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그곳은 가장 높은 지점이었다. 나는 영상을 통해 조명 아래의 놀이공원을 내려다봤다. 전체적으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설계도에 있던 조명의 기본 색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원래 디자인에서는 조명 바탕색이 파란색에서 점점 변하는 그라데이션으로,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바다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온통 짙은 파란색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라데이션은 없었다. 색깔 자체는 짙고 강렬했지만 그 속에서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언니, 전체 모습은 이래요. 시공 쪽 문제인지, 아니면 조명 제조사에서 문제가 생긴 건지 모르겠어요.” 이소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공 팀이랑 제조사랑 이야기는 해봤어요? 그 사람들은 뭐래요?” 내가 물었다. “시공 쪽은 자신들이 요청대로 시공했다고 하고, 제조사도 우리가 요청한 대로 조명을 납품했다고 주장해요. 서로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해서, 도대체 어디서 문제가 생긴 건지 모르겠어요.” 이소희는 몹시 난감해 보였다. “지원 언니, 이 문제는 진짜 해결이 안 돼요. 언니도 이 프로젝트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잖아요.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거, 언니도 원하지 않잖아요?” 이소희는 나를 다시 설득하려고 했다. “알았어요, 돌아갈게요.” 이번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바로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곧 이소희가 보내온 드론 촬영 영상을 받았는데,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짐을 챙겼다. 아홉 시 비행기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지원아,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또 요가라도 하려고?” 할머니가 나를 보고 물었다. 며칠 동안 나는 시간이 나면 마당에서 요가를 하곤 했는데 할머니는 그럴 때마다 내 팔, 다리, 허리가 다칠까 봐 조심하라고 당부하셨다. “아니에요.” 나는 할머니 앞에 다가가 말했다. “할머니, 저 이제 가봐야 해요.” 할머니는 놀라며 물었다. “아니, 아직 며칠 더 있기로 하지 않았니?” “회
당구장.강유형이 큐대를 휘둘렀지만 공은 모두 빗나갔다.한편에서 신지태는 큐대를 닦으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윤지원이 아직도 너한테 답장 안 했어? 연락도 없고?”강유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신지태는 당구대에서 가장 까다로운 각도의 공을 겨냥해 큐대를 휘둘렀다. 쿵 소리와 함께 공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들어갔다.“보통 이러지 않잖아. 네가 그렇게 말했을 때도 별로 신경 안 쓴 것 같더니, 이번에는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지?” 신지태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강유형은 윤지원이 당구장에 와서 물어봤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 윤지원이 너한테 뭘 물었지?”신지태는 또 한 번 공을 넣더니, 멋지게 당구대에 걸터앉아 다른 공을 겨냥했다. 쿵 소리와 함께 이번에도 완벽하게 공이 들어갔다.“이미 말했잖아. 네가 조나연이나 임석진이랑 학교 다닐 때 뭔가 문제가 있었냐고 물었지. 난 없다고 했고, 그래서 윤지원이 떠난 건 나랑 전혀 상관없어.” 신지태는 책임을 깔끔하게 넘겼다.“내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불안해?” 강유형의 말투는 여전히 거칠었다.신지태는 마지막 남은 공을 바라보다가 강유형을 보며 말했다. “너 정말로 윤지원이 왜 떠났는지 모르는 거야? 왜 혼인 신고조차 안 하고 떠났는지?”“몰라, 그냥 삐진 거겠지. 그동안 내가 너무 오냐오냐 해줬으니까!” 강유형은 화가 난 듯 대답했다.혼인 신고를 하지 못한 것 때문에 집에 돌아가면 부모님도 그를 불편하게 대했고, 회사에서도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다. 심지어 바람을 피우다 걸렸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정말, 사람들은 아무 말이나 지어내기 일쑤다.“네가 오냐오냐 해줬다고?” 신지태는 웃었다. “유형아, 솔직히 말해서 난 네가 지원이를 오냐오냐 해줬다는 느낌을 전혀 못 받았어. 오히려 너는...”신지태는 잠시 멈췄다. “오히려 너는 윤지원이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 믿고, 네가 없으면 지원이가 못 살 거라 생각했던 거지. 그래서 지원이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을
오후 세 시.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짐도 풀지 않고 바로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이소희도 그곳에 있었고 나를 보자마자 달려와서 나를 꼭 껴안았다. “언니, 드디어 돌아오셨네요.”나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일단 나랑 몇 군데만 가서 확인해 봐요.”어젯밤은 거의 한숨도 못 잤다.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부분을 계속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공사나 조명업체를 의심하고는 있지만 그들이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건 큰 프로젝트였으니까.만약 그들 탓으로 문제가 발생한다면 돈을 벌기는커녕 큰 손해를 볼 게 뻔했다.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다른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전문가가 아닌 나로서는 정확히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현장에 가서 직접 확인해야 했다.