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우에게 기대어 있던 순간, 소희연의 굳은 표정과 꽉 쥔 주먹이 눈에 들어왔다. 그 표정에는 분명히 질투가 가득했다.나는 문득 가슴이 답답해지며 무심코 그녀를 불렀다.“소 교수님.”그러자 소희연은 안리영과 구안석을 바라보던 시선을 나에게로 돌렸다. 내가 묻기도 전에 그녀는 냉정한 말투로 말했다.“환자는 30분 후에 관찰실로 옮겨질 예정입니다.”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서서 걸어갔다. 그 뒷모습에는 억울함과 분노가 뚜렷하게 묻어 있었다.나는 진정우를 살짝 건드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질투하나 봐.”진정우는 동생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덕에 긴장했던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내 손을 꼭 잡았다.“그래. 구 교수님이 잘하셨네.”어?나는 놀란 눈으로 여전히 안리영을 안고 있는 구안석을 보다가 다시 진정우를 바라봤다.진정우는 나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구안석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안리영을 껴안은 것은 단순히 그녀를 사랑해서만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며 안리영에게 안심을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진정우의 말을 듣고 나니 역시 남자는 남자를 더 잘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구안석은 그제야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수술 중 환자가 과다 출혈이 있었고 거의 전신 수혈 두 번에 가까운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관찰실에서 상태를 지켜볼 겁니다. 이식 후 78시간이 가장 중요한 거 아시죠? 간호사가 계속 관찰하면서 이상이 생기면 바로 대처해야 합니다.”그의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태도에 우리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만약 거부반응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요?”나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물었다.“대응 방안은 충분히 준비돼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구안석은 침착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그의 말에 진정우도 마음이 한결 놓였는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정말 감사드립니다. 교수님.”구안석은 미소를 지으며 안리영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안리영 선생님 친구들이라면 제 가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부
진소영은 3일 후에 관찰실을 나왔다.다행히도 거부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고 몸 상태도 아주 좋아서 구안석의 예상을 뛰어넘는 회복 속도를 보였다.“보아하니 다른 사람의 심장이 아주 잘 맞나 봐.”안리영도 감탄하며 말했다.나는 꽃다발을 들고 가며 살짝 농담처럼 말했다.“아마도 심장 주인이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안리영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기증자의 정보를 알 수 있어?”안리영은 나를 힐끗 쳐다보며 단호히 말했다.“몰라. 그런 건 철저히 비밀로 하니까.”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냥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니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준 그 숭고함이 경이로웠다.그때, 관찰실 문이 열리고 진소영이 밖으로 나왔다.3일 동안 우리가 종종 그녀를 보러 갔었지만 이번은 특별한 순간이었다.그 문은 진소영에게 다시 태어나는 문이었다.그 문을 통해 그녀는 새로운 건강한 삶으로 나아갔다.“오빠! 언니! 리영 언니!”진소영은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마치 돌고래의 울음소리 같았다.진정우는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며 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나는 꽃다발을 건네며 그녀를 안아주었다.“새로운 삶을 시작한 걸 축하해!”안리영도 손을 내밀어 그녀와 악수하며 말했다.“좋은 미래를 향해 달려가자.”진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흘렸다.수술 때조차 울지 않았던 그녀가 새 삶을 맞이한 이 순간 눈물을 흘린 것이다.그녀의 눈물은 마치 새 생명이 세상에 첫울음을 터뜨리며 인사하는 것 같았다.수술 후 2주가 지나고, 마침내 놀이공원이 개장할 준비를 마쳤다.그 소식은 강진혁을 통해 들었다.“지원아, 개장식에 와줄 거지?”강진혁이 물었다.나는 이미 결정했기에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네. 갈게요.”이번 개장은 나에게도 중요한 의미였다.강유형과 KS 그룹과의 마지막 이별을 그리고 나의 과거와의 작별을 의미했다.그리고 난 단지 앞만 보고 달리고 과거에 다시는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혹시 강유형도 오나요?”나는
