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 말 없이 멍하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진정우가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울 텐데 괜히 잘못된 반응을 보여 그를 더 슬프게 할까 봐 말을 삼켰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부모님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부모님의 사고는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당시 나는 너무 어렸고 사고 이후 모든 일은 강두식 삼촌이 처리해 주셨다. 아마 삼촌만이 진실을 알고 계실지도 모른다. 조금 후에 그를 만나면 그 이야기를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진정우도 내가 말이 없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삼촌 집에 도착하자마자 얼굴 인식으로 문이 열렸다. 마당에 있던 장 집사가 나를 보고 반갑게 맞이했다.“아가씨, 오셨네요! 곧바로 어르신과 사모님께 알려 드릴게요.”“괜찮아요. 제가 직접 들어갈게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장 집사는 차에서 내린 진정우를 흥미롭게 쳐다봤다. 그의 정체가 궁금한 듯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끌어안았다.“제 남자 친구, 진정우예요.”장 집사는 단순한 집사가 아니라, 삼촌 댁에서 나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보냈고 김희연 아줌마와도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니 장 집사 앞이라고 해도 연기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진정우는 장 집사를 향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장 집사님.”“아이고...” 장 집사는 그를 바라보며 어딘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나와 강유형의 혼약이 정해진 사이로 보이는 상황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장 집사가 이런 반응이라면, 조금 후 삼촌과 아줌마는 더 큰 충격을 받겠지.나는 진정우와 팔짱을 낀 채 장 집사를 지나 거실로 향했다. 아직 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삼촌을 꾸짖는 중이었다.“회장이라는 사람이 회사에서 몇천 명씩 다스리면서도 자기 아들 하나 제대로 말을 듣게 하지 못하잖아!”삼촌은 대답 없이 스마트폰이나 잡지를 보고 계신 것 같았다. 일부러 못 들은 척하는 걸까?“강두식! 또 못 들은 척하는
하지만 아줌마는 믿지 않는다는 듯, 다시 삼촌을 한 대 때리며 말했다."지원이를 핑계로 나를 달래려 하지 마. 안 속아."“아줌마!” 내가 부르자 아줌마가 몸을 살짝 떨며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자마자 눈에 기쁨이 번졌지만 곧 삼촌과 다정한 모습을 내가 목격했음을 깨달은 듯 얼굴이 붉어졌다.아줌마는 삼촌의 손을 재빨리 떨쳐내며 내게 다가왔다.“지원아, 왔구나! 밥은 먹었어? 내가 장 집사한테 준비하라고 할까?”“이미 먹었어요.” 거짓말이었다. 사실 먹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진정우가 식사를 했는지도 묻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넌 왜 집에 와서 먹지 않고 나가서 먹어?” 아줌마는 나에게만 투덜대면서도 진정우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못 본 척하는 것이었다. 진정우에게 말 걸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줌마는 이렇게 자신의 방식으로 진정우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내고 있었다.하지만 상류층 가문의 사모님답게, 약간의 침묵 후에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지원이 친구인가 보네?”나는 슬쩍 진정우의 팔을 쥐었다. 그도 상황을 파악한 듯 정중하게 말했다.“안녕하세요.”아줌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지원의 친구라면 외부인은 아니네. 어서 들어와.”삼촌도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는 준비해 온 선물을 두 손으로 내밀었다.“삼촌, 미리 생신 축하드려요.”“역시 우리 지원이! 늘 이렇게 마음 써주니 고맙구나.” 삼촌은 기쁜 얼굴로 선물을 받으며 진정우를 바라봤다.“안녕하세요, 삼촌.” 진정우도 인사를 건넸다.삼촌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권하자 아줌마는 장 집사에게 차와 과일을 준비하라고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와 진정우를 한참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선물만 주고 그날에 안 오면 곤란해. 네 삼촌과 난 그런 거 허락 못 해.”아줌마는 내 의도를 꿰뚫어 본 듯, 단호하게 내 계획을 차단했다. 나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그날 정우 씨와 함께 올 거예요.”그러자 아줌마의 얼굴이 잠시 굳어지더니, 이내 억
