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다.진정우는 내가 아이스크림을 고르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왜요, 마음에 안 드세요?” 나는 일부러 물었다.“여자들이 이런 걸 너무 많이 먹으면 건강에 안 좋아요.” 진정우가 진지하게 말하자 나는 웃으며 되물었다.“정우 씨, 여자들에 대해 꽤 잘 아시네요. 정말 연애 경험 없으신 거 맞아요?”“네, 없어요.” 진정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나는 그를 바라보며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여동생이 있어서 여자들에 대해 기본적인 건 조금 알죠.” 그의 말에 나는 숟가락을 잠시 멈췄다.여동생이 있다고? 하지만 한 번도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그가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친여동생이에요. 부모님이 같은.”나는 시선을 피하며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었다.“한 번도 얘기하신 적 없잖아요.”“얘기할 기회가 없었거든요.”진정우도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었고 그가 다시 얼굴을 찡그리는 걸 보니 이걸 좋아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역시 강유형도 이런 종류의 디저트를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때도 “이런 건 몸에 해로울 뿐”이라며 불평했었다.갑자기 그때가 떠오르며 기분이 살짝 상했다.“억지로 드시지 마세요. 다른 거 시켜드릴게요.”“아니에요, 괜찮아요. 좀 차가운 것뿐이라서요.” 진정우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차가운 거 드시면 속이 불편하실 텐데요.”나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작은 반항의 의미로 침묵을 지켰다. 진정우도 내 마음을 알아챈 듯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었다.그때 내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지원아?”고개를 돌리니 신지태가 예쁘게 화장한 여자와 함께 나를 보고 있었다.“지태 오빠, 여기서 보네.” “혼자 아이스크림 먹고 있었구나.” 신지태는 아직 진정우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그 순간 진정우의 숟가락이 내 그릇에 들어왔다. 그는 내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
나는 신지태 곁의 여자가 누구인지 굳이 묻지 않았다. 그녀는 옷차림과 화장을 보면 신지태의 정식 여자 친구라기보다는 스쳐 가는 사람임이 분명했다.신지태가 떠난 후, 다시 내 아이스크림 그릇을 보니 이미 진정우가 다 먹어 치운 상태였다.“다른 거 더 먹으러 갑시다.”진정우는 전혀 사양할 줄 몰랐다.나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좋아요.”진정우는 나를 이끌고 국수를 파는 가게로 갔고 두 그릇을 시켰다. 이번엔 내 것을 빼앗지 않았다. 이건 따뜻한 음식이니까.알고 보니 진정우가 정말 아이스크림을 좋아해서 먹은 게 아니라, 내가 너무 많이 먹을까 봐 신경 쓴 것이었다.이 사람, 약간 얄미운 구석은 있지만 나름 진심으로 챙겨주고 있는 건 분명했다.국수를 다 먹고 나서 우리는 계속 거리를 걸었다. 강아지와 고양이를 파는 가게도 있었고 화분을 파는 가게도 있다. 그러다 내가 작은 화분 두 개를 사서 진정우에게 주었다.“방이 너무 삭막하니까 꽃을 선물하고 싶어서요. 조금은 따뜻한 느낌이 들게.”“내가 있는 걸로 부족한가 봐요?”그가 웃으며 말했다. 충분하기는 했지만 인정하기 싫었다.“그럼 향기나 풍기게 놔두세요. 행운이 따를지도 모르잖아요.”내가 웃으며 말하자 진정우도 따라 웃었다.그의 웃음이 뭔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져서 나는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말하지 마세요.”진정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용히 꽃을 들고 나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우리는 밤 12시가 될 때까지 거리를 누볐다.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다.진정우가 내일 일찍 출근해야 할 텐데 걱정이 되어 말했다.“우리 이제 돌아가요.”“아직 더 보고 싶은 거 없어요?”그가 물었다.“아니요, 슬슬 피곤하네요.”나는 일부러 하품하며 말했다.그와 함께 돌아오는 길, 나는 계속 주변의 다양한 먹거리와 작은 소품들에 시선을 빼앗겨 그의 표정을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러다 예쁜 생화 액세서리를 파는 가게를 발견하고 장난스럽게 하나를 집어 머리에 얹었다
