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온몸이 굳어지면서 본능적으로 이런 신체접촉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가 하도 꽉 쥐고 있는 바람에 피할 수도 없었다.이런 컨트롤 당하는 느낌이 너무 싫은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오빠...”강진혁은 내 말도 채 듣지 않고 말했다.“지원아. 유형이는 내 동생이라 뭐라 하지 못하겠지만 걔 때문에 너의 원칙을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어.”그의 손을 통해 긴장감과 떨림을 느낄수 있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어두운 눈빛과 진지한 말투는 나를 애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지원아, 남자친구를 사귀는 건 장난이 아니야. 꼭 신중했으면 좋겠어. 잘못했다간 네가 다칠 수도 있어.”그의 진지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파서 순간 진정우가 나의 가짜 남자친구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하지만 강씨 가문과 인연을 끊고 싶은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아니면 진정우가 남자친구라고 연기했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수도 있었다.“오빠, 난 3살짜리 어린애가 아니야. 난 내가 무슨 짓을 하고있는지 알아.”내가 그에게 반박했다.“그러면 진정우랑 서로 알고 지낸 지 며칠이나 됐는데?”강진혁은 화가 났는지 목소리가 더욱 진지해졌다.그가 믿지 않길래 나는 파격적인 소식을 들려주기로 했다.“서로 알고 지낸 지는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사람과의 관계는 청평군으로 갔을 때 이미 확정된 거예요.”강진혁은 나의 친오빠와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너무 심한 말은 하기 싫었다.강진혁도 이 정도 눈치는 있는 사람이라 흔들리는 동공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내 어깨를 꽉 잡았다.그는 이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아무 말 없이 실망스럽고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이 눈빛을 읽은 나는 움찔하고 말았다.“오빠, 사람과 사람 간의 인연은 하늘이 맺어준 거예요. 저랑 정우 씨는 만날 운명이었어요.”나는 강진혁이 휘청거리고 있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그는 여전히 내 어깨를 잡고 있었지만, 아까처럼은 꽉 잡지 않았다.우리 둘이 대치하고 있을 때, 어디서 갑자
마음속에 의문이 스쳤다. 막 말을 꺼내려는 찰나, 허진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크음! 윤 팀장, 왜 문틈에서 엿듣고 있었어요? 깜짝 놀랐네.”허진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라는 걸 알았지만 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오해하지 마세요. 엿들은 게 아니라 마침 찾아뵈려던 참이었어요.”“하하!”허진호는 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농담이에요.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그가 손짓으로 들어오라는 신호를 주자 나는 그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입사한 지 며칠 지났지만 그의 사무실에 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첫인상은 어딘가 자유롭고 독특했다. 허진호는 회사의 부대표였지만 대표가 회사 업무에 관여하지 않으니 사실상 최고 결정권자나 다름없었다. 보통 대표의 사무실이라면 차분하고 세련된 분위기여야 할 텐데 그의 사무실은 좀 달랐다.소파는 다채로운 색상이었고 디자인도 반달 모양의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방 안 곳곳에는 알록달록한 생화가 놓여 있었고 책상 위에는 귀여운 장식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여성스러운 느낌이 강했다. 그가 부대표라는 걸 몰랐다면 사무실을 잘못 찾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어때요, 마음에 들어요?”허진호가 내 시선을 알아차리고 물었다.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였다. 사무실치고는 너무 가벼운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곳의 주인은 그였으니 그가 좋아하면 그만이었다.“대표님 사무실 스타일이 참 독특하시네요.”나는 약간의 아부를 섞어 말했다.허진호는 웃으며 나를 소파에 앉으라고 권했다.“나는 딱딱한 분위기는 싫더라고요. 형도 늘 그런 얘길 해요. 아, 그 형이 바로 대표예요. 방금 그와 통화 중이었는데, 지원 씨가 문 앞에 불쑥 나타나서 놀랐잖아요.”나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생각이 많았다. 그가 대표를 형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둘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은 듯했다. 어쩐지 모든 걸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이유가 있겠지.“다음엔 조심할게요.”나는 겸손하게 말했다.“괜
