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아까까지만 해도 유령 세계 같던 놀이공원이 다시 화려한 불빛 속에 감싸이며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밖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복구됐어.”강진혁도 창밖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때, 기술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우리를 불렀다.“윤 대표님, 강 대표님! 이거 좀 보세요...”그가 가리킨 컴퓨터 화면을 보니, 이번에는 조명이 이상한 형태로 변해 있었다.빛이 선처럼 길게 이어지는데 규칙도 없이 엉망이었다.“아직 문제가 남아있네.”강진혁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나는 화면을 몇 초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갑자기 몸이 먼저 반응했고 그 자리에서 뛰쳐나가 밖으로 내달렸다.놀이공원 광장에 도착하자,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웅성거리고 있었다.“위에 글씨가 나타났어!”나는 고개를 들어 변해가는 조명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진정우가 내게 청혼하던 그날이 떠올랐다. 수많은 색색의 리본에 새겨진 단 하나의 문장.[지원아, 나랑 결혼해 줘.]“지원아, 나랑 결혼해 줘!”“청혼이야!”“근데 지원이가 누구야?!”“와, 너무 낭만적이다! 나도 이런 프러포즈 받고 싶어...”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커졌지만 나는 화면 속에서 바뀌는 수많은 조명 속에서도, 딱 하나 변하지 않는 그 문장만을 바라보았다.[지원아, 나랑 결혼해 줘.]순간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진정우!그가 남긴 조명 속에, 그때의 프러포즈가 숨어 있었던 거다. 그때는 나에게 보여주지 않더니, 이제야...‘이건 분명 진정우야.’이 조명을 이렇게까지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진정우뿐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조명 사고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그가 일부러 한 거야. 내가 엉망으로 살아가는 걸 보고 화가 나서, 이런 방식으로 경고하고 있는 거겠지.’그 생각이 드는 순간, 나는 소리쳤다.“진정우! 진정우!”하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사람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결혼해! 결혼해
나는‘해동 아이’라 불리는 대형 관람차 앞까지 내달렸다.놀이공원이 개장한 이후, 이곳은 관광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명소 중 하나였고 매일 긴 줄이 늘어섰다.“태워줘.”나는 이곳의 주인이었다. 내가 원하면 관람차는 나를 위해 멈출 수도, 움직일 수도, 최고점까지 올라갈 수도 있었다.천천히 상승하는 관람차 아래에서 강진혁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나는 날 따라오는 듯한 시선을 느끼며 점점 더 높이 올라갔다.놀이공원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높은 곳에서 놀이공원을 내려다본 건, 진정우가 직접 조명을 조정했던 날이었다.그때 나는 그와 함께 있었고 우린 단순히 조명만 감상한 것이 아니었다.그날 밤, 우리는 찬란한 불빛 아래서 서로를 바라보았고 감정이 깊어지는 걸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둘만 남은 것 같았고 우리는 누구보다 행복했다.‘하지만 이제는... 아니! 진정우는 아직 살아 있어.’방금 전의 조명은 분명 나에게 보내는 신호였다.관람차가 최고점에 다다르자, 놀이공원뿐만 아니라 해동시 전체가 내려다보였다.하지만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그런 거창한 풍경이 아니었다. 내가 보고 싶은 건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진정우! 나랑 결혼하고 싶다면... 돌아와!”나는 손을 높이 들어 반짝이는 조명 아래에서 반지를 흔들었다.“네가 직접 주문한 우리 커플링이야. 난 한 번도 빼지 않았어. 네가 준 팔찌도 그대로야. 이제 너만 돌아오면 돼.”내 목소리는 밤하늘을 가르며 울려 퍼졌고 마치 나의 외침에 반응하듯 조명이 순간적으로 깜빡였다.아래에서는 다시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비명 같기도 했고 놀람 섞인 감탄 같기도 했다오늘 밤의 조명은 예상치 못한 최고의 공연이 되었다. 놀이공원을 찾은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이벤트에 열광하며 아예 분위기를 즐기기 시작했다.삶이란 뜻밖의 일들로 가득 차 있으며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즐기는 편이 낫다. 놀이공원 측으로 환불을 요구하던 고객들도 모두 취소했다는 연락이 들
