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골탕을 먹였다고?’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물음표를 보냈다.[안석 선배가 왔어!]안리영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나는 곧장 호텔 사건이 떠올라 웃음을 참지 못하고 답장을 보냈다.[내가 만들어 준 둘만의 시간을 잘 즐겨.][즐길 시간이 어딨어, 나 지금 바로 수술 들어가야 해!]‘아, 진짜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하지만 안리영은 일부러 일을 피하는 게 아니었고 정말로 수술이 있었다.사실 다른 의사에게 맡길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구안석이 몇 달 동안 연락도 없이 자기 일에만 몰두했는데 이제 와서 그가 돌아왔다고 해서 그녀가 바로 일정을 바꿔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그리고 시간이 흘러 수술이 끝났을 때는 이미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수술을 마친 안리영은 제일 먼저 휴대전화를 확인했지만 메시지 창은 텅 비어 있었다.그녀는 일부러 구안석과의 대화방을 열어 보았지만 대화는 그가 한국에 도착했다는 메시지에서 멈춰 있었다.‘몇 시간 동안... 단 한 마디도 없었다고? 설마... 진짜로 화난 거야?’안리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손에 쥔 채 평소처럼 휴게실로 향했다.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그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휴게실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그 불빛 아래 POLO 셔츠에 슬랙스를 입은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구안석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수술은 잘 끝났어?”안리영은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리며 힘없이 대답했다.“응, 잘 끝났어. 그런데... 여기서 뭐 해?”“너 기다리고 있었어.”그의 짧은 대답에 심장이 살짝 두근거렸다.“나도 원래 이따 찾아가려고 했는데...”“정말... 올 생각이 있었어?”그 말은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는 듯한 압박감을 주었다.안리영은 속으로 쓴웃음을 치며 애써 피식 웃었다.“나, 먼저 씻고 옷 갈아입을게.”그녀는 얼른 화제를 돌리며 욕실 쪽을 가리켰다. 그런데 막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구안석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안석은 안리영을 병원에서 데리고 나왔다. 안리영은 그가 호텔로 데려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차에 오르자 구안석이 조용히 물었다.“너희 집으로 가도 돼?”안리영은 잠깐 당황하면서 그의 말 속에 숨은 의도를 금방 알아챘다.“내 집에 남자가 있는지 확인하러 가자는 거야?”“아니.”‘그럴 리가, 역시 남자의 질투심은...’“나는 그런 남자들과는 달라.”안리영은 할 말을 잃었고 이제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구안석을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그녀의 이 작은 집은 부모님 외에는 오직 윤지원만이 와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구안석을 데리고 올라가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간 안리영은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구안석의 목을 팔로 감쌌다. 신발만 벗은 그녀는 순식간에 그보다 훨씬 작아져 발끝을 들여야 했다.“안아 줘.”구안석은 안리영을 번쩍 들어 올렸고 그녀는 구안석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구안석, 먼저 말해두는데 호텔 일은 그냥 연극이었어. 윤지원이 연기를 하려고 꾸민 거야. 나랑 그녀는 남자랑 호텔에서 잔 적 없어. 우리는 같은 방에서 잤고 내 집에는 어떤 남자도 온 적 없어. 믿지 못하겠으면 마음대로 확인해 봐...”“응, 봤어!” 구안석의 눈은 그녀의 머리 위를 넘어 보고 있었다.“봤지? 내 집에는 남자 없어.” 안리영이 자랑스럽게 말했다.“그럼 저 사람은 누구야?” 구안석의 말에 안리영은 잠깐 멈칫했다. 그녀가 아직 반응하지 못했을 때,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안리영, 남자를 집에 데려왔어?”그 소리를 듣고 안리영이 고개를 돌리자, 거실 한가운데 서 있는 남자를 보곤 그대로 얼어붙었다.“저 사람 누구야?” 구안석도 그녀에게 물었다. 안리영은 몇 초간 머리가 하얘졌다가, 큰 소리로 외쳤다.“삼촌, 왜 갑자기 우리 집에 온 거야? 누가 비밀번호를 알려줬어?”믿음직스럽지 못한 안리영의 엄마 외에 그녀의 집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넌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 저 사람 누구야
