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혁은 멈춰 서서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줌마가 새로 인테리어 하셨대요.” 말을 끝내고 그의 가방을 건네주며 덧붙였다. “오빠 먼저 짐 정리하고 좀 쉬세요. 저도 좀 챙길 게 있어서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방으로 돌아갔다.방 안은 여전히 나와 강유형의 물건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내가 떠난 이후로 이 방에는 아무도 머물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강유형도 이곳에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나 보다. 그렇다면 그는 그동안 어디서 지냈을까? 혹시 조나연이 머물고 있는 봉화타운하우스에서였을까?그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마음속에서 강유형을 떼어내긴 했지만 그가 남긴 상처는 아직 치유되지 않은 채였다. 나는 그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서둘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불필요한 물건을 정리하는 습관이 있었던 터라 내 물건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옷과 생활용품을 하나의 여행가방에 다 넣을 수 있었다.거의 다 정리할 즈음 방 문이 두드려졌다. 문을 열어보니 강진혁이 서 있었다. 그는 옷을 갈아입었고, 그의 시선은 방 안의 짐이 가득 든 내 여행가방으로 향했다. 이내 그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너, 집에서 나가려는 거야?” “네. 여기 더 이상 있으면 서로 불편하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다시 짐을 정리했다.강진혁은 방 안으로 들어와 열려 있는 옷장을 보았다. 옷장 안에는 여전히 강유형의 옷이 걸려 있었다. 그의 손이 잠시 움켜쥐듯이 떨렸다. “너와 유형이는 오랫동안 함께 있었잖아. 그런데 이렇게 떠나는 거... 아쉽지 않아?” 그의 말은 느리지만 묵직하게 다가왔다. ‘아쉽냐고?' 나는 잠시 멈춰서 생각했다. “오빠도 알잖아요. 내가 가장 잘하는 게 바로 단호하게 정리하는 거라는 걸.” 강진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남은 짐을 마저 챙기고 가방을 닫았다. 그리고 가방을 침대에서 내리려는 순간, 그의 손이 가방 위에
“꼬맹아, 너한텐 아직 내가 있잖아.” 강진혁이 말하며 커다란 손으로 내 뒷머리를 가볍게 두드린 후, 나를 놓아주었다. 울지 않으려던 나는 그 순간 눈물이 갑자기 눈가에 차올랐고 뚝뚝 떨어졌다. 내가 아무리 참으려 해도 막을 수가 없었다. 이 눈물은 절대 흘려서는 안 된다. 내 마음을 들켜버릴 테니까.나는 눈물을 삼키려 애썼지만 억누를수록 더 많이 흘러내렸다. 급히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하며 내 초라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그때 강진혁의 손이 다시 내 머리 위에 얹혔다.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는 말했다. “내 앞에서 우는 게 뭐가 부끄럽다고. 너 잊었어?” 이건 그가 예전에도 했던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또다시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 마지막 자존심을 찢어내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급히 돌아서서 그의 눈을 피하며 서둘러 눈물을 닦아냈다.아마 내 속내를 읽었는지, 그는 내 여행가방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가방 차에 먼저 실어둘게.” 그가 방을 나가고 나는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내렸다.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부엌에서 강유형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전히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들이 돌아온 기쁨이 결국 나를 잃는 불안감을 덮어버린 듯했다. 나는 그들과 더 이상 인사하지 않았다. 그들이 내 울고 붉어진 눈을 보지 않길 원했고 그들이 나를 붙잡을까 두려웠다.강진혁은 차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어딘가를 응시하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다시 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데려다줄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오빠는 4년 만에 돌아왔잖아요. 이 도시도 많이 변했을 텐데, 길 잃을지도 몰라요.” 강진혁은 미소를 살짝 지었다. “그래?” 나는 고개를 숙이고 발끝만 바라봤다. 그의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내 부은 눈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뇨. 우리 둘이 머물러야죠. 조명 조정 효과를 보려면 밤이 가장 적합하니까, 통근하느라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 여기서 밤새거나 자정까지 일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에요.” 