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서 밥 먹어요.”배성재가 나를 부르자 나는 그대로 서서 그를 바라봤다. 그는 식탁 위에 수저를 놓으며 다시 말했다.“와서 맛 좀 봐요.”주방 조명 아래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진정우와 닮아 있었다.특히 조금 전 죽을 저을 때의 습관까지 똑같았다.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몸에 밴 습관은 쉽게 숨길 수 없는 법이다.나는 그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확신했다.배성재, 당신이 바로 진정우 맞지?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나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그의 등을 감싸안았다.“...”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지만 그는 나를 밀어내지는 않고 대신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밥 먹어요.”나는 그의 등을 꼭 끌어안은 채 낮게 속삭였다.“당신... 진정우 맞죠?”그는 침묵했고 나는 그의 몸을 돌려세워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여긴 우리 둘뿐이에요. 나한테만은 솔직해져요. 당신이 진정우라는 거... 인정해 줄 수 없어요?”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그의 한 마디는 내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아닙니다.”나는 멍해진 채 그를 바라봤고 그는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내 이름은 배성재입니다.”그 순간 내 손이 저절로 힘을 잃고 그의 소매를 놓아버렸다.나는 한 발짝 물러서며 고개를 끄덕였다.“미안해요. 당신이 이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는 모습이... 너무 똑같았어요. 심지어 죽을 저을 때도 똑같이 왼손으로 세 번 저었어요.”그는 약간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그냥 우연의 일치겠죠.”“그러게요. 참 신기하죠. 너무 우연이 겹치니까... 저도 모르게 또 헷갈렸어요.”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식탁에 앉았다.그리고 젓가락을 들어 그가 만든 음식을 한 입 넣었다.그런데...나는 순간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그가 눈치를 챘는지 곧바로 물었다.“맛이 없나요? 아니면 간이 안 맞아요?”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맛이 없어서가 아니고 간이 부족해서도 아니었다.이건 분명히 그 사람의 맛
“...”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고 얼굴이 뜨거워졌다.조금 전까지 내가 그를 떠보려 했는데 오히려 당하고 말았다.그는 겉으로 보기엔 진지하고 무심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은근슬쩍 던지는 말은 전혀 초보자가 아니었다.이 남자, 예상보다 훨씬 노련한데?나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태연한 척 입꼬리를 올렸다.“착각하지 마세요.”나는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TV가 켜진 거실로 향했다.그는 여유롭게 식탁을 정리한 뒤 내가 뿜어낸 죽이 튄 옷을 간단히 닦고 설거지를 시작했다.그러고 부엌까지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서야 내 쪽으로 걸어왔다.“화장실 좀 써도 될까요?”그의 정중한 태도에 나는 무심하게 손짓했다.“맘대로 쓰세요.”그런데, 바로 이어진 말이 내 손을 멈추게 했다.“샤워도 좀 해야겠네요.”나는 즉시 그의 얼굴을 바라봤고 그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태연하게 서 있었다.마치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한다면 그건 내 문제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머리카락을 보았다.아직도 죽이 튀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그제야 나는 생각을 바꿨다.‘아... 샤우할만 하네.’그래서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그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갈아입을 옷 있나요?”나는 그제야 그가 처음부터 이걸 의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순간적으로 거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덧붙인 말이 내 결정을 흔들어 놓았다.“헌 옷이라도 괜찮아요.”그는 진정우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도 분명했다.내 집에 남자의 옷이 있다면 그건 당연히 진정우의 것일 테니까.나는 그를 노려봤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이건 완벽한 연기였다.그러니까 내가 괜한 의미를 부여하면 오히려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상황이었다.나는 내심 한숨을 쉬며 억지로 무덤덤한 척 대답했다.“찾아볼게요.”나는 옷장을 열어 진정우의 옷을 손에 들었다.그 순간 나는 마음이 매우 복잡해졌다.이걸
