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 말 없이 멍하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진정우가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울 텐데 괜히 잘못된 반응을 보여 그를 더 슬프게 할까 봐 말을 삼켰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부모님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부모님의 사고는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당시 나는 너무 어렸고 사고 이후 모든 일은 강두식 삼촌이 처리해 주셨다. 아마 삼촌만이 진실을 알고 계실지도 모른다. 조금 후에 그를 만나면 그 이야기를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진정우도 내가 말이 없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삼촌 집에 도착하자마자 얼굴 인식으로 문이 열렸다. 마당에 있던 장 집사가 나를 보고 반갑게 맞이했다.“아가씨, 오셨네요! 곧바로 어르신과 사모님께 알려 드릴게요.”“괜찮아요. 제가 직접 들어갈게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장 집사는 차에서 내린 진정우를 흥미롭게 쳐다봤다. 그의 정체가 궁금한 듯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끌어안았다.“제 남자 친구, 진정우예요.”장 집사는 단순한 집사가 아니라, 삼촌 댁에서 나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보냈고 김희연 아줌마와도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니 장 집사 앞이라고 해도 연기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진정우는 장 집사를 향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장 집사님.”“아이고...” 장 집사는 그를 바라보며 어딘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나와 강유형의 혼약이 정해진 사이로 보이는 상황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장 집사가 이런 반응이라면, 조금 후 삼촌과 아줌마는 더 큰 충격을 받겠지.나는 진정우와 팔짱을 낀 채 장 집사를 지나 거실로 향했다. 아직 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삼촌을 꾸짖는 중이었다.“회장이라는 사람이 회사에서 몇천 명씩 다스리면서도 자기 아들 하나 제대로 말을 듣게 하지 못하잖아!”삼촌은 대답 없이 스마트폰이나 잡지를 보고 계신 것 같았다. 일부러 못 들은 척하는 걸까?“강두식! 또 못 들은 척하는
하지만 아줌마는 믿지 않는다는 듯, 다시 삼촌을 한 대 때리며 말했다."지원이를 핑계로 나를 달래려 하지 마. 안 속아."“아줌마!” 내가 부르자 아줌마가 몸을 살짝 떨며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자마자 눈에 기쁨이 번졌지만 곧 삼촌과 다정한 모습을 내가 목격했음을 깨달은 듯 얼굴이 붉어졌다.아줌마는 삼촌의 손을 재빨리 떨쳐내며 내게 다가왔다.“지원아, 왔구나! 밥은 먹었어? 내가 장 집사한테 준비하라고 할까?”“이미 먹었어요.” 거짓말이었다. 사실 먹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진정우가 식사를 했는지도 묻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넌 왜 집에 와서 먹지 않고 나가서 먹어?” 아줌마는 나에게만 투덜대면서도 진정우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못 본 척하는 것이었다. 진정우에게 말 걸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줌마는 이렇게 자신의 방식으로 진정우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내고 있었다.하지만 상류층 가문의 사모님답게, 약간의 침묵 후에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지원이 친구인가 보네?”나는 슬쩍 진정우의 팔을 쥐었다. 그도 상황을 파악한 듯 정중하게 말했다.“안녕하세요.”아줌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지원의 친구라면 외부인은 아니네. 어서 들어와.”삼촌도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는 준비해 온 선물을 두 손으로 내밀었다.“삼촌, 미리 생신 축하드려요.”“역시 우리 지원이! 늘 이렇게 마음 써주니 고맙구나.” 삼촌은 기쁜 얼굴로 선물을 받으며 진정우를 바라봤다.“안녕하세요, 삼촌.” 진정우도 인사를 건넸다.삼촌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권하자 아줌마는 장 집사에게 차와 과일을 준비하라고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와 진정우를 한참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선물만 주고 그날에 안 오면 곤란해. 네 삼촌과 난 그런 거 허락 못 해.”아줌마는 내 의도를 꿰뚫어 본 듯, 단호하게 내 계획을 차단했다. 나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그날 정우 씨와 함께 올 거예요.”그러자 아줌마의 얼굴이 잠시 굳어지더니, 이내 억