진소영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회복 과정에서 여전히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길 가능성은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손길이 필요한 상태였다.진정우는 낮에는 간병인을 고용했지만 밤이 되면 직접 병원에 가서 동생을 챙겼다.그래서 요즘 우리 둘이 함께 보내는 시간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낮에는 각자 일 때문에 바쁘기도 했다.“시간 있어?”내가 신지태 오빠의 경기에 관해 이야기하며 물었을 때 진정우가 의외로 대답했다.“있어.”그의 대답에 나는 의아하면서도 기뻤다.“근데 소영이는...”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진정우는 단호히 말을 잘랐다.“내가 알아서 할게.”그의 확신에 찬 말에 나는 마음이 든든해졌다.“너랑 제대로 데이트를 못 한 지 너무 오래됐잖아.”그가 이마를 내 이마에 맞대며 속삭이자 나는 마음이 찡해졌다.맞다.요즘 그는 동생을 돌보느라 바빴기에 자연스레 나와 있는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물론 내가 이것을 가지고 질투를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지태 오빠의 경기는 풍진에서 열렸다.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의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든 픽업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우리 둘 다 의아해하며 물었고 기사는 지태 오빠가 직접 준비했다고 설명했다.“와, 진짜 세심하네. 오길 잘했어. 안 그랬으면 이렇게 정성껏 준비한 걸 헛되게 할 뻔했잖아.”나는 그의 배려에 감탄하며 말했다.게다가 같은 비행기를 탄 승객 중 상당수가 지태 오빠의 팬이었다.나는 그제야 그의 인기가 이렇게 많다는 걸 실감했다.아직 경기장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팬들의 뜨거운 열정에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지태 오빠가 이렇게 인기 많을 줄은 몰랐네. 그냥 당구장 관장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말이야.”나는 감탄하며 말했고 진정우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하지만 나는 그의 조용한 성격을 알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그는 지태 오빠와 친한 사이도 아니니 굳이 흥미를 보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나
진정우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기에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었다.그의 말투에 나는 살짝 겁이 나면서도 장난기가 쑥 들어갔다.병으로 고생한 동생을 돌보느라 힘든데 지금 나까지 달래야 한다니 얼마나 피곤할까 싶었다.순간적으로 미안함이 밀려와 더 이상 그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그의 손을 살짝 잡아당기며 솔직하게 말했다.“나랑 지태 오빠는 그냥 친구야. 그래서 너 앞에서 편하게 얘기한 거지. 마음에 거리낌이 없으니까.”하지만 말하고 나니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사실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건 아니었다.그냥 말을 꺼내지 않는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알아.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진 않아.”진정우는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았다.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했다.내 앞에서 진정우가 다른 여자를 칭찬한다면 나도 기분 나빴을 테니까.아마 바로 화를 내며 그를 쫓아냈을지도 모른다.“미안해, 내 잘못이야.”나는 조용히 사과했다.그러자 그의 굳어 있던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나한테는 입으로 사과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야.”그 말에 그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챘다.그에게 조금 더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방에 가서 행동으로 보여줄게.”그러자 그의 목젖이 떨렸고 귀끝이 붉게 물들었다.그가 내 의도를 정확히 이해한 게 분명했다.그렇게 쉽게 풀리는 그의 모습에 나는 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정우 씨, 나 피곤해.”그는 바로 대답했다.“안아줄게.”사람들로 북적이는 호텔 로비에서 그가 나를 안겠다고 하자 오히려 내가 민망해졌다.나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농담이야. 안아달라고 한 건 아니고...”그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내 몸이 갑자기 공중으로 들렸다.하지만 그가 나를 안아 든 건 아니었다.대신 내 몸을 캐리어 위에 올려놓고 캐리어를 밀기 시작했다.처음 해보는 캐리어 타기 체험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예전에 강유형과 출장 다닐 때 한 번쯤 캐리어 위에 앉아보고 싶었지만 말도 꺼내지 못했다.하지만
