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빚을 갚은 겁니다.”배성재의 대답은 단순했고 동시에 그가 나를 오해했던 일도 떠올랐다.“그럼 왜 그렇게 딱 맞춰 제가 위험할 때 나타난 거죠? 저도 이제 당신이 일부러 판 함정 아닐까 의심해야 하는 건가요?”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전방을 주시한 채, 담담하게 대답했다.“미안합니다. 제가 당신을 오해했군요.”그의 뜻밖의 빠른 인정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방금 전에 그 남자가 전화하는 걸 들었어요. 오늘 일은 강유형의 짓이 아니라, 강진혁이 주도한 거더군요.”그의 말에 나는 순간 멍해졌다.‘뭐라고? 방금 그 남자는 분명 강유형이라고 했는데?’그러자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증거가 있습니다. 녹음해 뒀어요.”그는 휴대폰을 꺼내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대표님, 일 처리 끝났습니다. 지원 씨가 강유형 님이 한 짓이라고 믿고 있습니다.”나는 휴대폰을 쥔 손을 살짝 떨었다.나는 지금까지 강유형이 움직였다고 확신했었지만 이 녹음이 사실이라면 강진혁은 내가 강유형을 의심하도록 유도한 셈이고 최근 강유형이 나한테 신경 쓰는 게 불편했던 거였다.나는 불현듯, 진정우가 사고를 당했던 날이 떠올랐다.그때도 강진혁은 진정우, 강유형, 그리고 신지태까지 한 번에 제거하려 했었다.그는 나를 얻기 위해서라면 가족이고 뭐고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만약 그가 나를 차지할 수 없다면 나 역시도 제거 대상이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평소 온화하고 친절했던 그의 모습과, 지금 그의 행동이 너무나 대조적이었다.강진혁은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었나? 아니면 처음부터 연기였던 걸까?”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창밖을 바라봤다. 그렇게 아무런 말 없이 병원에 도착했고 차가 멈춰 선 순간 배성재가 내게 물었다.“조금 전에 당신을 치려던 차, 누가 보낸 거라고 생각해요?”나는 순간 당황하며 그를 바라봤다.사실, 지금까지 그 부분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지만 확실한 건, 그 차는 분명 나를 겨냥한 것이었다.그리고 만약 배성재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크게
손끝에 날카로운 통증이 스쳤다. 본능적으로 손을 움켜쥐려 했지만 배성재가 단단히 붙잡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조금만 참으세요. 금방 끝납니다.”그의 목소리는 전에 듣던 차가운 톤과 달리 부드러웠다.‘이 사람, 기분이 바뀌는 속도가 한여름 날씨보다 더 변덕스럽네.’간호사는 능숙한 솜씨로 내 손끝에 박힌 유리 조각을 제거했다. 그녀는 조각을 핀셋으로 집어 들어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보세요. 이렇게 크잖아요. 그대로 두면 계속 찌르고 아팠을 거예요.”나는 언제 유리가 박혔는지도 몰랐다. 아마 아까 재떨이를 던질 때 튀어서 박힌 듯했다.간호사는 조심스럽게 소독한 뒤, 작은 반창고를 붙여주었다.“다 됐습니다.”그러자 배성재가 짧게 말했다.“고맙습니다.”그는 간호사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서야 내 손을 놓았다.나는 순간적으로 손을 움츠리며 반창고가 붙은 손끝을 바라보다가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성재 씨는요?”“뭐가요?”“다치신 곳 없어요?”“없습니다.”방금 나를 구해주면서 몇 번이나 뒹굴었는데 하나도 다친 데가 하나도 없다니. 배성재는 보기보다 훨씬 단단한 사람이었다. 병원 복도를 걸어 나오며 나는 문득 생각났다.“이제 말해보세요. 당신,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죠? 나한테 복수하려는 건가요? 아니면 또 다른 속셈이라도 있는 거예요?”그는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렸다.“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네요.”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아니 당신 나 엄청 싫어하잖아요. 그런데 방금 전까지 내 손까지 잡아가며 치료해 줬잖아요. 그게 무슨 의미냐고요.”“당신이 다친 건 저 때문이잖아요. 병원에 데려온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요?”그의 태도는 이상할 정도로 태연했다.“그렇다면 우리 이제 퉁친 거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었다.“제가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과 정말 많이 닮았나요?”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처음엔 그랬죠.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점점 다른 사람이란