“아니에요, 아니에요. 대표님은 모두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시는 게 아니라, 오직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사랑받기를 원하죠.”회사를 떠날 때도 허진호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왠지 그 대표님이 어떤 생김새일지 궁금해졌다.그런데 이상한 건 회사 자료에 대표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혹시 숨겨야 할 뭔가가 있는 걸까? 아니면 마치 재벌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극도로 신비주의를 유지해서 사진도 안 찍고 이름도 숨기는 타입일까?문방사우를 파는 명품 가게인 ‘영보각’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온통 대표님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차에서 내리기 전, 나는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바쁜가 싶어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저녁에 산책할래요? 시간 괜찮으면 알려줘요.”전화를 받지 않는 걸 보면 메시지도 곧바로 확인하지 않겠지 싶어, 메시지를 보낸 뒤 차에서 내려 영보각 안으로 들어갔다.“윤 팀장님, 오셨군요!”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주인이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나는 이곳의 단골로, 매년 여기서 비싼 가격에 특별한 문구 세트를 주문하곤 했다.삼촌은 서예와 그림을 좋아해서 매년 이 문구를 많이 사용하셨으니, 이번에도 그분께 드리기에 딱 맞는 선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사장님, 올해도 좋은 신상품이 나왔나요?”나는 평소처럼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물건을 둘러보았다.“네, 여기 진열된 건 신경 쓰지 마세요. 아무리 봐도 마음에 안 드실 테니까요. 좋은 건 이쪽에 따로 있습니다.”그는 나를 한쪽 진열대로 안내했다.나는 가게를 한 바퀴 돌아보고 사장님이 말한 진열대 앞에 섰다. 그리고 한눈에 한 세트를 보고 마음이 끌렸다. 짙은 초록빛이 도는 고급스러운 문구 세트였다.“이거 좀 보여주세요.”“물론이죠.” 사장님은 세트를 조심스럽게 꺼내며 말했다.“이건 올해 신제품이라 이제 막 입고된 겁니다.”어떻게 보면 내 안목을 칭찬해 주는 듯했다.나는 그 문구 세트를 꼼꼼히 살폈다. 재질이나 공예가 모두 뛰어
문방사우는 집집마다 필요한 물건이 아니라서 처음엔 조나연도 삼촌에게 드릴 선물을 사러 온 건가 싶었다. 며칠 전, 강유형이 조나연과 회사에서 손을 끊고 더는 얽히지 않겠다고 굳게 약속했던 걸 생각하니 그가 삼촌의 생일에 그녀를 데리고 가려 한다는 건 뜻밖이었다. 그의 말을 믿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조나연은 사장님이 가져온 문구 세트를 꼼꼼하게 살피며 꽤 아는 척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지 못했고 나 역시 그녀와 엮이고 싶지 않아서 못 본 척 돌아서서 내 선물을 고르기로 했다.“사장님, 정말 이게 제일 좋은 거 맞죠? 아주 중요한 분께 드리는 거라서 실망시키지 말아주세요.” 조나연이 사장님에게 물었다.“나연 씨가 말씀하시는 ‘제일 좋은’ 것에는 기준이 없죠. 최고가 있다면 그보다 나은 것도 있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제가 약속하건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고 주시는 분의 품격을 살릴 겁니다.” 사장님은 장사를 잘 아시는 분이었다.“그렇군요. 그래도 그날 제가 주는 게 제일 좋아 보였으면 해요.” 조나연의 말에서 그가 선물할 사람을 꽤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해동에서 이 문방사우라면 저희 가게를 능가할 곳이 없습니다. 나연 씨께서 고르신 이 세트도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겁니다. 선물을 받는 분이 나연 씨의 정성을 느끼실 겁니다.” 사장님이 말하며 웃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사실 이 선물은 제 미래의 시아버지께 드리는 거거든요.”그 말을 듣고 나는 움찔했다. 그녀가 강유형과 진지하게 교제하는 건가? 그렇다면 왜 강유형은 아직도 내가 다니는 회사를 압박하는 걸까? 참으로 이기적이다 싶었다.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선물을 고르려 했지만, 진열된 물건들은 눈에 차지 않았다. 조금 실망하고 있던 찰나, 진열장 아래 구석에 놓인 문구 세트가 눈에 들어왔다. 별다른 고민 없이 입을 열었다.“사장님, 이거 좀 보여주세요.”“고르신 거 마음대로 꺼내 보세요.” 사장님은 나를 편하게 대했다.궁금해서 서둘러 진열장을 열고 문구 세트를
