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석진의 부모님은 내 질문에 순간 당황한 듯 얼어붙었다.그들은 조심스럽게 나를 훑어보더니 경계하는 눈빛으로 물었다.“누구세요?”분명 예전에 만난 적이 있는데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아마 나이가 많아 기억이 흐려진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는... 석진 오빠 친구예요. 오빠에게 아이가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한번 찾아왔어요.”내가 정체를 밝히면 아예 아이를 보여주지 않으려 할까 봐 조심스럽게 말을 돌렸다.그들의 표정에는 의심과 불안이 가득했다.“우린 당신을 본 적도 없고 석진이도 당신 같은 친구에 대해 말한 적 없어요.”요즘 같은 세상에 사기꾼이 많으니, 이렇게 신중한 건 당연한 일이겠지.나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내밀었다.“그럴 수도 있죠. 그래도 괜찮아요, 그냥 뵙고 싶었을 뿐이에요. 별다른 의도는 없어요.”하지만 그들은 선물을 받기는커녕 손사래를 쳤다.“우린 당신을 모릅니다. 받을 이유도 없어요.”말을 마치자마자 발걸음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다.나는 그들을 멀어지는 시선을 가만히 바라봤고 굳이 따라가서 말 붙일 생각은 없었다.이 시점에서 내가 더 접근하면 오히려 더 불안해할 게 분명했다.그렇다면... 아이는 어디 있는 걸까? 집에 있고 보모가 돌보고 있는 걸까?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그렇다고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그래서 나는 곧장 단지 내 관리실을 찾아갔다. 그리고 내가 가져온 선물들을 맡기며 아이에 대한 정보를 슬쩍 떠봤다.그러자 관리소 직원이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그 집 아이요? 잘 지내고 있어요. 매일 어르신 두 분이 데리고 나와 놀아주던데요. 저기 보이세요? 저쪽 놀이터에서요.”직원이 손가락으로 놀이터를 가리켰다. 그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한 중년 여성이 유모차를 밀고 있었다.“아이가 감기에 걸려서 최근에는 가끔만 나오더라고요. 요즘은 가정 의사를 불러서 돌보고 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문득, 나도 저런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임석진의 집을 떠난 후, 나는 곧장 회사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이소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강진혁이 준 정보가 틀릴 리 없었다. 이소희가 전화를 받지 않는 건, 아마도 여전히 도망치고 싶어서겠지.나는 곧장 문자를 보냈다.[소희야, 나를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내 전화 좀 받아줘.]하지만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도 읽지 않았다.이제 남은 방법은 직접 찾아가는 것 하나뿐이었다.나는 출근 중이었지만 어차피 회사에서는 나를 관여하지 않는 분위기였으니 별 고민 없이 임도로 가는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그런데 막 표를 결제한 순간 허진호가 등장했다.“윤 부장, 요즘 참 한가하신가 보네요?”물잔을 들고 내 맞은편에 앉은 허진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이 타이밍에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분명 실시간 검색어를 본 게 틀림없었다.나는 별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혹시 제 업무량을 늘리실 생각인가요?”“그래야 할 것 같은데요.”그는 천천히 물을 한 모금 마셨다.“너무 한가하게 지내다 보면 쓸데없는 사고가 터질 수도 있잖아요. 괜히 사고 치셨다가, 혹시라도 정우 씨가 무덤에서 튀어나와 저한테 따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허진호의 농담에 나는 피식 웃었다.“그럴 일 없을 겁니다.”어젯밤부터 오늘까지, 놀이공원의 조명 문제를 수없이 곱씹어 봤고 나는 진정우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다.하지만 내 확신과는 별개로, 허진호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어쨌든, 더는 봐 드릴 수 없습니다. 오늘부터는 규칙대로 근무하세요. 회사 규정 어기시면 처벌이 있을 겁니다.”그가 드디어 대표다운 태도를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하게 물었다.“처벌이라면... 벌금인가요?”벌금? 그거야말로 나한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중 하나였다.안리영이 늘 말했다.“너는 부모도, 남편도, 자식도 없는 삼무인간이야. 그 많은 돈 다 쓰지도