진정우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의 손이 내 손을 더 단단히 감싸 쥐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마치 내 심장의 멎는 것 같았다. 설렘의 극치가 있으면 바로 이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저는 지원이에게 제 모든 걸 줄 겁니다. 제 생명처럼 사랑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를 지킬 거예요.” 진정우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깊고 고요한 눈동자에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는 듯했다.'바다처럼 깊은 사랑'이란 말이 바로 이럴 때 쓰는 걸까? 연기임을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정우가 진심을 담아 고백하고 있는 것 같았다.정말 대단한 남자다. 연기라는 핑계로 내 마음을 흔들다니.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손을 맞잡으려다가, 왠지 그가 얄미워져서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 평소 고지식한 그가 이런 행동을 불편해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 손에 얼굴을 비비며 장난스럽게 굴었다.‘진짜 뻔뻔하네. 이런 사람도 있구나.’ 싶었지만 어딘가 귀여운 구석이 있긴 했다.진정우는 내 손을 살짝 놓고 삼촌과 아줌마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삼촌께서 아줌마를 평생 사랑하시듯 저도 평생 지원이를 사랑할 겁니다.”앞부분은 내게 하는 고백이었다면, 뒷부분은 아줌마를 겨냥한 반격이었다.아줌마의 얼굴이 살짝 굳는 게 보였다. 진정우의 말을 듣고 더는 뭐라 말할 수 없었던 듯했다. 그때까지 침묵하던 삼촌이 입을 열었다.“정우 씨는 아줌마와 얘기 좀 나누고 너는 나랑 서재에 잠깐 가자.”삼촌은 진정우를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삼촌이 나를 부른 이유를 짐작하면서도 살짝 긴장된 마음으로 그를 따라갔다.서재에 들어가자 삼촌은 내가 가져온 선물 상자를 내게 건네며 말했다.“지원아, 네가 사 온 새 먹과 붓으로 나랑 같이 글을 써 보자.”오랜만에 삼촌과 함께 글을 쓰게 된 거였다. 적어도 3년은 된 일이다. 그때 아줌마는 아들이 크면 엄마와 서먹해지고 딸이 크면 아빠와 서먹해진다고 했다. 게다가
삼촌과 글씨 연습을 해야 할 때가 아니면 글을 쓸 일이 없었다. 나이가 들었다지만 여전히 아이 같아서 쉴 수 있을 때는 늘 게으름을 피우곤 했다.“괜찮아.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써 봐. 잘 쓰든 못 쓰든 상관없어.” 삼촌이 나를 격려하며 붓을 내밀었다.더는 거절할 수 없어 붓을 받았지만 그 순간 붓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먹을 묻혀서 그럴 수도 있지만 아마 삼촌의 기대가 담긴 눈빛 때문일 것이다. 삼촌은 내가 예전처럼 글을 쓰고 마음에 여전히 강유형만 두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여전히 내가 ‘가족’으로 남을 수 있으니까.손이 살짝 떨리면서도 힘겹게 붓을 내려 글씨를 썼지만 글자는 삐뚤고 힘도 고르지 못했다. 삼촌이 내게 글을 쓰게 한 건, 글씨 자체가 아니라 내 마음을 알고 싶었던 게 아닐까.“한 번뿐인 인생...” 삼촌은 내가 쓴 글을 천천히 따라 읽었다.삼촌이 글씨로 내게 무언가를 전해 준 것처럼, 나도 내 마음을 담아 답을 쓴 것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나를 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지원아,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삼촌은 항상 네 편이야.”삼촌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나는 악수 대신 가볍게 삼촌을 안았다.“삼촌, 감사해요.”삼촌은 내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미안하다. 네가 힘들었을 텐데... 삼촌이 아들을 잘못 가르친 탓이야.”조금 전 아줌마의 잔소리에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삼촌이, 나에게는 이렇게 사과를 해주니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삼촌은 내가 울 것 같다는 걸 느꼈는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유형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나도 알아. 이미 경고를 해 두었으니까,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야. 또다시 그런 짓을 하면 쫓아낼 각오도 돼 있어.”사실 나는 오늘 이 일을 삼촌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내가 말하기도 전에 삼촌이 다 알고 있었다. 20년 동안 함께 지내며 우리는 진짜 가족처럼 서로를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삼촌,