계산을 마치고 있을 때, 진정우에게서 전화가 왔다.“방금 바빠서 이제야 메시지를 봤어요.”진정우가 먼저 사과했다.“괜찮아요.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진정우가 “몇 시쯤?” 하고 묻자, 나는 잠시 생각했다. 여섯 시에 가면 저녁 식사 시간이어서 삼촌과 아줌마가 저녁을 함께 하자고 할 게 뻔했다. 나는 괜찮지만 진정우는 좀 불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일곱 시 반이요.”이때쯤이면 식사를 마쳤을 시간이었다.“좋아요. 제가 일곱 시에 데리러 갈게요.”나는 웃으며 대답했다.“저를 어떻게 데리러 오실 건데요? 자전거라도 타고?”그냥 재미로 한 말이었는데 진정우가 아무 대답이 없자 내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아,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나는 서둘러 해명했다.“제가 데리러 갈게요. 미리 집으로 돌아갈 테니 그때 같이 가면 될 것 같네요. 혹시 선물 준비해야 할 것도 있나요?”“아니요, 제가 준비했어요.”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어보니, 조나연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조나연은 나를 볼 때마다 어딘가 부러워하거나 질투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와 할 말이 없어서 물건을 챙겨 나왔다.나는 집으로 가지 않고 바로 남성복 매장으로 향했다. 오늘 진정우와 함께 가야 하니 평소 입던 옷으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에게 옷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와 함께 연기를 해주기로 한 만큼 옷 한 벌쯤은 맞춰주는 게 예의였다.저녁 여섯 시에 간단히 식사를 하고 진정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이소희의 전화를 받았다.“언니, 오늘 저녁 시간 괜찮으세요? 같이 얘기 좀 하고 싶어요.”마침 오늘은 시간이 없었다.“무슨 일이에요? 전화로 말해도 돼요. 오늘은 삼촌 댁에 가야 하거든요.”나는 솔직히 말했다.“그렇구나, 아쉽네요.”이소희의 목소리에는 실망이 가득했다.나는 탁자 위에 놓인 사과를 베어 물며 말했다.“다음에 밥 한 번 살게요.”“안 먹어요. 언니, 요즘 진짜 화가 나요. 원래는 말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도대체 누구 아이인지 본인이 제일 잘 알겠죠. 정말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시든가요.”이소희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제가 그런 쓸데없는 짓 할 시간은 없어요. 그 시간에 차라리 정우 씨에게 신경을 더 쓰겠어요.”이소희가 진정우를 언급하자 그가 아직 오지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슬쩍 보며 돌려 물었다.“지금 저랑 얘기하는 거 퇴근하고 하는 거예요? 아니면 또 핑계 대고 화장실에 가서 전화하는 거예요?”“언니,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 정우 씨, 요즘 완전 인간미 넘쳐요. 오늘도 평소보다 더 일찍 퇴근하셨다니까요.”“그래요? 퇴근한 지 얼마나 됐는데요?”“한 30분? 저 지금 벌써 집 소파에 누워 있어요.”이소희의 말을 듣고 진정우가 올 때가 됐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싶었다.“요즘 이렇게 일찍 퇴근하고 밤에도 야근 안 하면 공사를 제때 끝낼 수 있어요?” 내가 걱정스레 물었다.이소희가 뭔가를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정우 씨가 괜찮다고 하셨어요.”“정말 괜찮아 보이세요? 괜히 믿었다가 시간 못 맞추면 소희 씨만 손해잖아요. 보너스 깎이면 어쩌려고요.”이소희가 가볍게 기침을 하더니 말했다.“괜찮을 거예요. 이제 D구역까지 작업이 진행됐고 요즘 진짜 순조롭게 가고 있어요. 문제도 거의 없고 출근해서 일만 하면 되니까요.”이소희는 말을 끝내며 혀를 찼다.“언니, 신기한 게요. 언니가 여기 있을 때는 매일같이 문제가 생겨서 정우 씨 방을 들락거렸는데 언니 나가고 나서는 그런 일도 없어졌어요. 덕분에 정우 씨 방에 갈 일도 줄어들어서 아쉽네요. 차라리 문제라도 좀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럼 가서... 호호호...”이소희가 또 이상한 상상을 하는 걸 눈치채고 나는 바로 말을 잘랐다.“아마 제가 진정우 씨랑 사주가 안 맞아서 그랬을 거예요. 같이 일할 때마다 이상하게 문제가 생기더니 제가 떠나고 나니까 다 잘 풀리네
