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문이 열리며 들린 외침과 함께 허진호가 고개를 돌려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진정우는 자세를 바로 세우며 무심하게 말했다.“이렇게 오래 사시면서 연애하는 사람 처음 봐요?”허진호는 손을 내리며 피식 웃었다.“봤죠. 근데 이런 스타일의 키스는 처음 보네요.”그는 나를 쳐다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우리 윤 부장, 역시 마케팅 부서 출신답게 새로운 방식을 개척하시네요.”나는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잃었다. 그런데 진정우가 한마디로 그의 기를 꺾었다.“대표님, 혼자 서있고 싶으면 서 있으세요. 다른 사람까지 불편하게 만들지 말고.”그러자 허진호는 이마를 툭 치며 말했다.“나 좀 봐! 정신이 팔려 인사하는 걸 잊어버렸네요.”그는 몸을 옆으로 비키며 말했다.“대표님, 이쪽으로 들어오세요!”대표님?그 말을 듣고 나는 순간 멍해졌다. 곧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섰다. 둥글게 나온 배 때문에 마치 임신 7개월 차라도 된 듯한 중년 남성이었다. 나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 당황하며 진정우를 힐끔 쳐다보았다.진정우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고 손끝으로 자신의 입술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는 내가 묻힌 립스틱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대표님, 이쪽으로 앉으시죠.”허진호는 주인석 의자를 정중히 빼며 말했다. 제야 나는 허진호가 잠깐 나가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만나고 싶어 하던 분을 모시고 오겠다는 그 말 말이다.허진호가 소개를 이어갔다.“대표님, 이쪽은 이번에 새로 들어온 든든한 두 분입니다. 기술 총괄 진정우 님과 마케팅 부장 윤지원 님입니다.”그리고는 우리를 향해 말했다.“이분이 바로 우리 회사의 진 대표님이십니다.”이 사람이 대표님이라고?내가 그렇게 궁금해했던 그 신비한 대표님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니. 나는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싶어 머릿속이 복잡했다.“진 대표님.”진정우는 태연하게 인사를 했다. 반면 나는 계속 멍하니 서 있었다. 이때 허진호가 내 이름을 부르며 웃었다.“윤 부장님, 대표님의 외
“아니요.”“사실 나도 저분이 대표님처럼 보이진 않아요. 몸매며 카리스마며 저랑 비교하면 말이 안 되잖아요?”허진호는 우스꽝스럽게 가슴을 펴고 엉덩이를 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회사 설립이 그분의 투자로 이뤄졌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맞나요?”나는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다시 물었다.“맞아요. 실제로 회사 지분을 가장 많이 가진 분은 그분이에요. 나야 뭐, 겉으론 대표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고급 직원일 뿐이에요. 지원 씨랑 다를 게 없죠.”허진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의 태도는 친근하면서도 묘하게 가벼워 보였다.“그런데 왜 본인이 직접 회사를 운영하지 않으시는 걸까요?”“이런 걸 정말 몰라서 물어요?”허진호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그 사람은 돈이 많아서 회사가 한두 개가 아니에요. 언제 그걸 다 챙기겠어요?”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방 안쪽 문을 힐끗 봤다. 그 방 안에 있는 작은 체구의 남자가 정말 그렇게 부자인 걸까?“믿기 어려운가 보네요.”허진호가 내 표정을 읽고는 비웃듯 말했다.“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네요.”나는 허진호의 말을 듣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안에 있는 분 이름은 진수로예요. 서령 지역에서 유명한 석탄 사업가 진현의 손자죠. 겉모습이 조금 나이 들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나이는 30대 초반이에요. 석탄 산업이 주춤해지면서 진씨 가문 자손들이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고 있는 거예요. 진수로 대표님은 외모는 평범해 보여도 머리는 정말 뛰어난 사람이에요.”허진호는 자기 머리를 두드리며 강조했다.그의 말을 듣자 그동안의 의문이 어느 정도 풀렸다.“서령 사람이 여기까지 와서 사업을 한다니, 손이 참 멀리 뻗었네요.”나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돈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는 거죠. 대표님은 해외에도 사업이 있어요.”허진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전혀 예상 못 했죠?”“네, 정말 의외네요.”나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허 대표님 뒤에 이런 분이 계실 줄은 몰랐어요. 사실 저는...”
