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우에게 전화를 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갑자기 쿵하고 내려앉았다. 더 중요한 건, 그 사실을 내가 진소영에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적어도 그녀의 심장이 충분히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 안리영에게 연락해서 구 교수님께도 말씀드리고 진소영에게 다시 한 번 검사를 받게 해야겠다.결국엔 숨길 수 없을 것이다. 진정우가 없어진 지금, 잠깐은 숨길 수 있어도, 결국은 진실은 드러날 테니까.“너 오빠한테 뭐라고 말할 거야? 고마워서?”나는 일부러 진소영에게 물어봤다.“응, 맞아.”진소영은 손에 들고 있던 입학 통지서를 만지며 기뻐했다.나는 살짝 기침을 하고는 말했다.“그건 괜찮아, 고마워할 필요 없어... 사실 그 입학 통지서도 내가 준비한 거야.”진소영은 잠시 놀랐다가, 이내 나를 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언니 최고! 고마워, 언니!”“응.”하지만 진소영은 여전히 재촉했다.“그럼 언니, 나 오빠한테 전화 한 통 해줘.”‘이 아이는 정말 고집이 세구나.’나는 또 다른 핑계를 대기로 했다.“너 좋은 소식 전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괜찮아, 내가 이미 말했어.”“아니, 나는 그게 아니라, 그냥 오빠가 보고 싶어서, 할 말이 있어.”진소영의 말에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똑똑해서 금방 눈치를 챘다.“언니, 왜 오빠한테 전화 안 해줘? 오빠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급히 부인했다.“아니.”“근데 나는 계속 오빠랑 연락이 안 돼. 휴링턴 이후로 전혀 못 봤어. 언니, 오빠 무슨 일이 생겼지?”진소영은 나를 붙잡으며 그녀가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입학 통지서조차 떨어뜨렸다.그녀의 모습에 나는 마음이 아팠다. 만약 내가 살짝만 고개를 끄덕이면 그녀는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진소영도 진정우의 진짜 신분을 알 것 같아 계속 핑계를 둘러댔다.“아니야, 너무 걱정하지 마. 오빠는 지금 또 비밀 작전에 참여하고 있어. 외부와 연락할 수 없는 상황이야.
‘진씨 가문 사람들을 까먹었네.’진정우는 진씨 가문의 새로운 후계자로서 이렇게 오랫동안 연락이 없다면 진씨 가문에서 제일 먼저 그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진소영에게 가서 간접적으로 정보를 탐색하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뭔가 이상해.’ 나는 진소영의 기분을 상관하지 않고 물었다. “소영아, 너한테 물어 본 사람 누구인지 기억나?”“오빠랑 비슷한 나이대인데 이름이 진수로라고 한 것 같아.”나는 진수로의 얼굴이 떠올리며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이 몇 번 왔었어? 혼자 왔었어?”“응.”진소영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보였지만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언제 입학할 건지 나한테 말해줘. 내가 그때 너 데려다줄게.”“언니, 나 언니랑 오빠 같이 가고 싶어.” 진소영은 끈질기게 달라붙었고 나는 마음을 다잡고 대답했다. “알았어. 오빠한테 말해볼게. 빨리 돌아오라고.”진소영과 헤어지면서 나는 점점 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진씨 가문에서 진정우를 찾지 않고 있다니.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그들이 진소영한테까지 찾아왔다면 당연히 나한테도 와야 하는데 왜 나한테는 오지 않았을까? 물론 나는 진정우와 이미 헤어진 사이여서 찾아오지 않아도 이해가 되는데 용설아에게는 찾아가야 하지 않나?용설아는 나를 만나자마자 환하게 반겨주었다. “얼굴 좋아 보이네요.”“씩씩하게 살아야죠. 같이 죽을 수는 없잖아요.”용설아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럴 줄 알았는데...”나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오늘 설아 씨한테 온 이유는 진씨 가문에서 설아 씨한테 연락이 왔는지 궁금해서...”“네?” 용설아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왔었어요, 진정우가 어디 있는지 물어봤어요.”“그러면 말했어요?”용설아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말했죠, 숨길 수 없는 일이니까. 알다시피 정우가 진씨 가문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어요.” 나는 진수로가 진소영을 찾아간 이야기를 했다. 그
