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소은의 말은 진심처럼 들렸다.그리고 나는 그녀가 얼마나 외로운지 느껴졌다. 아니었다면 한순간에는 나에게 소리를 높이다가 갑자기 친구가 되고 싶다며 손을 내밀었을 리가 없었다.“저는 친구가 거의 없어요. 진표 씨가 절대 친구 사귀지 말라고 해서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진표 씨는 지원 씨를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지원 씨랑 친구가 되고 싶어요. 그러면 진표 씨도 괜찮다고 할 거예요.”함소은은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왔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지원 씨, 정말 다른 뜻은 없어요. 그냥 친구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우리 아이도 지원 씨를 정말 좋아하잖아요. 며칠 전에도 지원 씨 얘기를 몇 번이나 했다고요.”그녀는 딸 이야기를 꺼내며 간절함을 더했다.“제가 별로인 건 알지만 우리 아이를 위해서라도 저랑 친구가 되어줄 수 없나요?”함소은은 더 이상 처음의 거만한 태도도 뻔뻔함도 없었고 오히려 불쌍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죄송하지만 제가 좀 바빠서요.”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그녀와 엮이는 건 딱 봐도 나중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특히 용진표 같은 사람과 관련된 일에 휘말리는 건 정말 좋을 게 없어서 피하고 싶었다.함소은의 눈빛 속의 기대감은 꺼진 촛불처럼 확 사라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비웃는 듯 웃었다.“알아요. 저 같은 사람은 지원 씨 같은 분과 어울리지 않겠죠.”그녀의 말에는 자기 비하가 담겨 있었고 그걸 통해 나의 동정을 사려는 듯했다. 나에게 그런 수단은 통하지 않았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쉽게 연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었다.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걸어갔다. 거리를 두었지만 그녀의 시선이 내 등을 묵묵히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해가 질 무렵 아줌마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지원아, 그 녀석 돌아온 거 알고 있니?”나는 전날 밤, 차 안에서 본 익숙한 실루엣이 떠올랐다.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네. 알아요.”“그럼 그 녀석이 너를 찾아갔어?”그날 밤은 나를 찾은 게 아니라 단순히 우연히 마주친 정도
수술실 복도를 걸으며 나는 진정우의 손을 꼭 잡았다. 그에게 아무 말 없이 힘이 되길 바랐다.구안석이 말하기를 이 수술은 최소 여섯 시간 이상 걸린다고 했다. 세 시간이 지나자 진정우가 갑자기 코피를 흘렸다.긴장감이 극에 달한 탓이었다. 그의 모습을 보며 진소영이라는 동생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다시금 깨달았다.“물 좀 가져올게.”우리는 이 시간 동안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다. 전날 밤 진소영이 금식 중이었기에 진정우도 그녀와 함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난 괜찮아. 너나 가서 잠깐 쉬어. 나중에 다시 와.”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먼저 챙기려 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병원 매점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수술실 복도에 기대 서 있는 소지훈을 발견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나는 이틀 전 병실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유희연이 이미 세상을 떠났을 텐데 소지훈은 왜 여기에 있는 걸까?혹시 또 다른 가족이 수술 중인 걸까? 아니면 유희연에게 기적이라도 일어난 걸까?기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지훈 씨.”그는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 스친 불안감은 사라졌지만 그의 얼굴은 한층 더 야위어 있었다.“지원 씨...”“여긴 왜 왔어요? 혹시 누가 수술 중이에요?”그는 벽에서 몸을 일으켰다. 피로와 슬픔이 뒤섞인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다.“유희연 씨인가요? 아직 일이 끝나지 않은 거예요?”그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끝났어요.”비록 기적을 바라고 있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런데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소지훈은 고개를 숙이며 낮게 말했다.“지원 씨를 기다렸어요.”“저를요? 왜요?”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냥... 지원 씨를 보고 싶어서요.”나는 그의 말을 듣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나를 통해 유희연을 떠올리려는 것이 분명했다.“지훈 씨,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해요
