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소영은 3일 후에 관찰실을 나왔다.다행히도 거부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고 몸 상태도 아주 좋아서 구안석의 예상을 뛰어넘는 회복 속도를 보였다.“보아하니 다른 사람의 심장이 아주 잘 맞나 봐.”안리영도 감탄하며 말했다.나는 꽃다발을 들고 가며 살짝 농담처럼 말했다.“아마도 심장 주인이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안리영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기증자의 정보를 알 수 있어?”안리영은 나를 힐끗 쳐다보며 단호히 말했다.“몰라. 그런 건 철저히 비밀로 하니까.”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냥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니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준 그 숭고함이 경이로웠다.그때, 관찰실 문이 열리고 진소영이 밖으로 나왔다.3일 동안 우리가 종종 그녀를 보러 갔었지만 이번은 특별한 순간이었다.그 문은 진소영에게 다시 태어나는 문이었다.그 문을 통해 그녀는 새로운 건강한 삶으로 나아갔다.“오빠! 언니! 리영 언니!”진소영은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마치 돌고래의 울음소리 같았다.진정우는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며 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나는 꽃다발을 건네며 그녀를 안아주었다.“새로운 삶을 시작한 걸 축하해!”안리영도 손을 내밀어 그녀와 악수하며 말했다.“좋은 미래를 향해 달려가자.”진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흘렸다.수술 때조차 울지 않았던 그녀가 새 삶을 맞이한 이 순간 눈물을 흘린 것이다.그녀의 눈물은 마치 새 생명이 세상에 첫울음을 터뜨리며 인사하는 것 같았다.수술 후 2주가 지나고, 마침내 놀이공원이 개장할 준비를 마쳤다.그 소식은 강진혁을 통해 들었다.“지원아, 개장식에 와줄 거지?”강진혁이 물었다.나는 이미 결정했기에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네. 갈게요.”이번 개장은 나에게도 중요한 의미였다.강유형과 KS 그룹과의 마지막 이별을 그리고 나의 과거와의 작별을 의미했다.그리고 난 단지 앞만 보고 달리고 과거에 다시는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혹시 강유형도 오나요?”나는
진소영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회복 과정에서 여전히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길 가능성은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손길이 필요한 상태였다.진정우는 낮에는 간병인을 고용했지만 밤이 되면 직접 병원에 가서 동생을 챙겼다.그래서 요즘 우리 둘이 함께 보내는 시간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낮에는 각자 일 때문에 바쁘기도 했다.“시간 있어?”내가 신지태 오빠의 경기에 관해 이야기하며 물었을 때 진정우가 의외로 대답했다.“있어.”그의 대답에 나는 의아하면서도 기뻤다.“근데 소영이는...”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진정우는 단호히 말을 잘랐다.“내가 알아서 할게.”그의 확신에 찬 말에 나는 마음이 든든해졌다.“너랑 제대로 데이트를 못 한 지 너무 오래됐잖아.”그가 이마를 내 이마에 맞대며 속삭이자 나는 마음이 찡해졌다.맞다.요즘 그는 동생을 돌보느라 바빴기에 자연스레 나와 있는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물론 내가 이것을 가지고 질투를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지태 오빠의 경기는 풍진에서 열렸다.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의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든 픽업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우리 둘 다 의아해하며 물었고 기사는 지태 오빠가 직접 준비했다고 설명했다.“와, 진짜 세심하네. 오길 잘했어. 안 그랬으면 이렇게 정성껏 준비한 걸 헛되게 할 뻔했잖아.”나는 그의 배려에 감탄하며 말했다.게다가 같은 비행기를 탄 승객 중 상당수가 지태 오빠의 팬이었다.나는 그제야 그의 인기가 이렇게 많다는 걸 실감했다.아직 경기장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팬들의 뜨거운 열정에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지태 오빠가 이렇게 인기 많을 줄은 몰랐네. 그냥 당구장 관장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말이야.”나는 감탄하며 말했고 진정우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하지만 나는 그의 조용한 성격을 알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그는 지태 오빠와 친한 사이도 아니니 굳이 흥미를 보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나