그녀의 질문에 나는 순간 멍해졌다.나는 두 눈으로 직접 그가 내 앞에서 쓰러지는 걸 봤고 의사가 수술이 실패했다고 말하는 걸 들었으며 내 손으로 그의 유골을 받았다.그가 다시 살아날 거라는 상상을 해본 적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현실은 소설도, 영화도 아니다. 진정우는 떠났고 그것이 냉혹한 진실이었다.아무리 내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도, 바뀌는 건 없었다.“나도 그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내 목소리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이미 정우가 떠난 걸 받아들이셨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저한테 이런 걸 묻는 거죠?”용설아가 차분하게 되물었고 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냥 뭔가 이상해서요.”“뭐가 이상한데요?”“진씨 가문의 반응이 이상해요. 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담담해 보이고요. 저는... 설아 씨가 진정우를 사랑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가 이렇게 떠났는데도, 이렇게까지 태연할 수 있는 건... 뭔가 이상하잖아요.”“저도 슬퍼요. 제가 안 슬퍼 보이나요?”용설아는 솔직하게 인정했다.“하지만 제가 아무리 슬퍼해도 정우가 돌아오진 않잖아요.”그건 사실이었다. 나도 그 말로 나 자신을 위로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또 뭐가 이상한가요?”용설아가 물었다.분명 더 이상한 점이 있었지만 갑자기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느낌이라는 게 때때로 사람을 속이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이상함’이라는 것도, 단순한 감각일 뿐, 어떤 확실한 증거도 없었다.내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용설아는 조용히 가방에서 작은 쪽지를 꺼내 내 앞에 밀어놓았다.“이거 당신 거예요.”“뭐죠?”“열어 보면 알 거예요.”나는 쪽지를 펼쳐 읽었다. “반지는 이미 제작이 끝났어요. 업체에서 진정우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아서 결국 내게 전화가 왔어요. 얼른 찾아가라고요.”나는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그럼 설아 씨가 받아 가면 되잖아요. 나한테 이걸 왜 보여주는 건데요? 지
“이 디자인은 고객님의 남자 친구가 직접 디자인한 거예요. 정말 독특하고 예쁘네요. 손목에 차신 팔찌랑 같은 디자인이기도 하고요.”점원은 예리한 눈썰미로 말을 건넸다.“그런데 남자 친구분은 왜 안 오셨어요? 이 반지는 그분이 직접 찾으러 오실 건가요, 아니면 고객님이 가져가실 건가요?”“제가 가져갈게요.”나는 짧게 대답하며 남성용 반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내 엄지손가락에 끼웠다.내 행동에 점원은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웃으며 말했다.“고객님이 껴도 꽤 잘 어울리네요.”“감사합니다.”나는 짧게 인사한 후 떠났다. 그런데 문을 나서자마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혹시 내가 양손에 반지를 끼고 있어서 너무 눈에 띄었던 걸까? 나는 무심코 길가에 세워진 차의 사이드미러를 힐끗 보았다. 그제야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하지만 나는 놀란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그대로 그 사람을 따돌리지 않은 채 내버려두었다.혹시라도 나를 해치려는 건가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사람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채 이틀 동안이나 나를 그저 조용히 따라왔다.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쫓아왔다는 건 단순한 강도나 범죄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나를 노릴 이유도 없고. 그렇다면 도대체 왜 나를 따라다니는 걸까?이 궁금증을 해결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가 나를 따라왔듯, 나도 그를 따라가 보는 것.나는 그가 머무는 장소까지 조용히 추적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내 모습을 본 그가 순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지원아, 의외네.”진수로가 나를 보고 놀란 듯 말했다.“의외는 아니죠. 내가 요즘 뭘 하고 다니는지, 대표님도 다 알고 있을 텐데요.”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 말에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나쁜 의도는 없어.”“그렇겠죠. 만약 그랬다면 우리가 이렇게 마주 앉아 있진 않겠죠.”나는 가볍게 받아쳤다.“그 이유를 물으려 온 거야?”그는 내 의도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앞
나는 전혀 무섭지 않았지만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그 순간, 귀를 찢을 듯한 자동차 경적이 울렸다.그리고 한 대의 차가 내 앞으로 급히 멈춰 서더니 누군가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진수로가 내 뒤를 밟으라고 보낸 남자였다. 그는 날 납치한 남자를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놔.”“네가 뭔데?”내 목을 조르고 있던 남자는 긴장한 나머지 목소리가 떨렸다. 솔직히, 그 순간 나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살고 싶으면 그냥 놔.”구해주러 온 남자는 위압적인 분위기를 뿜어냈지만 날 붙잡고 있는 남자는 오히려 더 버티며 비웃었다.“안 놔, 안 놔! 싫으면 와서 직접 때려 보든가!”나는 속으로 눈을 굴렸다. 이 사람, 배우 했으면 감독이 분노해서 촬영장을 박차고 나갔을 거다.