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나는 깊게 잠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푹 자고 있었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이 깼다. 말하는 사람은 진정우가 아니었고, 지방 사투리가 섞인 여성의 목소리였다. 소리만 들어도 그 여자가 젊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린 소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청아하지만 중년 여성의 목소리는 대개 무겁고 거칠다. 나는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민감한 편이지만, 10년을 사랑했던 남자가 사실은 쓰레기였다는 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람을 잊는다는 건 더 이상 그를 떠올리지 않는 거라는데, 아직 나는 그게 안 된다. 강유형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도 원망 때문인지 자꾸 그가 생각난다.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귀를 기울여 밖의 소리를 들었다. “할머니, 정우 씨는 어디 있어요?” 여자가 물었다. “갔어. 아침 일찍 나갔지.” 할머니는 무언가를 씻고 있는 듯, 물소리가 흘러나왔다. “갔군요. 아직 자고 있는 줄 알았어요.” 여자의 목소리엔 웃음이 섞여 있었다. “오향설, 정우가 일어났는지 안 일어났는지 너랑 무슨 상관이야? 정우는 널 좋아하지 않으니 괜한 헛수고하지 마.”할머니는 정말 직설적이었다. 일반 사람이라면 버티지 못했을 텐데 문밖의 그 과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 남자는 밀당을 좋아해요.” 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여자 꽤 자신만만하네.’“난 정우가 너를 낡은 헝겊처럼 내팽개쳤다는 것만 알아.” 할머니는 정말 한 치의 여유도 없었다. “할머니, 나이 드시더니 뭘 모르시네요.” 오향설은 약간 화가 난 듯했다. “난 부끄러움을 알고, 사람은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아.” 할머니의 말에 나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할머니, 우리 이웃끼리 왜 이러세요? 제가 그동안 할머니도 많이 도와드렸잖아요. 도와주지 못할 망정 왜 저를 몰아붙이세요?” 오향설은 도덕적 압박을 시도했다. 할머니는 그런 그녀에게도 전혀 개의치 않
나는 컵에 물을 받아 양치질을 했다. 오향설을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지만 그녀는 단 한순간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다시 발끝에서 머리까지 나를 샅샅이 훑었다. “지원아, 이분은 오향설이라고 해.” 할머니가 그녀를 소개했다. 나는 입안에 치약 거품을 가득 머금고 오향설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둥근 얼굴을 가졌지만 뚱뚱하진 않았고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얼굴에는 정성 들여 화장을 한 흔적이 뚜렷했다. “향설아, 이 사람이 네가 궁금해하던 지원이야. 내 말이 맞았지? 정말 피부가 물기 어린 것 같지 않니?” 할머니는 손으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오향설이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는 나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듯 살짝 주눅 든 표정을 지었지만 입으로는 여전히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나도 저 나이 때는 피부 좋았어요. 나이 들어서야 이렇게 된 거죠.” 할머니는 입을 삐죽거렸고 오향설은 그런 할머니를 흘겨보며 눈싸움을 했다. 두 사람의 묘한 신경전이 마치 코미디 한 편을 보는 듯했다. 내가 양치질을 마치자 오향설이 입을 열었다. “지원 씨, 여긴 친척 댁에 온 건가요, 아니면 놀러 온 건가요?” “놀러 왔어요.” 나는 물을 틀고 칫솔을 헹구었다. “혼자 왔어요? 남자친구는 없고요?” 오향설의 질문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네, 솔로예요!” 내 대답에 그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정우가 지원이한테 반해서 나한테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했어. 오향설, 너도 인정해야 하지 않겠어?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린다고.” 할머니는 여전히 힘이 넘쳤다. 오향설의 입꼬리가 살짝 떨리더니 결국 이렇게 말했다. “개구리가 아무리 천상계의 백조를 꿈꿔도, 백조가 거들떠봐야죠.” 그녀는 질투심에 차서 말하긴 했지만 내가 백조라는 것을 인정했다. 할머니는 나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지원아, 네가 꿈에서 진정우랑 결혼하려고 했다고 했잖아, 그치?” 나는