“네가 직접 화장하는 걸 봤잖아. 그냥 우연일 수도 있어.”강진혁은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여전히 관람차 위에 있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나는 그곳에서 한참을 머물렀다.관광객들이 하나둘 떠나고 화려하게 빛나던 조명도 점차 밤과 함께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모든 것이 다시 원래의 고요한 상태로 돌아가자, 나도 천천히 관람차에서 내려왔다.강진혁은 여전히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다가와 나를 부축했고 시선은 내 얼굴을 깊이 탐색하고 있었다.아마도 내 감정을 읽어내려 했겠지. 하지만 나는 이미 관람차 위에서 모든 감정을 쏟아냈다. 이제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였다.“늦었어. 이제 가자.”그의 말에 나는 말없이 그를 따라 놀이공원을 빠져나오면서 문득 떠올라 물었다.“오빠, 소희에 대한 소식... 알려주신다면서요.”강진혁은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조용히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내게 문자를 보냈다.“소희는 지금 임도에 있어. 다른 정보는 직접 연락해서 알아봐.”곧바로 핸드폰 알림이 울렸고 새로운 전화번호와 주소가 전송되어 있었다.“고마워요, 오빠.”나는 감사 인사를 건네고 곧장 몸을 돌렸다.“지원아.”강진혁이 나를 부르면서 그윽하게 쳐다봤다.“...잘 쉬어.”하지만 나는 그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이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놀이공원이 유명한 핫플레이스인 만큼, 이번 사고는 순식간에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하지만 정작 내 이름이 거론된 이유는 놀이공원 때문이 아니었다.[윤지원, 바에서 만난 남자와 함께 호텔 투숙?]기사에는 영상까지 첨부되어 있었고 마치 몰래 찍은 듯한 각도로 화면이 잡혀 있었고 누가 봐도 의도적으로 촬영된 것이었다.날 망가뜨리려고 한 짓이라는 게 너무 뻔했다.솔직히 나는 상관없었다. 애초에 감출 생각도 없었고 어제 안리영에게도 "차라리 내가 먼저 폭로하고 말지." 라고 했으니까.하지만 내가 하는 건 괜찮아도 남이 나를 이
임석진의 부모님은 내 질문에 순간 당황한 듯 얼어붙었다.그들은 조심스럽게 나를 훑어보더니 경계하는 눈빛으로 물었다.“누구세요?”분명 예전에 만난 적이 있는데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아마 나이가 많아 기억이 흐려진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는... 석진 오빠 친구예요. 오빠에게 아이가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한번 찾아왔어요.”내가 정체를 밝히면 아예 아이를 보여주지 않으려 할까 봐 조심스럽게 말을 돌렸다.그들의 표정에는 의심과 불안이 가득했다.“우린 당신을 본 적도 없고 석진이도 당신 같은 친구에 대해 말한 적 없어요.”요즘 같은 세상에 사기꾼이 많으니, 이렇게 신중한 건 당연한 일이겠지.나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내밀었다.“그럴 수도 있죠. 그래도 괜찮아요, 그냥 뵙고 싶었을 뿐이에요. 별다른 의도는 없어요.”하지만 그들은 선물을 받기는커녕 손사래를 쳤다.“우린 당신을 모릅니다. 받을 이유도 없어요.”말을 마치자마자 발걸음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다.나는 그들을 멀어지는 시선을 가만히 바라봤고 굳이 따라가서 말 붙일 생각은 없었다.이 시점에서 내가 더 접근하면 오히려 더 불안해할 게 분명했다.그렇다면... 아이는 어디 있는 걸까? 집에 있고 보모가 돌보고 있는 걸까?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그렇다고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그래서 나는 곧장 단지 내 관리실을 찾아갔다. 그리고 내가 가져온 선물들을 맡기며 아이에 대한 정보를 슬쩍 떠봤다.그러자 관리소 직원이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그 집 아이요? 잘 지내고 있어요. 매일 어르신 두 분이 데리고 나와 놀아주던데요. 저기 보이세요? 저쪽 놀이터에서요.”직원이 손가락으로 놀이터를 가리켰다. 그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한 중년 여성이 유모차를 밀고 있었다.“아이가 감기에 걸려서 최근에는 가끔만 나오더라고요. 요즘은 가정 의사를 불러서 돌보고 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문득, 나도 저런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임석진의 집을 떠난 후, 나는 곧장 회사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이소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강진혁이 준 정보가 틀릴 리 없었다. 이소희가 전화를 받지 않는 건, 아마도 여전히 도망치고 싶어서겠지.나는 곧장 문자를 보냈다.[소희야, 나를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내 전화 좀 받아줘.]하지만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도 읽지 않았다.이제 남은 방법은 직접 찾아가는 것 하나뿐이었다.나는 출근 중이었지만 어차피 회사에서는 나를 관여하지 않는 분위기였으니 별 고민 없이 임도로 가는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그런데 막 표를 결제한 순간 허진호가 등장했다.“윤 부장, 요즘 참 한가하신가 보네요?”물잔을 들고 내 맞은편에 앉은 허진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이 타이밍에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분명 실시간 검색어를 본 게 틀림없었다.