이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건, 내가 화장실에서 얼굴에 잔뜩 묻은 물을 닦고 있을 때였다.“언니...”그녀의 목소리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아는 이소희라면 평소엔 마치 작은 기관총처럼 말을 쏟아내던 아이였는데.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때의 자살 시도가 지금의 그녀를 이렇게 만들어 버렸다는 건 알고 있었다.“너 계속 전화 안 받으면 내가 직접 찾아갈 거야.”“언니, 오지 마. 난 괜찮아.”그녀는 다급하게 나를 말렸다.나는 손에 들고 있던 휴지를 버리고 세면대에 기대어 말했다.“괜찮으면 내가 왜 너한테 수십 통씩 전화를 걸었겠어. 이제 좀 말해 봐, 도대체 무슨 일이야?”이소희는 한참 후에야 힘없이 입을 열었다.“언니, 나 지금 완전히 빈털터리야. 그리고... 빚이 거의 2억 가까이 돼.”나는 곧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강진혁에게 들었는데 그녀는 남자 친구에게 속아 모든 걸 잃었다.“...그래서 자살을 생각한 거야? 네 목숨이 2억보다 못해?”“언니... 그 2억 중에는 인터넷 대출도 있고 신용카드도 있고 게다가... 사채도 있어.”그 말에 나도 모르게 손을 움켜쥐어졌다.“그 사람들이 매일 협박 전화를 하고 온라인에 내 신상을 퍼뜨렸어. 그리고... 우리 부모님도 찾아갔어.”그녀의 목소리에는 절망이 묻어 있었다.“그렇게 힘들었으면 나한테 전화를 했어야지.”그녀에게 빌려주는 돈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내가 그 돈을 줬다면 그녀가 죽으려고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 순간 그때 내 휴대전화가 고장 나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혹시 나에게 전화를 했는데 내가 받지 못했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졌다.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후회를 해도 소용없어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차분히 물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임도에 있는 이유가 돈을 갚기 위해서야?”“응...”낯선 도시에 와서, 변변한 학력도 없는 그녀가 한 달에 얼마를 벌 수 있겠는가.월급이 200만 원이라 해도, 2억을
이런 부류의 남자는 언제나 돈 많고 외모가 뛰어난 여자에게만 관심을 두는 법이다.윤시안이 나를 알아본다는 건, 분명 나에 대해 미리 조사했거나,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왜 당신을 찾아온 것 같아요?”윤시안은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보며 대답했다.“이소희 때문이겠죠?”역시, 나와 이소희가 가까운 사이임을 알고 있었다.“맞아요. 소희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죠? 경찰에게 진술한 것 외에도 더 숨기고 있는 것이 있지 않나요?”하지만 윤시안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제가 꼭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까?”‘이 상황에서도 거래하겠다는 건가.’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조건이 뭔데요?”그는 주위를 살피더니,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였다.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2억이요? 혹시라도 협박죄 하나 더 추가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 돈을 어디에 쓰시려고요? 지금 교도소에 계시면서 그 돈을 사용할 곳이라도 있어요?”그러자 그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한테 주실 필요 없어요. 부모님께 주시면 됩니다.”‘이 인간은 쓰레기지만 효심은 있네...’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런데 부모님께서 그 돈을 받을 것 같아요? 제가 돈을 건네려 하면 두려워서 도망치시지 않을까요?”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윤시안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한참 후, 힘없이 입을 열었다.“저는 소희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돈을 빌린 것뿐이에요.”“그렇다면 왜 소희가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려고 했을까요?”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만약 정말 효심이 남아 있다면 지금이라도 모든 걸 솔직하게 말씀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이 한 일 때문에 부모님까지 손가락질받으며 사시는 건 알고 계시죠?”그 순간, 윤시안의 눈빛이 흔들렸다.“부모님
“당신들 지금 뭐 하는 거야?”나는 단호하게 소리쳤다. 그제야 문을 두드리던 세 명의 남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들 중 하나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와, 임도에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었나?”다른 남자는 비웃으며 말을 던졌다.“아가씨, 여기 방 빌리러 왔어? 아니면 저 안에 있는 그 여자랑 아는 사이야?”나는 차갑게 시선을 던지며 냉정하게 말했다.“내가 먼저 물었잖아?”그러자 문을 두드리던 남자가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우리는 예쁜 여자를 찾으러 왔지. 딱 당신 같은 사람을 말이야.”그는 말하며 내 턱을 건드리려 손을 뻗었다.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피했다. 그러자 그는 낄낄 웃으며 말했다.“성격 있는 여자네. 난 이런 여자가 더 좋더라.”