조명을 켰다 껐다 하며, 설계도와 비교해 가며 문제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일을 멈출 수 있었다. “지원 언니, 언니 이번 주는 완전 몰아서 일하는 거네요.” 지친 이소희가 나를 놀리듯 말했다. 정말로 일주일이나 지나버린 걸까? 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나는 이소희와 함께 회사로 가서 밤새 우리가 찾아낸 문제들을 정리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다음 날 시공사와 조명업체에 연락해 논의하고 강유형에게 보고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강유형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해 알고 있었고, 무척 화가 나 있었다고 이소희가 전해주었다. 그녀는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결국에는 둘 다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강유형은 나에 대한 감정은 별로 좋지 않지만, 일에서는 철저히 공과 사를 구분하며 매우 엄격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벌을 받더라도 해야 할 일은 완벽히 해내야지.” 나도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 우리는 새벽 6시까지 일을 했고 결국 이소희는 지쳐 책상 위에 엎드려 잠들었다. 나도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왔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졸리지 않았다. 간단히 세면
강유형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검은색 정장에 흰 셔츠를 입고 별무늬가 박힌 넥타이를 맸다. 그 넥타이는 작년 그의 생일에 내가 선물한 것이었다. 그는 그 넥타이를 한 번도 맨 적이 없어서, 아마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야 이 넥타이를 맨 걸 보니 아주 뜻밖이었다.강유형의 얼굴은 매우 어두웠고 그의 눈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빛은 날카롭고 위협적이었다. 그가 왜 화가 났는지 알고 있었지만 나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요즘 어디 갔었어?” 그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연차 휴가를 보냈습니다.” 나는 딱히 답이 되지 않는 말을 했다.강유형은 책상 위에 얹어놓은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어디로 갔냐고 물었어.”“청평군에 다녀왔습니다.” 숨길 것도 없어서 솔직하게 지명을 말했다. 그가 더 깊게 찡그린 미간에 잠깐 당혹스러움이 스쳤다. 청평군이 어디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청평군은 작은 시골 마을이었고 그가 그런 곳을 알 리가 없었다.하지만 그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썼다면 이미 알았을 것이다. 나는 그곳이 내가 태어난 곳이며, 부모님이 나를 가장 데려가고 싶어 했던 곳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에게 나는 중요하지 않았기에 내가 했던 말은 그저 흘려들었을 뿐이다. “그런 곳에 여행이라도 갔다는 건가?” 강유형의 질문에 나는 웃음이 나왔고 결국 가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왜 휴대폰을 꺼놨어? 메시지도 확인 안 하고?” 그가 말할 때마다 나를 질책하는 듯했다. 나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제 자유입니다, 대표님.”그의 얼굴이 순간 더 어두워졌다. “그래, 그건 네 자유지. 하지만 회사 규정상, 어떤 경우에도 업무에 지장이 있어선 안 돼.”“제가 무슨 일을 방해했습니까?” 나는 차분하게 반문했다.강유형은 침을 꿀꺽 삼켰고 그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진정우가 내 코
강유형은 손을 들어 넥타이를 거칠게 풀었다. “윤지원,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갑자기 혼인 신고를 안 하겠다고 한 거지? 그리고 왜 연락도 없이 사라져?”공적인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다시 사적인 문제로 대화를 돌렸다. 사실 이것이 그가 나를 부른 진짜 이유였다.“난 아무것도 안 했어.” 나는 이 한마디로 내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이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너 집안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 어머니께서 너무 화가 나서 병원에 입원하셨어.” 강유형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강유형 어머니가 입원했다는 말에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그 일과 이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내가 강유형의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이 있어도 그가 나에게 준 상처를 지울 수는 없었다.“아주머니께 따로 찾아가 설명하고 사과할게.”“윤지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나는 왜 갑자기 혼인 신고를 안 하겠다는 건지 묻고 있어.” 강유형은 다시 한 번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잘못을 저지른 건 그인데 마치 나에게 배신당한 것처럼 굴었다.그렇다면 나는 그에게 누가 누구에게 상처를 준 건지 명확히 알려줄 생각이었다. 나는 살짝 시선을 내리고 그의 손목시계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나, 봉화타운 하우스에 갔었어.”내 말이 끝나자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강유형의 몸이 순간 굳어졌고 그의 얼굴은 빠르게 변해갔다. “내 말 좀 들어봐...” “듣고 싶지 않아. 어떤 설명을 하든, 조나연 씨가 그곳에 산다는 건 사실이잖아. 게다가...”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덧붙였다. “침구를 사러 갔을 때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샀더라고.”“나랑 나연이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야.” 강유형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지만, 나는 한 발 물러나며 그와의 거리를 유지했다. “강유형, 나는 추측하거나 상상하는 걸 싫어해. 하지만 내 눈으로 본 건 믿고 내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어.”“지원아...” 강유형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 집은 원래 너한