나는 별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혹시 제 업무량을 늘리실 생각인가요?”“그래야 할 것 같은데요.”그는 천천히 물을 한 모금 마셨다.“너무 한가하게 지내다 보면 쓸데없는 사고가 터질 수도 있잖아요. 괜히 사고 치셨다가, 혹시라도 정우 씨가 무덤에서 튀어나와 저한테 따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허진호의 농담에 나는 피식 웃었다.“그럴 일 없을 겁니다.”어젯밤부터 오늘까지, 놀이공원의 조명 문제를 수없이 곱씹어 봤고 나는 진정우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다.하지만 내 확신과는 별개로, 허진호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어쨌든, 더는 봐 드릴 수 없습니다. 오늘부터는 규칙대로 근무하세요. 회사 규정 어기시면 처벌이 있을 겁니다.”그가 드디어 대표다운 태도를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하게 물었다.“처벌이라면... 벌금인가요?”벌금? 그거야말로 나한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중 하나였다.안리영이 늘 말했다.“너는 부모도, 남편도, 자식도 없는 삼무인간이야. 그 많은 돈 다 쓰지도
이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건, 내가 화장실에서 얼굴에 잔뜩 묻은 물을 닦고 있을 때였다.“언니...”그녀의 목소리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아는 이소희라면 평소엔 마치 작은 기관총처럼 말을 쏟아내던 아이였는데.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때의 자살 시도가 지금의 그녀를 이렇게 만들어 버렸다는 건 알고 있었다.“너 계속 전화 안 받으면 내가 직접 찾아갈 거야.”“언니, 오지 마. 난 괜찮아.”그녀는 다급하게 나를 말렸다.나는 손에 들고 있던 휴지를 버리고 세면대에 기대어 말했다.“괜찮으면 내가 왜 너한테 수십 통씩 전화를 걸었겠어. 이제 좀 말해 봐, 도대체 무슨 일이야?”이소희는 한참 후에야 힘없이 입을 열었다.“언니, 나 지금 완전히 빈털터리야. 그리고... 빚이 거의 2억 가까이 돼.”나는 곧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강진혁에게 들었는데 그녀는 남자 친구에게 속아 모든 걸 잃었다.“...그래서 자살을 생각한 거야? 네 목숨이 2억보다 못해?”“언니... 그 2억 중에는 인터넷 대출도 있고 신용카드도 있고 게다가... 사채도 있어.”그 말에 나도 모르게 손을 움켜쥐어졌다.“그 사람들이 매일 협박 전화를 하고 온라인에 내 신상을 퍼뜨렸어. 그리고... 우리 부모님도 찾아갔어.”그녀의 목소리에는 절망이 묻어 있었다.“그렇게 힘들었으면 나한테 전화를 했어야지.”그녀에게 빌려주는 돈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내가 그 돈을 줬다면 그녀가 죽으려고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 순간 그때 내 휴대전화가 고장 나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혹시 나에게 전화를 했는데 내가 받지 못했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졌다.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후회를 해도 소용없어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차분히 물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임도에 있는 이유가 돈을 갚기 위해서야?”“응...”낯선 도시에 와서, 변변한 학력도 없는 그녀가 한 달에 얼마를 벌 수 있겠는가.월급이 200만 원이라 해도, 2억을
이런 부류의 남자는 언제나 돈 많고 외모가 뛰어난 여자에게만 관심을 두는 법이다.윤시안이 나를 알아본다는 건, 분명 나에 대해 미리 조사했거나,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왜 당신을 찾아온 것 같아요?”윤시안은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보며 대답했다.“이소희 때문이겠죠?”역시, 나와 이소희가 가까운 사이임을 알고 있었다.“맞아요. 소희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죠? 경찰에게 진술한 것 외에도 더 숨기고 있는 것이 있지 않나요?”하지만 윤시안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제가 꼭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까?”‘이 상황에서도 거래하겠다는 건가.’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조건이 뭔데요?”그는 주위를 살피더니,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였다.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2억이요? 혹시라도 협박죄 하나 더 추가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 돈을 어디에 쓰시려고요? 지금 교도소에 계시면서 그 돈을 사용할 곳이라도 있어요?”그러자 그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한테 주실 필요 없어요. 부모님께 주시면 됩니다.”‘이 인간은 쓰레기지만 효심은 있네...’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런데 부모님께서 그 돈을 받을 것 같아요? 