삼촌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 그의 몸이 살짝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나는 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삼촌...”그러자 삼촌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지원아, 갑자기 왜 이런 걸 묻는 거야?”진정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지만, 삼촌에게 그대로 말할 수는 없어서 그냥 대충 얼버무렸다.“그냥 궁금해서요.”삼촌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고 그의 무거운 표정에 나까지 긴장되었다.“지원아, 네 부모님의 사고는 그저 안타까운 사고였어. 내가 현장에 직접 갔었고 당시 경찰 보고서와 부검 결과도 다 확인했어.” 삼촌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이 묻어 있었다.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삼촌이 나를 사고 현장에 데려가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삼촌이 나를 보호하려고 현장에 데려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은 제일 큰 아쉬움으로 남아있다.“지원아, 만약 네가 의문이 있거나 믿지 못하겠다면, 그 당시의 기록을 직접 열람해 봐도 좋아.” 삼촌의 얼굴은 창백해 보였고 조금 전까지 밝았던 표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삼촌과 아버지와 가까운 사이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거의 친형제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내가 부모님의 사고를 언급한 것이, 그때의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한 듯 보였다.나는 삼촌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삼촌, 아니에요. 전 믿어요. 그냥 한 번 물어본 거예요.”삼촌은 내 말을 듣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결국 아무 말 없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원아, 먼저 내려가 있어라. 난 잠깐 혼자 더 있을게.”함께 내려가기로 했던 삼촌이 갑자기 말을 바꾸자, 내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삼촌...”“괜찮아, 어서 내려가.” 삼촌은 손짓하며 나를 보내려 했다.나는 서재를 나왔지만, 바로 아래층으로 가지 않고 벽에 기대어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삼촌의 반응이 예상 밖이라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혹시 그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그의 진심 어
“알겠어요.” 나는 아줌마를 보며 인사했다.“아줌마, 저희 이만 가볼게요.”아줌마는 내 얼굴빛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듯, 잠시 위층을 바라봤다. 아마 삼촌과 나눈 대화가 궁금했던 것 같았다. 그래도 굳이 붙잡지 않고 “조심해서 가” 하고 배웅해 주었다.나는 진정우와 함께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려고 하자 진정우가 내 손을 붙잡았다.“왜 그래요?” “별거 아니에요. 부모님 얘기가 나왔거든요.” 나는 숨기지 않고 답했다.“혹시 사고 얘기 물어보신 거예요?” 그는 바로 눈치챘다.“네, 사실은... 정우 씨 영향도 좀 받았죠. 정우 씨의 이야기를 듣고 제 가족사도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나는 약간 자조적으로 웃었다.“그럼 결과는요?” 그가 다시 물었다.삼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차에 시동을 걸고 조용히 답했다.“단순한 사고였대요.”차가 삼촌 집을 벗어나자 나는 말을 덧붙였다.“현장 보고서와 부검 결과도 있고요.”진정우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차에 앉아 있었고 어느덧 도심의 화려한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사람이 붐비는 거리라 교통이 막혀 차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신호등에 걸린 사이, 나는 침묵을 깨며 물었다.“오늘 저녁 드셨어요?”“아니요, 아직이요.” 진정우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오늘 고생 많았으니까 저녁은 제가 살게요.”“좋죠.” 그는 거절하지 않고 흔쾌히 받아들였다.나는 주차할 곳을 찾아 차를 세운 후, 차에서 내려 붐비는 길거리 음식 노점을 둘러봤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했다.“오늘 여기 있는 거 전부 마음껏 드세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내 몸을 툭 치고 지나갔다. 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거린 나는 본능적으로 진정우의 옷깃을 잡아 그의 쪽으로 넘어갔다.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진정우의 옷깃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 장면은 마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연출이었고 그의 얼굴이 바로 내 앞에 있었다. 코끝이 맞닿고 조금만 움