내가 설명하자 이소희가 나를 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언니는 정말 섬세해요!” “혹시 남자 친구가 있다면 미리 얘기해둬요. 요즘 좀 바빠서 데이트 시간 뺏길 테니까.” 나는 웃으며 덧붙였다. 이소희도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달콤한 행복이 가득했다. “괜찮아요, 이번 기회에 그 사람을 좀 시험해보려고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일하러 가요. 시간을 절약하려면 문제의 원인을 빨리 파악해서, 상대방이 도착하면 바로 해결할 수 있게 해야 해요.” 이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면을 꺼냈다. “제가 A구역, D구역, F구역을 맡을게요.” “나머지는 내가 맡죠.” 나는 비록 팀장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이소희와 똑같이 발로 뛰며 일을 해야 한다.다음 날, 우리는 먼저 시공사에서 파견한 두 명과 만났다. 한 사람은 한남석이었고, 다른 사람은 오돌쇠였다. 오후에는 조명 공급업체에서 온 두 명과 만났다. 한 사람은 성이 장, 다른 사람은 성이 김이었다. 우리는 함께 찾아낸 문제를 바탕으로 먼저 토론을 한 후 현장 조사를 진행했다. 결국 모두가 동의한 결론은, 사용된 조명 자체나 시공에는 문제가 없고 조명 조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었다.계약서에 따르면 조명 조정은 조명을 공급한 업체의 책임이었다. 김 기사님은 즉시 회사에 연락했고 나에게 답변을 주었다. “조명 조정 기사 두 분이 내일 오후에 도착할 겁니다.”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좀 더 빨리 오게 할 수는 없나요?” 비록 한 달의 시간이 남아있긴 했지만 조명 조정은 세심한 작업이었다. 한 군데의 조명만 해도 여러 번 조정해야 할 수 있고, 이 놀이공원의 조명은 수만 개에 달하니까, 속도를 내지 않으면 절대 기한 내에 끝낼 수 없었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최소한 강
넷째: [예쁜 아가씨, 정말 유형이랑 헤어졌어?]일곱째: [형수님 화내지 마세요. 저희가 대신해서 그 녀석 혼내줄게요.] 둘째: [지원 씨, 언제 시간되면 유형이랑 같이 밥 한 끼 합시다.] 다섯째: [나도 참가할래. 형수님이랑 유형이 형이 잘 풀리도록 꼭 내가 도와줄게.] 첫째: [너희들 그만 떠들어.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잖아. 왜 다들 같이 난리야?]나는 이 메시지들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이 그룹에는 총 여덟 명이 있었다. 말한 사람들 외에도 강유형, 나, 그리고 신지태가 있었다. 신지태는 유일하게 말이 없었지만 나와 가장 친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오빠, 대체 다들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이 그룹에서 강유형은 셋째, 신지태는 여섯째였다. 원래라면 강유형처럼 그도 나를 형수라 불러야 했지만, 내가 그와 처음 알게 됐을 때는 아직 강유형과 명확한 관계가 아니었다. 그때 이미 강유형과 의형제를 맺었고, 나는 그때부터 그를 오빠라 불렀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그를 오빠, 또는 지태 오빠라 부른다.신지태는 즉각 답장을 보냈다.[유형이가 인스타에 글 올렸어, 못 봤어?]그가 단톡방 메시지를 봤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나랑 강유형 사이의 일을 알고도 말하지 않은 것 뿐이다.그의 답장을 보고 나는 곧바로 인스타를 열었다. 강유형이 올린 사진은 갓 꺾은 붉은 장미 한 송이였다. 문구는 이랬다.[역시 붉은 게 예쁘네.]내가 흰 장미를 좋아한다는 걸 모든 이들이 알고 있었다. 그가 이런 글을 올린 건, 우리 사이를 아는 사람들에게 내가 더 이상 그가 원하는 ‘장미’가 아니라는 걸 알리려는 의도였다. 그가 전화로 남긴 그 차가운 말들을 떠올리며, 나는 그가 조나연과 함께하려는 의사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 거라고 생각했다.단톡방 사람들은 여전히 내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대답해야 했으니, 곧장 강유형의 인스타
신지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놀이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얼른 그를 따라갔다.“단톡방은 왜 나간 거야?”그가 걸으면서 내게 물었다.“네 친구들이 모여있는 단톡방이잖아. 내가 거기 남아서 뭐해. 오히려 내가 거기 남아 있으면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고 있을 텐데.”게다가 강유형도 단톡방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다들 말조심해. 내 여보가 여기 있으니까.]여보라는 호칭에 나는 그 문자를 한참 빤히 보았다. 너무 행복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으니까.“그런 걸 다 신경 쓰고 있었어?”신지태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지태는 킥보드 앞에 멈춰 섰다.“탈 줄 알아?”“응, 알아!”내가 대답하자마자 신지태는 킥보드를 당기더니 타면서 빙빙 돌았다.“어라? 정말 재밌잖아?”지금 신지태의 모습은 세 살배기 어린아이 같았다.