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소영, 수술할 수 있대! 이틀 안으로 가능하다고 해!”안리영의 목소리가 스피커폰을 통해 들려왔다.진정우가 즉시 나를 바라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쁜 소식을 전했다.“심장 기증자를 찾았어요?” 진정우가 물었다. 안리영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 시간에 정우 씨가 지원의 집에 있는 건 무슨 이유일까요?”그녀의 농담을 받아줄 상황이 아니어서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그만 놀리고 중요한 얘기부터 해.”안리영이 가볍게 웃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새로운 기증자를 찾은 건 아니고 전에 기증을 거부했던 가족이 마음을 바꿨어.”“구 교수님은 뭐래요?”진정우가 재차 물었다.“소영이 상태가 너무 좋아서 특별한 문제가 없거나 감염 같은 일이 생기지만 않으면, 3일 안에 수술 가능하대요.”안리영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나와 진정우는 둘 다 긴장 속에서도 약간 들뜬 상태였다. 그의 이마에 힘줄이 도드라지는 게 보였다.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진정시키려 했다.“우리가 준비해야 할 건 없어요?” 진정우가 물었다.“특별한 건 없는데… 아, 하나! 수술비용은 미리 준비해 둬야 할걸요?”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재빠르게 대답했다.“걱정 마. 돈은 충분히 준비했어. 병원비는 문제없어.”“오케이, 그럼 이만 끊을게.”안리영이 전화를 끊으려는 듯했지만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정우 씨, 지원 씨가 생리 중이라면서요? 절제하세요.”그녀의 농담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고 진정우는 어깨를 살짝 으쓱하며 묵묵히 받아들였다. 진소영의 수술 소식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동시에 긴장감도 밀려왔다.그날 밤, 우리 둘 다 좀처럼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아직 동도 트지 않은 이른 새벽, 진정우가 먼저 일어나 주방에서 프라이팬을 다루는 소리가 들렸다.그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아마도 오늘 준비한 아침 식사에는 진소영을 위한 것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집어 들
진정우가 내 시선을 따라 물었다.“가볼래?”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지금은 혼자 있고 싶을 거야.”진정우는 더 묻지 않았고 나는 몇 초 뒤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가자.”차가 멀리 달렸지만 백미러에 비친 소지훈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꾹꾹 눌러둔 슬픔을 애써 삼키는 그의 모습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병원으로 가는 길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진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병실에 들어가기 전 내 손을 조용히 잡았다.그의 손이 내 손가락을 꽉 감싸는 순간, 나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살짝 미소를 띠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소영이 앞에서는 괜찮아 보일 거야.”“신경 쓰지 말고 밥이나 잘 먹어.”그는 내 손을 가볍게 쥐며 덧붙였다.“누구나 자신의 슬픔을 극복해야 해. 남이 대신할 수 없는 일이잖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병실 문을 열었다.진소영은 책을 읽고 있다가 우리를 보자 책을 던지듯 내려놓고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오빠! 언니!”그녀는 예전보다 훨씬 밝고 활기찼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혹시 맛있는 거 가져온 거예요?”진소영은 내 팔을 꼭 붙잡고 진정우가 들고 있는 도시락 가방을 바라봤다.“맛있는 거 주러 온 게 아니라 같이 먹으러 온 거야.”내 말에 진소영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그럼 나는 오늘 한 개 더 먹어야겠다!”“기름진 음식은 금지야. 네 상태엔 담백한 식단이 필요해.”진정우의 말에 진소영은 입술을 삐죽였다.“나 지금 스님 되는 중인가요? 나 고기 먹고 싶단 말이에요.”진소영은 아이처럼 투덜댔다. 진정우는 도시락을 내려놓고 그녀의 이마를 톡 치며 말했다.“비슷하지, 뭐.”“언니, 오빠 좀 보세요!”진소영이 내게 투덜댔고 나는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수술 끝나면 오빠가 매 끼니 고기반찬을 해줄 거야.”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소영아, 이제 3일 뒤면 수술이야.”진소영은 놀란 눈으로 나
