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혁은 차가운 표정으로 걸어와 부모님과 마주했다. 그러자 삼촌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강진혁, 정말 끝까지 이럴 거냐?”강진혁은 부모님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제가 기억하는 한, 유형이가 태어난 이후로 내 모든 것이 달라졌어요. 아버지는 유형이를 감싸고 사랑했지만 저는 점점 배제됐죠. 그가 아기일 때부터 부모님은 항상 유형이와 함께 잤어요. 그때 나는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홀로 두려움에 떨었죠. 늘 그렇게 말하셨잖아요.‘유형이는 아직 어리니까.’하지만 저는요? 저도 그보다 겨우 몇 살 많았을 뿐이에요. 저도 사랑받고 싶었던 어린아이였다고요. 유형이는 부모님의 사랑만 빼앗아 간 게 아니었어요. 제 장난감, 제 옷, 제 모든 것이 하나씩 그에게 넘어갔죠. 심지어 제 물건을 빼앗길 때마다, 아버지는 ‘넌 형이니까 양보해야지’라며 저를 설득했어요. 그렇게 두 분은 늘 ‘형이니까 참아야 한다’고 저를 세뇌했어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게 익숙해졌어요. 정말 간절히 원하는 것도, 늘 유형이가 먼저 선택할 기회를 가졌죠. 그리고 그가 가져가 버리면 저는 밤마다 이불 속에서 몰래 울 수밖에 없었어요.”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아줌마와 삼촌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나는 강진혁의 눈동자 속 깊숙이 숨어 있던 억울함과 분노를 보았다.그가 품고 있던 상처는 20년이 넘도록 아무도 들어주지 않은 채, 그를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다가 지원이가 우리 집에 왔어요. 나는 지원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어요. 하지만 두 분은 ‘지원이는 유형이의 미래 아내’라고 못 박아버렸죠. 나는 또다시 숨을 수밖에 없었어요. 좋아하면서도 티 내지도 못하고 조용히 그 감정을 숨겨야 했어요.”강진혁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의 사랑이 비록 뒤틀렸을지언정,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간직된 감정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나중에 부모님은 유형이에게 회사를 맡겼죠. 그러면서 저에게는 온갖 이유를 대며 칭찬
“솔직히 말해봐, 너 윤지원이랑 해봤어?”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와 막 들어가려던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문틈 사이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강유형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지원이가 먼저 다가왔지만 난 관심 없었어.”“강유형, 그렇게 사람 깎아내리지 마. 윤지원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 미인이야. 꽤 많은 사람들이 윤지원을 노리고 있다고.”말하는 사람은 강유형의 친구 신지태였다. 그는 나와 강유형의 10년 감정을 지켜본 증인이기도 했다.“너무 익숙해서 그래.” 강유형이 눈썹을 찌푸렸다.내가 14살 때 강씨 집안으로 보내졌고 그때 처음으로 강유형을 만났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앞으로 강유형과 결혼할 거라고.그 후로 우리는 함께 살았고 어느새 10년이 흘렀다.“그렇지. 너희 둘은 낮에는 한 회사에서 일하면서 얼굴 보고 밤에는 집에 와서 같은 식탁에서 밥 먹고. 아마 상대방이 하루에 몇 번 화장실 가는지까지 다 알겠어.”신지태가 농담을 던지고는 혀를 찼다. “지금은 오래 보면 정든다는 시대가 아니야. 남녀 사이엔 그래도 신선함이 있어야 하지.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그런 느낌, 그래야 감정이 생기고 자극적인 법이야.”강유형은 침묵했고 신지태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듯했다.“그래서 너 윤지원과 결혼할 거야?” 신지태의 질문에 내 숨이 멎는 것 같았다.강유형의 부모님은 우리에게 혼인신고를 하라고 하셨다. 그는 좋다고도, 싫다고도 하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 묻지 않았다. 그러니 신지태가 나 대신 물어본 셈이다.강유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신지태가 웃었다. “결혼하기 싫어?”“...그건 아니야.”“그럼 결혼은 하고 싶은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는 거지?” 신지태와 강유형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사이라 서로의 마음을 잘 알았다.“지태야, 이런 말 들어봤어?” 강유형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뭔데?”“먹자니 맛없고 버리자니 아깝고.” 강유형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강유형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고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굳이 보지 않아도 내 안색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어디 아파?”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나는 말없이 그의 책상 앞으로 걸어가 목구멍에 맺힌 쓴맛을 삼키며 말했다. “나랑 결혼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아주머니한테 말씀드릴게.”