강유형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고 굳어 있었다. 평소의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네?”옆에 있던 남자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다시 쳐다보며 말했다.“못 알아볼 리 없는데요? 대표님 약횬녀가 그렇게 예쁘신데... 제가 어떻게 헷갈리겠어요?”“내 약횬녀는 지금 집에서 내 부모님을 돌보고 있어.”강유형은 담담하게 대답한 뒤 긴 다리를 뻗어 걸어갔다.“뭐라고요? 그럴 리가...”남자는 여전히 충격을 받은 듯 내 얼굴을 살피다가 강유형의 뒷모습을 쫓아가며 계속 중얼거렸다.“너무 닮았는데? 완전히 똑같은데?”강유형은 멀어져 갔고 나를 난처하게 만들 법한 말을 하진 않았다. 그가 이렇게 거짓말을 할 줄은 정말 예상 밖이었다.평소 같았으면 분명 사실을 인정하며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나아가 진정우까지 난처하게 했을 텐데 말이다.그런데 오늘의 강유형은 달랐다. 차가운 태도로 나를 스쳐 지나가며 마치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다.그는 변한 것 같았다. 더 이상 예전처럼 쉽게 화를 내거나 성급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낯선 사람처럼 행동하는 그의 모습은 전에 없던 차분함이었다.강유형은 이번에 돌아온 뒤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일상에서 완전히 잊힌 것 같았다. 어쩌면 그가 나를 진심으로 놓아준 건지도 모른다.나는 그런 생각에 잠긴 채 있었고 진정우는 그런 나를 엘리베이터로 조용히 이끌었다. 정신을 차리고 그의 얼굴을 보니 특별히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방금 일이 그에게도 불편했으리라 짐작됐다.내가 그의 손을 살짝 잡아끌자 그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괜찮아. 앞으로도 이런 일은 또 생길 거야.”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곳이든 해동이든 오늘 같은 상황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그리고 오늘 일이 벌어진 이유도 따지고 보면 내가 이 호텔이 지태 오빠가 준비한 장소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태 오빠와 강유형이 친한 사이인 걸 알면서도 무심코 잊어버린 내 실수였다.하지만 이미
솔직히 내 핸드폰이 언제 꺼졌는지는 기억도 안 났다. 다만 진정우가 욕실에서 나를 안아 침대로 옮겼을 때 내 몸은 완전히 녹아버린 것처럼 힘이 하나도 없었다. 너무 피곤해서 눈꺼풀조차 들기 힘들었던 나는 이불 속에 파묻혀 그대로 잠들었다.“조금 눈 붙이고 있어. 내가 죽 끓여줄게.”진정우의 낮고 약간 쉰 목소리가 귀에 스며들었다. 나는 희미하게 대답만 하고 꿈속으로 빠져들었다.하지만 잠결에도 핸드폰 소리가 자꾸 들렸다. 뭔가 귀찮았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눈도 뜰 수 없었다. 결국 손을 더듬어 옆자리를 찾았지만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정우 씨... 정우...”나는 그를 부르기 시작했고 진정우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상체를 숙이며 물었다.“왜 그래?”“핸드폰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나는 눈을 뜨지도 않은 채 중얼거렸다.“뭐라고?”그는 내 말을 잘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핸드폰, 시끄러워.”다시 한번 반복하자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지원아, 꿈꾼 거야. 네 핸드폰은 꺼놨어.”정말 그랬을까? 그런데도 계속 들렸던 그 소리는 뭐였을까? 나는 다시 묻지 않고 그대로 다시 잠이 들었다.눈을 떠보니 진정우는 방 한쪽의 책상에 앉아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너무나도 집중하고 있어서 내가 깬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그의 손길이 멈추었다. 그는 도면을 그리고 있었다.그가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허진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됐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이렇게 한 번도 빠트리지 않고 묵묵히 해내고 있었다.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그의 모습이 방해될까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지만 내 움직임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자마자 펜을 내려놓고 다가왔다.“왜 나를 안 불렀어?”“너무 바빠 보여서.”내가 대답하자 내 목소리가 쉰 소리로 나왔다. 그제야 지난밤의 열정적인 순간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진정우도 알아차렸는지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이따가 목캔디 사다 줄게.”“괜찮아. 난.