“환자 가족분 계셔요?”진정우가 막 물병을 열어 한 모금을 마시던 중, 수술실 문이 급히 열리며 소희연이 바쁘게 걸어 나왔다. 그녀는 오늘 구안석을 보조하며 수술에 참여하고 있었다.“접니다!”진정우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가 서두르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몸이 잠시 흔들렸다.나는 그의 팔을 부축하며 소희연 앞으로 다가갔다.“소희연 씨, 무슨 일이죠?”소희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수술 중 환자에게 심각한 출혈이 발생했습니다. 심리적으로 준비하셔야 합니다. 이건 동의서입니다.”그녀의 말에 진정우와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상황이 아주 위험한가요? 지금은 어떻게 되고 있죠?”때마침 안리영이 수술 가운 차림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오늘 수술 일정이 없었지만 동료의 갑작스러운 부재로 대신 투입되었던 상황이었다.“현재 계속 수혈 중이고 출혈 부위를 찾는 중입니다.”소희연은 의학적 상황 설명을 덧붙이며 동의서를 내밀었다.진정우는 손을 뻗지도 못한 채 멈칫하며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리영을 바라봤다.그녀가 눈빛으로 나에게 동의서를 받으라고 신호를 보냈다.내가 손을 내밀려는 찰나 진정우가 먼저 동의서를 받았다. 그의 손은 분명히 떨리고 있었다.“수술 중 이런 일이 흔히 있나요?”그는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 교수님과 저는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빨리 동의서에 서명해 주세요.”소희연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진지했다.나는 진정우의 손을 꼭 쥐고 그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와 눈을 마주친 후, 그는 빠르게 서명했다.“수고 부탁드립니다.”소희연이 돌아서려 할 때, 안리영이 대신 감사 인사를 건넸다.“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소희연 선생님.”소희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다.문이 닫히자 안리영이 우리를 다독였다.“이건 절차일 뿐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 구안석 교수님을 믿어보자.”하지만 진정우는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는 듯
진정우에게 기대어 있던 순간, 소희연의 굳은 표정과 꽉 쥔 주먹이 눈에 들어왔다. 그 표정에는 분명히 질투가 가득했다.나는 문득 가슴이 답답해지며 무심코 그녀를 불렀다.“소 교수님.”그러자 소희연은 안리영과 구안석을 바라보던 시선을 나에게로 돌렸다. 내가 묻기도 전에 그녀는 냉정한 말투로 말했다.“환자는 30분 후에 관찰실로 옮겨질 예정입니다.”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서서 걸어갔다. 그 뒷모습에는 억울함과 분노가 뚜렷하게 묻어 있었다.나는 진정우를 살짝 건드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질투하나 봐.”진정우는 동생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덕에 긴장했던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내 손을 꼭 잡았다.“그래. 구 교수님이 잘하셨네.”어?나는 놀란 눈으로 여전히 안리영을 안고 있는 구안석을 보다가 다시 진정우를 바라봤다.진정우는 나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구안석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안리영을 껴안은 것은 단순히 그녀를 사랑해서만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며 안리영에게 안심을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진정우의 말을 듣고 나니 역시 남자는 남자를 더 잘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구안석은 그제야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수술 중 환자가 과다 출혈이 있었고 거의 전신 수혈 두 번에 가까운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관찰실에서 상태를 지켜볼 겁니다. 이식 후 78시간이 가장 중요한 거 아시죠? 간호사가 계속 관찰하면서 이상이 생기면 바로 대처해야 합니다.”그의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태도에 우리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만약 거부반응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요?”나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물었다.“대응 방안은 충분히 준비돼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구안석은 침착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그의 말에 진정우도 마음이 한결 놓였는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정말 감사드립니다. 교수님.”구안석은 미소를 지으며 안리영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안리영 선생님 친구들이라면 제 가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부