강유형의 미간 주름이 더 깊어졌다. 그는 내가 그와 신지태의 대화를 들었다는 걸 알아챘다.난 목이 메어 말을 잇기 힘들었다. “난 내가 먹자니 맛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존재가 될 줄은 몰랐어, 강유형...”“모든 사람들 눈에는 우린 이미 부부야.” 강유형이 내 말을 끊었다.‘그래서 뭐? 그 사람들 때문에 나랑 결혼하려는 건가?’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가 나를 사랑해서, 나와 평생을 함께 보내고 싶어서 결혼하는 거였다.‘탁’하는 소리와 함께 강유형의 손에 든 펜이 닫혔고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든 혼인 신고서에 머물렀다. “다음 주 수요일에 혼인신고 하러 가자.”이 말은 내가 듣고 싶었 거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가슴이 아팠다. 그것도 아주...난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강유형, 억지로 할 필요 없어. 나도 그럴 필요 없고.”“윤지원!” 그가 날카롭게 내 이름을 불렀다.나는 움찔했고 고개를 들어 그의 짜증 난 듯한 눈과 마주쳤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혼인 신고서를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그의 턱이 굳어졌다. “이리 줘.”나는 움직이지 않았고 분위기는 더욱 팽팽해졌다.몇 초 후, 그가 일어나 내게로 왔고 내 앞에 서더니 한숨을 살짝 내쉬며 말했다. “지태랑 한 얘기는 그냥 농담이었어. 넌 왜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야?”정말 농담이었을까?“너도 알잖아. 남자들에게 체면이 얼마나 중요한 거.” 그의 손이 내 팔을 잡더니 천천히 내려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혼인 신고서를 빼앗아 갔다.“앞으로는 남의 말 함부로 믿지 마.” 그가 돌아서서 혼인 신고서를 서랍에 넣고 옆에 있
하루 종일 이 문제를 고민했지만 오후에 그가 나를 부를 때까지도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난 그를 따라나섰다.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10년이란 시간 동안 나는 그에게, 그리고 퇴근 후 강씨 집안으로 돌아가는 일에 익숙해져 버렸다.“왜 말이 없어?”돌아가는 길에 강유형이 내 기분이 좋지 않음을 눈치챘는지 먼저 물었다.나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강유형, 우리 그냥...”뒷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휴대폰이 울리면서 차량 디스플레이에 이름 없는 번호가 떴고 강유형의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그가 긴장했다.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이미 재빨리 차량 스피커를 끄고 블루투스로 전환했다. “여보세요... 네, 지금 가고 있습니다.”통화 시간은 짧았다. 그는 전화를 끊고 나를 보며 말했다. “지원아, 급한 일이 생겨서 집에 데려다줄 수가 없겠어.”사실 그가 말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나를 내버려두고 갈 거라는 걸. 이미 처음이 아니었으니까.그래도 그가 말하기 전까지는 나를 먼저 데려다줄 거라고 기대했었다.가슴 한구석이 갑자기 텅 비어 아파왔고 나는 서운함을 억누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강유형의 턱이 굳어졌다. 그는 대답 대신 밖을 보며 말했다. “저기서 내려줄게. 택시 타고 돌아가.”설명조차 해주지 않고 이미 다 결정해 놓은 듯했다. 그러니 내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더 묻고 떼를 쓰는 건 스스로 망신당하는 일일 뿐이다.“집에 도착하면 전화... 메시지 보내.” 강유형이 당부하는 사이 핸들은 이미 돌아가 도로변 임시 주차장에 멈춰 섰다.나는 가방을 꼭 쥐고 차에서 내렸다.내가 예민한 게 아니다. 그가 발신번호를 본 후의 이상한 반응부터 차량 스피커로 통화하지 않으려 한 것까지, 이미 예감이 왔다.다만 묻지도 말하지도 않았을 뿐이다.어떤 일들은 묻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그대로 두고 자기 위안을 할 수 있으니.“조심해서 가!” 서두르는 와중에
평생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성추행 혐의로 경찰서에 끌려올 줄이야.그날 내가 부딪힌 건 고작 열일곱 살의 미성년자였다. 그 녀석은 내가 자기를 더럽게 만졌다고 우겼고 내가 아무리 부인해도 소용없었다.“어디를 만졌다는 거죠?” 경찰이 꼼꼼하게 물었다.조태혁이라는 소년은 나를 노려보며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더니 허리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요, 여기... 이 여자가 다 만졌어요.”‘개소리하지 마, 이 자식아!’나는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강유형 같은 미남도 못 만져본 내가 겨우 털도 다 안 난 꼬맹이를 만진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경찰이 다시 나를 쳐다보자 난 그가 묻기도 전에 먼저 부인했다. “전 그 애를 만지지 않았어요. 그저 실수로 부딪쳤을 뿐이에요.”“술 드셨나요?” 경찰의 눈빛이 의미심장했다.이 사회에서 남자가 술에 찌들어 사는 건 정상이지만 여자가 술을 마시면 대부분 품행이 의심받게 된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셨어요.”“얼마나 드셨죠?” 경찰의 이 질문이 지금 상황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맥주 한 병이요.”