손잡기, 포옹, 키스는 항목별로 따로 비용을 받는다는 것이 내가 소개팅남과 했던 약속이었다.지금 진정우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아마 그날 밤 그가 소개팅남을 때려눕힌 후 뒷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 일을 내게 언급한 적이 없었다. 정말 이 남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그는 나와 실제로 키스하지는 않고 대신 내 손을 잡아끌며 인파를 헤치고 달리기 시작했다.북적이는 도심에서 함께 뛰는 것은 내게도 처음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우리 둘이 왜 뛰는지 의아해했지만 알아서 길을 비켜주었다.붐비는 거리에서 사람들은 양옆으로 비켜섰고 우리는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달렸다. 진정우가 내 손을 잡고 가끔 나를 돌아보는 모습이 정말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불어왔다. 그렇게 나를 이끌고 달리는 진정우를 바라보자 문득 그와 함께 어디론가 도망치는 기분이 들었다.한참을 뛰다 보니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고 진정우는 내 걸음에 맞춰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멈춰 섰다.나는 헐떡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었고 진정우 역시 숨이 거칠었다. 그는 여전히 내 손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갈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진정우와 함께 이 순간을 공유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설렘을 주었다.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 다 숨이 점차 가라앉자, 나는 그가 아직도 내 손을 놓지 않고 있는 걸 알아챘다. 그의 목젖이 한번 꿀꺽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그 순간, 공기가 묘하게 달아올랐고 나는 심장이 더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목이 바싹 말라오는 긴장감 속에 겨우 말을 꺼냈다.“저기... 왜 저를 잡고 뛰어왔어요?”“안 뛰면... 사람들 앞에서 키스해야 했을 텐데요.”진정우의 말에 얼굴이 새빨개졌다.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의 손을 힘껏 빼내려 했지만 그는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그의 발을 살짝
“자.” 진정우가 자신이 들고 있던 탕후루를 내 입 가까이 들이밀었다.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탕후루를 더 가까이 내밀었다. 마치 내가 한 입 먹지 않으면 끝낼 생각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할 수 없이 입을 벌려 한입 베어 물었다. 달콤하면서도 새콤한 맛이 느껴졌고 확실히 오리지널 맛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솔직히 나쁘지 않았지만 내가 먹고 있던 과일 탕후루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맛은 아니었다.진정우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 때문에 맛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정말 맛있네요.”그러자 진정우가 내가 들고 있는 탕후루를 가리키며 말했다.“지원 씨 것도 궁금한데요.”나는 반사적으로 내 탕후루를 뒤로 숨기며 마치 소중한 걸 빼앗길까 봐 조심하는 어린아이처럼 굴었다.그러자 진정우가 웃으며 말했다.“한 입만 먹어볼 건데 뭘 그렇게까지... 그럼 너무 소심해 보이잖아요.”그 말에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한 입 정도 줄 수 있지 않은가 싶어서 탕후루를 다시 꺼냈다. 내가 선택한 탕후루는 작은 과일들이 다섯 알씩 담긴 것이었고 각기 다른 맛이 있었다.“자, 여기서 하나 고르세요.”하지만 그는 내가 들고 있는 것을 보지도 않고 내가 먹고 있던 탕후루를 가리켰다.“저는 이걸로 할게요.”나는 잠시 말이 막혔다. 그건 내가 이미 한 입 먹은 거였다.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진정우는 고개를 내밀어 내가 들고 있는 탕후루에서 작은 감 하나를 베어 물었다. 그가 먹고 나서 탕후루를 보니 남은 과일은 딱 한 알뿐이었다. 어쩐지 먹기도 뭐하고 안 먹기도 뭐한 기분이었다.그때 진정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남은 마지막 한 알을 내려다봤다. 그것은 설탕 코팅이 된 청포도라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이었다.버리기 아까워 마지막 청포도를 입에 넣고 재빨리 씹으려는 찰나, 고개를 들어 보니 진정우가 돌아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나는 갑
“콜록!”전화기 너머에서 배성재가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내 갑작스러운 애교 섞인 목소리가 꽤 당황스러웠나 보다.그는 곧바로 물었다.“무슨 부탁이죠?”나는 다리를 꼬아 올리고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말했다.“드래곤킹에는 남자 모델뿐만 아니라 여자 모델도 있죠? 혹시 그쪽이랑 친하세요?”이제 내가 배성재가 진정우라는 걸 확신한 이상, 굳이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도 없었다.생각해 보면 참 우습다. 그동안 그렇게 떠보고 시험해 보려고 온갖 수를 썼지만 결국 미트볼이 모든 걸 말해주었다.“갑자기 왜 그런 걸 묻죠?”