조시언의 시선이 구안석에게로 향했다.“나는 호텔에 머물 거야. 그냥 널 보러 온 거야.”안리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삼촌, 호텔 예약은 했어? 안 했으면 내가...”“필요 없어.”조시언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너희 둘 앉아. 우리 얘기 좀 하자.”그 말투는 확실히 어른스러운 느낌이었지만 사실 그는 안리영보다 한 살 많을 뿐이었다. 구안석도 조시언이 무슨 말을 할지 눈치채고 앉자마자 안리영의 손을 잡고 먼저 입을 열었다.“저는 리영이와 진지하게 교제 중입니다. 결혼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리영이가 동의했어요?” 조시언의 질문은 매우 직설적이었다. 구안석은 안리영을 바라보았다.“아직은 아니요.”안리영은 급히 말을 이었다.“나는 학교 다닐 때부터 안석 선배를 좋아했어. 선배가 청혼하면 저는 나는 당연히 선배랑 결혼할 거야.”조시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얼굴에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지만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다.“리영이 동의만 한다면 저는 최대한 빨리 부모님을 뵙고 인사드릴게요.” 구안석도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안리영은 구안석이 느끼는 압박감을 알아챘다. 오늘 이런 상황이 될 줄 알았으면 구안석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을 텐데.원래 그녀는 그냥 연애부터 시작하려고 했을 뿐, 결혼까지 생각한 건 아니었다. 이제 이렇게 되니, 마치 구안석을 몰아붙이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책임감이 강한 구안석은 오늘 자기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이때 안리영도 말을 이었다.“삼촌, 삼촌은 나랑 같은 나이인데 생각이 왜 이렇게 고리타분해? 나는 지금 안석 오빠랑 연애 중이고 지금은 그냥 연애만 하고 싶어. 부모님 뵙고 결혼하는 건 그다음 얘기야.”“그럼 너도 꼭 저 사람과 결혼할 생각은 없다는 거야?” 조시언의 질문은 그녀를 완전히 궁지에 몰아넣었다.안리영은 남자에게 너무 확실한 약속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게다가 조시언이 엄마에게 자신과 구안석의 관계를 말할까 봐 걱정되었다.“응.
구안석은 결국 그 이야기를 꺼냈다. 안리영은 이미 생각해 본 문제였기 때문에 그가 묻자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그럼 너는? 왜 안 돌아와?” 구안석은 안리영의 이마에 뽀뽀하며 잠시 망설이더니 금세 대답했다.“지금은 안 돼.”안리영은 그 이유에 대해 더 묻고 싶지 않았다.“나는 외국에 가고 싶지 않아.”두 사람의 대화는 그걸로 끝났다. 구안석은 안리영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느꼈는지, 가볍게 그녀를 끌어안았다.“내년에 신청해서 돌아올 거야.”“응.” 안리영은 눈을 감은 채 대답했고 구안석은 잠시 후 일어나서 욕실로 향했다.안리영은 천장을 바라보며 예전에는 장거리 연애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이제는 정말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실감하게 되었다.그때, 구안석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안리영은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욕실을 향해 외쳤다.“구안석, 희연 씨가 전화 왔어.”“받아.” 구안석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고 안리영은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소희연 교수님.”전화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리영 씨, 구 교수님은요?”“지금 샤워 중이에요. 급한 일 있으면 제가 전해줄게요.”안리영은 구안석이 그녀가 이 전화를 받는 걸 알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내일 릴리 교수님이 오시는데 구 교수님이 반드시 참여해야 해서 오늘 밤엔 반드시 돌아와야 합니다.”“알겠습니다. 전해드릴게요. 또 다른 일은 없나요?”안리영은 소희연이 지금 시간이 어떤 때인지, 구안석이 왜 돌아왔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 단순히 구안석에게 알리기 위해 전화한 것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리영 씨는 구 교수님과 영원히 사랑할 수 있어요?”소희연이 진짜 묻고 싶었던 건 이거였다. 그녀는 역시 속셈이 있는 듯했지만 참 직설적으로 구안석을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었다.“모르겠어요. 저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싶어요. 지금 사랑하면 됐죠.”안리영은 일부러 소희연을 자극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진심을 말했다.아무도 한 사람만을 영원히
“누구의 비밀?” 나는 무심코 물었다.이소희는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움직였지만 마치 말하고 싶으면서도 뭔가를 망설이는 듯한 모습이었다.그녀의 표정을 보고 나는 그 비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죽을지도 모른다"는 그녀의 말이 떠오르며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입을 막았다.“그만 말해, 내가 직접 조사할게.”이소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언니, 이렇게 많은 돈을 빌려줬는데 정말 고맙고 미안해. 하지만 더 이상 내 문제에 신경 쓰지 말아줘.”