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만 감고 샤워를 안 한 적은 있지.”진정우의 대답에 나는 웃음이 터졌다.“알았어. 네 마음대로 해. 하지만 빨리 씻어 그러다가 밤을 새우겠어.”나는 재빨리 그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조금만 더 늦었다간 또다시 그에게 끌려갈 것 같았다.처음 진정우를 만났을 때 그는 차갑고 거칠며 여자들에게는 관심조차 없고 성욕이 전혀 없는 남자처럼 보였다.하지만 이제는 이런 남자가 욕망을 자극받으면 얼마나 통제 불가능한지 알게 되었다.그가 씻으러 가고 나는 식탁을 정리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께 배운 습관 덕분에 먹고 난 그릇을 그대로 두는 일이 없었다.아직 주방 정리가 끝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었고 단지 옆방에서 나는 소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울렸다. 확실히 우리 방이 맞았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누구지?나는 손을 닦으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진정우가 방 안에 있다는 사실이 나를 조금 안심시켰다.그래도 습관적으로 문 앞에서 먼저 물었다.“누구세요?”“나야.”귀에 익은 목소리에 몸이 얼어붙었다.강유형이었다.이 늦은 밤에 왜 날 찾으러 온 거지?오늘 아침에 마주쳤을 때도 마치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갔던 그가 왜 지금 내 문 앞에 있는 거지?내가 문을 열지 않자 강유형은 문을 세게 두드리기 시작했다.나는 그가 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는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주변 사람들을 깨울 걱정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나는 그와 마주하는 게 싫었지만 이웃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내가 마침내 문을 열자 강유형은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머리는 살짝 헝클어져 있었고, 문을 두드리던 손은 멈춰 있었다.“무슨 일이야?”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전화를 받지 않았어?”그의 말에 나는 오늘 전화가 끊임없이 울렸던 기억이 떠올랐다.“못 들었어. 그런데 왜...”그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묻기도 전에 그는 내 팔을 잡았다.“나랑 가자.”그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나는 본능적으로
“강 대표님, 시간이 없어요!”비행기 승무원이 서둘러 출발을 요청했다.개인 비행기라도 정해진 항로와 시간을 준수해야 하는 규칙이 있었다. 내가 전화하면 출발을 지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됐어.”나는 잠자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딱 1분만 줄게.”강유형이 승무원을 향해 말했고 그 후 그는 자신의 휴대폰을 내게 건넸다.그가 이렇게 내게 전화를 허락한 것이 의외였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그는 얼마든지 규정을 이유로 거절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나는 그의 달라진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강유형은 내 시선을 피하고 창밖을 응시했다.“출발하세요.”나는 휴대폰을 승무원에게 돌려주며 말했다.강유형은 고개를 돌려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승무원은 그의 의사를 묻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이 비행기의 실제 소유자였기 때문이다.잠시 후, 강유형은 내게서 시선을 돌려 냉정하게 말했다.“출발해.”승무원이 그의 지시를 무전으로 전하며 비행기는 천천히 이륙 준비를 했다.그때, 강유형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화면을 한 번 보고 나서 나를 다시 바라봤다.나는 그것이 진정우의 전화임을 직감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내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비행기가 이륙 중이었고 나는 이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그의 휴대폰을 받아 확인하니 예상대로 진정우였다. 나는 직접 전화를 끊고 그의 휴대폰을 비행기 모드로 전환했다.비행기가 상공으로 오르고 승무원이 담요와 음료를 가져다주었다.“괜찮아요. 방금 야식을 먹어서요.”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유형이 다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 시선을 외면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검은 밤하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고 어두웠다. 그 어둠은 왠지 모르게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가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강유형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삼촌이 갑자기 위독해진 이유도 묻지 않았다.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우리는 병원으로 달려갔다.병실 밖에서