여전히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듯 조심스럽게 되묻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팔짱을 끼고 일부러 더 장난스러운 톤으로 말했다.“저도 한 번 여자 모델이 되어 보고 싶어서요.”“뭐라고요?”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층 높아졌다.예상치 못한 대답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듯했다.“드래곤킹에서 여자 모델로 일해 보고 싶다고요. 그러니까 성재 씨가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그건 안 됩니다.”이번엔 단칼에 잘라 말했다. 거절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오히려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왜요? 제가 못생겨서? 아니면 몸매가 별로라서?”“그런 문제가 아닙니다.”그의 목소리는 낮아졌고 곧이어 단호한 어조로 덧붙였다.“그곳은 당신이 갈 만한 곳이 아닙니다.”‘좋아, 바로 이 반응. 이제야 진짜 진정우다운 모습이 나오는군.’“왜요? 성재 씨도 거기서 일하셨잖아요?”내가 일부러 짓궂게 되묻자, 그는 순간 말을 잃었다.그리고 몇 초간의 침묵 끝에 낮게 말했다.“나는 당신이 그곳에 가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도와줄 수도 없어요.”나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그래, 바로 이거야. 이 반응이야.’분명 그는 자신이 진정우라는 걸 들키지 않으려 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나를 통제하려는 태도가 그대로 드러났다.“그럼 내 방법대로 알아서 갈게요.”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그가 날 불러 세웠다.“잠깐. 진짜 이유
내 아버지를 언급하자 강진혁은 순간 굳어졌다.표정이 단단하게 굳은 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연한 반응이었다.내 부모님의 죽음은 그의 아버지가 직접 만든 비극이었으니까.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배성재가 만든 완자를 바라보았다.나는 차분한 척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제 세상에 내가 좋아하는 그 맛은 다시 없을 거야.”하지만 그건 완전한 거짓말이었고 나는 이미 확신했다.배성재가 진정우라는 걸.그런데도 그가 계속 자신을 배성재라고 주장하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괜히 흔들리지 말고 그의 계획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었다.강진혁은 한숨을 내쉬듯 낮게 말했다.“지원아, 네 부모님 일은 정말 미안해.”하지만 그 말은 더럽게도 위선적으로 들렸다.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을 애써 눌러가며 나는 덤덤하게 받아쳤다.“그 일은 오빠랑 상관없잖아요.”강진혁이 쓴웃음을 지었다.“넌 참 착한 애야.”‘착해? 아니, 바보였겠지.’한때는 용서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내가 그들을 용서할 마음이 단 1%도 없다는 걸 말이다.나는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고 조용히 단호박 수프를 떠먹었다.따뜻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며 묘하게 마음을 안정시켰다.솔직히 말해 배성재의 요리 실력은 꽤 수준급이었다.심지어 예전 진정우보다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다.‘그동안 숨어서 요리 연습이라도 했나? 나중에 진짜 정체를 밝히면 꼭 물어봐야겠네.’“이거 맛있네요. 잘 만들었어요.”내가 무심하게 던진 칭찬에 강진혁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그러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저녁 약속 있어?”그는 내가 무심코 던진 말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없어요. 그냥 한 말이에요.”나는 무심히 단호박 수프를 한 모금 마셨고 그 순간 강진혁의 시선은 더욱 깊어졌다.그러더니 예상치 못한 제안을 했다.“그럼 오늘 저녁에는 나랑 같
배성재는 정말 겁도 없었다.강진혁이 나를 붙잡으려 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대놓고 도전장을 내밀다니...나는 그의 이런 태도가 예상 밖이었지만 지금 내게 더 중요한 건 이소희였다.그녀가 정말 드래곤킹에 있다면 직접 가서 확인해야 했다.나는 고민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아니요. 오늘 저녁엔 약속이 있어서요.”배성재는 별다른 아쉬운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돌아섰다.엘리베이터 앞에서 동료들을 마주쳤는지 다시 한 번 진 팀장님이라 불리는 소리가 들렸다.그런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뿐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이 모습을 보고 있던 강진혁이 문득 내게 물었다.“저 사람... 진정우랑 정말 많이 닮지 않았어?”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만약 이 자리에서 안 닮았다고 하면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워 보일 것이다.그래서 나는 가볍게 웃으며 의미심장하게 답했다.“모르겠어요. 