제가 돈을 건네려 하면 두려워서 도망치시지 않을까요?”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윤시안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한참 후, 힘없이 입을 열었다.“저는 소희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돈을 빌린 것뿐이에요.”“그렇다면 왜 소희가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려고 했을까요?”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만약 정말 효심이 남아 있다면 지금이라도 모든 걸 솔직하게 말씀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이 한 일 때문에 부모님까지 손가락질받으며 사시는 건 알고 계시죠?”그 순간, 윤시안의 눈빛이 흔들렸다.“부모님
“당신들 지금 뭐 하는 거야?”나는 단호하게 소리쳤다. 그제야 문을 두드리던 세 명의 남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들 중 하나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와, 임도에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었나?”다른 남자는 비웃으며 말을 던졌다.“아가씨, 여기 방 빌리러 왔어? 아니면 저 안에 있는 그 여자랑 아는 사이야?”나는 차갑게 시선을 던지며 냉정하게 말했다.“내가 먼저 물었잖아?”그러자 문을 두드리던 남자가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우리는 예쁜 여자를 찾으러 왔지. 딱 당신 같은 사람을 말이야.”그는 말하며 내 턱을 건드리려 손을 뻗었다.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피했다. 그러자 그는 낄낄 웃으며 말했다.“성격 있는 여자네. 난 이런 여자가 더 좋더라.”그는 곧바로 옆에 있는 남자들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오늘, 헛걸음한 건 아니겠어.”그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려던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놔둬! 건드리지 마!”나는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이소희가 있었다. 그녀는 손에 나무 몽둥이를 들고 달려오면서 주저 없이 남자들에게 몽둥이를 휘둘렀다.“이 미친놈들아, 당장 꺼져!”그러나 남자들은 오히려 비웃었다.“하필이면 네가 알아서 나와 주네? 우리가 널 찾고 있었는데.”그들은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나는 바닥에 있는 벽돌을 주워 들고 그대로 남자들에게 던졌다.“아, X발!”한 명이 벽돌에 맞고 비명을 지르면서 나를 향해 달려들려 했지만 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어쩌면 진정우가 떠난 후, 난 두려울 게 없어진 걸지도 모른다.한 남자가 나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회전하며 그에게 강하게 발차기를 날렸다.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정확히 급소를 가격당했고 두 손으로 급소를 감싸며 뒹굴었다.남은 두 명이 이소희를 잡으려 하자, 나는 그들에게 단호하게 외쳤다.“돈 필요하면 움직이지 마.”내 말에 그들은 멈칫하더니 눈을 번뜩이며 나를
안리영은 깊이 가라앉은 기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윤지원의 외삼촌과 외숙모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자책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함께 살아갈 수는 없었어도 죽음은 함께하겠다는 그들의 선택이 그녀에게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사랑은 함께 죽는 서사로 각인되어 왔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사랑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가 꿈꾸는 사랑은 서로를 붙잡고 끝까지 함께 늙어가는 것, 그뿐이었다.예전엔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기에 사랑은 단순한 줄만 알았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면 그걸로 족한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서로를 지켜낼 수 있는 사랑, 그걸 얻는 게 너무 어려웠다. 게다가 늙을 때까지 함께하자는 건 그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었다.구안석이 돌아온 건 깊은 밤이었다. 안리영은 잠들지 않았고 테라스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아직도 안 자고 있었어? 기다리지 말랬잖아.”구안석이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턱을 그녀의 어깨에 기대고 지친 숨을 내쉬며 작은 위로를 찾는 듯했다.“많이 피곤해?”안리영이 조용히 물었다.그는 그렇다는 뜻으로 낮게 대답하며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는 금방이라도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안리영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살짝 어루만졌다.