“머리만 감고 샤워를 안 한 적은 있지.”진정우의 대답에 나는 웃음이 터졌다.“알았어. 네 마음대로 해. 하지만 빨리 씻어 그러다가 밤을 새우겠어.”나는 재빨리 그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조금만 더 늦었다간 또다시 그에게 끌려갈 것 같았다.처음 진정우를 만났을 때 그는 차갑고 거칠며 여자들에게는 관심조차 없고 성욕이 전혀 없는 남자처럼 보였다.하지만 이제는 이런 남자가 욕망을 자극받으면 얼마나 통제 불가능한지 알게 되었다.그가 씻으러 가고 나는 식탁을 정리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께 배운 습관 덕분에 먹고 난 그릇을 그대로 두는 일이 없었다.아직 주방 정리가 끝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었고 단지 옆방에서 나는 소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울렸다. 확실히 우리 방이 맞았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누구지?나는 손을 닦으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진정우가 방 안에 있다는 사실이 나를 조금 안심시켰다.그래도 습관적으로 문 앞에서 먼저 물었다.“누구세요?”“나야.”귀에 익은 목소리에 몸이 얼어붙었다.강유형이었다.이 늦은 밤에 왜 날 찾으러 온 거지?오늘 아침에 마주쳤을 때도 마치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갔던 그가 왜 지금 내 문 앞에 있는 거지?내가 문을 열지 않자 강유형은 문을 세게 두드리기 시작했다.나는 그가 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는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주변 사람들을 깨울 걱정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나는 그와 마주하는 게 싫었지만 이웃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내가 마침내 문을 열자 강유형은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머리는 살짝 헝클어져 있었고, 문을 두드리던 손은 멈춰 있었다.“무슨 일이야?”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전화를 받지 않았어?”그의 말에 나는 오늘 전화가 끊임없이 울렸던 기억이 떠올랐다.“못 들었어. 그런데 왜...”그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묻기도 전에 그는 내 팔을 잡았다.“나랑 가자.”그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나는 본능적으로
“강 대표님, 시간이 없어요!”비행기 승무원이 서둘러 출발을 요청했다.개인 비행기라도 정해진 항로와 시간을 준수해야 하는 규칙이 있었다. 내가 전화하면 출발을 지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됐어.”나는 잠자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딱 1분만 줄게.”강유형이 승무원을 향해 말했고 그 후 그는 자신의 휴대폰을 내게 건넸다.그가 이렇게 내게 전화를 허락한 것이 의외였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그는 얼마든지 규정을 이유로 거절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나는 그의 달라진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강유형은 내 시선을 피하고 창밖을 응시했다.“출발하세요.”나는 휴대폰을 승무원에게 돌려주며 말했다.강유형은 고개를 돌려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승무원은 그의 의사를 묻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이 비행기의 실제 소유자였기 때문이다.잠시 후, 강유형은 내게서 시선을 돌려 냉정하게 말했다.“출발해.”승무원이 그의 지시를 무전으로 전하며 비행기는 천천히 이륙 준비를 했다.그때, 강유형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화면을 한 번 보고 나서 나를 다시 바라봤다.나는 그것이 진정우의 전화임을 직감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내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비행기가 이륙 중이었고 나는 이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그의 휴대폰을 받아 확인하니 예상대로 진정우였다. 나는 직접 전화를 끊고 그의 휴대폰을 비행기 모드로 전환했다.비행기가 상공으로 오르고 승무원이 담요와 음료를 가져다주었다.“괜찮아요. 방금 야식을 먹어서요.”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유형이 다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 시선을 외면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검은 밤하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고 어두웠다. 그 어둠은 왠지 모르게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가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강유형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삼촌이 갑자기 위독해진 이유도 묻지 않았다.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우리는 병원으로 달려갔다.병실 밖에서
