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평생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두 번 밖에 만나지 않은 남자가 나와 혼인신고를 하자고 한다니. 그런데 10년 동안 사랑한 남자는 나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났다. 잠시 충격을 받은 후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진정우 씨,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닌가요?” 진정우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진지하게 말했다. “연애는 결국 결혼하기 위한 거잖아요. 그쪽이 연애할 생각이 없다니까 그냥 결혼하자는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닌데 말을 한 사람 쪽이 좀 이상했다. 보통 사람이면 낯선 사람과 이렇게 쉽게 혼인신고를 하자고 하진 않을 텐데. 물론 소설 속에서는 이런 일이 유행하긴 한다. 하지만, 그건 소설일 뿐이다. 나는 살짝 눈을 찡긋하며 입가에 비웃음을 띄웠다. “진정우 씨, 모든 맞선 상대에게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세요?” 마침 저녁노을이 우리를 비추고 있었고, 진정우의 그림자는 나를 완전히 덮고 있었다. 그는 무심하게 말했다. “처음인데요.” 목구멍이 약간 간지러웠다. “우리... 서로 잘 모르잖아요.” 진정우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우리는 서로 마주 선 채로 가만히 있었다. 이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몸이 뜨거워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심지어 코끝에 땀이 맺히는 듯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뒤의 벽을 긁고 있을 때, 진정우가 입을 열었다. “난 생선 사러 갈게요.” “어, 나 고수 안 먹어요.” 왜 이런 말을 갑자기 해버렸는지 나도 모르겠다. 진정우는 간단하게 대답한 후 큰 걸음으로 떠났다. 나는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키가 180cm는 넘을 텐데 허리는 곧게 펴져 있었고, 태양 아래에서 강한 신뢰감을 주었다. 문득 이런 사람과 갑작스럽게 결혼해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게다가 그는 군인이었다. 국가에서 검증된 사람이라면 생활에서도 충분히 신뢰할 수 있지 않을까.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주인 할머니는 없었다. 만약 계셨다면 분명 나를
“음, 괜찮은 조언이네. 생각해볼게”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꼭 진지하게 생각해봐.” 안리영이 말끝을 맺고 잠시 멈추더니 덧붙였다. “지원아, 누군가와의 기억을 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새로운 사람과 빨리 시작하는 거야.” “알겠어, 전문가님. 잘 알겠어요.”전화를 끊고 나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나는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한 번에 알아챘다. 진정우였다. 그의 걸음은 무겁고 힘이 있었다. 곧이어 물 틀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집주인 할머니의 잔소리가 들렸다. “어째서 혼자만 왔어? 지원이는 어디 갔니?”진정우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잠시 후,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생선국에 고수 넣지 마세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웃었고 점점 눈물로 바뀌었다.이 몇 년간 강유형 집에 있는 동안 나는 고수를 먹었다. 하지만 부모님과 함께 있을 때는 한 번도 먹지 않았다. ‘타향에 가면 그곳의 풍습을 따르라’는 말처럼, 나는 강유형의 약혼녀 신분으로 그 집에 들어갔을 때 강유형의 어머니는 나를 딸처럼 여기겠다고 했지만 나는 결국 강유형의 가족이 아니었다. 나는 이 사실을 마음 깊숙이 알고 있었고 사소한 부분에서조차 내가 까다롭게 보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내 취향을 억누르며 살았다. 고수를 싫어했지만 억지로 먹었던 것처럼. 할머니가 나를 불러 국을 먹으라고 했을 때 나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진정우와 혼인신고를 하려는 꿈. 막 서명하려던 찰나에 누군가가 나를 깨웠다. “정우랑 잘 안됐어?” 할머니가 식탁에서 물었다. 꿈이 깨진 생각에 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혼인신고하려다가... 할머니가 깨워서 못했어요.” “뭐라고?” 할머니는 이해하지 못한 듯 물었다. “벌써 혼인신고를 하려는 거야? 이렇게 빨리? 며칠은 연애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니?” 나는 그저 말을 잇지 못했다.“지원아, 네가 안목이 있구나. 정우 같은 남자를 놓치면 후회할 거다. 내가 나이가 많아서 그렇지