경찰은 믿지 않는 눈빛을 보였다. 난 즉시 내 친구 안리영이 증인이 돼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 꼬맹이와 내가 다투고 있을 때 안리영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출혈 중인 산모를 구하러 병원으로 긴급 소환됐다고.난 경찰의 의도를 이해하고 다시 한번 설명했다. “전 취하지 않았어요. 술 핑계로 이 꼬맹이를 건드릴 이유도 없고요.”경찰은 내 말을 기록하고 조태혁을 바라봤다. “저 여성분께서 만졌다고 확신해요? 거짓말이나 무고는 법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당연히 확실하죠” 조태혁은 정말 고집불통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일어나 그를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조태혁의 눈이 갑자기 반짝였다. “누나, 왔어?”그가 미성년자니 당연히 보호자를 불렀을 거다. 나는 그의 가족에게 설명하려고 고개를
내 손이 아플 정도로 꽉 잡혔다. 분명 그가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이게 질투인 걸까?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 강유형은 내 손을 놓았고 그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윤지원, 내가 한마디 했다고 이렇게 복수하려는 거야?”나는 순간 당황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으니까.“아니 난...” 설명하려는 내 말은 도중에 끊겼다.“너 정말로 그 녀석을 만졌어? 정말로 그곳을?” 강유형의 턱이 굳어졌고 그의 눈에는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은 무서운 빛이 서렸다.이런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는데 역시 질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순간 내 마음속의 불편함이 많이 사라졌다. 그가 나를 여전히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만약 그가 나를 단순히 여동생이나 친구로만 여겼다면 내가 다른 남자를 만졌다고 해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아니야.” 나는 다시 한번 부인했다.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조태혁이 안에서 나왔고, 나를 향해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변태 아줌마, 또 우리 매형 꼬시려고?”사람 성격 쉽게 안 변한다더니 정말 그랬다.조태혁이 나를 바라보는 그 비열한 표정은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졌나 싶을 정도였다.이쪽으로 걸어오는 남매를 보면서, 특히 조나연의 그 순수한 모습과 그녀가 강유형을 만졌던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손을 들어 강유형의 팔을 감쌌다.하지만 그의 근육이 순간 굳어지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또 거짓말이지.” 조나연이 조태혁의 귀를 꼬집으며 다가왔다.그녀는 우리 앞에 서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유형 씨, 지원 씨, 정말 미안해요.”“네 잘못 아니야.” 강유형이 조태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에 또 이런 짓 하면 아무도 널 구해주지 않을 거야.”“흥.” 조태혁이 불만스럽게 강유형을 흘겨보았다. “당신이 누군데요? 뭔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해요? 당신이 우리 새 매형이 되겠다면 말 들을게요.”“조태혁!”조나연이 꾸짖으며 그를 한 번 더 때렸고 조태혁은 피하며 말했다. “누나, 저 사람
조나연은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아이는 무사했고 그녀는 병실로 돌아왔다. 창백한 얼굴에 붉어진 눈, 거기에 하얀 달빛까지 더해져 정말 애처롭고 가련해 보였다.“너무 걱정하지 마. 아이는 괜찮아.” 강유형이 위로했다.“유형 씨, 나 너무 무서웠어.” 조나연이 울음을 터뜨렸다. 강유형이 휴지를 건네자 조나연은 그것을 받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그의 손등에 기댔다.비록 가엾긴 하지만 그렇다고 남의 약혼자를 자기 남자처럼 대해도 되는 걸까?나는 다가가 말했다. “나연 씨,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가 흥분하면 태아에게 좋지 않대요. 겨우 아이를 지키셨는데 이렇게 울다가 또 문제가 생기면 곤란해질 거예요.”말하면서 난 그녀를 부축하며 강유형과 살짝 떼어놓았다. 하지만 강유형의 손등에 남은 눈물자국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 것이 다른 사람에 의해 더럽혀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깨끗한 걸 좋아한다. 일상에서도 그렇고 감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조나연은 내가 이렇게 말한 것에 놀란 듯했다. 그녀는 얼굴색이 확 변했다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로 잡았다.“유형 씨, 미안해. 내가 이렇게...”그녀가 휴지를 집어 강유형의 손을 닦으려 하자 내가 가로막았다. “나연 씨, 지금은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요.”조나연의 표정이 굳었다. 눈물 고인 눈으로 강유형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분명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병실을 나오자마자 나는 강유형에게 물었다. “나연 씨가 널 좋아하나 봐?”“아니야!”강유형이 부인했다.“그럼 넌? 나연 씨를 좋아해?”한 번에 확실히 물어보고 싶었다. 애매하게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으니까.강유형의 표정이 굳어졌다. 몇 초 후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그저 친구일 뿐이야...”정말 그저 친구일까?“석진이가 세상을 떠날 때 내 손을 잡고 나연이를 돌봐달라고 했어...” 강유형의 목소리가 떨렸고 늘어뜨린 손도 마찬가지였다.임석진의 죽음을 언급할 때마다 그는 항상 이렇게 격앙되