사람들이 나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모두 의혹 가득한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멀찍이 서서 바라볼 뿐이었다.용준호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어느 새끼가 감히 널 구하려는지 두고 보자고!”그는 너무나도 오만방자했다.“오빠!”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용준호가 걸음을 멈추었다. 뒤집힌 시야 속에서 만두 머리를 한 여자아이를 보았다.바로 용은서였다.내가 이 여자아이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용준호는 콧방귀를 뀌었다.“저리 썩 꺼져.”살벌한 목소리에 평범한 아이였다면 벌써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하지만 용은서는 그의 혈육이었고 평소에도 늘 호통에 익숙했는지 전혀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물었다.“왜 사람을 업고 있어? 강도 같아!”대담한 발언이었다.“꺼지라니까.”용준호는 음을 길게 끌며 말했다.“사람 말을 못 알아듣나? 집에서 안 가르쳐줬어?”용은서는 눈을 흘기며 받아쳤다.“오빤 맨날 이렇게 화내.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용준호가 다시 호통을 치려는 순간 용은서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오빠, 나 할 말 있어.”용은서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내가 제대로 서 있기만 했어도 당장 품에 안아서 볼에 뽀뽀를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하지만 용준호는 여전히 사나웠다.“꺼지라고 했지. 말 안 들으면 발로 차버린다.”혈육에게 말이 너무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하지만 용은서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오히려 그의 바지 끝을 움켜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은서야, 언니 구해줘!”나는 목소리를 냈지만 어린아이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 소꿉장난처럼 느껴져 부끄럽기 그지없었다.“윤지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한테 도움을 청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냐?” 용준호는 나에게도 으르렁댔다.지금의 그는 미친개처럼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중이었다.“오빠, 왜 언니를 업고 있어? 다쳐서 걷지 못해?”용은서의 질문은 철없는 아이다운 순수함이 묻어났다.용준호의 인내심은 바닥을
“싸움이 났어요, 밖에서 누가 싸우고 있어요!”복도에서 급히 들어온 누군가의 외침에 나는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리고 그 순간 용준호의 주먹이 강유형을 향해 뻗어가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그만둬! 준호 오빠, 당장 멈춰!”나는 소리치며 달려가 그를 말렸다.하지만 그는 내 손을 뿌리치더니 힘껏 내던졌다. 나는 벽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하얘짐을 느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킨 것처럼 어질어질해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그동안 단 한 번도 반격하지 않던 강유형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애틋했다. 걱정이 담긴 목소리였다.“지원아...”그는 내 이름을 부르자마자 곧장 용준호에게 주먹을 날렸다. 곧이어 두 사람은 완전히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두 사람을 바라보다 결국 누군가에게 부탁해 경호원을 불러달라고 했다.몸싸움을 겨우 뜯어말렸을 땐 이미 멍과 상처가 두 사람의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강유형은 계속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한 손으로 코를 막으며 고개를 젖혀 코피를 거꾸로 흐르게 했다.이들이 왜 갑자기 싸운 건지 너무 궁금했지만 강유형의 코피가 너무 심하게 나서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하는 수밖에 없었다.“강유형, 병원으로 들어가자.”그는 꼼짝도 하지 않더니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너는 괜찮아?”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끌었다.“나랑 같이 들어가자”“괜찮아. 금방 멈출 거야.”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내가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찰나 용준호가 고함을 질렀다.“강유형, 이 개자식아! 우리 엄마 어딨어? 당장 우리 엄마 데려와!”나는 멍하니 굳어버렸다. 분명 그의 어머니는 화재로 숨졌다고 했는데 왜 강유형한테서 어머니를 찾는지 알 수가 없었다.“준호 오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나는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봤다.“네가 직접 물어보든지.”“신경 쓰지 마. 미쳐서 그래.”강유형은 단호하게 말했다.