“집에 나랑 네 삼촌뿐이었어. 요즘은 고양이나 강아지도 다 네 삼촌 비위 맞추고 사는데... 누가 삼촌을 화나게 했겠어.”아줌마는 말하다 말고 갑자기 멈췄다.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고 내가 묻기도 전에 그녀가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아, 그래. 네 삼촌이 불편하다고 해서 내가 등을 주물러 주고 나니까 소파에 잠깐 눕겠다고 했었어. 그런데 내가 전화 받는 동안 네 삼촌도 전화를 받았던 것 같아.”혹시 그 전화가 삼촌의 상태를 악화시킨 원인이었을까?“아줌마, 삼촌 전화기는 어디 있어요?”나는 서둘러 물었다.아줌마는 주머니를 뒤지며 말했다.“안 가져왔어. 아마 집에 있을 거야.”지금 당장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지만 그 전화가 중요한 단서가 될 것 같았다.조금 뒤, 강진혁과 강유형이 돌아왔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어두웠다. 특히 강진혁은 삼촌의 상태를 더 잘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강유형에게도 전한 것 같았다.내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들을 찾아서 진실을 알고 싶었으나 아줌마는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나를 유일한 희망처럼 붙잡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웠다.한 시간이 더 지나서야 응급실 문이 열리고 피곤한 얼굴의 의사가 나왔다.“의사 선생님, 아버지 상태가 어떻습니까?”강진혁과 강유형이 동시에 물었다.“출혈은 멈췄습니다. 하지만 암세포가 간으로 전이됐습니다. 상황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의사의 말은 마치 커다란 바윗덩이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우리 모두 침묵한 채 있었고, 의사는 덧붙였다.“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환자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면 시간을 조금 더 살 수 있을 겁니다.”하지만 그 말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삼촌의 생명은 이제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듯했다.“감사합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강유형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삼촌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보호자 중 한 명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모두가 나를 추천했다.“지원아, 삼촌이 병원에 오는 내내 네 이름만 불렀어.”
삼촌이 힘겹게 말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내가 아는 삼촌은 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약해진 모습은 처음이었다.“울지 마, 지원아... 울지 마.”삼촌은 힘겹게 손을 들어 내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내 옷으로 훔쳤다.그런데 뭔가 이상했다.이 옷은 내 옷이 아니었다. 강유형의 외투였다.호텔에서 그에게 끌려 나올 때 나는 잠옷 차림이었다. 차 안에서 강유형이 자기 외투를 건넸고 나는 처음엔 거절하려 했지만 슬립형 잠옷만 입고 있어 어쩔 수 없이 외투를 입었다. 그 외투를 지금도 입고 있었다.“네, 안 울게요.”나는 눈물을 닦으며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삼촌은 나를 바라보며 부드럽고도 복잡한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에 나는 마음이 불편해졌다.나는 삼촌의 손을 더 꽉 잡고 다짐하듯 말했다.“괜찮아지실 거예요. 꼭 괜찮아지실 거예요.”“내 몸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지...”삼촌의 목소리는 너무 힘이 없어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였다.그는 평생 온갖 풍파를 겪으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지원아, 너는 네 엄마를 참 많이 닮았구나.”삼촌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그 말을 들으니 문득 예전에 내가 만난 적은 없지만 나와 많이 닮았다는 유희연이 생각났다.우리는 끝내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만 그녀는 지금 다른 세상에서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고 있을 거라 믿고 싶었다.“우리 엄마가 정말 예쁘셨나 보네요.”나는 웃으며 대답했다.삼촌도 약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응. 네 엄마는... 아주 현명하고 자애로웠지."“아줌마처럼 말이에요?”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삼촌의 눈꺼풀이 천천히 떨렸다.“지원아, 너는... 정말 착한 아이야. 반드시 행복할 거야.”삼촌의 말을 들으니 그의 마음속 깊은 감정이 느껴졌다. 그는 강유형과 내가 헤어진 일에 대해 미안함과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네. 저는 지금도 행복해요. 정우