문 앞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얼어붙은 표정을 한 사람은 강유형이었다.우리가 헤어진 후로 만날 때마다 이렇게 서로의 피를 거꾸로 쏟게 하는 장면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나는 지금 진정우와 웃으며 장난을 치고 있고, 그 곁에는 조나연이 서 있었다.조나연과 관계를 정리했다면서 이렇게 떡하니 같이 있다니... 남자의 말은 역시 믿을 게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잠시 멍하니 있던 나는 시선을 거두고 강유형을 보지 않기로 했다. 괜히 신경 쓰면 속만 상할 테니까.진정우도 마치 아무것도 못 본 척, 내 손을 잡으며 핸드폰을 빼앗지 않고 다정하게 말했다.“예쁠 때 찍어주세요.”그의 말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러 생각이 들게 했고 마치 오래된 연인 같은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그러자 강유형이 두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윤지원,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그는 재수 없고 무례하게 말을 건넸다. 조나연이 서 있는 자리에서 나를 끌어내려는 그의 태도는 조나연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지금 바빠.”정말 바빴다. 지금은 진정우 곁을 지키며 그의 주사를 챙겨줘야 하니까.그런데 강유형은 내 팔을 잡으려 손을 뻗었고 그보다 더 빨리 진정우가 그의 손을 막아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부딪치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둘은 아무 말 없이 기싸움을 벌였지만, 이렇게 계속 가면 결국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진정우는 지금 링거를 맞는 중이라 무리하게 싸우다가는 링거를 다시 맞아야 할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나는 이 상황을 말리지 않으면 더욱 악화될 것 같아 조용히 옆에 서 있던 조나연을 쏘아보며 말했다.“저 사람 좀 데리고 가줄래요?”조나연은 잠시 주저하다가 내 시선을 피할 수 없었는지 움찔했다. 그러고는 강유형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유형 씨, 나 좀 아파. 우리 빨리 가서 주사 맞자.”조나연도 링거를 맞으러 온 건가? 임산부가 약을 맞는 일은 흔치 않은데, 혹시 태아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조나연과 간호사의 대화가 끝나고서야 오늘 그녀가 놀이공원에서 넘어져서 태아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걸 알게 됐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는데 이게 누구 탓이겠나?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조나연이 링거를 맞기 위해 강유형과 함께 내 앞에 앉았다. 오늘 밤 뭔가 일을 벌이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앉아서 한동안 말이 없었고 나와 진정우도 그를 신경 쓰지 않는 듯 행동했다.하지만 강유형이 조용할 리가 없었다. 겨우 몇 분의 정적이 흐르고 나서 그가 입을 열었다.“오늘 저 사람을 집에 데려간 이유가 뭐야?”사실 그가 이 질문을 꺼내기 전부터 오늘 일로 그가 미쳐 날뛸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내 새로운 시작을 알리려는 거야.”강유형이 비웃으며 진정우를 바라보았다.“이 사람하고?”“그래, 이 사람이랑.”나는 진정우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강유형이 헛웃음을 지었다.“넌 거짓말을 할 때마다 귀가 빨개지는 버릇이 있잖아. 그걸 고치고 나서 거짓말을 해.”그 말에 순간 당황했지만 나는 손이 귀 쪽으로 가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지금 흔들리면 진정우와 함께하는 이 연극이 모두 무너질 테니까.나와 강유형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에 깃든 짜증스러운 미소는 마치 '네 거짓말 따위 믿지 않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때 진정우가 한마디 툭 던졌다.“지원 씨는 화가 나도 귀가 빨개져요.”강유형이 진정우를 째려보았지만 진정우의 말 덕분에 나는 조금 여유가 생겼다. 사실 나는 화가 날 때도 귀가 붉어지는 편이다. 진정우가 그걸 어떻게 알아챘는지 궁금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나는 강유형을 보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 널 보니까 또 귀가 빨개지네.”강유형은 다시 화기 치밀어 올랐지만 말을 꺼내진 않고 비웃음을 지었다.“네가 내 여자인 걸 잊지 마. 그냥 나를 화나게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그의 말이 참 뻔뻔하다고 느껴졌다. 그의 ‘내 여자’라는 표현은 의도적으로 조나연의 신경을