이소희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말할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그녀가 더 이상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져만 갔다.“이 돈은 걱정하지 마, 너만 괜찮으면 돼.” 나는 그녀가 부담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소희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그녀는 반드시 이 돈을 갚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누구에게나 자신의 고집과 원칙이 있는 법이니까 나는 더 이상 그녀의 결심을 깨고 싶지 않았다. 비록 이소희는 여전히 여기 있을 생각을 고수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새로이 단독 아파트를 마련해주고 3년 치 집세를 미리 지급했다.그녀에게는 더 이상 그 좁고 열악한 환경에서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소희가 더 이상 그렇게 힘든 일을 하지 않도록, 허진호의 도움을 받아 회사도 알아봐 주었다.그리고 안리영에게 전화를 걸어 구안석과 만나기로 약속했다.“알겠어, 시간과 장소 정해지면 알려줄게.” 안리영의 목소리는 마치 내가 구안석과 만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들렸다.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지만 이미 약속은 잡은 상태였다. 하지만 안리영은 오랫동안 답장이 없었다.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그때, 구안석은 갑자기 안리영에게 부모님을 만나러 가자는 제안을 했다. 이건 안리영에게 예기치 않은 일이었다.“부모님 만나러 가자고? 어제 작은 삼촌 때문에 그런 거야?” 안리영은 구안석이 왜 갑자기 부모님을 만나자고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아니, 사실 내가 돌아온 이유도 바
나는 예전에 강유형과 함께 계약을 논의하러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그때 내 인상 속의 이곳은 꽤 정식적인 곳이었다.하지만 이소희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내가 너무 순진했다는 걸 깨달았다.이곳에서 정보를 얻으려면 단순한 손님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나는 전에 술집에서 했던 방식대로 접근하기로 했다.회색 산업에 여성 서비스가 존재한다면 자연히 남성 서비스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전에 술집에서도 남성 직원을 불러봤으니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 보는 게 자연스러웠다.혹여 용씨 가문에서 나를 의심한다 해도 내가 그런 스타일의 손님이라고만 생각할 것이다. 때로는 우연처럼 보이는 일들이 가장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나는 VIP 룸을 하나 빌리고 직원에게 서비스를 요청했지만 직원은 단호했다.“죄송합니다, 고객님. 저희는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술을 따르는 직원은 가능합니다.”이곳이 불법적인 사업을 운영하면서도 완벽하게 감추고 있다는 증거였다.“그럼 술을 따라줄 사람을 불러줘요. 가장 잘생긴 사람으로.”나는 마치 돈 많은 사치스러운 손님처럼 능청스럽게 말했다.잠시 후, 룸에 한 사람이 들어왔는데 뜻밖에도 익숙한 얼굴이었다.“준호 씨가 왜 여기 있어요?“나는 용준호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보아하니 이곳의 보안은 예상보다 더 철저했다. 내가 특별한 요청을 하자마자 그들은 바로 용준호에게 보고했다. 아무래도 이런 방식으로 사업을 유지하는 곳이라면 보안이 철저할 수밖에 없다.어쨌든, 이소희가 말한 대로 이곳에서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이런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단골 손님일 가능성이 높았다.용준호는 나를 바라보며 자리에 앉더니 스스로 술을 따라 한 잔 건넸다.“미녀 고객님이 특별한 서비스를 찾고 있다길래 궁금했지. 그런데 네가 있을 줄이야.”나는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이상해요? 준호 씨, 요즘 인터넷을 안 보나 보네요?“용준호는 내게 술잔을 건네며 웃었다.“정말 알다가도 모를 여
하지만 쫓아가다 말고 멈춰 서면서 갑자기 머릿속에 이소희의 말이 떠올랐다.이소희가 누군가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했는데. 혹시 방금 본 그 사람일까? 만약 그렇다면 용씨 가문의 불법 사업에도 그가 개입되어 있다는 뜻일까?생각해 보니 우리 부모님의 죽음도 두 가문이 공모한 일이었다. 그러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거세게 몰려왔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서 있다가 뒤늦게 용준호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화장실 못 찾았어?”나는 재빨리 태연한 척하며 대답했다.“생리 중이라서요. 생리용품이 필요해요.”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참 묘한 타이밍이네. 내가 사람 시켜서 가져다주라고 할게.”그러고는 정말로 여성 직원에게 시켜 생리대까지 챙겨오게 했다. 나는 연극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화장실에 다녀왔다.방으로 돌아오자 용준호가 불러둔 남자 모델들이 도착해 있었다. 