평생 아빠, 엄마의 교통사고에 대해 의문을 품어온 나는 삼촌의 말이 더욱 신경 쓰였다.“아니야.”삼촌은 여전히 부인했다.“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네가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일에 집중하고 진정우와의 미래에만 신경 쓰라는 뜻이야.”삼촌의 목소리는 점점 더 약해지고 있었다. 옆에 있던 간호사가 그를 말리려 다가왔지만 삼촌이 손짓으로 그녀를 막았다. 간호사는 결국 한 마디만 덧붙였다.“마지막으로 1분만 더 하세요.”나는 삼촌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기에 더 묻고 싶었지만 그의 몸 상태를 우선으로 해야 했다.“삼촌, 우리 나중에 얘기해요. 지금은 쉬세요.”하지만 삼촌은 내 손을 단단히 붙잡고 놓지 않았다.“지원아, 약속해 줘.”삼촌의 말을 들은 내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그의 집착은 분명 내 부모님의 사고에 뭔가 숨겨진 진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하지만 삼촌이 지금 상태로는 더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나는 삼촌을 안심시키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약속할게요.”삼촌의 눈빛은 조금씩 안정감을 찾았지만 여전히 내 손을 놓지 않았다.“지원아, 앞만 보고 살아. 삼촌 말 꼭 기억해.”이 말은 얼마 전 내가 소지훈에게 했던 말이었다.하지만 지나간 일을 어떻게 완전히 잊고 앞으로만 나아갈 수 있을까?부모님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아야만 나는 그들의 무덤 앞에 떳떳하게 서 있을 용기가 생길 것이다.간호사가 삼촌의 산소마스크를 다시 씌우자 그의 호흡은 차츰 안정되었지만 몹시 지쳐 보였다. 그는 눈을 감고 잠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간호사는 그를 잠들게 하지 않으려 했고 나는 삼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삼촌은 겨우 “응”과 “아”로만 대답할 뿐이었다.면회 시간이 끝나고 삼촌은 제대로 쉴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자 나는 밖으로 나왔다.복도에는 강진혁과 아줌마가 보이지 않았고 강유형은 혼자 벽에 기대어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모습이었다.내가 다가가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그의 향기, 그리고 숨 막히는 듯한 압박감이 몰려왔다.나는 잠시 멍하니 굳어 있었다. 그의 낮고도 묵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이제는 진정우를 그렇게 신경 쓰는 거야?”그러자 나는 손끝이 움찔하며 주먹을 쥐었다.한때 나도 그를 그렇게 신경 썼다.안리영과 밥 한번 먹으러 가도 꼭 그에게 알렸고 하지만 그는 늘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그런데 이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자 오히려 그가 화를 내며 나를 다그치고 있다.“그래. 내 남잔데 내가 신경 안 쓰면 누가 신경 써?”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상처를 주는 말도 기술이었다.지금의 강유형과 나는 이미 서로 멀어졌지만 그가 내게 남긴 상처는 아직도 생생했다.무심코 떠오르는 순간마다 그 기억은 여전히 내 마음을 후벼 팠다.그래서 그에게 한 방 먹일 기회가 있다면 그동안의 내 아픔을 조금이라도 보상받는 느낌이 들었다.물론 그가 아직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강유형의 눈빛이 점점 차갑게 변했다.이건 그가 화가 날 때 보이는 전형적인 반응이다.그의 모습을 보니 아직도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참 우습네.’공식적으로 다른 사람과 엮였다고 알려진 그가 이제 와서 이런 반응이라니.그렇다면 앞으로도 필요할 때마다 이렇게 그의 마음을 찔러서 내 상처를 조금씩 보상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나는 핸드폰을 찾아서 진정우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진정우는 아직 회복 중인 여동생을 두고 멀리까지 나를 위해 따라와 줬는데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다.더구나 그 대상이 과거의 연인이라면 아무리 그가 나를 사랑하고 이해해 준다고 해도 상처받지 않을 리 없었다.나는 강유형의 품에서 빠져나와 뒤돌아섰다.그런데 그는 내 허리를 다시 한 손으로 붙잡아 그의 품으로 끌어당겼다.“강유형, 지금 뭐 하는 거야!”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손을 밀쳤지만 그는 오히려 나를 더 꽉 끌어안았다.“지원