그는 곧바로 옆에 있는 남자들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오늘, 헛걸음한 건 아니겠어.”그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려던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놔둬! 건드리지 마!”나는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이소희가 있었다. 그녀는 손에 나무 몽둥이를 들고 달려오면서 주저 없이 남자들에게 몽둥이를 휘둘렀다.“이 미친놈들아, 당장 꺼져!”그러나 남자들은 오히려 비웃었다.“하필이면 네가 알아서 나와 주네? 우리가 널 찾고 있었는데.”그들은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나는 바닥에 있는 벽돌을 주워 들고 그대로 남자들에게 던졌다.“아, X발!”한 명이 벽돌에 맞고 비명을 지르면서 나를 향해 달려들려 했지만 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어쩌면 진정우가 떠난 후, 난 두려울 게 없어진 걸지도 모른다.한 남자가 나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회전하며 그에게 강하게 발차기를 날렸다.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정확히 급소를 가격당했고 두 손으로 급소를 감싸며 뒹굴었다.남은 두 명이 이소희를 잡으려 하자, 나는 그들에게 단호하게 외쳤다.“돈 필요하면 움직이지 마.”내 말에 그들은 멈칫하더니 눈을 번뜩이며 나를
그들은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 계좌번호를 보여주었고 나는 망설임 없이 1억 2,000만 원을 이체했다.“빚 문서 내놔.”내가 손을 내밀자 그들은 약속대로 빚 문서를 건네며 비웃듯 말했다.“와, 생각보다 돈이 많네.”나는 문서를 확인한 후, 차갑게 경고했다.“난 돈뿐만 아니라 ‘사람’도 있어. 그러니까 앞으로 다시는 소희를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마. 만약 또 한 번 찾아오면 그땐 죽을 줄 알아.”내 단호한 태도에 그들은 더 이상 헛웃음을 짓지 않았다.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지자 그들은 서둘러 자리를 떴지만 가던 길에 한 남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돈 많은 친구가 있는데 대체 왜 사채를 빌린 거야?”“꺼져.”나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이소희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온몸을 떨고 있었다.“이제 괜찮아. 다 끝났어.”나는 그녀를 조용히 끌어안았고 그제야 그녀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흑... 으아아아아...”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그녀를 꼭 안아주며 그저 울게 놔두었다.이소희가 실컷 울고 난 후, 나는 그녀를 조용히 그녀의 원룸 안으로 데려갔지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곰팡이가 핀 벽지, 낡고 좁은 침대, 허름한 책상 위에 놓인 남은 음식들.한때 당당하고 씩씩했던 그녀가 이런 곳에서 이렇게 살고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끝이 거칠었고 피부는 갈라져 있었으며 곳곳에는 작은 상처도 남아 있었다.그녀는 돈을 갚기 위해 거친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텼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잘못된 길을 택하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나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데리고 호텔로 향했다. 그녀에게 샤워를 시키고 새 옷을 입힌 뒤, 함께 침대에 누웠다.그제야 이소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용씨 가문이야.”“뭐?”“그놈들, 다 해동 용씨 가문의 사람들이라고.”순간, 내 머릿속에 용진표의 얼굴이 떠올랐다.그 집안의 돈이
‘내가 골탕을 먹였다고?’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물음표를 보냈다.[안석 선배가 왔어!]안리영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나는 곧장 호텔 사건이 떠올라 웃음을 참지 못하고 답장을 보냈다.[내가 만들어 준 둘만의 시간을 잘 즐겨.][즐길 시간이 어딨어, 나 지금 바로 수술 들어가야 해!]‘아, 진짜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하지만 안리영은 일부러 일을 피하는 게 아니었고 정말로 수술이 있었다.사실 다른 의사에게 맡길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구안석이 몇 달 동안 연락도 없이 자기 일에만 몰두했는데 이제 와서 그가 돌아왔다고 해서 그녀가 바로 일정을 바꿔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그리고 시간이 흘러 수술이 끝났을 때는 이미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수술을 마친 안리영은 제일 먼저 휴대전화를 확인했지만 메시지 창은 텅 비어 있었다.그녀는 일부러 구안석과의 대화방을 열어 보았지만 대화는 그가 한국에 도착했다는 메시지에서 멈춰 있었다.‘몇 시간 동안... 단 한 마디도 없었다고? 설마... 진짜로 화난 거야?’안리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손에 쥔 채 평소처럼 휴게실로 향했다.