진정우의 몸이 잠시 떨리는 게 느껴졌다. 아마 내가 먼저 그를 키스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의 손이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안았다. 나는 그의 입술에서 살짝 떨어지며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주사 잘 맞은 보상이에요.”그 말을 하니 문득 강유형이 아팠을 때가 떠올랐다. 그는 주사를 몹시 무서워해서, 아파도 웬만하면 병원에 가지 않으려 했다. 주사를 맞는 건 거의 그에게 고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주사를 맞으러 갈 때마다 어린아이처럼 겁을 내며 거의 울먹이기까지 했다.그때마다 나는 아이를 달래듯 그를 다독였고 심지어 그가 주사를 맞는 동안 그의 눈을 가려 주기도 했다. 그가 아픔을 견디라고 내 팔을 물게 했던 적도 있었다. 강유형이 주사를 맞을 때마다 마치 커다란 임무를 완수한 듯 안도감을 느끼곤 했고 주사를 다 맞고 나면 그는 보상으로 나에게 춤을 추라든가, 노래를 부르라든가, 무언가를 사 달라며 요구하곤 했다. 마치 개구쟁이가 된 것처럼 말이다.그에 비해 진정우는 너무나도 조용하고 차분하게 주사를 맞았고 오히려 내가 지루하지 않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시간이나 보내라며 나를 걱정해 주기까지 했다. 이렇게 비교가 되니, 강유형은 나를 여자 친구라기보다는 개인 비서로 여겼다는 생각이 들었다.진정우는 내 말을 듣고 허리를 감싼 손에 더 힘을 주며, 낮고 부드럽게 속삭였다.“그럼 앞으로는 자주 아파야겠네요.”잠시 멈칫했지만, 그의 농담에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기 전에 바로 대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게 아니라...”그때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렇게 하니까 이제 속이 편해? 이제 우린 끝났다고 생각하는 거야?”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그는 화가 난 듯 보였지만, 목소리만은 차분하게 되물었다.“못 볼 걸로 할게. 우리 다시 시작하자.”이게 얼마나 뻔뻔한 말인지. 나는 그에게 쏘아붙였다.“정말 어이없네!”그리고 미련 없이 병원을 나섰다. 진정우의 손은 여전히 내 허리를 단단
“어?”나는 잠시 멍해졌다. 다른 남자와 키스할 일은 거의 없었다. 강유형을 좋아했을 때도 내가 먼저 입맞춤을 시도한 건, 그가 아프거나 술에 취해 잠들었을 때 얼굴이나 손등에 살짝 닿았던 게 전부였다.입술을 맞댄 건 거의 없었고 강유형도 나를 키스할 때는 가볍게 얼굴이나 이마에 하는 게 전부였다.어느 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지원아, 우리 너무 익숙해서 그런지 너한텐 쉽게 입 맞추기가 어려워.”결국 그건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누군가 말했듯, 남녀 간의 진짜 키스는 서로에게 끌려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거라고 했다. 충동을 참는 건, 결국 사랑이 아니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전 ‘만약에’라는 접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진정우의 물음에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러자 그는 목울대를 잠깐 삼키는 듯했다. 그 눈빛은 단단하고 집요했다.“하지만 너무 궁금해서요.”그의 강렬한 눈빛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돌려보려 했다.“왜요? 혹시 여자한테 키스 당한 게 처음인가요?”“네.”그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몇 초 후, 나는 마치 나쁜 여자처럼 뻔뻔하게 말했다.“그럼 내가 보상해 줄까요?”“어떻게 보상할 건데요?”그의 대답에 순간 내가 주도권을 뺏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가 원하는 보상이 뭔지 알 수 있었다. 마음을 다잡고 결단을 내렸다. 그가 더 오해하지 않게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정우 씨, 우리 그저 연기하는 거였잖아요. 스킨십도 다 설정된 거였고요. 만약 이게 마음에 걸린다면 다른 사람을 찾을 수밖에 없겠네요.”“그럼 매일 다른 남자를 남자 친구로 바꿀 거예요?”그의 목소리는 싸늘하고 날카로웠다.나는 무덤덤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웃었다.“저도 이러고 싶진 않지만 정우 씨가 버티지 못하면 어쩔 수 없잖아요.”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온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우리 사이가 점점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정우 씨가 너무 순진한 거 알아요.