진정우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기에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었다.그의 말투에 나는 살짝 겁이 나면서도 장난기가 쑥 들어갔다.병으로 고생한 동생을 돌보느라 힘든데 지금 나까지 달래야 한다니 얼마나 피곤할까 싶었다.순간적으로 미안함이 밀려와 더 이상 그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그의 손을 살짝 잡아당기며 솔직하게 말했다.“나랑 지태 오빠는 그냥 친구야. 그래서 너 앞에서 편하게 얘기한 거지. 마음에 거리낌이 없으니까.”하지만 말하고 나니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사실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건 아니었다.그냥 말을 꺼내지 않는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알아.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진 않아.”진정우는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았다.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했다.내 앞에서 진정우가 다른 여자를 칭찬한다면 나도 기분 나빴을 테니까.아마 바로 화를 내며 그를 쫓아냈을지도 모른다.“미안해, 내 잘못이야.”나는 조용히 사과했다.그러자 그의 굳어 있던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나한테는 입으로 사과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야.”그 말에 그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챘다.그에게 조금 더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방에 가서 행동으로 보여줄게.”그러자 그의 목젖이 떨렸고 귀끝이 붉게 물들었다.그가 내 의도를 정확히 이해한 게 분명했다.그렇게 쉽게 풀리는 그의 모습에 나는 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정우 씨, 나 피곤해.”그는 바로 대답했다.“안아줄게.”사람들로 북적이는 호텔 로비에서 그가 나를 안겠다고 하자 오히려 내가 민망해졌다.나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농담이야. 안아달라고 한 건 아니고...”그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내 몸이 갑자기 공중으로 들렸다.하지만 그가 나를 안아 든 건 아니었다.대신 내 몸을 캐리어 위에 올려놓고 캐리어를 밀기 시작했다.처음 해보는 캐리어 타기 체험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예전에 강유형과 출장 다닐 때 한 번쯤 캐리어 위에 앉아보고 싶었지만 말도 꺼내지 못했다.하지만
강유형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고 굳어 있었다. 평소의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네?”옆에 있던 남자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다시 쳐다보며 말했다.“못 알아볼 리 없는데요? 대표님 약횬녀가 그렇게 예쁘신데... 제가 어떻게 헷갈리겠어요?”“내 약횬녀는 지금 집에서 내 부모님을 돌보고 있어.”강유형은 담담하게 대답한 뒤 긴 다리를 뻗어 걸어갔다.“뭐라고요? 그럴 리가...”남자는 여전히 충격을 받은 듯 내 얼굴을 살피다가 강유형의 뒷모습을 쫓아가며 계속 중얼거렸다.“너무 닮았는데? 완전히 똑같은데?”강유형은 멀어져 갔고 나를 난처하게 만들 법한 말을 하진 않았다. 그가 이렇게 거짓말을 할 줄은 정말 예상 밖이었다.평소 같았으면 분명 사실을 인정하며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나아가 진정우까지 난처하게 했을 텐데 말이다.그런데 오늘의 강유형은 달랐다. 차가운 태도로 나를 스쳐 지나가며 마치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다.그는 변한 것 같았다. 더 이상 예전처럼 쉽게 화를 내거나 성급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낯선 사람처럼 행동하는 그의 모습은 전에 없던 차분함이었다.강유형은 이번에 돌아온 뒤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일상에서 완전히 잊힌 것 같았다. 어쩌면 그가 나를 진심으로 놓아준 건지도 모른다.나는 그런 생각에 잠긴 채 있었고 진정우는 그런 나를 엘리베이터로 조용히 이끌었다. 정신을 차리고 그의 얼굴을 보니 특별히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방금 일이 그에게도 불편했으리라 짐작됐다.내가 그의 손을 살짝 잡아끌자 그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괜찮아. 앞으로도 이런 일은 또 생길 거야.”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곳이든 해동이든 오늘 같은 상황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그리고 오늘 일이 벌어진 이유도 따지고 보면 내가 이 호텔이 지태 오빠가 준비한 장소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태 오빠와 강유형이 친한 사이인 걸 알면서도 무심코 잊어버린 내 실수였다.하지만 이미