“솔직히 말해봐, 너 윤지원이랑 해봤어?”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와 막 들어가려던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문틈 사이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강유형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지원이가 먼저 다가왔지만 난 관심 없었어.”“강유형, 그렇게 사람 깎아내리지 마. 윤지원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 미인이야. 꽤 많은 사람들이 윤지원을 노리고 있다고.”말하는 사람은 강유형의 친구 신지태였다. 그는 나와 강유형의 10년 감정을 지켜본 증인이기도 했다.“너무 익숙해서 그래.” 강유형이 눈썹을 찌푸렸다.내가 14살 때 강씨 집안으로 보내졌고 그때 처음으로 강유형을 만났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앞으로 강유형과 결혼할 거라고.그 후로 우리는 함께 살았고 어느새 10년이 흘렀다.“그렇지. 너희 둘은 낮에는 한 회사에서 일하면서 얼굴 보고 밤에는 집에 와서 같은 식탁에서 밥 먹고. 아마 상대방이 하루에 몇 번 화장실 가는지까지 다 알겠어.”신지태가 농담을 던지고는 혀를 찼다. “지금은 오래 보면 정든다는 시대가 아니야. 남녀 사이엔 그래도 신선함이 있어야 하지.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그런 느낌, 그래야 감정이 생기고 자극적인 법이야.”강유형은 침묵했고 신지태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듯했다.“그래서 너 윤지원과 결혼할 거야?” 신지태의 질문에 내 숨이 멎는 것 같았다.강유형의 부모님은 우리에게 혼인신고를 하라고 하셨다. 그는 좋다고도, 싫다고도 하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 묻지 않았다. 그러니 신지태가 나 대신 물어본 셈이다.강유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신지태가 웃었다. “결혼하기 싫어?”“...그건 아니야.”“그럼 결혼은 하고 싶은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는 거지?” 신지태와 강유형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사이라 서로의 마음을 잘 알았다.“지태야, 이런 말 들어봤어?” 강유형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뭔데?”“먹자니 맛없고 버리자니 아깝고.” 강유형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강유형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고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굳이 보지 않아도 내 안색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어디 아파?”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나는 말없이 그의 책상 앞으로 걸어가 목구멍에 맺힌 쓴맛을 삼키며 말했다. “나랑 결혼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아주머니한테 말씀드릴게.”강유형의 미간 주름이 더 깊어졌다. 그는 내가 그와 신지태의 대화를 들었다는 걸 알아챘다.난 목이 메어 말을 잇기 힘들었다. “난 내가 먹자니 맛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존재가 될 줄은 몰랐어, 강유형...”“모든 사람들 눈에는 우린 이미 부부야.” 강유형이 내 말을 끊었다.‘그래서 뭐? 그 사람들 때문에 나랑 결혼하려는 건가?’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가 나를 사랑해서, 나와 평생을 함께 보내고 싶어서 결혼하는 거였다.‘탁’하는 소리와 함께 강유형의 손에 든 펜이 닫혔고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든 혼인 신고서에 머물렀다. “다음 주 수요일에 혼인신고 하러 가자.”이 말은 내가 듣고 싶었 거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가슴이 아팠다. 그것도 아주...난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강유형, 억지로 할 필요 없어. 나도 그럴 필요 없고.”“윤지원!” 그가 날카롭게 내 이름을 불렀다.나는 움찔했고 고개를 들어 그의 짜증 난 듯한 눈과 마주쳤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혼인 신고서를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그의 턱이 굳어졌다. “이리 줘.”나는 움직이지 않았고 분위기는 더욱 팽팽해졌다.몇 초 후, 그가 일어나 내게로 왔고 내 앞에 서더니 한숨을 살짝 내쉬며 말했다. “지태랑 한 얘기는 그냥 농담이었어. 넌 왜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야?”정말 농담이었을까?“너도 알잖아. 남자들에게 체면이 얼마나 중요한 거.” 그의 손이 내 팔을 잡더니 천천히 내려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혼인 신고서를 빼앗아 갔다.“앞으로는 남의 말 함부로 믿지 마.” 그가 돌아서서 혼인 신고서를 서랍에 넣고 옆에 있