그래서 더 시험해 봐야죠.”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진정우는 항상 나한테 맛있는 걸 챙겨줬어요. 그래서 저도 한 번 성재 씨의 요리를 경험해 보려고요.”이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강진혁에게 보내는 신호였다.내가 배성재를 곁에 두려는 이유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다는 신호였다.나는 아직 강진혁이 배성재를 위험 요소로 인식하지 않길 바랐다.적어도 지금은 배성재가 그의 타겟이 되어서는 안 된다.그의 표정을 살피던 강진혁이 나지막이 물었다.“그럼 결과는 나왔어?”우리는 이미 사무실로 들어와 있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도시락을 열었다.그 안에는 예상했던 두 가지 요리 외에도 만두와 호박죽까지 곁들여져 있었다.솔직히 말해 보는 것만으로도 식욕이 당길 정도였다.강진혁도 한마디 덧붙였다.“보아하니 요리 실력이 제법인데. 드래곤킹에서 남자 모델로 있기엔 아까운 재능이네. 그냥 식당을 차리는 게 낫겠어.”나는 의미
“괜찮아요. 그냥 갑자기 속이 좀 안 좋았을 뿐이에요.”나는 강진혁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의 그런 태도조차 나에게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관심과 걱정이라기보다 그저 나를 붙잡기 위한 수단처럼 보였기 때문이다.사랑이 식으면 그의 모든 행동이 불편하게만 보인다더니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그래도 물이라도 좀 마셔.”강진혁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권했지만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그렇게 화장실을 나와 사무실 쪽으로 걸어가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그리고 곧, 회사 직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어? 진 팀장님!”“오랜만이에요! 드디어 복귀하신 거예요?”“우린 진짜 많이 보고 싶었어요!”여러 직원이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반가워하는 사람이 진정우가 아니라 배성재라는 것이었다.배성재는 아무런 반응 없이 직원들에게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그렇게 조용히 걸어오더니 나를 향해 곧장 다가왔다.그 순간, 내 옆에 있던 강진혁의 기운이 눈에 띄게 싸늘해졌다.굳이 보지 않아도 그가 지금 얼마나 불쾌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나는 팔짱을 낀 채 차갑게 물었다.“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나는 일부러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그가 진정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이 계속 착각하도록 놔두는 것이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괜한 오해가 쌓이면 나중에 정리하기가 더 골치 아파진다.배성재는 개의치 않는 듯 태연하게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 상자를 내게 건넸다.“점심 가져왔어요.”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사실 나는 아침도 못 먹고 나와서 속이 비어 있었다.나는 그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책임감이 꽤 강하네요?”그러면서 슬쩍 강진혁을 향해 돌아보며 덧붙였다.“오빠, 성재 씨 요리 실력 한 번도 안 맛봤죠? 진 팀장님보다는 아주 약간 부족하긴 한데 그래도 꽤 괜찮아요.”내 말이 끝나기가
“생각나는 사람 있어요?”강진혁은 집요하게 내 반응을 살폈다.나는 짧게 웃으며 허진호에게 집중하듯 말했다.“전 허 대표님이 빨리 회복해서 출근하셨으면 좋겠어요. 출근 도장 찍는 모습 못 보니 너무 심심하네요.”그렇게 나는 가볍게 농담을 던지며 전화를 끊었다.강진혁은 이미 내 자리까지 들어와 있었고 가져온 꽃을 조심스레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그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오랜만에 그렇게 밝게 웃는 거 본 것 같은데.” 나는 자연스럽게 이유를 만들어냈다.“허 대표님이 여자 친구한테 얼굴 할퀴었다고 투덜대는데 그게 너무 웃겨서요.”강진혁은 별로 놀라지도 않은 듯 자연스럽게 말했다.“혹시 유흥업소 간 거 때문에 그런 거야?”그 말에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강진혁이 허진호를 봤고 허진호가 본 사람이 정말 이소희라면 강진혁도 그녀를 봤을 가능성이 높았다.그리고 이소희가 그렇게 두려워했던 사람이 바로 강진혁이었다는 내 의심이 맞다면...나는 머릿속을 정리하며 그의 말을 받아쳤다.“역시 남자들은 다 거기서 거기네요. 그런 곳은 꼭 가봐야 속이 시원해요?”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난 일 때문에 갔어.”“허 팀장님도 똑같이 말하던데요. 근데 여자 친구가 안 믿고 난리를 쳤대요.”나는 꽃을 들어 올려 코끝에 가져가 향을 맡으며 시선을 피했다.향은 좋았지만 지금 내 기분과는 정반대였다.그러다 그가 갑자기 말을 돌렸다.“어제 드래곤킹에서 좀 난처한 일 겪었다며? 왜 나한테 연락 안 했어?”그 말을 듣자마자 등골이 싸늘해졌다.어떻게 이렇게 태연하게 묻는 걸까?그가 배후에 숨어져 있던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면 정말 그의 걱정 어린 태도에 속아 넘어갈 뻔했다.하지만 나는 이미 그가 주범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가 연기를 한다면 나도 맞춰줘야 했다.아직은 그를 자극할 때가 아니니까.그래서 나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직접 해결했어요. 굳이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나는