진소영은 3일 후에 관찰실을 나왔다.다행히도 거부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고 몸 상태도 아주 좋아서 구안석의 예상을 뛰어넘는 회복 속도를 보였다.“보아하니 다른 사람의 심장이 아주 잘 맞나 봐.”안리영도 감탄하며 말했다.나는 꽃다발을 들고 가며 살짝 농담처럼 말했다.“아마도 심장 주인이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안리영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기증자의 정보를 알 수 있어?”안리영은 나를 힐끗 쳐다보며 단호히 말했다.“몰라. 그런 건 철저히 비밀로 하니까.”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냥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니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준 그 숭고함이 경이로웠다.그때, 관찰실 문이 열리고 진소영이 밖으로 나왔다.3일 동안 우리가 종종 그녀를 보러 갔었지만 이번은 특별한 순간이었다.그 문은 진소영에게 다시 태어나는 문이었다.그 문을 통해 그녀는 새로운 건강한 삶으로 나아갔다.“오빠! 언니! 리영 언니!”진소영은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마치 돌고래의 울음소리 같았다.진정우는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며 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나는 꽃다발을 건네며 그녀를 안아주었다.“새로운 삶을 시작한 걸 축하해!”안리영도 손을 내밀어 그녀와 악수하며 말했다.“좋은 미래를 향해 달려가자.”진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흘렸다.수술 때조차 울지 않았던 그녀가 새 삶을 맞이한 이 순간 눈물을 흘린 것이다.그녀의 눈물은 마치 새 생명이 세상에 첫울음을 터뜨리며 인사하는 것 같았다.수술 후 2주가 지나고, 마침내 놀이공원이 개장할 준비를 마쳤다.그 소식은 강진혁을 통해 들었다.“지원아, 개장식에 와줄 거지?”강진혁이 물었다.나는 이미 결정했기에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네. 갈게요.”이번 개장은 나에게도 중요한 의미였다.강유형과 KS 그룹과의 마지막 이별을 그리고 나의 과거와의 작별을 의미했다.그리고 난 단지 앞만 보고 달리고 과거에 다시는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혹시 강유형도 오나요?”나는
진소영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회복 과정에서 여전히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길 가능성은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손길이 필요한 상태였다.진정우는 낮에는 간병인을 고용했지만 밤이 되면 직접 병원에 가서 동생을 챙겼다.그래서 요즘 우리 둘이 함께 보내는 시간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낮에는 각자 일 때문에 바쁘기도 했다.“시간 있어?”내가 신지태 오빠의 경기에 관해 이야기하며 물었을 때 진정우가 의외로 대답했다.“있어.”그의 대답에 나는 의아하면서도 기뻤다.“근데 소영이는...”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진정우는 단호히 말을 잘랐다.“내가 알아서 할게.”그의 확신에 찬 말에 나는 마음이 든든해졌다.“너랑 제대로 데이트를 못 한 지 너무 오래됐잖아.”그가 이마를 내 이마에 맞대며 속삭이자 나는 마음이 찡해졌다.맞다.요즘 그는 동생을 돌보느라 바빴기에 자연스레 나와 있는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물론 내가 이것을 가지고 질투를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지태 오빠의 경기는 풍진에서 열렸다.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의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든 픽업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우리 둘 다 의아해하며 물었고 기사는 지태 오빠가 직접 준비했다고 설명했다.“와, 진짜 세심하네. 오길 잘했어. 안 그랬으면 이렇게 정성껏 준비한 걸 헛되게 할 뻔했잖아.”나는 그의 배려에 감탄하며 말했다.게다가 같은 비행기를 탄 승객 중 상당수가 지태 오빠의 팬이었다.나는 그제야 그의 인기가 이렇게 많다는 걸 실감했다.아직 경기장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팬들의 뜨거운 열정에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지태 오빠가 이렇게 인기 많을 줄은 몰랐네. 그냥 당구장 관장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말이야.”나는 감탄하며 말했고 진정우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하지만 나는 그의 조용한 성격을 알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그는 지태 오빠와 친한 사이도 아니니 굳이 흥미를 보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나