나는 배성재에게 가까이 다가가 일부러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흔히들 남자는 유혹에 약하다고 하지만 그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보고 싶었다.“당신 집에서 하죠.”그는 아무런 변화 없는 얼굴로 대답하더니 곧바로 나와의 거리를 벌렸다.그런 그의 태도를 보자, 문득 진정우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고 그때도 그는 쉽게 휘둘리지 않았다.지금의 배성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고 그는 곧바로 부엌으로 가 요리를 시작했다.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봤다.그는 예전에 진정우가 자주 두르던 앞치마를 묶고 한결같은 동작으로 채소를 씻고 손질했다.그 순간, 마치 진정우가 돌아온 것 같았다.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이 사람이 정말 진정우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또다시 하게 됐다.하지만 이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그는 진정우가 아니다. 나는 수없이 부정하고 또다시 인정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그러던 중, 휴대전화가 울렸다.“언니 아직 안 잤지?”전화기 너머에서 진소영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들려왔다.“아니. 지금 밥 먹으려던 참이야.”나는 여전히 부엌에 있는 배성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이 시간에? 집에서 직접 해 먹어? 아니면 배달시킨 거야?”진소영의 물음에 나는 자세를 바꿔 옆으로 누웠다.“해 먹지.”“오빠가 있었으면 절대 언니가 직접 요리하게 두지 않았을 텐데.”진소영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혹시 요즘 오빠랑 연락했어? 여전히 전화가 안 돼서 마음이 불안해.”나는 배성재를 바라보며 천천히 대답했다.“응, 연락했어.”그 순간, 배성재가 왼손으로 조심스럽게 죽을 저었다.그런데 그는 죽을 세 번 저었다. 나는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진정우도 죽을 끓일 때마다 항상 정확히 세 번 저었고 그건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그만의 방식이었다.이것도 우연일까?나는 순간적으로 숨이 멎는 듯했다. 진소영이 계속해서 무언가 말하고 있었지만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나는 멍
“와서 밥 먹어요.”배성재가 나를 부르자 나는 그대로 서서 그를 바라봤다. 그는 식탁 위에 수저를 놓으며 다시 말했다.“와서 맛 좀 봐요.”주방 조명 아래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진정우와 닮아 있었다.특히 조금 전 죽을 저을 때의 습관까지 똑같았다.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몸에 밴 습관은 쉽게 숨길 수 없는 법이다.나는 그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확신했다.배성재, 당신이 바로 진정우 맞지?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나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그의 등을 감싸안았다.“...”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지만 그는 나를 밀어내지는 않고 대신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밥 먹어요.”나는 그의 등을 꼭 끌어안은 채 낮게 속삭였다.“당신... 진정우 맞죠?”그는 침묵했고 나는 그의 몸을 돌려세워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여긴 우리 둘뿐이에요. 나한테만은 솔직해져요. 당신이 진정우라는 거... 인정해 줄 수 없어요?”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그의 한 마디는 내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아닙니다.”나는 멍해진 채 그를 바라봤고 그는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내 이름은 배성재입니다.”그 순간 내 손이 저절로 힘을 잃고 그의 소매를 놓아버렸다.나는 한 발짝 물러서며 고개를 끄덕였다.“미안해요. 당신이 이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는 모습이... 너무 똑같았어요. 심지어 죽을 저을 때도 똑같이 왼손으로 세 번 저었어요.”그는 약간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그냥 우연의 일치겠죠.”“그러게요. 참 신기하죠. 너무 우연이 겹치니까... 저도 모르게 또 헷갈렸어요.”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식탁에 앉았다.그리고 젓가락을 들어 그가 만든 음식을 한 입 넣었다.그런데...나는 순간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그가 눈치를 챘는지 곧바로 물었다.“맛이 없나요? 아니면 간이 안 맞아요?”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맛이 없어서가 아니고 간이 부족해서도 아니었다.이건 분명히 그 사람의 맛