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이러다 병나겠어. 선배, 이제 좀 자신을 덜 힘들게 해줄 생각은 없어?”“아직은 안 돼. 2년만 더 지나면 그땐 좀 괜찮아질 거야.”구안석의 말에 안리영은 웃었다.쓴웃음이었다.“정말 대단하다, 선배. 선배는 정말이지, 성공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야.”그녀의 말엔 약간의 농담도 섞여 있었다.구안석은 말없이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정말 말 한마디조차 하기 싫은 듯했다.안리영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한참이나 망설였던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그가 이런 모습인 걸 보니 결국 다시 삼켜버렸다.“너무 피곤해 보이네. 얼른 자자.”“응.”그는 대답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지쳐서 도무지 몸
“유정철 씨께서 신희선 씨께 먼저 약을 먹이시고 그다음 본인이 복용하셨어요. 이게 그분들이 드신 약입니다.”의사는 약병을 내게 건넸다.약병에 적힌 글자를 바라보자 목이 턱 막히고 쓴맛이 올라왔다.“그분들 정말 너무 고통스러웠던 거예요. 그래서... 그런 선택을 하신 거겠죠.”사실 예전부터 외삼촌은 그런 얘기를 하신 적이 있었다. 그땐 단지 외숙모가 세상을 떠난 뒤 함께 하려는 결심이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외숙모가 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걸 차마 두고 볼 수 없어 먼저 보내드렸고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이건 유정철 씨가 남기신 유서입니다. 지원 씨께 드리라고 하셨어요.”의사가 봉투 하나를 내게 건넸다.나는 그걸 받아 들고 외삼촌이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을 읽어 내려갔다.‘얘야, 미안하구나. 외삼촌이 더는 너를 돌봐줄 수 없게 됐구나. 이런 방식으로 끝을 맺기로 한 건 사실 희연이가 떠났을 때부터 마음속으로 결심했던 일이란다. 네 외숙모와도 충분히 상의한 일이야.얘야, 너무 슬퍼하지 말고 외삼촌을 원망하지도 말길 바란다. 이젠 정말로 세상에 미련도 남지 않았단다. 그래서 네 외숙모의 손을 잡고 희연이를 만나러 간다.얘야, 마지막 순간까지 네가 내 곁에 있어 줘서 정말 기뻤단다. 다만 외삼촌이 너무 이기적이라 끝내는 내 친딸을 잊지 못하겠더구나. 그래서… 그 아이를 따라가기로 했단다.얘야, 우리가 떠난 뒤엔 병원이나 그 누구도 탓하지 마라. 나와 외숙모는 화장해서 희연이 곁에 묻어다오. 우리 셋, 한 가족이 다시 하나가 되게 말이다.지원아, 우리에겐 네가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래서 외숙모와 희연이 그리고 내가 남긴 모든 재산은 너에게 물려주려 한다.네가 이런 돈에 욕심이 없는 거 외삼촌은 안다. 그러니 필요 없다면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써다오.얘야, 다음 생이 있다면 우리 다시 만나 평안하고 건강하게, 행복한 삶을 살자꾸나.’편지를 다 읽으니 눈물이 뚝뚝 떨어져 종이를 적셨다.눈물이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외숙모의 상태는 대략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떠났다는 말을 들어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외삼촌은 멀쩡하셨는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날 수 있단 말인가?“우리 외삼촌... 어떻게 된 거죠?”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직접 오셔서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간호사는 더 설명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나는 한동안 멍하니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니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그날이 떠올랐다.그날은 햇살이 유난히 밝았고 영어 수업 시간이었다. 갑자기 담임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와 나를 불러냈고 복도 끝에서 강두식 삼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나를 보자마자 품에 안고 한마디를 건넸다.“이제 우리가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어렸던 나는 그 말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삼촌, 무슨 일 있었어요?”눈가에 눈물이 고인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원아, 네 부모님이 돌아가셨어.”그 순간 나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멍한 상태였던 건지, 아니면 정말 몰랐던 건지, 바보처럼 되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에요?”강두식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이제 이 세상에 안 계신다는 거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뜻이란다.”“정말 다시는 못 보는 거예요?”그땐 너무 어렸고 아마도 너무 무서웠던 나머지 그렇게 물었던 것 같다.