‘그렇게 하실 건가요?’그렇게 하다니, 대체 무슨 뜻일까? 유희연을 포기한다는 의미일까?나는 문 앞에 서서 소지훈을 바라보았다.그의 얼굴은 이미 창백했고 손은 꼭 쥔 채 긴장감이 맴돌았다.“소지훈, 말을 못 알아들어? 당장 나가, 나가라고!”유희연의 어머니는 갑자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치며 소지훈을 밀쳤다.소지훈은 밀려 비틀거리며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힘겹게 자세를 바로 세우며 간신히 말했다.“마지막까지 곁에 있을 수 있게 해주세요.”“우리 희연이가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어! 우리 딸을 돌려놔, 우리 희연이를 돌려달라고!”유희연의 어머니는 소지훈을 때리며 울분을 토했다.그 장면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본능적으로 다가가 그녀를 말리고 싶었다.그러나 내가 움직이기도 전에 유희연의 아버지가 그녀를 붙잡으며 말했다.“그만해. 희연이가 마지막 순간만큼은 편안히 떠날 수 있게 해 줘야지.”“희연아, 우리 희연아...”어머니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아버지는 그녀를 감싸안고 병실 밖으로 이끌었다.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들 부부가 병실 밖으로 나오며 나와 눈을 마주쳤을 때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아저씨, 아주머니.”그러나 유희연의 어머니는 흥분하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가 나를 딸로 착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유희연의 아버지는 조금 더 차분한 모습으로 아내를 붙잡았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놀라움과 혼란으로 가득했다.“당신은... 누구세요?”“저는 윤지원이라고 합니다.”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윤지원...?”어머니는 내 이름을 되뇌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뒤 남편을 바라보며 말했다.“희연이 아빠, 이건... 이건...”아버지는 고개를 저으며 아내를 다독였다.“희연이 엄마, 이 사람은 희연이가 아니야. 그냥 우리 희연이랑 조금 닮은 사람일 뿐이야.”어머니는 다시 한번 나를 유심히
유희연이 떠난 후의 장례 문제 때문일까?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그 답은 소지훈만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나중에 기회가 생긴다면 물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기회조차 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소지훈과 나는 병원에서 두 번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유희연이 세상을 떠난다면, 소지훈이 더 이상 이곳에 나타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마주칠 일도 없을 것이다.나는 병실의 침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한 번 더 바라보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했다.“희연 씨, 편히 쉬어요.”그렇게 병실을 나와 안리영을 찾으러 갔지만 그녀는 또다시 수술 중이었다. 나는 바로 병실로 돌아가지 않고 병원 바깥에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지원 씨.”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유희연의 아버지가 서 있었다. 그는 혼자였고 급하게 달려왔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가 나를 찾아온 것이 전혀 놀랍지 않았다.“아저씨.”“지원 씨, 정말 죄송합니다. 유희연 엄마가 워낙 충격을 받아서 그랬어요.”그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괜찮아요, 아저씨. 이해합니다.”나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유희연의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에게는 딸이 하나뿐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그 아이가 떠나면 우리는 딸이 없게 되는 거죠.”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절망이 묻어 있었다. 그를 바라보니, 겨우 쉰 살 정도로 보였지만 머리는 이미 희끗희끗해져 있었다.유희연이 사고를 당한 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어간다. 그녀는 살아 있지만 부모님과 대화를 나눌 수도 없고 "엄마, 아빠"라고 부를 수도 없다. 그런 침묵 속의 고통이 그들에게도 계속해서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그제야 나는 그들이 유희연을 보내기로 한 이유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유희연은 깨어날 수 없는 상태였다.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것은 그녀를 편히 쉬지 못하게 만들 뿐 아니라 부모님의 마음도 갉아먹고 있었다.“지원 씨.”유희연의 아버지는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부모님이 누구신지 여쭤봐도