그날 밤 나는 깊게 잠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푹 자고 있었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이 깼다. 말하는 사람은 진정우가 아니었고, 지방 사투리가 섞인 여성의 목소리였다. 소리만 들어도 그 여자가 젊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린 소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청아하지만 중년 여성의 목소리는 대개 무겁고 거칠다. 나는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민감한 편이지만, 10년을 사랑했던 남자가 사실은 쓰레기였다는 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람을 잊는다는 건 더 이상 그를 떠올리지 않는 거라는데, 아직 나는 그게 안 된다. 강유형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도 원망 때문인지 자꾸 그가 생각난다.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귀를 기울여 밖의 소리를 들었다. “할머니, 정우 씨는 어디 있어요?” 여자가 물었다. “갔어. 아침 일찍 나갔지.” 할머니는 무언가를 씻고 있는 듯, 물소리가 흘러나왔다. “갔군요. 아직 자고 있는 줄 알았어요.” 여자의 목소리엔 웃음이 섞여 있었다. “오향설, 정우가 일어났는지 안 일어났는지 너랑 무슨 상관이야? 정우는 널 좋아하지 않으니 괜한 헛수고하지 마.”할머니는 정말 직설적이었다. 일반 사람이라면 버티지 못했을 텐데 문밖의 그 과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 남자는 밀당을 좋아해요.” 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여자 꽤 자신만만하네.’“난 정우가 너를 낡은 헝겊처럼 내팽개쳤다는 것만 알아.” 할머니는 정말 한 치의 여유도 없었다. “할머니, 나이 드시더니 뭘 모르시네요.” 오향설은 약간 화가 난 듯했다. “난 부끄러움을 알고, 사람은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아.” 할머니의 말에 나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할머니, 우리 이웃끼리 왜 이러세요? 제가 그동안 할머니도 많이 도와드렸잖아요. 도와주지 못할 망정 왜 저를 몰아붙이세요?” 오향설은 도덕적 압박을 시도했다. 할머니는 그런 그녀에게도 전혀 개의치 않
나는 컵에 물을 받아 양치질을 했다. 오향설을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지만 그녀는 단 한순간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다시 발끝에서 머리까지 나를 샅샅이 훑었다. “지원아, 이분은 오향설이라고 해.” 할머니가 그녀를 소개했다. 나는 입안에 치약 거품을 가득 머금고 오향설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둥근 얼굴을 가졌지만 뚱뚱하진 않았고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얼굴에는 정성 들여 화장을 한 흔적이 뚜렷했다. “향설아, 이 사람이 네가 궁금해하던 지원이야. 내 말이 맞았지? 정말 피부가 물기 어린 것 같지 않니?” 할머니는 손으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오향설이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는 나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듯 살짝 주눅 든 표정을 지었지만 입으로는 여전히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나도 저 나이 때는 피부 좋았어요. 나이 들어서야 이렇게 된 거죠.” 할머니는 입을 삐죽거렸고 오향설은 그런 할머니를 흘겨보며 눈싸움을 했다. 두 사람의 묘한 신경전이 마치 코미디 한 편을 보는 듯했다. 내가 양치질을 마치자 오향설이 입을 열었다. “지원 씨, 여긴 친척 댁에 온 건가요, 아니면 놀러 온 건가요?” “놀러 왔어요.” 나는 물을 틀고 칫솔을 헹구었다. “혼자 왔어요? 남자친구는 없고요?” 오향설의 질문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네, 솔로예요!” 내 대답에 그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정우가 지원이한테 반해서 나한테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했어. 오향설, 너도 인정해야 하지 않겠어?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린다고.” 할머니는 여전히 힘이 넘쳤다. 오향설의 입꼬리가 살짝 떨리더니 결국 이렇게 말했다. “개구리가 아무리 천상계의 백조를 꿈꿔도, 백조가 거들떠봐야죠.” 그녀는 질투심에 차서 말하긴 했지만 내가 백조라는 것을 인정했다. 할머니는 나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지원아, 네가 꿈에서 진정우랑 결혼하려고 했다고 했잖아, 그치?” 나는
고개를 들자 각진 얼굴에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진정우가 눈에 들어왔다.그는 나를 붙잡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들고 있던 수박도 받아주었다. 이런 장면은 마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연출인데 지금 내 눈앞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나를 바로 세워주고는 손을 놓았지만 내가 살짝 움직이자마자 발목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어서 그의 팔을 잡으며 아프다고 말했다. 그는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내 희고 가는 발목이 이미 빨갛게 부어오른 것을 보았다. “발목을 삐었습니까?” 