그가 신나게 킥보드 타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벌써 두어 바퀴 돌고 온 신지태가 나에게 말했다.“정말로 강유형이랑 헤어지려고?”나는 옆에 있던 기둥에 몸을 기대었다.“나 결벽증 있는 거 기억 안 나?”신지태는 또 한 바퀴 돌고 왔다.“이렇게 쉽게 놓아주는 게 오히려 너무 봐주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난 늘 자비로웠어!”내 말에 신지태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킥보드를 멈추었다.“어제 네가 단톡방을 나가고 나서 다들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알아?”“알고 싶지 않아.”난 직설적으로 답했다.그러나 신지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다들 네가 너무 쉽게 강유형 포기했다고 했어. 네가 강유형을 뼛속 깊이 사랑하지 않아서 쉽게 포기한 거라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뭐 어쩌면 그럴지도.”“유형이가 단톡방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알아?”신지태는 느긋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나는 2초간 생각해 보았다.“단톡방을 나갔겠지.”신지태는 나를 향해 엄지를 척 들었다.“와, 정말이지 이런 부분에선 둘이 아주 잘 맞는다니까.”“아니, 지금 강유형에게
‘진정우?!'‘택시 운전기사가 아니었나? 언제부터 내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조명 기사가 되었지?!'그 순간 나는 헛것을 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진 기사님, 이분은 윤 팀장님이세요!”김석민이 간단히 소개했다.진정우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윤 팀장님.”그는 마치 나를 처음 만나는 듯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나는 의자에 앉은 상태였기에 나의 각도에선 날렵한 그의 턱선이 보였다. 그리고...나도 모르게 자꾸만 생각났던 그 섹시한 목울대로 보였다.이소희는 팔꿈치로 나를 툭툭 쳤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었다.그의 손과 나의 손이 겹쳐지고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럼 윤 팀장님께선 식사 마저 하세요. 전 현장으로 먼저 가 있을게요.”“아니요. 괜찮아요. 같이 현장으로 가요.”나는 바로 걸음을 뗄 생각이었지만 진정우는 움직이지 않았다.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김석민을 보았다.“석민 씨, 점심은 드셨어요? 전 아직 점심을 먹지 못해서 그러는데 혹시 이 근처에 맛집이 있을까요?”김석민은 웃으며 대답했다.“네, 전 먹었어요.”이내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여긴 음식 배달도 가능해요.”나는 그 눈빛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지라 이소희에게 말했다.“소희 씨, 진정우 씨에게도 주문해주세요.”“아, 네.”이소희는 간단히 대답한 후 얼른 핸드폰을 들며 물었다.“진정우 씨는 뭐 드시고 싶으세요? 쌀밥, 면, 고기 중에서 뭐가 드시고 싶으세요?”진정우는 손을 들더니 내가 절반 먹다 남긴 음식을 가리켰다.“이거랑 같은 거로 주문해주시면 돼요.”내가 먹고 있던 것은 매운 소고기 칼국수였고 이소희가 주문해준 것이었다. 그러나 진정우는 매운 걸 잘 먹지 못했던지라 매운 소고기 칼국수는 그에게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와 같은 것을 주문해달라고 하다니.“네, 이 칼국수는 여기 오면 꼭 먹어봐야 하는 음식이에요. 진정우 씨 입맛이 저희 윤 팀장님이랑 같은 줄은 몰랐네요.”이소희는 중
아는 사이라도 답한다면 이소희는 분명 귀찮게 말을 더 많이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진정우의 사이는 더 어색해지게 된다.게다가 진정우의 방금 그 모습은 꼭 나와 아는 사이로 보이길 바라고 있지 않았다. 내가 그와 아는 사이임을 아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모르는 사이에요.”나는 부인했다.“그럼 어떻게...”이소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나는 서둘러 말했다.“그냥 맞혀본 거예요.”이소희는 음식을 별로 먹지 않았다. 모든 신경이 진정우에게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평소에 밥을 아주 잘 먹었다. 심지어 오늘 주문한 음식은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치킨까스 덮밥이었다.잘생긴 남자 앞에서는 제일 좋아하던 음식마저도 찬밥신세가 되었다.“맞혀본 거라고요?”이소희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끝까지 알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언니, 그런 추측은 어떻게 하신 거예요? 진정우 씨 얼굴에 쓰여 있던가요?”나는 정말로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이소희는 분명 이상한 오해를 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던 순간 나의 눈에 진정우의 가방에 달린 키링이 들어왔다.작고 하얀 토끼 모양이었고 아주 귀여웠다.“그게.”