그 말을 들으니 내가 휴가를 너무 오래 썼나 싶었다.어젯밤까지만 해도 허진호가 이렇게까지 내 출근을 관대하게 봐주는 이유가 진정우가 그의 뒤에 있는 대주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내심 어색함을 느끼며 허진호에게 대답했다.“혹시 고객이신가요? 지금 바로...”“고객이 아니라 여자입니다. 화려하게 꾸미고 마치 아내가 첩을 잡으러 온 것처럼 기세가 대단하더군요.”허진호는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으로 말을 이어갔다.“윤 부장님, 제가 부장님과 정우 씨의 관계를 아는 만큼 오해는 없어요. 그냥 혹시 엮이신 분이 있나 해서 미리 알려드리는 겁니다.”순간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평정심을 유지하며 물었다.“그 여자의 이름은요?”“이름은 모르겠고 성이 함씨라고 하더군요. 근데 딱 봐도 꽤 까다로운 사람 같았어요.”허진호는 마치 그 여자의 분위기에 기가 눌린 듯했다.‘함씨?’아무리 생각해도 ‘함씨 성을 가진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하지만 꺼림칙한 일을 하지 않았기에 불안감은 없었다. 나는 오히려 태연하게 말했다.“저 지금 병원이에요. 그분이 정말 저를 만나고 싶다면 병원으로 오라고 하세요.”“네?”허진호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만약 오기 싫다면 그냥 알아서 돌아가게 하세요.”머릿속으로 허진호가 당황하는 모습이 그려졌다.“그건 좀 그렇지 않나요?”나는 웃으며 말했다.“허 대표님께서 그 여자를 잘 모시고 싶으시면 마음껏 하셔도 돼요. 저는 오늘 회사에 못 갈 것 같네요. 내일 출근할게요.”진소영이 곧 수술을 앞두고 있어 내가 있어도 딱히 할 일은 없었다. 검사나 준비는 진정우가 곁에서 충분히 도울 수 있을 테니까.“서두르지 않으셔도 돼요. 가족 먼저 챙기세요. 회사엔 별일 없어요. 게다가 마케팅팀 직원들이 워낙 잘해서 윤 부장님이 계시든 안 계시든 문제없습니다.”허진호는 내게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정말요? 그렇다면 제가 굳이 필요 없겠네요. 부장 자리 없어도 되지 않을까요?”나는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그건 안
문뜩 그녀가 떠올라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 여자가 맞구나.’함소은은 내가 병원 앞에서 햇볕을 쬐고 있을 때 나타났다. 명품으로 치장한 그녀는 나를 도도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윤지원 씨, 당신이 그렇게 잘났나 봐요? 내가 직접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잘못 알고 계시네요. 제가 오라고 한 적은 없으니까요. 직접 오신 거잖아요.”함소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그럼 내가 왜 온 건지는 알겠지?”그녀가 서 있는 바람에 내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의 볼륨감 넘치는 몸매는 내가 봐도 눈길을 끌었다.이런 모습이라면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이 봐도 매력적이라고 느낄 만했다.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글쎄요. 설마 딸이랑 놀아달라는 부탁이라도 하려는 건가요?”솔직히 말해, 그녀와 내가 대화할 이유는 딸 때문이었다. 예전에 그의 딸과 처음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 용진표도 있었다.“착한 척은 다 하네요.”함소은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제가 뭘 어쨌다고요? 착한 척? 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리지널이예요. 당신과 달리.”그녀의 몸매는 너무나도 완벽해 보였고 솔직히 말하면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다.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내가 부러워서 그러는 거죠. 하지만 말해두는데 난 전부 자연 그대로예요. 믿지 못하겠으면 검사라도 해볼래요?”그녀의 대답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외모와 몸매는 흠잡을 데 없었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그녀의 사고 방식은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사실 그녀의 상황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현실적이었다면 용진표 같은 남자와 함께하며 이런 상황에 놓이지 않았을 테니까.나는 더 이상 그녀와 말다툼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장난스러운 태도를 접고 차분하게 물었다.“그래서, 저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당신이 더 잘 알 텐데.”함소은의 목소리는 여전히 화가 가득 담겨
함소은의 말은 진심처럼 들렸다.그리고 나는 그녀가 얼마나 외로운지 느껴졌다. 아니었다면 한순간에는 나에게 소리를 높이다가 갑자기 친구가 되고 싶다며 손을 내밀었을 리가 없었다.“저는 친구가 거의 없어요. 진표 씨가 절대 친구 사귀지 말라고 해서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진표 씨는 지원 씨를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지원 씨랑 친구가 되고 싶어요. 그러면 진표 씨도 괜찮다고 할 거예요.”함소은은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왔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지원 씨, 정말 다른 뜻은 없어요. 그냥 친구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우리 아이도 지원 씨를 정말 좋아하잖아요. 며칠 전에도 지원 씨 얘기를 몇 번이나 했다고요.”그녀는 딸 이야기를 꺼내며 간절함을 더했다.“제가 별로인 건 알지만 우리 아이를 위해서라도 저랑 친구가 되어줄 수 없나요?”함소은은 더 이상 처음의 거만한 태도도 뻔뻔함도 없었고 오히려 불쌍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죄송하지만 제가 좀 바빠서요.”