하루 종일 이 문제를 고민했지만 오후에 그가 나를 부를 때까지도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난 그를 따라나섰다.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10년이란 시간 동안 나는 그에게, 그리고 퇴근 후 강씨 집안으로 돌아가는 일에 익숙해져 버렸다.“왜 말이 없어?”돌아가는 길에 강유형이 내 기분이 좋지 않음을 눈치챘는지 먼저 물었다.나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강유형, 우리 그냥...”뒷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휴대폰이 울리면서 차량 디스플레이에 이름 없는 번호가 떴고 강유형의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그가 긴장했다.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이미 재빨리 차량 스피커를 끄고 블루투스로 전환했다. “여보세요... 네, 지금 가고 있습니다.”통화 시간은 짧았다. 그는 전화를 끊고 나를 보며 말했다. “지원아, 급한 일이 생겨서 집에 데려다줄 수가 없겠어.”사실 그가 말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나를 내버려두고 갈 거라는 걸. 이미 처음이 아니었으니까.그래도 그가 말하기 전까지는 나를 먼저 데려다줄 거라고 기대했었다.가슴 한구석이 갑자기 텅 비어 아파왔고 나는 서운함을 억누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강유형의 턱이 굳어졌다. 그는 대답 대신 밖을 보며 말했다. “저기서 내려줄게. 택시 타고 돌아가.”설명조차 해주지 않고 이미 다 결정해 놓은 듯했다. 그러니 내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더 묻고 떼를 쓰는 건 스스로 망신당하는 일일 뿐이다.“집에 도착하면 전화... 메시지 보내.” 강유형이 당부하는 사이 핸들은 이미 돌아가 도로변 임시 주차장에 멈춰 섰다.나는 가방을 꼭 쥐고 차에서 내렸다.내가 예민한 게 아니다. 그가 발신번호를 본 후의 이상한 반응부터 차량 스피커로 통화하지 않으려 한 것까지, 이미 예감이 왔다.다만 묻지도 말하지도 않았을 뿐이다.어떤 일들은 묻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그대로 두고 자기 위안을 할 수 있으니.“조심해서 가!” 서두르는 와중에
평생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성추행 혐의로 경찰서에 끌려올 줄이야.그날 내가 부딪힌 건 고작 열일곱 살의 미성년자였다. 그 녀석은 내가 자기를 더럽게 만졌다고 우겼고 내가 아무리 부인해도 소용없었다.“어디를 만졌다는 거죠?” 경찰이 꼼꼼하게 물었다.조태혁이라는 소년은 나를 노려보며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더니 허리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요, 여기... 이 여자가 다 만졌어요.”‘개소리하지 마, 이 자식아!’나는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강유형 같은 미남도 못 만져본 내가 겨우 털도 다 안 난 꼬맹이를 만진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경찰이 다시 나를 쳐다보자 난 그가 묻기도 전에 먼저 부인했다. “전 그 애를 만지지 않았어요. 그저 실수로 부딪쳤을 뿐이에요.”“술 드셨나요?” 경찰의 눈빛이 의미심장했다.이 사회에서 남자가 술에 찌들어 사는 건 정상이지만 여자가 술을 마시면 대부분 품행이 의심받게 된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셨어요.”“얼마나 드셨죠?” 경찰의 이 질문이 지금 상황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맥주 한 병이요.”경찰은 믿지 않는 눈빛을 보였다. 난 즉시 내 친구 안리영이 증인이 돼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 꼬맹이와 내가 다투고 있을 때 안리영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출혈 중인 산모를 구하러 병원으로 긴급 소환됐다고.난 경찰의 의도를 이해하고 다시 한번 설명했다. “전 취하지 않았어요. 술 핑계로 이 꼬맹이를 건드릴 이유도 없고요.”경찰은 내 말을 기록하고 조태혁을 바라봤다. “저 여성분께서 만졌다고 확신해요? 거짓말이나 무고는 법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당연히 확실하죠” 조태혁은 정말 고집불통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일어나 그를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조태혁의 눈이 갑자기 반짝였다. “누나, 왔어?”그가 미성년자니 당연히 보호자를 불렀을 거다. 나는 그의 가족에게 설명하려고 고개를
내 손이 아플 정도로 꽉 잡혔다. 분명 그가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이게 질투인 걸까?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 강유형은 내 손을 놓았고 그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윤지원, 내가 한마디 했다고 이렇게 복수하려는 거야?”나는 순간 당황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으니까.“아니 난...” 설명하려는 내 말은 도중에 끊겼다.“너 정말로 그 녀석을 만졌어? 정말로 그곳을?” 강유형의 턱이 굳어졌고 그의 눈에는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은 무서운 빛이 서렸다.이런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는데 역시 질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순간 내 마음속의 불편함이 많이 사라졌다. 그가 나를 여전히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만약 그가 나를 단순히 여동생이나 친구로만 여겼다면 내가 다른 남자를 만졌다고 해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아니야.” 