나는 얼른 키링을 보며 말했다.“저걸 봤거든요. 저거라면 충분히 증명되지 않을까요?”“저게 뭘 증명할 수 있는데요?”이소희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상남자 분위기 풀풀 난다는 남자가 저런 아기자기한 인형을 가방에 달고 다닌다는 자체가 이상하지 않아요?”나는 옆에 있던 밀크티를 들어 두 입 마셨다.‘을, 달아!'이것 또한 이소희가 주문해준 것이었다.“소희 씨, 다음엔 그냥 과일 주스로 부탁해요.”나는 바로 이소희에게 말했다.이소희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진정우 가방에 달린 키링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지원 언니 말은, 저 인형이 어쩌면 여자친구가 준 인형일 수도 있다는 말이네요. 임자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말이에요.”내 뜻을 드디어 알아챈 듯한 그녀를 보며 나는 어깨를 토닥였다.
‘여자친구?'‘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랑 맞선 보고 혼인신고 하려고 했으면서 벌써 여자친구가 생겼다고?'맞선 보자마자 나와 혼인신고를 하자고 했던지라 급하게 여자가 필요해 보여 나는 바로 거절했다. 그랬기에 어쩌면 이미 다른 상대를 찾았을지도 모른다.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더는 그를 피하거나 걱정할 것 없었으니까.다시 걸음을 옮겨 쓰레기 분리한 뒤 한쪽에서 그를 기다렸다.이소희는 2분도 지나지 않아 다가왔다. 그녀는 결국 치킨까스 덮밥을 전부 먹어치우지 않았다. 아마도 첫눈에 반한 남자에게 여자친구가 있다고 하니 입맛이 사라졌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하...”이소희는 오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좋은 남자는 전부 다른 사람의 것인가 봐요. 저한테는 꼬셔볼 기회조차 없네요.”그녀의 말에 나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소희 씨, 그래도 여자로 태어난 걸 어머니한테 고마워하세요. 만약 남자였으면 소희 씨는 아주 유명한 카사노바가 되었을 거예요.”말을 마치자마자 진정우가 다가왔다. 그는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하의는 작업 바지였으며 발목까지 올라오는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걷는 자세마저 좋아 마치 걸어 다니는 호르몬 같은 기분이었다.“역시 잘생겼어요!”이소희는 감탄했다.“언니, 진정우 씨 정말로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고 잘생긴 것 같아요. 저 품에 한 번만 안겨본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나는 손을 들어 이소희의 머리를 톡톡 쳤다.“그런 상상은 그만하는 게 좋을 거예요.”“언니, 도대체 어떤 여자가 저런 완벽한 남자의 애인인 걸까요? 저 정말 너무 궁금해요!”이소희는 진정우에게 푹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저야 모르죠. 직접 물어봐요.”나는 말하면서 진정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비록 진정우는 갑이었지만 조명을 담당하고 있었던지라 나는 여전히 을의 입장에서 그의 비위를 맞춰줘야 했다. 여하간에 진정우가 조명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다면 골치 아파질 사람이 나였으니까.이소희는 허둥지둥 나를 따라왔다. 진정우와 한
“여긴 공항이야, 사람들이 많고 아이들도 있는데.” 진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고 있어.”“그런데도...” 내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러자 진정우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하고 싶어.”그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강유형을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질투하는 거겠지.진정우는 강유형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그런 걸까?그 생각이 들자 나는 결심하고 눈을 감았다. 심장은 요동치며 공항 대기실에서 진정우의 입맞춤을 기대했다.하지만 그의 입술이 다가오는 대신 내 손에 무게감이 느껴졌다.눈을 뜨고 보니 내 손에 작은 가방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이게 뭐야?”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진정우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내가 열어보라고 손짓했다.내가 의아한 마음으로 가방을 열자 그 안에는 두 장의 카드와 하나의 증명서가 들어 있었다.그 카드와 증명서는 그가 전해주고 싶었던 것들이었다.“이게 무슨 의미야?” 나는 다시 물었다.진정우는 녹색의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이건 내가 군 복무를 마친 증명서야. 그리고 이건 내 열정이 담긴 헌혈 증서야. 이 카드들은 내 전 재산이야.”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전 재산을 보여주는 장면이 떠올랐다.