모두 183cm 이상의 키에 체형은 큰 차이가 없었고 넓은 어깨에 잘록한 허리, 긴 다리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피부도 깨끗하고 세련된 외모에다, 굉장히 예의 바르기까지 했다.나를 보자마자 일제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이 친구들, 모두 프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야. 원하는 대로 만족할 거야.”용준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괜찮네요. 역시 여기에는 진짜 숨은 고수들이 많은 곳이군요.”내 말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고 그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던진 말이었다.용준호는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래서 만족해?”“아주요.”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 사람들, 제가 필요할 때 미리 하루 전에 전화만 하면 준비해 줄 수 있죠?”“당연하지..”그는 거리낌 없이 대답했지만 나는 여전히 아까 봤던 그 그림자가 신경 쓰였다.그래서 이번 기회에 확실히 조사하기로 했다.“준호 씨, 특별한 일이 없으시면 가보세요. 저 혼자 술 좀 더 마시고 싶네요.”그는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강진혁의 옷깃을 잡아끌며 그를 내 눈앞으로 바짝 당겼다.“진정우, 드디어 왔네... 이 개자식아, 왜 이제야 온 거야?”강진혁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 있었다. 그는 내 손목을 눌러 잡으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지원, 너 술 너무 많이 마셨어. 나는 진정우가 아니야.”“아니야, 너 진정우 맞아.”나는 그의 눈가를 손으로 더듬으며 나직이 속삭였다.“내 진정우야. 너 변했어. 이제 나 안 사랑하지? 나 버린 거야?”남자들은 대체로 다른 사람의 대체품 취급받는 걸 가장 싫어한다. 게다가 강진혁은 나를 좋아하는데 이런 말이 그에게는 더 큰 상처일 것이 분명했다.내 말이 그의 심장을 정통으로 찌른 것이었을까. 그는 갑자기 내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며 흔들었다.“정신 차려. 내가 누군지 똑똑히 봐.”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몇 초 후 입술을 삐죽이며 울음을 터뜨렸다.“진정우, 너 나한테 이럴 거야? 너 진짜 나쁜 놈이야!”여자가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눈물이다. 내가 눈물을 흘리자 강진혁도 결국 내 손목을 서서히 놓았다.나는 틈을 타 그의 가슴을 밀치고 주먹으로 툭툭 쳤다. 그러나 그는 한순간에 나를 번쩍 안아 들고 방을 나섰다.방을 막 나서자 용준호가 걸어오더니 싱글거리며 말했다.“스코틀랜드산 위스키 한 병이면 남자라도 누구든 정신 못 차릴 정도라고 하던데?”그 말을 듣자 나는 속으로 이를 꽉 깨물었다. 다행히도, 나는 미리 대비를 해뒀다.강진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를 품에 안고 빠르게 걸어갔다. 용준호는 강진혁의 뒷모습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강 대표님, 오늘 밤 즐겁게 보내시길. 나한테도 공 좀 돌려줘야 해.”이 둘의 관계, 절대 단순하지 않았다.나는 강진혁에게 이끌려 그의 차에 올랐다. 호랑이 굴에 직접 들어가는 격이었지만 나는 가야만 했다.강진혁이 날 데려간 곳은 그의 개인 거처였다. 이곳은 내가 알지 못했던 장소였고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강유형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의 눈가엔 슬픔이 가득했다.수정 스님은 행각승이었다가 법운사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누구도 그의 고향이나 가족을 알지 못했다.굳이 혈육을 꼽으라면 강유형이 유일한 존재일 터였다.그는 어릴 적부터 수정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하며 경을 들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지원아, 먼저 부상자들부터 도와줘.”강유형이 내 슬픔을 잠재우듯 말했다.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나는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화재는 갑자기 일어난 거야? 너 그때 절에 있었어? 이상한 점은 없었고?”강유형의 눈빛이 짙어졌다.“지원아, 그건 내가 조사할 테니 네가 나설 필요 없어.”그 말에서 나는 그가 무언가를 의심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내가 위험에서 멀어지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강유형, 나도 모르는 척 편히 있으려 했지만 이 불은 나를 노리고 온 것 같아서 말이지.”내가 추측을 내뱉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위로의 말이 오리라 예상한 찰나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진정우, 곧 돌아오지?”맞았다. 강진혁이 직접 알려준 소식이었다.“이 화재가 진정우랑 관련 있다는 거야?”내 물음에 그는 담담히 말했다.“네가 방금 너 자신이 표적이라 말했으니 네 일은 곧 그의 일과 마찬가지인 셈이지.”하긴 지금 내 존재는 진정우의 약점이자 방패나 다름없었다.“지금은 급박한 때야. 조심해.”강유형은 문득 말을 멈추더니 이내 덧붙였다.“가능하다면 내 곁에 있어.”그가 나를 지키려는 의도임을 알았다.그래도 나는 되물었다.“진짜로 내가 표적이라면 네 힘만으로는 부족할 텐데.”법운사에 불을 지른 자들은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다. 수정 스님마저 피해자로 만들 정도로 그들은 광기에 사로잡혔던 것이다.김지영이 역시 불길에 휩싸일 줄은 용씨 가문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업보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 따뜻한 분께서 이런 재앙을 마주했다니, 안타까울 뿐이었다.용진표의 혼란스러운 이성 관계가 떠올