“...”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고 얼굴이 뜨거워졌다.조금 전까지 내가 그를 떠보려 했는데 오히려 당하고 말았다.그는 겉으로 보기엔 진지하고 무심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은근슬쩍 던지는 말은 전혀 초보자가 아니었다.이 남자, 예상보다 훨씬 노련한데?나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태연한 척 입꼬리를 올렸다.“착각하지 마세요.”나는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TV가 켜진 거실로 향했다.그는 여유롭게 식탁을 정리한 뒤 내가 뿜어낸 죽이 튄 옷을 간단히 닦고 설거지를 시작했다.그러고 부엌까지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서야 내 쪽으로 걸어왔다.“화장실 좀 써도 될까요?”그의 정중한 태도에 나는 무심하게 손짓했다.“맘대로 쓰세요.”그런데, 바로 이어진 말이 내 손을 멈추게 했다.“샤워도 좀 해야겠네요.”나는 즉시 그의 얼굴을 바라봤고 그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태연하게 서 있었다.마치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한다면 그건 내 문제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머리카락을 보았다.아직도 죽이 튀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그제야 나는 생각을 바꿨다.‘아... 샤우할만 하네.’그래서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그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갈아입을 옷 있나요?”나는 그제야 그가 처음부터 이걸 의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순간적으로 거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덧붙인 말이 내 결정을 흔들어 놓았다.“헌 옷이라도 괜찮아요.”그는 진정우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도 분명했다.내 집에 남자의 옷이 있다면 그건 당연히 진정우의 것일 테니까.나는 그를 노려봤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이건 완벽한 연기였다.그러니까 내가 괜한 의미를 부여하면 오히려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상황이었다.나는 내심 한숨을 쉬며 억지로 무덤덤한 척 대답했다.“찾아볼게요.”나는 옷장을 열어 진정우의 옷을 손에 들었다.그 순간 나는 마음이 매우 복잡해졌다.이걸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강유형, 네가 어떻게 내가 사고 난 걸 알았지?”그는 내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문기둥에 기대섰다.“당연히 알지. 왜냐하면...”그는 말하다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내가 사람을 붙여서 널 지켜주게 했거든.”지켜준다고? 이건 지켜주는 게 아니라 감시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그의 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치자 나는 이유 모를 불쾌감이 몰려왔다.그래서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비꼬듯 말했다.“네가 붙인 사람이 그렇게 실력이 있다면 내가 그렇게까지 위험한 순간에 처했을 때는 어디 있었던 거야?”“그 부분은 내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놈은 잘랐어.”강유형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그는 내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덧붙였다.“그리고 지금 누가 널 해치려 했는지 조사 중이야.”“잘됐네.”나는 짧게 대꾸하며 팔짱을 꼈다.“그럼 네가 그걸 알아내면 나한테도 알려줘.”강유형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피곤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지쳐 보였다.하지만 나는 그와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더군다나 지금 내 집 안에는 또 다른 손님이 있었으니까 말이다.“강유형, 늦었어. 인제 그만 돌아가.”나는 단호하게 말했으나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집에 가고 싶지 않아.”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고 그러자 그는 낮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지원아, 네가 떠난 이후로... 난 집에 들어가는 게 너무 싫어졌어.”그의 입가에 맺힌 쓴웃음은 가슴 한구석을 묘하게 찌르는 기분이었다.“네가 있을 때는 몰랐어. 네가 없는 집이 이렇게 공허한 곳일 줄은... 집에 들어가면 온통 적막하고 부모님도 서로 말이 없고 예전처럼 따뜻한 느낌이 하나도 안 남았어.”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그렇게 만든 게 누구 때문인데?“사실, 예전엔 이런 게 얼마나 소중한지도 몰랐어.”그는 허탈하게
나는 놀란 채로 그를 바라봤다.“강유형, 너...”그는 천천히 입가를 닦더니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나는 순간 따라가야 하나 망설였지만 끝내 발을 떼지 않았다.그냥... 이대로 두는 게 맞을 것 같았다.그래야 그도 이제 완전히 포기할 테니까.“저를 원망하진 않겠죠?”강유형이 떠난 후 뒤에서 배성재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천천히 돌아봤다.배성재는 문가에 서 있었고 그의 시선은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강유형이 토한 피가 아직 마르지 않은 채 얼룩져 있었다.“저 사람이 계속 지원 씨를 괴롭히는 것 같아서 도와주고 싶었어요.”나는 짧게 대꾸하며 손에 들고 있던 옷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옷 갈아입고 이제 가세요.”배성재는 말없이 옷을 받았다.그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서 손에 작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그 안에는 그가 입었던 더러워진 옷이 담겨 있었다.