나는 진정우의 목욕 후 모습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허리에만 수건을 두른 채로 상체도, 하체도 드러나고 겨우 가운데만 가린 모습이었다. 진정우 역시 나처럼 놀란 듯했는데 내가 갑자기 들어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의 살짝 붉어진 구릿빛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잠시 동안 우리 둘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그러다 진정우가 먼저 반응하며 침실로 들어갔고 그제야 나도 겨우 몸이 움직였다. 나는 긴장해서 두어 번 침을 삼켰다.그때야 내 얼굴이 뜨거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진정우가 들어간 침실 문을 바라보며, 아마 옷을 갈아입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그를 위해 산 옷이 떠올라 말했다.“정우 씨, 잠깐만 옷 입지 말고 기다려요.”말을 내뱉고 돌아서는데 순간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당황했다. 옷 입지 말고 기다려 달라니...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그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후회해도 이미 늦었기에 얼른 방으로 가서 옷을 챙긴 뒤 다시 진정우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침실 문 앞에 도착해 두 번 노크했다.“제가 산 옷이에요. 문 앞에 둘 테니 이걸 입는 게 나을 거예요.”굳이 방금 말을 해명하지 않았다. 그러면 더 민망해질 테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내려놓으려 했는데 침실 문이 휙 열리며 이미 옷을 갖춰 입은 진정우가 나타났다.흰 셔츠에 검정 슬랙스, 넥타이는 매지 않았고 두 개의 단추가 풀려 있어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격식 있는 느낌을 풍겼다.이렇게 차려입은 그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평소 그의 피부가 까무잡잡해서 이런 옷이 어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에, 나는 조금 더 캐주얼한 옷을 사준 것이었다.하지만 지금의 진정우는 그런 내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마치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넘치는 사람이 된 듯했다.
“혹시라도 급하면 찾으러 올 줄 알고 일부러 문을 열어뒀어요.” 진정우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나는 별생각 없이 물었다.“그래서 수건 하나만 두르고 나온 것도 일부러예요?”진정우의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 “아니에요, 핸드폰 소리가 들려서 받으려고 나왔을 뿐이에요. 이렇게 타이밍이 맞을 줄은 몰랐죠.”그래, 참 묘하게 맞아떨어진 타이밍이었다. 그래도 그의 몸이 훌륭하니 눈이 즐거웠달까.삼촌 집으로 가는 길에 진정우는 아무 말이 없었다. 혹시 긴장한 건가 싶어 내가 말을 걸었다.“가서 그냥 인사만 잘하면 돼요. 나머지 질문은 제가 다 답할게요.”진정우는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강유형이 만약 뭐 불편한 말을 하거나 일부러 괴롭히려 하면 너무 예의 차리지 마세요.”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는 말을 맞춰둬야 할 것 같아요. 청평에서 처음 만났고 당신이 저한테 관심 있어서 청평까지 찾아왔다고 하면 될 것 같아요.”그 얘기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이때 진정우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실수 없을 겁니다.”“네?” 나는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잠시 후에야 그의 말을 깨달았다.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우리 둘은 그저 침묵 속에 있었다.하지만 그 침묵이 묘하게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었고 나도 모르게 긴장한 탓에 운전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갑자기 앞차가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거의 들이받을 뻔했다.그 순간, 진정우가 재빨리 핸들을 잡아 45도 각도로 방향을 틀어주면서 겨우 추돌을 피할 수 있었다.차가 멈춘 후에도 나는 아직 정신이 없었다. 그의 빠른 반응이 너무 놀라워 현실감이 없을 정도였다.“운전할 때는 좀 더 집중하세요. 사고는 그렇다 쳐도 다치면 어떡하려고요?” 진정우가 한마디 했다. 앞차가 출발하자 차를 바르게 돌려놓고 핸들을 나에게 넘겼다.운전한 지 3년이나 됐는데도, 나는 그의 앞에서 초보처럼 느껴졌다.한참 후에야 진정이