역시나, 내 앞의 남자는 인상을 깊게 찌푸리더니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내 뒤의 남자가 소리쳤다.“한 발짝 더 다가오면 이 여자 가만 안 둔다!”짝! 짝!갑자기 박수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돌리니 안리영이 천천히 걸어오며 손뼉을 치고 있었다.“우리 귀여운 지원아, 몰카 당한 기분이 어때?”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날 붙잡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손을 놓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누나, 많이 놀랐죠?”나는 속으로‘아니 놀라긴커녕 웃겨 죽을 뻔했어!’라고 말했지만 꾹 참았다.그리고 나를 구하러 온 남자는 상황을 파악한 듯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얼굴에는 어색함과 당혹스러움, 그리고 뭔가 잘못됐다는 불안감이 스쳐 갔다.안리영은 그런 그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오. 그래도 멋졌어요. 타이밍도 좋았고 완전 남자다웠다니까요?”그 남자는 헛기침을 하더니 머쓱하게 말했다.“죄송합니다. 제가... 상황을 잘못 이해한 것 같네요. 방해해서 미안합니다.”그러고는 곧장 자리를 피했다. 나는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고마워요, 멋진 오빠!”그 남자가 사라지자, 안리영이 불러온 동료들도 그녀의 감사 인사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사실 이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안리영은 역시 의사답네. 해결책이 참...’안리영이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지원아, 이제 그만 벗어나야 해. 진정우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었다 해도,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어. 네가 이렇게 계속 붙잡고 있으면 너한테도, 그한테도 좋지 않아.”그녀는 내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며 말을 이었다.“너 예전에 강유형이랑 절에 가서 법문도 많이 들었잖아. 사람이란 결국 윤회를 반복하는 거야. 그런데 살아 있는 사람이 떠난 이를 너무 애타게 그리워하면 그 영혼은 다음 생으로 가지 못한다는 말도 있잖아.”나는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과학의 끝은 결국 미신과도 닿아 있다는 걸 알기에.어릴 때 어머니께서도 비슷한 말을 자주 하셨다.“지원아, 이제는 진정우를 놓아주고 너도 너의 삶을 살아야지.”안리영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단순히 그를 잊지 못해서가 아니었다.그의 죽음에 대해 너무나도 많은 의문점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처음으로, 나는 안리영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꼈지만 그녀를 탓할 수는 없었다.누구라도 지금의 나를 보고 있으면 단순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걸로 생각할 테니까.“그래, 놓아줄게. 오늘 연출하느라 고생 많았어.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나는 더 이상 이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너 요즘 완전 부자잖아? 이자만으로도 다 못 쓸 돈을 갖고 있으니, 난 제일 비싼 거 먹을래!”안리영은 스스럼없이 말했다. 그녀가 사양해도 나는 기어이 사줄 생각이었다.말 그대로 돈이야 많고 많으니, 쓰지 않고 쌓아두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나는 그녀를 데리고 해동에서 가장 높은 전망 레스토랑으로 갔고 2차로 최고급 바까지 갔다.그런데 술을 몇 잔 마시던 안리영이 나를 유심히 보며 물었다.“너 오늘... 뭔가 이상한데? 무슨 충격이라도 받은 거야?”“아니. 네가 그러잖아. 내가 아직 헤어 나오지 못했다고. 그러니까 이렇게 털어버리려는 거야.”나는 심지어 그녀를 위해
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혹시... 사람이 죽었어요?”“아니... 그게 아니라, 조명이 전부 다 꺼졌어.”강진혁의 말에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사람만 안 죽었으면 그나마 큰일은 아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수많은 불빛을 바라보며 물었다.“조명이 한순간에 다 꺼졌다는 거예요?”“응, 갑자기 전부 다 사라졌어. 기술자들이랑 수리팀이 점검했는데 정전도 아니고 배선에도 문제가 없어. 설비도 정상 작동하는데 이상하게 조명 효과만 전혀 나오지 않아.”강진혁의 설명을 들으니 나도 난감했다. 솔직히 조명 시스템 같은 건 문외한이었다. 게다가 애초에 설계부터 후반 작업까지 전부 진정우가 담당했던 일이었다.그가 있었다면 이런 문제쯤은 단숨에 해결했겠지만 이젠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그럼 놀이공원에 지금 조명 하나도 안 들어와요?” 나는 신발을 신으며 다시 물었다.“아니, 꺼진 게 아니라... 새하얘.”강진혁의 말에 손이 멈췄다.“...하얗다고요?”“사진 찍어서 보내줄게. 보면 무슨 말인지 알 거야.”그는 말을 멈추더니 잠시 망설였다.“이 조명 설계는 전부 진정우가 맡았던 거잖아. 혹시 네가 원인을 알 수도 있을 것 같고... 어쨌든 지금은 네가 놀이공원 법인 대표니까.”놀이공원은 내 소유로 되어 있었지만 운영은 강진혁이 대리로 맡아주고 있는 상태이다. ‘이참에 월급이라도 줘야 하나.’