고개를 들자 각진 얼굴에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진정우가 눈에 들어왔다.그는 나를 붙잡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들고 있던 수박도 받아주었다. 이런 장면은 마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연출인데 지금 내 눈앞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나를 바로 세워주고는 손을 놓았지만 내가 살짝 움직이자마자 발목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어서 그의 팔을 잡으며 아프다고 말했다. 그는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내 희고 가는 발목이 이미 빨갛게 부어오른 것을 보았다. “발목을 삐었습니까?” 진정우는 나와 아주 가까이 있었고, 그의 낮고 깊은 목소리는 특별히 매력적이고 듣기 좋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다음 순간 그는 수박을 내 손에 쥐여주고는 나를 번쩍 안아올렸다. 강유형과 오랜 시간을 함께 했을 때조차 그는 이런 식으로 안아준 적이 없었는데, 진정우가 갑자기 이렇게 나를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리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심지어 코끝에 땀까지 맺혔다. 나는 긴장하거나 흥분하면 코끝에 땀이 나는 사람이다. 이때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웃집 사람들과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이런 친밀한 남녀의 행동을 보는 것이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진정우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나를 단호한 걸음으로 품에 안고 마당으로 돌아왔다. 문을 들어설 때, 나는 오향설이 프라이팬을 들고 서서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어머, 안고 들어오네? 두 사람 진도가 꽤 빠른걸?” 집주인 할머니는 우리를 보면사 두 눈을 반짝이며 장난스레 말했다. “다쳤어요.” 진정우는 짧게 대답하며 나를 마당에 있는 돌 의자 위에 내려놓은 후 스스로 무릎을 꿇고 내 발에서 슬리퍼를 벗겼다. 그는 내 발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그의 손은 차가웠고, 그의 손바닥이 내 발을 감싸자 묘한 감각이 발바닥에서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발가락을 오
얼마 전, 강유형도 내 발을 주물러 준 적이 있다. 그때는 감동을 느꼈지만 지금과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손길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우가 내 발을 다 주물러 줄 때쯤, 밖에서 할머니가 소리치며 누군가를 꾸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똑똑히 들어, 내 사람한테 누가 해코지하면 내가 가만 안 있을 줄 알아! 너네 조상 대대로 내가 저주할 거야!” “무슨 일이에요?” 나는 조용히 물었다. 진정우는 내 발을 그의 무릎에서 내려 다른 돌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일어서는 순간 나는 그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걸 보았다. 나는 더워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의 다음 말이 그게 아님을 알려주었다. “앞으로 여기서는 치마 좀 덜 입어요.” 나는 고개를 숙여 내가 입고 있는 치마를 보았다. 짙은 파란색 실크로, 몸에 딱 달라붙는 데다가 옆이 살짝 트여 있었다. 내가 앉아 있을 때, 치마 틈이 위로 올라가서 하얀 허벅지가 드러나 있었다. 방금 진정우가 내 발을 주물러 줄 때 아마 뭔가를 봤을 것이다... 나도 얼굴이 약간 붉어졌지만 지는 건 싫어하는 성격이기에 태연한 척하며 물었다. “내가 치마 입는 게 거슬려요?” 진정우의 목젖이 빠르게 두 번 움직이더니, 그는 말없이 성큼성큼 마당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할머니의 꾸짖음도 멈췄다. 나는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 발목을 들고 폴짝폴짝 뛰며 문가로 갔다. 거기서 나는 진정우가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것을 보았고, 그의 앞에는 소문의 주인공인 오향설이 서 있었다. “당신 행동은 고의적인 상해예요. 신고만 하면 법적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진정우는 땅에 흩어진 기름 얼룩을 가리켰다. 바로 내가 아까 미끄러진 그 자리였다. 보아하니, 내가 발을 헛디딘 것은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의 짓이었다. “내가 그랬다고 어떻게 증명해요? 본 사람 있어요?” 오향설은 목소리를 높였다. 집주인 할머니가 말했다. “벌써