나는 다시 한번 부인했다.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조태혁이 안에서 나왔고, 나를 향해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변태 아줌마, 또 우리 매형 꼬시려고?”사람 성격 쉽게 안 변한다더니 정말 그랬다.조태혁이 나를 바라보는 그 비열한 표정은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졌나 싶을 정도였다.이쪽으로 걸어오는 남매를 보면서, 특히 조나연의 그 순수한 모습과 그녀가 강유형을 만졌던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손을 들어 강유형의 팔을 감쌌다.하지만 그의 근육이 순간 굳어지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또 거짓말이지.” 조나연이 조태혁의 귀를 꼬집으며 다가왔다.그녀는 우리 앞에 서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유형 씨, 지원 씨, 정말 미안해요.”“네 잘못 아니야.” 강유형이 조태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에 또 이런 짓 하면 아무도 널 구해주지 않을 거야.”“흥.” 조태혁이 불만스럽게 강유형을 흘겨보았다. “당신이 누군데요? 뭔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해요? 당신이 우리 새 매형이 되겠다면 말 들을게요.”“조태혁!”조나연이 꾸짖으며 그를 한 번 더 때렸고 조태혁은 피하며 말했다. “누나, 저 사람
조나연은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아이는 무사했고 그녀는 병실로 돌아왔다. 창백한 얼굴에 붉어진 눈, 거기에 하얀 달빛까지 더해져 정말 애처롭고 가련해 보였다.“너무 걱정하지 마. 아이는 괜찮아.” 강유형이 위로했다.“유형 씨, 나 너무 무서웠어.” 조나연이 울음을 터뜨렸다. 강유형이 휴지를 건네자 조나연은 그것을 받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그의 손등에 기댔다.비록 가엾긴 하지만 그렇다고 남의 약혼자를 자기 남자처럼 대해도 되는 걸까?나는 다가가 말했다. “나연 씨,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가 흥분하면 태아에게 좋지 않대요. 겨우 아이를 지키셨는데 이렇게 울다가 또 문제가 생기면 곤란해질 거예요.”말하면서 난 그녀를 부축하며 강유형과 살짝 떼어놓았다. 하지만 강유형의 손등에 남은 눈물자국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 것이 다른 사람에 의해 더럽혀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깨끗한 걸 좋아한다. 일상에서도 그렇고 감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조나연은 내가 이렇게 말한 것에 놀란 듯했다. 그녀는 얼굴색이 확 변했다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로 잡았다.“유형 씨, 미안해. 내가 이렇게...”그녀가 휴지를 집어 강유형의 손을 닦으려 하자 내가 가로막았다. “나연 씨, 지금은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요.”조나연의 표정이 굳었다. 눈물 고인 눈으로 강유형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분명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병실을 나오자마자 나는 강유형에게 물었다. “나연 씨가 널 좋아하나 봐?”“아니야!”강유형이 부인했다.“그럼 넌? 나연 씨를 좋아해?”한 번에 확실히 물어보고 싶었다. 애매하게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으니까.강유형의 표정이 굳어졌다. 몇 초 후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그저 친구일 뿐이야...”정말 그저 친구일까?“석진이가 세상을 떠날 때 내 손을 잡고 나연이를 돌봐달라고 했어...” 강유형의 목소리가 떨렸고 늘어뜨린 손도 마찬가지였다.임석진의 죽음을 언급할 때마다 그는 항상 이렇게 격앙되
“...”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고 얼굴이 뜨거워졌다.조금 전까지 내가 그를 떠보려 했는데 오히려 당하고 말았다.그는 겉으로 보기엔 진지하고 무심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은근슬쩍 던지는 말은 전혀 초보자가 아니었다.이 남자, 예상보다 훨씬 노련한데?나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태연한 척 입꼬리를 올렸다.“착각하지 마세요.”나는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TV가 켜진 거실로 향했다.그는 여유롭게 식탁을 정리한 뒤 내가 뿜어낸 죽이 튄 옷을 간단히 닦고 설거지를 시작했다.그러고 부엌까지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서야 내 쪽으로 걸어왔다.“화장실 좀 써도 될까요?”그의 정중한 태도에 나는 무심하게 손짓했다.“맘대로 쓰세요.”그런데, 바로 이어진 말이 내 손을 멈추게 했다.“샤워도 좀 해야겠네요.”나는 즉시 그의 얼굴을 바라봤고 그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태연하게 서 있었다.마치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한다면 그건 내 문제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머리카락을 보았다.