진정우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의 손이 내 손을 더 단단히 감싸 쥐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마치 내 심장의 멎는 것 같았다. 설렘의 극치가 있으면 바로 이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저는 지원이에게 제 모든 걸 줄 겁니다. 제 생명처럼 사랑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를 지킬 거예요.” 진정우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깊고 고요한 눈동자에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는 듯했다.'바다처럼 깊은 사랑'이란 말이 바로 이럴 때 쓰는 걸까? 연기임을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정우가 진심을 담아 고백하고 있는 것 같았다.정말 대단한 남자다. 연기라는 핑계로 내 마음을 흔들다니.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손을 맞잡으려다가, 왠지 그가 얄미워져서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 평소 고지식한 그가 이런 행동을 불편해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 손에 얼굴을 비비며 장난스럽게 굴었다.‘진짜 뻔뻔하네. 이런 사람도 있구나.’ 싶었지만 어딘가 귀여운 구석이 있긴 했다.진정우는 내 손을 살짝 놓고 삼촌과 아줌마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삼촌께서 아줌마를 평생 사랑하시듯 저도 평생 지원이를 사랑할 겁니다.”앞부분은 내게 하는 고백이었다면, 뒷부분은 아줌마를 겨냥한 반격이었다.아줌마의 얼굴이 살짝 굳는 게 보였다. 진정우의 말을 듣고 더는 뭐라 말할 수 없었던 듯했다. 그때까지 침묵하던 삼촌이 입을 열었다.“정우 씨는 아줌마와 얘기 좀 나누고 너는 나랑 서재에 잠깐 가자.”삼촌은 진정우를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삼촌이 나를 부른 이유를 짐작하면서도 살짝 긴장된 마음으로 그를 따라갔다.서재에 들어가자 삼촌은 내가 가져온 선물 상자를 내게 건네며 말했다.“지원아, 네가 사 온 새 먹과 붓으로 나랑 같이 글을 써 보자.”오랜만에 삼촌과 함께 글을 쓰게 된 거였다. 적어도 3년은 된 일이다. 그때 아줌마는 아들이 크면 엄마와 서먹해지고 딸이 크면 아빠와 서먹해진다고 했다. 게다가
삼촌과 글씨 연습을 해야 할 때가 아니면 글을 쓸 일이 없었다. 나이가 들었다지만 여전히 아이 같아서 쉴 수 있을 때는 늘 게으름을 피우곤 했다.“괜찮아.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써 봐. 잘 쓰든 못 쓰든 상관없어.” 삼촌이 나를 격려하며 붓을 내밀었다.더는 거절할 수 없어 붓을 받았지만 그 순간 붓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먹을 묻혀서 그럴 수도 있지만 아마 삼촌의 기대가 담긴 눈빛 때문일 것이다. 삼촌은 내가 예전처럼 글을 쓰고 마음에 여전히 강유형만 두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여전히 내가 ‘가족’으로 남을 수 있으니까.손이 살짝 떨리면서도 힘겹게 붓을 내려 글씨를 썼지만 글자는 삐뚤고 힘도 고르지 못했다. 삼촌이 내게 글을 쓰게 한 건, 글씨 자체가 아니라 내 마음을 알고 싶었던 게 아닐까.“한 번뿐인 인생...” 삼촌은 내가 쓴 글을 천천히 따라 읽었다.삼촌이 글씨로 내게 무언가를 전해 준 것처럼, 나도 내 마음을 담아 답을 쓴 것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나를 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지원아,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삼촌은 항상 네 편이야.”삼촌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나는 악수 대신 가볍게 삼촌을 안았다.“삼촌, 감사해요.”삼촌은 내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미안하다. 네가 힘들었을 텐데... 삼촌이 아들을 잘못 가르친 탓이야.”조금 전 아줌마의 잔소리에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삼촌이, 나에게는 이렇게 사과를 해주니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삼촌은 내가 울 것 같다는 걸 느꼈는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유형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나도 알아. 이미 경고를 해 두었으니까,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야. 또다시 그런 짓을 하면 쫓아낼 각오도 돼 있어.”사실 나는 오늘 이 일을 삼촌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내가 말하기도 전에 삼촌이 다 알고 있었다. 20년 동안 함께 지내며 우리는 진짜 가족처럼 서로를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삼촌,
삼촌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 그의 몸이 살짝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나는 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삼촌...”그러자 삼촌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지원아, 갑자기 왜 이런 걸 묻는 거야?”진정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지만, 삼촌에게 그대로 말할 수는 없어서 그냥 대충 얼버무렸다.“그냥 궁금해서요.”삼촌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고 그의 무거운 표정에 나까지 긴장되었다.“지원아, 네 부모님의 사고는 그저 안타까운 사고였어. 내가 현장에 직접 갔었고 당시 경찰 보고서와 부검 결과도 다 확인했어.” 삼촌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이 묻어 있었다.