“우린 잘 몰라요. 찾고 싶으시면 병원에 한번 가보시죠.”여기까지 와서 확인한 건 그저 화재 직후 법운사의 참담한 모습뿐이었다.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아니,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강유형이 무사하다는 소식도 들었다.나는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혹시 다친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나는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안은 분주함으로 가득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모두 종종걸음에 가까운 발걸음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화재로 인한 응급 상황 때문에 병원은 비상 진료 통로를 열어놓은 상태였고 나는 비교적 빠르게 부상자들이 치료받는 구역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강유형을 보았다.그의 옷은 여기저기 재로 인해 더럽혀져 있었고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조차도 발견하지 못했다.이런 모습의 강유형은 처음이었다. 더는 높은 곳에 있는 존재가 아니었고 넘볼 수 없는 거리감도 사라졌다. 고귀함도 자존심도 모두 내려놓은 채, 그저 평범한 남자로서 가장 위대한 일을 하고 있었다.직접 보기 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이토록 현실적이고 다정한 그의 모습이라니 꿈꾸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나는 짐지영이 너무 걱정돼 곧장 그에게 다가갔다.“강유형.”그는 나를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지원아,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뉴스 봤어. 계속 전화를 걸었는데 받질 않아서 법운사에도 직접 다녀왔어...”나는 말끝을 흐리며 곧장 부상자들을 살펴보았다.“사모님은? 괜찮으셔?”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착했던 내 가슴이 순간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강유형, 왜 말을 안 해? 사모님 설마...”내가 채 묻기도 전에 용준호가 허둥지둥 달려왔다.“우리 엄마 어딨어? 엄마! 엄마...”늘 껄렁하고 건들거리며 세상에 무서울 게 없어 보이던 용준호였다.하지만 지금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눈빛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강유형, 우리 엄마 어딨어?”그 역시 나처럼 물었다.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법운사로 향하는 길에 나는 강유형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기나긴 연결음 끝의 자동응답뿐이었다.가슴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요즘 그가 법운사에 머물고 있었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연락도 되지 않으니 머릿속은 온통 나쁜 상상으로 가득 찼다.그에게 전화를 건 건 단순히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부상자나 사망자가 있는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하지만 그에게 건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못했다.나는 액셀을 밟으며 용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어머니가 바로 그 절에 계셨으니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 역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이번엔 아예 거절당했다. 불안은 더 깊어졌다.‘혹시 김지영까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그간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강유형과 김지영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치거나 희생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복잡한 심경 속에서 차를 운전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멀쩡하던 절에 왜 불이 난 걸까?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의도한 일이었을까? 혹시 나를 노린 불은 아니었을까?’만약 안리영이 나를 데리고 조경태의 생신 잔치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그 절에 있었을 것이다. 죽었을 수도, 심하게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내 손에 누군가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걸 얻지 못하면 나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저지른 일이라면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희생시켜서는 안 됐다.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이 나는 어느덧 산기슭에 도착했다. 들이마시는 공기 속엔 타버린 재 냄새가 가득했고 멀리 보이는 산 위엔 아직도 연기가 자욱했다.산을 절반쯤 오르자 경찰이 차량을 막아섰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이
