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시언의 시선이 구안석에게로 향했다.“나는 호텔에 머물 거야. 그냥 널 보러 온 거야.”안리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삼촌, 호텔 예약은 했어? 안 했으면 내가...”“필요 없어.”조시언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너희 둘 앉아. 우리 얘기 좀 하자.”그 말투는 확실히 어른스러운 느낌이었지만 사실 그는 안리영보다 한 살 많을 뿐이었다. 구안석도 조시언이 무슨 말을 할지 눈치채고 앉자마자 안리영의 손을 잡고 먼저 입을 열었다.“저는 리영이와 진지하게 교제 중입니다. 결혼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리영이가 동의했어요?” 조시언의 질문은 매우 직설적이었다. 구안석은 안리영을 바라보았다.“아직은 아니요.”안리영은 급히 말을 이었다.“나는 학교 다닐 때부터 안석 선배를 좋아했어. 선배가 청혼하면 저는 나는 당연히 선배랑 결혼할 거야.”조시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얼굴에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지만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다.“리영이 동의만 한다면 저는 최대한 빨리 부모님을 뵙고 인사드릴게요.” 구안석도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안리영은 구안석이 느끼는 압박감을 알아챘다. 오늘 이런 상황이 될 줄 알았으면 구안석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을 텐데.원래 그녀는 그냥 연애부터 시작하려고 했을 뿐, 결혼까지 생각한 건 아니었다. 이제 이렇게 되니, 마치 구안석을 몰아붙이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책임감이 강한 구안석은 오늘 자기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이때 안리영도 말을 이었다.“삼촌, 삼촌은 나랑 같은 나이인데 생각이 왜 이렇게 고리타분해? 나는 지금 안석 오빠랑 연애 중이고 지금은 그냥 연애만 하고 싶어. 부모님 뵙고 결혼하는 건 그다음 얘기야.”“그럼 너도 꼭 저 사람과 결혼할 생각은 없다는 거야?” 조시언의 질문은 그녀를 완전히 궁지에 몰아넣었다.안리영은 남자에게 너무 확실한 약속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게다가 조시언이 엄마에게 자신과 구안석의 관계를 말할까 봐 걱정되었다.“응.
구안석은 결국 그 이야기를 꺼냈다. 안리영은 이미 생각해 본 문제였기 때문에 그가 묻자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그럼 너는? 왜 안 돌아와?” 구안석은 안리영의 이마에 뽀뽀하며 잠시 망설이더니 금세 대답했다.“지금은 안 돼.”안리영은 그 이유에 대해 더 묻고 싶지 않았다.“나는 외국에 가고 싶지 않아.”두 사람의 대화는 그걸로 끝났다. 구안석은 안리영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느꼈는지, 가볍게 그녀를 끌어안았다.“내년에 신청해서 돌아올 거야.”“응.” 안리영은 눈을 감은 채 대답했고 구안석은 잠시 후 일어나서 욕실로 향했다.안리영은 천장을 바라보며 예전에는 장거리 연애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이제는 정말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실감하게 되었다.그때, 구안석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안리영은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욕실을 향해 외쳤다.“구안석, 희연 씨가 전화 왔어.”“받아.” 구안석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고 안리영은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소희연 교수님.”전화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리영 씨, 구 교수님은요?”“지금 샤워 중이에요. 급한 일 있으면 제가 전해줄게요.”안리영은 구안석이 그녀가 이 전화를 받는 걸 알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내일 릴리 교수님이 오시는데 구 교수님이 반드시 참여해야 해서 오늘 밤엔 반드시 돌아와야 합니다.”“알겠습니다. 전해드릴게요. 또 다른 일은 없나요?”안리영은 소희연이 지금 시간이 어떤 때인지, 구안석이 왜 돌아왔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 단순히 구안석에게 알리기 위해 전화한 것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리영 씨는 구 교수님과 영원히 사랑할 수 있어요?”소희연이 진짜 묻고 싶었던 건 이거였다. 그녀는 역시 속셈이 있는 듯했지만 참 직설적으로 구안석을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었다.“모르겠어요. 저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싶어요. 지금 사랑하면 됐죠.”안리영은 일부러 소희연을 자극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진심을 말했다.아무도 한 사람만을 영원히