식사는 평화롭게 끝났다. 진수로는 전혀 거만한 태도가 없었고 모두가 편안하게 느낄 정도로 친근하게 행동했다.진정우는 식사 내내 내게 음식을 덜어주거나 물을 마실지 묻는 것 외에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뚝뚝함이 마치 그가 진짜 대표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식사가 끝난 뒤, 진수로는 조용히 마이바흐를 타고 떠났다.허진호는 술을 마셔 대리운전을 불렀다. 대리운전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진정우의 어깨에 팔을 얹으며 말을 걸었다.“정우 씨, 오늘 자리 어땠어? 괜찮았어?”진정우는 그의 손을 툭 치워내며 말했다.“술 너무 많이 드셨네요.”“에이, 많이 마신 것도 아니야. 네가 내가 헛소리할까 봐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걱정하지 마. 나도 선은 지켜.”허진호는 다시 그의 어깨를 치려 했지만 이번엔 진정우가 그의 손목을 꽉 잡았다.“대표님, 어깨 치는 건 별로 안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 어깨도 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진정우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사람 어깨에는 운이 담겨 있다는 말이 있잖아요. 괜히 잘못 건드리면 좋은 운을 다 날려버릴 수도 있으니까요.”나는 이 말을 듣고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돌렸다. 진정우가 이런 미신을 믿을 줄은 몰랐다. 허진호도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곧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정우 씨, 언제부터 그렇게 꼰대 같은 말을 하기 시작했어요? 예전엔 안 그랬잖아요.”“대리기사 도착했습니다.”진정우는 그의 말을 끊으며 대리기사의 도착을 알렸다. 허진호는 대리기사와 인사를 나누려 했지만 진정우는 내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이제 갈게요.”“정우 씨! 내가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 이렇게 그냥 가면 어쩌자는 거예요?”허진호가 소리쳤지만 진정우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차로 걸어갔다. 길 내내 나는 말없이 걸었고 진정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무슨 일 있어? 왜 그래?”나는 차 옆에 기대서서 그를 바라보았다.“오늘 본 진수로 대표님, 대기업 대표 같았어?”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왜, 너는
순간, 온몸에 묘한 열기가 퍼지며 모든 감각이 깨어난 듯했다. 스스로도 놀라울 만큼의 강렬한 감정이 밀려들었다.이런 나 자신이 어쩐지 부끄러웠다. 마치 내가 아닌 것 같았다.예전에 강유형과 사귈 때는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심지어 그와 옷을 벗고도 내게 남은 건 어색함과 긴장뿐이었다.그런데 진정우와 함께한 뒤로는 내가 달라진 것 같았다. 자유로워지고 본능적으로 솔직해졌다.나는 참지 못하고 진정우의 입술을 찾으려 했지만 그는 피했다.나는 그의 목을 감아 끌어당기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정우야...”내 목소리는 마치 울먹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이런 소리를 내다니, 스스로도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 끌림을 더는 억누를 수 없었다.진정우 앞에서는 항상 내가 가장 솔직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정우야...”나는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그는 손으로 내 목덜미를 감싸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잠깐만... 우리 집에 가자.”하지만 나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이 감정은 순간적인 것이기에 놓치면 다시 느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기 주차장이었다. 누군가 지나가면 우리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결국 이성이 본능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나는 강렬한 감정을 억누르며 그의 목을 살짝 물고는 몸을 멈췄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싼 채로 가만히 있었다.잠시 후, 그는 내 몸을 살짝 떼어내더니 조용히 차 문을 열어 나를 태웠다.그 순간, 내 마음에 남은 건 부끄러움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창피함이 가려지니, 이런 상황이 이해되기도 했다.나는 몸을 웅크리며 눈을 감고 엔진을 켰다. 그런데 출발하기 전, 진정우가 내게로 몸을 기울이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내가 잘못했어.”그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그는 덧붙였다.“너를 괜히 자극했어.”그 말을 듣자 더욱 부끄러워졌다. 나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운전하니까 말 걸지 마.”그는