이렇게 노골적인 말은 평생 처음으로 해봤다. 진정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차갑게 대답했다. “착각한 겁니다.” “...” 그는 뒤돌아 서서 수박을 잘랐다. 한 조각 한 조각, 마치 줄을 맞춰 대기하는 병사들처럼 가지런하게 접시에 올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그의 방을 다시 한번 엿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왜 안 먹고 있어? 보고만 있으면 배가 부르니?” 할머니가 다가와 나를 놀렸다. 이 할머니는 참 대단한 분이다. 욕할 때는 양손을 허리에 얹고, 남을 걱정할 때는 자상하며, 농담을 할 때는 능청스럽게 내뱉는 재치까지 갖추셨다. “할머니를 기다렸어요. 저를 위해 속 풀이해 주시느라 고생하셨잖아요.” 나는 장난스럽게 가장 큰 수박 조각을 할머니에게 내밀었다. 할머니는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 한 입 베어 물었다. “달다. 하지만 나는 당뇨가 있어서 많이 먹으면 안 돼.” 나도 수박을 먹기 시작했지만 진정우는 방으로 돌아가더니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저녁 시간이 되자 그는 또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에게 저녁을 먹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는 너무 빨리 가버려서 입도 떼지 못했다. 할머니가 옆에서 코웃음을 쳤다. “정우는 원래 굉장히 차가운 사람이야. 너한테만 저렇게 특별히 신경 써.” ‘나한테 어떻게 특별히 신경을 쓴다는 거지?’ 나는 묻지 않았지만 그가 내 발을 주물러 준 것이 효과가 있기는 했다. 밤새 자고 일어났더니 발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조용히 눈을 떴다. 마당 안은 너무도 고요해서 마치 사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민소매 슬립 차림으로 문을 열고 나가다가, 돌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 있는 두 사람과 눈이 딱 마주쳤다. 진정우는 내 모습을 몇 초 동안 바라보더니, 이내 급히 시선을 피했으며 귀마저 붉어졌다.나는 내 옷차림을 내려다보고,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려 하자 할머니가 정겹게 나를 불렀다. “지원아,
며칠 동안 이곳에 머물렀지만 할머니의 자식들이 찾아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오히려 할머니는 나와 진정우를 자신의 자식처럼 여기고 계신 것 같았다. 저녁에 잠들기 전 안리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제 돌아올 거냐고 묻기에 나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 작은 동네에 있는 동안 정말 행복했으니까. 부모님이 떠난 후로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휴가를 더 연장해서 이곳이 지겨워질 때까지 머물고 싶다고 말했다. “너 혹시 그 군인 오빠를 놓치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묻자 진정우와 몇 번의 짧은 만남 속에서 느낀 미묘한 설렘이 떠올랐다. “놓치기 싫다기보다는... 그 사람이랑 있을 때 심장이 활기차게 띠는 느낌이야.” “좋네, 우리 조 비서님의 회복력도 꽤 괜찮은데?” 안리영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안리영도 잠깐 침묵하더니 물었다. “강유형 그 나쁜 놈, 아직도 연락이 없어? 카톡도 하나 안 보냈어?” 나는 입술을 핥으며 조용히 대답했다. “.....응, 없어.” 안리영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 인간은 네가 평생 자기를 못 떠날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 나는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창밖의 달빛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번에는 강유형한테 보여줄 거야.” 안리영과 통화를 하며 잠들었고 다시 깨어났을 때는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전화는 끊어져 있었고 안리영이 남긴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이 세상에 누구도 누구 없이 살 수 없는 건 아니야.] 그렇다. 나는 강유형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을 거다. 며칠 동안 잘 먹고 잘 지냈으니까. 나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고 다시 자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휴대폰에서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이 새벽에 누가 메시지를 보낸 걸까? 눈을 뜨고 화면을 확인하자 순간 멍해졌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강유형이었다.[이제 그만하고 돌아