지금은 내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흥분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이 순간 그가 전화를 받거나 나가버린다면 나로서는 모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강유형의 목젖이 움직였다. 그는 휴대폰을 집어 들어 바로 끊어버리고는 다시 내 목과 쇄골에 입 맞추기 시작했다...하지만 휴대폰이 곧바로 다시 울렸다. 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우리 둘 다 평온할 수 없을 것 같았다.나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받아.”강유형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스쳤다. 그는 옆에 있던 이불을 끌어다 나를 덮어주고는 휴대폰을 들고 발코니로 나갔다.그가 발코니 문을 닫긴 했지만 그의 낮은 목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지금 안 돼. 간병인을 부르는 게 어때?”“돌보지 않겠다고 한 적 없어... 내 잘못인 걸 알아... 알았어, 울지 마. 갈게, 지금 갈게...”그 후로는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다만 라이터 켜는 소리만 들렸다.강유형이 담배를 피웠다.처음으로 집에서 담배를 피웠다.약 10분 후 강유형이 돌아왔고 공기 중에 담배 냄새가 섞여 있었다.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불안함이 묻어났다. “저기... 잠깐 나가봐야 할 것 같아. 나연이가 병원에 있는데 돌볼 사람이 없어서...”드물게도 그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숨기지 않았다.하지만 이불 속 내 몸이 차가워졌다. “남자인 네가 나연 씨를 돌보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해?”“난, 난 나연이한테 간병인을 구해주러 가는 거야.” 강유형은 말하면서 이미 내가 흐트러뜨린 그의 옷을 정리하고 있었다.그를 붙잡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난처함과 서운함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코끝까지 올라왔다. “강유형.”“응?”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는데 그의 눈 밑에는 불안함이 가득했다.아마도 내가 그를 붙잡고 가지 못하게 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유명한 사업가인 강유형이 언제 이렇게 두려워했던가. 지금 내 앞에서 그는 긴장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이 순간 내 목구멍에 걸린 말을 더 이상 꺼낼 수 없었다. 나는 쓴
강진혁은 차가운 표정으로 걸어와 부모님과 마주했다. 그러자 삼촌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강진혁, 정말 끝까지 이럴 거냐?”강진혁은 부모님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제가 기억하는 한, 유형이가 태어난 이후로 내 모든 것이 달라졌어요. 아버지는 유형이를 감싸고 사랑했지만 저는 점점 배제됐죠. 그가 아기일 때부터 부모님은 항상 유형이와 함께 잤어요. 그때 나는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홀로 두려움에 떨었죠. 늘 그렇게 말하셨잖아요.‘유형이는 아직 어리니까.’하지만 저는요? 저도 그보다 겨우 몇 살 많았을 뿐이에요. 저도 사랑받고 싶었던 어린아이였다고요. 유형이는 부모님의 사랑만 빼앗아 간 게 아니었어요. 제 장난감, 제 옷, 제 모든 것이 하나씩 그에게 넘어갔죠. 심지어 제 물건을 빼앗길 때마다, 아버지는 ‘넌 형이니까 양보해야지’라며 저를 설득했어요. 그렇게 두 분은 늘 ‘형이니까 참아야 한다’고 저를 세뇌했어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게 익숙해졌어요. 정말 간절히 원하는 것도, 늘 유형이가 먼저 선택할 기회를 가졌죠. 그리고 그가 가져가 버리면 저는 밤마다 이불 속에서 몰래 울 수밖에 없었어요.”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아줌마와 삼촌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나는 강진혁의 눈동자 속 깊숙이 숨어 있던 억울함과 분노를 보았다.그가 품고 있던 상처는 20년이 넘도록 아무도 들어주지 않은 채, 그를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다가 지원이가 우리 집에 왔어요. 나는 지원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어요. 하지만 두 분은 ‘지원이는 유형이의 미래 아내’라고 못 박아버렸죠. 나는 또다시 숨을 수밖에 없었어요. 좋아하면서도 티 내지도 못하고 조용히 그 감정을 숨겨야 했어요.”강진혁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의 사랑이 비록 뒤틀렸을지언정,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간직된 감정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나중에 부모님은 유형이에게 회사를 맡겼죠. 그러면서 저에게는 온갖 이유를 대며 칭찬