진정우는 나와 아주 가까이 있었고, 그의 낮고 깊은 목소리는 특별히 매력적이고 듣기 좋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다음 순간 그는 수박을 내 손에 쥐여주고는 나를 번쩍 안아올렸다. 강유형과 오랜 시간을 함께 했을 때조차 그는 이런 식으로 안아준 적이 없었는데, 진정우가 갑자기 이렇게 나를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리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심지어 코끝에 땀까지 맺혔다. 나는 긴장하거나 흥분하면 코끝에 땀이 나는 사람이다. 이때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웃집 사람들과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이런 친밀한 남녀의 행동을 보는 것이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진정우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나를 단호한 걸음으로 품에 안고 마당으로 돌아왔다. 문을 들어설 때, 나는 오향설이 프라이팬을 들고 서서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어머, 안고 들어오네? 두 사람 진도가 꽤 빠른걸?” 집주인 할머니는 우리를 보면사 두 눈을 반짝이며 장난스레 말했다. “다쳤어요.” 진정우는 짧게 대답하며 나를 마당에 있는 돌 의자 위에 내려놓은 후 스스로 무릎을 꿇고 내 발에서 슬리퍼를 벗겼다. 그는 내 발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그의 손은 차가웠고, 그의 손바닥이 내 발을 감싸자 묘한 감각이 발바닥에서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발가락을 오
얼마 전, 강유형도 내 발을 주물러 준 적이 있다. 그때는 감동을 느꼈지만 지금과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손길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우가 내 발을 다 주물러 줄 때쯤, 밖에서 할머니가 소리치며 누군가를 꾸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똑똑히 들어, 내 사람한테 누가 해코지하면 내가 가만 안 있을 줄 알아! 너네 조상 대대로 내가 저주할 거야!” “무슨 일이에요?” 나는 조용히 물었다. 진정우는 내 발을 그의 무릎에서 내려 다른 돌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일어서는 순간 나는 그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걸 보았다. 나는 더워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의 다음 말이 그게 아님을 알려주었다. “앞으로 여기서는 치마 좀 덜 입어요.” 나는 고개를 숙여 내가 입고 있는 치마를 보았다. 짙은 파란색 실크로, 몸에 딱 달라붙는 데다가 옆이 살짝 트여 있었다. 내가 앉아 있을 때, 치마 틈이 위로 올라가서 하얀 허벅지가 드러나 있었다. 방금 진정우가 내 발을 주물러 줄 때 아마 뭔가를 봤을 것이다... 나도 얼굴이 약간 붉어졌지만 지는 건 싫어하는 성격이기에 태연한 척하며 물었다. “내가 치마 입는 게 거슬려요?” 진정우의 목젖이 빠르게 두 번 움직이더니, 그는 말없이 성큼성큼 마당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할머니의 꾸짖음도 멈췄다. 나는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 발목을 들고 폴짝폴짝 뛰며 문가로 갔다. 거기서 나는 진정우가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것을 보았고, 그의 앞에는 소문의 주인공인 오향설이 서 있었다. “당신 행동은 고의적인 상해예요. 신고만 하면 법적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진정우는 땅에 흩어진 기름 얼룩을 가리켰다. 바로 내가 아까 미끄러진 그 자리였다. 보아하니, 내가 발을 헛디딘 것은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의 짓이었다. “내가 그랬다고 어떻게 증명해요? 본 사람 있어요?” 오향설은 목소리를 높였다. 집주인 할머니가 말했다. “벌써
이렇게 노골적인 말은 평생 처음으로 해봤다. 진정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차갑게 대답했다. “착각한 겁니다.” “...” 그는 뒤돌아 서서 수박을 잘랐다. 한 조각 한 조각, 마치 줄을 맞춰 대기하는 병사들처럼 가지런하게 접시에 올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그의 방을 다시 한번 엿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왜 안 먹고 있어? 보고만 있으면 배가 부르니?” 할머니가 다가와 나를 놀렸다. 이 할머니는 참 대단한 분이다. 욕할 때는 양손을 허리에 얹고, 남을 걱정할 때는 자상하며, 농담을 할 때는 능청스럽게 내뱉는 재치까지 갖추셨다. “할머니를 기다렸어요. 저를 위해 속 풀이해 주시느라 고생하셨잖아요.” 나는 장난스럽게 가장 큰 수박 조각을 할머니에게 내밀었다. 할머니는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 한 입 베어 물었다. “달다. 하지만 나는 당뇨가 있어서 많이 먹으면 안 돼.” 나도 수박을 먹기 시작했지만 진정우는 방으로 돌아가더니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저녁 시간이 되자 그는 또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에게 저녁을 먹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는 너무 빨리 가버려서 입도 떼지 못했다. 