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그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휴게실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그 불빛 아래 POLO 셔츠에 슬랙스를 입은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구안석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수술은 잘 끝났어?”안리영은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리며 힘없이 대답했다.“응, 잘 끝났어. 그런데... 여기서 뭐 해?”“너 기다리고 있었어.”그의 짧은 대답에 심장이 살짝 두근거렸다.“나도 원래 이따 찾아가려고 했는데...”“정말... 올 생각이 있었어?”그 말은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는 듯한 압박감을 주었다.안리영은 속으로 쓴웃음을 치며 애써 피식 웃었다.“나, 먼저 씻고 옷 갈아입을게.”그녀는 얼른 화제를 돌리며 욕실 쪽을 가리켰다. 그런데 막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구안석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안석은 안리영을 병원에서 데리고 나왔다. 안리영은 그가 호텔로 데려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차에 오르자 구안석이 조용히 물었다.“너희 집으로 가도 돼?”안리영은 잠깐 당황하면서 그의 말 속에 숨은 의도를 금방 알아챘다.“내 집에 남자가 있는지 확인하러 가자는 거야?”“아니.”‘그럴 리가, 역시 남자의 질투심은...’“나는 그런 남자들과는 달라.”안리영은 할 말을 잃었고 이제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구안석을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그녀의 이 작은 집은 부모님 외에는 오직 윤지원만이 와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구안석을 데리고 올라가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간 안리영은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구안석의 목을 팔로 감쌌다. 신발만 벗은 그녀는 순식간에 그보다 훨씬 작아져 발끝을 들여야 했다.“안아 줘.”구안석은 안리영을 번쩍 들어 올렸고 그녀는 구안석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구안석, 먼저 말해두는데 호텔 일은 그냥 연극이었어. 윤지원이 연기를 하려고 꾸민 거야. 나랑 그녀는 남자랑 호텔에서 잔 적 없어. 우리는 같은 방에서 잤고 내 집에는 어떤 남자도 온 적 없어. 믿지 못하겠으면 마음대로 확인해 봐...”“응, 봤어!” 구안석의 눈은 그녀의 머리 위를 넘어 보고 있었다.“봤지? 내 집에는 남자 없어.” 안리영이 자랑스럽게 말했다.“그럼 저 사람은 누구야?” 구안석의 말에 안리영은 잠깐 멈칫했다. 그녀가 아직 반응하지 못했을 때,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안리영, 남자를 집에 데려왔어?”그 소리를 듣고 안리영이 고개를 돌리자, 거실 한가운데 서 있는 남자를 보곤 그대로 얼어붙었다.“저 사람 누구야?” 구안석도 그녀에게 물었다. 안리영은 몇 초간 머리가 하얘졌다가, 큰 소리로 외쳤다.“삼촌, 왜 갑자기 우리 집에 온 거야? 누가 비밀번호를 알려줬어?”믿음직스럽지 못한 안리영의 엄마 외에 그녀의 집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넌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 저 사람 누구야
날카로운 신음과 함께 남자가 바닥에 쓰러졌다.나는 야구 배트를 그에게 겨눈 채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낯선 남자였다.“누구 지시로 온 거야? 내 집엔 어떻게 들어왔고?”나는 곧장 다그쳤다.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입을 열 생각이 없다는 태도였다. 나도 긴말 없이 바로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그럼 경찰서로 가서 말해.”“신고하지 마세요!”남자는 겁에 질렸다.“그냥 뭐 좀 훔치려고 했을 뿐이에요. 지금 다 돌려드릴 테니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면서 그는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다. 나는 혹시라도 무기를 꺼낼까 싶어 차갑게 경고했다.“손 함부로 놀리지 마.”내 말이 끝나자 남자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그의 손과 함께 나온 것은 내 액세서리들이었다.“이것뿐이에요. 다 여기 있습니다.”그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말했다.단순한 좀도둑인가?나는 믿지 않았다. 이건 그냥 지나가다 슬쩍한 게 분명했다.더 말을 섞을 필요도 없이 나는 곧장 신고 버튼을 눌렀다. 남자는 허겁지겁 내 쪽을 향해 애원했다.“누님, 제발 신고하지 마세요! 경찰한테 잡히면 제 인생 끝장이에요.”그렇게 될 게 두려웠다면 애초에 이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휴대폰을 귀에서 살짝 떼고 단호하게 말했다.“솔직하게 다 말하면 한 번 봐줄 수도 있어.”남자는 다시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내가 한 마디 더 던지자 움찔했다.“고개를 젓는 순간 바로 신고할 거야.”내 휴대폰 화면에는 선명하게 112가 떠 있었다. 내가 진심이라는 걸 깨달은 남자는 몇 초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어떤 형님이 시켰어요.”나는 묻지도 않았는데 그는 스스로 덧붙였다.“누군지는 몰라요. 그냥 돈을 좀 줬고 일이 끝나면 추가로 더 준다고 했어요.”“대체 무슨 일을 하라고 했는데? 내 집에서 뭘 찾으라고 했지?”나는 되물었다.“그런 건 말 안 했어요. 그냥 들어가서 이것저것 뒤집어 놓으라고 했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 한 장면이 그려졌다.내 집은 지금