진정우는 내 말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이내 내가 “아무것도 아니야. 올라가자.”라고 말하자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어두운 복도를 지나며, 차 옆에서 본 그 사람이 떠올랐다.여기가 곧 철거될 곳이라 그는 내가 이곳에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그런데도 찾아왔다니,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지금 와서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진정우는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문 열어.”진정우는 가벼운 숨을 몰아쉬며 그는 말했고 나는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문을 열자마자 그는 나를 신발장 위에 올려두었다.그리고 어둠 속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마치 깊고도 어두운 밤바다 같았다.그 눈에 빠져드는 느낌에, 나는 본능적으로 침을 삼켰다.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나를 덮쳤다.“지금은 너에게 달려 있어. 원하는 대로 해봐.”그는 속삭이며 자신의 외투를 벗고 셔츠의 목깃을 풀었다. 차 옆에서 내가 그를 얼마나 강렬히 원했는지를 알았는지, 이번에는 그가 더 적극적이었다.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순간의 열망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때의 감정을 되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그는 내가 반응이 없다는 걸 알아차린 듯, 움직임을 멈추고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우리 둘 다 아무 말 없이 그 자세로 멈춰 있었다.한참 뒤, 그는 호흡을 가다듬더니 내게서 조금 떨어졌다. 하지만 내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정우야...”그는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모든 것을 꿰뚫는 듯한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혹시 진정우도 내가 아래에서 본 그 사람을 알아차렸던 걸까?그리고 내 반응이 그와 관련 있다고 오해하고 있는 걸까?“나... 아직 생리 중이야.”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응.”그는 짧게 대답했고 그 안에 담긴 실망과 차가움이 느껴졌다.“정우야, 그런 거 아니야. 오해하지 마.”나는 서둘러 해명하려 했다.“아니야.”그는 고개를 저으며 내 손을 가볍게
진정우의 말이 맞았다. 분명히 내가 잘못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내가 억울해서 우는 것 같은 걸까?진정우는 돌아와 눈물에 젖은 나를 보더니 조심스레 안아주었다.“내가 잘못했어. 말을 너무 심하게 했네. 앞으로는 안 그럴게.”그의 사과에 내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나는 손으로 그의 가슴을 치며 말했다.“네가 뭘 잘못했는데. 잘못한 건 나야!”“아니야. 너는 잘못 없어. 내가 잘못했어. 내 욕심이 지나쳤던 거야. 그래서 이상한 말을 했어.”그는 다시 모든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렸다.그런 그의 모습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나는 그의 가슴을 한 번, 또 한 번 세게 때렸다. 그러다가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그의 어깨를 꽉 물어버렸다.“아야, 아파.”그가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소리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나는 깜짝 놀라 입을 떼며 눈물을 가득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그러자 그는 내 얼굴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물었으면 이제 울지 마. 내일 눈 부으면 보기 안 좋잖아.”“다 네 탓이잖아!”나는 다시 투덜댔다.“응, 내 잘못이야. 앞으로는 안 그럴게.”그는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 하지만 그가 잘못한 건 없었다.나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눈물로 젖은 내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었다.“네가 날 이렇게 버릇없게 만들었어.”“맞아. 내 잘못이야. 그래서 네가 나한테 이러는 것도 내가 감수해야 해. 그러니까 한 번 더 물래?”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의 가슴을 치며 웃었다. 그러자 그는 나를 꼭 안아주었다.그렇게 우습고도 진지한 다툼이 짧은 시간에 끝났다. 하지만 그 어색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나 우유 마시고 싶어.”나는 어색함을 덜기 위해 말했다.“알았어. 데워 올게. 넌 가서 씻어.”그는 나를 욕실로 밀어 넣으며 문을 닫아주었다.“정우야,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 안 그럴게.”나는 문을 사이에 두고 조심스럽게 말했다.“넌 잘못한 적 없어.”그가 남긴 말이 문 너머로 들려왔다. 그 말을 들으며