진정우는 내게 재산을 넘기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신념까지도 함께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특히 빨간 헌혈 증서를 보자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이걸 왜 준비한 거야?” 나는 조금 울컥하며 물었다.“너에게 주는 믿음이야. 이게 사랑 보험보다 더 실용적이야.”진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강유형과 사랑 보험에 가입했던 사실을 안 것 같았다.하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내게 주는 것이 모든 것 같았다.“이 두 개는 내가 가질게. 하지만 카드는 네가 갖고 있어.”나는 그가 준 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고 돈에 욕심이 없다. 만약 돈에 눈이 먼 여자라면 나는 강유형과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진정우는 카드를 받지 않고 조금 난처한 듯 말했
“네, 누구세요?”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무심코 강유형을 쳐다보았다.그는 나를 보지 않고 혼자서 멀리 있는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저는 하트시그널 보험사의 A8338번 직원입니다. 4년 전, 윤지원 씨와 강유형 씨가 저희 회사 사랑 보험에 가입하셨고 이제 보험 만기일이 다가와 관련 정보를 확인하려고 연락드렸습니다.”이 말을 듣고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본능적으로 진정우를 보았다.그는 내 옆에서 자리를 피하고 내가 전화를 받을 때는 멀리 떨어져 앉았다.그는 내게 충분한 개인 공간을 주고 있었다.진정우는 정말 세심하다. 나에게 필요한 안전감도, 여유도 모두 제공해 주고 있었다.“실례지만 두 분 지금 연애 중인가요, 아니면 결혼하셨나요?” 상대방이 조심스레 물었다.그 말에 나는 다시 강유형을 쳐다보았다. 그는 전화를 받고 있었고 표정은 매우 심각해 보였다.“지원 씨?” 상대방이 내 대답을 기다리며 다시 물었다.나는 침을 삼키는 동작을 하며 대답했다. “네, 듣고 있어요. 저희... “‘이미 헤어졌어요’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강유형이 갑자기 나를 바라봤다.그 순간, 나는 피할 틈도 없이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우리는 그렇게 눈을 마주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원 씨?” 상대방이 또 나를 부르며 물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어봤다. “왜 남자 쪽은 묻지 않나요?”“묻긴 했습니다. 다른 동료가 강유형 씨와 연락 중입니다.” 그의 대답을 들으니 강유형 역시 이 전화를 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세상엔 정말 재밌는 일이 많다.나는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우리는 헤어졌어요.”“확실한가요?” 상대방의 말투가 불쾌하게 들렸다.나는 강유형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진정우를 쳐다보며 손에 낀 반지를 살펴보았다.“저는 이미 결혼했어요.”상대방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원 씨. 만약 강유형 씨도 같은 답을 하셨다면, 이 사랑 보험 계약은 보험 규정에 따라
내가 그런 말을 했지만 이건 사적인 일이 아닌가?진정우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 걸 알아차린 듯 바로 설명해 줬다. “내가 그 사람한테 말한 거야.”“아, 그렇구나.” 나는 대답하고 계속 죽을 먹었다. 그런데 두어 숟갈 먹고 나서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너 허 대표님하고 그렇게 친해? 내가 대신 휴가를 부탁했더니 대표님이 그냥 허락하고, 오히려 공손하게 나한테 말까지 했잖아?”진정우는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그렇게 친한 건 아니야.”“친하지 않다고? 내가 보기엔 마치 네가 그 사람의... 대표님 같아.”진정우가 한마디만 하면 허진호는 절대 거절할 리가 없어 보였다.“비슷한 거지.” 진정우가 의외로 그렇게 대답했다. “허 대표님이 나한테 새 제품을 개발해달라고 부탁하고, 내가 돈을 벌어줘야 하니까내가 말하면 거절할 수 없어.”대단하네!나는 마음속으로 존경을 표하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역시 자신감 넘치게 말한다. 이게 바로 진짜 실력이지.“우리 늦지 않았어?” 나는 밥을 다 먹고 물어봤다.“괜찮아. 늦으면 그냥 항공편 변경하면 돼.” 진정우는 정말 나를 방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이해가 안 돼서 물었다. “왜 그렇게 급하지 않아? 나 좀 재촉해줘도 될 텐데.”“네 마음대로 하게 하고 싶어.” 진정우가 또 닭살이 돋는 멘트를 하자 나는 당황해서 얼른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불만을 털어놨다. “어제 미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내가 준비했을 텐데.”“어제... 내가 말할 기회가 없었잖아.” 진정우의 말에 나도 순간 뜨끔하면서 얼굴이 빨개졌다.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진정우는 살짝 웃으며 내가 당황한 모습을 보며 평온하게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 천천히 해. 부족한 것 있으면 가서 사면 돼.”“일찍 말했으면 내가 준비 안 했을 텐데.” 내가 그에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진정우는 화내지 않고 또 한마디 했다. “근데 나는 네가 물건 정리하는 모습 보는 게 좋아.”“