강유형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조소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 이상 그와 다투는 것도 귀찮아서 나는 간단히 말했다. “네 집에서 나가려고 해.”“우리 집?” 강유형의 눈동자가 좁아졌다. “윤지원, 너 정말 한 번도 그 집을 네 집으로 생각해본 적 없었구나. 우리 부모님이 그렇게 너를 아껴줬는데 다 헛수고였어.”나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가 모르는 건, 내가 원했던 건 그의 부모님의 사랑이 아니라 그의 사랑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그와 헤어질 결심을 한 지금 그 말을 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었다.“대표님, 저 일하러 가봐야겠어요.” 사직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맡은 일을 마무리한 후에 그만둘 생각이었으니까.“윤지원, 너 진짜 나랑 헤어지려는 거야?” 강유형은 다시 물었다.그는 전에 내가 한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십 년 동안 그토록 좋아했던 얼굴을 바라보며 차갑게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그래, 강유형. 난 너랑 헤어질 거야. 이제부터 너는 너고, 나는 나. 각자 결혼하고 각자의 삶을 살 거야.”“흥.” 강유형은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좋아, 윤지원. 네가 한 말이야. 후회하지 마.”후회? 그는 두 번이나 그 말을 했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지난 십 년 동안 그를 너무 사랑해서, 마치 바보처럼 그의 냉대와 상처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안녕.” 나는 이 두 글자만 남기고 돌아섰다.강유형은 더 이상 나를 붙잡지 않았다. 나는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막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문을 열고 나니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조나연이었다.그녀는 나를 보더니 눈에 잠시 당혹스러운 빛이 스쳤지만, 곧 미소를 띠며 말했다.
“소희 씨를 탓하지 않아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게 본능이고 그게 당연한 거니까요.” 내 말은 진심이었다. 나는 이소희를 원망할 생각이 없었다. 우리가 단순히 동료 관계일 뿐만 아니라, 설령 친자매 사이라 해도 먼저 자기 자신을 챙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언니...” 이소희는 내 팔을 살짝 흔들며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지금은 조명 문제를 해결하는 게 최우선이에요. 대표님께서 조명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고 했으니까,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어요.”이소희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이건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닌데 마치 우리 잘못인 것처럼 말하네요.”“우리가 이 프로젝트를 맡고 있잖아요. 문제가 생기면 우리가 제일 책임자니까 핑계를 댈 수는 없어요. 후폭풍을 피하고 싶으면 문제를 해결하는 수밖에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그 말을 들은 이소희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돌아섰다. 그녀가 뒤돌아서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공적인 일을 사적으로 이용하네.”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강유형이 나에게 불만이 있어서 일부러 이런 식으로 일을 힘들게 한다고 생각하는 거였다. 나 역시 그런 걸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일수록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야 했다. 그래야 강유형이 나에게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게다가 이 놀이공원 프로젝트는 아버지의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으니, 어느 하나도 허술하게 처리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살아계실 때 완벽을 추구하던 분이셨다. 아버지께 그분의 딸도 이렇게 훌륭하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다.곧 이소희는 조명 업체와 시공사의 연락처를 나에게 가져왔다. 나는 전화를 걸어 양측 모두 현장에 와서 문제의 원인을 논의하고 해결책을 찾자고 제안했다. 두 회사 모두 동의했지만 가장 빨라도 모레에야 올 수 있다고 했다. 이틀 동안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이