나는 준비실에서 차를 따르다가 무심코 동료들에게 물었다.“허 대표님은 오늘 안 나오셨나요?”내 말에 몇몇이 입을 꾹 다물고 킥킥거리며 웃었다.나는 그 반응이 이상해서 눈썹을 살짝 올리며 되물었다.“뭐예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그러자 한 명이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얼굴이 엉망이 됐다네요!”“아무래도 여자 친구한테 할퀸 모양이에요.”“진짜 상상도 못 했는데 허 대표님 여자 친구가 그렇게 사나운 줄은...”“근데 솔직히 허 대표님이 유흥업소라도 갔다면 나 같아도 가만 안 뒀을걸요.”순식간에 사무실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고 다들 각자 한마디씩 보태며 떠들어댔다.그제야 나는 허진호가 오늘 회사에 안 나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얼굴이 엉망이 돼서 창피해서 못 나온 거겠지.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때리는 건 그렇다 쳐도 얼굴은 좀 봐줘야 하는 거 아니야?솔직히 나는 그냥 궁금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자마자 허진호가 먼저 선수를 쳤다.“지원 씨, 회사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다 헛소문입니다. 그런 일 없었어요.”그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가득했고 나는 모르는 척 능청스럽게 되물었다.“네? 무슨 일인데요? 제가 뭘 들었다는 거죠?”허진호는 순간 말을 멈추더니, 헛기침을 한 번 했다.“회사 갔다면서요? 아무도 얘기 안 해줬어요?”나는 일부러 능청을 떨며 대답했다.“아침부터 바빠서요. 무슨 일 있으셨나요?”그제야 허진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꺼냈다.“아, 됐습니다. 별일 아니에요.”하지만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모든 걸 털어놓기 시작했다.그리고 내가 들은 내용은 사무실 사람들이 떠들던 소문과 거의 똑같았다.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제가 지금 제일 후회하는 건 도대체 왜 여자한테 빠졌냐는 겁니다.”나는 순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그의 한탄이 어이없기도 했고 뭔가 귀엽기도 했다.그래서 나는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그럼 이제 남자를 좋아해 보시려고요?”그러자 허진호도 장단을
나는 놀란 채로 그를 바라봤다.“강유형, 너...”그는 천천히 입가를 닦더니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나는 순간 따라가야 하나 망설였지만 끝내 발을 떼지 않았다.그냥... 이대로 두는 게 맞을 것 같았다.그래야 그도 이제 완전히 포기할 테니까.“저를 원망하진 않겠죠?”강유형이 떠난 후 뒤에서 배성재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천천히 돌아봤다.배성재는 문가에 서 있었고 그의 시선은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강유형이 토한 피가 아직 마르지 않은 채 얼룩져 있었다.“저 사람이 계속 지원 씨를 괴롭히는 것 같아서 도와주고 싶었어요.”나는 짧게 대꾸하며 손에 들고 있던 옷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옷 갈아입고 이제 가세요.”배성재는 말없이 옷을 받았다.그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서 손에 작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그 안에는 그가 입었던 더러워진 옷이 담겨 있었다.그는 그대로 나가지 않고 손수건을 꺼내더니 현관 앞 바닥에 묻은 피를 닦기 시작했고 나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마침내 문이 닫히고 그가 떠났고 나는 그제야 소파에 몸을 던지듯 주저앉았다.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앉아 있다가 결국 지쳐서 그대로 소파에 누워버렸고 나는 그렇게 밤을 보냈다.그런데 꿈속에서도 나는 계속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봤다.강유형이 내 앞에서 피를 토하는 모습.그 붉은 피가 마치 내 가슴 한복판에 떨어지는 듯한 느낌.그 꿈에 시달리며 나는 밤새 뒤척였다.그리고 다음 날 내가 눈을 뜨자마자 창문으로 쏟아지는 강한 햇살이 눈을 찔렀다.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면대로 향했다.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 그리고 옷 위에 묻어 있는 이미 말라붙은 핏자국...나는 조용히 물티슈를 집어 들었다.그리고 하나하나 천천히 핏자국을 닦아내기 시작했다.마치 그것이 내 삶에서 강유형의 흔적을 지우는 과정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내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용준호에게서 전화가 왔다.