그는 그대로 나가지 않고 손수건을 꺼내더니 현관 앞 바닥에 묻은 피를 닦기 시작했고 나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마침내 문이 닫히고 그가 떠났고 나는 그제야 소파에 몸을 던지듯 주저앉았다.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앉아 있다가 결국 지쳐서 그대로 소파에 누워버렸고 나는 그렇게 밤을 보냈다.그런데 꿈속에서도 나는 계속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봤다.강유형이 내 앞에서 피를 토하는 모습.그 붉은 피가 마치 내 가슴 한복판에 떨어지는 듯한 느낌.그 꿈에 시달리며 나는 밤새 뒤척였다.그리고 다음 날 내가 눈을 뜨자마자 창문으로 쏟아지는 강한 햇살이 눈을 찔렀다.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면대로 향했다.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 그리고 옷 위에 묻어 있는 이미 말라붙은 핏자국...나는 조용히 물티슈를 집어 들었다.그리고 하나하나 천천히 핏자국을 닦아내기 시작했다.마치 그것이 내 삶에서 강유형의 흔적을 지우는 과정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내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용준호에게서 전화가 왔다.“들었어. 어제 우리 쪽에서 사고 났다며?”내가 찾기도 전에
나는 준비실에서 차를 따르다가 무심코 동료들에게 물었다.“허 대표님은 오늘 안 나오셨나요?”내 말에 몇몇이 입을 꾹 다물고 킥킥거리며 웃었다.나는 그 반응이 이상해서 눈썹을 살짝 올리며 되물었다.“뭐예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그러자 한 명이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얼굴이 엉망이 됐다네요!”“아무래도 여자 친구한테 할퀸 모양이에요.”“진짜 상상도 못 했는데 허 대표님 여자 친구가 그렇게 사나운 줄은...”“근데 솔직히 허 대표님이 유흥업소라도 갔다면 나 같아도 가만 안 뒀을걸요.”순식간에 사무실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고 다들 각자 한마디씩 보태며 떠들어댔다.그제야 나는 허진호가 오늘 회사에 안 나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얼굴이 엉망이 돼서 창피해서 못 나온 거겠지.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때리는 건 그렇다 쳐도 얼굴은 좀 봐줘야 하는 거 아니야?솔직히 나는 그냥 궁금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자마자 허진호가 먼저 선수를 쳤다.“지원 씨, 회사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다 헛소문입니다. 그런 일 없었어요.”그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가득했고 나는 모르는 척 능청스럽게 되물었다.“네? 무슨 일인데요? 제가 뭘 들었다는 거죠?”허진호는 순간 말을 멈추더니, 헛기침을 한 번 했다.“회사 갔다면서요? 아무도 얘기 안 해줬어요?”나는 일부러 능청을 떨며 대답했다.“아침부터 바빠서요. 무슨 일 있으셨나요?”그제야 허진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꺼냈다.“아, 됐습니다. 별일 아니에요.”하지만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모든 걸 털어놓기 시작했다.그리고 내가 들은 내용은 사무실 사람들이 떠들던 소문과 거의 똑같았다.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제가 지금 제일 후회하는 건 도대체 왜 여자한테 빠졌냐는 겁니다.”나는 순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그의 한탄이 어이없기도 했고 뭔가 귀엽기도 했다.그래서 나는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그럼 이제 남자를 좋아해 보시려고요?”그러자 허진호도 장단을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법운사로 향하는 길에 나는 강유형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기나긴 연결음 끝의 자동응답뿐이었다.가슴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요즘 그가 법운사에 머물고 있었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연락도 되지 않으니 머릿속은 온통 나쁜 상상으로 가득 찼다.그에게 전화를 건 건 단순히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부상자나 사망자가 있는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하지만 그에게 건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못했다.나는 액셀을 밟으며 용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어머니가 바로 그 절에 계셨으니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 역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이번엔 아예 거절당했다. 불안은 더 깊어졌다.‘혹시 김지영까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그간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강유형과 김지영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치거나 희생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복잡한 심경 속에서 차를 운전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멀쩡하던 절에 왜 불이 난 걸까?