“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자마자 강진혁이 보낸 사진이 도착했다.한때 화려한 색채로 가득했던 놀이공원이 온통 눈이 시릴 정도로 새하얀 빛에 잠겨 있었다.그 광경을 보는 순간 묘하게도... 놀이공원이 마치 유령 도시처럼 보이면서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조여들었다.혹시 진정우의 영혼이 떠돌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이렇게 방황하는 걸 보고 화가 나서 이런 식으로 경고하는 건가?그 생각이 드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는 곧장 차를 몰아 놀이공원으로 향했다.안리영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더니 내가 없는 걸 보고 전화를 걸어왔다.내가 상황을 설명하자 그녀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아까까지만 해도 유령 세계 같던 놀이공원이 다시 화려한 불빛 속에 감싸이며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밖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복구됐어.”강진혁도 창밖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때, 기술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우리를 불렀다.“윤 대표님, 강 대표님! 이거 좀 보세요...”그가 가리킨 컴퓨터 화면을 보니, 이번에는 조명이 이상한 형태로 변해 있었다.빛이 선처럼 길게 이어지는데 규칙도 없이 엉망이었다.“아직 문제가 남아있네.”강진혁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나는 화면을 몇 초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갑자기 몸이 먼저 반응했고 그 자리에서 뛰쳐나가 밖으로 내달렸다.놀이공원 광장에 도착하자,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웅성거리고 있었다.“위에 글씨가 나타났어!”나는 고개를 들어 변해가는 조명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진정우가 내게 청혼하던 그날이 떠올랐다. 수많은 색색의 리본에 새겨진 단 하나의 문장.[지원아, 나랑 결혼해 줘.]“지원아, 나랑 결혼해 줘!”“청혼이야!”“근데 지원이가 누구야?!”“와, 너무 낭만적이다! 나도 이런 프러포즈 받고 싶어...”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커졌지만 나는 화면 속에서 바뀌는 수많은 조명 속에서도, 딱 하나 변하지 않는 그 문장만을 바라보았다.[지원아, 나랑 결혼해 줘.]순간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진정우!그가 남긴 조명 속에, 그때의 프러포즈가 숨어 있었던 거다. 그때는 나에게 보여주지 않더니, 이제야...‘이건 분명 진정우야.’이 조명을 이렇게까지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진정우뿐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조명 사고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그가 일부러 한 거야. 내가 엉망으로 살아가는 걸 보고 화가 나서, 이런 방식으로 경고하고 있는 거겠지.’그 생각이 드는 순간, 나는 소리쳤다.“진정우! 진정우!”하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사람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결혼해! 결혼해
안리영은 깊이 가라앉은 기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윤지원의 외삼촌과 외숙모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자책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함께 살아갈 수는 없었어도 죽음은 함께하겠다는 그들의 선택이 그녀에게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사랑은 함께 죽는 서사로 각인되어 왔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사랑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가 꿈꾸는 사랑은 서로를 붙잡고 끝까지 함께 늙어가는 것, 그뿐이었다.예전엔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기에 사랑은 단순한 줄만 알았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면 그걸로 족한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서로를 지켜낼 수 있는 사랑, 그걸 얻는 게 너무 어려웠다. 게다가 늙을 때까지 함께하자는 건 그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었다.구안석이 돌아온 건 깊은 밤이었다. 안리영은 잠들지 않았고 테라스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아직도 안 자고 있었어? 기다리지 말랬잖아.”구안석이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턱을 그녀의 어깨에 기대고 지친 숨을 내쉬며 작은 위로를 찾는 듯했다.“많이 피곤해?”안리영이 조용히 물었다.