나는 왜 그를 밀쳐내지 못했을까?강유형은 여전히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가 착각하며 집착한다면 나는 그를 그대로 두기로 했다.결국 가장 큰 상처를 입는 건 그 자신일 테니까.이것은 어쩌면 하늘이 내린 벌일지도 몰랐다.아니면 내 부모님이 하늘에서 내 지난 10년간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셔서 강유형이 나와의 과거를 잊지 못하게 하는 걸지도 모른다.“조금 있으면 고준석이 핸드폰을 가져다줄 거야. 들어가서 푹 쉬어.”강유형은 그렇게 말하며 내 허리를 감싸던 손을 풀었다.그는 뒤돌아섰고 그의 뒷모습은 여전히 꼿꼿했다.한때 그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르던 내가 이제는 그 모습이 아련하고 낯설게만 느껴졌다.나는 로비로 내려갔다.문을 나서려는 찰나에 고준석이 도착했다.“윤 팀장님.”나는 더 이상 그의 비서가 아니었지만 고준석은 여전히 나를 그렇게 불렀다.하지만 호칭 따위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강 대표님이 직접 주문하신 핸드폰입니다. 윤지원 씨가 쓰시던 브랜드의 최신 모델이에요.”그가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 핸드폰은 필요 없으니 당신 핸드폰 좀 빌려주세요.”고준석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윤 팀장님, 그건 조금...”내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자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한 번 거절한 건 절대 번복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테니까.“핸드폰 빌릴 수 없으면 그냥 됐어요.”나는 말하며 돌아섰다.“아, 알겠어요!”고준석이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건넸다.그 핸드폰을 받아 들고 나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전화를 걸었다.“죄송합니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자동 응답 메시지가 들려왔다.진정우의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혹시 진정우가 비행기를 타고 돌아간 걸까?혹시 몰라 내 핸드폰에도 전화를 걸어봤다. 이번엔 통화 연결음이 울렸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진정우가 화가 나서 내 전화를 일부러
“강 대표님께서 지원 씨 목이 잠겼다고 하시면서 특별히 부탁해서 구운 배에 도라지를 넣어달라고 하셨어요. 한밤중에 주문한 건데도 지금도 따뜻하네요.”고준석은 말을 마치며 따뜻한 구운 배가 담긴 봉투를 내 손에 건넸다.손바닥에 전해지는 온기가 느껴졌다.나는 봉투를 들고 고개를 숙였다.고준석이 차를 출발시키며 물었다.“윤 팀장님, 지금 사시는 아파트로 모실까요?”그 아파트는 내가 현재 살고 있는 곳이었다.그가 이렇게 쉽게 물어본 걸 보니 지난번 한밤중에 강유형이 우리 집 아래에 있었던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았다.아마 고준석이 미리 알아보고 강유형에게 정보를 준 게 분명했다.“아니요. 괜찮아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고준석은 잠시 멈칫하더니 룸미러로 나를 쳐다봤다.“그럼 어디로...”“고 비서님, 차를 세워주세요.”내 말에 고준석은 움찔하며 차를 한쪽에 세웠다.그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윤지원 씨, 무슨 일이세요?"나는 그의 말을 끊고 말했다.“집에 가지 않을 거예요. 병원 외과 병동으로 가주세요.”잠시 잊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아직 병원에서 회복 중인 진소영을 찾아가야 한다는 걸 말이다.고준석은 금세 상황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진소영의 수술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걸 보니 강유형도 아마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밤새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을 텐데 괜찮으시겠어요?”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나는 그가 나를 걱정해서 그런지 아니면 강유형의 요구대로 일을 처리 못 하면 돌아가서 욕을 먹을까 봐 두려워서 그런지 몰랐다.“괜찮아요.”나는 말하며 차에서 내리려 했다.“윤 팀장님.”그가 나를 다시 불렀다.그의 시선은 내가 들고 있는 따뜻한 구운 배로 향해 있었다.“강 대표님은 여전히 윤 팀장님을 위해 정말 많이 신경 쓰십니다. 만약 제 실수만 아니었더라면 아마 지금쯤 두 분은 결혼하셨을지도 모릅니다.”그 일이 아직도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듯했다.나는 그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아