“진소영, 수술할 수 있대! 이틀 안으로 가능하다고 해!”안리영의 목소리가 스피커폰을 통해 들려왔다.진정우가 즉시 나를 바라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쁜 소식을 전했다.“심장 기증자를 찾았어요?” 진정우가 물었다. 안리영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 시간에 정우 씨가 지원의 집에 있는 건 무슨 이유일까요?”그녀의 농담을 받아줄 상황이 아니어서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그만 놀리고 중요한 얘기부터 해.”안리영이 가볍게 웃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새로운 기증자를 찾은 건 아니고 전에 기증을 거부했던 가족이 마음을 바꿨어.”“구 교수님은 뭐래요?”진정우가 재차 물었다.“소영이 상태가 너무 좋아서 특별한 문제가 없거나 감염 같은 일이 생기지만 않으면, 3일 안에 수술 가능하대요.”안리영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나와 진정우는 둘 다 긴장 속에서도 약간 들뜬 상태였다. 그의 이마에 힘줄이 도드라지는 게 보였다.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진정시키려 했다.“우리가 준비해야 할 건 없어요?” 진정우가 물었다.“특별한 건 없는데… 아, 하나! 수술비용은 미리 준비해 둬야 할걸요?”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재빠르게 대답했다.“걱정 마. 돈은 충분히 준비했어. 병원비는 문제없어.”“오케이, 그럼 이만 끊을게.”안리영이 전화를 끊으려는 듯했지만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정우 씨, 지원 씨가 생리 중이라면서요? 절제하세요.”그녀의 농담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고 진정우는 어깨를 살짝 으쓱하며 묵묵히 받아들였다. 진소영의 수술 소식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동시에 긴장감도 밀려왔다.그날 밤, 우리 둘 다 좀처럼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아직 동도 트지 않은 이른 새벽, 진정우가 먼저 일어나 주방에서 프라이팬을 다루는 소리가 들렸다.그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아마도 오늘 준비한 아침 식사에는 진소영을 위한 것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집어 들
진정우가 내 시선을 따라 물었다.“가볼래?”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지금은 혼자 있고 싶을 거야.”진정우는 더 묻지 않았고 나는 몇 초 뒤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가자.”차가 멀리 달렸지만 백미러에 비친 소지훈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꾹꾹 눌러둔 슬픔을 애써 삼키는 그의 모습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병원으로 가는 길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진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병실에 들어가기 전 내 손을 조용히 잡았다.그의 손이 내 손가락을 꽉 감싸는 순간, 나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살짝 미소를 띠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소영이 앞에서는 괜찮아 보일 거야.”“신경 쓰지 말고 밥이나 잘 먹어.”그는 내 손을 가볍게 쥐며 덧붙였다.“누구나 자신의 슬픔을 극복해야 해. 남이 대신할 수 없는 일이잖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병실 문을 열었다.진소영은 책을 읽고 있다가 우리를 보자 책을 던지듯 내려놓고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오빠! 언니!”그녀는 예전보다 훨씬 밝고 활기찼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혹시 맛있는 거 가져온 거예요?”진소영은 내 팔을 꼭 붙잡고 진정우가 들고 있는 도시락 가방을 바라봤다.“맛있는 거 주러 온 게 아니라 같이 먹으러 온 거야.”내 말에 진소영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그럼 나는 오늘 한 개 더 먹어야겠다!”“기름진 음식은 금지야. 네 상태엔 담백한 식단이 필요해.”진정우의 말에 진소영은 입술을 삐죽였다.“나 지금 스님 되는 중인가요? 나 고기 먹고 싶단 말이에요.”진소영은 아이처럼 투덜댔다. 진정우는 도시락을 내려놓고 그녀의 이마를 톡 치며 말했다.“비슷하지, 뭐.”“언니, 오빠 좀 보세요!”진소영이 내게 투덜댔고 나는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수술 끝나면 오빠가 매 끼니 고기반찬을 해줄 거야.”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소영아, 이제 3일 뒤면 수술이야.”진소영은 놀란 눈으로 나
헤르나가 크게 웃자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를 쳐다봤고 자연스레 나에게도 시선이 쏠렸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용설아마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갑작스러운 주목에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당황한 나머지 손을 들어 헤르나를 한 대 쳤다.“그만 좀 웃으세요!”“아이고!”그는 과장되게 소리를 내며 자기 팔을 움켜쥐었고 그러고 나서야 나는 그 팔이 상처 난 곳임을 떠올렸다. 그 상처는 진정우가 남긴 것이었다.복수를 중요시하는 남자, 특히 헤르나 같은 사람에게 그 상처가 어떤 의미일지 생각이 스쳤다.“진정우가 오늘 여기에 온 걸 보니, 복수라도 하실 건가요?” 나는 직접적으로 물었고 헤르나는 앞자리의 진정우를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그가 얌전히 있으면 한 번 봐줄까 생각 중이야.”그의 말에 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그게 무슨 뜻이죠?”