“왜 안 받아?” 내가 무심코 물었다.“받을 거야.” 진정우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너는 자지 말고 일어나서 씻고 아침 먹어.”나는 깜짝 놀랐다.“아침 벌써 준비했어?”나는 그가 내 옆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정우는 이미 아침을 다 준비하고 내가 일어나지 않자 다시 침대에 돌아와서 나와 함께 공부한 거였다. 역시 뛰어난 사람은 항상 뒤에서 묵묵히 노력하는구나.“응, 내가 계란 죽을 끓였어. 일어나서 좀 먹어.” 진정우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사랑받는 느낌은 정말 좋다. 마치 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진다.진정우는 전화를 받으러 나갔고 나는 손을 이불에서 빼내며 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고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면서 한정판이라고 묘사했다.그리고 다시 SNS를 놀다가 잠시 후에야 일어났다. 그런데 진정우의 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별 신경 쓰지 않고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화장실에 들어가서야 나는 안리영이 준 약이 반 통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 전에 약을 4분의 1만 썼던 것 같은데 그럼 진정우가 사용한 건가? 언제였지?혹시 내가 자고 있을 때?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왜 아직도 안 씻었어?” 진정우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어색하지 않게 하려면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게 제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말이 나와버렸다. “너 기다리느라 그래.”진정우가 잠깐 멈칫하다가,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 분명, 내 말이 그에게 어떤 자극을 준 거였다. 나는 더 이상 아침에 뭔가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일부러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서둘러 씻고 그에게 말했다. “빨리 죽 끓여 놓고 나오는 대로 밥 차려줘.”“안 늦었어.” “지금 몇 시인데 아직도 안 늦었다고 해?” 내가 그를 비꼬며 말했다.“10시 비행기야, 시간 충분해.” 진정우의 말에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나는 원래 거울 속에서 그를 보고 있었는데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그
“알았어.” 진정우는 여전히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이 터졌다.“이제야 네가 왜 서른이 넘도록 연애를 안 했는지 알겠어. 네가 너무 재미없잖아.”“너도 내가 재미없다고 생각해?”그는 가볍게 내게 물었다. 연애라는 부분에서 그는 약간 둔한 면이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말했다.“내 말은 네가 여자 마음을 잘 달래주는 방법을 모른다는 뜻이야.”그는 몇 초 동안 조용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내 생각엔 달래는 건 속인다는 뜻이야.”그의 참신한 대답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럼 내가 널 달래줘야겠어?”진정우가 다시 물었다. 어떤 여자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다정함은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진정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나는 과거 강유형이 나를 대했던 방식을 떠올리며 말했다.“아니, 지금처럼 해. 난 너의 방식이 좋아. 너는 정말 특별하니까.”그의 품에 더 깊숙이 기대며 덧붙였다.“내가 프러포즈하면 받아줄 거야?”진정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말했다.“안 하면서 뭘 물어?”그 순간,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불 안에서 내 손을 꺼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만지며 말했다.“윤지원, 나와 결혼해 줄래?”순간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네 프러포즈이야?”“아니, 완전한 건 아니지만 맞기도 해.”그의 애매한 대답에 나는 그를 살짝 때리고 싶었다. 솔직히 내가 처음으로 프러포즈를 받을 거라고 상상했던 장면은 이런 게 아니었다. 한때 나는 내 인생 첫 프러포즈는 강유형이 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진정우였다.그 말을 들으니 얼마 전 강유형이 나를 위해 준비한 놀이공원 프러포즈 이벤트가 떠올랐다.나는 가지 않았지만 이후 몇몇 네티즌이 사진을 찍어 온라인에 올렸다. 그들은 그걸 단순히 오픈 이벤트의 리허설로 생각했겠지만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