강유형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의 눈가엔 슬픔이 가득했다.수정 스님은 행각승이었다가 법운사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누구도 그의 고향이나 가족을 알지 못했다.굳이 혈육을 꼽으라면 강유형이 유일한 존재일 터였다.그는 어릴 적부터 수정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하며 경을 들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지원아, 먼저 부상자들부터 도와줘.”강유형이 내 슬픔을 잠재우듯 말했다.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나는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화재는 갑자기 일어난 거야? 너 그때 절에 있었어? 이상한 점은 없었고?”강유형의 눈빛이 짙어졌다.“지원아, 그건 내가 조사할 테니 네가 나설 필요 없어.”그 말에서 나는 그가 무언가를 의심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내가 위험에서 멀어지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강유형, 나도 모르는 척 편히 있으려 했지만 이 불은 나를 노리고 온 것 같아서 말이지.”내가 추측을 내뱉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위로의 말이 오리라 예상한 찰나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진정우, 곧 돌아오지?”맞았다. 강진혁이 직접 알려준 소식이었다.“이 화재가 진정우랑 관련 있다는 거야?”내 물음에 그는 담담히 말했다.“네가 방금 너 자신이 표적이라 말했으니 네 일은 곧 그의 일과 마찬가지인 셈이지.”하긴 지금 내 존재는 진정우의 약점이자 방패나 다름없었다.“지금은 급박한 때야. 조심해.”강유형은 문득 말을 멈추더니 이내 덧붙였다.“가능하다면 내 곁에 있어.”그가 나를 지키려는 의도임을 알았다.그래도 나는 되물었다.“진짜로 내가 표적이라면 네 힘만으로는 부족할 텐데.”법운사에 불을 지른 자들은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다. 수정 스님마저 피해자로 만들 정도로 그들은 광기에 사로잡혔던 것이다.김지영이 역시 불길에 휩싸일 줄은 용씨 가문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업보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 따뜻한 분께서 이런 재앙을 마주했다니, 안타까울 뿐이었다.용진표의 혼란스러운 이성 관계가 떠올
“우린 잘 몰라요. 찾고 싶으시면 병원에 한번 가보시죠.”여기까지 와서 확인한 건 그저 화재 직후 법운사의 참담한 모습뿐이었다.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아니,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강유형이 무사하다는 소식도 들었다.나는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혹시 다친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나는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안은 분주함으로 가득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모두 종종걸음에 가까운 발걸음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화재로 인한 응급 상황 때문에 병원은 비상 진료 통로를 열어놓은 상태였고 나는 비교적 빠르게 부상자들이 치료받는 구역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강유형을 보았다.그의 옷은 여기저기 재로 인해 더럽혀져 있었고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조차도 발견하지 못했다.이런 모습의 강유형은 처음이었다. 더는 높은 곳에 있는 존재가 아니었고 넘볼 수 없는 거리감도 사라졌다. 고귀함도 자존심도 모두 내려놓은 채, 그저 평범한 남자로서 가장 위대한 일을 하고 있었다.직접 보기 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이토록 현실적이고 다정한 그의 모습이라니 꿈꾸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나는 짐지영이 너무 걱정돼 곧장 그에게 다가갔다.“강유형.”그는 나를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지원아,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뉴스 봤어. 계속 전화를 걸었는데 받질 않아서 법운사에도 직접 다녀왔어...”나는 말끝을 흐리며 곧장 부상자들을 살펴보았다.“사모님은? 괜찮으셔?”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착했던 내 가슴이 순간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강유형, 왜 말을 안 해? 사모님 설마...”내가 채 묻기도 전에 용준호가 허둥지둥 달려왔다.“우리 엄마 어딨어? 엄마! 엄마...”늘 껄렁하고 건들거리며 세상에 무서울 게 없어 보이던 용준호였다.하지만 지금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눈빛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강유형, 우리 엄마 어딨어?”그 역시 나처럼 물었다.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법운사로 향하는 길에 나는 강유형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기나긴 연결음 끝의 자동응답뿐이었다.가슴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요즘 그가 법운사에 머물고 있었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연락도 되지 않으니 머릿속은 온통 나쁜 상상으로 가득 찼다.그에게 전화를 건 건 단순히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부상자나 사망자가 있는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하지만 그에게 건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못했다.