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삼촌이 나를 사고 현장에 데려가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삼촌이 나를 보호하려고 현장에 데려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은 제일 큰 아쉬움으로 남아있다.“지원아, 만약 네가 의문이 있거나 믿지 못하겠다면, 그 당시의 기록을 직접 열람해 봐도 좋아.” 삼촌의 얼굴은 창백해 보였고 조금 전까지 밝았던 표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삼촌과 아버지와 가까운 사이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거의 친형제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내가 부모님의 사고를 언급한 것이, 그때의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한 듯 보였다.나는 삼촌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삼촌, 아니에요. 전 믿어요. 그냥 한 번 물어본 거예요.”삼촌은 내 말을 듣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결국 아무 말 없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원아, 먼저 내려가 있어라. 난 잠깐 혼자 더 있을게.”함께 내려가기로 했던 삼촌이 갑자기 말을 바꾸자, 내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삼촌...”“괜찮아, 어서 내려가.” 삼촌은 손짓하며 나를 보내려 했다.나는 서재를 나왔지만, 바로 아래층으로 가지 않고 벽에 기대어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삼촌의 반응이 예상 밖이라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혹시 그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그의 진심 어
“알겠어요.” 나는 아줌마를 보며 인사했다.“아줌마, 저희 이만 가볼게요.”아줌마는 내 얼굴빛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듯, 잠시 위층을 바라봤다. 아마 삼촌과 나눈 대화가 궁금했던 것 같았다. 그래도 굳이 붙잡지 않고 “조심해서 가” 하고 배웅해 주었다.나는 진정우와 함께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려고 하자 진정우가 내 손을 붙잡았다.“왜 그래요?” “별거 아니에요. 부모님 얘기가 나왔거든요.” 나는 숨기지 않고 답했다.“혹시 사고 얘기 물어보신 거예요?” 그는 바로 눈치챘다.“네, 사실은... 정우 씨 영향도 좀 받았죠. 정우 씨의 이야기를 듣고 제 가족사도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나는 약간 자조적으로 웃었다.“그럼 결과는요?” 그가 다시 물었다.삼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차에 시동을 걸고 조용히 답했다.“단순한 사고였대요.”차가 삼촌 집을 벗어나자 나는 말을 덧붙였다.“현장 보고서와 부검 결과도 있고요.”진정우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차에 앉아 있었고 어느덧 도심의 화려한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사람이 붐비는 거리라 교통이 막혀 차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신호등에 걸린 사이, 나는 침묵을 깨며 물었다.“오늘 저녁 드셨어요?”“아니요, 아직이요.” 진정우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오늘 고생 많았으니까 저녁은 제가 살게요.”“좋죠.” 그는 거절하지 않고 흔쾌히 받아들였다.나는 주차할 곳을 찾아 차를 세운 후, 차에서 내려 붐비는 길거리 음식 노점을 둘러봤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했다.“오늘 여기 있는 거 전부 마음껏 드세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내 몸을 툭 치고 지나갔다. 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거린 나는 본능적으로 진정우의 옷깃을 잡아 그의 쪽으로 넘어갔다.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진정우의 옷깃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 장면은 마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연출이었고 그의 얼굴이 바로 내 앞에 있었다. 코끝이 맞닿고 조금만 움
손잡기, 포옹, 키스는 항목별로 따로 비용을 받는다는 것이 내가 소개팅남과 했던 약속이었다.지금 진정우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아마 그날 밤 그가 소개팅남을 때려눕힌 후 뒷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 일을 내게 언급한 적이 없었다. 정말 이 남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그는 나와 실제로 키스하지는 않고 대신 내 손을 잡아끌며 인파를 헤치고 달리기 시작했다.북적이는 도심에서 함께 뛰는 것은 내게도 처음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우리 둘이 왜 뛰는지 의아해했지만 알아서 길을 비켜주었다.붐비는 거리에서 사람들은 양옆으로 비켜섰고 우리는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달렸다. 진정우가 내 손을 잡고 가끔 나를 돌아보는 모습이 정말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불어왔다. 