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겠어요.” 나는 아줌마를 보며 인사했다.“아줌마, 저희 이만 가볼게요.”아줌마는 내 얼굴빛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듯, 잠시 위층을 바라봤다. 아마 삼촌과 나눈 대화가 궁금했던 것 같았다. 그래도 굳이 붙잡지 않고 “조심해서 가” 하고 배웅해 주었다.나는 진정우와 함께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려고 하자 진정우가 내 손을 붙잡았다.“왜 그래요?” “별거 아니에요. 부모님 얘기가 나왔거든요.” 나는 숨기지 않고 답했다.“혹시 사고 얘기 물어보신 거예요?” 그는 바로 눈치챘다.“네, 사실은... 정우 씨 영향도 좀 받았죠. 정우 씨의 이야기를 듣고 제 가족사도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나는 약간 자조적으로 웃었다.“그럼 결과는요?” 그가 다시 물었다.삼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차에 시동을 걸고 조용히 답했다.“단순한 사고였대요.”차가 삼촌 집을 벗어나자 나는 말을 덧붙였다.“현장 보고서와 부검 결과도 있고요.”진정우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차에 앉아 있었고 어느덧 도심의 화려한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사람이 붐비는 거리라 교통이 막혀 차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신호등에 걸린 사이, 나는 침묵을 깨며 물었다.“오늘 저녁 드셨어요?”“아니요, 아직이요.” 진정우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오늘 고생 많았으니까 저녁은 제가 살게요.”“좋죠.” 그는 거절하지 않고 흔쾌히 받아들였다.나는 주차할 곳을 찾아 차를 세운 후, 차에서 내려 붐비는 길거리 음식 노점을 둘러봤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했다.“오늘 여기 있는 거 전부 마음껏 드세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내 몸을 툭 치고 지나갔다. 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거린 나는 본능적으로 진정우의 옷깃을 잡아 그의 쪽으로 넘어갔다.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진정우의 옷깃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 장면은 마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연출이었고 그의 얼굴이 바로 내 앞에 있었다. 코끝이 맞닿고 조금만 움
손잡기, 포옹, 키스는 항목별로 따로 비용을 받는다는 것이 내가 소개팅남과 했던 약속이었다.지금 진정우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아마 그날 밤 그가 소개팅남을 때려눕힌 후 뒷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 일을 내게 언급한 적이 없었다. 정말 이 남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그는 나와 실제로 키스하지는 않고 대신 내 손을 잡아끌며 인파를 헤치고 달리기 시작했다.북적이는 도심에서 함께 뛰는 것은 내게도 처음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우리 둘이 왜 뛰는지 의아해했지만 알아서 길을 비켜주었다.붐비는 거리에서 사람들은 양옆으로 비켜섰고 우리는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달렸다. 진정우가 내 손을 잡고 가끔 나를 돌아보는 모습이 정말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불어왔다. 그렇게 나를 이끌고 달리는 진정우를 바라보자 문득 그와 함께 어디론가 도망치는 기분이 들었다.한참을 뛰다 보니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고 진정우는 내 걸음에 맞춰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멈춰 섰다.나는 헐떡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었고 진정우 역시 숨이 거칠었다. 그는 여전히 내 손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갈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진정우와 함께 이 순간을 공유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설렘을 주었다.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 다 숨이 점차 가라앉자, 나는 그가 아직도 내 손을 놓지 않고 있는 걸 알아챘다. 그의 목젖이 한번 꿀꺽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그 순간, 공기가 묘하게 달아올랐고 나는 심장이 더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목이 바싹 말라오는 긴장감 속에 겨우 말을 꺼냈다.“저기... 왜 저를 잡고 뛰어왔어요?”“안 뛰면... 사람들 앞에서 키스해야 했을 텐데요.”진정우의 말에 얼굴이 새빨개졌다.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의 손을 힘껏 빼내려 했지만 그는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그의 발을 살짝