사람들이 나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모두 의혹 가득한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멀찍이 서서 바라볼 뿐이었다.용준호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어느 새끼가 감히 널 구하려는지 두고 보자고!”그는 너무나도 오만방자했다.“오빠!”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용준호가 걸음을 멈추었다. 뒤집힌 시야 속에서 만두 머리를 한 여자아이를 보았다.바로 용은서였다.내가 이 여자아이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용준호는 콧방귀를 뀌었다.“저리 썩 꺼져.”살벌한 목소리에 평범한 아이였다면 벌써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하지만 용은서는 그의 혈육이었고 평소에도 늘 호통에 익숙했는지 전혀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물었다.“왜 사람을 업고 있어? 강도 같아!”대담한 발언이었다.“꺼지라니까.”용준호는 음을 길게 끌며 말했다.“사람 말을 못 알아듣나? 집에서 안 가르쳐줬어?”용은서는 눈을 흘기며 받아쳤다.“오빤 맨날 이렇게 화내.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용준호가 다시 호통을 치려는 순간 용은서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오빠, 나 할 말 있어.”용은서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내가 제대로 서 있기만 했어도 당장 품에 안아서 볼에 뽀뽀를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하지만 용준호는 여전히 사나웠다.“꺼지라고 했지. 말 안 들으면 발로 차버린다.”혈육에게 말이 너무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하지만 용은서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오히려 그의 바지 끝을 움켜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은서야, 언니 구해줘!”나는 목소리를 냈지만 어린아이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 소꿉장난처럼 느껴져 부끄럽기 그지없었다.“윤지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한테 도움을 청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냐?” 용준호는 나에게도 으르렁댔다.지금의 그는 미친개처럼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중이었다.“오빠, 왜 언니를 업고 있어? 다쳐서 걷지 못해?”용은서의 질문은 철없는 아이다운 순수함이 묻어났다.용준호의 인내심은 바닥을
“싸움이 났어요, 밖에서 누가 싸우고 있어요!”복도에서 급히 들어온 누군가의 외침에 나는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리고 그 순간 용준호의 주먹이 강유형을 향해 뻗어가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그만둬! 준호 오빠, 당장 멈춰!”나는 소리치며 달려가 그를 말렸다.하지만 그는 내 손을 뿌리치더니 힘껏 내던졌다. 나는 벽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하얘짐을 느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킨 것처럼 어질어질해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그동안 단 한 번도 반격하지 않던 강유형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애틋했다. 걱정이 담긴 목소리였다.“지원아...”그는 내 이름을 부르자마자 곧장 용준호에게 주먹을 날렸다. 곧이어 두 사람은 완전히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두 사람을 바라보다 결국 누군가에게 부탁해 경호원을 불러달라고 했다.몸싸움을 겨우 뜯어말렸을 땐 이미 멍과 상처가 두 사람의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강유형은 계속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한 손으로 코를 막으며 고개를 젖혀 코피를 거꾸로 흐르게 했다.이들이 왜 갑자기 싸운 건지 너무 궁금했지만 강유형의 코피가 너무 심하게 나서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하는 수밖에 없었다.“강유형, 병원으로 들어가자.”그는 꼼짝도 하지 않더니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너는 괜찮아?”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끌었다.“나랑 같이 들어가자”“괜찮아. 금방 멈출 거야.”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내가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찰나 용준호가 고함을 질렀다.“강유형, 이 개자식아! 우리 엄마 어딨어? 당장 우리 엄마 데려와!”나는 멍하니 굳어버렸다. 분명 그의 어머니는 화재로 숨졌다고 했는데 왜 강유형한테서 어머니를 찾는지 알 수가 없었다.“준호 오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나는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봤다.“네가 직접 물어보든지.”“신경 쓰지 마. 미쳐서 그래.”강유형은 단호하게 말했다.