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그녀와 엮이는 건 딱 봐도 나중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특히 용진표 같은 사람과 관련된 일에 휘말리는 건 정말 좋을 게 없어서 피하고 싶었다.함소은의 눈빛 속의 기대감은 꺼진 촛불처럼 확 사라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비웃는 듯 웃었다.“알아요. 저 같은 사람은 지원 씨 같은 분과 어울리지 않겠죠.”그녀의 말에는 자기 비하가 담겨 있었고 그걸 통해 나의 동정을 사려는 듯했다. 나에게 그런 수단은 통하지 않았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쉽게 연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었다.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걸어갔다. 거리를 두었지만 그녀의 시선이 내 등을 묵묵히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해가 질 무렵 아줌마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지원아, 그 녀석 돌아온 거 알고 있니?”나는 전날 밤, 차 안에서 본 익숙한 실루엣이 떠올랐다.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네. 알아요.”“그럼 그 녀석이 너를 찾아갔어?”그날 밤은 나를 찾은 게 아니라 단순히 우연히 마주친 정도
수술실 복도를 걸으며 나는 진정우의 손을 꼭 잡았다. 그에게 아무 말 없이 힘이 되길 바랐다.구안석이 말하기를 이 수술은 최소 여섯 시간 이상 걸린다고 했다. 세 시간이 지나자 진정우가 갑자기 코피를 흘렸다.긴장감이 극에 달한 탓이었다. 그의 모습을 보며 진소영이라는 동생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다시금 깨달았다.“물 좀 가져올게.”우리는 이 시간 동안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다. 전날 밤 진소영이 금식 중이었기에 진정우도 그녀와 함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난 괜찮아. 너나 가서 잠깐 쉬어. 나중에 다시 와.”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먼저 챙기려 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병원 매점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수술실 복도에 기대 서 있는 소지훈을 발견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나는 이틀 전 병실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유희연이 이미 세상을 떠났을 텐데 소지훈은 왜 여기에 있는 걸까?혹시 또 다른 가족이 수술 중인 걸까? 아니면 유희연에게 기적이라도 일어난 걸까?기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지훈 씨.”그는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 스친 불안감은 사라졌지만 그의 얼굴은 한층 더 야위어 있었다.“지원 씨...”“여긴 왜 왔어요? 혹시 누가 수술 중이에요?”그는 벽에서 몸을 일으켰다. 피로와 슬픔이 뒤섞인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다.“유희연 씨인가요? 아직 일이 끝나지 않은 거예요?”그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끝났어요.”비록 기적을 바라고 있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런데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소지훈은 고개를 숙이며 낮게 말했다.“지원 씨를 기다렸어요.”“저를요? 왜요?”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냥... 지원 씨를 보고 싶어서요.”나는 그의 말을 듣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나를 통해 유희연을 떠올리려는 것이 분명했다.“지훈 씨,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해요
헤르나가 크게 웃자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를 쳐다봤고 자연스레 나에게도 시선이 쏠렸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용설아마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갑작스러운 주목에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당황한 나머지 손을 들어 헤르나를 한 대 쳤다.“그만 좀 웃으세요!”“아이고!”그는 과장되게 소리를 내며 자기 팔을 움켜쥐었고 그러고 나서야 나는 그 팔이 상처 난 곳임을 떠올렸다. 그 상처는 진정우가 남긴 것이었다.복수를 중요시하는 남자, 특히 헤르나 같은 사람에게 그 상처가 어떤 의미일지 생각이 스쳤다.“진정우가 오늘 여기에 온 걸 보니, 복수라도 하실 건가요?” 나는 직접적으로 물었고 헤르나는 앞자리의 진정우를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그가 얌전히 있으면 한 번 봐줄까 생각 중이야.”그의 말에 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그게 무슨 뜻이죠?”그는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오늘 걔가 널 데려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시간을 조금 더 줄 수도 있다는 뜻이지.”진정우가 나를 데리러 온다고? 갑자기 용설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 진정우가 하고 싶다는 말이 이것인가? 