나는 기껏해야 그녀의 새언니일 뿐인데 지금은 그녀를 보면서 엄마가 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아마 내 안에 숨어 있던 모성애가 폭발한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아이를 가져볼 때가 된 걸지도 모른다.생각해 보면 참 이상했다. 요즘 들어 자꾸만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스치곤 했다.“아니야,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진소영이 말하는 고맙다가 무슨 뜻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내게 화를 내는 일은 드문데 그런 그녀가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이 작은 아이는 참으로 감정이 뚜렷한 편이었다. 나는 그녀의 감사를 받아들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오빠는 또 어디 갔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른 건 아니지?”진소영이 갑자기 진정우에 관해 물었다.나는 솔직히 그녀가 이런 질문을 할까 봐 조금 걱정했었다. 그녀는 한 번 의문을 품으면 끝까지 답을 찾고야 마는 집요한 성격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진정우에 관한 건 내가 함부로 떠들 수 없는 일이 많았다.“별일 없어.”나는 진정우가 그녀에게 알리지 않길 원했던 원칙을 지키기로 했다.“둘이서 나를 속이려고 하지 마. 요즘 동네에 낯선 사람들이 몇 번이나 다녀갔어. 내가 살던 곳에서 뭔가를 찾는 것처럼 말이야.”진소영의 말에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 사람들이 그곳까지 찾아갔다고? 그렇다면 혹시 무덤을 파헤치거나 유골을 가져가려는 걸까?’“이제 솔직하게 말해 줄 거야?”진소영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지금의 그녀는 예전과 달랐다. 예전보다 날카로워졌고 성숙해졌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진정우의 고향으로 돌아가 봐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러다 오히려 더 큰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침묵 속에서 진소영이 말했다.“언니, 오빠가 말하지 않는 건 내가 겁먹을까 봐, 혹은 나까지 말려들까 봐 그러는 거겠지. 하지만 난 그렇게 약하지 않아. 나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어. 그래야 만약 누군가가 나를 찾아오더라도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역시나 그녀는 냉철하고 이성적
나와 그녀의 교집합은 강유형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 남자는 나와 조나연, 그 누구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세상일이란 참 알 수 없는 법이다.“어떻게, 요즘 그 사람 못 봤어?”나는 옅은 미소를 띠고 반문했다.조나연은 솔직했다.“못 봤어.”“왜, 보고 싶어졌어?”나는 장난스럽게 물었다.“조금.”조나연도 담백하게 인정했다.“보고 싶으면 찾아가.”나는 그녀를 부추겼다.그러자 조나연의 입가에 비웃음이 피어올랐다.“찾아갈 수 있었다면 왜 굳이 그쪽한테 묻겠어?”이 여자는 나와 대화할 때마다 꼭 불꽃이 튀는 듯했다. 언제나 날카롭고 거칠게 반응했다.하지만 그녀가 그럴수록 나는 더 차분해졌다.“예전엔 나연 씨를 위해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던 사람이 지금 이렇게 변했다니... 참, 남자의 마음은 알 수가 없어.”“지원 씨, 그렇게 비꼬지 마.”조나연이 불만스럽게 말했다.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강유형이 이런 그녀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다.“나연 씨, 후회한 적 있어?”나는 문가에 기대어 물었다.“없어.”그녀는 단호했다. 망설임도 없었다.그러나 그럴수록 그녀가 후회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부정하는 건 누군가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차릴까 봐 두려운 사람이 보이는 반응이니 말이다.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만약 나연 씨가 그렇게 부와 명예만 좇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이와 함께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을 텐데.”조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많은 일을 겪고 나서야 깨달았어. 돈이 많든 적든, 부유하든 평범하든, 결국 가장 소중한 건 담백하고 평온한 삶이란 걸.”나는 일부러 그녀를 자극하려 이런 말을 뱉은 게 아니었다. 그저 솔직한 생각을 말했을 뿐이다.“요즘 나는 걷는 게 가장 좋아. 