할머니가 옆에서 코웃음을 쳤다. “정우는 원래 굉장히 차가운 사람이야. 너한테만 저렇게 특별히 신경 써.” ‘나한테 어떻게 특별히 신경을 쓴다는 거지?’ 나는 묻지 않았지만 그가 내 발을 주물러 준 것이 효과가 있기는 했다. 밤새 자고 일어났더니 발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조용히 눈을 떴다. 마당 안은 너무도 고요해서 마치 사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민소매 슬립 차림으로 문을 열고 나가다가, 돌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 있는 두 사람과 눈이 딱 마주쳤다. 진정우는 내 모습을 몇 초 동안 바라보더니, 이내 급히 시선을 피했으며 귀마저 붉어졌다.나는 내 옷차림을 내려다보고,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려 하자 할머니가 정겹게 나를 불렀다. “지원아,
며칠 동안 이곳에 머물렀지만 할머니의 자식들이 찾아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오히려 할머니는 나와 진정우를 자신의 자식처럼 여기고 계신 것 같았다. 저녁에 잠들기 전 안리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제 돌아올 거냐고 묻기에 나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 작은 동네에 있는 동안 정말 행복했으니까. 부모님이 떠난 후로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휴가를 더 연장해서 이곳이 지겨워질 때까지 머물고 싶다고 말했다. “너 혹시 그 군인 오빠를 놓치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묻자 진정우와 몇 번의 짧은 만남 속에서 느낀 미묘한 설렘이 떠올랐다. “놓치기 싫다기보다는... 그 사람이랑 있을 때 심장이 활기차게 띠는 느낌이야.” “좋네, 우리 조 비서님의 회복력도 꽤 괜찮은데?” 안리영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안리영도 잠깐 침묵하더니 물었다. “강유형 그 나쁜 놈, 아직도 연락이 없어? 카톡도 하나 안 보냈어?” 나는 입술을 핥으며 조용히 대답했다. “.....응, 없어.” 안리영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 인간은 네가 평생 자기를 못 떠날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 나는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창밖의 달빛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번에는 강유형한테 보여줄 거야.” 안리영과 통화를 하며 잠들었고 다시 깨어났을 때는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전화는 끊어져 있었고 안리영이 남긴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이 세상에 누구도 누구 없이 살 수 없는 건 아니야.] 그렇다. 나는 강유형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을 거다. 며칠 동안 잘 먹고 잘 지냈으니까. 나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고 다시 자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휴대폰에서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이 새벽에 누가 메시지를 보낸 걸까? 눈을 뜨고 화면을 확인하자 순간 멍해졌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강유형이었다.[이제 그만하고 돌아
“여긴 공항이야, 사람들이 많고 아이들도 있는데.” 진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고 있어.”“그런데도...” 내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러자 진정우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하고 싶어.”그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강유형을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질투하는 거겠지.진정우는 강유형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그런 걸까?그 생각이 들자 나는 결심하고 눈을 감았다. 심장은 요동치며 공항 대기실에서 진정우의 입맞춤을 기대했다.하지만 그의 입술이 다가오는 대신 내 손에 무게감이 느껴졌다.눈을 뜨고 보니 내 손에 작은 가방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이게 뭐야?”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진정우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내가 열어보라고 손짓했다.내가 의아한 마음으로 가방을 열자 그 안에는 두 장의 카드와 하나의 증명서가 들어 있었다.그 카드와 증명서는 그가 전해주고 싶었던 것들이었다.“이게 무슨 의미야?” 나는 다시 물었다.진정우는 녹색의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이건 내가 군 복무를 마친 증명서야. 그리고 이건 내 열정이 담긴 헌혈 증서야. 이 카드들은 내 전 재산이야.”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전 재산을 보여주는 장면이 떠올랐다.