강유형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의 눈가엔 슬픔이 가득했다.수정 스님은 행각승이었다가 법운사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누구도 그의 고향이나 가족을 알지 못했다.굳이 혈육을 꼽으라면 강유형이 유일한 존재일 터였다.그는 어릴 적부터 수정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하며 경을 들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지원아, 먼저 부상자들부터 도와줘.”강유형이 내 슬픔을 잠재우듯 말했다.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나는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화재는 갑자기 일어난 거야? 너 그때 절에 있었어? 이상한 점은 없었고?”강유형의 눈빛이 짙어졌다.“지원아, 그건 내가 조사할 테니 네가 나설 필요 없어.”그 말에서 나는 그가 무언가를 의심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내가 위험에서 멀어지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강유형, 나도 모르는 척 편히 있으려 했지만 이 불은 나를 노리고 온 것 같아서 말이지.”내가 추측을 내뱉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위로의 말이 오리라 예상한 찰나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진정우, 곧 돌아오지?”맞았다. 강진혁이 직접 알려준 소식이었다.“이 화재가 진정우랑 관련 있다는 거야?”내 물음에 그는 담담히 말했다.“네가 방금 너 자신이 표적이라 말했으니 네 일은 곧 그의 일과 마찬가지인 셈이지.”하긴 지금 내 존재는 진정우의 약점이자 방패나 다름없었다.“지금은 급박한 때야. 조심해.”강유형은 문득 말을 멈추더니 이내 덧붙였다.“가능하다면 내 곁에 있어.”그가 나를 지키려는 의도임을 알았다.그래도 나는 되물었다.“진짜로 내가 표적이라면 네 힘만으로는 부족할 텐데.”법운사에 불을 지른 자들은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다. 수정 스님마저 피해자로 만들 정도로 그들은 광기에 사로잡혔던 것이다.김지영이 역시 불길에 휩싸일 줄은 용씨 가문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업보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 따뜻한 분께서 이런 재앙을 마주했다니, 안타까울 뿐이었다.용진표의 혼란스러운 이성 관계가 떠올
“우린 잘 몰라요. 찾고 싶으시면 병원에 한번 가보시죠.”여기까지 와서 확인한 건 그저 화재 직후 법운사의 참담한 모습뿐이었다.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아니,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강유형이 무사하다는 소식도 들었다.나는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혹시 다친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나는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안은 분주함으로 가득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모두 종종걸음에 가까운 발걸음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화재로 인한 응급 상황 때문에 병원은 비상 진료 통로를 열어놓은 상태였고 나는 비교적 빠르게 부상자들이 치료받는 구역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강유형을 보았다.그의 옷은 여기저기 재로 인해 더럽혀져 있었고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조차도 발견하지 못했다.이런 모습의 강유형은 처음이었다. 더는 높은 곳에 있는 존재가 아니었고 넘볼 수 없는 거리감도 사라졌다. 고귀함도 자존심도 모두 내려놓은 채, 그저 평범한 남자로서 가장 위대한 일을 하고 있었다.직접 보기 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이토록 현실적이고 다정한 그의 모습이라니 꿈꾸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나는 짐지영이 너무 걱정돼 곧장 그에게 다가갔다.“강유형.”그는 나를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지원아,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뉴스 봤어. 계속 전화를 걸었는데 받질 않아서 법운사에도 직접 다녀왔어...”나는 말끝을 흐리며 곧장 부상자들을 살펴보았다.“사모님은? 괜찮으셔?”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착했던 내 가슴이 순간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강유형, 왜 말을 안 해? 사모님 설마...”내가 채 묻기도 전에 용준호가 허둥지둥 달려왔다.“우리 엄마 어딨어? 엄마! 엄마...”늘 껄렁하고 건들거리며 세상에 무서울 게 없어 보이던 용준호였다.하지만 지금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눈빛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강유형, 우리 엄마 어딨어?”그 역시 나처럼 물었다.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법운사로 향하는 길에 나는 강유형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기나긴 연결음 끝의 자동응답뿐이었다.가슴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요즘 그가 법운사에 머물고 있었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연락도 되지 않으니 머릿속은 온통 나쁜 상상으로 가득 찼다.그에게 전화를 건 건 단순히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부상자나 사망자가 있는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하지만 그에게 건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못했다.