“누구의 비밀?” 나는 무심코 물었다.이소희는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움직였지만 마치 말하고 싶으면서도 뭔가를 망설이는 듯한 모습이었다.그녀의 표정을 보고 나는 그 비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죽을지도 모른다"는 그녀의 말이 떠오르며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입을 막았다.“그만 말해, 내가 직접 조사할게.”이소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언니, 이렇게 많은 돈을 빌려줬는데 정말 고맙고 미안해. 하지만 더 이상 내 문제에 신경 쓰지 말아줘.”이소희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말할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그녀가 더 이상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져만 갔다.“이 돈은 걱정하지 마, 너만 괜찮으면 돼.” 나는 그녀가 부담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소희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그녀는 반드시 이 돈을 갚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누구에게나 자신의 고집과 원칙이 있는 법이니까 나는 더 이상 그녀의 결심을 깨고 싶지 않았다. 비록 이소희는 여전히 여기 있을 생각을 고수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새로이 단독 아파트를 마련해주고 3년 치 집세를 미리 지급했다.그녀에게는 더 이상 그 좁고 열악한 환경에서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소희가 더 이상 그렇게 힘든 일을 하지 않도록, 허진호의 도움을 받아 회사도 알아봐 주었다.그리고 안리영에게 전화를 걸어 구안석과 만나기로 약속했다.“알겠어, 시간과 장소 정해지면 알려줄게.” 안리영의 목소리는 마치 내가 구안석과 만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들렸다.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지만 이미 약속은 잡은 상태였다. 하지만 안리영은 오랫동안 답장이 없었다.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그때, 구안석은 갑자기 안리영에게 부모님을 만나러 가자는 제안을 했다. 이건 안리영에게 예기치 않은 일이었다.“부모님 만나러 가자고? 어제 작은 삼촌 때문에 그런 거야?” 안리영은 구안석이 왜 갑자기 부모님을 만나자고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아니, 사실 내가 돌아온 이유도 바
나는 예전에 강유형과 함께 계약을 논의하러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그때 내 인상 속의 이곳은 꽤 정식적인 곳이었다.하지만 이소희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내가 너무 순진했다는 걸 깨달았다.이곳에서 정보를 얻으려면 단순한 손님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나는 전에 술집에서 했던 방식대로 접근하기로 했다.회색 산업에 여성 서비스가 존재한다면 자연히 남성 서비스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전에 술집에서도 남성 직원을 불러봤으니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 보는 게 자연스러웠다.혹여 용씨 가문에서 나를 의심한다 해도 내가 그런 스타일의 손님이라고만 생각할 것이다. 때로는 우연처럼 보이는 일들이 가장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나는 VIP 룸을 하나 빌리고 직원에게 서비스를 요청했지만 직원은 단호했다.“죄송합니다, 고객님. 저희는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술을 따르는 직원은 가능합니다.”이곳이 불법적인 사업을 운영하면서도 완벽하게 감추고 있다는 증거였다.“그럼 술을 따라줄 사람을 불러줘요. 가장 잘생긴 사람으로.”나는 마치 돈 많은 사치스러운 손님처럼 능청스럽게 말했다.잠시 후, 룸에 한 사람이 들어왔는데 뜻밖에도 익숙한 얼굴이었다.“준호 씨가 왜 여기 있어요?“나는 용준호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보아하니 이곳의 보안은 예상보다 더 철저했다. 내가 특별한 요청을 하자마자 그들은 바로 용준호에게 보고했다. 아무래도 이런 방식으로 사업을 유지하는 곳이라면 보안이 철저할 수밖에 없다.어쨌든, 이소희가 말한 대로 이곳에서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이런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단골 손님일 가능성이 높았다.용준호는 나를 바라보며 자리에 앉더니 스스로 술을 따라 한 잔 건넸다.“미녀 고객님이 특별한 서비스를 찾고 있다길래 궁금했지. 그런데 네가 있을 줄이야.”나는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이상해요? 준호 씨, 요즘 인터넷을 안 보나 보네요?“용준호는 내게 술잔을 건네며 웃었다.“정말 알다가도 모를 여