"저예요."복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순간적으로 계단 난간을 꽉 잡고 멈춰 섰다.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누그러졌다.잠시 후, 뒤돌아 올라가자 어두운 복도에 서 있는 진정우가 보였다.얼마 전 어색하게 헤어졌던 순간이 떠올라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지만 깜짝 놀란 건 사실이라 일부러 짜증 난 척하며 말했다.“이런 식으로 갑자기 나타나면 놀라는 거 몰라요?”“네.”그는 늘 그렇듯 짧게 대답했다. 그런 그의 태도가 어찌나 무심하게 느껴지는지 뭔가 더 말하려던 순간, 그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다음번엔 안 그럴게요.”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열쇠를 꺼내 문을 열려는데 열쇠가 자물쇠에 닿기도 전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도 진지했다.“오늘 밤은 제가 오해했어요.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게요.”응?내가 멍하니 돌아보자 그는 이미 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 나를 잠시 바라보며 말했다.“잘 자요.”입술이 떨렸지만 그의 문이 닫히고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앞으로... 라는 게 무슨 뜻이지?”사실 그가 말하는 뜻은 알고 있었다. 가짜 연인 관계를 끝내기 싫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이 관계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상처를 더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진정우는 여자 친구조차 사귀어본 적 없는 사람인데 나 때문에 억지로 연애를 흉내 내면서 소중한 첫 경험들까지 다 내주고 있었다.이젠 너무한 것 같아서 스스로가 미워졌다.자책하는 마음으로 집에 들어왔고 그날 밤 죄책감에 뒤척이며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꿈속에서도 진정우가 나를 따라다니며 "왜 키스했어요? 그건 내 첫 키스였는데."라고 묻는 장면이 반복됐다.결국 새벽 4시 반쯤에 눈을 떴다.이 시간쯤이면 진정우는 벌써 운동을 나갔을 것이다. 이 틈을 타서 서둘러 씻고 준비한 후, 그와 마주치지 않도록 서둘러 집을 나섰다.아침 해가 희미하게 떠오르는 거리를 달리며 문득 내가 왜 이토록 피해 다니고 있는지 스스로가 한심하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회사 업무에 빨리 익숙해지고 싶어서요.”“그래도 너무 일찍 나오신 거 아니에요? 회사에서 추가 수당 안 주는 거 아시죠?” 허진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나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제가 자발적으로 하는 겁니다.”“그래서 윤 부장님이 이 자리까지 오신 거겠죠. 모두가 부장님처럼 열심히 하면 우리 회사도 금방 대박 나겠어요.” 허진호의 지나친 칭찬에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났다.그는 항상 이렇게 말에 진심과 농담을 섞어서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나는 이런 말에 진지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농담이 아니라, 회사 발전이 한 사람에게만 의존할 수는 없어요. 윤 부장님의 노력은 저도 충분히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표님께도 말씀드렸어요. 부장님이 너무 무리하셔서 건강을 해치기라도 하면 회사로서는 큰 손실이라고요. 앞으로는 좀 더 건강에 신경 쓰라고 하셨어요.”허진호는 아예 내가 일찍 출근할 핑계마저 막아버렸다. 그래도 뭐, 오히려 잘 됐다. 이제 더는 진정우를 피해 다닐 필요도 없으니까.진정우는 요 며칠 아침 식사를 문 앞에 두지 않았다. 내 뜻을 알았는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한 것 같다.“듣기로는 오늘 고객이 오신다면서요? 게다가 꽤 큰 계약이라던데?” 허진호가 화제를 돌렸다.“네, 10시에 오기로 했어요. 한 시간 정도 남았네요.”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이제 준비하러 가봐야 해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좋아요. 윤 부장님, 오늘도 좋은 결과 기대하겠습니다.” 허진호는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나를 응원했다.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준비한 자료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9시 50분쯤 미리 회의실에 들어가 준비 상태를 확인했다.오늘 만날 분은 정말 중요한 고객이었다. 이 계약을 성사할 수만 있다면 며칠 전 강유형이 빼앗아 간 고객으로 생긴 손해를 충분히 만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성과를 몇 단계 더 끌어올릴 기회였다.10시 정각, 고객이 도착했다.그런데 그가 회의실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표정이 굳어졌다.