그렇게 나를 이끌고 달리는 진정우를 바라보자 문득 그와 함께 어디론가 도망치는 기분이 들었다.한참을 뛰다 보니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고 진정우는 내 걸음에 맞춰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멈춰 섰다.나는 헐떡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었고 진정우 역시 숨이 거칠었다. 그는 여전히 내 손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갈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진정우와 함께 이 순간을 공유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설렘을 주었다.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 다 숨이 점차 가라앉자, 나는 그가 아직도 내 손을 놓지 않고 있는 걸 알아챘다. 그의 목젖이 한번 꿀꺽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그 순간, 공기가 묘하게 달아올랐고 나는 심장이 더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목이 바싹 말라오는 긴장감 속에 겨우 말을 꺼냈다.“저기... 왜 저를 잡고 뛰어왔어요?”“안 뛰면... 사람들 앞에서 키스해야 했을 텐데요.”진정우의 말에 얼굴이 새빨개졌다.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의 손을 힘껏 빼내려 했지만 그는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그의 발을 살짝
“자.” 진정우가 자신이 들고 있던 탕후루를 내 입 가까이 들이밀었다.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탕후루를 더 가까이 내밀었다. 마치 내가 한 입 먹지 않으면 끝낼 생각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할 수 없이 입을 벌려 한입 베어 물었다. 달콤하면서도 새콤한 맛이 느껴졌고 확실히 오리지널 맛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솔직히 나쁘지 않았지만 내가 먹고 있던 과일 탕후루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맛은 아니었다.진정우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 때문에 맛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정말 맛있네요.”그러자 진정우가 내가 들고 있는 탕후루를 가리키며 말했다.“지원 씨 것도 궁금한데요.”나는 반사적으로 내 탕후루를 뒤로 숨기며 마치 소중한 걸 빼앗길까 봐 조심하는 어린아이처럼 굴었다.그러자 진정우가 웃으며 말했다.“한 입만 먹어볼 건데 뭘 그렇게까지... 그럼 너무 소심해 보이잖아요.”그 말에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한 입 정도 줄 수 있지 않은가 싶어서 탕후루를 다시 꺼냈다. 내가 선택한 탕후루는 작은 과일들이 다섯 알씩 담긴 것이었고 각기 다른 맛이 있었다.“자, 여기서 하나 고르세요.”하지만 그는 내가 들고 있는 것을 보지도 않고 내가 먹고 있던 탕후루를 가리켰다.“저는 이걸로 할게요.”나는 잠시 말이 막혔다. 그건 내가 이미 한 입 먹은 거였다.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진정우는 고개를 내밀어 내가 들고 있는 탕후루에서 작은 감 하나를 베어 물었다. 그가 먹고 나서 탕후루를 보니 남은 과일은 딱 한 알뿐이었다. 어쩐지 먹기도 뭐하고 안 먹기도 뭐한 기분이었다.그때 진정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남은 마지막 한 알을 내려다봤다. 그것은 설탕 코팅이 된 청포도라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이었다.버리기 아까워 마지막 청포도를 입에 넣고 재빨리 씹으려는 찰나, 고개를 들어 보니 진정우가 돌아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나는 갑
남자는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특히, 여자 앞에서는 더더욱.하지만 지금, 나는 허진호가 내 앞에서 눈가가 붉어지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그가 그렇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그의 사무실을 나와, 그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충분히 진정우를 기릴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주었다.이 회사가 진정우의 것이라고 했지만 공식적인 사장은 허진호였다.그만큼 두 사람 사이의 신뢰가 깊었고 진정우는 그를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다.그런데 이제, 진정우가 사라졌다. 그를 기다리던 허진호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의 슬픔도, 나 못지않을 것이다.나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진정우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는 연구개발을 했기에 직접 실험을 진행하는 일이 많았고 책상 위에는 각종 실험 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하지만 그 많은 장비에도 불구하고 연구실은 전혀 어수선하지 않았다.나는 천천히 다가가 책상 위에 놓인 실험 기록 노트를 집어 들었다. 빼곡하게 적힌 숫자들, 그리고 그가 직접 쓴 강직한 글씨들. 손끝으로 글자를 따라가다가, 다시 가슴이 아려왔다.모든 것이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그는 더 이상 여기에 없었다.