조나연의 작은 속임수는 나의 직설적인 말에 여지없이 무너졌고, 그녀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스쳐갔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고귀한 이미지를 유지하려 애썼다. “지원 씨는 내가 유형 씨랑 뭔가 있다고 확신하는 거예요?”뭐가 있든 없든, 그걸 굳이 내가 확신해야 할 필요가 있나?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본인이 가장 잘 알지 않을까? 하지만 내 품위가 그녀에게 거친 말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 조나연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들의 생각이 이렇게 더럽고 추악할 줄은 몰랐어요.”보아하니, 스스로를 얼마나 고결한 사람으로 포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윤지원 씨, 유형 씨는 훌륭한 남자예요. 그런 사람도 믿지 못한다면 당신은 유형 씨 곁에 있을 자격이 없어요.” 조나연의 이 말에 나는 모든 걸 깨달았다. 그녀가 지금까지 한 모든 말은 내가 강유형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주장하기 위한 서막이었을 뿐이다.그래서 분명 뒷말이 있을 것이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연기를 지켜보기로 했다. 예상대로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지원 씨는 정말로 유형 씨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버리려는 거예요?”이 여자는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고 있었다. 나를 순진한 바보로 여기는 건가? 나는 조소를 띤 채 말했다. “내가 만약 강유형을 버린다고 하면 당신은 강유형을 원한다고 말하려는 거죠?”조나연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그녀는 앵두 같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고, 연약하고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연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의 그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을지도 모른다.“유형 씨는 소중히 여길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요.” 조나연은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다.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그녀의 아직 평평한 배를 쳐다본 후, 그녀가 신은 낮은 굽의 신발로 시선을 옮겼다. “정말 강유형을 소중히 여기고 싶어하는 것 같네요. 그런데 당신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
나는 오직 그녀만을 믿었다.“괜찮아. 초음파 사진 봤어. 아기는 아주 건강해.”안리영의 곱고 단정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저 그렇게 미묘하게 번진 웃음 하나가 내겐 믿음을 주는 보약처럼 느껴졌다.“리영아, 제발 이 아이만은 꼭 지킬 수 있게 도와줘.”나는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듯 말했다.“당연하지. 이건 너랑 정우 씨의 사랑의 결실이잖아.”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강유형은 고개를 돌렸다. 감춰지지 못한 외로움이 스쳐 지나갔다.그와의 관계에서 나는 이미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 역시 이별을 받아들였다고 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했다.안리영 덕분에 나는 병실에, 그것도 VIP 병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당직실이 아니라 정식 병실이었다.아랫배의 통증도 가라앉았고 출혈도 점점 잦아들었다. 마음이 조금 놓이자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그 강 선생님이라는 사람, 갑자기 부임한 거라면서? 어떻게 된 일이야?”안리영은 반 박자쯤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소희연의 고모인가 이모인가 그래.”이 말을 듣고 나는 바로 눈치를 챘다. 슬쩍 그녀의 표정을 살폈지만 전과 다를 건 없었다. 다만 얼굴이 조금 더 야위어 보였다.그녀는 구안석과 헤어졌다. 게다가 먼저 끝내자고 한 것도 그녀였다. 실망이 극에 달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구안석은 그녀가 오랜 세월 마음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그 오랜 감정을 끊어낸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나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그런 감정은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위로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히 말했다.“강유형이 병원장한테 얘기할 것 같아.”“고자질할 만하면 해야지.”안리영은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가만히 당해줄 호구도 아니었다.나는 웃음이 터졌다.“의사 선생님답네. 칼 쥐고 돈 받는 직업이라 그런가 마음도 차갑기 그지없군.”“남한테 괜히 마음 써봤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셈이나
“유산 조짐이 있습니다.”그 말을 듣자 나는 마치 환청이라도 들은 듯 얼이 빠졌다.‘유산이라니?’“의사 선생님, 저 임신한 거예요?”놀라움과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의사의 가운을 붙잡았다.“몰랐어요?”의사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곧 못마땅하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요즘 젊은이들은 쾌락만 즐기고 책임질 생각을 전혀 안 한다니까요.”의사는 나와 강유형을 연인으로 착각하고는 설교를 퍼부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걸 해명할 정신도, 그의 핀잔에 대응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재차 물었다.“선생님, 저 정말 임신한 거 맞죠?”“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산 조짐이 보여요. 아이를 지킬 수 있을지는 아직 몰라요.”의사의 말에 나는 그의 가운을 더 꽉 움켜쥐었다.“제발 부탁드릴게요. 아이를 지켜 주세요.”흥분에 겨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요즘 들어 이유 없이 아이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선물처럼 안겨 오다니 꿈만 같은 소식이었다.그런데도 나는 멍청하게 지금까지 아무것도 몰랐었고 그로 인해 아이를 놀라게 하고 말았다.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아가야, 아무 일 없어야 해. 꼭...’“우선은 보태부터 시작할게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화장실을 가는 것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누워 있어야 해요. 일주일 정도 상태를 지켜본 후에 다시 판단할 겁니다. 계속 출혈이 있으면 아이는 지키기 힘들지도 몰라요.”의사는 이미 키보드를 두드리며 처방전을 작성하고 있었다.“선생님, 여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을 수 있을까요?”나는 지금 몸을 함부로 움직이기 두려웠고 그저 병원 안에 머무르고 싶었다.이 병원엔 안리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산부인과 과장이기도 하다.지금은 또 수술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도와줬을 것이 분명했다.“지금은 남는 병상이 없어요. 일단 집에서 안정을