“콜록!”전화기 너머에서 배성재가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내 갑작스러운 애교 섞인 목소리가 꽤 당황스러웠나 보다.그는 곧바로 물었다.“무슨 부탁이죠?”나는 다리를 꼬아 올리고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말했다.“드래곤킹에는 남자 모델뿐만 아니라 여자 모델도 있죠? 혹시 그쪽이랑 친하세요?”이제 내가 배성재가 진정우라는 걸 확신한 이상, 굳이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도 없었다.생각해 보면 참 우습다. 그동안 그렇게 떠보고 시험해 보려고 온갖 수를 썼지만 결국 미트볼이 모든 걸 말해주었다.“갑자기 왜 그런 걸 묻죠?”여전히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듯 조심스럽게 되묻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팔짱을 끼고 일부러 더 장난스러운 톤으로 말했다.“저도 한 번 여자 모델이 되어 보고 싶어서요.”“뭐라고요?”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층 높아졌다.예상치 못한 대답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듯했다.“드래곤킹에서 여자 모델로 일해 보고 싶다고요. 그러니까 성재 씨가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그건 안 됩니다.”이번엔 단칼에 잘라 말했다. 거절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오히려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왜요? 제가 못생겨서? 아니면 몸매가 별로라서?”“그런 문제가 아닙니다.”그의 목소리는 낮아졌고 곧이어 단호한 어조로 덧붙였다.“그곳은 당신이 갈 만한 곳이 아닙니다.”‘좋아, 바로 이 반응. 이제야 진짜 진정우다운 모습이 나오는군.’“왜요? 성재 씨도 거기서 일하셨잖아요?”내가 일부러 짓궂게 되묻자, 그는 순간 말을 잃었다.그리고 몇 초간의 침묵 끝에 낮게 말했다.“나는 당신이 그곳에 가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도와줄 수도 없어요.”나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그래, 바로 이거야. 이 반응이야.’분명 그는 자신이 진정우라는 걸 들키지 않으려 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나를 통제하려는 태도가 그대로 드러났다.“그럼 내 방법대로 알아서 갈게요.”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그가 날 불러 세웠다.“잠깐. 진짜 이유
내 아버지를 언급하자 강진혁은 순간 굳어졌다.표정이 단단하게 굳은 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연한 반응이었다.내 부모님의 죽음은 그의 아버지가 직접 만든 비극이었으니까.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배성재가 만든 완자를 바라보았다.나는 차분한 척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제 세상에 내가 좋아하는 그 맛은 다시 없을 거야.”하지만 그건 완전한 거짓말이었고 나는 이미 확신했다.배성재가 진정우라는 걸.그런데도 그가 계속 자신을 배성재라고 주장하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괜히 흔들리지 말고 그의 계획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었다.강진혁은 한숨을 내쉬듯 낮게 말했다.“지원아, 네 부모님 일은 정말 미안해.”하지만 그 말은 더럽게도 위선적으로 들렸다.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을 애써 눌러가며 나는 덤덤하게 받아쳤다.“그 일은 오빠랑 상관없잖아요.”강진혁이 쓴웃음을 지었다.“넌 참 착한 애야.”‘착해? 아니, 바보였겠지.’한때는 용서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내가 그들을 용서할 마음이 단 1%도 없다는 걸 말이다.나는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고 조용히 단호박 수프를 떠먹었다.따뜻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며 묘하게 마음을 안정시켰다.솔직히 말해 배성재의 요리 실력은 꽤 수준급이었다.심지어 예전 진정우보다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다.‘그동안 숨어서 요리 연습이라도 했나? 나중에 진짜 정체를 밝히면 꼭 물어봐야겠네.’“이거 맛있네요. 잘 만들었어요.”내가 무심하게 던진 칭찬에 강진혁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그러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저녁 약속 있어?”그는 내가 무심코 던진 말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없어요. 그냥 한 말이에요.”나는 무심히 단호박 수프를 한 모금 마셨고 그 순간 강진혁의 시선은 더욱 깊어졌다.그러더니 예상치 못한 제안을 했다.“그럼 오늘 저녁에는 나랑 같