그는 그렇다는 뜻으로 낮게 대답하며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는 금방이라도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안리영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살짝 어루만졌다.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이러다 병나겠어. 선배, 이제 좀 자신을 덜 힘들게 해줄 생각은 없어?”“아직은 안 돼. 2년만 더 지나면 그땐 좀 괜찮아질 거야.”구안석의 말에 안리영은 웃었다.쓴웃음이었다.“정말 대단하다, 선배. 선배는 정말이지, 성공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야.”그녀의 말엔 약간의 농담도 섞여 있었다.구안석은 말없이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정말 말 한마디조차 하기 싫은 듯했다.안리영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한참이나 망설였던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그가 이런 모습인 걸 보니 결국 다시 삼켜버렸다.“너무 피곤해 보이네. 얼른 자자.”“응.”그는 대답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지쳐서 도무지 몸
“유정철 씨께서 신희선 씨께 먼저 약을 먹이시고 그다음 본인이 복용하셨어요. 이게 그분들이 드신 약입니다.”의사는 약병을 내게 건넸다.약병에 적힌 글자를 바라보자 목이 턱 막히고 쓴맛이 올라왔다.“그분들 정말 너무 고통스러웠던 거예요. 그래서... 그런 선택을 하신 거겠죠.”사실 예전부터 외삼촌은 그런 얘기를 하신 적이 있었다. 그땐 단지 외숙모가 세상을 떠난 뒤 함께 하려는 결심이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외숙모가 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걸 차마 두고 볼 수 없어 먼저 보내드렸고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이건 유정철 씨가 남기신 유서입니다. 지원 씨께 드리라고 하셨어요.”의사가 봉투 하나를 내게 건넸다.나는 그걸 받아 들고 외삼촌이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을 읽어 내려갔다.‘얘야, 미안하구나. 외삼촌이 더는 너를 돌봐줄 수 없게 됐구나. 이런 방식으로 끝을 맺기로 한 건 사실 희연이가 떠났을 때부터 마음속으로 결심했던 일이란다. 네 외숙모와도 충분히 상의한 일이야.얘야, 너무 슬퍼하지 말고 외삼촌을 원망하지도 말길 바란다. 이젠 정말로 세상에 미련도 남지 않았단다. 그래서 네 외숙모의 손을 잡고 희연이를 만나러 간다.얘야, 마지막 순간까지 네가 내 곁에 있어 줘서 정말 기뻤단다. 다만 외삼촌이 너무 이기적이라 끝내는 내 친딸을 잊지 못하겠더구나. 그래서… 그 아이를 따라가기로 했단다.얘야, 우리가 떠난 뒤엔 병원이나 그 누구도 탓하지 마라. 나와 외숙모는 화장해서 희연이 곁에 묻어다오. 우리 셋, 한 가족이 다시 하나가 되게 말이다.지원아, 우리에겐 네가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래서 외숙모와 희연이 그리고 내가 남긴 모든 재산은 너에게 물려주려 한다.네가 이런 돈에 욕심이 없는 거 외삼촌은 안다. 그러니 필요 없다면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써다오.얘야, 다음 생이 있다면 우리 다시 만나 평안하고 건강하게, 행복한 삶을 살자꾸나.’편지를 다 읽으니 눈물이 뚝뚝 떨어져 종이를 적셨다.눈물이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외숙모의 상태는 대략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떠났다는 말을 들어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외삼촌은 멀쩡하셨는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날 수 있단 말인가?“우리 외삼촌... 어떻게 된 거죠?”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직접 오셔서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간호사는 더 설명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나는 한동안 멍하니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니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그날이 떠올랐다.그날은 햇살이 유난히 밝았고 영어 수업 시간이었다. 갑자기 담임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와 나를 불러냈고 복도 끝에서 강두식 삼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나를 보자마자 품에 안고 한마디를 건넸다.“이제 우리가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어렸던 나는 그 말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삼촌, 무슨 일 있었어요?”눈가에 눈물이 고인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원아, 네 부모님이 돌아가셨어.”그 순간 나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멍한 상태였던 건지, 아니면 정말 몰랐던 건지, 바보처럼 되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에요?”강두식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이제 이 세상에 안 계신다는 거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뜻이란다.”