큰 문제? 얼마나 큰 문제인데? 나는 놀라지 않고 차분하게 물었다. “천천히 말해요, 무슨 일이에요?” 이소희는 상황을 설명해 주었는데, 대략 조명과 디자인 시안이 완전히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조명 자체의 품질 문제가 있거나, 시공 설치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문제를 이미 알고 있으면 관련 책임자를 찾아 해결하면 되잖아요. 내가 돌아간다고 해도 결국 그 일을 할 거예요.” 나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언니, 언니 제발 돌아와요. 저 혼자서는 정말 감당이 안 돼요. 요즘 대표님께서 무슨 생각인지, 매일같이 놀이공원에 와서 문제를 제기하는데, 그때마다 골치 아픈 일들이 생겨요. 저 정말 미칠 것 같아요.” 이소희의 목소리는 거의 울먹일 지경이었다. 강유형이 나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를 떠올리며, 혹시 일부러 이소희를 곤란하게 만들어 나를 압박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마음이 약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걸 싫어한다는 걸 말이다. “소희 씨가 먼저 처리해봐요.” 나는 여전히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가 이소희를 일부러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성장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계속해서 배우고 책임을 지면서 발전하게 된다. 나는 사직할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녀에게는 승진의 기회가 올 것이다. 그러니 그에 따른 능력도 갖춰야 했다. “언니, 저 혼자선 이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어요. 조명이 놀이공원의 핵심이잖아요.” 이소희는 여전히 나를 설득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몇 초 동안 생각한 끝에 나는 말했다. “문제 보고서를 보내고 현장에서 나랑 영상 통화해요. 가능하면 밤에 조명을 다 켜고 내가 상황을 보고 나서 결정할게요.” 이소희는 내가 정말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언니, 대표님과 마주하고 싶지 않은 거죠? 실은 저도 혼자 감당할 수 있다면 언니한테 이런 말을
확실히 그곳은 가장 높은 지점이었다. 나는 영상을 통해 조명 아래의 놀이공원을 내려다봤다. 전체적으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설계도에 있던 조명의 기본 색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원래 디자인에서는 조명 바탕색이 파란색에서 점점 변하는 그라데이션으로,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바다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온통 짙은 파란색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라데이션은 없었다. 색깔 자체는 짙고 강렬했지만 그 속에서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언니, 전체 모습은 이래요. 시공 쪽 문제인지, 아니면 조명 제조사에서 문제가 생긴 건지 모르겠어요.” 이소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공 팀이랑 제조사랑 이야기는 해봤어요? 그 사람들은 뭐래요?” 내가 물었다. “시공 쪽은 자신들이 요청대로 시공했다고 하고, 제조사도 우리가 요청한 대로 조명을 납품했다고 주장해요. 서로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해서, 도대체 어디서 문제가 생긴 건지 모르겠어요.” 이소희는 몹시 난감해 보였다. “지원 언니, 이 문제는 진짜 해결이 안 돼요. 언니도 이 프로젝트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잖아요.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거, 언니도 원하지 않잖아요?” 이소희는 나를 다시 설득하려고 했다. “알았어요, 돌아갈게요.” 이번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바로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곧 이소희가 보내온 드론 촬영 영상을 받았는데,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짐을 챙겼다. 아홉 시 비행기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지원아,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또 요가라도 하려고?” 할머니가 나를 보고 물었다. 며칠 동안 나는 시간이 나면 마당에서 요가를 하곤 했는데 할머니는 그럴 때마다 내 팔, 다리, 허리가 다칠까 봐 조심하라고 당부하셨다. “아니에요.” 나는 할머니 앞에 다가가 말했다. “할머니, 저 이제 가봐야 해요.” 할머니는 놀라며 물었다. “아니, 아직 며칠 더 있기로 하지 않았니?” “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