배성재는 정말 겁도 없었다.강진혁이 나를 붙잡으려 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대놓고 도전장을 내밀다니...나는 그의 이런 태도가 예상 밖이었지만 지금 내게 더 중요한 건 이소희였다.그녀가 정말 드래곤킹에 있다면 직접 가서 확인해야 했다.나는 고민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아니요. 오늘 저녁엔 약속이 있어서요.”배성재는 별다른 아쉬운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돌아섰다.엘리베이터 앞에서 동료들을 마주쳤는지 다시 한 번 진 팀장님이라 불리는 소리가 들렸다.그런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뿐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이 모습을 보고 있던 강진혁이 문득 내게 물었다.“저 사람... 진정우랑 정말 많이 닮지 않았어?”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만약 이 자리에서 안 닮았다고 하면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워 보일 것이다.그래서 나는 가볍게 웃으며 의미심장하게 답했다.“모르겠어요. 그래서 더 시험해 봐야죠.”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진정우는 항상 나한테 맛있는 걸 챙겨줬어요. 그래서 저도 한 번 성재 씨의 요리를 경험해 보려고요.”이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강진혁에게 보내는 신호였다.내가 배성재를 곁에 두려는 이유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다는 신호였다.나는 아직 강진혁이 배성재를 위험 요소로 인식하지 않길 바랐다.적어도 지금은 배성재가 그의 타겟이 되어서는 안 된다.그의 표정을 살피던 강진혁이 나지막이 물었다.“그럼 결과는 나왔어?”우리는 이미 사무실로 들어와 있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도시락을 열었다.그 안에는 예상했던 두 가지 요리 외에도 만두와 호박죽까지 곁들여져 있었다.솔직히 말해 보는 것만으로도 식욕이 당길 정도였다.강진혁도 한마디 덧붙였다.“보아하니 요리 실력이 제법인데. 드래곤킹에서 남자 모델로 있기엔 아까운 재능이네. 그냥 식당을 차리는 게 낫겠어.”나는 의미
“괜찮아요. 그냥 갑자기 속이 좀 안 좋았을 뿐이에요.”나는 강진혁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의 그런 태도조차 나에게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관심과 걱정이라기보다 그저 나를 붙잡기 위한 수단처럼 보였기 때문이다.사랑이 식으면 그의 모든 행동이 불편하게만 보인다더니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그래도 물이라도 좀 마셔.”강진혁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권했지만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그렇게 화장실을 나와 사무실 쪽으로 걸어가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그리고 곧, 회사 직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어? 진 팀장님!”“오랜만이에요! 드디어 복귀하신 거예요?”“우린 진짜 많이 보고 싶었어요!”여러 직원이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반가워하는 사람이 진정우가 아니라 배성재라는 것이었다.배성재는 아무런 반응 없이 직원들에게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그렇게 조용히 걸어오더니 나를 향해 곧장 다가왔다.그 순간, 내 옆에 있던 강진혁의 기운이 눈에 띄게 싸늘해졌다.굳이 보지 않아도 그가 지금 얼마나 불쾌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나는 팔짱을 낀 채 차갑게 물었다.“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나는 일부러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그가 진정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이 계속 착각하도록 놔두는 것이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괜한 오해가 쌓이면 나중에 정리하기가 더 골치 아파진다.배성재는 개의치 않는 듯 태연하게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 상자를 내게 건넸다.“점심 가져왔어요.”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사실 나는 아침도 못 먹고 나와서 속이 비어 있었다.나는 그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책임감이 꽤 강하네요?”그러면서 슬쩍 강진혁을 향해 돌아보며 덧붙였다.“오빠, 성재 씨 요리 실력 한 번도 안 맛봤죠? 진 팀장님보다는 아주 약간 부족하긴 한데 그래도 꽤 괜찮아요.”내 말이 끝나기가
“생각나는 사람 있어요?”강진혁은 집요하게 내 반응을 살폈다.나는 짧게 웃으며 허진호에게 집중하듯 말했다.“전 허 대표님이 빨리 회복해서 출근하셨으면 좋겠어요. 출근 도장 찍는 모습 못 보니 너무 심심하네요.”그렇게 나는 가볍게 농담을 던지며 전화를 끊었다.강진혁은 이미 내 자리까지 들어와 있었고 가져온 꽃을 조심스레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그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오랜만에 그렇게 밝게 웃는 거 본 것 같은데.” 나는 자연스럽게 이유를 만들어냈다.“허 대표님이 여자 친구한테 얼굴 할퀴었다고 투덜대는데 그게 너무 웃겨서요.”강진혁은 별로 놀라지도 않은 듯 자연스럽게 말했다.“혹시 유흥업소 간 거 때문에 그런 거야?”그 말에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강진혁이 허진호를 봤고 허진호가 본 사람이 정말 이소희라면 강진혁도 그녀를 봤을 가능성이 높았다.그리고 이소희가 그렇게 두려워했던 사람이 바로 강진혁이었다는 내 의심이 맞다면...나는 머릿속을 정리하며 그의 말을 받아쳤다.“역시 남자들은 다 거기서 거기네요. 그런 곳은 꼭 가봐야 속이 시원해요?”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난 일 때문에 갔어.”“허 팀장님도 똑같이 말하던데요. 근데 여자 친구가 안 믿고 난리를 쳤대요.”