나는 액셀을 밟으며 용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어머니가 바로 그 절에 계셨으니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 역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이번엔 아예 거절당했다. 불안은 더 깊어졌다.‘혹시 김지영까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그간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강유형과 김지영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치거나 희생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복잡한 심경 속에서 차를 운전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멀쩡하던 절에 왜 불이 난 걸까?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의도한 일이었을까? 혹시 나를 노린 불은 아니었을까?’만약 안리영이 나를 데리고 조경태의 생신 잔치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그 절에 있었을 것이다. 죽었을 수도, 심하게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내 손에 누군가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걸 얻지 못하면 나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저지른 일이라면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희생시켜서는 안 됐다.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이 나는 어느덧 산기슭에 도착했다. 들이마시는 공기 속엔 타버린 재 냄새가 가득했고 멀리 보이는 산 위엔 아직도 연기가 자욱했다.산을 절반쯤 오르자 경찰이 차량을 막아섰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이
난처한 상황이었다. 도무지 어찌할지 몰라 법까지 들먹이고 말았다.“법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서른이 넘도록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는 건 정상이 아니야. 어느 날 갑자기 남자 며느리라도 데려오면 내가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보겠냐?”조경태는 누가 뭐라 해도 듣지 않겠다는 태도였다.“그럼 제가 하나 약속드릴게요. 절대 남자를 며느리로 데려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조시언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조경태는 씩씩 대며 화를 냈다. 그러자 안리영이 급히 나서며 말했다.“할아버지, 삼촌 좀 그만 괴롭히세요. 안 좋아하는데 억지로 떠민다고 행복해지겠어요?”“이 계집애는 왜 또 얘 편을 드는 거야?”할아버지는 안리영을 흘겨보았다.내가 얼른 말을 이었다.“오늘 온 아가씨들, 저랑 리영이 다 지켜봤어요. 삼촌이랑 어울릴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고요.”지금 이 순간 나도 안리영을 따라 조시언을 삼촌이라 부르고 있었다.“난 못 믿겠는걸.”조경태는 콧방귀를 뀌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정말이에요, 할아버지. 그 여자들, 남 얘기하길 좋아해서 뒤에서 험담이나 하는 사람들이에요. 아까도 삼촌 뒷담 까고 있었어요.”조시언은 그녀를 바라보았고 조경태도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그래? 뭐라고 험담하던?”“삼촌이 나이가 꽤 됐는데도 아직 결혼 안 한 걸 말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삼촌을 차지해서 조씨 가문 며느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수작 부릴 생각들만 하고 있었어요.”안리영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오늘 그 여자들이 조시언을 노리고 온 건 분명했으니 말이다.“그건 좋은 일이잖니.”조경태는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할아버지는 수작 부리는 여자가 좋으세요?”안리영은 조경태가 싫어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조경태는 말이 없었다. 속이 시커먼 여자한테 크게 당할 뻔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안리영은 나를 향해 눈짓을 보냈고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삼촌 짝 찾는 일은 저랑 리영이에게 맡겨주세요.”내 말에 안리영이 눈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안리영과 나는 방 안의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서로 마주 본 채 각자의 소파에 앉은 모습이었다. 한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젊고 준수한 청년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가 너무나 뚜렷해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분명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부자 관계였다.안리영은 조시언이 입양된 아들이라고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의아했다. 당시 나이로 치면 조경태는 조시언을 손자처럼 키워도 이상할 게 없었을 텐데 왜 굳이 아들로 삼은 건지 궁금했다.“시언아, 너 이제 나이도 어린 게 아니잖니. 결혼 안 하겠다는 건 그렇다 쳐도 여자 친구조차 없다니. 밖에서 사람들이 너를 두고 뭐라고 수군대는지 너도 알지?”조경태는 수군대다 같은 말도 자연스럽게 썼다.하지만 조시언은 묵묵히 앉아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조명이 그의 얼굴과 콧대를 선명하게 나누듯 비췄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면서 그의 이목구비는 더욱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깊은 눈썹뼈는 날카로운 선을 연출해 냈다.“사람들이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더라!”