하지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걸까?헤르나가 진정우의 의도를 꿰뚫고 있다면 이미 대비책을 마련했을 게 분명했다.진정우의 뒷모습을 보며 내 마음이 점점 불안해졌다.“만약 진정우가 널 구하러 온다면 너는 그와 함께 떠날 거야?”헤르나가 갑자기 내게 물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아까 그가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줬다.“그때 가서 알려줄게요.”“하하하!”그는 또다시 큰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이미 용설아와 헤르나가 던진 말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졌고 더는 그와 농담을 주고받을 기운이 없었다. 그냥 멍하니 앉아 앞자리의 진정우를 바라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그러던 중, 갑자기 내 눈앞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이스크림이었다. 헤르나는 이미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고 나에게도 하나를 건넸다.“이거 다 먹으면 경기가 시작되겠네.”나는
미움은 있지만 원망이 더 크다.하지만 내 사랑과 미움이 이 여인과 무슨 상관이 있겠나. 용설아는 나를 경계하는 마음에 물어보았고 혹시라도 내가 진정우와 다시 얽히는 것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나는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용설아 씨, 우리 서로 잘 알지도 못하잖아요. 내가 누굴 사랑하든, 누굴 미워하든 그쪽이 알 바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리고 내가 진정우를 미워하든 말든, 그건 본인이 가장 잘 알겠죠.”“정우 씨는 알겠죠. 하지만 난 모르잖아요.”용설아는 뜻밖에도 집요하게 물었다.나는 그녀의 강단 있는 태도를 보며 가만히 말했다.“용설아 씨, 설마 내가 다시 진정우랑 엮일까 봐 걱정하는 거라면 안심해도 돼요. 설령 그가 무릎 꿇고 나한테 애원한다고 해도, 더는 돌아보지 않을 거예요.”“지원 씨는 정말 냉정하시네요.”용설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약간의 조롱 섞인 어조로 말했다.나도 입가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그럼요. 아니면 뭐, 용설아 씨가 나랑 경쟁이라도 하고 싶어요?”내 말을 듣고 그녀가 대답하기 전에, 나는 말을 덧붙였다.“그럴 기회, 아마 평생 없을 거예요.”그렇게 말을 남기고 돌아서는데 어느새 다가와 있던 진정우와 눈이 마주쳤다.그는 거기 서서 어두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이미 내 말을 분명 다 들었을 것이고 나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내가 그를 사랑했을 땐 그는 내 전부였지만 이제 그가 나를 버린 이상, 그는 내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란 걸 알려주고 싶었다.잠시 눈을 마주치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어 지나쳤다.하지만 복도 끝에서 한 발짝도 더 내디딜 수 없었다.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게 조여 와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내가 그를 찌를 때 나 자신도 깊이 상처 입고 있었다.“기분이 이상해?”뒤에서 들려온 용설아의 목소리가 내 생각을 끊었다. 그녀와 진정우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고 나는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아 몸을 한쪽 구석으로 숨겼다.진정우의 대답은
“그건 경기가 끝난 후에 이야기하자.”헤르나는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는 누구와도 농담을 주고받는 것을 즐기는 사람 같았다.“자, 우리 앉을 자리나 찾아볼까?”그는 나를 데리고 자리로 향했다. 그런데 우리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이번에는 진정우가 용설아와 함께 나타나 바로 우리 앞줄에 앉았다. 진정우와 용설아 옆에는 강유형도 함께 있었다.이 배치는 강유형이 일부러 이렇게 정리한 것이 분명했다. 나는 얼마 전에 진소영과 소지훈에게 줬던 입장권이 떠올랐지만 경기가 곧 시작될 시간이 다가왔음에도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갑자기 걱정이 밀려왔는데 핸드폰이 고장 나서 진소영에게 연락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우에게 부탁해 보는 것이 가장 빠르겠지만 나는 그에게 먼저 말을 걸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다행히 나는 진소영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그래서 전화를 빌릴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 경기장을 나왔다.“윤지원 씨!”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용설아가 서 있었다. 나는 그녀와 직접 만난 적이 없었는데 그녀는 내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마도 나와 진정우의 과거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무슨 일이신가요, 용설아 씨?”나는 최대한 무표정하게 대답했다.