나는 꽃을 들어 올려 코끝에 가져가 향을 맡으며 시선을 피했다.향은 좋았지만 지금 내 기분과는 정반대였다.그러다 그가 갑자기 말을 돌렸다.“어제 드래곤킹에서 좀 난처한 일 겪었다며? 왜 나한테 연락 안 했어?”그 말을 듣자마자 등골이 싸늘해졌다.어떻게 이렇게 태연하게 묻는 걸까?그가 배후에 숨어져 있던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면 정말 그의 걱정 어린 태도에 속아 넘어갈 뻔했다.하지만 나는 이미 그가 주범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가 연기를 한다면 나도 맞춰줘야 했다.아직은 그를 자극할 때가 아니니까.그래서 나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직접 해결했어요. 굳이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나는
나는 준비실에서 차를 따르다가 무심코 동료들에게 물었다.“허 대표님은 오늘 안 나오셨나요?”내 말에 몇몇이 입을 꾹 다물고 킥킥거리며 웃었다.나는 그 반응이 이상해서 눈썹을 살짝 올리며 되물었다.“뭐예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그러자 한 명이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얼굴이 엉망이 됐다네요!”“아무래도 여자 친구한테 할퀸 모양이에요.”“진짜 상상도 못 했는데 허 대표님 여자 친구가 그렇게 사나운 줄은...”“근데 솔직히 허 대표님이 유흥업소라도 갔다면 나 같아도 가만 안 뒀을걸요.”순식간에 사무실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고 다들 각자 한마디씩 보태며 떠들어댔다.그제야 나는 허진호가 오늘 회사에 안 나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얼굴이 엉망이 돼서 창피해서 못 나온 거겠지.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때리는 건 그렇다 쳐도 얼굴은 좀 봐줘야 하는 거 아니야?솔직히 나는 그냥 궁금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자마자 허진호가 먼저 선수를 쳤다.“지원 씨, 회사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다 헛소문입니다. 그런 일 없었어요.”그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가득했고 나는 모르는 척 능청스럽게 되물었다.“네? 무슨 일인데요? 제가 뭘 들었다는 거죠?”허진호는 순간 말을 멈추더니, 헛기침을 한 번 했다.“회사 갔다면서요? 아무도 얘기 안 해줬어요?”나는 일부러 능청을 떨며 대답했다.“아침부터 바빠서요. 무슨 일 있으셨나요?”그제야 허진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꺼냈다.“아, 됐습니다. 별일 아니에요.”하지만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모든 걸 털어놓기 시작했다.그리고 내가 들은 내용은 사무실 사람들이 떠들던 소문과 거의 똑같았다.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제가 지금 제일 후회하는 건 도대체 왜 여자한테 빠졌냐는 겁니다.”나는 순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그의 한탄이 어이없기도 했고 뭔가 귀엽기도 했다.그래서 나는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그럼 이제 남자를 좋아해 보시려고요?”그러자 허진호도 장단을
나는 놀란 채로 그를 바라봤다.“강유형, 너...”그는 천천히 입가를 닦더니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나는 순간 따라가야 하나 망설였지만 끝내 발을 떼지 않았다.그냥... 이대로 두는 게 맞을 것 같았다.그래야 그도 이제 완전히 포기할 테니까.“저를 원망하진 않겠죠?”강유형이 떠난 후 뒤에서 배성재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천천히 돌아봤다.배성재는 문가에 서 있었고 그의 시선은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강유형이 토한 피가 아직 마르지 않은 채 얼룩져 있었다.“저 사람이 계속 지원 씨를 괴롭히는 것 같아서 도와주고 싶었어요.”나는 짧게 대꾸하며 손에 들고 있던 옷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옷 갈아입고 이제 가세요.”배성재는 말없이 옷을 받았다.그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서 손에 작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그 안에는 그가 입었던 더러워진 옷이 담겨 있었다.그는 그대로 나가지 않고 손수건을 꺼내더니 현관 앞 바닥에 묻은 피를 닦기 시작했고 나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마침내 문이 닫히고 그가 떠났고 나는 그제야 소파에 몸을 던지듯 주저앉았다.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앉아 있다가 결국 지쳐서 그대로 소파에 누워버렸고 나는 그렇게 밤을 보냈다.그런데 꿈속에서도 나는 계속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봤다.강유형이 내 앞에서 피를 토하는 모습.그 붉은 피가 마치 내 가슴 한복판에 떨어지는 듯한 느낌.그 꿈에 시달리며 나는 밤새 뒤척였다.그리고 다음 날 내가 눈을 뜨자마자 창문으로 쏟아지는 강한 햇살이 눈을 찔렀다.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면대로 향했다.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 그리고 옷 위에 묻어 있는 이미 말라붙은 핏자국...나는 조용히 물티슈를 집어 들었다.그리고 하나하나 천천히 핏자국을 닦아내기 시작했다.