하지만 쫓아가다 말고 멈춰 서면서 갑자기 머릿속에 이소희의 말이 떠올랐다.이소희가 누군가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했는데. 혹시 방금 본 그 사람일까? 만약 그렇다면 용씨 가문의 불법 사업에도 그가 개입되어 있다는 뜻일까?생각해 보니 우리 부모님의 죽음도 두 가문이 공모한 일이었다. 그러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거세게 몰려왔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서 있다가 뒤늦게 용준호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화장실 못 찾았어?”나는 재빨리 태연한 척하며 대답했다.“생리 중이라서요. 생리용품이 필요해요.”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참 묘한 타이밍이네. 내가 사람 시켜서 가져다주라고 할게.”그러고는 정말로 여성 직원에게 시켜 생리대까지 챙겨오게 했다. 나는 연극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화장실에 다녀왔다.방으로 돌아오자 용준호가 불러둔 남자 모델들이 도착해 있었다. 모두 183cm 이상의 키에 체형은 큰 차이가 없었고 넓은 어깨에 잘록한 허리, 긴 다리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피부도 깨끗하고 세련된 외모에다, 굉장히 예의 바르기까지 했다.나를 보자마자 일제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이 친구들, 모두 프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야. 원하는 대로 만족할 거야.”용준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괜찮네요. 역시 여기에는 진짜 숨은 고수들이 많은 곳이군요.”내 말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고 그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던진 말이었다.용준호는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래서 만족해?”“아주요.”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 사람들, 제가 필요할 때 미리 하루 전에 전화만 하면 준비해 줄 수 있죠?”“당연하지..”그는 거리낌 없이 대답했지만 나는 여전히 아까 봤던 그 그림자가 신경 쓰였다.그래서 이번 기회에 확실히 조사하기로 했다.“준호 씨, 특별한 일이 없으시면 가보세요. 저 혼자 술 좀 더 마시고 싶네요.”그는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강진혁의 옷깃을 잡아끌며 그를 내 눈앞으로 바짝 당겼다.“진정우, 드디어 왔네... 이 개자식아, 왜 이제야 온 거야?”강진혁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 있었다. 그는 내 손목을 눌러 잡으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지원, 너 술 너무 많이 마셨어. 나는 진정우가 아니야.”“아니야, 너 진정우 맞아.”나는 그의 눈가를 손으로 더듬으며 나직이 속삭였다.“내 진정우야. 너 변했어. 이제 나 안 사랑하지? 나 버린 거야?”남자들은 대체로 다른 사람의 대체품 취급받는 걸 가장 싫어한다. 게다가 강진혁은 나를 좋아하는데 이런 말이 그에게는 더 큰 상처일 것이 분명했다.내 말이 그의 심장을 정통으로 찌른 것이었을까. 그는 갑자기 내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며 흔들었다.“정신 차려. 내가 누군지 똑똑히 봐.”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몇 초 후 입술을 삐죽이며 울음을 터뜨렸다.“진정우, 너 나한테 이럴 거야? 너 진짜 나쁜 놈이야!”여자가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눈물이다. 내가 눈물을 흘리자 강진혁도 결국 내 손목을 서서히 놓았다.나는 틈을 타 그의 가슴을 밀치고 주먹으로 툭툭 쳤다. 그러나 그는 한순간에 나를 번쩍 안아 들고 방을 나섰다.방을 막 나서자 용준호가 걸어오더니 싱글거리며 말했다.“스코틀랜드산 위스키 한 병이면 남자라도 누구든 정신 못 차릴 정도라고 하던데?”그 말을 듣자 나는 속으로 이를 꽉 깨물었다. 다행히도, 나는 미리 대비를 해뒀다.강진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를 품에 안고 빠르게 걸어갔다. 용준호는 강진혁의 뒷모습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강 대표님, 오늘 밤 즐겁게 보내시길. 나한테도 공 좀 돌려줘야 해.”이 둘의 관계, 절대 단순하지 않았다.나는 강진혁에게 이끌려 그의 차에 올랐다. 호랑이 굴에 직접 들어가는 격이었지만 나는 가야만 했다.강진혁이 날 데려간 곳은 그의 개인 거처였다. 이곳은 내가 알지 못했던 장소였고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곧이어 강유형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는 거침없이 침실로 향했지만 소파에 누워 있는 나를 보지 못했다.강진혁은 입가를 닦으며 고개를 들었고 그 손끝에 묻은 붉은 흔적이 희미하게 보였다.잠시 후, 강유형이 침실에서 나왔고 강진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너, 내가 그렇게 더러운 놈이라고 생각하지 마.”그제야 강유형의 시선이 소파 위의 나에게 향했다. 그리고 내가 옷매무새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걸 확인하자 그의 분노가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그럼 처음부터 건드리지 말았어야지.”강진혁은 입가를 닦은 휴지를 쓰레기통에 던지며 조용히 술잔을 들었다.“건드린 건 나야. 하지만 먼저 다가온 건 쟤라고.”