“자.” 진정우가 자신이 들고 있던 탕후루를 내 입 가까이 들이밀었다.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탕후루를 더 가까이 내밀었다. 마치 내가 한 입 먹지 않으면 끝낼 생각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할 수 없이 입을 벌려 한입 베어 물었다. 달콤하면서도 새콤한 맛이 느껴졌고 확실히 오리지널 맛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솔직히 나쁘지 않았지만 내가 먹고 있던 과일 탕후루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맛은 아니었다.진정우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 때문에 맛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정말 맛있네요.”그러자 진정우가 내가 들고 있는 탕후루를 가리키며 말했다.“지원 씨 것도 궁금한데요.”나는 반사적으로 내 탕후루를 뒤로 숨기며 마치 소중한 걸 빼앗길까 봐 조심하는 어린아이처럼 굴었다.그러자 진정우가 웃으며 말했다.“한 입만 먹어볼 건데 뭘 그렇게까지... 그럼 너무 소심해 보이잖아요.”그 말에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한 입 정도 줄 수 있지 않은가 싶어서 탕후루를 다시 꺼냈다. 내가 선택한 탕후루는 작은 과일들이 다섯 알씩 담긴 것이었고 각기 다른 맛이 있었다.“자, 여기서 하나 고르세요.”하지만 그는 내가 들고 있는 것을 보지도 않고 내가 먹고 있던 탕후루를 가리켰다.“저는 이걸로 할게요.”나는 잠시 말이 막혔다. 그건 내가 이미 한 입 먹은 거였다.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진정우는 고개를 내밀어 내가 들고 있는 탕후루에서 작은 감 하나를 베어 물었다. 그가 먹고 나서 탕후루를 보니 남은 과일은 딱 한 알뿐이었다. 어쩐지 먹기도 뭐하고 안 먹기도 뭐한 기분이었다.그때 진정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남은 마지막 한 알을 내려다봤다. 그것은 설탕 코팅이 된 청포도라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이었다.버리기 아까워 마지막 청포도를 입에 넣고 재빨리 씹으려는 찰나, 고개를 들어 보니 진정우가 돌아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나는 갑
나는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다.진정우는 내가 아이스크림을 고르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왜요, 마음에 안 드세요?” 나는 일부러 물었다.“여자들이 이런 걸 너무 많이 먹으면 건강에 안 좋아요.” 진정우가 진지하게 말하자 나는 웃으며 되물었다.“정우 씨, 여자들에 대해 꽤 잘 아시네요. 정말 연애 경험 없으신 거 맞아요?”“네, 없어요.” 진정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나는 그를 바라보며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여동생이 있어서 여자들에 대해 기본적인 건 조금 알죠.” 그의 말에 나는 숟가락을 잠시 멈췄다.여동생이 있다고? 하지만 한 번도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그가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친여동생이에요. 부모님이 같은.”나는 시선을 피하며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었다.“한 번도 얘기하신 적 없잖아요.”“얘기할 기회가 없었거든요.”진정우도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었고 그가 다시 얼굴을 찡그리는 걸 보니 이걸 좋아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역시 강유형도 이런 종류의 디저트를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때도 “이런 건 몸에 해로울 뿐”이라며 불평했었다.갑자기 그때가 떠오르며 기분이 살짝 상했다.“억지로 드시지 마세요. 다른 거 시켜드릴게요.”“아니에요, 괜찮아요. 좀 차가운 것뿐이라서요.” 진정우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차가운 거 드시면 속이 불편하실 텐데요.”나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작은 반항의 의미로 침묵을 지켰다. 진정우도 내 마음을 알아챈 듯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었다.그때 내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지원아?”고개를 돌리니 신지태가 예쁘게 화장한 여자와 함께 나를 보고 있었다.“지태 오빠, 여기서 보네.” “혼자 아이스크림 먹고 있었구나.” 신지태는 아직 진정우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그 순간 진정우의 숟가락이 내 그릇에 들어왔다. 그는 내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