남자는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특히, 여자 앞에서는 더더욱.하지만 지금, 나는 허진호가 내 앞에서 눈가가 붉어지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그가 그렇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그의 사무실을 나와, 그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충분히 진정우를 기릴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주었다.이 회사가 진정우의 것이라고 했지만 공식적인 사장은 허진호였다.그만큼 두 사람 사이의 신뢰가 깊었고 진정우는 그를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다.그런데 이제, 진정우가 사라졌다. 그를 기다리던 허진호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의 슬픔도, 나 못지않을 것이다.나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진정우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는 연구개발을 했기에 직접 실험을 진행하는 일이 많았고 책상 위에는 각종 실험 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하지만 그 많은 장비에도 불구하고 연구실은 전혀 어수선하지 않았다.나는 천천히 다가가 책상 위에 놓인 실험 기록 노트를 집어 들었다. 빼곡하게 적힌 숫자들, 그리고 그가 직접 쓴 강직한 글씨들. 손끝으로 글자를 따라가다가, 다시 가슴이 아려왔다.모든 것이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그는 더 이상 여기에 없었다.그가 남긴 것들은 내 손에 닿지만 정작 그는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그가 있었던 흔적이 이렇게나 선명한데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나는 자리로 앉아 그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평소 그가 쓰던 펜, USB, 블루투스 이어폰, 그리고 기록 노트가 있었다.그리고 눈에 띄는 투명한 상자 하나가 있어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내 열어보았더니 안에는 묘하게 낯선 질감을 가진 가느다란 팔찌가 들어 있었다.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금속이나 은이 아니라,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재질이었고 잠금장치가 없었다. 혹시 빠진 걸까 싶어 상자 안을 뒤적이다가 몇 개의 미완성 부품과 함께 접혀 있는
신입 사원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씩씩하게 대답했다.“그럼요! 윤 부장님, 밥 사주세요.”그 직설적인 대답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좋아, 그럼 오늘 저녁에 다 같이 ‘성해 반점’에서 모이자. 내가 쏠게.”“정말이죠?”“당연하지.”“와! 윤 부장님 최고!”신입 사원은 신나서 뛰어나갔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별것 아닌 대화였지만 회사 분위기가 한결 밝아진 것 같았다.가방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본 후, 나는 허진호가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는 책상 가득 쌓인 서류에 파묻혀 있었다.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른 채 바쁘게 사인을 하고 있었다.나는 그의 책상을 흘끗 바라봤다. 거기에는 내가 맡았던 부서의 서류들도 섞여 있었다.‘역시, 내가 아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건 이 사람이 뒤에서 버텨주고 있었기 때문이구나.'내가 없는 동안, 모든 업무를 그가 대신 처리했을 것이다.“허 대표님, 이렇게 혼자서 모든 걸 떠안고 일할 거면 차라리 사람을 더 뽑는 게 낫지 않아요?”내 말을 들은 허진호는 순간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그는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세상에, 윤 부장님!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저 정말...”그는 말을 멈췄지만 나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내가 회사로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하지만 만약 내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왜 새로운 직원을 뽑지 않았던 걸까? 혹시 내 퇴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허 대표님, 저 복직할 수 있는 거죠?”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당연하죠! 무조건! 그런데 복직 안 하면 설마 퇴사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절대 안 돼요. 회사 규정상 최소 1년은 근무해야 사직이 가능하다고요!”그의 말에 나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계약서에 그런 조항이 있었어? 나 왜 몰랐지?’“이건 말도 안 되는 규정이에요.”나는 장난을 치며 말했다.“서명했으면 끝난 거예요. 이제 와서 불평하