삼촌은 다시 나를 껴안았고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한순간에 부모님 두 분을 모두 잃는다는 건 더없이 참혹한 일이었다. 그런 비극을 내 인생에서 두 번이나 겪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하늘은 정말이지 나를 참으로 특별히 사랑해 주시는 모양이다.비록 외삼촌과 외숙모와는 큰 정도, 함께 밥 한 끼 제대로 먹은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내 가족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병원에 도착하니 외삼촌과 외숙모는 이미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다.“윤지원 씨, 확인 부탁드립니다. 이후에 자세한 상황을 설명해 드릴게요.”의사와 간호사가 나를 이끌었다.나는 도저
용준호가 바로 좋아요를 눌렀다. 거기에 덧붙여 댓글도 남겼다.‘어수선함도 하나의 아름다움이지.’강진혁 쪽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못 본 건지 아니면 못 본 척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나는 용준호의 댓글을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경찰 아저씨도 그렇게 말했어요.’용준호가 다시 답글을 달았다.‘이 정도 사소한 일은 내가 해결해 주지. 경찰 아저씨까지 귀찮게 할 필요가 있나?’‘오빠가 해결하면 더 엉망이 될까 봐 그래요.’‘이 오빠 못 믿어?’‘네.’‘아침부터 상처받았어.’‘파스 붙여 드릴 게요.’‘속을 다스려야지.’그의 마지막 답글을 보고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강진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무슨 일이야? 집에 도둑이라도 들었어?”갓 잠에서 깬 듯한 나른한 목소리였다.“네, 근데 잡았어요. 누군가가 시켜서 왔대요.”나는 그에게 힌트를 던졌다.사실 내게 사람을 보낼 만한 사람은 강진혁 아니면 용준호였다. 원하는 걸 찾지 못하니 나를 일부러 귀찮게 해서 불안하게 만들고 나 스스로 허점을 드러내길 기다리는 게 분명했다. 그래야 그들이 실마리를 잡을 테니 말이다.“그래? 그럼 제대로 심문해야겠네. 경찰에 넘겼어?”강진혁이 물었다.나는 가볍게 그랬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덧붙였다.“경찰이 저런 녀석들한테서 뭘 제대로 캐낼 수 있을까.”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그 말 경찰 아저씨들이 들으면 기분 상하겠는데요.”강진혁이 가볍게 기침을 했다.“그러니까 내 말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원하는 걸 얻기 어렵다는 뜻이야.”“그래도 원칙대로 가는 게 낫죠. 난 경찰 아저씨를 믿어요.”내 말에 그는 더 이상 이 문제로 왈가왈부하지 않았다.“오빠 생각엔 누가 시킨 것 같아요?”한참을 돌려 말하다가 결국 본론을 꺼냈다.강진혁도 바로 이해했다.“설마 날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쓸데없이 돌려 말할 필요 없이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오빠 아니면 준호 오빠잖아요.”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한 마디 덧붙였다.
날카로운 신음과 함께 남자가 바닥에 쓰러졌다.나는 야구 배트를 그에게 겨눈 채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낯선 남자였다.“누구 지시로 온 거야? 내 집엔 어떻게 들어왔고?”나는 곧장 다그쳤다.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입을 열 생각이 없다는 태도였다. 나도 긴말 없이 바로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그럼 경찰서로 가서 말해.”“신고하지 마세요!”남자는 겁에 질렸다.“그냥 뭐 좀 훔치려고 했을 뿐이에요. 지금 다 돌려드릴 테니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면서 그는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다. 나는 혹시라도 무기를 꺼낼까 싶어 차갑게 경고했다.“손 함부로 놀리지 마.”내 말이 끝나자 남자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그의 손과 함께 나온 것은 내 액세서리들이었다.“이것뿐이에요. 다 여기 있습니다.”그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말했다.단순한 좀도둑인가?나는 믿지 않았다. 이건 그냥 지나가다 슬쩍한 게 분명했다.더 말을 섞을 필요도 없이 나는 곧장 신고 버튼을 눌렀다. 남자는 허겁지겁 내 쪽을 향해 애원했다.“누님, 제발 신고하지 마세요! 경찰한테 잡히면 제 인생 끝장이에요.”그렇게 될 게 두려웠다면 애초에 이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휴대폰을 귀에서 살짝 떼고 단호하게 말했다.“솔직하게 다 말하면 한 번 봐줄 수도 있어.”남자는 다시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내가 한 마디 더 던지자 움찔했다.“고개를 젓는 순간 바로 신고할 거야.”내 휴대폰 화면에는 선명하게 112가 떠 있었다. 내가 진심이라는 걸 깨달은 남자는 몇 초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어떤 형님이 시켰어요.”나는 묻지도 않았는데 그는 스스로 덧붙였다.“누군지는 몰라요. 그냥 돈을 좀 줬고 일이 끝나면 추가로 더 준다고 했어요.”“대체 무슨 일을 하라고 했는데? 내 집에서 뭘 찾으라고 했지?”나는 되물었다.“그런 건 말 안 했어요. 그냥 들어가서 이것저것 뒤집어 놓으라고 했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 한 장면이 그려졌다.내 집은 지금