나는 신지태 곁의 여자가 누구인지 굳이 묻지 않았다. 그녀는 옷차림과 화장을 보면 신지태의 정식 여자 친구라기보다는 스쳐 가는 사람임이 분명했다.신지태가 떠난 후, 다시 내 아이스크림 그릇을 보니 이미 진정우가 다 먹어 치운 상태였다.“다른 거 더 먹으러 갑시다.”진정우는 전혀 사양할 줄 몰랐다.나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좋아요.”진정우는 나를 이끌고 국수를 파는 가게로 갔고 두 그릇을 시켰다. 이번엔 내 것을 빼앗지 않았다. 이건 따뜻한 음식이니까.알고 보니 진정우가 정말 아이스크림을 좋아해서 먹은 게 아니라, 내가 너무 많이 먹을까 봐 신경 쓴 것이었다.이 사람, 약간 얄미운 구석은 있지만 나름 진심으로 챙겨주고 있는 건 분명했다.국수를 다 먹고 나서 우리는 계속 거리를 걸었다. 강아지와 고양이를 파는 가게도 있었고 화분을 파는 가게도 있다. 그러다 내가 작은 화분 두 개를 사서 진정우에게 주었다.“방이 너무 삭막하니까 꽃을 선물하고 싶어서요. 조금은 따뜻한 느낌이 들게.”“내가 있는 걸로 부족한가 봐요?”그가 웃으며 말했다. 충분하기는 했지만 인정하기 싫었다.“그럼 향기나 풍기게 놔두세요. 행운이 따를지도 모르잖아요.”내가 웃으며 말하자 진정우도 따라 웃었다.그의 웃음이 뭔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져서 나는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말하지 마세요.”진정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용히 꽃을 들고 나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우리는 밤 12시가 될 때까지 거리를 누볐다.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다.진정우가 내일 일찍 출근해야 할 텐데 걱정이 되어 말했다.“우리 이제 돌아가요.”“아직 더 보고 싶은 거 없어요?”그가 물었다.“아니요, 슬슬 피곤하네요.”나는 일부러 하품하며 말했다.그와 함께 돌아오는 길, 나는 계속 주변의 다양한 먹거리와 작은 소품들에 시선을 빼앗겨 그의 표정을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러다 예쁜 생화 액세서리를 파는 가게를 발견하고 장난스럽게 하나를 집어 머리에 얹었다
문 앞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얼어붙은 표정을 한 사람은 강유형이었다.우리가 헤어진 후로 만날 때마다 이렇게 서로의 피를 거꾸로 쏟게 하는 장면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나는 지금 진정우와 웃으며 장난을 치고 있고, 그 곁에는 조나연이 서 있었다.조나연과 관계를 정리했다면서 이렇게 떡하니 같이 있다니... 남자의 말은 역시 믿을 게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잠시 멍하니 있던 나는 시선을 거두고 강유형을 보지 않기로 했다. 괜히 신경 쓰면 속만 상할 테니까.진정우도 마치 아무것도 못 본 척, 내 손을 잡으며 핸드폰을 빼앗지 않고 다정하게 말했다.“예쁠 때 찍어주세요.”그의 말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러 생각이 들게 했고 마치 오래된 연인 같은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그러자 강유형이 두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윤지원,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그는 재수 없고 무례하게 말을 건넸다. 조나연이 서 있는 자리에서 나를 끌어내려는 그의 태도는 조나연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지금 바빠.”정말 바빴다. 지금은 진정우 곁을 지키며 그의 주사를 챙겨줘야 하니까.그런데 강유형은 내 팔을 잡으려 손을 뻗었고 그보다 더 빨리 진정우가 그의 손을 막아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부딪치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둘은 아무 말 없이 기싸움을 벌였지만, 이렇게 계속 가면 결국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진정우는 지금 링거를 맞는 중이라 무리하게 싸우다가는 링거를 다시 맞아야 할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나는 이 상황을 말리지 않으면 더욱 악화될 것 같아 조용히 옆에 서 있던 조나연을 쏘아보며 말했다.“저 사람 좀 데리고 가줄래요?”조나연은 잠시 주저하다가 내 시선을 피할 수 없었는지 움찔했다. 그러고는 강유형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유형 씨, 나 좀 아파. 우리 빨리 가서 주사 맞자.”조나연도 링거를 맞으러 온 건가? 임산부가 약을 맞는 일은 흔치 않은데, 혹시 태아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조나연과 간호사의 대화가 끝나고서야 오늘 그녀가 놀이공원에서 넘어져서 태아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걸 알게 됐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는데 이게 누구 탓이겠나?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조나연이 링거를 맞기 위해 강유형과 함께 내 앞에 앉았다. 오늘 밤 뭔가 일을 벌이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앉아서 한동안 말이 없었고 나와 진정우도 그를 신경 쓰지 않는 듯 행동했다.하지만 강유형이 조용할 리가 없었다. 겨우 몇 분의 정적이 흐르고 나서 그가 입을 열었다.“오늘 저 사람을 집에 데려간 이유가 뭐야?”사실 그가 이 질문을 꺼내기 전부터 오늘 일로 그가 미쳐 날뛸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내 새로운 시작을 알리려는 거야.”강유형이 비웃으며 진정우를 바라보았다.