난처한 상황이었다. 도무지 어찌할지 몰라 법까지 들먹이고 말았다.“법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서른이 넘도록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는 건 정상이 아니야. 어느 날 갑자기 남자 며느리라도 데려오면 내가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보겠냐?”조경태는 누가 뭐라 해도 듣지 않겠다는 태도였다.“그럼 제가 하나 약속드릴게요. 절대 남자를 며느리로 데려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조시언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조경태는 씩씩 대며 화를 냈다. 그러자 안리영이 급히 나서며 말했다.“할아버지, 삼촌 좀 그만 괴롭히세요. 안 좋아하는데 억지로 떠민다고 행복해지겠어요?”“이 계집애는 왜 또 얘 편을 드는 거야?”할아버지는 안리영을 흘겨보았다.내가 얼른 말을 이었다.“오늘 온 아가씨들, 저랑 리영이 다 지켜봤어요. 삼촌이랑 어울릴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고요.”지금 이 순간 나도 안리영을 따라 조시언을 삼촌이라 부르고 있었다.“난 못 믿겠는걸.”조경태는 콧방귀를 뀌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정말이에요, 할아버지. 그 여자들, 남 얘기하길 좋아해서 뒤에서 험담이나 하는 사람들이에요. 아까도 삼촌 뒷담 까고 있었어요.”조시언은 그녀를 바라보았고 조경태도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그래? 뭐라고 험담하던?”“삼촌이 나이가 꽤 됐는데도 아직 결혼 안 한 걸 말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삼촌을 차지해서 조씨 가문 며느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수작 부릴 생각들만 하고 있었어요.”안리영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오늘 그 여자들이 조시언을 노리고 온 건 분명했으니 말이다.“그건 좋은 일이잖니.”조경태는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할아버지는 수작 부리는 여자가 좋으세요?”안리영은 조경태가 싫어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조경태는 말이 없었다. 속이 시커먼 여자한테 크게 당할 뻔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안리영은 나를 향해 눈짓을 보냈고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삼촌 짝 찾는 일은 저랑 리영이에게 맡겨주세요.”내 말에 안리영이 눈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안리영과 나는 방 안의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서로 마주 본 채 각자의 소파에 앉은 모습이었다. 한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젊고 준수한 청년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가 너무나 뚜렷해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분명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부자 관계였다.안리영은 조시언이 입양된 아들이라고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의아했다. 당시 나이로 치면 조경태는 조시언을 손자처럼 키워도 이상할 게 없었을 텐데 왜 굳이 아들로 삼은 건지 궁금했다.“시언아, 너 이제 나이도 어린 게 아니잖니. 결혼 안 하겠다는 건 그렇다 쳐도 여자 친구조차 없다니. 밖에서 사람들이 너를 두고 뭐라고 수군대는지 너도 알지?”조경태는 수군대다 같은 말도 자연스럽게 썼다.하지만 조시언은 묵묵히 앉아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조명이 그의 얼굴과 콧대를 선명하게 나누듯 비췄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면서 그의 이목구비는 더욱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깊은 눈썹뼈는 날카로운 선을 연출해 냈다.“사람들이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더라!”조경태는 말을 끝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런 이상한 소문이 퍼지는 건 우리 조씨 가문의 체면을 망치는 일이다. 우린 그런 망신 못 당한다!”조시언은 그 말에도 여전히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평온한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했다.“남의 입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건 그들 사정일 뿐, 우린 신경 쓰지 않으면 됩니다.”“넌 신경 안 쓴다지만, 이 늙은이는 창피해서 못 살겠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지금 당장 사람 하나 데리고 오든가, 아니면 내가 직접 찾아줄 거다. 결혼 안 해도 좋다. 그냥 네 옆에 여자 하나 세워놔라. 사람들이 널 정상으로 보게 말이다!”그 말에 안리영과 나는 동시에 서로의 팔을 꼬집었다. 안 그러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 노