진정우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기에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었다.그의 말투에 나는 살짝 겁이 나면서도 장난기가 쑥 들어갔다.병으로 고생한 동생을 돌보느라 힘든데 지금 나까지 달래야 한다니 얼마나 피곤할까 싶었다.순간적으로 미안함이 밀려와 더 이상 그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그의 손을 살짝 잡아당기며 솔직하게 말했다.“나랑 지태 오빠는 그냥 친구야. 그래서 너 앞에서 편하게 얘기한 거지. 마음에 거리낌이 없으니까.”하지만 말하고 나니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사실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건 아니었다.그냥 말을 꺼내지 않는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알아.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진 않아.”진정우는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았다.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했다.내 앞에서 진정우가 다른 여자를 칭찬한다면 나도 기분 나빴을 테니까.아마 바로 화를 내며 그를 쫓아냈을지도 모른다.“미안해, 내 잘못이야.”나는 조용히 사과했다.그러자 그의 굳어 있던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나한테는 입으로 사과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야.”그 말에 그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챘다.그에게 조금 더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방에 가서 행동으로 보여줄게.”그러자 그의 목젖이 떨렸고 귀끝이 붉게 물들었다.그가 내 의도를 정확히 이해한 게 분명했다.그렇게 쉽게 풀리는 그의 모습에 나는 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정우 씨, 나 피곤해.”그는 바로 대답했다.“안아줄게.”사람들로 북적이는 호텔 로비에서 그가 나를 안겠다고 하자 오히려 내가 민망해졌다.나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농담이야. 안아달라고 한 건 아니고...”그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내 몸이 갑자기 공중으로 들렸다.하지만 그가 나를 안아 든 건 아니었다.대신 내 몸을 캐리어 위에 올려놓고 캐리어를 밀기 시작했다.처음 해보는 캐리어 타기 체험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예전에 강유형과 출장 다닐 때 한 번쯤 캐리어 위에 앉아보고 싶었지만 말도 꺼내지 못했다.하지만
강유형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고 굳어 있었다. 평소의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네?”옆에 있던 남자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다시 쳐다보며 말했다.“못 알아볼 리 없는데요? 대표님 약횬녀가 그렇게 예쁘신데... 제가 어떻게 헷갈리겠어요?”“내 약횬녀는 지금 집에서 내 부모님을 돌보고 있어.”강유형은 담담하게 대답한 뒤 긴 다리를 뻗어 걸어갔다.“뭐라고요? 그럴 리가...”남자는 여전히 충격을 받은 듯 내 얼굴을 살피다가 강유형의 뒷모습을 쫓아가며 계속 중얼거렸다.“너무 닮았는데? 완전히 똑같은데?”강유형은 멀어져 갔고 나를 난처하게 만들 법한 말을 하진 않았다. 그가 이렇게 거짓말을 할 줄은 정말 예상 밖이었다.평소 같았으면 분명 사실을 인정하며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나아가 진정우까지 난처하게 했을 텐데 말이다.그런데 오늘의 강유형은 달랐다. 차가운 태도로 나를 스쳐 지나가며 마치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다.그는 변한 것 같았다. 더 이상 예전처럼 쉽게 화를 내거나 성급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낯선 사람처럼 행동하는 그의 모습은 전에 없던 차분함이었다.강유형은 이번에 돌아온 뒤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일상에서 완전히 잊힌 것 같았다. 어쩌면 그가 나를 진심으로 놓아준 건지도 모른다.나는 그런 생각에 잠긴 채 있었고 진정우는 그런 나를 엘리베이터로 조용히 이끌었다. 정신을 차리고 그의 얼굴을 보니 특별히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방금 일이 그에게도 불편했으리라 짐작됐다.내가 그의 손을 살짝 잡아끌자 그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괜찮아. 앞으로도 이런 일은 또 생길 거야.”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곳이든 해동이든 오늘 같은 상황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그리고 오늘 일이 벌어진 이유도 따지고 보면 내가 이 호텔이 지태 오빠가 준비한 장소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태 오빠와 강유형이 친한 사이인 걸 알면서도 무심코 잊어버린 내 실수였다.하지만 이미