“이 사람하고?”“그래, 이 사람이랑.”나는 진정우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강유형이 헛웃음을 지었다.“넌 거짓말을 할 때마다 귀가 빨개지는 버릇이 있잖아. 그걸 고치고 나서 거짓말을 해.”그 말에 순간 당황했지만 나는 손이 귀 쪽으로 가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지금 흔들리면 진정우와 함께하는 이 연극이 모두 무너질 테니까.나와 강유형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에 깃든 짜증스러운 미소는 마치 '네 거짓말 따위 믿지 않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때 진정우가 한마디 툭 던졌다.“지원 씨는 화가 나도 귀가 빨개져요.”강유형이 진정우를 째려보았지만 진정우의 말 덕분에 나는 조금 여유가 생겼다. 사실 나는 화가 날 때도 귀가 붉어지는 편이다. 진정우가 그걸 어떻게 알아챘는지 궁금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나는 강유형을 보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 널 보니까 또 귀가 빨개지네.”강유형은 다시 화기 치밀어 올랐지만 말을 꺼내진 않고 비웃음을 지었다.“네가 내 여자인 걸 잊지 마. 그냥 나를 화나게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그의 말이 참 뻔뻔하다고 느껴졌다. 그의 ‘내 여자’라는 표현은 의도적으로 조나연의 신경을
진정우의 몸이 잠시 떨리는 게 느껴졌다. 아마 내가 먼저 그를 키스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의 손이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안았다. 나는 그의 입술에서 살짝 떨어지며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주사 잘 맞은 보상이에요.”그 말을 하니 문득 강유형이 아팠을 때가 떠올랐다. 그는 주사를 몹시 무서워해서, 아파도 웬만하면 병원에 가지 않으려 했다. 주사를 맞는 건 거의 그에게 고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주사를 맞으러 갈 때마다 어린아이처럼 겁을 내며 거의 울먹이기까지 했다.그때마다 나는 아이를 달래듯 그를 다독였고 심지어 그가 주사를 맞는 동안 그의 눈을 가려 주기도 했다. 그가 아픔을 견디라고 내 팔을 물게 했던 적도 있었다. 강유형이 주사를 맞을 때마다 마치 커다란 임무를 완수한 듯 안도감을 느끼곤 했고 주사를 다 맞고 나면 그는 보상으로 나에게 춤을 추라든가, 노래를 부르라든가, 무언가를 사 달라며 요구하곤 했다. 마치 개구쟁이가 된 것처럼 말이다.그에 비해 진정우는 너무나도 조용하고 차분하게 주사를 맞았고 오히려 내가 지루하지 않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시간이나 보내라며 나를 걱정해 주기까지 했다. 이렇게 비교가 되니, 강유형은 나를 여자 친구라기보다는 개인 비서로 여겼다는 생각이 들었다.진정우는 내 말을 듣고 허리를 감싼 손에 더 힘을 주며, 낮고 부드럽게 속삭였다.“그럼 앞으로는 자주 아파야겠네요.”잠시 멈칫했지만, 그의 농담에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기 전에 바로 대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게 아니라...”그때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렇게 하니까 이제 속이 편해? 이제 우린 끝났다고 생각하는 거야?”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그는 화가 난 듯 보였지만, 목소리만은 차분하게 되물었다.“못 볼 걸로 할게. 우리 다시 시작하자.”이게 얼마나 뻔뻔한 말인지. 나는 그에게 쏘아붙였다.“정말 어이없네!”그리고 미련 없이 병원을 나섰다. 진정우의 손은 여전히 내 허리를 단단
진정우와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진소영이 마당의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봤다. 바람에 치맛자락이 살짝 날리며 그 장면이 마치 꿈처럼 비현실적이었다.진소영은 책에 몰입해 있었고 우리가 내린 것도 몰랐다. 이때 도성운이 크게 외쳤다.“소영아, 누가 왔는지 봐봐!”“성운 오빠, 엔진 소리가 어찌 크던지 단번에 오빠인 줄 알았어요.”진소영이 웃으며 말했고 그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도성운은 조금 어색해하며 머리를 긁었다.“나만 온 거 아닌데. 다른 사람도 있어.”진소영은 책을 계속 읽으며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도성운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나는 가볍게 그를 막으며 사뿐사뿐 진소영에게 다가갔다.“이 책 저번에 같이 읽었잖아?”지난번에 봤던 오래된 연애 소설 책이었다. 진소영은 놀란 듯 고개를 돌렸고 나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언니!”나는 환하게 웃었고 진소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내 뒤에 있는 진정우를 보고 급히 책을 던져두고 그에게 달려갔다.“오빠!”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진정우가 진소영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게 되었다.그는 평소에도 진소영을 많이 챙겼다. 나는 그들 대화를 방해하지 않고 진소영이 읽던 책을 집어 들었다. 