“이 난장판에 끼어들 생각은 없어요. 대단하신 지원 양이 알아서 해봐요.”함소은은 그렇게 말하며 용은서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자. 준호 오빠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너랑 놀아줄 틈 없어”“싫어요! 나랑 안 놀아줄 거면 저 언니를 내려놓으라고 해요! 언니가 나랑 놀아주면 되잖아요!”이 아이는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그래, 그럼 여기서 계속 붙잡고 있어. 난 먼저 간다.”함소은은 아이의 손을 놓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용준호에게 한마디 던졌다.“이번엔 너한테 맡긴다. 제대로 잘 봐. 잃어버리기만 해봐, 아주 그냥.”그러고는 정말로 가버렸다. 그것도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아주 태연하게 말이다.이 여자는 정말 대단했다. 아이는 그렇게 내버려둔 채로 신경도 안 쓰고 가버렸다.하긴 자신의 딸을 납치까지 했던 사람이니 용준호한테 애를 맡기는 건 별일도 아닐 게 분명했다.하지만 그녀의 행동이 내게는 도움이 됐다. 용은서가 용준호를 붙잡고 있는 덕분에 날 업고 도망가기는 어렵게 됐으니 말이다.함소은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유형이 도착했다.코피는 이미 멈췄지만 낯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용준호, 윤지원 놓아줘. 아니면 오늘 나랑 끝을 보든지 해.”강유형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용준호랑 한패도 아니었고 평소에 저렇게 거칠게 말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코피도 아직 덜 닦았구먼 왜 또 여기서 영웅 행세야?”용준호가 빈정거리듯 말했다.“오빠 피도 아직 안 말랐거든.”용준호가 날 어깨에 짊어지고 있어 답답하긴 했지만 한마디는 해야겠다 싶었다.용준호는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한 채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강유형, 이 여자는 이미 딴 남자랑 잤어. 이제 너랑은 아무 관계 없는 여자라고.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남이 쓰던 걸 다시 쓰고 싶냐고.”‘이 자식이 지금 날 뭐라고 한 거야? 지금 붙잡혀 있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렸을 텐데.’“내려놓으라고 했어. 헛소리는 그만하지?”강유형은 더 이상 말다툼할 가치도 없다
사람들이 나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모두 의혹 가득한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멀찍이 서서 바라볼 뿐이었다.용준호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어느 새끼가 감히 널 구하려는지 두고 보자고!”그는 너무나도 오만방자했다.“오빠!”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용준호가 걸음을 멈추었다. 뒤집힌 시야 속에서 만두 머리를 한 여자아이를 보았다.바로 용은서였다.내가 이 여자아이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용준호는 콧방귀를 뀌었다.“저리 썩 꺼져.”살벌한 목소리에 평범한 아이였다면 벌써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하지만 용은서는 그의 혈육이었고 평소에도 늘 호통에 익숙했는지 전혀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물었다.“왜 사람을 업고 있어? 강도 같아!”대담한 발언이었다.“꺼지라니까.”용준호는 음을 길게 끌며 말했다.“사람 말을 못 알아듣나? 집에서 안 가르쳐줬어?”용은서는 눈을 흘기며 받아쳤다.“오빤 맨날 이렇게 화내.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용준호가 다시 호통을 치려는 순간 용은서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오빠, 나 할 말 있어.”용은서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내가 제대로 서 있기만 했어도 당장 품에 안아서 볼에 뽀뽀를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하지만 용준호는 여전히 사나웠다.“꺼지라고 했지. 말 안 들으면 발로 차버린다.”혈육에게 말이 너무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하지만 용은서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오히려 그의 바지 끝을 움켜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은서야, 언니 구해줘!”나는 목소리를 냈지만 어린아이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 소꿉장난처럼 느껴져 부끄럽기 그지없었다.“윤지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한테 도움을 청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냐?” 용준호는 나에게도 으르렁댔다.지금의 그는 미친개처럼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중이었다.“오빠, 왜 언니를 업고 있어? 다쳐서 걷지 못해?”용은서의 질문은 철없는 아이다운 순수함이 묻어났다.용준호의 인내심은 바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