나는 액셀을 밟으며 용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어머니가 바로 그 절에 계셨으니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 역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이번엔 아예 거절당했다. 불안은 더 깊어졌다.‘혹시 김지영까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그간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강유형과 김지영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치거나 희생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복잡한 심경 속에서 차를 운전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멀쩡하던 절에 왜 불이 난 걸까?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의도한 일이었을까? 혹시 나를 노린 불은 아니었을까?’만약 안리영이 나를 데리고 조경태의 생신 잔치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그 절에 있었을 것이다. 죽었을 수도, 심하게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내 손에 누군가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걸 얻지 못하면 나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저지른 일이라면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희생시켜서는 안 됐다.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이 나는 어느덧 산기슭에 도착했다. 들이마시는 공기 속엔 타버린 재 냄새가 가득했고 멀리 보이는 산 위엔 아직도 연기가 자욱했다.산을 절반쯤 오르자 경찰이 차량을 막아섰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이
난처한 상황이었다. 도무지 어찌할지 몰라 법까지 들먹이고 말았다.“법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서른이 넘도록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는 건 정상이 아니야. 어느 날 갑자기 남자 며느리라도 데려오면 내가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보겠냐?”조경태는 누가 뭐라 해도 듣지 않겠다는 태도였다.“그럼 제가 하나 약속드릴게요. 절대 남자를 며느리로 데려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조시언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조경태는 씩씩 대며 화를 냈다. 그러자 안리영이 급히 나서며 말했다.“할아버지, 삼촌 좀 그만 괴롭히세요. 안 좋아하는데 억지로 떠민다고 행복해지겠어요?”“이 계집애는 왜 또 얘 편을 드는 거야?”할아버지는 안리영을 흘겨보았다.내가 얼른 말을 이었다.“오늘 온 아가씨들, 저랑 리영이 다 지켜봤어요. 삼촌이랑 어울릴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고요.”지금 이 순간 나도 안리영을 따라 조시언을 삼촌이라 부르고 있었다.“난 못 믿겠는걸.”조경태는 콧방귀를 뀌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정말이에요, 할아버지. 그 여자들, 남 얘기하길 좋아해서 뒤에서 험담이나 하는 사람들이에요. 아까도 삼촌 뒷담 까고 있었어요.”조시언은 그녀를 바라보았고 조경태도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그래? 뭐라고 험담하던?”“삼촌이 나이가 꽤 됐는데도 아직 결혼 안 한 걸 말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삼촌을 차지해서 조씨 가문 며느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수작 부릴 생각들만 하고 있었어요.”안리영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오늘 그 여자들이 조시언을 노리고 온 건 분명했으니 말이다.“그건 좋은 일이잖니.”조경태는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할아버지는 수작 부리는 여자가 좋으세요?”안리영은 조경태가 싫어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조경태는 말이 없었다. 속이 시커먼 여자한테 크게 당할 뻔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안리영은 나를 향해 눈짓을 보냈고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삼촌 짝 찾는 일은 저랑 리영이에게 맡겨주세요.”내 말에 안리영이 눈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안리영과 나는 방 안의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서로 마주 본 채 각자의 소파에 앉은 모습이었다. 한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젊고 준수한 청년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가 너무나 뚜렷해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분명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부자 관계였다.안리영은 조시언이 입양된 아들이라고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의아했다. 당시 나이로 치면 조경태는 조시언을 손자처럼 키워도 이상할 게 없었을 텐데 왜 굳이 아들로 삼은 건지 궁금했다.“시언아, 너 이제 나이도 어린 게 아니잖니. 결혼 안 하겠다는 건 그렇다 쳐도 여자 친구조차 없다니. 밖에서 사람들이 너를 두고 뭐라고 수군대는지 너도 알지?”조경태는 수군대다 같은 말도 자연스럽게 썼다.하지만 조시언은 묵묵히 앉아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조명이 그의 얼굴과 콧대를 선명하게 나누듯 비췄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면서 그의 이목구비는 더욱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깊은 눈썹뼈는 날카로운 선을 연출해 냈다.“사람들이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더라!”