진정우는 내게 재산을 넘기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신념까지도 함께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특히 빨간 헌혈 증서를 보자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이걸 왜 준비한 거야?” 나는 조금 울컥하며 물었다.“너에게 주는 믿음이야. 이게 사랑 보험보다 더 실용적이야.”진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강유형과 사랑 보험에 가입했던 사실을 안 것 같았다.하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내게 주는 것이 모든 것 같았다.“이 두 개는 내가 가질게. 하지만 카드는 네가 갖고 있어.”나는 그가 준 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고 돈에 욕심이 없다. 만약 돈에 눈이 먼 여자라면 나는 강유형과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진정우는 카드를 받지 않고 조금 난처한 듯 말했
“네, 누구세요?”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무심코 강유형을 쳐다보았다.그는 나를 보지 않고 혼자서 멀리 있는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저는 하트시그널 보험사의 A8338번 직원입니다. 4년 전, 윤지원 씨와 강유형 씨가 저희 회사 사랑 보험에 가입하셨고 이제 보험 만기일이 다가와 관련 정보를 확인하려고 연락드렸습니다.”이 말을 듣고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본능적으로 진정우를 보았다.그는 내 옆에서 자리를 피하고 내가 전화를 받을 때는 멀리 떨어져 앉았다.그는 내게 충분한 개인 공간을 주고 있었다.진정우는 정말 세심하다. 나에게 필요한 안전감도, 여유도 모두 제공해 주고 있었다.“실례지만 두 분 지금 연애 중인가요, 아니면 결혼하셨나요?” 상대방이 조심스레 물었다.그 말에 나는 다시 강유형을 쳐다보았다. 그는 전화를 받고 있었고 표정은 매우 심각해 보였다.“지원 씨?” 상대방이 내 대답을 기다리며 다시 물었다.나는 침을 삼키는 동작을 하며 대답했다. “네, 듣고 있어요. 저희... “‘이미 헤어졌어요’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강유형이 갑자기 나를 바라봤다.그 순간, 나는 피할 틈도 없이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우리는 그렇게 눈을 마주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원 씨?” 상대방이 또 나를 부르며 물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어봤다. “왜 남자 쪽은 묻지 않나요?”“묻긴 했습니다. 다른 동료가 강유형 씨와 연락 중입니다.” 그의 대답을 들으니 강유형 역시 이 전화를 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세상엔 정말 재밌는 일이 많다.나는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우리는 헤어졌어요.”“확실한가요?” 상대방의 말투가 불쾌하게 들렸다.나는 강유형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진정우를 쳐다보며 손에 낀 반지를 살펴보았다.“저는 이미 결혼했어요.”상대방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원 씨. 만약 강유형 씨도 같은 답을 하셨다면, 이 사랑 보험 계약은 보험 규정에 따라
내가 그런 말을 했지만 이건 사적인 일이 아닌가?진정우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 걸 알아차린 듯 바로 설명해 줬다. “내가 그 사람한테 말한 거야.”“아, 그렇구나.” 나는 대답하고 계속 죽을 먹었다. 그런데 두어 숟갈 먹고 나서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너 허 대표님하고 그렇게 친해? 내가 대신 휴가를 부탁했더니 대표님이 그냥 허락하고, 오히려 공손하게 나한테 말까지 했잖아?”진정우는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그렇게 친한 건 아니야.”“친하지 않다고? 내가 보기엔 마치 네가 그 사람의... 대표님 같아.”진정우가 한마디만 하면 허진호는 절대 거절할 리가 없어 보였다.“비슷한 거지.” 진정우가 의외로 그렇게 대답했다. “허 대표님이 나한테 새 제품을 개발해달라고 부탁하고, 내가 돈을 벌어줘야 하니까내가 말하면 거절할 수 없어.”대단하네!나는 마음속으로 존경을 표하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역시 자신감 넘치게 말한다. 이게 바로 진짜 실력이지.“우리 늦지 않았어?” 나는 밥을 다 먹고 물어봤다.“괜찮아. 늦으면 그냥 항공편 변경하면 돼.” 진정우는 정말 나를 방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이해가 안 돼서 물었다. “왜 그렇게 급하지 않아? 나 좀 재촉해줘도 될 텐데.”“네 마음대로 하게 하고 싶어.” 진정우가 또 닭살이 돋는 멘트를 하자 나는 당황해서 얼른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불만을 털어놨다. “어제 미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내가 준비했을 텐데.”“어제... 내가 말할 기회가 없었잖아.” 진정우의 말에 나도 순간 뜨끔하면서 얼굴이 빨개졌다.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진정우는 살짝 웃으며 내가 당황한 모습을 보며 평온하게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 천천히 해. 부족한 것 있으면 가서 사면 돼.”“일찍 말했으면 내가 준비 안 했을 텐데.” 내가 그에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진정우는 화내지 않고 또 한마디 했다. “근데 나는 네가 물건 정리하는 모습 보는 게 좋아.”“