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의도한 일이었을까? 혹시 나를 노린 불은 아니었을까?’만약 안리영이 나를 데리고 조경태의 생신 잔치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그 절에 있었을 것이다. 죽었을 수도, 심하게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내 손에 누군가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걸 얻지 못하면 나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저지른 일이라면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희생시켜서는 안 됐다.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이 나는 어느덧 산기슭에 도착했다. 들이마시는 공기 속엔 타버린 재 냄새가 가득했고 멀리 보이는 산 위엔 아직도 연기가 자욱했다.산을 절반쯤 오르자 경찰이 차량을 막아섰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이
난처한 상황이었다. 도무지 어찌할지 몰라 법까지 들먹이고 말았다.“법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서른이 넘도록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는 건 정상이 아니야. 어느 날 갑자기 남자 며느리라도 데려오면 내가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보겠냐?”조경태는 누가 뭐라 해도 듣지 않겠다는 태도였다.“그럼 제가 하나 약속드릴게요. 절대 남자를 며느리로 데려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조시언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조경태는 씩씩 대며 화를 냈다. 그러자 안리영이 급히 나서며 말했다.“할아버지, 삼촌 좀 그만 괴롭히세요. 안 좋아하는데 억지로 떠민다고 행복해지겠어요?”“이 계집애는 왜 또 얘 편을 드는 거야?”할아버지는 안리영을 흘겨보았다.내가 얼른 말을 이었다.“오늘 온 아가씨들, 저랑 리영이 다 지켜봤어요. 삼촌이랑 어울릴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고요.”지금 이 순간 나도 안리영을 따라 조시언을 삼촌이라 부르고 있었다.“난 못 믿겠는걸.”조경태는 콧방귀를 뀌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정말이에요, 할아버지. 그 여자들, 남 얘기하길 좋아해서 뒤에서 험담이나 하는 사람들이에요. 아까도 삼촌 뒷담 까고 있었어요.”조시언은 그녀를 바라보았고 조경태도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그래? 뭐라고 험담하던?”“삼촌이 나이가 꽤 됐는데도 아직 결혼 안 한 걸 말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삼촌을 차지해서 조씨 가문 며느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수작 부릴 생각들만 하고 있었어요.”안리영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오늘 그 여자들이 조시언을 노리고 온 건 분명했으니 말이다.“그건 좋은 일이잖니.”조경태는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할아버지는 수작 부리는 여자가 좋으세요?”안리영은 조경태가 싫어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조경태는 말이 없었다. 속이 시커먼 여자한테 크게 당할 뻔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안리영은 나를 향해 눈짓을 보냈고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삼촌 짝 찾는 일은 저랑 리영이에게 맡겨주세요.”내 말에 안리영이 눈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안리영과 나는 방 안의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서로 마주 본 채 각자의 소파에 앉은 모습이었다. 한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젊고 준수한 청년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가 너무나 뚜렷해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분명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부자 관계였다.안리영은 조시언이 입양된 아들이라고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의아했다. 당시 나이로 치면 조경태는 조시언을 손자처럼 키워도 이상할 게 없었을 텐데 왜 굳이 아들로 삼은 건지 궁금했다.“시언아, 너 이제 나이도 어린 게 아니잖니. 결혼 안 하겠다는 건 그렇다 쳐도 여자 친구조차 없다니. 밖에서 사람들이 너를 두고 뭐라고 수군대는지 너도 알지?”조경태는 수군대다 같은 말도 자연스럽게 썼다.하지만 조시언은 묵묵히 앉아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조명이 그의 얼굴과 콧대를 선명하게 나누듯 비췄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면서 그의 이목구비는 더욱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깊은 눈썹뼈는 날카로운 선을 연출해 냈다.