온몸이 이불에 휩싸인 채 침대로 돌아오고 나서야 내가 괜히 이상한 상상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한 번 더 군인 출신인 진정우의 자제력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도 실감했다.그는 단순히 나를 씻겨준 것뿐이었다. 말 그대로 그냥 깨끗하게 씻겨준 것.이미 그의 능력을 확인했지만 그래도 승부욕이 발동해 장난스럽게 말했다.“진정우, 너 혹시... 안 되는 거 아니야?”이 말은 남자에게 치명적인 모욕이다. 어지간한 남자는 이런 말을 듣고 참을 수 없겠지만 진정우는 보통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내 어깨를 가볍게 누르며 말했다.“얌전히 있어. 그리고 더 이상 애쓰지 마. 아무 소용 없으니까.”내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한 그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살짝 상처받았는데...”나는 일부러 힘없이 실망한 척하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그러자 그가 이불을 살짝 당겨 내 얼굴을 드러내며 내 볼을 살짝 문지르며 말했다.“내가 안 되는 게 아니고 네가 날 끌어당기지 못하는 것도 아니야. 단지, 내가 널 다치게 할까 봐 조금 더 기다리는 거야.”그의 말에 내 얼굴이 더 붉어졌다.“그럼 내가 너랑 가까워지기만 하면 다칠 것 같으면 너 평생 나한테 손도 안 댈 거야?”그는 입술을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응, 참아야겠지.”“...”나는 다시 이불을 덮어버렸다. 그러자 그는 이불째 나를 품에 안았다.“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그의 말에 내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그는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말했다.“조금만 쉬어. 나 샤워하고 올게.”분명 찬물 샤워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찬물 샤워하러 간다.”“...”정말 원칙 하나는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다. 자신이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나를 상처 주지 않으려는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나는 그가 돌아서는 모습을 바라보며 불렀다.“진정우.”“응?”“너, 진짜 최고야.”그리고는 창피해서 혀를 쏙 내밀고 이불 속으로 숨었다. 그러자 그가
진정우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는 내가 모든 원칙을 포기해도 괜찮은 사람이니까.”그는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평범하게 말했지만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 자체로 깊은 사랑을 담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직접 꺼내지 않아도, 문장 하나하나가 사랑이었다. 나는 코끝이 찡해졌고 전을 먹으며 입안 가득 찬 상태로 웅얼거렸다.“진정우, 이리 와봐.”“왜?”그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오라면 오라니까.”나는 괜히 고집을 부렸다. 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와 앉았다. 소파에 앉자마자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는 잠시 놀란 듯 멈췄고 내가 말했다.“네 어깨에 기대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부드러운 웃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진정우가 나를 침대에 눕히며 물었다.“오늘 여기서 잘까, 아니면 네 방에서 잘까?”“여기서 잘래!”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문득, 밤마다 푸쉬업을 하고 찬물 샤워를 하던 그가 떠올랐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근데 오늘 밤에는 푸쉬업 금지야.”그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일부러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얘긴 다시 꺼내지 마.”나는 그의 품에 안기며 그의 허리를 살짝 감쌌다.“안 하면 안 꺼낼게.”진정우의 목젖이 한 번 크게 움직였다.“장난치지 마.”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못 참겠어?”나는 한층 대담하게 물었다. 진정우는 내 허리를 조심스럽게 잡으며 말했다.“장난은 이제 그만. 그리고 나를 더 자극하지 마.”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이듯 낮아진 목소리였다.“너도 원하고 있잖아.”나는 점점 더 직설적으로 말했다.“지원아...”그는 나의 손길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의 티셔츠 끝자락을 잡아 올리며 안으로 파고들었다.“지원아.”그의 목소리는 완전히 잠겨 있었다. 나는 그의 귀에 바짝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난 이제 다 나았어.