그가 남긴 것들은 내 손에 닿지만 정작 그는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그가 있었던 흔적이 이렇게나 선명한데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나는 자리로 앉아 그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평소 그가 쓰던 펜, USB, 블루투스 이어폰, 그리고 기록 노트가 있었다.그리고 눈에 띄는 투명한 상자 하나가 있어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내 열어보았더니 안에는 묘하게 낯선 질감을 가진 가느다란 팔찌가 들어 있었다.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금속이나 은이 아니라,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재질이었고 잠금장치가 없었다. 혹시 빠진 걸까 싶어 상자 안을 뒤적이다가 몇 개의 미완성 부품과 함께 접혀 있는
신입 사원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씩씩하게 대답했다.“그럼요! 윤 부장님, 밥 사주세요.”그 직설적인 대답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좋아, 그럼 오늘 저녁에 다 같이 ‘성해 반점’에서 모이자. 내가 쏠게.”“정말이죠?”“당연하지.”“와! 윤 부장님 최고!”신입 사원은 신나서 뛰어나갔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별것 아닌 대화였지만 회사 분위기가 한결 밝아진 것 같았다.가방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본 후, 나는 허진호가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는 책상 가득 쌓인 서류에 파묻혀 있었다.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른 채 바쁘게 사인을 하고 있었다.나는 그의 책상을 흘끗 바라봤다. 거기에는 내가 맡았던 부서의 서류들도 섞여 있었다.‘역시, 내가 아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건 이 사람이 뒤에서 버텨주고 있었기 때문이구나.'내가 없는 동안, 모든 업무를 그가 대신 처리했을 것이다.“허 대표님, 이렇게 혼자서 모든 걸 떠안고 일할 거면 차라리 사람을 더 뽑는 게 낫지 않아요?”내 말을 들은 허진호는 순간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그는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세상에, 윤 부장님!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저 정말...”그는 말을 멈췄지만 나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내가 회사로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하지만 만약 내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왜 새로운 직원을 뽑지 않았던 걸까? 혹시 내 퇴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허 대표님, 저 복직할 수 있는 거죠?”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당연하죠! 무조건! 그런데 복직 안 하면 설마 퇴사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절대 안 돼요. 회사 규정상 최소 1년은 근무해야 사직이 가능하다고요!”그의 말에 나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계약서에 그런 조항이 있었어? 나 왜 몰랐지?’“이건 말도 안 되는 규정이에요.”나는 장난을 치며 말했다.“서명했으면 끝난 거예요. 이제 와서 불평하
나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강유형을 바라봤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난 이미 알고 있으니까.”강현우의 눈빛이 깊어졌다.“누구라고 생각하는데?”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몸을 일으키며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지원아, 설마 형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형이랑 만나려는 것도 결국 진정우의 복수를 위해서야?”오랫동안 나를 사랑했던 사람답게, 내 속마음을 읽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진혁 오빠 아니야? 그렇다면 진짜 배후가 누구인지 알려줘.”내 질문에 그는 잠시 말을 삼켰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지원아, 형은 아니야. 사실 나도 정확한 배후가 누군지는 몰라. 그때 네게 말했던 건 그저 추측이었어.”나는 조급해하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아니라면 더 좋지. 그렇다면 내가 진혁 오빠를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겠네.”강현우의 표정이 굳어졌다.“지원아…“나는 깊은숨을 내쉬며 담담하게 말했다.“우린 10년을 알고 지냈고 4년 동안 사랑했어. 그리고 나는 진정우를 사랑하게 됐지. 나는 여러 가지 사랑을 경험했어. 짝사랑이 이루어지는 설렘도, 운명처럼 빠져드는 감정도. 하지만 결국 사랑이란 건 너무 피곤한 감정이더라. 이제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선택하고 싶어.”“좋아, 네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건 이해하지만 형은 절대 안 돼.”강현우는 강하게 반대했고 나는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왜 안 되는데? 이유를 말해봐.”그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지원아, 이유 모를 리 없잖아. 꼭 내가 말해야 해? 내 형이잖아. 너는 한때 내 약혼녀였고. 둘이 같이 있으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볼 것 같아? 우리 가족은 또 어떻게 보겠어? 나더러 어떻게 널 마주하라는 거야?”나는 잠시 침묵했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럼 네 체면과 감정을 위해, 난 내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는 거야?”그는 내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마음의 준비