“넌 안 그럴 거야, 맞지?”안리영은 계속 나를 놀리면서도 언제나 내 편이었다.우리는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섰다.조경태는 자줏빛과 금색이 어우러진 긴 도포를 입고 활짝 웃으며 손님들의 축하 선물을 받고 있었다.그는 내가 가져온 선물을 보곤 눈을 반짝였다.“특별한 선물이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그 말에 나는 괜히 민망해졌다.강유형의 어머니도 비슷한 걸 선물했는데 어째서 내 것을 특별하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역시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은 달랐다. 누구보다도 말솜씨가 뛰어났다. 받는 사람도 기쁘고 주는 사람도 흐뭇하게 만드는 한마디였다.“리영아, 구 교수는 어디 갔니? 오늘은 왜 같이 안 왔어?”조경태가 슬며시 물었다.안리영은 내 옆구리를 몰래 콕 찔렀다.“그냥 따로 말 안 했어요. 오늘은 그냥 제가 단순히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온 거거든요.”그러나 이 정도 지긋한 나이가 되면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오늘 같은 잔칫날에 인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고 왔다 해서 구안석이 못 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는 안리영을 힐끔 바라보다 두어 번 웃고는 더 묻지 않았다.“할아버지, 그럼 선물마저 받으시고요. 저는 지원이랑 가서 뭐 좀 먹고 올게요.”안리영은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 했다. 또 무슨 질문이 나올까 봐 걱정된 눈치였다.“그래, 다녀오거라. 다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좀 있다 너희 둘 도움 좀 받아야겠구나.”그 말에 우리 둘은 눈빛을 주고받았다.“혹시 케이크 자르실 때 저희한테 맡기시려는 거 아니에요?”안리영이 농담처럼 물었다.조경태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콕 찔렀다.“이놈의 계집애, 지금 누굴 놀리는 거냐. 케이크 칼 정도는 들 수 있다고! 그게 아니고, 너희 둘한테 자문 좀 구하고 싶어서 그래.”“자문이요? 혹시 애인이라도 골라달라는 거예요?”안리영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겁 없이 농을 던졌다. 외할머니가 들으면 바로 이마 한 대는 맞았을 거다.“점점 대담해지는구나.”조경태가 다시 한번 그녀를 가리키며
안리영과 조시언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성준수는 그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안리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하긴 이렇게나 예쁜데 조시언이 마음 줄 만도 하지... 아야, 아파! 조시언, 너 왜 그래?!”성준수는 조시언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 나갔고 안리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정신 나갔네.”“조시언네 리영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난스럽게 되물었다.안리영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너까지 말썽이야, 얼른 가자. 외할아버지께 선물 드려야지.”그녀는 내 손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빨갛게 물든 귓바퀴가 그녀의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아까 조시언과의 어색한 분위기를 떠올리다 나도 모르게 장난을 쳤다.“리영아, 너랑 외삼촌 피가 섞인 것도 아니잖아. 내가 보기엔 한번 고려해 볼 만도 해. 잘생겼지, 돈 많지, 만약 네가 저 사람 잡으면 적어도 밖으로 새는 물은 없을 거 아니야.”안리영은 눈을 부릅떴다.“윤지원, 너 또 그런 소리 하면 진짜 절교할 거야.”“어머, 발끈하네?”나는 계속해서 놀렸다.“그만하라고 했지!”안리영은 나를 쫓아와 때리려 했다.나는 그녀를 피해 도망치다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익숙한 향이 먼저 스며들었다.고개를 들자 강유형이 서 있었다.요즘 그와 자주 마주쳤다. 절에서도 마주쳤고 조씨 가문에서도 마주쳤으니 말이다.“강 대표님, 이제 가시려고요?”안리영의 말투엔 노골적으로 쫓아내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나는 이미 다 털어냈다 하더라도 안리영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네.”강유형은 나를 살짝 놓아주며 내 발을 내려다봤다. 다친 데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했다.“조경태 씨 생신 축하하러 왔어요.”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는 볼 거 다 보고 별일 다 겪은 사이였다.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저녁 식사는 안 하고 가?”“응, 그게...”그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집에 가봐야 해서.”그 말에 문득 김희연이 내게 건넨 말과