나는 기껏해야 그녀의 새언니일 뿐인데 지금은 그녀를 보면서 엄마가 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아마 내 안에 숨어 있던 모성애가 폭발한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아이를 가져볼 때가 된 걸지도 모른다.생각해 보면 참 이상했다. 요즘 들어 자꾸만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스치곤 했다.“아니야,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진소영이 말하는 고맙다가 무슨 뜻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내게 화를 내는 일은 드문데 그런 그녀가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이 작은 아이는 참으로 감정이 뚜렷한 편이었다. 나는 그녀의 감사를 받아들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오빠는 또 어디 갔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른 건 아니지?”진소영이 갑자기 진정우에 관해 물었다.나는 솔직히 그녀가 이런 질문을 할까 봐 조금 걱정했었다. 그녀는 한 번 의문을 품으면 끝까지 답을 찾고야 마는 집요한 성격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진정우에 관한 건 내가 함부로 떠들 수 없는 일이 많았다.“별일 없어.”나는 진정우가 그녀에게 알리지 않길 원했던 원칙을 지키기로 했다.“둘이서 나를 속이려고 하지 마. 요즘 동네에 낯선 사람들이 몇 번이나 다녀갔어. 내가 살던 곳에서 뭔가를 찾는 것처럼 말이야.”진소영의 말에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 사람들이 그곳까지 찾아갔다고? 그렇다면 혹시 무덤을 파헤치거나 유골을 가져가려는 걸까?’“이제 솔직하게 말해 줄 거야?”진소영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지금의 그녀는 예전과 달랐다. 예전보다 날카로워졌고 성숙해졌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진정우의 고향으로 돌아가 봐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러다 오히려 더 큰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침묵 속에서 진소영이 말했다.“언니, 오빠가 말하지 않는 건 내가 겁먹을까 봐, 혹은 나까지 말려들까 봐 그러는 거겠지. 하지만 난 그렇게 약하지 않아. 나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어. 그래야 만약 누군가가 나를 찾아오더라도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역시나 그녀는 냉철하고 이성적
나와 그녀의 교집합은 강유형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 남자는 나와 조나연, 그 누구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세상일이란 참 알 수 없는 법이다.“어떻게, 요즘 그 사람 못 봤어?”나는 옅은 미소를 띠고 반문했다.조나연은 솔직했다.“못 봤어.”“왜, 보고 싶어졌어?”나는 장난스럽게 물었다.“조금.”조나연도 담백하게 인정했다.“보고 싶으면 찾아가.”나는 그녀를 부추겼다.그러자 조나연의 입가에 비웃음이 피어올랐다.“찾아갈 수 있었다면 왜 굳이 그쪽한테 묻겠어?”이 여자는 나와 대화할 때마다 꼭 불꽃이 튀는 듯했다. 언제나 날카롭고 거칠게 반응했다.하지만 그녀가 그럴수록 나는 더 차분해졌다.“예전엔 나연 씨를 위해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던 사람이 지금 이렇게 변했다니... 참, 남자의 마음은 알 수가 없어.”“지원 씨, 그렇게 비꼬지 마.”조나연이 불만스럽게 말했다.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강유형이 이런 그녀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다.“나연 씨, 후회한 적 있어?”나는 문가에 기대어 물었다.“없어.”그녀는 단호했다. 망설임도 없었다.그러나 그럴수록 그녀가 후회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부정하는 건 누군가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차릴까 봐 두려운 사람이 보이는 반응이니 말이다.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만약 나연 씨가 그렇게 부와 명예만 좇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이와 함께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을 텐데.”조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많은 일을 겪고 나서야 깨달았어. 돈이 많든 적든, 부유하든 평범하든, 결국 가장 소중한 건 담백하고 평온한 삶이란 걸.”나는 일부러 그녀를 자극하려 이런 말을 뱉은 게 아니었다. 그저 솔직한 생각을 말했을 뿐이다.“요즘 나는 걷는 게 가장 좋아. 