솔직히 내 핸드폰이 언제 꺼졌는지는 기억도 안 났다. 다만 진정우가 욕실에서 나를 안아 침대로 옮겼을 때 내 몸은 완전히 녹아버린 것처럼 힘이 하나도 없었다. 너무 피곤해서 눈꺼풀조차 들기 힘들었던 나는 이불 속에 파묻혀 그대로 잠들었다.“조금 눈 붙이고 있어. 내가 죽 끓여줄게.”진정우의 낮고 약간 쉰 목소리가 귀에 스며들었다. 나는 희미하게 대답만 하고 꿈속으로 빠져들었다.하지만 잠결에도 핸드폰 소리가 자꾸 들렸다. 뭔가 귀찮았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눈도 뜰 수 없었다. 결국 손을 더듬어 옆자리를 찾았지만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정우 씨... 정우...”나는 그를 부르기 시작했고 진정우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상체를 숙이며 물었다.“왜 그래?”“핸드폰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나는 눈을 뜨지도 않은 채 중얼거렸다.“뭐라고?”그는 내 말을 잘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핸드폰, 시끄러워.”다시 한번 반복하자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지원아, 꿈꾼 거야. 네 핸드폰은 꺼놨어.”정말 그랬을까? 그런데도 계속 들렸던 그 소리는 뭐였을까? 나는 다시 묻지 않고 그대로 다시 잠이 들었다.눈을 떠보니 진정우는 방 한쪽의 책상에 앉아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너무나도 집중하고 있어서 내가 깬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그의 손길이 멈추었다. 그는 도면을 그리고 있었다.그가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허진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됐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이렇게 한 번도 빠트리지 않고 묵묵히 해내고 있었다.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그의 모습이 방해될까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지만 내 움직임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자마자 펜을 내려놓고 다가왔다.“왜 나를 안 불렀어?”“너무 바빠 보여서.”내가 대답하자 내 목소리가 쉰 소리로 나왔다. 그제야 지난밤의 열정적인 순간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진정우도 알아차렸는지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이따가 목캔디 사다 줄게.”“괜찮아. 난.
“머리만 감고 샤워를 안 한 적은 있지.”진정우의 대답에 나는 웃음이 터졌다.“알았어. 네 마음대로 해. 하지만 빨리 씻어 그러다가 밤을 새우겠어.”나는 재빨리 그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조금만 더 늦었다간 또다시 그에게 끌려갈 것 같았다.처음 진정우를 만났을 때 그는 차갑고 거칠며 여자들에게는 관심조차 없고 성욕이 전혀 없는 남자처럼 보였다.하지만 이제는 이런 남자가 욕망을 자극받으면 얼마나 통제 불가능한지 알게 되었다.그가 씻으러 가고 나는 식탁을 정리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께 배운 습관 덕분에 먹고 난 그릇을 그대로 두는 일이 없었다.아직 주방 정리가 끝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었고 단지 옆방에서 나는 소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울렸다. 확실히 우리 방이 맞았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누구지?나는 손을 닦으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진정우가 방 안에 있다는 사실이 나를 조금 안심시켰다.그래도 습관적으로 문 앞에서 먼저 물었다.“누구세요?”“나야.”귀에 익은 목소리에 몸이 얼어붙었다.강유형이었다.이 늦은 밤에 왜 날 찾으러 온 거지?오늘 아침에 마주쳤을 때도 마치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갔던 그가 왜 지금 내 문 앞에 있는 거지?내가 문을 열지 않자 강유형은 문을 세게 두드리기 시작했다.나는 그가 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는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주변 사람들을 깨울 걱정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나는 그와 마주하는 게 싫었지만 이웃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내가 마침내 문을 열자 강유형은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머리는 살짝 헝클어져 있었고, 문을 두드리던 손은 멈춰 있었다.“무슨 일이야?”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전화를 받지 않았어?”그의 말에 나는 오늘 전화가 끊임없이 울렸던 기억이 떠올랐다.“못 들었어. 그런데 왜...”그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묻기도 전에 그는 내 팔을 잡았다.“나랑 가자.”그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나는 본능적으로