만약 강유형이 정말 이대로 다리를 잃게 된다면 내가 그에게 진 빚이 너무 클 것이다.하지만 그와 더 이상 복잡하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할 수 있는 한 그를 설득해 제대로 치료를 받게 하려는 것뿐이었다.“그렇게 심각하지 않아. 몇 번 더 치료받으면 괜찮아질 거야.”그는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말했고 목소리조차 기운이 없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그를 더 설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강유형이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네가 돌아왔으니, 내 상처도 금방 나을 거야.”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지만 그는 곧장 화제를 돌렸다.“신지태가 널 몇 번이나 찾았어. 내가 말리지 않았으면 실종 신고라도 했을걸?”나는 한동안 연락을 끊고 지냈다. 그동안 나를 걱정한 사람들이 많았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지태 오빠 오늘 와?”나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모르겠어. 네가 왔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뛰어올걸?”그는 핸드폰을 집어 들며 신지태에게 연락하려 했다.그러나 팔을 움직이는 순간, 상처에서 뻐근한 통증이 밀려온 듯 그는 순간적으로 멈췄다. 나는 그의 감싼 팔을 조심스레 붙잡으며 말했다.“굳이 전화할 필요 없어. 내가 돌아왔으니, 곧 만나겠지.”그는 통증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의사 불러줄까?”그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적셨다.“물 좀 줘.”나는 컵을 건네주었고 그는 두어 모금 마신 후에야 얼굴이 조금 나아 보였다.“형은 너 보러 왔어?”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번 왔었어.”“어제 돌아오면서 우연히 마주쳤어.”“어디서?”“샤부샤부 집에서.”강유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반응이 흥미로워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나랑 참 인연이 깊은 것 같아.”그는 내 말을 단숨에 이해했는지,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지원아,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나는
“지원아, 돌아왔구나?”강진혁이 나를 보며 살짝 놀란 듯, 그리고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네, 오늘 막 도착했어요.”나는‘오늘’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대답했고 안리영도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오자마자 이렇게 마주치는 거 보면 진짜 우연인가 보네요.”강진혁은 그녀의 말에서 숨은 의미를 느꼈는지, 위층을 가리키며 덤덤하게 말했다.“고등학교 친구들이 며칠 전부터 약속 잡고 여기서 모이기로 했어.”마침 누군가 그를 불렀다.“진혁아, 우리 먼저 갈게.”그는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 손짓하며 배웅한 뒤, 다시 우리를 바라보며 물었다.“더 필요한 거 있어? 주문할 거 있으면 내가 계산할게.”그의 말투는 자연스러웠지만 분명 의도적으로 챙기려는 느낌이 들었다.“이미 결제했어요.”안리영이 대신 대답했다. 그러자 강진혁은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원아, 좀 쉬고 나면 집에 와서 밥 한 끼 하자. 부모님이 네 걱정을 많이 하셔.”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조만간 먼저 연락할게요. 그리고... 휴링턴에서 신세 많이 졌어요.”굳이 ‘휴링턴’을 언급한 이유는, 그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서였지만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짧게 대답했다.“그래.”그는 안리영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유리창 너머로 그가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 순간, 안리영이 내 발을 슬쩍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뭐야, 강진혁 아직도 너 못 잊은 거 아냐?”나는 시선을 다시 테이블로 돌리며 끓어오르는 국물 속에서 부글거리는 재료들을 바라보았다.“리영아, 나는 지금... 강진혁이 이 모든 일의 배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뭐라고?”그녀는 놀라서 젓가락을 들던 손을 멈췄다. 나는 휴링턴에서 발견한 것들에 대해 조용히 이야기했다.“앞으로 내가 하는 일이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해해 줘.”