그는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오늘 걔가 널 데려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시간을 조금 더 줄 수도 있다는 뜻이지.”진정우가 나를 데리러 온다고? 갑자기 용설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 진정우가 하고 싶다는 말이 이것인가? 하지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걸까?헤르나가 진정우의 의도를 꿰뚫고 있다면 이미 대비책을 마련했을 게 분명했다.진정우의 뒷모습을 보며 내 마음이 점점 불안해졌다.“만약 진정우가 널 구하러 온다면 너는 그와 함께 떠날 거야?”헤르나가 갑자기 내게 물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아까 그가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줬다.“그때 가서 알려줄게요.”“하하하!”그는 또다시 큰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이미 용설아와 헤르나가 던진 말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졌고 더는 그와 농담을 주고받을 기운이 없었다. 그냥 멍하니 앉아 앞자리의 진정우를 바라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그러던 중, 갑자기 내 눈앞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이스크림이었다. 헤르나는 이미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고 나에게도 하나를 건넸다.“이거 다 먹으면 경기가 시작되겠네.”나는
미움은 있지만 원망이 더 크다.하지만 내 사랑과 미움이 이 여인과 무슨 상관이 있겠나. 용설아는 나를 경계하는 마음에 물어보았고 혹시라도 내가 진정우와 다시 얽히는 것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나는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용설아 씨, 우리 서로 잘 알지도 못하잖아요. 내가 누굴 사랑하든, 누굴 미워하든 그쪽이 알 바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리고 내가 진정우를 미워하든 말든, 그건 본인이 가장 잘 알겠죠.”“정우 씨는 알겠죠. 하지만 난 모르잖아요.”용설아는 뜻밖에도 집요하게 물었다.나는 그녀의 강단 있는 태도를 보며 가만히 말했다.“용설아 씨, 설마 내가 다시 진정우랑 엮일까 봐 걱정하는 거라면 안심해도 돼요. 설령 그가 무릎 꿇고 나한테 애원한다고 해도, 더는 돌아보지 않을 거예요.”“지원 씨는 정말 냉정하시네요.”용설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약간의 조롱 섞인 어조로 말했다.나도 입가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그럼요. 아니면 뭐, 용설아 씨가 나랑 경쟁이라도 하고 싶어요?”내 말을 듣고 그녀가 대답하기 전에, 나는 말을 덧붙였다.“그럴 기회, 아마 평생 없을 거예요.”그렇게 말을 남기고 돌아서는데 어느새 다가와 있던 진정우와 눈이 마주쳤다.그는 거기 서서 어두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이미 내 말을 분명 다 들었을 것이고 나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내가 그를 사랑했을 땐 그는 내 전부였지만 이제 그가 나를 버린 이상, 그는 내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란 걸 알려주고 싶었다.잠시 눈을 마주치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어 지나쳤다.하지만 복도 끝에서 한 발짝도 더 내디딜 수 없었다.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게 조여 와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내가 그를 찌를 때 나 자신도 깊이 상처 입고 있었다.“기분이 이상해?”뒤에서 들려온 용설아의 목소리가 내 생각을 끊었다. 그녀와 진정우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고 나는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아 몸을 한쪽 구석으로 숨겼다.진정우의 대답은
“그건 경기가 끝난 후에 이야기하자.”헤르나는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는 누구와도 농담을 주고받는 것을 즐기는 사람 같았다.“자, 우리 앉을 자리나 찾아볼까?”그는 나를 데리고 자리로 향했다. 그런데 우리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이번에는 진정우가 용설아와 함께 나타나 바로 우리 앞줄에 앉았다. 진정우와 용설아 옆에는 강유형도 함께 있었다.이 배치는 강유형이 일부러 이렇게 정리한 것이 분명했다. 나는 얼마 전에 진소영과 소지훈에게 줬던 입장권이 떠올랐지만 경기가 곧 시작될 시간이 다가왔음에도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갑자기 걱정이 밀려왔는데 핸드폰이 고장 나서 진소영에게 연락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우에게 부탁해 보는 것이 가장 빠르겠지만 나는 그에게 먼저 말을 걸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다행히 나는 진소영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그래서 전화를 빌릴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 경기장을 나왔다.“윤지원 씨!”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용설아가 서 있었다. 