“정우 씨가 왜 여동생이 안 보이느냐고 걱정해서요.”그녀의 말에 내 가슴이 답답해졌다.“자기 여동생을 찾으려면 본인이 직접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나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대꾸했지만 그녀는 나의 반응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그러게요. 그런데 지원 씨가 여동생을 돌봐준다고 믿고 있나 봐요. 그래서 지원 씨에게 물어보라고 했어요.”그녀의 말투는 여유롭고 차분했지만 나는 너무 불쾌하고 화가 났다.“저도 몰라요. 그래서 지금 전화를 빌려 물어보려고 하던 참이었어요.”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그녀는 약간 놀란 듯 보였지만 여전히 웃음을 띠며 말했다.“핸드폰이 없으세요?”그녀의 물음에 마음이 또다시 쓰라렸다. 그녀가 모른다면 진정우 역시 모른다는 뜻일 것이다. 결국,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마침 그 순간, 진정우도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보았다. 비록 차창 너머로 서로를 보고 있었지만 마치 그의 시선이 내게 닿은 것 같았고 가슴은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비수에 찔린 듯 아팠다. 하지만 그 시선은 오래 가지 않았다. 옆에 있던 용설아가 그의 주의를 끌었고 차창을 통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정우야, 우리 안으로 들어가자.”그는 내 쪽에서 시선을 거두고는 용설아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그 광경에 가슴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나는 즉시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발이 땅에 닿자, 헤르나도 내 뒤를 따라 차에서 내리며 물었다.“가서 인사라도 하고 싶어?”나는 그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 다른 여자를 데리고 나를 지나칠 때 그가 과연 미안함을 느낄지, 아니면 그동안 내게 했던 말들을 기억이나 할지 궁금했다.사실, 이것은 미련의 문제가 아니었고 내가 보고 싶은 건 단지 그의 진심이었다.“진!”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헤르나는 이미 내 마음을 읽은 듯 진정우를 불렀다.그리고 내 손을 잡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진정우는 멈춰 섰고 용설아와 함께 이쪽을 바라보았다. 내 심장은 긴장과 혼란으로 빠르게 뛰었고 그 속에는 그에게 일말의 복수를 원하는 감정도 섞여 있었다.‘나를 버렸다고? 그래도 나는 멀쩡히 잘 살고 있어. 더구나 내가 누구에게 보호받고 있는지 똑똑히 보여줄 거야.’헤르나는 나를 데리고 진정우와 용설아 앞으로 가 먼저 입을 열었다.“진, 또 만났군.”진정우가 그를 다치게 했고 그의 자존심을 짓밟은 적도 있지만 지금 이 순간 헤르나의 말투에서는 그런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정말 강단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그저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진정우는 변함없는 차가운 얼굴로 대답했다.“당신은 내가 보고 싶지 않을 텐데.”헤르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난 널 다시 보길 기대했어.”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맞지, 꼬마야?”진정우의 눈에
“왜 그러는 거예요?”나는 목이 멘 듯한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응?”헤르나는 내가 뭘 묻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했고 나는 그의 깊고 어두운 눈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건데요?”말을 끝내자 나는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헤르나 씨, 당신이 저한테 잘해주는 건 솔직히 좀 이상해요. 우리는 친하지도 않고 저는 당신이 다른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 이용하는 도구일 뿐이잖아요...”그러자 헤르나가 피식 웃었다.“그래서 내가 너한테 잘해주는 게 문제야?”“네, 그래서 더 불안해요.”나는 직설적으로 말했다. 세상에 아무 이유 없이 사랑이나 증오를 품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러자 헤르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쓸모가 있으니까.”“쓸모라니, 무슨 쓸모요?”나는 가슴이 조여드는 느낌이었지만 헤르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정말 끈질기게 묻는구나. 뭐든 끝까지 캐내는 타입이야, 너는.”그의 태도가 여전히 여유롭고 가벼울수록, 내 긴장감은 더욱 커졌다.“헤르나 씨, 제발 솔직히 말해줘요. 더는 돌려 말하지 말고요.”그의 미소가 조금씩 사라졌고 손을 들어 내 뺨에 살짝 닿았다. 손끝이 뺨을 스치자 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마치 차가운 뱀이 몸을 감싸는 듯한 기분이었다.나는 한 발 물러서 그의 손길을 피했고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네가 어떤 쓸모가 있는지는, 그날이 오면 알게 될 거야.”끝까지 답을 주지 않는 그의 태도에 나는 손을 꽉 쥔 채 답답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자, 이제 가자.”그는 손짓으로 나를 재촉했지만 내가 움직이지 않자 그가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여긴 마치 호랑이 굴 같은 곳이야. 정말로 안 나갈 거야?”이대로 여기에 남았다가는 분명 브라운에게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헤르나가 오늘 나를 이곳에 데리고 온 이유가 브라운을 경고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알겠지만 동시에 브라운의 분노를 나에게 집중시키려는 의도도 느껴졌다.다른 선택이 없다는 걸 깨닫고