나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강유형을 바라봤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난 이미 알고 있으니까.”강현우의 눈빛이 깊어졌다.“누구라고 생각하는데?”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몸을 일으키며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지원아, 설마 형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형이랑 만나려는 것도 결국 진정우의 복수를 위해서야?”오랫동안 나를 사랑했던 사람답게, 내 속마음을 읽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진혁 오빠 아니야? 그렇다면 진짜 배후가 누구인지 알려줘.”내 질문에 그는 잠시 말을 삼켰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지원아, 형은 아니야. 사실 나도 정확한 배후가 누군지는 몰라. 그때 네게 말했던 건 그저 추측이었어.”나는 조급해하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아니라면 더 좋지. 그렇다면 내가 진혁 오빠를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겠네.”강현우의 표정이 굳어졌다.“지원아…“나는 깊은숨을 내쉬며 담담하게 말했다.“우린 10년을 알고 지냈고 4년 동안 사랑했어. 그리고 나는 진정우를 사랑하게 됐지. 나는 여러 가지 사랑을 경험했어. 짝사랑이 이루어지는 설렘도, 운명처럼 빠져드는 감정도. 하지만 결국 사랑이란 건 너무 피곤한 감정이더라. 이제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선택하고 싶어.”“좋아, 네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건 이해하지만 형은 절대 안 돼.”강현우는 강하게 반대했고 나는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왜 안 되는데? 이유를 말해봐.”그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지원아, 이유 모를 리 없잖아. 꼭 내가 말해야 해? 내 형이잖아. 너는 한때 내 약혼녀였고. 둘이 같이 있으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볼 것 같아? 우리 가족은 또 어떻게 보겠어? 나더러 어떻게 널 마주하라는 거야?”나는 잠시 침묵했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럼 네 체면과 감정을 위해, 난 내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는 거야?”그는 내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마음의 준비
만약 강유형이 정말 이대로 다리를 잃게 된다면 내가 그에게 진 빚이 너무 클 것이다.하지만 그와 더 이상 복잡하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할 수 있는 한 그를 설득해 제대로 치료를 받게 하려는 것뿐이었다.“그렇게 심각하지 않아. 몇 번 더 치료받으면 괜찮아질 거야.”그는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말했고 목소리조차 기운이 없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그를 더 설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강유형이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네가 돌아왔으니, 내 상처도 금방 나을 거야.”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지만 그는 곧장 화제를 돌렸다.“신지태가 널 몇 번이나 찾았어. 내가 말리지 않았으면 실종 신고라도 했을걸?”나는 한동안 연락을 끊고 지냈다. 그동안 나를 걱정한 사람들이 많았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지태 오빠 오늘 와?”나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모르겠어. 네가 왔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뛰어올걸?”그는 핸드폰을 집어 들며 신지태에게 연락하려 했다.그러나 팔을 움직이는 순간, 상처에서 뻐근한 통증이 밀려온 듯 그는 순간적으로 멈췄다. 나는 그의 감싼 팔을 조심스레 붙잡으며 말했다.“굳이 전화할 필요 없어. 내가 돌아왔으니, 곧 만나겠지.”그는 통증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의사 불러줄까?”그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적셨다.“물 좀 줘.”나는 컵을 건네주었고 그는 두어 모금 마신 후에야 얼굴이 조금 나아 보였다.“형은 너 보러 왔어?”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번 왔었어.”“어제 돌아오면서 우연히 마주쳤어.”“어디서?”“샤부샤부 집에서.”강유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반응이 흥미로워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나랑 참 인연이 깊은 것 같아.”그는 내 말을 단숨에 이해했는지,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지원아,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나는