“정말 다시는 못 보는 거예요?”그땐 너무 어렸고 아마도 너무 무서웠던 나머지 그렇게 물었던 것 같다.삼촌은 다시 나를 껴안았고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한순간에 부모님 두 분을 모두 잃는다는 건 더없이 참혹한 일이었다. 그런 비극을 내 인생에서 두 번이나 겪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하늘은 정말이지 나를 참으로 특별히 사랑해 주시는 모양이다.비록 외삼촌과 외숙모와는 큰 정도, 함께 밥 한 끼 제대로 먹은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내 가족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병원에 도착하니 외삼촌과 외숙모는 이미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다.“윤지원 씨, 확인 부탁드립니다. 이후에 자세한 상황을 설명해 드릴게요.”의사와 간호사가 나를 이끌었다.나는 도저
용준호가 바로 좋아요를 눌렀다. 거기에 덧붙여 댓글도 남겼다.‘어수선함도 하나의 아름다움이지.’강진혁 쪽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못 본 건지 아니면 못 본 척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나는 용준호의 댓글을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경찰 아저씨도 그렇게 말했어요.’용준호가 다시 답글을 달았다.‘이 정도 사소한 일은 내가 해결해 주지. 경찰 아저씨까지 귀찮게 할 필요가 있나?’‘오빠가 해결하면 더 엉망이 될까 봐 그래요.’‘이 오빠 못 믿어?’‘네.’‘아침부터 상처받았어.’‘파스 붙여 드릴 게요.’‘속을 다스려야지.’그의 마지막 답글을 보고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강진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무슨 일이야? 집에 도둑이라도 들었어?”갓 잠에서 깬 듯한 나른한 목소리였다.“네, 근데 잡았어요. 누군가가 시켜서 왔대요.”나는 그에게 힌트를 던졌다.사실 내게 사람을 보낼 만한 사람은 강진혁 아니면 용준호였다. 원하는 걸 찾지 못하니 나를 일부러 귀찮게 해서 불안하게 만들고 나 스스로 허점을 드러내길 기다리는 게 분명했다. 그래야 그들이 실마리를 잡을 테니 말이다.“그래? 그럼 제대로 심문해야겠네. 경찰에 넘겼어?”강진혁이 물었다.나는 가볍게 그랬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덧붙였다.“경찰이 저런 녀석들한테서 뭘 제대로 캐낼 수 있을까.”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그 말 경찰 아저씨들이 들으면 기분 상하겠는데요.”강진혁이 가볍게 기침을 했다.“그러니까 내 말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원하는 걸 얻기 어렵다는 뜻이야.”“그래도 원칙대로 가는 게 낫죠. 난 경찰 아저씨를 믿어요.”내 말에 그는 더 이상 이 문제로 왈가왈부하지 않았다.“오빠 생각엔 누가 시킨 것 같아요?”한참을 돌려 말하다가 결국 본론을 꺼냈다.강진혁도 바로 이해했다.“설마 날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쓸데없이 돌려 말할 필요 없이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오빠 아니면 준호 오빠잖아요.”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한 마디 덧붙였다.
날카로운 신음과 함께 남자가 바닥에 쓰러졌다.나는 야구 배트를 그에게 겨눈 채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낯선 남자였다.“누구 지시로 온 거야? 내 집엔 어떻게 들어왔고?”나는 곧장 다그쳤다.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입을 열 생각이 없다는 태도였다. 나도 긴말 없이 바로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그럼 경찰서로 가서 말해.”“신고하지 마세요!”남자는 겁에 질렸다.“그냥 뭐 좀 훔치려고 했을 뿐이에요. 지금 다 돌려드릴 테니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면서 그는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다. 나는 혹시라도 무기를 꺼낼까 싶어 차갑게 경고했다.“손 함부로 놀리지 마.”내 말이 끝나자 남자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그의 손과 함께 나온 것은 내 액세서리들이었다.“이것뿐이에요. 다 여기 있습니다.”그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말했다.단순한 좀도둑인가?나는 믿지 않았다. 이건 그냥 지나가다 슬쩍한 게 분명했다.더 말을 섞을 필요도 없이 나는 곧장 신고 버튼을 눌렀다. 남자는 허겁지겁 내 쪽을 향해 애원했다.“누님, 제발 신고하지 마세요! 경찰한테 잡히면 제 인생 끝장이에요.”그렇게 될 게 두려웠다면 애초에 이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휴대폰을 귀에서 살짝 떼고 단호하게 말했다.“솔직하게 다 말하면 한 번 봐줄 수도 있어.”남자는 다시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내가 한 마디 더 던지자 움찔했다.“고개를 젓는 순간 바로 신고할 거야.”내 휴대폰 화면에는 선명하게 112가 떠 있었다. 내가 진심이라는 걸 깨달은 남자는 몇 초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어떤 형님이 시켰어요.”나는 묻지도 않았는데 그는 스스로 덧붙였다.“누군지는 몰라요. 그냥 돈을 좀 줬고 일이 끝나면 추가로 더 준다고 했어요.”“대체 무슨 일을 하라고 했는데? 내 집에서 뭘 찾으라고 했지?”나는 되물었다.“그런 건 말 안 했어요. 그냥 들어가서 이것저것 뒤집어 놓으라고 했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 한 장면이 그려졌다.내 집은 지금