‘결벽증 있다더니 이게 무슨 행동이야?’헤르나는 안았다가 이제는 손까지 잡고 있었다.나는 손을 뿌리치려다 병실 안을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침대에 누운 사람은 진정우가 아니었고 그는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리며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왜 저 여자를 데리고 온 거야?”헤르나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천천히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경기 데려가기 전에 들른 거야. 그런데 상태는 좀 어때?”그 말에 브라운의 얼굴은 한순간에 창백해졌다. 헤르나는 일부러 그의 상처를 그것도 가장 굴욕적인 상처 들춰내고 있었다.브라운이 다쳤다는 이야기를 떠올리자, 나는 본능적으로 그 부위를 떠올렸고 솔직히 조금 민망했다.“복수는커녕, 이 여자를 데리고 와서 날 조롱하려고?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브라운의 분노가 병실에 울려 퍼졌지만 헤르나는 태연히 대답했다.“그냥 알리러 온 거야.”그는 내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이제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니까 건들지 마.”브라운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그럼 난 괜히 당한 거야?”“네가 당한 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이 사람과는 아무 상관 없어. 그리고 널 다치게 한 사람도 얘가 아니야.”헤르나는 단호하게 말했고 그제야 나는 헤르나가 나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를 깨달았다.“하지만 모든 게 저 여자 때문이었잖아.”브라운은 여전히 적대적인 시선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그건 네가 먼저 건드렸기 때문이지.”헤르나는 냉정하게 말했고 그의 말에 브라운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브라운은 입술을 꾹 다문 채 푸른 눈동자로 나를 쏘아보았다.“그래도 저년이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도대체 왜 신지태의 문제에 얽히려 한 거야?”그의 말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지.’나는 단순히 신지태가 걱정돼서 관여했을 뿐이었는데 이런 상황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러다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혹시 강유형이 일부러 날 이런 상황에 끌어들인 건 아닐까?’그 생각은 스쳐 갔지만
나는 헤르나의 말을 듣고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진정우가 용설아와 함께 온 건가? 이제 이렇게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된 걸까? 항상 붙어 다니는 거야?’헤르나는 내 표정이 잠시 멍해진 것을 보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네 눈이 네 입보다 솔직하네.”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병원 입구 쪽으로 걸어갔고 나는 숨 막히는 답답함을 삼키고 그의 뒤를 따랐다.내가 이곳에 올 때는 헤르나에게 기절당한 채 끌려왔지만 이제는 그의 고급 차량에 앉아 창밖 풍경을 감상하며 이동하고 있었다.하지만 창밖의 풍경은 또렷이 기억나는데 내 마음속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차가 멈추자 나는 옆에 앉은 헤르나를 바라보며 물었다.“여기 병원에 왜 온 거죠?”“한 사람을 만나러.” 헤르나는 내 긴장한 모습을 흘깃 보며 말했다.“누구를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다가와, 깊고 어두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이렇게 긴장하는 걸 보니, 진정우를 생각하고 있는가 봐?”나는 진정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하고 있었다.“이미 헤어졌잖아. 미워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그를 신경 써?”헤르나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고 나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억지로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대답했다.“헤어졌다고 해서 신경을 안 쓴다는 법은 없잖아요.”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동안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마치 내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잠시 후, 그는 차에서 내렸다.“그게 진정우인지 아닌지는 네가 가서 보면 알겠지.”나는 차 안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만약 진정우라면 난 가지 않을 거예요.”“왜?” 헤르나가 웃으며 물었다.“그 사람에게는 약혼자가 있잖아요. 내가 전 연인으로 찾아가면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요.”헤르나는 입가를 살짝 핥으며 웃었다.“선을 잘 지키네. 하지만…… 넌 가야 해.”“가지 않으면요?” 나는 그와 대립하듯 대꾸했다.“그럼 내가 널 안고 갈 거야.”나는 눈이 커