나는 그녀와 직접 만난 적이 없었는데 그녀는 내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마도 나와 진정우의 과거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무슨 일이신가요, 용설아 씨?”나는 최대한 무표정하게 대답했다.“정우 씨가 왜 여동생이 안 보이느냐고 걱정해서요.”그녀의 말에 내 가슴이 답답해졌다.“자기 여동생을 찾으려면 본인이 직접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나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대꾸했지만 그녀는 나의 반응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그러게요. 그런데 지원 씨가 여동생을 돌봐준다고 믿고 있나 봐요. 그래서 지원 씨에게 물어보라고 했어요.”그녀의 말투는 여유롭고 차분했지만 나는 너무 불쾌하고 화가 났다.“저도 몰라요. 그래서 지금 전화를 빌려 물어보려고 하던 참이었어요.”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그녀는 약간 놀란 듯 보였지만 여전히 웃음을 띠며 말했다.“핸드폰이 없으세요?”그녀의 물음에 마음이 또다시 쓰라렸다. 그녀가 모른다면 진정우 역시 모른다는 뜻일 것이다. 결국,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마침 그 순간, 진정우도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보았다. 비록 차창 너머로 서로를 보고 있었지만 마치 그의 시선이 내게 닿은 것 같았고 가슴은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비수에 찔린 듯 아팠다. 하지만 그 시선은 오래 가지 않았다. 옆에 있던 용설아가 그의 주의를 끌었고 차창을 통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정우야, 우리 안으로 들어가자.”그는 내 쪽에서 시선을 거두고는 용설아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그 광경에 가슴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나는 즉시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발이 땅에 닿자, 헤르나도 내 뒤를 따라 차에서 내리며 물었다.“가서 인사라도 하고 싶어?”나는 그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 다른 여자를 데리고 나를 지나칠 때 그가 과연 미안함을 느낄지, 아니면 그동안 내게 했던 말들을 기억이나 할지 궁금했다.사실, 이것은 미련의 문제가 아니었고 내가 보고 싶은 건 단지 그의 진심이었다.“진!”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헤르나는 이미 내 마음을 읽은 듯 진정우를 불렀다.그리고 내 손을 잡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진정우는 멈춰 섰고 용설아와 함께 이쪽을 바라보았다. 내 심장은 긴장과 혼란으로 빠르게 뛰었고 그 속에는 그에게 일말의 복수를 원하는 감정도 섞여 있었다.‘나를 버렸다고? 그래도 나는 멀쩡히 잘 살고 있어. 더구나 내가 누구에게 보호받고 있는지 똑똑히 보여줄 거야.’헤르나는 나를 데리고 진정우와 용설아 앞으로 가 먼저 입을 열었다.“진, 또 만났군.”진정우가 그를 다치게 했고 그의 자존심을 짓밟은 적도 있지만 지금 이 순간 헤르나의 말투에서는 그런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정말 강단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그저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진정우는 변함없는 차가운 얼굴로 대답했다.“당신은 내가 보고 싶지 않을 텐데.”헤르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난 널 다시 보길 기대했어.”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맞지, 꼬마야?”진정우의 눈에
“왜 그러는 거예요?”나는 목이 멘 듯한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응?”헤르나는 내가 뭘 묻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했고 나는 그의 깊고 어두운 눈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건데요?”말을 끝내자 나는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헤르나 씨, 당신이 저한테 잘해주는 건 솔직히 좀 이상해요. 우리는 친하지도 않고 저는 당신이 다른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 이용하는 도구일 뿐이잖아요...”그러자 헤르나가 피식 웃었다.“그래서 내가 너한테 잘해주는 게 문제야?”“네, 그래서 더 불안해요.”나는 직설적으로 말했다. 세상에 아무 이유 없이 사랑이나 증오를 품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러자 헤르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쓸모가 있으니까.”“쓸모라니, 무슨 쓸모요?”나는 가슴이 조여드는 느낌이었지만 헤르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정말 끈질기게 묻는구나. 뭐든 끝까지 캐내는 타입이야, 너는.”그의 태도가 여전히 여유롭고 가벼울수록, 내 긴장감은 더욱 커졌다.“헤르나 씨, 제발 솔직히 말해줘요. 더는 돌려 말하지 말고요.”그의 미소가 조금씩 사라졌고 손을 들어 내 뺨에 살짝 닿았다. 손끝이 뺨을 스치자 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마치 차가운 뱀이 몸을 감싸는 듯한 기분이었다.나는 한 발 물러서 그의 손길을 피했고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네가 어떤 쓸모가 있는지는, 그날이 오면 알게 될 거야.”끝까지 답을 주지 않는 그의 태도에 나는 손을 꽉 쥔 채 답답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자, 이제 가자.”그는 손짓으로 나를 재촉했지만 내가 움직이지 않자 그가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여긴 마치 호랑이 굴 같은 곳이야. 정말로 안 나갈 거야?”이대로 여기에 남았다가는 분명 브라운에게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헤르나가 오늘 나를 이곳에 데리고 온 이유가 브라운을 경고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알겠지만 동시에 브라운의 분노를 나에게 집중시키려는 의도도 느껴졌다.다른 선택이 없다는 걸 깨닫고