마치 그것이 내 삶에서 강유형의 흔적을 지우는 과정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내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용준호에게서 전화가 왔다.“들었어. 어제 우리 쪽에서 사고 났다며?”내가 찾기도 전에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강유형, 네가 어떻게 내가 사고 난 걸 알았지?”그는 내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문기둥에 기대섰다.“당연히 알지. 왜냐하면...”그는 말하다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내가 사람을 붙여서 널 지켜주게 했거든.”지켜준다고? 이건 지켜주는 게 아니라 감시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그의 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치자 나는 이유 모를 불쾌감이 몰려왔다.그래서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비꼬듯 말했다.“네가 붙인 사람이 그렇게 실력이 있다면 내가 그렇게까지 위험한 순간에 처했을 때는 어디 있었던 거야?”“그 부분은 내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놈은 잘랐어.”강유형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그는 내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덧붙였다.“그리고 지금 누가 널 해치려 했는지 조사 중이야.”“잘됐네.”나는 짧게 대꾸하며 팔짱을 꼈다.“그럼 네가 그걸 알아내면 나한테도 알려줘.”강유형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피곤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지쳐 보였다.하지만 나는 그와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더군다나 지금 내 집 안에는 또 다른 손님이 있었으니까 말이다.“강유형, 늦었어. 인제 그만 돌아가.”나는 단호하게 말했으나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집에 가고 싶지 않아.”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고 그러자 그는 낮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지원아, 네가 떠난 이후로... 난 집에 들어가는 게 너무 싫어졌어.”그의 입가에 맺힌 쓴웃음은 가슴 한구석을 묘하게 찌르는 기분이었다.“네가 있을 때는 몰랐어. 네가 없는 집이 이렇게 공허한 곳일 줄은... 집에 들어가면 온통 적막하고 부모님도 서로 말이 없고 예전처럼 따뜻한 느낌이 하나도 안 남았어.”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그렇게 만든 게 누구 때문인데?“사실, 예전엔 이런 게 얼마나 소중한지도 몰랐어.”그는 허탈하게
“...”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고 얼굴이 뜨거워졌다.조금 전까지 내가 그를 떠보려 했는데 오히려 당하고 말았다.그는 겉으로 보기엔 진지하고 무심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은근슬쩍 던지는 말은 전혀 초보자가 아니었다.이 남자, 예상보다 훨씬 노련한데?나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태연한 척 입꼬리를 올렸다.“착각하지 마세요.”나는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TV가 켜진 거실로 향했다.그는 여유롭게 식탁을 정리한 뒤 내가 뿜어낸 죽이 튄 옷을 간단히 닦고 설거지를 시작했다.그러고 부엌까지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서야 내 쪽으로 걸어왔다.“화장실 좀 써도 될까요?”그의 정중한 태도에 나는 무심하게 손짓했다.“맘대로 쓰세요.”그런데, 바로 이어진 말이 내 손을 멈추게 했다.“샤워도 좀 해야겠네요.”나는 즉시 그의 얼굴을 바라봤고 그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태연하게 서 있었다.마치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한다면 그건 내 문제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머리카락을 보았다.아직도 죽이 튀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그제야 나는 생각을 바꿨다.‘아... 샤우할만 하네.’그래서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그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갈아입을 옷 있나요?”나는 그제야 그가 처음부터 이걸 의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순간적으로 거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덧붙인 말이 내 결정을 흔들어 놓았다.“헌 옷이라도 괜찮아요.”그는 진정우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도 분명했다.내 집에 남자의 옷이 있다면 그건 당연히 진정우의 것일 테니까.나는 그를 노려봤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이건 완벽한 연기였다.그러니까 내가 괜한 의미를 부여하면 오히려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상황이었다.나는 내심 한숨을 쉬며 억지로 무덤덤한 척 대답했다.“찾아볼게요.”나는 옷장을 열어 진정우의 옷을 손에 들었다.그 순간 나는 마음이 매우 복잡해졌다.이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