길을 걷다가 평범한 부부가 자전거 한 대를 함께 타거나 장을 본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나란히 가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조나연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안에는 진소영의 월급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까지 함께 내밀며 말했다.“이것도 안 받을 거면 아예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이건 거의 협박에 가까웠다.그때 나는 문을 밀고 들어가 일부러 놀란 척을 했다.“어, 나연 씨 방에 사람이 있었네?”진소영은 나를 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물론 나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마치 모르는 사람인 양 철저히 선을 그었다.조나연은 나를 보곤 순간 살짝 긴장한 기색을 보였지만 곧바로 감정을 감췄다. 그러곤 진소영에게 말했다.“이건 다 네가 받아야 할 몫이니 가져가.”진소영은 손을 내밀어 봉투만 들고 갔다. 조나연이 준비한 상자는 끝내 손에 들지 않았다.역시 진정우의 손에 자란 아이다웠다. 기개가 남달랐다.“고맙습니다.”진소영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조용히 돌아섰다.끝까지 나에게는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아직도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조나연에게 우리 관계를 들키기 싫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나중에 또 아르바이트하고 싶으면 언제든 와도 돼.”조나연은 내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나연 씨가 여자라서 다행이지. 남자였으면 진짜 관심 있는 줄 알았겠어.”진소영이 문을 나서자 나는 곧바로 조나연을 놀리듯 말했다. 그 말과 동시에 나는 그녀가 진소영에게 주려던 상자를 집어 들었다.“이거, 실례라고 생각 안 해?”나를 사장으로 대하는 태도 따위는 없었다.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큼지막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팔찌가 들어 있었다. 가격이 꽤 나가 보였다.“직원 잡으려고 돈을 이렇게 쓰는 거 보니, 나연 씨도 진짜 통이 크네.”“하긴 순진한 양 없이 어찌 늑대를 잡겠어.”조나연은 숨김도 없었다.나는 상자를 딱 소리 나게 닫았다.“그 애한테 부리는 수작은 이쯤에서 접어.”조나연은 말없이 내 눈을 바라봤다. 뭔가 설명을 바라듯 말이다.나는 그녀가 진소영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따지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 애, 진정우의 동생이야.”조나연은 놀란 듯 살
이런 깊은 밤, 바에서 진소영을 마주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요즘 나도 일이 너무 많아 그녀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손을 놓은 건 아니었다.진소영은 먹색이 감도는 짙은 녹색 롱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몸매를 드러내는 디자인도 아니었고 그저 단아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풍겼다. 혼란스럽고 소란스러운 바의 분위기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나는 바로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고 조용히 뒤를 따랐다. 대체 무슨 일로 이곳에 온 건지 지켜보고 싶었다.그녀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더니 무대 뒤편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방향을 꺾어 방으로 들어갔다.그곳은 조나연의 사무실이었다.‘조나연이 그녀를 찾은 건가?’순간 가슴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나는 재빨리 걸음을 옮겨 방문 앞에 섰다. 마침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대화 내용도 들을 수 있었다.“조 매니저님, 저 다음 주부터 개강이라 여기 더 이상 못 나와요. 이번 공연비 정산 좀 부탁드려요.”진소영의 말에 나는 또 한 번 놀랐다.그녀가 여기서 돈을 벌고 있었다니, 게다가 말투를 보니 꽤 오래 이 일을 해온 것 같았다.“서울대로 가는 거야?”조나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진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서울대요.”“좋은 학교지. 우리 남편도 그 학교 나왔어.”그녀는 태연하게 임석진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어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밤중에 그의 영혼이 그녀를 찾아와 복수를 해도 모자랄 텐데 말이다.“아, 그렇군요.”진소영은 짧게 대꾸했을 뿐 더는 말하지 않았다. 덕분에 조나연도 대화를 이어가기 어려웠는지 화제를 돌렸다.“어떤 전공을 선택했어?”“의학이요.”진소영은 묻는 말에 곧바로 짧은 대답을 내놓았다.조나연은 가느다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이렇게 예쁜 애가 왜 하필 의대를 가려는 거야?”“그냥 좋아서요.”진소영은 의대를 선택한 진짜 이유를 굳이 밝히지 않았다.“그렇지만 너무...”