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강진혁이 내가 일부러 접근했다는 걸 눈치챈 건가?“네가 처음부터 탐내지 않았어?”강유형도 강진혁의 속내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진혁은 술잔을 기울이며 한쪽 다리를 살짝 꼬았다. 하얀 셔츠의 단추 두 개가 풀어진 그의 모습은 평소보다 한층 나른하면서도 거친 느낌을 풍겼다.“유형아, 네가 잊지 말아야 할 게 하나 있어. 넌 이제 지원이와 아무 관계도 아니야. 지원이는 지금 자유로운 몸이고 새 사랑을 시작할 권리도 있어.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게 윤리적으로 문제 될 게 뭐가 있겠어?”강진혁은 늘 침착했고 그의 말에는 한 치의 틀림도 없었다.반면 강유형은 전혀 달랐다. 그는 조급했고 감정을 숨기지도 않았다.“누구를 좋아하든 네 자유지만 지원이만큼은 안 돼.”“왜?”강진혁이 비웃듯이 물었다.“한때 네 여자였기 때문이야? 난 신경 안 쓰는데?”그 말을 듣는 순간 예전에 강진혁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내 과거 따윈 상관없고 '나'이기만 하면 된다고 했던 그 말 말이다.“하지만 난 상관있어.”강유형은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었다.“지원이만큼은 안 돼. 누구라도 상관없지만 지원이는 안 돼.”강진혁은 짧게 웃었다.“왜지? 혹시 나와 함께 있는 게 두려워서야? 아니면... 아직도 지원이를 사
그렇다면 용씨 가문의 불법 사업을 조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문득 떠오른 사람이 용설아였지만 그녀는 용씨 가문의 사람이었다.아무리 정의롭고 진정우와 같은 편에 서 있었다고 해도 진정우가 사라진 지금 나를 도울 이유가 없었다.게다가, 용씨 가문은 그녀의 뿌리다. 아무리 대의를 중요하게 여긴다 해도, 가족을 배신할 만큼은 아닐 것이다.그렇다면 또 다른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한 명은 함소은이다. 그녀는 예전에 용진표를 증오한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문제는, 그녀가 한때 나를 배신했다는 점이다.그녀를 찾았다가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내 정보를 팔아넘길 가능성이 컸다.이리저리 생각해 보았지만 마땅한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용씨 가문의 불법 사업을 밝혀야만 그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그렇게 해야만 부모님의 복수를 할 수 있고 또한, 용씨 가문에게 희생당한 수많은 여자를 구할 수 있었다.이소희가 구체적인 정보를 주진 않았지만 그녀가 겪은 일들만 봐도 하나의 그림이 그려졌다.용씨 가문은 이소희의 남자 친구 같은 사람들을 키워 여자들에게 접근해 연애 감정을 이용한 뒤 고리대금이나 인터넷 대출을 유도했다. 그리고 빚을 갚지 못하면 강제로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하게 했다.그리고 이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용씨 가문의 불법 사업은 단순히 성매매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했다.그렇게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새 밤을 새우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운동이라고들 해서 나는 아침 일찍 조깅을 나섰다.그런데 아파트 1층에서 뜻밖의 사람을 마주쳤다. 강유형의 차 앞에는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들이 보였다. 그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눈빛은 초점을 잃고 있었다.‘설마... 여기서 밤을 샌 걸까?’그가 날 지켜보며 밤을 지새웠다면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첫째, 강진혁이 다시 나를 데려갈까 봐. 둘째, 내가 또 무슨 일을 벌일까 봐.그가 감기
“안리영, 너 왜 이렇게 네 삼촌을 무서워해? 혹시 그 사람한테 뭔가 잘못한 거 있냐?”내가 휠체어를 타고 천천히 가는 동안 참지 못하고 물어봤다.안리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다시 물었다.“정말 뭐가 있긴 한 거지?”“우리 그 얘기 그만하자.”안리영의 말을 듣자 나는 뭔가 비밀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나는 손으로 안리영을 톡톡 쳤다.“내가 한번 맞춰볼까? 혹시 네가 그 사람 잘생긴 얼굴에 홀려서 뭔가 더 과한 짓을 한 거 아니야?”“무슨 말이야, 내 삼촌이라고.” 안리영이 내 머리를 가볍게 쳤다.“그럼 왜 그를 보면 그렇게 떨고 겁을 먹고 있어?”나는 정말 궁금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의 안리영이 이렇게 떨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별거 아니야, 그냥 내가 한 번 우연히 삼촌이 샤워하는 걸 봤거든.” 안리영의 말에 나는 놀라서 멈췄다.“뭐라고? 어디서 봤어? 다 봤어?”안리영이 눈을 감았다. “그만 말해.”“왜?”그 말에 안리영은 한숨을 내쉬고 결국 솔직히 말했다.“욕실에서... 다 봤어.”“뭐야! 대박!”나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혹시 술 취해서 실수로 들어간 거 아니야?”“아니야.” 안리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날 내가 외할머니 집에 갔었고 그 집엔 아무도 없었어. 