아직도 죽이 튀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그제야 나는 생각을 바꿨다.‘아... 샤우할만 하네.’그래서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그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갈아입을 옷 있나요?”나는 그제야 그가 처음부터 이걸 의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순간적으로 거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덧붙인 말이 내 결정을 흔들어 놓았다.“헌 옷이라도 괜찮아요.”그는 진정우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도 분명했다.내 집에 남자의 옷이 있다면 그건 당연히 진정우의 것일 테니까.나는 그를 노려봤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이건 완벽한 연기였다.그러니까 내가 괜한 의미를 부여하면 오히려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상황이었다.나는 내심 한숨을 쉬며 억지로 무덤덤한 척 대답했다.“찾아볼게요.”나는 옷장을 열어 진정우의 옷을 손에 들었다.그 순간 나는 마음이 매우 복잡해졌다.이걸
“와서 밥 먹어요.”배성재가 나를 부르자 나는 그대로 서서 그를 바라봤다. 그는 식탁 위에 수저를 놓으며 다시 말했다.“와서 맛 좀 봐요.”주방 조명 아래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진정우와 닮아 있었다.특히 조금 전 죽을 저을 때의 습관까지 똑같았다.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몸에 밴 습관은 쉽게 숨길 수 없는 법이다.나는 그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확신했다.배성재, 당신이 바로 진정우 맞지?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나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그의 등을 감싸안았다.“...”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지만 그는 나를 밀어내지는 않고 대신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밥 먹어요.”나는 그의 등을 꼭 끌어안은 채 낮게 속삭였다.“당신... 진정우 맞죠?”그는 침묵했고 나는 그의 몸을 돌려세워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여긴 우리 둘뿐이에요. 나한테만은 솔직해져요. 당신이 진정우라는 거... 인정해 줄 수 없어요?”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그의 한 마디는 내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아닙니다.”나는 멍해진 채 그를 바라봤고 그는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내 이름은 배성재입니다.”그 순간 내 손이 저절로 힘을 잃고 그의 소매를 놓아버렸다.나는 한 발짝 물러서며 고개를 끄덕였다.“미안해요. 당신이 이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는 모습이... 너무 똑같았어요. 심지어 죽을 저을 때도 똑같이 왼손으로 세 번 저었어요.”그는 약간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그냥 우연의 일치겠죠.”“그러게요. 참 신기하죠. 너무 우연이 겹치니까... 저도 모르게 또 헷갈렸어요.”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식탁에 앉았다.그리고 젓가락을 들어 그가 만든 음식을 한 입 넣었다.그런데...나는 순간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그가 눈치를 챘는지 곧바로 물었다.“맛이 없나요? 아니면 간이 안 맞아요?”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맛이 없어서가 아니고 간이 부족해서도 아니었다.이건 분명히 그 사람의 맛
나는 배성재에게 가까이 다가가 일부러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흔히들 남자는 유혹에 약하다고 하지만 그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보고 싶었다.“당신 집에서 하죠.”그는 아무런 변화 없는 얼굴로 대답하더니 곧바로 나와의 거리를 벌렸다.그런 그의 태도를 보자, 문득 진정우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고 그때도 그는 쉽게 휘둘리지 않았다.지금의 배성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고 그는 곧바로 부엌으로 가 요리를 시작했다.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봤다.그는 예전에 진정우가 자주 두르던 앞치마를 묶고 한결같은 동작으로 채소를 씻고 손질했다.그 순간, 마치 진정우가 돌아온 것 같았다.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이 사람이 정말 진정우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또다시 하게 됐다.하지만 이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그는 진정우가 아니다. 나는 수없이 부정하고 또다시 인정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그러던 중, 휴대전화가 울렸다.“언니 아직 안 잤지?”전화기 너머에서 진소영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들려왔다.