“응.”긁히면서 상처가 날 때는 아프지 않았는데 약을 바르려니 오히려 더 따끔하고 아팠다.구안석은 손을 멈췄다.“그럼 좀 더 살살 할게.”“아니, 안 발라도 아파. 세기 문제는 아니야.”안리영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낮았다.구안석은 그녀의 뜻을 단번에 알아차렸다.“리영아, 미안해. 널 지켜주지 못했고 제때 찾아내지도 못했어.”사실 누구한테 질책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구안석 자신이 가장 자책하고 있었다.어떻게 자기 여자조차 지키지 못하는 남자 친구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선배 탓하는 거 아니야.”안리영은 진심이었다.그녀는 정말 구안석을 원망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건 그녀의 직업이 안고 가야 할 위험이었다.“하지만 난 나 자신이 원망스러워.”구안석은 안리영의 상처를 바라보며 깊이 자책했다.“그럼 그 원망을 보살핌으로 바꿔 봐. 나 다쳤으니까 남자 친구가 잘 챙겨줘야지.”안리영이 귀염스레 애교를 부렸다.이런 순간에 구안석이 거절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그래.”그는 긍정의 대답을 내놓았다.그러자 안리영이 장난스럽게 웃었다.“그럼 일은 안 하려고?”구안석이 고개를 끄덕였다.“일보다 여자 친구가 더 중요하지.”“농담이야. 당연히 일이 더 중요하지. 볼일 봐.”안리영은 구안석이 이번에 돌아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괜찮아. 상대방이랑 얘기해 볼게. 며칠 동안은 네 곁에 있을 거야.”하지만 구안석은 단호했다.그의 마음이 그런 거라면 굳이 거절할 필요도 없었다.구안석은 약을 다 바르고 말했다.“가자, 집으로.”입원이 필요한 부상은 아니었기에 병원에 남을 이유는 없었다.안리영도 밤새 정신없이 지내느라 한숨도 못 잤다.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구안석과 함께 가려는데 그가 몸을 숙이며 말했다.“안아줄게.”“괜찮아. 혼자서도 걸을 수 있어. 이 정도 상처로는 아무 문제없...”거절하려던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구안석이 끊어버렸다.“올 때도 안겨서 왔잖아.”그 말에 안리영은 순간
병원 로비에서 나는 조시언과 마주쳤다. 그의 손에는 연고가 든 작은 봉투가 들려 있었다.“...리영이는요?”나는 머뭇거리다 물었다.그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됐다. 조시언 씨라고 하자니 너무 딱딱했고 삼촌이라 부르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어차피 우리와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았으니 말이다.“위에서 검사 중이에요.”조시언은 그렇게 말하고는 손목시계를 흘깃 보았다.“아마 지금쯤이면 곧 끝날 거예요.”“그럼 전 올라가 볼게요.”나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잠깐만요.”그는 나를 불러 세우고는 손에 든 봉투를 내밀었다.“리영이 손목이랑 발목에 상처랑 멍이 좀 있어요. 연고를 발라줘야 할 것 같아서요.”나는 조용히 봉투를 받아 들었다.“그쪽은 안 올라가세요?”“네. 전 차에 있으려고요. 이따 누나랑 매형이 볼일 끝나시면 데리고 나오실 수 있으세요? 부탁드릴게요.”조시언의 말은 영 이상했다. 하지만 그와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니 굳이 더 캐묻진 않았다. 그래도 하나만은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리영이를 어떻게 찾으신 거예요?”“찾으려면 언제든지 찾을 수 있죠. 어렵지 않아요.”그의 답변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하지만 어딘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나랑 구안석도 필사적으로 안리영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실패했으니 말이다.“리영이한테 이토록 심혈을 기울이는 건 역시 시언 씨뿐이네요.”나는 장난스럽게 한마디 던졌다.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없이 돌아서서 병원 밖으로 걸어 나갔다.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키의 단정한 실루엣은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걸음을 옮겼다. 정말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인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나는 병실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안리영과 구안석을 만났다. 그리고 그 순간 조시언이 굳이 올라오려 하지 않은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지원아! 나 안아줘!”안리영은 나를 보자마자 애교를 부리며 달려들었다.나는 그녀를 꼭 안아 주며 웃었