“신지태는 당분간 괜찮을 거야.”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강유형이 설명을 덧붙였다.“Q 클럽은 겉으로는 스누커를 하지만 실제로는 도박을 하고 있어. 신지태에게 그런 일을 벌인 건 그들이 우승을 이어가면서 도박에서 가장 큰 이득을 챙기려는 거였어.”도박이라... 들은 적은 있지만 스누커와 그런 일이 연관될 줄은 몰랐다.“신지태는 이제 그들 손에 넘어가지 않을 거야. 그런데 그들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어. 그게 바로 지태를 도박에 이용하는 거야. 지태가 경기에서 이기면 겉으로는 그들이 돈을 잃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더 큰 이득을 챙기게 될 거야.”강유형의 말에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스누커 하나로도 그런 무서운 자본가들이 돈을 챙기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예전에 신지태가 스누커를 좋아한다고 했었고 그 후에는 세계 무대에서 한국인도 스누커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했었는데... 만약 그가 지금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알면 기분이 어떨까?나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지태 오빠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몰라. 만약 알았다면 아마 경기를 하지 않았을 거야.”강유형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말을 이었다.“그런데 만약 지태가 경기를 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나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지원아,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진정우가 신지태를 구했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게 아니야. 사실 이 일은 그들이 모두 계획한 함정이었어.”나는 갑자기 닭살이 돋기 시작했다. 진정우는 이 일을 알고 있는 걸까? 진정우도 모르고 있는 건가?“지원아, 이제 경기까지 이틀밖에 남지 않았어.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어야 해. 그런데 브라운이란 사람은 예외야. 그의 팬은 Q클럽이 아무리 손을 써도 제어할 수 없지. 그래서 Q클럽은 너한테도 손을 대려 할 거야. 너를 다치게 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너를 협상 카드로 쓰려고 할 거야.”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정우는 다시 Q클럽에 복수하는 걸 안 무서워하는 거야?”강유
강유형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이유는 분명히 뭔가 의도가 있는 거였다.그는 내 눈을 깊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진정우는 좀 더 신중하게 브라운을 처리해야 했어. 그의 배경을 먼저 조사하고 나서 행동을 취했어야지.”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네 말은 그 사람 배경이 강하니까 내가 괴롭힘을 당해도 참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 내가 피해를 봐도 그냥 참고 있으라는 거지?”강유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지원아, 그런 말은 아니야.”“강유형, 나는 진정우가 한 일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생각해. 브라운은 그냥 자업자득이야.”나는 단호하게 말했고 강유형의 눈빛에 잠깐의 무력감이 스쳤다.“내 말은 좀 더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었잖아. 이런 식으로 일을 키우는 건 결국 너를 더 위험하게 만들 뿐이야.”그는 말을 멈추고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지원아, 내가 말하는 건 진정우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상황을 냉정하게 보자는 거야.”나는 그가 내 뜻을 왜곡할까 봐 걱정하지 않기 위해 선을 그었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봤자 소용없어. 게다가 브라운의 목표는 나니까 진정우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가 더 대담해질 거야.”브라운은 이미 진정우와 강유형이 함께한 연회에서 나를 괴롭혔고 그는 아예 두 사람을 무시하고 행동하는 거였다.“지금은 그의 팬들이 더 난리가 났지.” 강유형은 멀리 있는 남자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지원아, 넌 지금 어디에 있든 위험할 수 있어. 그래서 여기에 있는 건 안전하지 않아.”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강유형이 나에게 말한 의도를 알겠지만 내가 그와 함께 호텔에 가는 건 더 불편한 일이었다.내가 그에게 피를 주고 진정우는 이미 자기와 헤어졌다고 오해하고 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있으면 상황이 더 복잡해지겠지.그래서 나는 그럴 수는 없었다.“그의 팬들이 나를 노리고 있는 거니까 어디에 있든 난 위험할 거야.”나는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강유형은 턱선
“경기를 보러 온 거야? 티켓 샀어?” 강유형이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아직 안 샀어. 너는 티켓 있어? 티켓 구하기 힘드니까 내가 네 걸 살게. 얼마야?”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빠른 길이 있는데 일부러 돌아가는 건 어리석은 일이니까.그러자 강유형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있긴 한데 안 팔아.”그는 말하자마자 주머니에서 티켓을 꺼냈고 그것도 두 장이었다. “이미 나한테 남겨두라고 했어. 이건 신지태가 준비한 거야.”그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잠깐 떨렸다. 신지태는 나에게 오라고 연락도 안 했는데 티켓을 남겨둔 걸 보면 나를 기다린 거였을 거다. 내가 안 왔으면 실망했을 것 같았다.