길을 걷다가 평범한 부부가 자전거 한 대를 함께 타거나 장을 본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나란히 가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조나연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안에는 진소영의 월급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까지 함께 내밀며 말했다.“이것도 안 받을 거면 아예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이건 거의 협박에 가까웠다.그때 나는 문을 밀고 들어가 일부러 놀란 척을 했다.“어, 나연 씨 방에 사람이 있었네?”진소영은 나를 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물론 나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마치 모르는 사람인 양 철저히 선을 그었다.조나연은 나를 보곤 순간 살짝 긴장한 기색을 보였지만 곧바로 감정을 감췄다. 그러곤 진소영에게 말했다.“이건 다 네가 받아야 할 몫이니 가져가.”진소영은 손을 내밀어 봉투만 들고 갔다. 조나연이 준비한 상자는 끝내 손에 들지 않았다.역시 진정우의 손에 자란 아이다웠다. 기개가 남달랐다.“고맙습니다.”진소영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조용히 돌아섰다.끝까지 나에게는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아직도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조나연에게 우리 관계를 들키기 싫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나중에 또 아르바이트하고 싶으면 언제든 와도 돼.”조나연은 내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나연 씨가 여자라서 다행이지. 남자였으면 진짜 관심 있는 줄 알았겠어.”진소영이 문을 나서자 나는 곧바로 조나연을 놀리듯 말했다. 그 말과 동시에 나는 그녀가 진소영에게 주려던 상자를 집어 들었다.“이거, 실례라고 생각 안 해?”나를 사장으로 대하는 태도 따위는 없었다.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큼지막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팔찌가 들어 있었다. 가격이 꽤 나가 보였다.“직원 잡으려고 돈을 이렇게 쓰는 거 보니, 나연 씨도 진짜 통이 크네.”“하긴 순진한 양 없이 어찌 늑대를 잡겠어.”조나연은 숨김도 없었다.나는 상자를 딱 소리 나게 닫았다.“그 애한테 부리는 수작은 이쯤에서 접어.”조나연은 말없이 내 눈을 바라봤다. 뭔가 설명을 바라듯 말이다.나는 그녀가 진소영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따지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 애, 진정우의 동생이야.”조나연은 놀란 듯 살
이런 깊은 밤, 바에서 진소영을 마주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요즘 나도 일이 너무 많아 그녀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손을 놓은 건 아니었다.진소영은 먹색이 감도는 짙은 녹색 롱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몸매를 드러내는 디자인도 아니었고 그저 단아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풍겼다. 혼란스럽고 소란스러운 바의 분위기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나는 바로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고 조용히 뒤를 따랐다. 대체 무슨 일로 이곳에 온 건지 지켜보고 싶었다.그녀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더니 무대 뒤편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방향을 꺾어 방으로 들어갔다.그곳은 조나연의 사무실이었다.‘조나연이 그녀를 찾은 건가?’순간 가슴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나는 재빨리 걸음을 옮겨 방문 앞에 섰다. 마침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대화 내용도 들을 수 있었다.“조 매니저님, 저 다음 주부터 개강이라 여기 더 이상 못 나와요. 이번 공연비 정산 좀 부탁드려요.”진소영의 말에 나는 또 한 번 놀랐다.그녀가 여기서 돈을 벌고 있었다니, 게다가 말투를 보니 꽤 오래 이 일을 해온 것 같았다.“서울대로 가는 거야?”조나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진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서울대요.”“좋은 학교지. 우리 남편도 그 학교 나왔어.”그녀는 태연하게 임석진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어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밤중에 그의 영혼이 그녀를 찾아와 복수를 해도 모자랄 텐데 말이다.“아, 그렇군요.”진소영은 짧게 대꾸했을 뿐 더는 말하지 않았다. 덕분에 조나연도 대화를 이어가기 어려웠는지 화제를 돌렸다.“어떤 전공을 선택했어?”“의학이요.”진소영은 묻는 말에 곧바로 짧은 대답을 내놓았다.조나연은 가느다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이렇게 예쁜 애가 왜 하필 의대를 가려는 거야?”“그냥 좋아서요.”진소영은 의대를 선택한 진짜 이유를 굳이 밝히지 않았다.“그렇지만 너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