“강 대표님, 시간이 없어요!”비행기 승무원이 서둘러 출발을 요청했다.개인 비행기라도 정해진 항로와 시간을 준수해야 하는 규칙이 있었다. 내가 전화하면 출발을 지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됐어.”나는 잠자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딱 1분만 줄게.”강유형이 승무원을 향해 말했고 그 후 그는 자신의 휴대폰을 내게 건넸다.그가 이렇게 내게 전화를 허락한 것이 의외였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그는 얼마든지 규정을 이유로 거절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나는 그의 달라진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강유형은 내 시선을 피하고 창밖을 응시했다.“출발하세요.”나는 휴대폰을 승무원에게 돌려주며 말했다.강유형은 고개를 돌려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승무원은 그의 의사를 묻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이 비행기의 실제 소유자였기 때문이다.잠시 후, 강유형은 내게서 시선을 돌려 냉정하게 말했다.“출발해.”승무원이 그의 지시를 무전으로 전하며 비행기는 천천히 이륙 준비를 했다.그때, 강유형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화면을 한 번 보고 나서 나를 다시 바라봤다.나는 그것이 진정우의 전화임을 직감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내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비행기가 이륙 중이었고 나는 이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그의 휴대폰을 받아 확인하니 예상대로 진정우였다. 나는 직접 전화를 끊고 그의 휴대폰을 비행기 모드로 전환했다.비행기가 상공으로 오르고 승무원이 담요와 음료를 가져다주었다.“괜찮아요. 방금 야식을 먹어서요.”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유형이 다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 시선을 외면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검은 밤하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고 어두웠다. 그 어둠은 왠지 모르게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가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강유형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삼촌이 갑자기 위독해진 이유도 묻지 않았다.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우리는 병원으로 달려갔다.병실 밖에서
“집에 나랑 네 삼촌뿐이었어. 요즘은 고양이나 강아지도 다 네 삼촌 비위 맞추고 사는데... 누가 삼촌을 화나게 했겠어.”아줌마는 말하다 말고 갑자기 멈췄다.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고 내가 묻기도 전에 그녀가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아, 그래. 네 삼촌이 불편하다고 해서 내가 등을 주물러 주고 나니까 소파에 잠깐 눕겠다고 했었어. 그런데 내가 전화 받는 동안 네 삼촌도 전화를 받았던 것 같아.”혹시 그 전화가 삼촌의 상태를 악화시킨 원인이었을까?“아줌마, 삼촌 전화기는 어디 있어요?”나는 서둘러 물었다.아줌마는 주머니를 뒤지며 말했다.“안 가져왔어. 아마 집에 있을 거야.”지금 당장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지만 그 전화가 중요한 단서가 될 것 같았다.조금 뒤, 강진혁과 강유형이 돌아왔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어두웠다. 특히 강진혁은 삼촌의 상태를 더 잘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강유형에게도 전한 것 같았다.내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들을 찾아서 진실을 알고 싶었으나 아줌마는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나를 유일한 희망처럼 붙잡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웠다.한 시간이 더 지나서야 응급실 문이 열리고 피곤한 얼굴의 의사가 나왔다.“의사 선생님, 아버지 상태가 어떻습니까?”강진혁과 강유형이 동시에 물었다.“출혈은 멈췄습니다. 하지만 암세포가 간으로 전이됐습니다. 상황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의사의 말은 마치 커다란 바윗덩이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우리 모두 침묵한 채 있었고, 의사는 덧붙였다.“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환자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면 시간을 조금 더 살 수 있을 겁니다.”하지만 그 말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삼촌의 생명은 이제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듯했다.“감사합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강유형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삼촌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보호자 중 한 명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모두가 나를 추천했다.“지원아, 삼촌이 병원에 오는 내내 네 이름만 불렀어.”