“아니. 지금 밥 먹으려던 참이야.”나는 여전히 부엌에 있는 배성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이 시간에? 집에서 직접 해 먹어? 아니면 배달시킨 거야?”진소영의 물음에 나는 자세를 바꿔 옆으로 누웠다.“해 먹지.”“오빠가 있었으면 절대 언니가 직접 요리하게 두지 않았을 텐데.”진소영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혹시 요즘 오빠랑 연락했어? 여전히 전화가 안 돼서 마음이 불안해.”나는 배성재를 바라보며 천천히 대답했다.“응, 연락했어.”그 순간, 배성재가 왼손으로 조심스럽게 죽을 저었다.그런데 그는 죽을 세 번 저었다. 나는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진정우도 죽을 끓일 때마다 항상 정확히 세 번 저었고 그건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그만의 방식이었다.이것도 우연일까?나는 순간적으로 숨이 멎는 듯했다. 진소영이 계속해서 무언가 말하고 있었지만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나는 멍
손끝에 날카로운 통증이 스쳤다. 본능적으로 손을 움켜쥐려 했지만 배성재가 단단히 붙잡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조금만 참으세요. 금방 끝납니다.”그의 목소리는 전에 듣던 차가운 톤과 달리 부드러웠다.‘이 사람, 기분이 바뀌는 속도가 한여름 날씨보다 더 변덕스럽네.’간호사는 능숙한 솜씨로 내 손끝에 박힌 유리 조각을 제거했다. 그녀는 조각을 핀셋으로 집어 들어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보세요. 이렇게 크잖아요. 그대로 두면 계속 찌르고 아팠을 거예요.”나는 언제 유리가 박혔는지도 몰랐다. 아마 아까 재떨이를 던질 때 튀어서 박힌 듯했다.간호사는 조심스럽게 소독한 뒤, 작은 반창고를 붙여주었다.“다 됐습니다.”그러자 배성재가 짧게 말했다.“고맙습니다.”그는 간호사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서야 내 손을 놓았다.나는 순간적으로 손을 움츠리며 반창고가 붙은 손끝을 바라보다가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성재 씨는요?”“뭐가요?”“다치신 곳 없어요?”“없습니다.”방금 나를 구해주면서 몇 번이나 뒹굴었는데 하나도 다친 데가 하나도 없다니. 배성재는 보기보다 훨씬 단단한 사람이었다. 병원 복도를 걸어 나오며 나는 문득 생각났다.“이제 말해보세요. 당신,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죠? 나한테 복수하려는 건가요? 아니면 또 다른 속셈이라도 있는 거예요?”그는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렸다.“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네요.”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아니 당신 나 엄청 싫어하잖아요. 그런데 방금 전까지 내 손까지 잡아가며 치료해 줬잖아요. 그게 무슨 의미냐고요.”“당신이 다친 건 저 때문이잖아요. 병원에 데려온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요?”그의 태도는 이상할 정도로 태연했다.“그렇다면 우리 이제 퉁친 거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었다.“제가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과 정말 많이 닮았나요?”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처음엔 그랬죠.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점점 다른 사람이란
“그냥 빚을 갚은 겁니다.”배성재의 대답은 단순했고 동시에 그가 나를 오해했던 일도 떠올랐다.“그럼 왜 그렇게 딱 맞춰 제가 위험할 때 나타난 거죠? 저도 이제 당신이 일부러 판 함정 아닐까 의심해야 하는 건가요?”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전방을 주시한 채, 담담하게 대답했다.“미안합니다. 제가 당신을 오해했군요.”그의 뜻밖의 빠른 인정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방금 전에 그 남자가 전화하는 걸 들었어요. 오늘 일은 강유형의 짓이 아니라, 강진혁이 주도한 거더군요.”그의 말에 나는 순간 멍해졌다.‘뭐라고? 방금 그 남자는 분명 강유형이라고 했는데?’그러자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증거가 있습니다. 녹음해 뒀어요.”그는 휴대폰을 꺼내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대표님, 일 처리 끝났습니다. 지원 씨가 강유형 님이 한 짓이라고 믿고 있습니다.”나는 휴대폰을 쥔 손을 살짝 떨었다.나는 지금까지 강유형이 움직였다고 확신했었지만 이 녹음이 사실이라면 강진혁은 내가 강유형을 의심하도록 유도한 셈이고 최근 강유형이 나한테 신경 쓰는 게 불편했던 거였다.나는 불현듯, 진정우가 사고를 당했던 날이 떠올랐다.그때도 강진혁은 진정우, 강유형, 그리고 신지태까지 한 번에 제거하려 했었다.그는 나를 얻기 위해서라면 가족이고 뭐고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만약 그가 나를 차지할 수 없다면 나 역시도 제거 대상이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평소 온화하고 친절했던 그의 모습과, 지금 그의 행동이 너무나 대조적이었다.강진혁은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었나? 아니면 처음부터 연기였던 걸까?”