나는 기껏해야 그녀의 새언니일 뿐인데 지금은 그녀를 보면서 엄마가 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아마 내 안에 숨어 있던 모성애가 폭발한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아이를 가져볼 때가 된 걸지도 모른다.생각해 보면 참 이상했다. 요즘 들어 자꾸만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스치곤 했다.“아니야,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진소영이 말하는 고맙다가 무슨 뜻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내게 화를 내는 일은 드문데 그런 그녀가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이 작은 아이는 참으로 감정이 뚜렷한 편이었다. 나는 그녀의 감사를 받아들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오빠는 또 어디 갔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른 건 아니지?”진소영이 갑자기 진정우에 관해 물었다.나는 솔직히 그녀가 이런 질문을 할까 봐 조금 걱정했었다. 그녀는 한 번 의문을 품으면 끝까지 답을 찾고야 마는 집요한 성격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진정우에 관한 건 내가 함부로 떠들 수 없는 일이 많았다.“별일 없어.”나는 진정우가 그녀에게 알리지 않길 원했던 원칙을 지키기로 했다.“둘이서 나를 속이려고 하지 마. 요즘 동네에 낯선 사람들이 몇 번이나 다녀갔어. 내가 살던 곳에서 뭔가를 찾는 것처럼 말이야.”진소영의 말에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 사람들이 그곳까지 찾아갔다고? 그렇다면 혹시 무덤을 파헤치거나 유골을 가져가려는 걸까?’“이제 솔직하게 말해 줄 거야?”진소영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지금의 그녀는 예전과 달랐다. 예전보다 날카로워졌고 성숙해졌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진정우의 고향으로 돌아가 봐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러다 오히려 더 큰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침묵 속에서 진소영이 말했다.“언니, 오빠가 말하지 않는 건 내가 겁먹을까 봐, 혹은 나까지 말려들까 봐 그러는 거겠지. 하지만 난 그렇게 약하지 않아. 나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어. 그래야 만약 누군가가 나를 찾아오더라도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역시나 그녀는 냉철하고 이성적
나와 그녀의 교집합은 강유형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 남자는 나와 조나연, 그 누구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세상일이란 참 알 수 없는 법이다.“어떻게, 요즘 그 사람 못 봤어?”나는 옅은 미소를 띠고 반문했다.조나연은 솔직했다.“못 봤어.”“왜, 보고 싶어졌어?”나는 장난스럽게 물었다.“조금.”조나연도 담백하게 인정했다.“보고 싶으면 찾아가.”나는 그녀를 부추겼다.그러자 조나연의 입가에 비웃음이 피어올랐다.“찾아갈 수 있었다면 왜 굳이 그쪽한테 묻겠어?”이 여자는 나와 대화할 때마다 꼭 불꽃이 튀는 듯했다. 언제나 날카롭고 거칠게 반응했다.하지만 그녀가 그럴수록 나는 더 차분해졌다.“예전엔 나연 씨를 위해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던 사람이 지금 이렇게 변했다니... 참, 남자의 마음은 알 수가 없어.”“지원 씨, 그렇게 비꼬지 마.”조나연이 불만스럽게 말했다.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강유형이 이런 그녀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다.“나연 씨, 후회한 적 있어?”나는 문가에 기대어 물었다.“없어.”그녀는 단호했다. 망설임도 없었다.그러나 그럴수록 그녀가 후회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부정하는 건 누군가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차릴까 봐 두려운 사람이 보이는 반응이니 말이다.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만약 나연 씨가 그렇게 부와 명예만 좇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이와 함께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을 텐데.”조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많은 일을 겪고 나서야 깨달았어. 돈이 많든 적든, 부유하든 평범하든, 결국 가장 소중한 건 담백하고 평온한 삶이란 걸.”나는 일부러 그녀를 자극하려 이런 말을 뱉은 게 아니었다. 그저 솔직한 생각을 말했을 뿐이다.“요즘 나는 걷는 게 가장 좋아. 