「링」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책이 많이 갈라지고 색이 바래 있었기에 분명 여러 번 읽은 책일 거다.내용이 궁금해져서 책을 넘기다 진소영이 다가와서 책을 빼앗으려 했다.“안 돼요. 보지 마세요.”그녀는 책을 빼앗으며 말했다.“왜? 이 책에 비밀이라도 있어?”진소영은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그럴 리가요. 언니는 오빠랑 연애 중인데 이런 소설을 보면 안 되죠.”그녀의 얼굴이 빨개지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아, 그럼 연애 초보인 너에게 딱 맞는 교과서겠네.”“언니!”진소영은 얼굴을 붉히며 나를 쏘아봤다.나는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책을 그녀에게 돌려줬다. 그때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들어와 물 좀 마셔.”나는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진정우가 물을 꺼내
비행기가 착륙할 때쯤, 이미 해 질 무렵이었다.저녁노을이 빨갛게 물든 광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이 떨렸다.“이건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야!” 내가 감탄하며 말했다.“나도 그래.” 그러자 진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하지만 나는 이제 별로 감동이 없었다.그런데 차에 앉아 그의 SNS를 보니 조금 전에 본 노을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글귀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네가 옆에 있어서.]한눈에 보면 사진과 글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지만 비행기 안에서 우리가 나눈 대화를 떠올리니 그 의미가 확 와닿았다. [이건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야, 네가 옆에 있어서.]진정우는 이렇게 사랑을 표현하는 데 아주 능숙하다.“형, 이번에 결혼식 하려고 돌아온 거야?” 차를 운전하던 남자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는 진정우의 친구였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우리를 데리러 왔다.“아니. 이번은 아니야.” 진정우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말은 다음에 한다는 뜻인가?“형수님 미인이시네.” 그 남자가 나를 몇 번이나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그럼.”진정우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어쩐지 부끄러워졌다.“형수님 나는 도성운이라고 해요“ 그 남자가 친근하게 자기를 소개했고 나도 웃으며 말했다. “저는 윤지원이라고 합니다.”“알아요. 알아요.” 도성운은 두어 번 반복하며 말했다. “소영이가 매일 말하더라고요. 우리 마을 사람들은 다 알죠. 형수님 이름이 윤지원이란걸.”나는 그제야 부끄러움을 좀 떨쳐내고 있었는데 도성운은 또 다른 말을 덧붙였다.“그래요? 그럼 앞으로 아마 자기 소개할 일 없겠네요.”“그러묭. 이렇게 예쁜 분이 오면 다들 한 번에 이름을 기억할 수밖에 없어요.” 계속되는 칭찬을 들으니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게 현명할 것 같았다.그런데 진정우가 내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보니까, 네가 먼저 분위기 잡은 것 같네.”도성운은 진정우를 많이 존경하고 따라 배우고 싶
그가 진지하게 내게 농담하는 건가?하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잖아!그래서 나는 그가 진지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고 오히려 순수하지 않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가 싶었다.“안 믿으면 한번 해봐?”진정우의 뜨거운 시선에 내 얼굴이 또다시 붉어졌다.나는 그를 한 번 꼬집으며, 일부러 화난 척했다.“너 계속 듣고 싶어? 안 듣고 싶으면 말 안 할 거야.”“듣을거야!”나는 창밖을 보며, 강진혁이 그때 나에게 했던 말을 진정우에게 전했다.그는 내 마음을 아주 잘 이해한 듯 물었다.“너 걱정되는 거야?”“응, 하지만 나는 강유형이 걱정돼서 그런 게 아니야. 회사가 걱정이야.”내가 그렇게 바로잡자, 진정우는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말했다.“알아, 너는 이 일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할 거라고 느끼는 거지?”진정우는 정말 나를 너무 잘 안다.“너의 걱정이 틀린 건 아닐 거야. 혹시 강진혁이 돌아오는 것도 이미 다 계산된 일일 수도 있어.”진정우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그럴 수도 있어?”내가 의심하고 있었던 부분을 진정우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니, 조금 충격을 받았다. 강진혁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잘 안다. 그는 늘 나와 강유형을 위해 양보하며, 언제나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으니까.