안리영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이상하게 보인다니, 도대체 뭘 하려고?”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나는 의료 서적을 넘기며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갔다. 문외한인 내가 이런 책을 본다는 게 쉽지 않았지만 지난 한 달 동안 고요한 시간을 보내면서 마음이 차분해져서인지 의외로 집중이 잘 됐다.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내 마음이 가라앉았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얼마 후, 안리영이 수술을 마치고 돌아왔다. 문 앞에서 나를 보던 그녀는 몇 초간 멈춰 서 있더니,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나를 꼭 안아 주었다.“돌아왔네.”진정우의 일을 나는 오직 안리영에게만 이야기했다. 진정우를 어디에 묻었는지 아는 사람도 그녀뿐이었다.나는 그녀의 어깨에 기대며 익숙한 소독약 냄새를 맡았다.“나, 갑자기 훠궈가 먹고 싶어.”“좋지! 당장 가자!”그녀의 대답에는 묘하게 들뜬 기운이 섞여 있었다. 어쩌면 그녀도 내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게 반가웠던 걸지도 몰랐다.그래, 나도 이제 다시 살아가야 했다. 진정우는 떠났지만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식사를 하던 중, 문득 떠오른 듯 물었다.“강유형, 본 적 있어?”“그럼, 매일 보지. 악어한테 물린 이후로 계속 우리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그녀의 말에 나는 젓가락을 멈췄다.“벌써 한 달이 넘었잖아? 아직도 치료 중이야?”“응. 상처가 아물질 않아서 계속 곪고 있대. 이미 몇 번이나 괴사한 살을 도려냈다더라.”그 말을 듣는 순간, 강유형이 악어에게 물렸던 장면이 눈앞을 스쳤다.“그 정도로 심각했어?”“직접 가서 볼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나 때문이잖아.”안리영이 고기를 집어 내 그릇에 올려주며 말했다.“많이 먹어. 한 달 사이에 살이 너무 빠졌어.”“그래? 나 하루 세 끼 잘 챙겨 먹었는데.”나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진정우 곁을 지키는 동안에도 먹고 자는 것만큼은 철저히 지켰다.“그럼... 마음고생 때문인가 보네.”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나는 안리영을 보며 피식 웃었다.“넌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은데? 교수님이랑 잘 지내나 보네?”
나는 진정우를 고국으로, 그리고 우리가 함께 꿈꾸던 집으로 데려왔다.해가 지는 어느 저녁, 우리는 그가 노후를 함께 보내고 싶다던 그 땅에 그를 묻었다. 그렇게 하고도 쉽게 떠날 수 없어 나는 그의 곁에 꼬박 35일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다녀왔다.어릴 적 어머니가 이야기하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영혼은 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했던 사람 곁에서 머문다고. 흔히 말하는 35날이라는 기간 동안 말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것을 믿고 싶었다. 그가 홀로 떠나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함께 있어 주고 싶었다. 그의 영혼이 완전히 떠난 후에야 나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동안 나는 세상과의 연락을 끊고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진소영이 그랬던 것처럼 책을 읽고 꽃을 따서 차를 우려 마시고 그림을 그렸고 그림 속에는 온통 진정우뿐이었다. 그를 그릴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강진혁의 방에 빼곡히 걸려 있던 내 초상화들이었다.아침과 저녁이면 그의 곁에서 혼잣말을 하듯 이야기를 나눴다.“진정우, 오늘 밤 꿈에라도 와서, 그때 못다 한 말을 마저 해줄래?”“진정우,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너를 안아보고 싶은데 이제는 만질 수도 없잖아. 그런 공허한 아픔이 날 미치게 할 것 같아.”“진정우, 오늘 길에서 다친 작은 새를 주웠어. 어미는 보이지 않더라. 내가 잘 키울 수 있을까?”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가끔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마치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던 그의 손길처럼 느껴졌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35번째 날, 나는 새로 딴 꽃을 들고 그의 곁을 찾았다.“진정우, 오늘이 네가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이야? 내일부터는 정말로 네가 없는 걸까? 나도 이제 돌아가야겠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마주해야 할 사람들을 만나야 해. 그리고...”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나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널 함정에 빠뜨린 사람을 찾아야겠어.”그 순간, 바람