나는 땀을 흘려서 씻고 싶어서 위층에 올라갔고 그 방에 들어갔어. 그리고 욕실로 가서...”그 뒤 이야기는 말하지 않아도 나는 다 짐작이 갔다.“그 욕실에서 물소리 안 들렸어?”안리영이 한숨을 쉬었다. “그때 내가 이어폰 끼고 음악 듣고 있었어.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갔지.”“잠깐만!” 내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너 옷 벗고 욕실에 들어갔다고? 그러면... 너도 그 사람처럼 전부 다 보여준 거네?”안리영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하하.” 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화가 난 안리영은 내 머리를 쳤다. “그럼 너도 이제 신경 쓸 필요 없겠네, 다 봤으니 서로 부끄러울 것도 없잖아?”“나야말로 부
안리영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왜 이렇게 소심해. 손 한 번 만지는 것도 안 되나요?”배성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죄송합니다. 저는 몸은 팔지 않아요. 부담스럽네요.”그렇게 똑 부러지면서도 예의 바른 남자를 마주하자 안리영은 더 이상 그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손을 빼며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올해 몇 살이에요?”“스물아홉입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얼굴을 잠시 올려다보며 물었다.“키는요?”“183.7cm예요.”안리영은 또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대학교는 다녔나요?”“네, 청수대 인공지능 전공입니다.”“음, 요즘 그 전공 많이 인기 있죠.” 그 말은, 이렇게 좋은 전공을 하고도 남자 모델을 한다는 게 아깝다는 뜻이었다.“이건 제 알바예요.”배성재가 덧붙였다.안리영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요즘 사람들은 이렇게 바쁘게 살고 있나? 제대로 된 본업도 있으면서 왜 알바를 할까?’그와 같은 열정적인 사람과 비교하니 나는 내 자신이 정말 게으른 사람 같았다.“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이네요.”안리영이 감탄하며 말했다. 배성재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해 안리영에게 말했다.“가자, 공연 곧 시작해.”안리영은 배성재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부모님이 아이를 잃어본 적 있어요?”“저는 외동이에요.”안리영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부모님 유전자 정말 좋네요.”그녀는 나를 밀며 조용히 속삭였다.“아까 말한 것 중에 진정우랑 겹치는 부분이 있어?”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 외에는 진정우와 일치하는 점이 전혀 없었다.“그 사람이 진정우가 아니라고 하는데 얼굴은 진짜 똑같고 목소리도 아니고 정보도 다르고... 진짜 진정우인지 모르겠어.” 안리영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나는 아무 말 없이 침묵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 남자를 어떻게 더 시험해 볼지 고민하고 있었다. 진정우가 아니라고 한다면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윤지원, 왜 휠체어에 앉아 있어?”강유형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자 고개를 돌리니 그와 조시언이 다가오고 있었다.두 사람은 각각 흰색 셔츠와 검은 셔츠를 입고 흑백 조합이 시선을 사로잡았다.“오늘 정말 시끌시끌하네, 하나같이 다 왔네.”안리영이 작게 투덜거렸다. 이렇게 작은 조명 쇼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릴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안리영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조시언이 오기 싫어서였겠지만 그는 고객이었고 이번 쇼를 보러 온 사람 중 하나였다.강유형이 내 쪽으로 걸어오며 내 다리를 쳐다봤다. “어디 다친 거야?”“무릎을 살짝 긁혔어. 별일 아니야.”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강유형은 믿지 않았다. “별일 아니라는 사람은 휠체어에 앉지 않아.”“정말 괜찮아요. 강진혁 씨가 너무 걱정해서 휠체어를 가져온 거예요. 지원이도 안 타려고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된 거죠.” 안리영이 대신 설명했다. 안리영 덕분에 강유형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물론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그럴 만도 했다.안리영은 강유형의 반응을 무시하고 내게 덧붙였다. “하지만 이 휠체어는 꽤 괜찮아. 이렇게 밀고 다니면 다리가 좀 더 편하겠네. 널 세심하게 챙기고 다니는 건 확실히 강유형보다 나아.”그러자 강유형이 턱을 굳게 다물었 그 옆에서 조시언이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풀어줬다.“너희 어디 가는 거야?”“멋진 남자들 보러 가요.”안리영이 대답했다. 그 말에 강유형은 한숨을 쉬었지만 우리는 그저 그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백스테이지에 들어서자 마자 대기 중인 남자 모델들이 보였다. 모두 이미 의상을 갈아입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다들 비슷한 체형에 못지않게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와, 이 몸매들 정말 장난 아니네!” 안리영은 역시 중요한 포인트를 잘 찝었다.“몸매보다는 얼굴이 중요하지.” 나는 살짝 눈치를 주며 말했다.“그거야 알지만 자세히 볼 수 있으면 좋겠네.” 안리영은 발끝으로 서서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봤다.그때, 무대 감