“아줌마,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두 번도 배신해요. 강유형은 이미 저한테 신뢰를 잃었어요. 설령 제가 진혁 오빠를 선택하지 않는다 해도, 유형이를 다시 선택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강유형의 부모님이 아직도 나와 강유형의 관계를 다시 잇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기대를 확실히 끊어놓을 필요가 있었다.“진혁이도 안 돼.”그동안 가만히 듣고만 있던 삼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 말에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아줌마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할 때부터 이미 부부가 함께 논의한 결과라는 걸 알고 있었다.“삼촌, 요즘 세상에 연애는 자유로운 거예요. 그리고 아줌마랑 삼촌이 이런 이야기를 진혁 오빠한테도 했어요?”나는 가벼운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러자 삼촌의 표정이 단단하게 굳어졌다.“지원아, 우리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거 알아. 네가 우리를 용서한다고 했지만 마음속 깊이 우리를 원망하는 거 아니야? 너한테 잘못한 건 우리니까, 화가 나면 나한테 직접 풀어. 하지만 우리 아들들까지 싸우게 만들지는 마.”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삼촌, 너무 과대 해석하시는 거 아니에요? 저는 누구의 사이도 이간질할 생각 없어요. 그저 제 자리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에요.”나는 자신도 서글퍼질 만큼 씁쓸하게 웃었다.“저는 그저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과 함께, 제가 온전히 쉴 수 있는 집을 갖고 싶어요. 제게도 그런 가족이 있으면 좋겠어요.”“지원아, 만약 네가 정말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다면 아줌마가 더 좋은 사람을 소개해 줄게.”아줌마는 다급한 듯이 말했지만 나는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그럼 진혁 오빠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오빠는 절 원하고 있어요. 제 마음속에 아직 진정우가 남아 있다는 것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어요.”그 말이 끝나자 거실이 순간 얼어붙었다.아줌마와 삼촌의 얼굴이 굳어졌고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참 후, 아줌마는 마치 울고 싶은 듯한 얼굴로 조용히 입을
강진혁과 함께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서자, 강유형이 거실에 앉아 있었다.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얼굴이 굳었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지원아!”아줌마는 여전히 예전처럼 다정했다. 오랜만에 나를 보자 그녀는 감격한 듯 눈물을 훔쳤다.“이제야 다시 보게 되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삼촌은 소파 옆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몸 상태가 예전보다 더 나빠 보였고 기운도 없어 보였다.그는 내 시선을 피하며 어딘가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기 때문일까?우리 사이의 벽은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지만 나는 여느 때처럼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삼촌, 오랜만이에요.”나는 이미 이들과의 감정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과거의 원한을 묻기로 했으니, 그들에게‘빚을 갚으라’는 듯한 태도를 보일 생각은 없었다.삼촌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강유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진혁을 노려보며 말했다.“잠깐 나와봐.”어릴 때부터 감정을 숨기지 않는 강유형의 성격을 알기에,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강진혁과 크게 한바탕 할 기세였다.아줌마는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입을 열려다 이내 망설였다.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지만 굳이 먼저 묻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결국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지원아, 너랑 진혁이 요즘 많이 가까워졌니?”나는 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답했다.“오빠가 저를 좋아한다고 고백했어요.”아줌마와 삼촌은 동시에 굳어버렸다. 아줌마는 입술을 몇 번 달싹였지만 이내 굳은 얼굴로 물었다.“그럼... 너도 그 마음을 받아들일 생각이야?”그녀의 반응은 예상한 대로였다. 예전에는 강유형과 내가 헤어졌을 때조차‘같은 집안사람인데 인연을 이어보면 어떻겠냐’는 식으로 말하더니, 지금은 확실히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아마도 이제는 단순한 집안 문제를 넘어, 그동안 감춰졌던 진실이 드러났기 때문이겠지.“아직은 아니에요. 하지만 오빠가