그녀는 그의 허벅지를 움켜잡은 걸로도 모자라 아예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얼굴을 그의 민감한 부위로 들이대게 되었다.순간적으로 엄습한 당혹감에 안리영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예전에 욕실에서 알몸인 상태로 서로를 마주쳤을 때보다도 훨씬 더 난감한 상황이었다.마치 감전된 듯 손을 황급히 떼려는 순간, 그녀의 몸이 단숨에 들어 올려졌다.조시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품에 안고 성큼성큼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병원에 도착하자 안리영은 부모님과 구안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리영아, 괜찮니? 어디 다친 데는 없고?”“시언아, 리영이는 안 다쳤지?”부모님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큰 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정밀 검사를 받는 게 좋겠어요.”조시언의 제안에 부모님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구안석이 입을 열었다.“리영아, 정말 괜찮아? 안 다쳤어?”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바라보는 순간 안리영은 코끝이 시큰해짐을 느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다리는 괜찮아?”구안석은 모두가 놓친 부분을 예리하게 짚었다.그제야 안리영은 자신이 아직 조시언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아니, 괜찮아. 그냥 다리가 조금 저려서 그래.”그녀는 몸을 비틀며 내려오려 했지만 조시언은 더욱 단단하게 그녀를 고쳐 안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은 채 검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구안석의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 그는 곧 조시언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안석 씨, 리영이는 저한테 맡기시죠.”하지만 조시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안리영을 품에 안은 채 그대로 검사실에 들어갔다.“리영이를 구해줘서 고마워요.”구안석은 다시 한번 조시언에게 말을 건넸다.“고맙다는 말이 지금 무슨 의미가 있죠?”조시언의 목소리는 싸늘했다.그 말의 뜻을 구안석은 알고 있었다. 주시언은 안리영이 도움이 필요할 때 그녀의 곁을 지켜주지 못한 구안석을 원망하고 있었다.그 점은 구안석 자신도 자책하고 있었다.더는 할 말이
경찰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그가 온 것이었다.하지만 누가 됐든 간에 구해줄 사람이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리영의 공포는 한결 가라앉았다.그녀도 사람이지 신이 아니다. 방금까지 유창하게 떠들며 납치범을 자극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혹여라도 한 마디라도 잘못 내뱉어 납치범이 화를 내기라도 하면 망설임 없이 자신을 아래로 던져버릴 것 같았으니까.“헛소리 집어치워. 당장 꺼져! 안 그러면 이 여자랑 같이 뛰어내린다.”연시훈이 조시언을 향해 위협적으로 소리쳤다.조시언은 목이 졸려 있는 안리영을 힐끗 바라보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납치범을 응시했다.“지금 뛰어내리면 넌 아무것도 얻지 못해. 하지만 리영이를 놓아주면 병원에서 네가 받아야 할 보상금을 내가 직접 챙겨주지. 거기에 더해 내 개인 돈으로 2억을 얹어 줄게.”그는 말뿐이 아니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그대로 던지자 지퍼도 잠그지 않은 채 가방에서 새 지폐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와 연시훈의 발치에 떨어졌다.잠시 정신이 멍해진 연시훈은 이내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네 돈 따위 필요 없어! 난 내 와이프랑 아이를 원한다고!”그의 말과 오늘 저지른 일은 마치 절절한 사랑을 증명이라도 하듯 했다.그러나 조시언은 비웃음을 흘렸다.“연시훈, 맞지? 나한테 그런 가식적인 연기 따위는 통하지 않아. 내가 돈을 들고 왔다는 건 이미 네가 어떤 놈인지 다 알고 있다는 뜻이야.”안리영은 연시훈의 몸이 순간 굳어지는 걸 느끼자 조시언이 제대로 짚어낸 걸 알고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죽은 와이프랑 아이에 대한 사랑 운운하더니 결국 다 헛소리였던 거야? 그냥 감성 코스프레였던 거라고?’그런데 지금까지 연시훈은 돈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만약 조시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도대체 누구에게 돈을 요구할 생각이었던 걸까?’그때 연시훈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네 말을 믿을 수 없어! 날 속이려고 그러는 거잖아. 그리고 네가 혼자 왔을 리도 없어. 경찰을 데리고 왔을 거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