게다가 강진혁은 4년 전에 회사를 떠나고 얼마 전에 돌아왔다. 그렇게 회사를 걱정한다면 굳이 4년 전에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예전에는 몰라도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을 거야.”진정우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지원아, 사실 너는 남자들에 대해 잘 몰라.”나는 그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그럼 남자의 입장에서 말해봐.”“강진혁이 너 좋아하지?”진정우는 직설적으로 말했다.“응, 나도 이제야 알았어. 예전엔 몰랐고 이번에 돌아와서야 알게 된 거야.”나는 사실대로 말했다.“그는 너를 오래전부터 좋아했어. 강유형이랑 비슷한 시기에 좋아했을 거고 그 감정은 강유형보다 더 강했을 수도 있어.”진정우는 아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걸 물어볼 필요도 없잖아?누구나 속고 사는 걸 좋아하진 않으니까.나는 그를 바라보며 민감하게 물었다.“혹시, 앞으로 나를 속이려고 하거나 이미 나한테 뭔가 숨긴 거 있어?”진정우는 잠시 침묵했다.“...아니.”그 두 마디가 진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나는 확실히 내 입장을 밝혔다.“너무 싫어.”그러자 그의 목젖이 조금 움직였다.“알겠어.”만약 그가 나를 속인다면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명확하게 말하고 싶었다.그때 공항 대기실에 비행기 탑승 안내가 나왔고 해외행 비행기였다.나는 본능적으로 강유형을 떠올렸다. 그가 짐을 끌고 보안 검색대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해외에 무엇을 하러 가는 걸까?사업 얘기라도 하러? 아니면... “우리 이제 보안 검색대 쪽으로 가자.” 진정우가 내 생각을 끊으며 말했다.“어!” 나는 대답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나는 잠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강유형에게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진정우가 알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진정우의 표정에서는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그럴수록 내 마음은 더 불안하고 조금 죄책감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그의 손을 잡았다.“가자.”우리는 보안검색을 무사히 통과하고 비행기도 무사히 탑승했다. 비행기 모드로 전환하기 전, 내 휴대폰에 한 통의 미처 읽지 못한 메시지가 도착했다.강유형이었다.[안전 비행.]그 문자를 보며, 예전에 그가 출장을 갈 때마다 내가 보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그때마다 나는 항상 그렇게 보내곤 했다.어느 날, 강유형은 나를 비웃으며 말했다.“너 그런 말 너무 촌스럽잖아. 다음엔 다른 말로 보내봐. 새로 배운 거 있으면 알려줘.”그 이후로 나는 그 말을 더 이상 보내지 않았다.[안전 비행.]그 문구는 평범하고 진부하지만 내겐 그 무엇보다 중요한 말이었다.부모님이 사고를 당한 이후로, 나는 가까운 사람과 헤어질 때마다 늘 그 말을 떠올린다.다시 볼 수 있을지라는 두려움이 함께 밀려오기 때문이다.하지만 강유형은 내 마음을
“여긴 공항이야, 사람들이 많고 아이들도 있는데.” 진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고 있어.”“그런데도...” 내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러자 진정우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하고 싶어.”그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강유형을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질투하는 거겠지.진정우는 강유형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그런 걸까?그 생각이 들자 나는 결심하고 눈을 감았다. 심장은 요동치며 공항 대기실에서 진정우의 입맞춤을 기대했다.하지만 그의 입술이 다가오는 대신 내 손에 무게감이 느껴졌다.눈을 뜨고 보니 내 손에 작은 가방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이게 뭐야?”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진정우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내가 열어보라고 손짓했다.내가 의아한 마음으로 가방을 열자 그 안에는 두 장의 카드와 하나의 증명서가 들어 있었다.그 카드와 증명서는 그가 전해주고 싶었던 것들이었다.“이게 무슨 의미야?” 나는 다시 물었다.진정우는 녹색의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이건 내가 군 복무를 마친 증명서야. 그리고 이건 내 열정이 담긴 헌혈 증서야. 이 카드들은 내 전 재산이야.”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전 재산을 보여주는 장면이 떠올랐다.진정우는 내게 재산을 넘기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신념까지도 함께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특히 빨간 헌혈 증서를 보자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이걸 왜 준비한 거야?” 나는 조금 울컥하며 물었다.“너에게 주는 믿음이야. 이게 사랑 보험보다 더 실용적이야.”진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강유형과 사랑 보험에 가입했던 사실을 안 것 같았다.하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내게 주는 것이 모든 것 같았다.“이 두 개는 내가 가질게. 하지만 카드는 네가 갖고 있어.”나는 그가 준 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고 돈에 욕심이 없다. 만약 돈에 눈이 먼 여자라면 나는 강유형과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진정우는 카드를 받지 않고 조금 난처한 듯 말했