“지원아, 돌아왔구나?”강진혁이 나를 보며 살짝 놀란 듯, 그리고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네, 오늘 막 도착했어요.”나는‘오늘’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대답했고 안리영도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오자마자 이렇게 마주치는 거 보면 진짜 우연인가 보네요.”강진혁은 그녀의 말에서 숨은 의미를 느꼈는지, 위층을 가리키며 덤덤하게 말했다.“고등학교 친구들이 며칠 전부터 약속 잡고 여기서 모이기로 했어.”마침 누군가 그를 불렀다.“진혁아, 우리 먼저 갈게.”그는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 손짓하며 배웅한 뒤, 다시 우리를 바라보며 물었다.“더 필요한 거 있어? 주문할 거 있으면 내가 계산할게.”그의 말투는 자연스러웠지만 분명 의도적으로 챙기려는 느낌이 들었다.“이미 결제했어요.”안리영이 대신 대답했다. 그러자 강진혁은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원아, 좀 쉬고 나면 집에 와서 밥 한 끼 하자. 부모님이 네 걱정을 많이 하셔.”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조만간 먼저 연락할게요. 그리고... 휴링턴에서 신세 많이 졌어요.”굳이 ‘휴링턴’을 언급한 이유는, 그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서였지만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짧게 대답했다.“그래.”그는 안리영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유리창 너머로 그가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 순간, 안리영이 내 발을 슬쩍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뭐야, 강진혁 아직도 너 못 잊은 거 아냐?”나는 시선을 다시 테이블로 돌리며 끓어오르는 국물 속에서 부글거리는 재료들을 바라보았다.“리영아, 나는 지금... 강진혁이 이 모든 일의 배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뭐라고?”그녀는 놀라서 젓가락을 들던 손을 멈췄다. 나는 휴링턴에서 발견한 것들에 대해 조용히 이야기했다.“앞으로 내가 하는 일이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해해 줘.”안리영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이상하게 보인다니, 도대체 뭘 하려고?”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나는 의료 서적을 넘기며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갔다. 문외한인 내가 이런 책을 본다는 게 쉽지 않았지만 지난 한 달 동안 고요한 시간을 보내면서 마음이 차분해져서인지 의외로 집중이 잘 됐다.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내 마음이 가라앉았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얼마 후, 안리영이 수술을 마치고 돌아왔다. 문 앞에서 나를 보던 그녀는 몇 초간 멈춰 서 있더니,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나를 꼭 안아 주었다.“돌아왔네.”진정우의 일을 나는 오직 안리영에게만 이야기했다. 진정우를 어디에 묻었는지 아는 사람도 그녀뿐이었다.나는 그녀의 어깨에 기대며 익숙한 소독약 냄새를 맡았다.“나, 갑자기 훠궈가 먹고 싶어.”“좋지! 당장 가자!”그녀의 대답에는 묘하게 들뜬 기운이 섞여 있었다. 어쩌면 그녀도 내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게 반가웠던 걸지도 몰랐다.그래, 나도 이제 다시 살아가야 했다. 진정우는 떠났지만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식사를 하던 중, 문득 떠오른 듯 물었다.“강유형, 본 적 있어?”“그럼, 매일 보지. 악어한테 물린 이후로 계속 우리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그녀의 말에 나는 젓가락을 멈췄다.“벌써 한 달이 넘었잖아? 아직도 치료 중이야?”“응. 상처가 아물질 않아서 계속 곪고 있대. 이미 몇 번이나 괴사한 살을 도려냈다더라.”그 말을 듣는 순간, 강유형이 악어에게 물렸던 장면이 눈앞을 스쳤다.“그 정도로 심각했어?”“직접 가서 볼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나 때문이잖아.”안리영이 고기를 집어 내 그릇에 올려주며 말했다.“많이 먹어. 한 달 사이에 살이 너무 빠졌어.”“그래? 나 하루 세 끼 잘 챙겨 먹었는데.”나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진정우 곁을 지키는 동안에도 먹고 자는 것만큼은 철저히 지켰다.“그럼... 마음고생 때문인가 보네.”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나는 안리영을 보며 피식 웃었다.“넌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은데? 교수님이랑 잘 지내나 보네?”
