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회사 업무에 빨리 익숙해지고 싶어서요.”“그래도 너무 일찍 나오신 거 아니에요? 회사에서 추가 수당 안 주는 거 아시죠?” 허진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나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제가 자발적으로 하는 겁니다.”“그래서 윤 부장님이 이 자리까지 오신 거겠죠. 모두가 부장님처럼 열심히 하면 우리 회사도 금방 대박 나겠어요.” 허진호의 지나친 칭찬에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났다.그는 항상 이렇게 말에 진심과 농담을 섞어서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나는 이런 말에 진지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농담이 아니라, 회사 발전이 한 사람에게만 의존할 수는 없어요. 윤 부장님의 노력은 저도 충분히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표님께도 말씀드렸어요. 부장님이 너무 무리하셔서 건강을 해치기라도 하면 회사로서는 큰 손실이라고요. 앞으로는 좀 더 건강에 신경 쓰라고 하셨어요.”허진호는 아예 내가 일찍 출근할 핑계마저 막아버렸다. 그래도 뭐, 오히려 잘 됐다. 이제 더는 진정우를 피해 다닐 필요도 없으니까.진정우는 요 며칠 아침 식사를 문 앞에 두지 않았다. 내 뜻을 알았는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한 것 같다.“듣기로는 오늘 고객이 오신다면서요? 게다가 꽤 큰 계약이라던데?” 허진호가 화제를 돌렸다.“네, 10시에 오기로 했어요. 한 시간 정도 남았네요.”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이제 준비하러 가봐야 해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좋아요. 윤 부장님, 오늘도 좋은 결과 기대하겠습니다.” 허진호는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나를 응원했다.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준비한 자료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9시 50분쯤 미리 회의실에 들어가 준비 상태를 확인했다.오늘 만날 분은 정말 중요한 고객이었다. 이 계약을 성사할 수만 있다면 며칠 전 강유형이 빼앗아 간 고객으로 생긴 손해를 충분히 만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성과를 몇 단계 더 끌어올릴 기회였다.10시 정각, 고객이 도착했다.그런데 그가 회의실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표정이 굳어졌다.
우리 회사 사장은 마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모든 걸 알고 있는 신비한 인물 같았다.강유형은 내게 쏟아붓던 분노를 허진호에게 돌리며 소리쳤다.“안 한다고? 네가 지금 누구랑 얘기하는지 알고는 하는 소리야? 내가 누군지 알아?”지금 강유형은 무례하고 돈만 많은 졸부같았다.허진호는 물컵을 들고 무표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사장님께서 당신이 누군지 알아서 이 거래를 안 하신다고 하셨습니다.”그는 짧은 말로도 강유형을 제대로 자극했다.강유형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네 사장 누구야? 해동에서 발붙이고 살기 싫단 거야?”“네, 사장님께서 말씀하시길 해동에서 장사를 안 해도 되니까 당신과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허진호의 말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다.강유형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좋아, 두고 보자고. 네 사장한테도 전해.”“알겠습니다. 사장님께서도 강 대표님께 전하라 하셨습니다. 언제든 환영한다고요.”허진호의 말이 강유형을 완전히 자극했다.그러자 강유형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나는 그가 허진호에게 주먹이라도 날릴까 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하지만 강유형은 이를 꽉 물고 몇 초간 허진호를 노려보다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네가 이렇게 버티면 결국 다른 사람들만 피해를 보는 거 알지? 오늘 나와 함께 가면 좋게 끝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 회사가 네 고집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될 거야.”강유형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도 소용없자 협박하기 시작했다. 비록 나는 그의 집에서 자란 사람이긴 해도, 우리 부모님이 물려주신 고집은 쉽게 꺾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쉽게 겁을 먹었다면, 우리가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만약 네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 사이의 마지막 정까지 스스로 짓밟는 거야.”“네가 날 버린 마당에 무슨 정 타령이야?”그는 화가 나서 욕설을 내뱉었다.더 이상 그와 말다툼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회사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길 원하지도 않았다.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강 대표님, 이제 그만 가세요.”