“아이참, 엄마!”안리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오늘은 외할아버지 생신 잔치잖아, 내 맞선 자리가 아니고.”“뭐 어때?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잖니. 좀 있다가 잘 둘러보렴. 우리 딸처럼 예쁘고 똑똑한 애가 남자 친구 하나 못 찾겠어? 눈만 마주치면 끝이지.”조민영은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안리영은 체념한 듯 말했다.“알겠어. 엄마는 먼저 가서 볼일 봐. 난 지원이 찾으러 갈게. 외할아버지께 드릴 선물도 걔가 챙겨왔거든.”안리영은 그렇게 핑계를 대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난 그녀와 어머니의 대화를 이미 들은 터라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아주머니 꽤 개방적이시네. 근데 나도 그 말 일리 있다고 봐. 예전에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고.”“좋아.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바로 들이댈게.”그 순간 나는 조시언을 발견했다.그는 어두운 톤의 정장에 검은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셔츠 단추는 몇 개 풀려있었고 그로 인해 허연 목덜미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그 하얀 피부와 검은 셔츠가 만들어내는 대비는 그를 더욱 차가워 보이게 만들었다. 어쩐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도 자아냈다.“네 외삼촌, 진짜 잘생겼다.”나는 감탄했다.안리영도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여자들한테 인기 많았어. 예전에 내가 저 사람한테 온 러브레터를 얼마나 많이 대신 받아줬는지 몰라.”하긴 조시언 같은 사람이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그럼 연애는 해봤대?”안리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아니, 못 해봤을걸.”“그렇다면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다는 말이겠지.”내 말에 안리영이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내 가슴을 콕 찌르는 말을 꺼냈다.“아, 맞네. 너 연애 경험 많았지.”“나 약 올리는 거야? 그렇게 나오면 나도 너 도와줄 마음 싹 사라지는데?”우리가 대화를 나눌 동안 조시언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안리영은 어느새 자세를 바짝 고쳐
안리영은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초 후 그냥 끊어버렸다.그토록 단호하고 주저 없는 태도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정말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이런 부분에선 그녀가 나보다 훨씬 강했다. 질질 끌지도 않았고 미련도 없었다.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강유형과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 가끔 연락을 하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을 때뿐이었다.안리영과 구안석이 여기까지 온 게 아쉽긴 해도 딱히 뭐라고 말할 순 없었다.감정의 온도는 결국 그 당사자만이 아는 법이니 말이다.우리가 함께 차를 마시며 점원의 포장 작업을 기다리는 동안 안리영의 휴대폰 화면이 다시 한번 반짝였다.새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구안석에게서 온 메시지였다.‘리영아, 나 이제 갈게.’나는 슬쩍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이따가 차단할 거야.”“직접 못 하겠으면 내가 대신 해줄까?”내가 농담처럼 말했다.안리영은 나에게 절친만이 보낼 수 있는 눈빛을 건넸다. 점원이 포장해 준 작품을 들고 매장을 나설 때까지 그녀는 끝내 구안석에게 답장하지 않았다.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구안석의 메신저 대화창에서 멈춘 걸 발견했다. 그녀는 그들이 나눈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의아해 물었다.“왜 웃어?”안리영은 내게 휴대폰을 내밀며 말했다.“선배님이랑 나눈 대화 좀 봐봐.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합쳐도 겨우 몇십 개밖에 안 돼. 우리 과 단톡방에서 일주일에 올라오는 공지보다도 적어.”나는 보지도 않고 다시 그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이미 헤어지기로 한 거잖아. 그런 거 봐서 뭐 하려고.”“지원아, 나 진짜로 연애한 게 맞긴 한 걸까?”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구안석을 차단했다.“공적인 일 있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럴 때도 연락 안 하게?”나는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 장난을 던졌다.“그 사람은 흉부외과고 나는 산부인과야. 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