“뭐?”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임신? 도대체 어디서 나온 이야기지?진정우는 내게 매우 가까이 다가서 있었고 그의 특유의 시원하고 깔끔한 향이 내 코끝에 닿았다. 익숙한 그 향은 내 숨을 멎게 했고 가슴속에 알 수 없는 통증을 일으켰다.그와의 이별 후유증이 마치 늦게 발효된 술처럼 은근히 스며들어 있었다는 걸 이제야 느꼈다. 하지만 내 고집은 그 쓴맛을 억누르려 애쓰고 있었다.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비꼬듯 말했다.“뭐라고? 무슨 소리야?”진정우의 턱선이 단단히 굳어졌고 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대답해.”그가 확실한 답을 원한다는 건 분명했지만 나는 확실히 임신하지 않았다. 그건 나 자신도 잘 알고 있는데 왜 진정우는 갑자기 내가 임신했다고 생각한 걸까?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는지, 아니면 내가 뭔가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이라도 한 건지 궁금했다. 아니면 그가 혹시라도 내가 임신하면 뭔가 그에게 영향을 줄까 봐 두려워진 걸까?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니 화가 점점 치밀어 올랐다.그래, 내가 정말 임신했다고 하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만약 내가 임신했다고 하면?”내 입에서 말이 나오는 순간, 나 스스로도 숨을 죽였다.진정우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고 다음 순간 그는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거짓말 아니야?”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는 내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임신했으면서 술은 왜 마셨어? 왜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그가 뱉은 앞부분 말은 아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그가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냉정하게 떠났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내가 해명하려고 할 때조차 듣지 않더니 결국 이별을 통보했다. 나는 비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네가 말할 기회를 줬어?”진정우의 얼굴은 더 단단히 굳어졌고 그의 손에 잡힌 어깨는 아플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나는 몸을 비틀어 그의 손에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그는 오히려 더 세게 붙잡았다.“같이 병원 가자.”그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
“미안하지만 양보하든 말든 저는 다시 협력할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강진혁이 건물에서 나왔을 때, 나는 그의 차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적절한 타이밍에 나를 도와준 건 고마운 일이니, 감사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날 기다리는 거 보니 고맙다고 하려는 거야?” 강진혁은 내 의도를 알아차린 듯 웃으며 물었고 나도 가볍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오빠가 아니었으면 오늘 병원에 실려 갔을지도 몰라요.”“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 아까 네 발차기 꽤 강력했어. 걔 아마 장기라도 꼬였을 것 같아.” 강진혁의 농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지원아, 네 발차기 실력은 여전하네.” 강진혁의 말에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도 날 괴롭히려던 남학생들에게 주저 없이 발차기를 날렸던 기억이 났다.그 일 이후로 ‘날아다니는 발차기’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과거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아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오빠도 그 회사랑 협력 중이셨어요?”“그건 원래 유형이가 맡아서 진행했던 일이야. 난 오늘 현장 점검차 온 거고.” 강진혁이 간단히 설명했고 나는 가볍게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다.“근데 오늘 기운이 좋아 보이네? 혹시 내 아침밥 덕분이야?” 강진혁이 불쑥 아침 이야기를 꺼냈다.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감사하지만 다음부턴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사실 그 아침밥의 실물을 보지도 못했다. 이 사실을 알면 그가 얼마나 어이없어할까 싶었지만 나는 그와 더 얽히고 싶지 않았다.강진혁도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오늘은 공짜야. 근데 내가 매일 해주려면 돈 받아야 할걸?”“오빠 같은 사람을 고용할 여유는 없죠.” 나는 웃으며 받아치고는 덧붙였다.“오빠, 회사에 일이 있어서 이제 가봐야겠어요.”“잠깐.” 강진혁은 시계를 보며 말했다.“유형이가 두 시간 뒤에 도착하는데 우리 집에 같이 갈래? 밥이나 먹고 가자.”그들 가족은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내가 불편할 게 뻔했다.“아니요
“아야, 아야! 손 좀 살려주세요!”손이 짓밟힌 남자가 필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강진혁은 그의 손을 그대로 밟고 서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너 괜찮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저는 괜찮은데 핸드폰이 완전히 망가졌어요.”내 말을 들은 강진혁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난 핸드폰을 잠시 바라봤다. 그때 옆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강 대표님! 제발 이러지 마세요!”이신웅이 급히 다가와 손을 뻗었지만 강진혁에게 닿지도 못한 채 멈칫거렸다. 그의 눈빛엔 간절함과 당황함이 뒤섞여 있었다.“아빠! 손가락 다 부러질 것 같아요!”바닥에 엎드린 남자가 다른 손으로 이신웅을 붙잡으며 울부짖었다.그 한마디에 모든 상황이 명확해졌다. 이놈이 이렇게 거만하게 굴었던 이유는 아버지가 뒤에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이신웅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고개를 숙이며 강진혁에게 애원했다.