나는 힘없이 웃었다. 허진호가 굳이 전화를 걸어 단순한 안부를 물을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는 분명 내가 제대로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손목을 들어 올려 작은 방울을 입술에 살짝 대고 조용히 중얼거렸다.“정우야, 네 친구가 널 대신해서 내 안부를 챙겨주고 있어.”해가 질 무렵, 나는 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강진혁을 발견했다.붉게 물든 석양 아래 그의 실루엣이 마치 빛을 두른 것처럼 선명했다.그가 서 있는 모습은 단정하고 부드러웠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젊은 여자 직원들이 연신 뒤돌아보며 속삭였고 어떤 용기 있는 이는 대놓고 감탄하며 말했다.“오빠, 진짜 잘생겼어요!”그러나 그는 그 모든 시선을 철저히 차단한 채 오직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그에게 다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진혁 오빠, 인기 여전하네요?”그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너까지 장난치지 마.”나는 가벼운 농담을 접고 본론으로 넘어갔다.“소희 소식은요? 아직도 못 찾았어요?”“아직이야. 하지만 그녀의 남자 친구에 대해 조사해 봤는데...”그는 말을 잠시 끊었다. 나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조용히 물었다.“뭐가 문제예요?”“그 사람, 빚이 많더라. 사채와 온라인 대출까지 뒤얽혀 있었고 동시에 여러 여자와 교제하고 있었어.”그 말에 나는 한숨을 삼켰다. 결국, 그녀가 힘들어했던 이유는 사랑이 아니라 배신이었을지도 몰랐다.“지금 그 사람은 어디 있어요?”“체포됐어.”나는 순간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면회 가능한가요?”“가능하지. 내가 알아볼게.”그는 그렇게 말하며 차 문을 열어 주었다.차 안에 오르자 내 자리에는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화려한 장미가 아닌, 연보랏빛 라벤더와 안개꽃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꽃다발이었다.나는 꽃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이건...?”그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별을 따다 줄 순 없어서 대신 이걸 준비했어.”그의 말은 부드럽고 낭만적이었
“지원아!”강진혁의 목소리는 예전처럼 부드럽고 듣기 좋은 톤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 다정함이 오히려 날카로운 가시처럼 느껴졌고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남겼다.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온화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의 내면은 너무나 어두웠다.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 심지어 타인을 짓밟는 일조차 서슴지 않는 사람이었다.나는 감정을 억누르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오빠,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요?”“말해 봐.”그의 말투는 예전과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현재 그는 강유형 대신 KS 그룹을 이끌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목소리에는 자연스럽게 권위가 묻어났다. 역시 사람이 앉는 자리가 그 사람의 말투와 행동까지도 바꿔놓는 법이다.“우리 회사에 있던 직원, 이소희라고 아세요? 제 친구인데 얼마 전에 퇴사하고 연락이 끊겼어요. 혹시 오빠 인맥을 통해 그녀를 찾아줄 수 있을까요?”“이소희?”그는 내 말을 한 번 되뇌더니, 잠시 생각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알았어. 찾아볼게.”“고마워요, 오빠.”나는 여느 때처럼 예의 바르게 감사를 전했다. 그러자 그가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지원아.”“네?”“우리, 만날 수 있을까?”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좋아요. 언제요?”“네가 편한 시간에 맞출게.”그는 언제나 내 의견을 먼저 물었고 내 뜻을 존중해 주었다. 그는 한 번도 나에게 자신의 기준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그의 마음은 오래전부터 이런 식으로 나를 향해 있었고 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의 배려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감정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럼 내일 저녁에 봬요. 저를 데리러 와 주세요. 오랜만에 삼촌이랑 아줌마도 뵙고 싶네요.”내 말에 강진혁이 순간 멈칫했다.“...알겠어. 부모님께도 전해 놓을게.”전화를 끊고 나는 손목의 방울을 살짝 흔들었다. 그 맑고 청아한 소리를 들으며 속삭였다.‘정우야, 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강씨 집안과 엮이지 말라는 건 대체 무슨 의미였