조경태는 말을 끝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런 이상한 소문이 퍼지는 건 우리 조씨 가문의 체면을 망치는 일이다. 우린 그런 망신 못 당한다!”조시언은 그 말에도 여전히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평온한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했다.“남의 입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건 그들 사정일 뿐, 우린 신경 쓰지 않으면 됩니다.”“넌 신경 안 쓴다지만, 이 늙은이는 창피해서 못 살겠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지금 당장 사람 하나 데리고 오든가, 아니면 내가 직접 찾아줄 거다. 결혼 안 해도 좋다. 그냥 네 옆에 여자 하나 세워놔라. 사람들이 널 정상으로 보게 말이다!”그 말에 안리영과 나는 동시에 서로의 팔을 꼬집었다. 안 그러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 노
“넌 안 그럴 거야, 맞지?”안리영은 계속 나를 놀리면서도 언제나 내 편이었다.우리는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섰다.조경태는 자줏빛과 금색이 어우러진 긴 도포를 입고 활짝 웃으며 손님들의 축하 선물을 받고 있었다.그는 내가 가져온 선물을 보곤 눈을 반짝였다.“특별한 선물이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그 말에 나는 괜히 민망해졌다.강유형의 어머니도 비슷한 걸 선물했는데 어째서 내 것을 특별하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역시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은 달랐다. 누구보다도 말솜씨가 뛰어났다. 받는 사람도 기쁘고 주는 사람도 흐뭇하게 만드는 한마디였다.“리영아, 구 교수는 어디 갔니? 오늘은 왜 같이 안 왔어?”조경태가 슬며시 물었다.안리영은 내 옆구리를 몰래 콕 찔렀다.“그냥 따로 말 안 했어요. 오늘은 그냥 제가 단순히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온 거거든요.”그러나 이 정도 지긋한 나이가 되면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오늘 같은 잔칫날에 인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고 왔다 해서 구안석이 못 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는 안리영을 힐끔 바라보다 두어 번 웃고는 더 묻지 않았다.“할아버지, 그럼 선물마저 받으시고요. 저는 지원이랑 가서 뭐 좀 먹고 올게요.”안리영은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 했다. 또 무슨 질문이 나올까 봐 걱정된 눈치였다.“그래, 다녀오거라. 다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좀 있다 너희 둘 도움 좀 받아야겠구나.”그 말에 우리 둘은 눈빛을 주고받았다.“혹시 케이크 자르실 때 저희한테 맡기시려는 거 아니에요?”안리영이 농담처럼 물었다.조경태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콕 찔렀다.“이놈의 계집애, 지금 누굴 놀리는 거냐. 케이크 칼 정도는 들 수 있다고! 그게 아니고, 너희 둘한테 자문 좀 구하고 싶어서 그래.”“자문이요? 혹시 애인이라도 골라달라는 거예요?”안리영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겁 없이 농을 던졌다. 외할머니가 들으면 바로 이마 한 대는 맞았을 거다.“점점 대담해지는구나.”조경태가 다시 한번 그녀를 가리키며
안리영과 조시언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성준수는 그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안리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하긴 이렇게나 예쁜데 조시언이 마음 줄 만도 하지... 아야, 아파! 조시언, 너 왜 그래?!”성준수는 조시언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 나갔고 안리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정신 나갔네.”“조시언네 리영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난스럽게 되물었다.안리영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너까지 말썽이야, 얼른 가자. 외할아버지께 선물 드려야지.”그녀는 내 손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빨갛게 물든 귓바퀴가 그녀의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아까 조시언과의 어색한 분위기를 떠올리다 나도 모르게 장난을 쳤다.“리영아, 너랑 외삼촌 피가 섞인 것도 아니잖아. 내가 보기엔 한번 고려해 볼 만도 해. 잘생겼지, 돈 많지, 만약 네가 저 사람 잡으면 적어도 밖으로 새는 물은 없을 거 아니야.”안리영은 눈을 부릅떴다.“윤지원, 너 또 그런 소리 하면 진짜 절교할 거야.”“어머, 발끈하네?”나는 계속해서 놀렸다.“그만하라고 했지!”안리영은 나를 쫓아와 때리려 했다.나는 그녀를 피해 도망치다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익숙한 향이 먼저 스며들었다.고개를 들자 강유형이 서 있었다.요즘 그와 자주 마주쳤다. 절에서도 마주쳤고 조씨 가문에서도 마주쳤으니 말이다.“강 대표님, 이제 가시려고요?”안리영의 말투엔 노골적으로 쫓아내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나는 이미 다 털어냈다 하더라도 안리영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네.”강유형은 나를 살짝 놓아주며 내 발을 내려다봤다. 다친 데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했다.“조경태 씨 생신 축하하러 왔어요.”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는 볼 거 다 보고 별일 다 겪은 사이였다.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저녁 식사는 안 하고 가?”“응, 그게...”그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집에 가봐야 해서.”그 말에 문득 김희연이 내게 건넨 말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