“그가 이 일을 시작한 지 2년이나 됐다고요?” 나는 놀라움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더 큰 실망감을 느꼈다.진정우가 사고를 당한 지 몇달 밖에 안 되었으니 무대 위에 서 있는 사람은 분명히 진정우가 아니다.그런데 왜 이 사람은 진정우랑 이렇게 똑같이 생긴 걸까?혹시 이 사람과 진정우의 관계는, 내가 유희연과 같은 관계처럼 비슷한 건가?나는 그 사람을 유심히 쳐다보며 머릿속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강진혁이 내 이름을 부를 때까지 그가 왔다는 것도 몰랐다. “너, 얼굴이 안 좋다. 어디 아파?” 강진혁은 나의 상태를 바로 알아챘다.“다쳤어.” 용준호가 그 말을 대신했다.하지만 그가 말한‘다쳤다’는 내 몸의 상처뿐 아니라, 내 마음의 상처도 포함된 말이었다. 용준호가 이렇게 진정우랑 닮은 사람을 일부러 데려다 놓은 건, 분명히 나를 괴롭히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무릎을 다쳤어요.” 이번엔 허진호가 또 내 말을 대신해 주었다. 정말 고마운 두 남자 덕분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겠다.강진혁은 살짝 찡그리며 내 바지를 올리려고 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지만 강진혁의 손은 매우 빠르고 금세 내 발목을 잡았다. 그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움직이지 마, 잠깐만 볼게.”그가 내 바지를 살짝 올리자 상처가 드러났다. 강진혁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언제 다친 거야? 이렇게 심각한데 왜 말 안 했어?”그 모습이 마치 걱정스러워하면서도 나에게 화가 난, 그런 전형적인 남자 친구의 모습 같았다. 만약 내가 그가 의도가 나쁘지 않다는 걸 알지 못했다면 사실 그의 행동에 감동했을지도 모르겠다.“이미 안리영한테 확인을 받았어요. 별일 없었어요.” 나는 다리를 흔들며 말했다.그의 얼굴은 굳어졌고 다시 내 상처를 살펴본 후, 몇 초 후에야 바지를 내려놓고 일어섰다.“이렇게 다정한 모습은 지원이 앞에서만 볼 수 있네. 강진혁.” 용준호가 놀리듯 말했지만 강진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정우였다!지난번 골목에서 봤던 그 모습과 똑같았다.그때 내가 넘어져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보겠다고 결심하고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나 또다시 내 상처를 잊고 움직이자 그대로 넘어졌다.“어이, 이 여자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니야? 날 안고 싶으면 그냥 말해.”용준호는 장난스럽게 나를 일으켜 세웠다.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소리쳤다.“불 켜!”내 말에 연습 중이던 사람들이 모두 멈췄지만 여전히 무대 뒤쪽의 불은 꺼져 있었다.“불 켜!” 내가 다시 소리쳤다. 밖에서 들어온 허진호가 내 소리에 놀라며 말했다.“뭐야? 불 켜, 빨리 켜!”허진호의 말에 모두가 움직여, 뒤쪽의 조명이 켜지자 눈이 부셔서 모두 눈을 찡그렸다.나는 무대 위의 모델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나씩 얼굴을 살피다가, 결국 가장 중앙에 있는 얼굴에 시선이 멈췄다.그 얼굴은 내가 매일 밤 꿈에서 그리워했던 얼굴, 진정우의 얼굴이었다.그가 드디어 살아 돌아와 내 앞에 서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너무 낯설고 심지어 어쩐지 혼란스럽고 불안한 기색까지 감돌았다.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리의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무대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너 뭐 하는 거야?” 용준호가 물었다. 허진호는 무대 위 사람을 가리키며 혼란스러워했다. “정우 씨, 정... 정우 씨가 여기 어떻게...”허진호 역시 충격을 받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나는 비틀거리며 무대 앞에 다가가 그 얼굴을 더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정말 진정우의 얼굴이 맞다고 나는 확신했다.“진정우.” 나는 그토록 많이 부른 이름을 낮게 불렀다. 하지만 무대 위의 남자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나를 부축하던 용준호가 웃으며 말했다.“지원아, 이 남자는 진정우가 아니야. 배성재야. 여기서 제일 유명한 모델이야.”용준호는 그렇게 말하며 손짓을 하자 배성재는 곧장 다가왔다. “준호 도련님.”“윤지원 씨야, 인사해.” 