“강 대표님, 제발 아들을 좀 놔주십시오. 모든 잘못은 제 책임입니다.”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들은 더욱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강 대표님! 제발요! 손이 정말 못 쓰게 생겼단 말이에요!”이신웅은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서성거렸다. 그러나 강진혁은 그의 애원을 무시한 채 옆에 서 있던 비서 이소희를 향해 말했다.“최신 모델 핸드폰 하나 준비해.”이소희는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봤다.“최신 프로 모델로 보내드리겠습니다.”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오빠, 핸드폰은 필요 없어요. 제 핸드폰을 망가뜨린 사람이 물어내면 돼요.”이신웅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제가 배상하겠습니다! 뭐든 말씀만 하세요!”그는 곧바로 옆 사람에게 눈짓을 보냈고 최신 모델의 핸드폰이 금세 준비됐다. 하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이 준 물건은 믿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이상한 프로그램이나 도청 장치가 설치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나는 옆에 서 있던 내 직원을 가리키며 말했다.“우리 직원이 다친 건 어떻게 하실 건가요?”이신웅
방금 솔직히 정말 먹고 싶었지만 내가 그걸 먹는 순간, 진정우가 내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셈이 될 것이다. 나는 그를 그렇게 쉽게 만족시킬 순 없었다. 진정우는 나를 여전히 신경 쓰게 만들고 싶겠지만 나는 그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로 답답해지고 더 고민하도록 놔두고 싶었다.서랍에서 간식을 꺼내려는 순간, 사무실 전화가 울렸고 나는 한 손엔 간식을 들고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네? 상황이 많이 심각한가요?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전화를 끊고 간식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걸려 온 전화는 팀원으로부터 온 것이었는데 외부 미팅 중 상대 업체에서 트집을 잡고 폭행까지 있었다는 얘기였다.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내 팀원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건 곧 나를 겨냥한 일이기도 했기에 나는 곧바로 차를 몰고 현장으로 향했다.현장에 도착하니 팀원은 억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부장님, 정말 여자 탈의실에 들어간 적 없어요! 그 사람들이 일부러 저를 모함한 거예요.”그의 부은 얼굴을 보니 분명 폭행당한 흔적이었다.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지만 그 상처는 누가 봐도 명백했다.“누가 때렸어?”“상대 회사 보안 팀장입니다.”“여기 책임자가 누구죠?”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그때 중년 남자가 급히 뛰어왔다.“윤 부장님, 오늘 일은 정말 오해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의 이름은 이신웅이었고 이번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다. “이 부장님, 오해라고 하셨죠? 그런데 제 직원은 이렇게 맞았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이신웅은 서둘러 대답했다.“의료비는 저희 쪽에서 전액 부담하겠습니다.”나는 미소를 지으며 비꼬았다.“그게 전부인가요?”그러자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추가로 결근 보상금과 영양비도 제공하겠습니다.”나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그전에 폭행을 저지른 사람부터 데려오세요. 그렇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나는 휴대
“윤 부장님! 오셨네요! 오늘은 안 올 줄 알았어요.”회사에 도착해 아침 식사가 혹시 쓰레기통에 버려졌는지 확인하려던 참에 허진호가 봉투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왔다.“여기요, 아침 식사!”그의 말에 모든 상황이 이해됐고 아침 식사가 내 책상에 없는 이유는 이제 분명했다.그런데도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허진호가 이유 없이 나를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그는 음식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오늘 새벽 다섯 시에 정우 씨가 불러서 회사에 와서 일했거든요. 너무 배가 고파서 윤 부장님 책상 위에 있던 아침을 먹었어요. 그래서 이건 대신 사 온 거예요.”그의 거짓말은 너무 어설펐지만 굳이 따지지 않았다. 이제는 이런 일로 힘을 쓰고 싶지 않았으니까.“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이미 먹었어요.”사실 그날 아침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요즘은 음식을 보면 식욕이 전혀 생기지 않고 억지로 먹으려고 하면 오히려 속이 메스꺼웠다.“에이, 그럴 리가요. 설마 제가 산 음식이 맛없어서 그런 건 아니겠죠? 이건 믿을 만해요. 직접 맞춤 제작한 거라니까요.”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정말요? 그럼 한번 볼게요. 입맛에 맞으면 조금 먹어볼게요.”나는 포장을 열어 보았다. 안에는 야채와 새우가 든 계란찜, 홍삼이 들어간 대추차,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 샐러드가 담겨 있었다.이 조합은 분명 누군가가 내 취향을 잘 알고 만든 것이었다.“어때요?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은 구성이라니까요.”허진호가 말을 이으며 식기를 꺼내려 하자, 나는 포장을 탁 닫으며 말했다.“별로네요. 보기만 해도 입맛이 없어지는걸요.”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아니, 이거 다 윤 부장님이 좋아하는 음식들 아닌가요? 왜 오늘은...”“허 대표님은 제가 이걸 좋아한다고 어떻게 아세요?”나는 그의 말을 끊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자 허진호는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그게, 그, 전에 부장님이 말했잖아요..