나는 진정우를 고국으로, 그리고 우리가 함께 꿈꾸던 집으로 데려왔다.해가 지는 어느 저녁, 우리는 그가 노후를 함께 보내고 싶다던 그 땅에 그를 묻었다. 그렇게 하고도 쉽게 떠날 수 없어 나는 그의 곁에 꼬박 35일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다녀왔다.어릴 적 어머니가 이야기하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영혼은 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했던 사람 곁에서 머문다고. 흔히 말하는 35날이라는 기간 동안 말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것을 믿고 싶었다. 그가 홀로 떠나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함께 있어 주고 싶었다. 그의 영혼이 완전히 떠난 후에야 나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동안 나는 세상과의 연락을 끊고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진소영이 그랬던 것처럼 책을 읽고 꽃을 따서 차를 우려 마시고 그림을 그렸고 그림 속에는 온통 진정우뿐이었다. 그를 그릴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강진혁의 방에 빼곡히 걸려 있던 내 초상화들이었다.아침과 저녁이면 그의 곁에서 혼잣말을 하듯 이야기를 나눴다.“진정우, 오늘 밤 꿈에라도 와서, 그때 못다 한 말을 마저 해줄래?”“진정우,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너를 안아보고 싶은데 이제는 만질 수도 없잖아. 그런 공허한 아픔이 날 미치게 할 것 같아.”“진정우, 오늘 길에서 다친 작은 새를 주웠어. 어미는 보이지 않더라. 내가 잘 키울 수 있을까?”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가끔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마치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던 그의 손길처럼 느껴졌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35번째 날, 나는 새로 딴 꽃을 들고 그의 곁을 찾았다.“진정우, 오늘이 네가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이야? 내일부터는 정말로 네가 없는 걸까? 나도 이제 돌아가야겠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마주해야 할 사람들을 만나야 해. 그리고...”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나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널 함정에 빠뜨린 사람을 찾아야겠어.”그 순간, 바람
나는 무겁게 발을 떼며 앞으로 걸어갔다. 신지태가 나를 부축하며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지만 안으로 들어가기 전 이미 누군가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그 사람의 품에는 검은색 상자가 안겨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혼란이 서려 있었다. 나는 그 상자를 보는 순간, 숨이 멎었다.신지태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나를 더 단단히 부축했지만 그마저도 희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온몸의 감각이 무뎌졌다. 나는 다시 정신을 붙잡으려 애쓰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 안쪽,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용설아를 한눈에 그녀를 보았다.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저 등 뒤로 느껴지는 깊은 절망과 슬픔만으로도 충분히 모든 걸 알 수 있었다.그 순간, 발이 땅에 박힌 듯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신지태도 함께 멈춰 섰고 우리 둘 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잠시 후, 용설아는 천천히 몸을 돌렸고 그녀의 두 손 위에는 검은색 상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대로 시야가 흐려지며 쓰러질 뻔했다.용설아는 내 앞까지 걸어와 조용히 말했다.“이건 진정우가 남긴 마지막 부탁이에요. 그가 원했던 대로, 지원 씨가 직접 그를 데려가 주세요. 두 분이 가장 좋아했던 그곳에 묻어달라고 했어요.”나는 그녀가 들고 있는 상자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지난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그와 함께 걸었던 들판,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던 약속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살자고 했던 말.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나에게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그를 그곳에 묻어달라는 마지막 부탁 말이다.‘이건, 나보고 죽으라는 말이야?’나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상자를 노려보았다.“왜 나를 기다리지 않았어?”작은 상자 하나에 다 담길 리 없는 그를 떠올리며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왜... 기다려주지 않았어, 진정우?”“정우는 지원 씨가 그 순간을 직접 마주하지 않길 바랐거든요.”용설아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힘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정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강유형과 신지태 오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고 그들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하게 물었다.“둘 다 몰라?”나는 머릿속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그럼 내가 직접 찾아갈게...”그 순간, 신지태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나를 붙잡았고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왜 그래?”“지원아, 이제 받아들여야 해. 진정우는... 더 이상 없어.”강유형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나도 알아.”그러면서도 어설프게 웃으며 덧붙였다.“그래서, 그를 보러 가려고 해. 조용히 곁에 있고 싶어서.”그 순간, 신지태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면서 살짝 아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내 팔을 더 강하게 움켜잡았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오빠, 너무 아파.”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지원아... 진정우는... 없어. 더 이상 볼 수 없어.”그 말에 나는 얼어붙은 듯 멈춰 섰고 눈앞이 흔들렸지만 나는 애써 강하게 말했다.“아니, 난 볼 수 있어. 그러니까 가게 해 줘.”“지원아!”신지태가 단호하게 나를 불렀지만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 하며 애타게 말했다.“제발, 가게 해 줘.”그 순간, 강유형이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볼 수 없어. 그는 이미... 화장됐어.”그 순간, 내 손이 허공에서 멈춰 섰고 나는 서서히 강유형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온몸이 얼어붙은 듯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강유형.”신지태 오빠가 낮게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여전히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지원아... 진정해.”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그 말이 거짓이길 바랐다.“그 말, 거짓말이지...? 진정우... 진짜 아니지?”신지태 오빠의 눈이 더 붉어졌다.“지원아, 울고 싶으면 울어.”나는 울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나는 믿고 싶지 않았다. 눈앞이 흐려지면서 몸이 떨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