용준호가 말했다.배성재는 순순히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어.” 나는 멍하니 앞에 있는 하얀 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정우가 너무 그리워. 그가 내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싶어. 그런데 그가 아무 일도 없으면서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걸 생각하니까, 또 그를 걷어차고 때리고 싶어.”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 나중에 자식이 네 몸과 마음을 이렇게 망가뜨린 대가를 치르게 해.”무릎 부상 덕분에 나는 일주일을 쉴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하지만 그날의 고통 덕분에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기도 힘들었고 걸음마저 제대로 못 했다. 그래도 하루만 쉬고 나면 바로 일해야 했는데 조명이 준비된 날은 이틀 후였고 바디 라이트 쇼는 내가 급히 추가한 일이었기에 끝까지 지켜봐야 했다.결국 나는 절뚝거리며 라이트 쇼 현장에 나타났다. 허진호는 내가 그런 상태로 나타나자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이 정도로 심각한 거예요? 휠체어를 하나 가져다줄까요?”나는 바지를 걷어 올리며 말했다. “괜찮아요, 죽는 건 아니니까.”그는 내 상처를 보고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헐, 이렇게 심한 거였어요? 그냥 멍든 줄 알았는데 병원엔 갔어요?”“진짜 괜찮아요.”나는 말을 하며 그 순간 잘생긴 남자 모델들이 모두 검은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무리를 지어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그들이 나타나자 현장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지원 씨가 찾은 남자 모델들이죠? 정말 대단하네요.”허진호는 감탄하며 말했다.“드래곤 킹의 작품이니까 당연히 대단하죠.”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남성 모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그런데 인원이 부족한데? 일곱 명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허진호가 세심하게 사람들을 세어 보며 말했다.나는 용준호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는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한 명이 속이 안 좋아서 잠깐 화장실 갔어. 금방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그럼 됐네요. 저쪽에서 의상 피팅하고 줄 서서 대기시켜 주세요.” 나는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화장실 갔다는 그 사람도 얼른
그렇게 고요한 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내 마음을 휘감았다.순식간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나는 발걸음을 급히 옮기다 결국 뛰어가기까지 했다.숨을 헐떡이며 문 앞에 도착하자 차에 타고 있던 기사님이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뛰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급하지 않아요.”그렇다고 내가 급한 건 아니었지만 두려운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차에 앉자마자 다시 한번 그 골목을 돌아봤지만 골목 안은 아무것도 없고 텅 비어 있었다.하지만 그때 들었던 발소리는 너무 선명하고 분명히 누군가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금은 차에 앉아 있는데도 그 발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그 순간, 뒤돌아보지 않은 걸 후회했다.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나는 바로 안리영에게 전화를 걸어 이 이야기를 전했다.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귀신이라도 만난 거 아니야?”귀신이라니! 나는 그녀의 말을 반박하려던 찰나, 안리영은 다시 입을 열었다.“혹시 남색 귀신일 수도 있겠네?”그 말은 확실히 그럴듯했다. 어두운 골목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기엔 딱 맞는 장소였으니까. 하지만 그 남색 귀신이 나를 따라만 온다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손이라도 댔으면 모를까.“그만 생각해. 그냥 잘 자고 요즘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 몸에 좋지 않다니까, 아예 끊는 게 낫겠어.” 안리영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 나는 대충 넘어가듯 대답했다.물론 술이 몸에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만 요즘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술이라도 마셔야 겨우 잠이 오기 때문이다.기사님이 골목을 빠져나가며 나는 또 한 번 뒤를 돌아봤다. 그때, 골목에서 나오는 한 사람이 내 방향과 반대로 걸어가고 있었다.그 사람은 키가 크고 날렵한 모습이었다. 순간, 그 모습이 진정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심장이 마치 멈춘 듯했다. 나는 기사님 의자에 손을 두드리며 급히 소리쳤다.“세워요! 빨리 세워요!”기사님은 내 말에 즉시 차를 멈췄고 나는 문을 열려고 했지만 문에 안전 잠금이 걸려