지난번 신지태의 경기를 진정우가 녹화해 보여주긴 했지만 현장에서 직접 본 적은 없었다.“좋아, 이번엔 제일 좋은 자리로 준비해 둘게.”신지태가 웃으며 말했다.“응원할게, 오빠. 힘내.”나는 주먹을 쥐어 보이며 그를 응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말했다.“너도 건강 잘 챙겨.”“알았어. 이제 바로 밥 먹고 푹 잘 거야.”나도 졸음이 밀려와 하품을 참으며 대답했다. 어젯밤 한숨도 제대로 못 잤던 터라 몸이 한계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이제야 겨우 눈이 감기려는 찰나였다.“어서 쉬어. 그리고 진정우한테 맛있는 거 좀 해달라고 해.”신지태는 이렇게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 나는 휴대폰을 옆으로 던지고 부엌 쪽을 슬쩍 바라봤더니 어둠 속에 고요함만이 감돌았다.솔직히 진정우가 음식을 해준다면 좋겠지만 그가 다시 내게 돌아와야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언제까지 고집을 부리며 버틸지,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잡념에 빠진 채 잠에 들었고 한 번도 깨지 않고 아침까지 푹 잤다. 꿈도 꾸지 않을 만큼 깊이 잠들었던 나는 눈 부신 햇살에 눈을 떴다.그러나 이상하게도 몸이 여전히 피곤했고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이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런데 몸을 움직이자마자 온몸이 쑤시는 통증에 “아야!” 하고 외쳤다.“정우야, 나 아파. 좀 주물러 줘.”무심코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내 상황을 깨달은 나는 다시 그를 불렀다.“정우...”그러나 말을 끝맺지 못하고 멍해졌다. 진정우는 이미 내 곁에 없는데 그를 부르는 내가 참 우스웠다.습관이란 참 무서운 것이었다. 예전에 강유형에게 익숙했던 내가 이제는 진정우에게 익숙해졌다. 그들이 곁에 있는 것이 당연했던 시간이 지나, 이제는 그들이 없는 현실을 또다시 받아들여야 했다.휴대폰이 울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전화를 받으니 강진혁이었다.그의 문자에 답하지 않자 아예 전화를 건 것이었다. 안 받으면 직접 찾아올 것 같아서 나는 마지못해 전화를 받
정말 나쁜 남자! 나를 떠나겠다고 해놓고 뒤에서는 이런 행동이라니. 속마음은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다는 뜻일까? 만약 그렇다면 안리영의 말처럼 나도 한 번 그를 제대로 흔들어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허 대표님, 오늘 저녁엔 약속이 있어서 내일 저녁 먹어요.”나는 일부러 허진호에게 내일 저녁 약속을 제안했다. 허진호는 금세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좋아요! 정우 씨도 같이하시죠?”하지만 진정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저는 바빠서 어렵습니다.”허진호가 무언가 더 말하려는 찰나, 내가 먼저 끊었다.“허 대표님, 내일 제가 정말 특별한 곳으로 모실게요. 아마 허 대표님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일 거예요.”허진호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정말요? 제가 못 가본 곳이라니. 그런데 정우 씨는 가보셨나요?”그가 굳이 진정우를 언급하는 이유는 뻔했다. 허진호는 이미 진정우가 진씨 가문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혹시나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가 자신이 불똥을 맞을까 두려운 눈치였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진정우는 대답도 하지 않고 한 발짝에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어 나갔다. 허진호는 진정우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익살스럽게 말했다.“윤 부장님, 내일 제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요?”그는 그렇게 말하며 황급히 진정우를 따라갔다.나는 피식 웃었고 아침부터 우울했던 마음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신지태와 영상 통화를 했다. 하지만 화면이 켜지자마자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태야, 그만 통화해. 우리 다 기다리고 있잖아.”“지원이야.”신지태가 내 이름을 말하자, 강유형의 목소리가 뚝 끊겼고 신지태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네 얘기 들었어.”나는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이제 괜찮아. 오늘 하루 종일 회사에서도 잘 지냈고.”“정말 미안하다.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고생했구나.”그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미안함이 가득했다.“그렇게 말하면 내가 남이 되는 것