“한 장 더 줄 수 있어?”강유형이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또 다른 티켓을 꺼내주었다.“강유형, 너 진짜 티켓 파는 사람 같아.”나는 티켓을 받으며 그를 놀리듯 말했다. 강유형은 웃기만 했지 특별히 대답은 하지 않았고 나도 더 이상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그때, 마침 소지훈이 진소영을 데리고 내려왔다. 그는 진소영의 짐을 밀어주고 진소영은 수줍게 그의 옆을 따르며 둘은 정말 달콤한 느낌을 주었다.“친구들이야.” 나는 강유형에게 두 사람을 소개하며 일어섰다.진소영은 소지훈과 함께 내 쪽으로 걸어오며 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새언니.”나는 진소영을 보며 그녀가 강유형을 경계하듯 쳐다보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의도적으로 ‘새언니’라고 불렀다. 이건 분명 강유형을 자극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지훈이가 잘 돌봐줄 거야. 그런데 만약 뭐가 이상하거나 네가 괴롭힘당하면 언제든지 전화해.”나는 진소영에게 말하는 척하며 소지훈에게 경고했다. 진소영은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소지훈을 지키려고 했다.“지훈 오빠는 저를 절대 괴롭히지 않아요.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나는 소지훈에게 티켓을 건네며 말했다.“이건 돈으로 살 수 없는 거야.”“고마워요, 새언니.”진소영은 예의 있게 답하며 또다시 나를 ‘새언니’라고 불렀다.“잘 가. 뭐 필요하면 연
“예쁜 아가씨,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순간적으로 긴장이 되어 고개를 들었다.그러자 흰머리의 외국인 할머니가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죠?” 나는 예의 있게 물었다.“커... 커피 한잔 사주실 수 있을까요? 돈이 없어서 너무 오래 마셔보지 못했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면서 그런 그녀가 불쌍하게 느껴졌다.그래서 나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정말 고마워요.” 그녀는 내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여기 앉아서 마셔도 될까요?”선한 마음으로 도와주는 거니까 앉게 해주는 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저기요. 저쪽 자리가 비었는데 그쪽으로 앉으세요.”나는 깜짝 놀라서 그를 보았다. ‘강유형이 왜 여기 있지?’어리둥절한 사이 강유형은 내 커피를 마시려던 그 할머니에게 옆자리를 가리키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건네주었다.“커피 드시고 싶으시면 직접 주문하시면 돼요.”강유형의 행동에 그 할머니는 그대로 물러나고 커피도 주문하지 않고 나갔다.나는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아무 말 없이 지켜봤다. 할머니가 돈을 들고 가는 모습에 미묘한 불쾌감이 들었다. 그때 강유형이 다시 말을 꺼냈다.“봤지? 그 할머니는 사실 커피를 마시고 싶었던 게 아니야.”“돈을 원한 거야?”“그래. 만약 오늘 그 할머니가 여기 앉아서 커피를 주문하게 되면 10분도 안 돼서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거야. 그러면 누군가 신고하고 넌 커피를 사준 사람으로 경찰에 끌려갈 거야.”강유형의 말에 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 말이 떠오르면서 신지태가 겪었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믿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강유형의 말에 반박했다.“사람들을 그렇게 나쁘게만 볼 필요 없잖아.”강유형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핸드폰을 꺼내 내 앞에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한 할머니와 젊은 여자가 싸우는 영상이 나왔고 내용은 강유형이 말한 것과 거의 똑같았다.
오늘 소지훈을 만나게 된 목적을 떠올리며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지훈 씨, 이번에 소영이가 경기를 보러 온 것도 지훈 씨를 만나기 위해서예요. 둘이 드물게 함께 시간을 보낼 기회니까 며칠 신경 써달라고 한 거예요. 이 기회를 통해서 지훈 씨도 마음을 확실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소지훈은 잠시 놀란 듯 표정이 굳었다.“누나,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나는 소지훈이 진소영에게 접근한 이유를 알고 있으니 소지훈의 말도 맞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진소영이 내 곁에 있는 건 너무 위험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소지훈에게 그녀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괜찮아요. 제가 지훈 씨를 믿으니까 괜찮아요.” 나는 그를 믿는다는 말로 한 번 더 언급했다. 그러자 소지훈은 표정이 살짝 어색해졌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믿어줘서 고마워요, 누나.”내가 커피잔을 살짝 들어 올리자, 그는 웃으며 받아 주었다.“희연 씨의 부모님은 어떻게 지내요?” 나는 불현듯 그 부부가 생각났다.“그분들은 괜찮아요. 아마 희연이가 병원에서 두 해 동안 누워 있었을 때 이미 그 사실을 받아들인 것 같아요. 그런데... ”소지훈은 잠시 망설였다. “최근엔 전혀 연락을 안 드렸어요.”