“사람들이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더라!”조경태는 말을 끝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런 이상한 소문이 퍼지는 건 우리 조씨 가문의 체면을 망치는 일이다. 우린 그런 망신 못 당한다!”조시언은 그 말에도 여전히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평온한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했다.“남의 입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건 그들 사정일 뿐, 우린 신경 쓰지 않으면 됩니다.”“넌 신경 안 쓴다지만, 이 늙은이는 창피해서 못 살겠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지금 당장 사람 하나 데리고 오든가, 아니면 내가 직접 찾아줄 거다. 결혼 안 해도 좋다. 그냥 네 옆에 여자 하나 세워놔라. 사람들이 널 정상으로 보게 말이다!”그 말에 안리영과 나는 동시에 서로의 팔을 꼬집었다. 안 그러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 노
“넌 안 그럴 거야, 맞지?”안리영은 계속 나를 놀리면서도 언제나 내 편이었다.우리는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섰다.조경태는 자줏빛과 금색이 어우러진 긴 도포를 입고 활짝 웃으며 손님들의 축하 선물을 받고 있었다.그는 내가 가져온 선물을 보곤 눈을 반짝였다.“특별한 선물이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그 말에 나는 괜히 민망해졌다.강유형의 어머니도 비슷한 걸 선물했는데 어째서 내 것을 특별하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역시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은 달랐다. 누구보다도 말솜씨가 뛰어났다. 받는 사람도 기쁘고 주는 사람도 흐뭇하게 만드는 한마디였다.“리영아, 구 교수는 어디 갔니? 오늘은 왜 같이 안 왔어?”조경태가 슬며시 물었다.안리영은 내 옆구리를 몰래 콕 찔렀다.“그냥 따로 말 안 했어요. 오늘은 그냥 제가 단순히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온 거거든요.”그러나 이 정도 지긋한 나이가 되면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오늘 같은 잔칫날에 인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고 왔다 해서 구안석이 못 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는 안리영을 힐끔 바라보다 두어 번 웃고는 더 묻지 않았다.“할아버지, 그럼 선물마저 받으시고요. 저는 지원이랑 가서 뭐 좀 먹고 올게요.”안리영은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 했다. 또 무슨 질문이 나올까 봐 걱정된 눈치였다.“그래, 다녀오거라. 다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좀 있다 너희 둘 도움 좀 받아야겠구나.”그 말에 우리 둘은 눈빛을 주고받았다.“혹시 케이크 자르실 때 저희한테 맡기시려는 거 아니에요?”안리영이 농담처럼 물었다.조경태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콕 찔렀다.“이놈의 계집애, 지금 누굴 놀리는 거냐. 케이크 칼 정도는 들 수 있다고! 그게 아니고, 너희 둘한테 자문 좀 구하고 싶어서 그래.”“자문이요? 혹시 애인이라도 골라달라는 거예요?”안리영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겁 없이 농을 던졌다. 외할머니가 들으면 바로 이마 한 대는 맞았을 거다.“점점 대담해지는구나.”조경태가 다시 한번 그녀를 가리키며
안리영과 조시언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성준수는 그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안리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하긴 이렇게나 예쁜데 조시언이 마음 줄 만도 하지... 아야, 아파! 조시언, 너 왜 그래?!”성준수는 조시언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 나갔고 안리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정신 나갔네.”“조시언네 리영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난스럽게 되물었다.안리영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너까지 말썽이야, 얼른 가자. 외할아버지께 선물 드려야지.”그녀는 내 손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빨갛게 물든 귓바퀴가 그녀의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아까 조시언과의 어색한 분위기를 떠올리다 나도 모르게 장난을 쳤다.“리영아, 너랑 외삼촌 피가 섞인 것도 아니잖아. 내가 보기엔 한번 고려해 볼 만도 해. 잘생겼지, 돈 많지, 만약 네가 저 사람 잡으면 적어도 밖으로 새는 물은 없을 거 아니야.”안리영은 눈을 부릅떴다.“윤지원, 너 또 그런 소리 하면 진짜 절교할 거야.”“어머, 발끈하네?”나는 계속해서 놀렸다.“그만하라고 했지!”안리영은 나를 쫓아와 때리려 했다.나는 그녀를 피해 도망치다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익숙한 향이 먼저 스며들었다.고개를 들자 강유형이 서 있었다.요즘 그와 자주 마주쳤다. 절에서도 마주쳤고 조씨 가문에서도 마주쳤으니 말이다.“강 대표님, 이제 가시려고요?”안리영의 말투엔 노골적으로 쫓아내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나는 이미 다 털어냈다 하더라도 안리영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네.”강유형은 나를 살짝 놓아주며 내 발을 내려다봤다. 다친 데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했다.“조경태 씨 생신 축하하러 왔어요.”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는 볼 거 다 보고 별일 다 겪은 사이였다.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저녁 식사는 안 하고 가?”“응, 그게...”그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집에 가봐야 해서.”그 말에 문득 김희연이 내게 건넨 말과
