 또 내 말을 대신해 주었다. 정말 고마운 두 남자 덕분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겠다.강진혁은 살짝 찡그리며 내 바지를 올리려고 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지만 강진혁의 손은 매우 빠르고 금세 내 발목을 잡았다. 그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움직이지 마, 잠깐만 볼게.”그가 내 바지를 살짝 올리자 상처가 드러났다. 강진혁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언제 다친 거야? 이렇게 심각한데 왜 말 안 했어?”그 모습이 마치 걱정스러워하면서도 나에게 화가 난, 그런 전형적인 남자 친구의 모습 같았다. 만약 내가 그가 의도가 나쁘지 않다는 걸 알지 못했다면 사실 그의 행동에 감동했을지도 모르겠다.“이미 안리영한테 확인을 받았어요. 별일 없었어요.” 나는 다리를 흔들며 말했다.그의 얼굴은 굳어졌고 다시 내 상처를 살펴본 후, 몇 초 후에야 바지를 내려놓고 일어섰다.“이렇게 다정한 모습은 지원이 앞에서만 볼 수 있네. 강진혁.” 용준호가 놀리듯 말했지만 강진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정우였다!지난번 골목에서 봤던 그 모습과 똑같았다.그때 내가 넘어져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보겠다고 결심하고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나 또다시 내 상처를 잊고 움직이자 그대로 넘어졌다.“어이, 이 여자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니야? 날 안고 싶으면 그냥 말해.”용준호는 장난스럽게 나를 일으켜 세웠다.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소리쳤다.“불 켜!”내 말에 연습 중이던 사람들이 모두 멈췄지만 여전히 무대 뒤쪽의 불은 꺼져 있었다.“불 켜!” 내가 다시 소리쳤다. 밖에서 들어온 허진호가 내 소리에 놀라며 말했다.“뭐야? 불 켜, 빨리 켜!”허진호의 말에 모두가 움직여, 뒤쪽의 조명이 켜지자 눈이 부셔서 모두 눈을 찡그렸다.나는 무대 위의 모델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나씩 얼굴을 살피다가, 결국 가장 중앙에 있는 얼굴에 시선이 멈췄다.그 얼굴은 내가 매일 밤 꿈에서 그리워했던 얼굴, 진정우의 얼굴이었다.그가 드디어 살아 돌아와 내 앞에 서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너무 낯설고 심지어 어쩐지 혼란스럽고 불안한 기색까지 감돌았다.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리의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무대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너 뭐 하는 거야?” 용준호가 물었다. 허진호는 무대 위 사람을 가리키며 혼란스러워했다. “정우 씨, 정... 정우 씨가 여기 어떻게...”허진호 역시 충격을 받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나는 비틀거리며 무대 앞에 다가가 그 얼굴을 더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정말 진정우의 얼굴이 맞다고 나는 확신했다.“진정우.” 나는 그토록 많이 부른 이름을 낮게 불렀다. 하지만 무대 위의 남자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나를 부축하던 용준호가 웃으며 말했다.“지원아, 이 남자는 진정우가 아니야. 배성재야. 여기서 제일 유명한 모델이야.”용준호는 그렇게 말하며 손짓을 하자 배성재는 곧장 다가왔다. “준호 도련님.”“윤지원 씨야, 인사해.” 용준호가 말했다.배성재는 순순히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