“그분들이 지훈 씨 보면 마음 아파할까 봐?” 나는 그가 어떤 마음일지 눈치챘다.“그냥 아픈 게 아니라 저를 미워하실 거예요. 만약 제 탓이 아니었다면 그분들은 절대 딸을 잃지 않으셨을 테니까요.”소지훈은 깊은 자책감에 잠긴 듯했다.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위로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아, 맞다. 희연 씨 아버님이 저한테 전화했어요.”소지훈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뭐라고 했는데요?”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누나 전화번호랑 가족 상황을 물어보셨어요.”소지훈은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내가 그들에게 그런 걸 말한 적은 없지만 그들의 묻는 의도가 무엇일까 궁금했다.혹시 내가 자기 딸과 닮아서 그리움에 잠시나마 얼굴을
소지훈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지 않았다. 혹은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나는 내가 짐작한 대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지훈 씨, 혹시 일부러 소영이 곁에 나타난 건가요?”소지훈은 갑자기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그의 반응 자체가 내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그때 나는 내 얼굴과 유난히 닮은 유희연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유희연이 세상을 떠난 후, 소지훈은 나와 함께 진소영의 수술실까지 갔었다.“소영이와 가까워지면 나랑 자주 만날 기회가 생기고 그러면 희연 씨를 보는 것 같아 좋아요?”소지훈은 급하게 부인하며 대답했다.“아니에요, 누나. 정말 그런 생각 한 적 없어요.”그는 급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진정하려는 듯했다. 나는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누나,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전 절대 누나를 희연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물론 두 분이 닮으셨지만 저는 분명히 알고 있어요. 희연이와 누나는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소지훈은 진지하게 말했고 그 말은 거짓말 같지 않았다. 나는 조금 안도하며 그를 바라봤지만 여전히 걱정됐다.소지훈이 나를 유희연이라고 생각하며 그리움과 고통을 끊어내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다. 비록 아니라고 했지만 여전히 내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그런데 왜 자꾸 소영이 곁에 나타나죠? 이건 우연일까요?”소지훈은 입술을 꼭 깨물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지훈 씨, 만약 말할 수 없다면 더 이상 소영이를 만나지 마세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누나, 소영이에게 나쁜 의도가 없어요. 저는 그냥... 그녀를 지키고 싶어요. 조용히 지키고 싶어요.”소지훈은 다시 말을 멈췄다.“그냥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그의 진심은 보였지만 그는 진소영과 특별한 인연이 없고 그렇게 깊은 감정으로 지켜줄 이유가 없어 보였다.“왜요?”나는 그 질문을 던지면서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르며 순간 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지훈 씨, 혹시...”이번엔 내가 당
“지태 오빠의 경기는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까? 지태 오빠가 위험한 건 아닐까?”나는 어쩔 수 없이 신지태가 걱정되었다.“신지태는 괜찮아.”진정우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나는 창밖에 짙은 어둠을 바라보며 물었다.“나는 정말로 돌아가야 하는 거야?”진정우는 잠시 침묵한 후 말했다.“내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 그리고... 그 사람이 보낸 메시지는 삭제하고 차단해.”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잠시 멈췄고 나는 그가 더 말할 줄 알았지만 결국 전화를 끊었다.이국의 밤은 원래 잠들기 어려운 법인데 이렇게 상황이 꼬여버리니 나는 아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진정우의 말을 듣고 나는 그 사람의 메시지를 삭제한 뒤 신지태에게 보낸 메시지를 열어보았다. 정말로 그에게 안부를 묻고 싶었지만 그가 지금 긴급 훈련 중이라는 걸 알기에 그의 마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다시 채팅창을 닫았다.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잠이 오지 않아 억지로 눈을 감았다. 그러다 문득 진소영이 깬 걸 알고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전화하는 소리도 들렸다.그녀의 목소리는 원래 부드러운데 사랑하는 사람과 전화할 때는 더 부드럽고 온화했고 나는 듣기만 해도 행복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소지훈이라는 걸 생각하니 나는 또 불안해졌다.그래도 진정우가 그 사람에 대해 조사를 다 했을 테니 그가 나에게 진소영을 소지훈에게 맡기라고 했으니 나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나는 진소영이 소지훈과 전화하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 들었다. 아마도 그 행복한 기운이 내 불안을 치유해 준 것 같았다. 이 잠은 오전 11시까지 이어졌다.내가 눈을 뜨자 진소영이 책을 보고 있었다. 소지훈이 그녀에게 준 에너지는 확실히 긍정적이었다.“밥 먹었어?”나는 가장 먼저 진소영의 식사를 걱정했고 진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음식 주문했어요.”진소영은 공부도 잘하고 어젯밤에 우리가 돌아왔을 때도 내가 전화해서 음식을 주문했다. 오늘은 내가 나서지 않아도 혼자서 해결할 수 있었다