“왜 안 받아?” 내가 무심코 물었다.“받을 거야.” 진정우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너는 자지 말고 일어나서 씻고 아침 먹어.”나는 깜짝 놀랐다.“아침 벌써 준비했어?”나는 그가 내 옆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정우는 이미 아침을 다 준비하고 내가 일어나지 않자 다시 침대에 돌아와서 나와 함께 공부한 거였다. 역시 뛰어난 사람은 항상 뒤에서 묵묵히 노력하는구나.“응, 내가 계란 죽을 끓였어. 일어나서 좀 먹어.” 진정우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사랑받는 느낌은 정말 좋다. 마치 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진다.진정우는 전화를 받으러 나갔고 나는 손을 이불에서 빼내며 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고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면서 한정판이라고 묘사했다.그리고 다시 SNS를 놀다가 잠시 후에야 일어났다. 그런데 진정우의 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별 신경 쓰지 않고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화장실에 들어가서야 나는 안리영이 준 약이 반 통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 전에 약을 4분의 1만 썼던 것 같은데 그럼 진정우가 사용한 건가? 언제였지?혹시 내가 자고 있을 때?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왜 아직도 안 씻었어?” 진정우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어색하지 않게 하려면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게 제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말이 나와버렸다. “너 기다리느라 그래.”진정우가 잠깐 멈칫하다가,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 분명, 내 말이 그에게 어떤 자극을 준 거였다. 나는 더 이상 아침에 뭔가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일부러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서둘러 씻고 그에게 말했다. “빨리 죽 끓여 놓고 나오는 대로 밥 차려줘.”“안 늦었어.” “지금 몇 시인데 아직도 안 늦었다고 해?” 내가 그를 비꼬며 말했다.“10시 비행기야, 시간 충분해.” 진정우의 말에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나는 원래 거울 속에서 그를 보고 있었는데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그
“알았어.” 진정우는 여전히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이 터졌다.“이제야 네가 왜 서른이 넘도록 연애를 안 했는지 알겠어. 네가 너무 재미없잖아.”“너도 내가 재미없다고 생각해?”그는 가볍게 내게 물었다. 연애라는 부분에서 그는 약간 둔한 면이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말했다.“내 말은 네가 여자 마음을 잘 달래주는 방법을 모른다는 뜻이야.”그는 몇 초 동안 조용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내 생각엔 달래는 건 속인다는 뜻이야.”그의 참신한 대답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럼 내가 널 달래줘야겠어?”진정우가 다시 물었다. 어떤 여자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다정함은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진정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나는 과거 강유형이 나를 대했던 방식을 떠올리며 말했다.“아니, 지금처럼 해. 난 너의 방식이 좋아. 너는 정말 특별하니까.”그의 품에 더 깊숙이 기대며 덧붙였다.“내가 프러포즈하면 받아줄 거야?”진정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말했다.“안 하면서 뭘 물어?”그 순간,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불 안에서 내 손을 꺼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만지며 말했다.“윤지원, 나와 결혼해 줄래?”순간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네 프러포즈이야?”“아니, 완전한 건 아니지만 맞기도 해.”그의 애매한 대답에 나는 그를 살짝 때리고 싶었다. 솔직히 내가 처음으로 프러포즈를 받을 거라고 상상했던 장면은 이런 게 아니었다. 한때 나는 내 인생 첫 프러포즈는 강유형이 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진정우였다.그 말을 들으니 얼마 전 강유형이 나를 위해 준비한 놀이공원 프러포즈 이벤트가 떠올랐다.나는 가지 않았지만 이후 몇몇 네티즌이 사진을 찍어 온라인에 올렸다. 그들은 그걸 단순히 오픈 이벤트의 리허설로 생각했겠지만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