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창밖을 바라봤다. 그렇게 아무런 말 없이 병원에 도착했고 차가 멈춰 선 순간 배성재가 내게 물었다.“조금 전에 당신을 치려던 차, 누가 보낸 거라고 생각해요?”나는 순간 당황하며 그를 바라봤다.사실, 지금까지 그 부분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지만 확실한 건, 그 차는 분명 나를 겨냥한 것이었다.그리고 만약 배성재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크게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동안 오지 않다가 오늘 왔는데 공교롭게도 배성재가 여기 있었고 또 마침 사고까지 났다.이건 분명 우연이 아니었고 누군가 일부러 꾸민 일일 가능성이 높았다.나는 그대로 주차장에서 아까 나한테 맞은 고진구를 가로막았다.“이봐요, 오늘 누가 시켜서 이런 짓을 한 겁니까?”그의 얼굴은 피범벅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모습을 보고 움찔했겠지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그는 눈을 피하며 말을 얼버무렸다.“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그의 눈빛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나는 그의 반응을 살피며 피식 웃었다.“난 말로 하는 거 귀찮아서 행동으로 보여주는 편이에요.”내가 주변을 둘러보자,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지원 씨, 제발 좀 쉽게 가시죠.”나는 차분히 말했다.“간단해요. 대답만 하면 끝나는 문제입니다.”그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말했다.“그럼 내가 하나씩 말할 테니까, 맞으면 끄덕이고 아니면 고개를 저으면 되겠네요.”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윤지원 씨...”나는 그의 말을 끊고 바로 물었다.“강씨 가문에서 시킨 거죠?”그 순간, 그의 몸이 굳어졌다. 나는 바로 반응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강유형?”“지원 씨...”그의 눈이 크게 흔들렸고 그 반응만으로 충분했다. 내가 강유형을 의심한 이유는 단순했다. 강진혁은 이미 용준호와 손을 잡고 있었다. 만약 그가 배성재를 시험하려 했다면 내부 인물을 이용했을 것이고 굳이 눈앞의 고진구를 끼워 넣을 필요가 없었다.“제발, 도련님을 건드리지 마세요. 그러면 전 끝장납니다.”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주차장에 세워진 차들의 반사경에 비친 고진구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마도 강유형에게 보고하는 거겠지. 참 열심이네, 강유형.”그가 이 모든 걸 배성재를 망신 주기 위해 벌인 일이란 건 뻔했다.배성재가 무너지면 나는 다시 그를 진정우와 비교할
나는 혹시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려고 제일 먼저 배성재를 바라보았다.다행히 멀쩡히 서 있긴 했지만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놀란 건가?’하지만 만약 그가 진정우였다면 그는 결코 이런 상황에서 주눅 들지 않았을 것이다. 배성재가 진정우가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나는 바닥에 깨진 유리 조각들을 조심히 밟으며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무슨 일입니까?”그러나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오히려 불편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그때, 방 안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비아냥거리듯 내게 말을 걸었다.“넌 또 누구야?”그러자 옆자리에 있던 다른 남자가 그의 팔을 살짝 당기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윤씨 가문 사람이야.”그제야 그 남자가 다시 나를 찬찬히 훑어보더니 이번엔 실소를 터뜨렸다.“강유형이 버린 여자잖아?”순간 속이 메스꺼웠다. 이런 식으로 내 이름이 떠돌다니. 도대체 강유형은 무슨 생각으로 나와 다시 관계를 맺으려 했던 걸까?만약 내가 정말 그와 다시 엮였다면 이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을 것이다.나는 차분히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저는 윤지원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제 사람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그 말이 끝나자, 아까 나를 비웃었던 거구의 남자가 다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네가 뭔데 책임진다는 거야?”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대화가 통하지 않아 나는 무시하고 곧장 배성재의 손목을 잡았다.“갑시다.”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다시 한번 손목을 당기자 배성재가 천천히 나를 바라봤다.“X발, 별별 것들이 다 까불대네. 어디서 나서서 이러는 거야?”그 남자가 험한 욕설을 내뱉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이제 대화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군.’나는 주저 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유리 재떨이를 그대로 집어 들고 있는 힘껏 그의 얼굴을 향해 내리쳤다.