나는 전방위적으로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그런데 그는 왜 나를 따라다니는 걸까? 복수라도 하려는 걸까?나는 휴대폰을 꽉 쥐고 화면을 응시지만 더 이상 그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많이 고민하다가 나는 그 메시지를 캡처해서 진정우에게 보냈다.브라운이 나를 노리고 지금 진소영이 내 옆에 있다면 내가 위험에 처할 때 진소영도 연루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나는 진정우에게 내 위험을 알리기로 했다. 그가 나를 보호하고 싶지 않더라도 적어도 진소영은 그가 방치할 수 없을 것이다.이런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진정우에게 도움을 요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습관이겠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그에게만 의지하는 것 같았다. 설령 그가 나를 원하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내 전화가 울렸다. 진정우였다.나는 바로 전화를 받았지만 먼저 말을 꺼낸 건 진정우였다.“걱정하지 마. 내가 사람을 보내서 너를 지켜줄게.”그 말을 듣고 내 마음이 묘하게 따뜻해졌지만 그 따뜻함 속에 씁쓸함도 섞여 있었다.그래도 나는 여전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날 지켜달라는 게 아니라 내가 걱정하는 건 소영이가 내 옆에 있는데 만약 내가 뭔가 문제가 생기면 소영이도 위험해질 거잖아. 네가 그런 상황을 방치하지 않길 바라는 거야.”전화기 너머에서 진정우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었고 전화를 끊지도 않았다.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나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브라운이 왜 나를 노리는데? 혹시... 신지태 때문이야?”브라운이 처음 만났을 때 나를 스누커 소녀라고 불렀고 나는 사실 신지태와만 게임을 했었다. 게다가 최근에 신지태 사건도 있었고 나도 그를 만나러 이곳에 왔다.그래서 브라운이 나를 따라오는 이유는 아마도 그것 때문일 거로 생각했다.진정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신지태는 그저 구실일 뿐이야. 그 사람들은 너를 이용해서 나를 공격하려는 거겠지.”그 말에 나는 잠시 놀랐고 바로 그때 강유형이 나한테 했었던 말이 떠올랐다.“Q 클럽의 보스
“지원아, 소영이는 어디 있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진정우는 전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로 거의 간절하게 물었다.그 목소리에 나는 마음이 찔리듯 아팠다. 오랜만에 그의 입에서 지원이라는 내 이름이 들려왔다.그때 검사실 문이 열리면서 진소영이 나왔고 나는 휴대폰을 그녀에게 건넸다.“널 찾아.”진소영은 잠시 멈칫하다가 전화를 받아 귀에 대고 말했고 나는 조금 떨어져서 그녀의 말을 들었다.“비행기 타고 오느라 너무 힘들었어. 내가 걱정돼서 언니가 날 데리고 병원에 왔어. 괜찮대. 의사님은 심장에 문제없다고 했어. 그냥 좀 쉬면 될 거라고 했어.”“알았어. 언니가 날 잘 챙겨주니까 오빠도 걱정하지 마. 오빠, 나는 언니 외에 다른 여자를 절대 안 받아들여. 오빠가 다른 여자랑 결혼하면 나한테도 이제 오빠는 없는 거야.”진소영의 말에 나는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고 숨이 안 올라와서 나는 숨을 헐떡이며 그 말을 듣고 있었다.“알았어. 오빠, 걱정하지 마. 나도 언니 잘 챙겨줄게.”마지막 말은 좀 더 크게 나왔고 나는 그 말이 나에게 들리게 하려고 일부러 크게 말한 거라는 걸 알았다.진소영은 진정우와 나를 위해 너무 신경 쓰고 있지만 사랑은 그렇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언니, 괜찮아요?”진소영이 나에게 묻자 나는 이미 감정을 추스르고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괜찮아. 너는 좀 나아졌어?”진소영은 보고서를 건네주며 말했다.“보세요. 제가 괜찮다고 했잖아요. 언니는 뭐 하러 이렇게 돈 써서 검사까지 한 거예요.”“검사 안 하고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네 오빠가 내게 뭐라고 할 것 같아서.”나는 장난스럽게 대답했다.“그럴 리 없잖아. 오빠는 언니의 목숨을 자기 목숨보다도 훨씬 소중하게 생각해요.”진소영은 언제나 진정우를 챙기려고 하는 나쁜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나는 대꾸하지 않고 그녀를 데리고 호텔로 갔다.밤이 되자 진소영은 잠이 들었지만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휴대폰을 꺼냈다. 안리영이 보낸 여러 개의 읽지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