“아이참, 엄마!”안리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오늘은 외할아버지 생신 잔치잖아, 내 맞선 자리가 아니고.”“뭐 어때?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잖니. 좀 있다가 잘 둘러보렴. 우리 딸처럼 예쁘고 똑똑한 애가 남자 친구 하나 못 찾겠어? 눈만 마주치면 끝이지.”조민영은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안리영은 체념한 듯 말했다.“알겠어. 엄마는 먼저 가서 볼일 봐. 난 지원이 찾으러 갈게. 외할아버지께 드릴 선물도 걔가 챙겨왔거든.”안리영은 그렇게 핑계를 대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난 그녀와 어머니의 대화를 이미 들은 터라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아주머니 꽤 개방적이시네. 근데 나도 그 말 일리 있다고 봐. 예전에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고.”“좋아.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바로 들이댈게.”그 순간 나는 조시언을 발견했다.그는 어두운 톤의 정장에 검은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셔츠 단추는 몇 개 풀려있었고 그로 인해 허연 목덜미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그 하얀 피부와 검은 셔츠가 만들어내는 대비는 그를 더욱 차가워 보이게 만들었다. 어쩐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도 자아냈다.“네 외삼촌, 진짜 잘생겼다.”나는 감탄했다.안리영도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여자들한테 인기 많았어. 예전에 내가 저 사람한테 온 러브레터를 얼마나 많이 대신 받아줬는지 몰라.”하긴 조시언 같은 사람이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그럼 연애는 해봤대?”안리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아니, 못 해봤을걸.”“그렇다면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다는 말이겠지.”내 말에 안리영이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내 가슴을 콕 찌르는 말을 꺼냈다.“아, 맞네. 너 연애 경험 많았지.”“나 약 올리는 거야? 그렇게 나오면 나도 너 도와줄 마음 싹 사라지는데?”우리가 대화를 나눌 동안 조시언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안리영은 어느새 자세를 바짝 고쳐
안리영은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초 후 그냥 끊어버렸다.그토록 단호하고 주저 없는 태도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정말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이런 부분에선 그녀가 나보다 훨씬 강했다. 질질 끌지도 않았고 미련도 없었다.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강유형과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 가끔 연락을 하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을 때뿐이었다.안리영과 구안석이 여기까지 온 게 아쉽긴 해도 딱히 뭐라고 말할 순 없었다.감정의 온도는 결국 그 당사자만이 아는 법이니 말이다.우리가 함께 차를 마시며 점원의 포장 작업을 기다리는 동안 안리영의 휴대폰 화면이 다시 한번 반짝였다.새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구안석에게서 온 메시지였다.‘리영아, 나 이제 갈게.’나는 슬쩍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이따가 차단할 거야.”“직접 못 하겠으면 내가 대신 해줄까?”내가 농담처럼 말했다.안리영은 나에게 절친만이 보낼 수 있는 눈빛을 건넸다. 점원이 포장해 준 작품을 들고 매장을 나설 때까지 그녀는 끝내 구안석에게 답장하지 않았다.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구안석의 메신저 대화창에서 멈춘 걸 발견했다. 그녀는 그들이 나눈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의아해 물었다.“왜 웃어?”안리영은 내게 휴대폰을 내밀며 말했다.“선배님이랑 나눈 대화 좀 봐봐.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합쳐도 겨우 몇십 개밖에 안 돼. 우리 과 단톡방에서 일주일에 올라오는 공지보다도 적어.”나는 보지도 않고 다시 그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이미 헤어지기로 한 거잖아. 그런 거 봐서 뭐 하려고.”“지원아, 나 진짜로 연애한 게 맞긴 한 걸까?”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구안석을 차단했다.“공적인 일 있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럴 때도 연락 안 하게?”나는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 장난을 던졌다.“그 사람은 흉부외과고 나는 산부인과야. 서로