길을 걷다가 평범한 부부가 자전거 한 대를 함께 타거나 장을 본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나란히 가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조나연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안에는 진소영의 월급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까지 함께 내밀며 말했다.“이것도 안 받을 거면 아예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이건 거의 협박에 가까웠다.그때 나는 문을 밀고 들어가 일부러 놀란 척을 했다.“어, 나연 씨 방에 사람이 있었네?”진소영은 나를 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물론 나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마치 모르는 사람인 양 철저히 선을 그었다.조나연은 나를 보곤 순간 살짝 긴장한 기색을 보였지만 곧바로 감정을 감췄다. 그러곤 진소영에게 말했다.“이건 다 네가 받아야 할 몫이니 가져가.”진소영은 손을 내밀어 봉투만 들고 갔다. 조나연이 준비한 상자는 끝내 손에 들지 않았다.역시 진정우의 손에 자란 아이다웠다. 기개가 남달랐다.“고맙습니다.”진소영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조용히 돌아섰다.끝까지 나에게는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아직도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조나연에게 우리 관계를 들키기 싫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나중에 또 아르바이트하고 싶으면 언제든 와도 돼.”조나연은 내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나연 씨가 여자라서 다행이지. 남자였으면 진짜 관심 있는 줄 알았겠어.”진소영이 문을 나서자 나는 곧바로 조나연을 놀리듯 말했다. 그 말과 동시에 나는 그녀가 진소영에게 주려던 상자를 집어 들었다.“이거, 실례라고 생각 안 해?”나를 사장으로 대하는 태도 따위는 없었다.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큼지막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팔찌가 들어 있었다. 가격이 꽤 나가 보였다.“직원 잡으려고 돈을 이렇게 쓰는 거 보니, 나연 씨도 진짜 통이 크네.”“하긴 순진한 양 없이 어찌 늑대를 잡겠어.”조나연은 숨김도 없었다.나는 상자를 딱 소리 나게 닫았다.“그 애한테 부리는 수작은 이쯤에서 접어.”조나연은 말없이 내 눈을 바라봤다. 뭔가 설명을 바라듯 말이다.나는 그녀가 진소영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따지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 애, 진정우의 동생이야.”조나연은 놀란 듯 살
이런 깊은 밤, 바에서 진소영을 마주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요즘 나도 일이 너무 많아 그녀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손을 놓은 건 아니었다.진소영은 먹색이 감도는 짙은 녹색 롱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몸매를 드러내는 디자인도 아니었고 그저 단아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풍겼다. 혼란스럽고 소란스러운 바의 분위기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나는 바로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고 조용히 뒤를 따랐다. 대체 무슨 일로 이곳에 온 건지 지켜보고 싶었다.그녀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더니 무대 뒤편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방향을 꺾어 방으로 들어갔다.그곳은 조나연의 사무실이었다.‘조나연이 그녀를 찾은 건가?’순간 가슴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나는 재빨리 걸음을 옮겨 방문 앞에 섰다. 마침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대화 내용도 들을 수 있었다.“조 매니저님, 저 다음 주부터 개강이라 여기 더 이상 못 나와요. 이번 공연비 정산 좀 부탁드려요.”진소영의 말에 나는 또 한 번 놀랐다.그녀가 여기서 돈을 벌고 있었다니, 게다가 말투를 보니 꽤 오래 이 일을 해온 것 같았다.“서울대로 가는 거야?”조나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진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서울대요.”“좋은 학교지. 우리 남편도 그 학교 나왔어.”그녀는 태연하게 임석진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어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밤중에 그의 영혼이 그녀를 찾아와 복수를 해도 모자랄 텐데 말이다.“아, 그렇군요.”진소영은 짧게 대꾸했을 뿐 더는 말하지 않았다. 덕분에 조나연도 대화를 이어가기 어려웠는지 화제를 돌렸다.“어떤 전공을 선택했어?”“의학이요.”진소영은 묻는 말에 곧바로 짧은 대답을 내놓았다.조나연은 가느다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이렇게 예쁜 애가 왜 하필 의대를 가려는 거야?”“그냥 좋아서요.”진소영은 의대를 선택한 진짜 이유를 굳이 밝히지 않았다.“그렇지만 너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