“외삼촌...” 내가 그렇게 부른 순간, 유정철은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눈물은 제멋대로 쏟아져 내려 그의 얼굴을 적셨고 그 표정에서 온갖 슬픔이 묻어났다. “네 삼촌이 그랬어. 희연이가 이모랑 닮았다고. 이제야 나도 알겠어. 그래서 너랑 희연이가 그렇게 닮았구나.” 신희선 외숙모가 부엌에서 나와 눈물 맺힌 눈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나는 두 사람의 손을 붙잡고 그들과 함께 서로를 껴안았다. 이제 우리는, 세 명이서 하나가 되었다.그 후 나는 외삼촌과 외숙모를 부모님의 묘소로 데려갔다. 그곳에 놓인 한 송이 신선한 꽃다발을 보며 나는 강씨 가문에서 놓고 간 꽃이라고 확신했다.그들은 내 부모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이지만 이제 와서 그 죄책감에 시달리며 꽃을 바치고 있었다. 그들이 사죄의 의미로 꽃을 바쳤다고 해서 부모님이 용서해 주실까? 아니 내 부모님은 용서하지 않으실 거다. 그들은 단순히 목숨만 잃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나를 지켜줄 기회를, 내가 딸로서 살아갈 기회를 빼앗겼다.외삼촌과 외숙모는 내 엄마의 사진을 보고 또다시 눈물을 쏟았다. 특히 외숙모는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엄마의 사진을 보면서 그리운 유희연을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유희연이 나와 닮았다면 사실 우리 엄마의 표정, 분위기, 이목구비와도 많이 닮았을 것이다.외삼촌과 외숙모는 나에게 같이 살자고 제안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우리 셋은 평생 함께 살지 않았고 나의 일상과 생활 패턴은 그들과 맞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자주 찾아뵙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들도 나를 강요하지 않았다.갑자기 생긴 가족이라는 느낌은 정말 기쁘고 따뜻했지만 그 기쁨 속에 또 다른 무거운 감정이 나를 짓눌렀다. 마치 가슴 속에 무엇인가가 눌려 있는 것 같았다. 그 감정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지 사장의 가게로 향했다.비록 내가 술집을 운영하고 있지만 그곳은 가지 않기로 했다. 나는 지 사장 가게에 앉아 있다가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결국 그는 가
유정철은 물을 내려놓고 벽에 걸린 오래된 사진을 보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건 우리 가족 사진인데 이제 그 사진 속 사람 중엔 나밖에 남지 않았어.” 유정철은 조용히 말하며 그 사진을 바라보았다.“가족 사진?” 나는 중얼거리며 빨간 옷을 입은 작은 소녀를 가리켰다. “이 소녀도 아저씨 가족분인가요?”“응, 맞아. 저건 내 여동생이야. 그때 그녀는 겨우 두 살이었지.” 유정철의 목소리는 깊고 낮았다.“이분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나는 숨이 갑자기 가빠졌다. 마음속에서 ’혹시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쳤다.유정철은 잠시 말이 없어졌다.이때 나는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아저씨...”“그날 여동생은 사라졌어. 바로 그 사진을 찍은 날이었지.” 유정철의 말에 내 심장이 급격히 빨라졌다.“어떻게 사라졌나요?” 나는 본능적으로 유정철의 옷자락을 잡았다.유정철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날을 되새겼고 사진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부모님은 그날 사진을 찍고 굉장히 기뻐했지. 그들은 사진관에서 만든 키링를 목걸이로 바꿔 여동생에게 선물했어. 그리고 우리를 놀이공원에 데려갔고... 여동생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해서 엄마가 데려갔는데 엄마가 화장실에서 기절하고 나니 여동생은 사라졌어...” 유정철의 말이 끝날 때, 내 가슴은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막히는 기분이었다.“그 후로 한 번도 찾지 않았나요?” 나는 목이 타는 듯한 질문을 던졌다.“찾았지. 우리 가족은 미친 듯이 찾았어. 부모님은 놀이공원에서 하루 종일 지키고 그 후엔 도시 전역을 찾았지. 그리고 나서는 전국을 찾아다녔어. 그러다 엄마는 여동생을 찾지 못한 탓에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했어. 아빠는 엄마 장례를 치르고도 계속해서 찾았는데 그 과정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지...”그 말에 나는 몸이 얼어붙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결국 내 엄마의 실종이 행복한 가정을 이렇게 산산이 부서지게 만든 것이었다.“그럼 더 이상 찾지 않으셨나요?”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