“이거 포장해 주세요. 선물할 거니까 선물 상자에 담아 주세요.”김희연은 점원에게 부탁을 마치고 돌아서다 나를 발견했다.“지원아!”그녀가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아줌마.”나는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김희연은 나를 바라보며 눈가를 붉혔고 눈동자까지 촉촉하게 물들였다.“지원아...”그녀는 내 이름만을 부를 뿐 다른 말은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마음속에 수많은 말들이 맴돌고 있을 게 분명했지만 끝내 꺼낼 용기가 나지 않는 듯했다.나도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몇 달 만에 마주한 모습이었다. 흰머리가 부쩍 늘었고 수척해진 인상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눈빛에서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요즘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두식은 병상에 계시고 두 아들 사이엔 균열이 생겨 서로 등을 돌린 상태다.말 그대로 집안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모든 시작은 나와 강유형이 끝을 맺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들이 잘 풀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잘 지내니?”그녀가 한참 만에 힘들게 물었다.“네,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거면 됐다. 그거면 좋아.”나는 그녀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시간을 견뎌냈는지 이미 보아냈으니 말이다.“너도 혹시 작품 보러 왔니? 선물하려고?”그녀는 어색함을 덜기 위해 다시 말을 건넸다.“오늘 저희 외할아버지 생신이라서요. 지원이가 저희 외할아버지 드리려고 보고 있었어요.”안리영이 대신 대답했다.“지원이도 조씨 댁에 가는구나. 잘 됐다, 그분도 지원이를 참 좋아하시잖니. 예전에도 자주 얘기하셨지.”그녀는 말을 잇다가 목이 메인 듯 얼굴을 살짝 돌렸다.나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그렇게 슬픔을 억누르는 모습이 안쓰러워 조용히 입을 열었다.“아줌마, 저 먼저 고르러 가볼게요.”“지원아.”그녀가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어렵게 말을 이었다.
“네가 헤어지자고 했는데 구안석이 아무 말도 안 했다고?”안리영의 말을 듣고 나도 좀 놀랐다.안리영은 살짝 웃었다.“아마 그 사람도 지쳤겠지. 차라리 혼자일 때가 더 편했을 거야. 뭘 하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간섭받을 일도 없고 신경 쓸 일도 없으니까.”딱 봐도 감정 섞인 말이었다.“너, 혹시 이별하자는 말도 일부러 한 거 아니야? 화나서?”내가 조심스레 물었다.안리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난 정말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야.”내가 코웃음을 쳤다. 안리영이 웃으며 말했다.“진짜라니까. 지난번에 내가 선배한테 귀국할 수 없냐고 물었을 때부터 쭉 고민해 왔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사실 사랑이든 결혼이든 여자들이 바라는 건 결국 하나잖아. 안정감,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근데 그 사람이 그걸 못 준다면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굳이 그런 사랑을 붙잡을 필요가 있을까?”안리영은 낮게 물었다.나는 장난스럽게 말해봤다.“그럼 생리적 욕구 해결은?”안리영은 다시 웃었다.“남자를 그 이유 하나로만 찾는 거면 얼마나 쉬워.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잖아. 게다가 종류도 다양하고 취향 바꾸는 것도 가능하고.”“하하하.”나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리영이, 네 취향 은근히 세네?”장난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녀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리영아, 네가 어떤 결정을 해도 난 응원할 거야. 하지만 말이지... 이별이라는 건, 특히 진심이었을 때는 헤어지는 순간도 진짜 아프잖아. 힘들면 꼭 나한테 말해. 같이 술이라도 마셔주지.”“응, 필요하면 연락할게.”안리영은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살짝 맞댔다.“그보다 지금 당장 네가 좀 도와줘야 하는 일이 하나 있어.”“뭔데?”“오늘 우리 외할아버지 생신이야. 이번엔 도저히 빠질 수가 없어.”안리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부모님도 몇 번이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 하신다고 했는데 그녀는 그때마다 핑계를 대고 빠졌단다. 이번까지 거절하면 그녀의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