온몸이 이불에 휩싸인 채 침대로 돌아오고 나서야 내가 괜히 이상한 상상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한 번 더 군인 출신인 진정우의 자제력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도 실감했다.그는 단순히 나를 씻겨준 것뿐이었다. 말 그대로 그냥 깨끗하게 씻겨준 것.이미 그의 능력을 확인했지만 그래도 승부욕이 발동해 장난스럽게 말했다.“진정우, 너 혹시... 안 되는 거 아니야?”이 말은 남자에게 치명적인 모욕이다. 어지간한 남자는 이런 말을 듣고 참을 수 없겠지만 진정우는 보통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내 어깨를 가볍게 누르며 말했다.“얌전히 있어. 그리고 더 이상 애쓰지 마. 아무 소용 없으니까.”내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한 그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살짝 상처받았는데...”나는 일부러 힘없이 실망한 척하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그러자 그가 이불을 살짝 당겨 내 얼굴을 드러내며 내 볼을 살짝 문지르며 말했다.“내가 안 되는 게 아니고 네가 날 끌어당기지 못하는 것도 아니야. 단지, 내가 널 다치게 할까 봐 조금 더 기다리는 거야.”그의 말에 내 얼굴이 더 붉어졌다.“그럼 내가 너랑 가까워지기만 하면 다칠 것 같으면 너 평생 나한테 손도 안 댈 거야?”그는 입술을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응, 참아야겠지.”“...”나는 다시 이불을 덮어버렸다. 그러자 그는 이불째 나를 품에 안았다.“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그의 말에 내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그는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말했다.“조금만 쉬어. 나 샤워하고 올게.”분명 찬물 샤워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찬물 샤워하러 간다.”“...”정말 원칙 하나는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다. 자신이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나를 상처 주지 않으려는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나는 그가 돌아서는 모습을 바라보며 불렀다.“진정우.”“응?”“너, 진짜 최고야.”그리고는 창피해서 혀를 쏙 내밀고 이불 속으로 숨었다. 그러자 그가
진정우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는 내가 모든 원칙을 포기해도 괜찮은 사람이니까.”그는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평범하게 말했지만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 자체로 깊은 사랑을 담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직접 꺼내지 않아도, 문장 하나하나가 사랑이었다. 나는 코끝이 찡해졌고 전을 먹으며 입안 가득 찬 상태로 웅얼거렸다.“진정우, 이리 와봐.”“왜?”그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오라면 오라니까.”나는 괜히 고집을 부렸다. 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와 앉았다. 소파에 앉자마자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는 잠시 놀란 듯 멈췄고 내가 말했다.“네 어깨에 기대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부드러운 웃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진정우가 나를 침대에 눕히며 물었다.“오늘 여기서 잘까, 아니면 네 방에서 잘까?”“여기서 잘래!”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문득, 밤마다 푸쉬업을 하고 찬물 샤워를 하던 그가 떠올랐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근데 오늘 밤에는 푸쉬업 금지야.”그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일부러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얘긴 다시 꺼내지 마.”나는 그의 품에 안기며 그의 허리를 살짝 감쌌다.“안 하면 안 꺼낼게.”진정우의 목젖이 한 번 크게 움직였다.“장난치지 마.”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못 참겠어?”나는 한층 대담하게 물었다. 진정우는 내 허리를 조심스럽게 잡으며 말했다.“장난은 이제 그만. 그리고 나를 더 자극하지 마.”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이듯 낮아진 목소리였다.“너도 원하고 있잖아.”나는 점점 더 직설적으로 말했다.“지원아...”그는 나의 손길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의 티셔츠 끝자락을 잡아 올리며 안으로 파고들었다.“지원아.”그의 목소리는 완전히 잠겨 있었다. 나는 그의 귀에 바짝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난 이제 다 나았어.