나는 무겁게 발을 떼며 앞으로 걸어갔다. 신지태가 나를 부축하며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지만 안으로 들어가기 전 이미 누군가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그 사람의 품에는 검은색 상자가 안겨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혼란이 서려 있었다. 나는 그 상자를 보는 순간, 숨이 멎었다.신지태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나를 더 단단히 부축했지만 그마저도 희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온몸의 감각이 무뎌졌다. 나는 다시 정신을 붙잡으려 애쓰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 안쪽,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용설아를 한눈에 그녀를 보았다.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저 등 뒤로 느껴지는 깊은 절망과 슬픔만으로도 충분히 모든 걸 알 수 있었다.그 순간, 발이 땅에 박힌 듯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신지태도 함께 멈춰 섰고 우리 둘 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잠시 후, 용설아는 천천히 몸을 돌렸고 그녀의 두 손 위에는 검은색 상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대로 시야가 흐려지며 쓰러질 뻔했다.용설아는 내 앞까지 걸어와 조용히 말했다.“이건 진정우가 남긴 마지막 부탁이에요. 그가 원했던 대로, 지원 씨가 직접 그를 데려가 주세요. 두 분이 가장 좋아했던 그곳에 묻어달라고 했어요.”나는 그녀가 들고 있는 상자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지난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그와 함께 걸었던 들판,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던 약속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살자고 했던 말.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나에게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그를 그곳에 묻어달라는 마지막 부탁 말이다.‘이건, 나보고 죽으라는 말이야?’나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상자를 노려보았다.“왜 나를 기다리지 않았어?”작은 상자 하나에 다 담길 리 없는 그를 떠올리며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왜... 기다려주지 않았어, 진정우?”“정우는 지원 씨가 그 순간을 직접 마주하지 않길 바랐거든요.”용설아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힘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정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강유형과 신지태 오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고 그들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하게 물었다.“둘 다 몰라?”나는 머릿속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그럼 내가 직접 찾아갈게...”그 순간, 신지태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나를 붙잡았고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왜 그래?”“지원아, 이제 받아들여야 해. 진정우는... 더 이상 없어.”강유형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나도 알아.”그러면서도 어설프게 웃으며 덧붙였다.“그래서, 그를 보러 가려고 해. 조용히 곁에 있고 싶어서.”그 순간, 신지태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면서 살짝 아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내 팔을 더 강하게 움켜잡았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오빠, 너무 아파.”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지원아... 진정우는... 없어. 더 이상 볼 수 없어.”그 말에 나는 얼어붙은 듯 멈춰 섰고 눈앞이 흔들렸지만 나는 애써 강하게 말했다.“아니, 난 볼 수 있어. 그러니까 가게 해 줘.”“지원아!”신지태가 단호하게 나를 불렀지만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 하며 애타게 말했다.“제발, 가게 해 줘.”그 순간, 강유형이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볼 수 없어. 그는 이미... 화장됐어.”그 순간, 내 손이 허공에서 멈춰 섰고 나는 서서히 강유형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온몸이 얼어붙은 듯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강유형.”신지태 오빠가 낮게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여전히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지원아... 진정해.”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그 말이 거짓이길 바랐다.“그 말, 거짓말이지...? 진정우... 진짜 아니지?”신지태 오빠의 눈이 더 붉어졌다.“지원아, 울고 싶으면 울어.”나는 울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나는 믿고 싶지 않았다. 눈앞이 흐려지면서 몸이 떨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