“네, 누구세요?”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무심코 강유형을 쳐다보았다.그는 나를 보지 않고 혼자서 멀리 있는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저는 하트시그널 보험사의 A8338번 직원입니다. 4년 전, 윤지원 씨와 강유형 씨가 저희 회사 사랑 보험에 가입하셨고 이제 보험 만기일이 다가와 관련 정보를 확인하려고 연락드렸습니다.”이 말을 듣고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본능적으로 진정우를 보았다.그는 내 옆에서 자리를 피하고 내가 전화를 받을 때는 멀리 떨어져 앉았다.그는 내게 충분한 개인 공간을 주고 있었다.진정우는 정말 세심하다. 나에게 필요한 안전감도, 여유도 모두 제공해 주고 있었다.“실례지만 두 분 지금 연애 중인가요, 아니면 결혼하셨나요?” 상대방이 조심스레 물었다.그 말에 나는 다시 강유형을 쳐다보았다. 그는 전화를 받고 있었고 표정은 매우 심각해 보였다.“지원 씨?” 상대방이 내 대답을 기다리며 다시 물었다.나는 침을 삼키는 동작을 하며 대답했다. “네, 듣고 있어요. 저희... “‘이미 헤어졌어요’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강유형이 갑자기 나를 바라봤다.그 순간, 나는 피할 틈도 없이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우리는 그렇게 눈을 마주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원 씨?” 상대방이 또 나를 부르며 물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어봤다. “왜 남자 쪽은 묻지 않나요?”“묻긴 했습니다. 다른 동료가 강유형 씨와 연락 중입니다.” 그의 대답을 들으니 강유형 역시 이 전화를 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세상엔 정말 재밌는 일이 많다.나는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우리는 헤어졌어요.”“확실한가요?” 상대방의 말투가 불쾌하게 들렸다.나는 강유형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진정우를 쳐다보며 손에 낀 반지를 살펴보았다.“저는 이미 결혼했어요.”상대방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원 씨. 만약 강유형 씨도 같은 답을 하셨다면, 이 사랑 보험 계약은 보험 규정에 따라
내가 그런 말을 했지만 이건 사적인 일이 아닌가?진정우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 걸 알아차린 듯 바로 설명해 줬다. “내가 그 사람한테 말한 거야.”“아, 그렇구나.” 나는 대답하고 계속 죽을 먹었다. 그런데 두어 숟갈 먹고 나서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너 허 대표님하고 그렇게 친해? 내가 대신 휴가를 부탁했더니 대표님이 그냥 허락하고, 오히려 공손하게 나한테 말까지 했잖아?”진정우는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그렇게 친한 건 아니야.”“친하지 않다고? 내가 보기엔 마치 네가 그 사람의... 대표님 같아.”진정우가 한마디만 하면 허진호는 절대 거절할 리가 없어 보였다.“비슷한 거지.” 진정우가 의외로 그렇게 대답했다. “허 대표님이 나한테 새 제품을 개발해달라고 부탁하고, 내가 돈을 벌어줘야 하니까내가 말하면 거절할 수 없어.”대단하네!나는 마음속으로 존경을 표하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역시 자신감 넘치게 말한다. 이게 바로 진짜 실력이지.“우리 늦지 않았어?” 나는 밥을 다 먹고 물어봤다.“괜찮아. 늦으면 그냥 항공편 변경하면 돼.” 진정우는 정말 나를 방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이해가 안 돼서 물었다. “왜 그렇게 급하지 않아? 나 좀 재촉해줘도 될 텐데.”“네 마음대로 하게 하고 싶어.” 진정우가 또 닭살이 돋는 멘트를 하자 나는 당황해서 얼른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불만을 털어놨다. “어제 미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내가 준비했을 텐데.”“어제... 내가 말할 기회가 없었잖아.” 진정우의 말에 나도 순간 뜨끔하면서 얼굴이 빨개졌다.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진정우는 살짝 웃으며 내가 당황한 모습을 보며 평온하게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 천천히 해. 부족한 것 있으면 가서 사면 돼.”“일찍 말했으면 내가 준비 안 했을 텐데.” 내가 그에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진정우는 화내지 않고 또 한마디 했다. “근데 나는 네가 물건 정리하는 모습 보는 게 좋아.”“