이 상황, 얼마나 민망했을지 상상이 간다. 물론 진정우는 예외였다.“잠시만요.”진정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나를 소파에 앉혔다. 그는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천천히 물티슈를 꺼내 내 손을 닦아주었다.“천천히 먹어. 죽이 좀 뜨거우니까 급하게 먹지 말고.”문가에 서 있는 강진혁은 들어오기도, 물러서기도 난감해 보였다. 그 어색한 분위기가 나까지 불편하게 만들었다.“내가 알아서 먹을게.”내 말은 진정우에게 얼른 강진혁을 챙기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진정우는 자리를 뜨기 전에 모든 음식 포장을 풀고 식기를 내 앞에 정갈히 놓아주었다.문가에 서 있던 강진혁은 그야말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애정 행위를 강제로 목격한 셈이었다.아마 나를 짝사랑하는 그의 입장에선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강 실장님, 무슨 일이 신가요?”진정우는 문가로 걸어가며 강진혁에게 물었다.강진혁은 병실 밖으로 나갔고 그가 진정우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나는 듣지 못했다.진정우는 약 3분 후에 돌아왔는데 그의 평온한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가 표정을 드러내지 않자 궁금증이 더해졌다. 그래서 나는 죽을 먹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야?”“별일 아니야.”그의 대답은 꽤 건조했다. 아마도 그 자신도 느꼈는지 덧붙였다.“나를 스카우트하려고 하더군.”“스카우트? 어디로? KS그룹?”강진혁은 아직 총괄 감독에 불과하다. 스카우트 같은 건 인사 부서나 그룹 회장이 해야 할 일 아닌가?혹시 이미 강유형의 자리를 대신할 준비를 하고 있는 걸까?만약 그렇다면, 아까 그가 내게 한 말은 다 무슨 뜻이었을까?내게 심리적 준비를 시키려는 걸까, 아니면 나를 떠보려는 걸까?“어디로 간다는 얘기는 없었고 그저 내 생각을 물어봤어.”진정우는 덤덤하게 답하며 의자에 앉았다. 나는 죽을 휘휘 저으며 물었다.“뭐라고 대답했는데?”“고려하지 않는다고 했어.”그의 대답은 직설적이고 단호했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왜 웃어?”“너무 솔직하고 귀여워서.”칭찬을 듣자
“오빠, 강유형은 성인이에요. 본인이 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죠.”나는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했다.강유형을 회사에서 내보내든, 관계를 끊든, 그건 전부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나도 알아. 하지만 아버지랑 그렇게 싸우는 걸 보니 속이 타더라. 그리고 그가 회사에서 나가면 회사에도 영향이 클 거야.”강진혁은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오빠가 있잖아요?”그의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지원아, 난 한 번도 회사를 관리할 생각을 해본 적 없어. 그러지 않을 거였으면 애초에 회사를 떠나지도 않았겠지.”그가 진심인지 아닌지는 본인만 알겠지만 나는 굳이 따지지 않았다.다만 내 생각을 덧붙였다.“회사의 일은 삼촌께서 알아서 계획하고 계실 거예요. 강유형이 떠난다고 해서 회사가 멈추는 건 아니죠.”나는 이성적으로 말하며 마지막에 한 마디를 더했다.“세상은 누구 없어도 돌아가게 돼 있어요.”강진혁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하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생각이 짧았던 거야.”“오빠, 아마 너무 걱정되니까 그런 거겠죠.”나는 그의 체면을 세워주는 말을 덧붙였다.강진혁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원아, 네가 4년 전과는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4년 전?그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4년이라는 시간은 아이도 어엿한 청소년으로 성장할 만큼 충분한 시간이다.“그걸 성장이라고 하죠.”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강진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맞아. 네가 정말 많이 컸다, 우리 꼬마 지원이.”그의 말에 가슴 한쪽이 찡했다.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내가 강가에 들어왔을 때, 강유형과 강진혁은 종종 나를 이렇게 부르며 장난스럽게, 때로는 애정을 담아 나를 놀리곤 했다.그런데 그 말을 들은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오빠, 이런 문제는 본인들이 알아서 해결하게 놔두세요. 너무 관여하면 오히려 안 좋아요.”그의 ‘꼬마 지원이'라는 말에 잠시 감정이 흔들렸지만 나는 결국 한마디 덧붙였다.강진혁은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