헤르나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는 약속한 경기 날이 다가올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날 진정우가 올 거라는 말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하지만 진정우가 오든 오지 않든, 이제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다.아무리 깊은 사랑이라도 실망이 반복되면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걸, 강유형과 진정우를 통해 뼈저리게 깨달았다.셋째 날 아침, 헤르나가 돌아왔다. 나는 테라스의 흔들의자에 앉아 아침 햇살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아래에서 손을 흔들며 나를 불렀다.고개를 돌리니 연한 카키색 재킷과 흰색 캐주얼 팬츠를 입고 손에는 하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190cm가 넘는 그의 키와 탄탄한 체격은 마치 톱 모델처럼 보였다.“내려와.”그가 나를 부르자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는 꽃다발을 건네며 나를 가볍게 안으려 했다.그때 나는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친하지도 않은 남녀 사이에 이건 아닌 것 같네요. 함부로 그러지 마세요.”나는 순간 뭔가 깨달았다. 헤르나는 나에게 유난히 관대한 것 같았고 내가 반항적이고 제멋대로 굴수록 그는 오히려 나를 더 흥미롭게 대했다. 아마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늘 남들의 복종에 익숙해져서, 가끔 말을 안 듣고 반항하는 사람을 만나면 신선하게 느끼는 모양이다.“하하, 참 쑥스러움이 많네.”그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소파로 걸어갔다.나는 그를 따라가며 물었다.“경기 보러 언제 가요?”“서두를 필요 없어. 내가 없으면 시작도 못 할 테니까.”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이런 일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스누커뿐 아니라 다른 스포츠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의 대답을 들으니, 얼마나 많은 선수가 이런 부당한 현실 속에서 희생되었을지 떠올라 분노가 치밀었다.“헤르나 씨, 이렇게 하면 양심에 찔리지는 않아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처음엔 그랬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아무렇지도 않더라.”그는 정말 솔직했지만 그 솔직함이 오히려 화를 돋웠다.이틀 동
나는 강유형을 세게 밀치며 소리쳤다.“안 간다고 했잖아! 왜 자꾸 이래? 지금은 여기에 있고 싶어. 내가 늑대한테 잡아먹히든, 개한테 물리든 그게 네 일이야?”강유형의 얼굴이 굳어졌다.“지원아...”나는 단호하게 말했다.“강유형, 우린 이미 아무 사이도 아니야. 내 일에 간섭하지 마. 그리고 네가 신경 쓰는 것도 원하지 않아.”내 말에 강유형의 눈빛이 깊은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지원아, 이건 네 선택이야. 후회하지 마.”“내 선택에 후회한 적 없어.”나는 냉정하게 대답했다.그 말에 강유형은 입술을 꽉 깨물고 등을 돌렸지만 몇 걸음 걷다 멈춰 서서 손가락으로 헤르나를 가리키며 말했다.“경고야. 지원이한테 손대지 마.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 말을 남기고 그는 다시 나를 한 번 쳐다본 후 떠났다.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 마음 한구석에 묘한 익숙함이 스쳐 지나갔다.“그 자식 아직도 널 사랑하는 것 같아.”헤르나가 내 귀에 속삭이듯 말했고 나는 시선을 땅으로 떨구며 대답했다.“유통기한 지난 사랑은 아무리 좋아도 필요 없어요.”헤르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제법 똑똑한 소녀네.”그가 나를 칭찬한 건지, 아니면 내가 여기 남겠다고 한 선택이 현명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강유형과 함께 떠나겠다고 했더라면 그는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가자. 뭐라도 먹어야지. 오늘 특별히 중국 요리사를 불러서 네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준비했어.”헤르나는 마치 소중한 손님을 대접하듯 말했다.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는 그의 '인질'인데도, 그는 나를 VIP처럼 대했다.식탁에는 다양한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고 특히 내가 좋아하는 만두까지 있었다.'이 사람, 철저히 나를 조사했구나.'내가 모르는 사이 누군가가 나를 관찰하고 정보를 수집했을 거라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왜 안 먹어?”그는 만두 하나를 내 접시에 놓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