용설아뿐만 아니라 허진호 역시 진정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적어도, 그가 겪었던 위험과 고비에 대해서는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그의 과거를 깊이 파고들 용기가 없었다.그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알면 알수록 더 마음이 아플 테고 그리움만 깊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저는 믿을 수 없어요.”허진호가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나 역시도 가슴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진정우가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만 같았다. 다만 내가 도달할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버린 것뿐이라고.“그럼 정우가 아주 먼 여행을 떠난 거라고 생각합시다.”나는 손목에 걸린 방울을 살짝 흔들었다. 맑고 청아한 울림이 공간을 가득 채웠고 그 소리에 마치 진정우가 여전히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조금이나마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다행이야.’그가 남긴 이 작은 방울이, 나를 붙잡아 줄 마지막 선물 같았다. 그때, 허진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조금만 시간을 줘요. 지원 씨에게 전해줄 물건이 있어요.”“뭐죠?”“직접 보면 알 거예요.”그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나는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한 번도 진지한 표정을 지은 적 없던 그가 마치 온 세상을 잃은 듯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걸 보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그에게도 진정우는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었다.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허진호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친구였다.그가 느낄 상실감 또한 나와 다르지 않을 터였다.허진호가 떠난 후, 나는 사무실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손목의 방울을 흔들었다.그저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그 소리는 나를 위로하는 듯했다.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회사를 나와 이소희의 집으로 향했다.전날 그녀에게 연락했지만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고 메시지에도 답이 없었다.회사에 알아보니 이미 사직서를 제출한 상태였다. 결국, 직접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누구세요?”소희의 어머님인 박수미가 나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
남자는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특히, 여자 앞에서는 더더욱.하지만 지금, 나는 허진호가 내 앞에서 눈가가 붉어지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그가 그렇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그의 사무실을 나와, 그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충분히 진정우를 기릴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주었다.이 회사가 진정우의 것이라고 했지만 공식적인 사장은 허진호였다.그만큼 두 사람 사이의 신뢰가 깊었고 진정우는 그를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다.그런데 이제, 진정우가 사라졌다. 그를 기다리던 허진호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의 슬픔도, 나 못지않을 것이다.나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진정우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는 연구개발을 했기에 직접 실험을 진행하는 일이 많았고 책상 위에는 각종 실험 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하지만 그 많은 장비에도 불구하고 연구실은 전혀 어수선하지 않았다.나는 천천히 다가가 책상 위에 놓인 실험 기록 노트를 집어 들었다. 빼곡하게 적힌 숫자들, 그리고 그가 직접 쓴 강직한 글씨들. 손끝으로 글자를 따라가다가, 다시 가슴이 아려왔다.모든 것이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그는 더 이상 여기에 없었다.그가 남긴 것들은 내 손에 닿지만 정작 그는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그가 있었던 흔적이 이렇게나 선명한데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나는 자리로 앉아 그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평소 그가 쓰던 펜, USB, 블루투스 이어폰, 그리고 기록 노트가 있었다.그리고 눈에 띄는 투명한 상자 하나가 있어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내 열어보았더니 안에는 묘하게 낯선 질감을 가진 가느다란 팔찌가 들어 있었다.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금속이나 은이 아니라,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재질이었고 잠금장치가 없었다. 혹시 빠진 걸까 싶어 상자 안을 뒤적이다가 몇 개의 미완성 부품과 함께 접혀 있는