‘결벽증 있다더니 이게 무슨 행동이야?’헤르나는 안았다가 이제는 손까지 잡고 있었다.나는 손을 뿌리치려다 병실 안을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침대에 누운 사람은 진정우가 아니었고 그는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리며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왜 저 여자를 데리고 온 거야?”헤르나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천천히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경기 데려가기 전에 들른 거야. 그런데 상태는 좀 어때?”그 말에 브라운의 얼굴은 한순간에 창백해졌다. 헤르나는 일부러 그의 상처를 그것도 가장 굴욕적인 상처 들춰내고 있었다.브라운이 다쳤다는 이야기를 떠올리자, 나는 본능적으로 그 부위를 떠올렸고 솔직히 조금 민망했다.“복수는커녕, 이 여자를 데리고 와서 날 조롱하려고?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브라운의 분노가 병실에 울려 퍼졌지만 헤르나는 태연히 대답했다.“그냥 알리러 온 거야.”그는 내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이제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니까 건들지 마.”브라운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그럼 난 괜히 당한 거야?”“네가 당한 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이 사람과는 아무 상관 없어. 그리고 널 다치게 한 사람도 얘가 아니야.”헤르나는 단호하게 말했고 그제야 나는 헤르나가 나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를 깨달았다.“하지만 모든 게 저 여자 때문이었잖아.”브라운은 여전히 적대적인 시선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그건 네가 먼저 건드렸기 때문이지.”헤르나는 냉정하게 말했고 그의 말에 브라운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브라운은 입술을 꾹 다문 채 푸른 눈동자로 나를 쏘아보았다.“그래도 저년이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도대체 왜 신지태의 문제에 얽히려 한 거야?”그의 말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지.’나는 단순히 신지태가 걱정돼서 관여했을 뿐이었는데 이런 상황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러다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혹시 강유형이 일부러 날 이런 상황에 끌어들인 건 아닐까?’그 생각은 스쳐 갔지만
나는 헤르나의 말을 듣고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진정우가 용설아와 함께 온 건가? 이제 이렇게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된 걸까? 항상 붙어 다니는 거야?’헤르나는 내 표정이 잠시 멍해진 것을 보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네 눈이 네 입보다 솔직하네.”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병원 입구 쪽으로 걸어갔고 나는 숨 막히는 답답함을 삼키고 그의 뒤를 따랐다.내가 이곳에 올 때는 헤르나에게 기절당한 채 끌려왔지만 이제는 그의 고급 차량에 앉아 창밖 풍경을 감상하며 이동하고 있었다.하지만 창밖의 풍경은 또렷이 기억나는데 내 마음속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차가 멈추자 나는 옆에 앉은 헤르나를 바라보며 물었다.“여기 병원에 왜 온 거죠?”“한 사람을 만나러.” 헤르나는 내 긴장한 모습을 흘깃 보며 말했다.“누구를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다가와, 깊고 어두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이렇게 긴장하는 걸 보니, 진정우를 생각하고 있는가 봐?”나는 진정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하고 있었다.“이미 헤어졌잖아. 미워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그를 신경 써?”헤르나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고 나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억지로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대답했다.“헤어졌다고 해서 신경을 안 쓴다는 법은 없잖아요.”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동안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마치 내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잠시 후, 그는 차에서 내렸다.“그게 진정우인지 아닌지는 네가 가서 보면 알겠지.”나는 차 안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만약 진정우라면 난 가지 않을 거예요.”“왜?” 헤르나가 웃으며 물었다.“그 사람에게는 약혼자가 있잖아요. 내가 전 연인으로 찾아가면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요.”헤르나는 입가를 살짝 핥으며 웃었다.“선을 잘 지키네. 하지만…… 넌 가야 해.”“가지 않으면요?” 나는 그와 대립하듯 대꾸했다.“그럼 내가 널 안고 갈 거야.”나는 눈이 커