조경태는 말을 끝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런 이상한 소문이 퍼지는 건 우리 조씨 가문의 체면을 망치는 일이다. 우린 그런 망신 못 당한다!”조시언은 그 말에도 여전히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평온한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했다.“남의 입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건 그들 사정일 뿐, 우린 신경 쓰지 않으면 됩니다.”“넌 신경 안 쓴다지만, 이 늙은이는 창피해서 못 살겠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지금 당장 사람 하나 데리고 오든가, 아니면 내가 직접 찾아줄 거다. 결혼 안 해도 좋다. 그냥 네 옆에 여자 하나 세워놔라. 사람들이 널 정상으로 보게 말이다!”그 말에 안리영과 나는 동시에 서로의 팔을 꼬집었다. 안 그러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 노
“넌 안 그럴 거야, 맞지?”안리영은 계속 나를 놀리면서도 언제나 내 편이었다.우리는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섰다.조경태는 자줏빛과 금색이 어우러진 긴 도포를 입고 활짝 웃으며 손님들의 축하 선물을 받고 있었다.그는 내가 가져온 선물을 보곤 눈을 반짝였다.“특별한 선물이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그 말에 나는 괜히 민망해졌다.강유형의 어머니도 비슷한 걸 선물했는데 어째서 내 것을 특별하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역시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은 달랐다. 누구보다도 말솜씨가 뛰어났다. 받는 사람도 기쁘고 주는 사람도 흐뭇하게 만드는 한마디였다.“리영아, 구 교수는 어디 갔니? 오늘은 왜 같이 안 왔어?”조경태가 슬며시 물었다.안리영은 내 옆구리를 몰래 콕 찔렀다.“그냥 따로 말 안 했어요. 오늘은 그냥 제가 단순히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온 거거든요.”그러나 이 정도 지긋한 나이가 되면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오늘 같은 잔칫날에 인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고 왔다 해서 구안석이 못 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는 안리영을 힐끔 바라보다 두어 번 웃고는 더 묻지 않았다.“할아버지, 그럼 선물마저 받으시고요. 저는 지원이랑 가서 뭐 좀 먹고 올게요.”안리영은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 했다. 또 무슨 질문이 나올까 봐 걱정된 눈치였다.“그래, 다녀오거라. 다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좀 있다 너희 둘 도움 좀 받아야겠구나.”그 말에 우리 둘은 눈빛을 주고받았다.“혹시 케이크 자르실 때 저희한테 맡기시려는 거 아니에요?”안리영이 농담처럼 물었다.조경태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콕 찔렀다.“이놈의 계집애, 지금 누굴 놀리는 거냐. 케이크 칼 정도는 들 수 있다고! 그게 아니고, 너희 둘한테 자문 좀 구하고 싶어서 그래.”“자문이요? 혹시 애인이라도 골라달라는 거예요?”안리영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겁 없이 농을 던졌다. 외할머니가 들으면 바로 이마 한 대는 맞았을 거다.“점점 대담해지는구나.”조경태가 다시 한번 그녀를 가리키며
안리영과 조시언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성준수는 그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안리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하긴 이렇게나 예쁜데 조시언이 마음 줄 만도 하지... 아야, 아파! 조시언, 너 왜 그래?!”성준수는 조시언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 나갔고 안리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정신 나갔네.”“조시언네 리영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난스럽게 되물었다.안리영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너까지 말썽이야, 얼른 가자. 외할아버지께 선물 드려야지.”그녀는 내 손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빨갛게 물든 귓바퀴가 그녀의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아까 조시언과의 어색한 분위기를 떠올리다 나도 모르게 장난을 쳤다.“리영아, 너랑 외삼촌 피가 섞인 것도 아니잖아. 내가 보기엔 한번 고려해 볼 만도 해. 잘생겼지, 돈 많지, 만약 네가 저 사람 잡으면 적어도 밖으로 새는 물은 없을 거 아니야.”안리영은 눈을 부릅떴다.“윤지원, 너 또 그런 소리 하면 진짜 절교할 거야.”“어머, 발끈하네?”나는 계속해서 놀렸다.“그만하라고 했지!”안리영은 나를 쫓아와 때리려 했다.나는 그녀를 피해 도망치다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익숙한 향이 먼저 스며들었다.고개를 들자 강유형이 서 있었다.요즘 그와 자주 마주쳤다. 절에서도 마주쳤고 조씨 가문에서도 마주쳤으니 말이다.“강 대표님, 이제 가시려고요?”안리영의 말투엔 노골적으로 쫓아내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나는 이미 다 털어냈다 하더라도 안리영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네.”강유형은 나를 살짝 놓아주며 내 발을 내려다봤다. 다친 데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했다.“조경태 씨 생신 축하하러 왔어요.”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는 볼 거 다 보고 별일 다 겪은 사이였다.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저녁 식사는 안 하고 가?”“응, 그게...”그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집에 가봐야 해서.”그 말에 문득 김희연이 내게 건넨 말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