“들었어. 어제 우리 쪽에서 사고 났다며?”내가 찾기도 전에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강유형, 네가 어떻게 내가 사고 난 걸 알았지?”그는 내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문기둥에 기대섰다.“당연히 알지. 왜냐하면...”그는 말하다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내가 사람을 붙여서 널 지켜주게 했거든.”지켜준다고? 이건 지켜주는 게 아니라 감시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그의 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치자 나는 이유 모를 불쾌감이 몰려왔다.그래서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비꼬듯 말했다.“네가 붙인 사람이 그렇게 실력이 있다면 내가 그렇게까지 위험한 순간에 처했을 때는 어디 있었던 거야?”“그 부분은 내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놈은 잘랐어.”강유형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그는 내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덧붙였다.“그리고 지금 누가 널 해치려 했는지 조사 중이야.”“잘됐네.”나는 짧게 대꾸하며 팔짱을 꼈다.“그럼 네가 그걸 알아내면 나한테도 알려줘.”강유형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피곤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지쳐 보였다.하지만 나는 그와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더군다나 지금 내 집 안에는 또 다른 손님이 있었으니까 말이다.“강유형, 늦었어. 인제 그만 돌아가.”나는 단호하게 말했으나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집에 가고 싶지 않아.”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고 그러자 그는 낮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지원아, 네가 떠난 이후로... 난 집에 들어가는 게 너무 싫어졌어.”그의 입가에 맺힌 쓴웃음은 가슴 한구석을 묘하게 찌르는 기분이었다.“네가 있을 때는 몰랐어. 네가 없는 집이 이렇게 공허한 곳일 줄은... 집에 들어가면 온통 적막하고 부모님도 서로 말이 없고 예전처럼 따뜻한 느낌이 하나도 안 남았어.”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그렇게 만든 게 누구 때문인데?“사실, 예전엔 이런 게 얼마나 소중한지도 몰랐어.”그는 허탈하게
“...”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고 얼굴이 뜨거워졌다.조금 전까지 내가 그를 떠보려 했는데 오히려 당하고 말았다.그는 겉으로 보기엔 진지하고 무심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은근슬쩍 던지는 말은 전혀 초보자가 아니었다.이 남자, 예상보다 훨씬 노련한데?나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태연한 척 입꼬리를 올렸다.“착각하지 마세요.”나는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TV가 켜진 거실로 향했다.그는 여유롭게 식탁을 정리한 뒤 내가 뿜어낸 죽이 튄 옷을 간단히 닦고 설거지를 시작했다.그러고 부엌까지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서야 내 쪽으로 걸어왔다.“화장실 좀 써도 될까요?”그의 정중한 태도에 나는 무심하게 손짓했다.“맘대로 쓰세요.”그런데, 바로 이어진 말이 내 손을 멈추게 했다.“샤워도 좀 해야겠네요.”나는 즉시 그의 얼굴을 바라봤고 그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태연하게 서 있었다.마치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한다면 그건 내 문제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머리카락을 보았다.아직도 죽이 튀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그제야 나는 생각을 바꿨다.‘아... 샤우할만 하네.’그래서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그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갈아입을 옷 있나요?”나는 그제야 그가 처음부터 이걸 의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순간적으로 거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덧붙인 말이 내 결정을 흔들어 놓았다.“헌 옷이라도 괜찮아요.”그는 진정우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도 분명했다.내 집에 남자의 옷이 있다면 그건 당연히 진정우의 것일 테니까.나는 그를 노려봤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이건 완벽한 연기였다.그러니까 내가 괜한 의미를 부여하면 오히려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상황이었다.나는 내심 한숨을 쉬며 억지로 무덤덤한 척 대답했다.“찾아볼게요.”나는 옷장을 열어 진정우의 옷을 손에 들었다.그 순간 나는 마음이 매우 복잡해졌다.이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