헤르나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는 약속한 경기 날이 다가올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날 진정우가 올 거라는 말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하지만 진정우가 오든 오지 않든, 이제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다.아무리 깊은 사랑이라도 실망이 반복되면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걸, 강유형과 진정우를 통해 뼈저리게 깨달았다.셋째 날 아침, 헤르나가 돌아왔다. 나는 테라스의 흔들의자에 앉아 아침 햇살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아래에서 손을 흔들며 나를 불렀다.고개를 돌리니 연한 카키색 재킷과 흰색 캐주얼 팬츠를 입고 손에는 하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190cm가 넘는 그의 키와 탄탄한 체격은 마치 톱 모델처럼 보였다.“내려와.”그가 나를 부르자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는 꽃다발을 건네며 나를 가볍게 안으려 했다.그때 나는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친하지도 않은 남녀 사이에 이건 아닌 것 같네요. 함부로 그러지 마세요.”나는 순간 뭔가 깨달았다. 헤르나는 나에게 유난히 관대한 것 같았고 내가 반항적이고 제멋대로 굴수록 그는 오히려 나를 더 흥미롭게 대했다. 아마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늘 남들의 복종에 익숙해져서, 가끔 말을 안 듣고 반항하는 사람을 만나면 신선하게 느끼는 모양이다.“하하, 참 쑥스러움이 많네.”그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소파로 걸어갔다.나는 그를 따라가며 물었다.“경기 보러 언제 가요?”“서두를 필요 없어. 내가 없으면 시작도 못 할 테니까.”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이런 일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스누커뿐 아니라 다른 스포츠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의 대답을 들으니, 얼마나 많은 선수가 이런 부당한 현실 속에서 희생되었을지 떠올라 분노가 치밀었다.“헤르나 씨, 이렇게 하면 양심에 찔리지는 않아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처음엔 그랬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아무렇지도 않더라.”그는 정말 솔직했지만 그 솔직함이 오히려 화를 돋웠다.이틀 동
나는 강유형을 세게 밀치며 소리쳤다.“안 간다고 했잖아! 왜 자꾸 이래? 지금은 여기에 있고 싶어. 내가 늑대한테 잡아먹히든, 개한테 물리든 그게 네 일이야?”강유형의 얼굴이 굳어졌다.“지원아...”나는 단호하게 말했다.“강유형, 우린 이미 아무 사이도 아니야. 내 일에 간섭하지 마. 그리고 네가 신경 쓰는 것도 원하지 않아.”내 말에 강유형의 눈빛이 깊은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지원아, 이건 네 선택이야. 후회하지 마.”“내 선택에 후회한 적 없어.”나는 냉정하게 대답했다.그 말에 강유형은 입술을 꽉 깨물고 등을 돌렸지만 몇 걸음 걷다 멈춰 서서 손가락으로 헤르나를 가리키며 말했다.“경고야. 지원이한테 손대지 마.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 말을 남기고 그는 다시 나를 한 번 쳐다본 후 떠났다.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 마음 한구석에 묘한 익숙함이 스쳐 지나갔다.“그 자식 아직도 널 사랑하는 것 같아.”헤르나가 내 귀에 속삭이듯 말했고 나는 시선을 땅으로 떨구며 대답했다.“유통기한 지난 사랑은 아무리 좋아도 필요 없어요.”헤르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제법 똑똑한 소녀네.”그가 나를 칭찬한 건지, 아니면 내가 여기 남겠다고 한 선택이 현명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강유형과 함께 떠나겠다고 했더라면 그는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가자. 뭐라도 먹어야지. 오늘 특별히 중국 요리사를 불러서 네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준비했어.”헤르나는 마치 소중한 손님을 대접하듯 말했다.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는 그의 '인질'인데도, 그는 나를 VIP처럼 대했다.식탁에는 다양한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고 특히 내가 좋아하는 만두까지 있었다.'이 사람, 철저히 나를 조사했구나.'내가 모르는 사이 누군가가 나를 관찰하고 정보를 수집했을 거라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왜 안 먹어?”그는 만두 하나를 내 접시에 놓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