쾅!묵직한 소리와 함께 그 남자가 뒤로 휘청거렸고 방 안의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너무나 익숙한 얼굴. 하지만 내가 이 사람을 모르는 척할 수 있을까?아니 이제는 그래야만 한다. 그는 더 이상 내 인생에 발을 들일 수 없도록, 스스로 포기하도록 만들어야 했다.“난 이미 널 낯선 사람으로 보고 있어.”나는 조용히 손을 뺐고 더 이상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왔다.강유형이 언제 떠났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가 내게 보낸 메시지를 한 번 쓱 훑어봤다.내용은 어제 용준호가 했던 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배성재의 부모와 형제자매까지 포함된 상세한 신상 정보가 추가되어 있었다.이걸 나에게 보낸 이유는 단 하나, 즉 배성재를 진정우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나는 그 메시지를 보고 피식 웃었고 점심 무렵, 용준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아마 어젯밤 내가 전화를 씹었던 걸 아직도 기분 나빠하는 거야?’나는 대신, 그냥 직접 드래곤킹으로 향했다.이번에는 숨길 것도 없이 당당하게 들어가 로비 매니저를 불러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용준호 좀 보자고 해. 내 이름 대면 알 거야.”매니저의 태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윤지원 씨,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이걸 보니 용준호가 미리 내 이름을 언급해 두었음이 분명했다. 그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한 걸 보면 나를 견제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나는 안내된 방에 들어가 앉았다. 매니저가 음료나 원하는 서비스를 묻자, 나는 간단히 말했다.“과일이랑 음료만 주세요.”그리고 배성재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지금 용준호는 분명 나를 낚으려고 배성재를 미끼로 던진 상태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그가 먼저 움직이도록 놔둬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용준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올 줄 알았어.”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고 나는 바로 수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계약 정산하러 왔어.”그는 수표를 보지도 않고 오히려 내 얼굴을 살폈다.“고작 이 일 때문에?”“아니면 뭐요? 남자 모델 하나 골라서 밤새 놀고 가라는
“알았어요.”나는 짧게 하고 대답한 뒤,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묻지 않고 바로 회의실로 향했다.“잠깐만요.” 허진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어제 그 남자 모델, 진짜로 정우 씨 아니에요.”“알아요.” 나는 커피잔을 들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내가 직접 그를 땅에 묻었으니까.”허진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그냥 두겠다는 듯 다시 물러섰다. 나는 회의실 문을 열었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강유형은 마치 내 감정을 읽으려는 듯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하지만 오늘의 나는 요즘 중에서 가장 좋은 상태였다. 게다가 화장까지 하고 나왔으니 거울 속 내 모습이 꽤 근사해 보이기까지 했다.무엇보다도, 밤새 아팠던 다리도 거짓말처럼 나아 이제 걷는 것도 전혀 문제없었다.“좀 늦었네?” 강유형이 나를 훑어보더니 가벼운 농담처럼 말했다.“응, 근데 우리 대표님이 워낙 너그럽거든. 지각했다고 월급 깎지 않더라.”내 말에 강유형의 얼굴이 잠깐 굳어졌다.예전에 내가 KS그룹에 다닐 때, 지각이나 조퇴를 하면 누구든 벌금을 내야 했다. 나는 대표님의 약혼녀라는 타이틀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예외는 없었다.“어제 너한테 계속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 집까지 갔더니 불도 꺼져 있길래 걱정됐어.”강유형은 거침없이 걱정스러웠던 마음을 내비쳤다.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집에 가서 바로 잤어.”“그렇게 쉽게 잘 수 있었어?”“못 잘 이유라도 있어?” 나는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배성재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 사람, 진정우 아니야. 내가 직접 조사해 봤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하더니 바로 그때, 내 주머니 속 핸드폰이 가볍게 진동했다.“밤새 사람 시켜서 조사했어. 관련 자료 다 보냈으니까 확인해 봐.”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윤지원, 진정우는 이미 죽었어. 네가 직접 봤잖아.”나는 손에 쥔 커피잔을 가만히 돌리며 대답했다.“나도 알아. 그 사람이 죽었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