신입 사원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씩씩하게 대답했다.“그럼요! 윤 부장님, 밥 사주세요.”그 직설적인 대답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좋아, 그럼 오늘 저녁에 다 같이 ‘성해 반점’에서 모이자. 내가 쏠게.”“정말이죠?”“당연하지.”“와! 윤 부장님 최고!”신입 사원은 신나서 뛰어나갔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별것 아닌 대화였지만 회사 분위기가 한결 밝아진 것 같았다.가방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본 후, 나는 허진호가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는 책상 가득 쌓인 서류에 파묻혀 있었다.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른 채 바쁘게 사인을 하고 있었다.나는 그의 책상을 흘끗 바라봤다. 거기에는 내가 맡았던 부서의 서류들도 섞여 있었다.‘역시, 내가 아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건 이 사람이 뒤에서 버텨주고 있었기 때문이구나.'내가 없는 동안, 모든 업무를 그가 대신 처리했을 것이다.“허 대표님, 이렇게 혼자서 모든 걸 떠안고 일할 거면 차라리 사람을 더 뽑는 게 낫지 않아요?”내 말을 들은 허진호는 순간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그는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세상에, 윤 부장님!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저 정말...”그는 말을 멈췄지만 나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내가 회사로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하지만 만약 내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왜 새로운 직원을 뽑지 않았던 걸까? 혹시 내 퇴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허 대표님, 저 복직할 수 있는 거죠?”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당연하죠! 무조건! 그런데 복직 안 하면 설마 퇴사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절대 안 돼요. 회사 규정상 최소 1년은 근무해야 사직이 가능하다고요!”그의 말에 나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계약서에 그런 조항이 있었어? 나 왜 몰랐지?’“이건 말도 안 되는 규정이에요.”나는 장난을 치며 말했다.“서명했으면 끝난 거예요. 이제 와서 불평하
나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강유형을 바라봤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난 이미 알고 있으니까.”강현우의 눈빛이 깊어졌다.“누구라고 생각하는데?”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몸을 일으키며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지원아, 설마 형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형이랑 만나려는 것도 결국 진정우의 복수를 위해서야?”오랫동안 나를 사랑했던 사람답게, 내 속마음을 읽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진혁 오빠 아니야? 그렇다면 진짜 배후가 누구인지 알려줘.”내 질문에 그는 잠시 말을 삼켰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지원아, 형은 아니야. 사실 나도 정확한 배후가 누군지는 몰라. 그때 네게 말했던 건 그저 추측이었어.”나는 조급해하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아니라면 더 좋지. 그렇다면 내가 진혁 오빠를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겠네.”강현우의 표정이 굳어졌다.“지원아…“나는 깊은숨을 내쉬며 담담하게 말했다.“우린 10년을 알고 지냈고 4년 동안 사랑했어. 그리고 나는 진정우를 사랑하게 됐지. 나는 여러 가지 사랑을 경험했어. 짝사랑이 이루어지는 설렘도, 운명처럼 빠져드는 감정도. 하지만 결국 사랑이란 건 너무 피곤한 감정이더라. 이제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선택하고 싶어.”“좋아, 네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건 이해하지만 형은 절대 안 돼.”강현우는 강하게 반대했고 나는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왜 안 되는데? 이유를 말해봐.”그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지원아, 이유 모를 리 없잖아. 꼭 내가 말해야 해? 내 형이잖아. 너는 한때 내 약혼녀였고. 둘이 같이 있으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볼 것 같아? 우리 가족은 또 어떻게 보겠어? 나더러 어떻게 널 마주하라는 거야?”나는 잠시 침묵했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럼 네 체면과 감정을 위해, 난 내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는 거야?”그는 내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마음의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