허진호는 사람을 꾸짖거나 대놓고 나무라는 일이 거의 없었다. 대신 돌려서 넌지시 지적하면서 상대가 스스로 깨닫도록 했다. 덕분에 부끄러움은 덜고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묘한 능력이 있었다.그는 항상 느긋하고 농담을 섞어가며 회사를 운영했지만 직원들은 누구 하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의 밑에서 모두가 최선을 다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일을 조금이라도 늦게 하면 허 대표님께 죄송한 기분이 들어서요.”나도 일부러 분위기를 맞추며 말했다. 그러자 허진호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제가 언제 압박을 줬다고 그래요. 일은 매일 쌓이고 또 쌓이는 건데 굳이 서두를 필요 없잖아요.”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상사는 허진호가 처음이었다.그의 진심이 느껴졌기에, 나도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앞으로는 조금 더 느긋하게 해볼게요.”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요즘 살이 많이 빠지신 것 같은데 혹시 어디 아프세요?”솔직히 말하면 허진호와 나는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나를 대했고 나는 그와의 거리감을 유지하려 애썼다.“괜찮습니다. 몸 상태는 좋아요.”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는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좋기는 무슨. 얼굴이 창백해서 뱀파이어한테 피 다 빨린 사람 같아요.”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옆 서랍을 열어 작은 선물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며칠 전에 고객이 준 건 영양제예요. 이거 드시고 몸 좀 챙기세요.”나는 상자를 받아서 들며 살펴봤다.“이거 여성 영양제 같은데요? 허 대표님한테 왜 이런 걸 준 거죠?”허진호는 난처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하하, 그러게요. 아마 제가 여자 친구가 있을 거라 생각한 거 같아요. 근데 알다시피 저는 외로운 솔로잖아요.”그의 너스레에 웃음이 났지만 그가 진심으로 챙겨주는 것이 고마워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감사합니다, 허 대표님. 나중에 제가 식사 한번 대접할게요.”허진호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약
진정우가 정말로 후회할까?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젯밤 그의 단호했던 뒷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아픔은 점점 커져서, 결국 그날 밤 나는 뒤척이며 한숨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강유형과 헤어졌을 때조차 이렇게 괴롭진 않았던 것 같았다. 밤새도록 마음을 다잡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고 준비를 마친 뒤, 나는 회사를 향했다. 회사에 가면 진정우를 볼 수 있을 것이고 나와 달리 평온한 얼굴로 있을까 궁금했다.잠 못 잔 흔적을 감추기 위해 최대한 공들여 화장을 하고 회사로 갔다. 그리고 마침 로비에서 허진호와 마주쳤다. 그는 늘 그렇듯 환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윤 부장님! 오늘 아침도 빛나시네요!”그의 넘치는 열정이 내게 닿자, 마음 한구석에서 묵직한 피로가 밀려왔다. 꼭 오랜만에 만난 가족이라도 된 듯 반갑게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나는 살짝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허 대표님, 안녕하세요.”“그런데 혼자 오셨네요? 가족분은 안 보이는데요?”그가 툭 던진 ‘가족’이라는 단어가 가슴을 찔렀다. 어젯밤부터 억눌렀던 감정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가족이요? 허 대표님이 새로 만들어 주시는 건가요?”내 말에 허진호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허허 웃으며 멀리서 다가오는 누군가를 가리켰다.“저기 오시네요. 정우 씨 바로 오고 있잖아요.”진정우가 걸어오고 있었다. 어제와는 달리 간단한 티셔츠와 작업복 차림이었다. 비록 그는 이제 진가의 상속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이 회사에서 일하는 모습은 변함없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이 회사도 그의 소유였다.그를 바라보며 왜 나에게 자신의 신분을 숨겼는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를 믿지 못해서? 아니면 내가 그의 부를 탐낼까 걱정돼서? 아니면 나를 그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걸까?생각이 꼬리를 물자 갑자기 가슴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서둘러 발걸음을 돌리려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