“왜 안 받아?” 내가 무심코 물었다.“받을 거야.” 진정우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너는 자지 말고 일어나서 씻고 아침 먹어.”나는 깜짝 놀랐다.“아침 벌써 준비했어?”나는 그가 내 옆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정우는 이미 아침을 다 준비하고 내가 일어나지 않자 다시 침대에 돌아와서 나와 함께 공부한 거였다. 역시 뛰어난 사람은 항상 뒤에서 묵묵히 노력하는구나.“응, 내가 계란 죽을 끓였어. 일어나서 좀 먹어.” 진정우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사랑받는 느낌은 정말 좋다. 마치 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진다.진정우는 전화를 받으러 나갔고 나는 손을 이불에서 빼내며 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고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면서 한정판이라고 묘사했다.그리고 다시 SNS를 놀다가 잠시 후에야 일어났다. 그런데 진정우의 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별 신경 쓰지 않고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화장실에 들어가서야 나는 안리영이 준 약이 반 통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 전에 약을 4분의 1만 썼던 것 같은데 그럼 진정우가 사용한 건가? 언제였지?혹시 내가 자고 있을 때?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왜 아직도 안 씻었어?” 진정우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어색하지 않게 하려면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게 제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말이 나와버렸다. “너 기다리느라 그래.”진정우가 잠깐 멈칫하다가,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 분명, 내 말이 그에게 어떤 자극을 준 거였다. 나는 더 이상 아침에 뭔가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일부러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서둘러 씻고 그에게 말했다. “빨리 죽 끓여 놓고 나오는 대로 밥 차려줘.”“안 늦었어.” “지금 몇 시인데 아직도 안 늦었다고 해?” 내가 그를 비꼬며 말했다.“10시 비행기야, 시간 충분해.” 진정우의 말에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나는 원래 거울 속에서 그를 보고 있었는데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그
“알았어.” 진정우는 여전히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이 터졌다.“이제야 네가 왜 서른이 넘도록 연애를 안 했는지 알겠어. 네가 너무 재미없잖아.”“너도 내가 재미없다고 생각해?”그는 가볍게 내게 물었다. 연애라는 부분에서 그는 약간 둔한 면이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말했다.“내 말은 네가 여자 마음을 잘 달래주는 방법을 모른다는 뜻이야.”그는 몇 초 동안 조용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내 생각엔 달래는 건 속인다는 뜻이야.”그의 참신한 대답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럼 내가 널 달래줘야겠어?”진정우가 다시 물었다. 어떤 여자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다정함은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진정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나는 과거 강유형이 나를 대했던 방식을 떠올리며 말했다.“아니, 지금처럼 해. 난 너의 방식이 좋아. 너는 정말 특별하니까.”그의 품에 더 깊숙이 기대며 덧붙였다.“내가 프러포즈하면 받아줄 거야?”진정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말했다.“안 하면서 뭘 물어?”그 순간,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불 안에서 내 손을 꺼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만지며 말했다.“윤지원, 나와 결혼해 줄래?”순간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네 프러포즈이야?”“아니, 완전한 건 아니지만 맞기도 해.”그의 애매한 대답에 나는 그를 살짝 때리고 싶었다. 솔직히 내가 처음으로 프러포즈를 받을 거라고 상상했던 장면은 이런 게 아니었다. 한때 나는 내 인생 첫 프러포즈는 강유형이 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진정우였다.그 말을 들으니 얼마 전 강유형이 나를 위해 준비한 놀이공원 프러포즈 이벤트가 떠올랐다.나는 가지 않았지만 이후 몇몇 네티즌이 사진을 찍어 온라인에 올렸다. 그들은 그걸 단순히 오픈 이벤트의 리허설로 생각했겠지만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