이 상황, 얼마나 민망했을지 상상이 간다. 물론 진정우는 예외였다.“잠시만요.”진정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나를 소파에 앉혔다. 그는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천천히 물티슈를 꺼내 내 손을 닦아주었다.“천천히 먹어. 죽이 좀 뜨거우니까 급하게 먹지 말고.”문가에 서 있는 강진혁은 들어오기도, 물러서기도 난감해 보였다. 그 어색한 분위기가 나까지 불편하게 만들었다.“내가 알아서 먹을게.”내 말은 진정우에게 얼른 강진혁을 챙기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진정우는 자리를 뜨기 전에 모든 음식 포장을 풀고 식기를 내 앞에 정갈히 놓아주었다.문가에 서 있던 강진혁은 그야말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애정 행위를 강제로 목격한 셈이었다.아마 나를 짝사랑하는 그의 입장에선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강 실장님, 무슨 일이 신가요?”진정우는 문가로 걸어가며 강진혁에게 물었다.강진혁은 병실 밖으로 나갔고 그가 진정우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나는 듣지 못했다.진정우는 약 3분 후에 돌아왔는데 그의 평온한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가 표정을 드러내지 않자 궁금증이 더해졌다. 그래서 나는 죽을 먹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야?”“별일 아니야.”그의 대답은 꽤 건조했다. 아마도 그 자신도 느꼈는지 덧붙였다.“나를 스카우트하려고 하더군.”“스카우트? 어디로? KS그룹?”강진혁은 아직 총괄 감독에 불과하다. 스카우트 같은 건 인사 부서나 그룹 회장이 해야 할 일 아닌가?혹시 이미 강유형의 자리를 대신할 준비를 하고 있는 걸까?만약 그렇다면, 아까 그가 내게 한 말은 다 무슨 뜻이었을까?내게 심리적 준비를 시키려는 걸까, 아니면 나를 떠보려는 걸까?“어디로 간다는 얘기는 없었고 그저 내 생각을 물어봤어.”진정우는 덤덤하게 답하며 의자에 앉았다. 나는 죽을 휘휘 저으며 물었다.“뭐라고 대답했는데?”“고려하지 않는다고 했어.”그의 대답은 직설적이고 단호했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왜 웃어?”“너무 솔직하고 귀여워서.”칭찬을 듣자
“오빠, 강유형은 성인이에요. 본인이 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죠.”나는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했다.강유형을 회사에서 내보내든, 관계를 끊든, 그건 전부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나도 알아. 하지만 아버지랑 그렇게 싸우는 걸 보니 속이 타더라. 그리고 그가 회사에서 나가면 회사에도 영향이 클 거야.”강진혁은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오빠가 있잖아요?”그의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지원아, 난 한 번도 회사를 관리할 생각을 해본 적 없어. 그러지 않을 거였으면 애초에 회사를 떠나지도 않았겠지.”그가 진심인지 아닌지는 본인만 알겠지만 나는 굳이 따지지 않았다.다만 내 생각을 덧붙였다.“회사의 일은 삼촌께서 알아서 계획하고 계실 거예요. 강유형이 떠난다고 해서 회사가 멈추는 건 아니죠.”나는 이성적으로 말하며 마지막에 한 마디를 더했다.“세상은 누구 없어도 돌아가게 돼 있어요.”강진혁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하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생각이 짧았던 거야.”“오빠, 아마 너무 걱정되니까 그런 거겠죠.”나는 그의 체면을 세워주는 말을 덧붙였다.강진혁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원아, 네가 4년 전과는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4년 전?그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4년이라는 시간은 아이도 어엿한 청소년으로 성장할 만큼 충분한 시간이다.“그걸 성장이라고 하죠.”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강진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맞아. 네가 정말 많이 컸다, 우리 꼬마 지원이.”그의 말에 가슴 한쪽이 찡했다.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내가 강가에 들어왔을 때, 강유형과 강진혁은 종종 나를 이렇게 부르며 장난스럽게, 때로는 애정을 담아 나를 놀리곤 했다.그런데 그 말을 들은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오빠, 이런 문제는 본인들이 알아서 해결하게 놔두세요. 너무 관여하면 오히려 안 좋아요.”그의 ‘꼬마 지원이'라는 말에 잠시 감정이 흔들렸지만 나는 결국 한마디 덧붙였다.강진혁은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