“부대표님, 혹시 사장님에 대해 아는 정보가 좀 있으세요?”직접 뵐 수 없다면 이름이라도 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허진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사장님께 관심이 생기셨나 봐요?”“네, 너무 신비로워서요. 도대체 어떤 분인지 궁금해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허진호는 마침 커피 가루를 다 갈고 커피 향을 맡으며 말했다.“음, 향이 참 좋네요.”그러고는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한 잔 내려드릴까요?”“괜찮아요.”사장님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서 지금은 커피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그는 갈아놓은 커피 가루를 내게 내밀며 말했다.“이 커피, 사장님께서 보내주신 거예요. 한 번 맛보지 않겠어요?”“그분이 보내주신 커피를 마시는 것보다, 직접 만나 뵙는 게 더 좋겠는데요.”나는 솔직하게 말했다.허진호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미소가 왠지 모르게 이상하게 느껴졌다.“뭐가 그렇게 웃기세요? 제 부탁이 과한가요? 왜 웃으세요?”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과한 건 아니에요. 사장님을 이렇게 궁금해하다니. 얼굴도 못 본 분한테 이리 관심을 가지다니. 우리 사장님 역시 대단하시네요.”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허진호가 장난스럽게 말을 돌리려는 건 알았지만 사장님에 대한 궁금증은 오히려 더 커졌다.그가 내게 커피를 건넸을 때,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혹시 제가 괜한 마음을 품을까 걱정되신다면, 차라리 그분에 대한 기본 정보라도 알려주세요.”“그건 좀 어렵겠네요.”허진호는 예상대로 거절했다.나는 약간 비꼬듯이 물었다.“그럼 이유라도 설명해 주시죠.”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사장님께서 원치 않으신다네요.”“왜요?”나는 그가 계속 빙빙 돌려 말하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사장님이 본인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서요. 사람들이 다 반할까 봐 그러시나 봐요.”그는 커피 향을 깊게 들이마시며 말했다.강유형 집안에서 상급 커피를 많이 접해본 터라 이 커피가 꽤
이소희의 다급한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무슨 일이에요?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봐요.”“지금 누군가가 놀이공원에서 정우 씨에게 시비를 걸고 있어요. 몇 명인데 다들 무섭게 생겼어요.”이소희의 말을 듣고 긴장이 풀렸다. 큰일이 난 줄 알았는데 그냥 진정우에게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이소희는 많이 놀란 듯했지만 진정우라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그 사람들이 벌써 정우 씨를 찾았어요?”“아직은 못 찾았지만 곧 올 것 같아요. 경찰을 불러야 할까요?” 이소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일단 정우 씨에게 먼저 상황을 알리고 어떻게 할지 물어보세요. 본인이 판단해서 결정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진정우가 그들과 마주하게 된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판단을 따르기로 했다.“네, 그럼 그렇게 할게요. 언니, 올 거죠?”“당연히 가야죠.” 진정우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데 안 갈 수가 없었다.사실 강유형이 남긴 말도 마음에 걸렸다. 혹시 그가 회사를 위협하면서 진정우에게도 어떤 식으로 압박을 주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가방을 챙겨 나갈 준비를 하며 강유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허진호가 사무실 밖으로 나오며 내 가방을 보고 물었다.“어디 가시려고요, 윤 부장님?”나는 통화 연결음이 울리는 걸 확인하며 잠시 답하지 않았다.“윤 부장님, 대체 어디 가시나요?” 허진호가 다시 물었다.답하려던 순간, 강유형이 전화를 받았다.“왜, 이제 마음이 바뀐 건가?”“지금 놀이공원에 사람들 보냈어?”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는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무슨 소리야? 내가 뭘 보냈다고? 무슨 얘긴지 모르겠는데.”그의 반응에 순간 당황했다. 내가 아는 한, 강유형은 자신의 행동을 숨기거나 부정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만약 진정우를 위협하려는 의도였다면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우를 찾은 사람들은 강유형과는 무관한 셈이다.“설마 나한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갑자기 오늘 아침 허진호가 말했던, 아니 정확히는 허진호가 사장님의 말씀이라고 전해줬던 그 말이 떠올랐다. 순간 진정우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내가 아는 그라면 사장님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았다.“허... 잘도 버티네.”대머리 남자는 비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그렇게 버티는 대가를 보여주지.”그가 목을 한 번 비틀자 뼈마디가 우두둑 소리를 냈고 그의 신호에 부하들이 한꺼번에 놀이공원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정우는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가 가만히 있는 이유를 나는 알 것 같았다.그가 겁이 나서가 아니라 그들이 놀이공원을 망가뜨리는 순간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건 곧 강유형의 이익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순식간에 놀이공원 보안 요원들이 뛰어왔다. 그들이 진정우를 건드리는 것까지는 무시할 수 있었겠지만 공원을 훼손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들의 임무는 놀이공원을 지키는 것이었으니까.위압적이던 그들도 보안 요원들의 수에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제압당했다. 하지만 이들 역시 범상치 않은 상대들이었다. 마침내 그들 중 한 명이 칼을 꺼내 보안 요원 대장의 목에 겨누며 협박했다.“전부 손 떼! 안 그러면 이 자식 죽을 줄 알아!”뜻밖의 상황에 나는 보안 요원들에게 눈짓을 보내며 일단 물러나게 했다. 보안 요원들은 사람을 풀었지만 대머리 남자는 여전히 인질을 붙잡고 있었다. 그는 진정우를 보며 비웃었다.“왜 이렇게 고집이 센 거야? 난 이런 강한 놈들 골라서 부러뜨리는 걸 좋아하지. 지금 당장 무릎 꿇고 세 번 절하면 이 사람은 살려줄게. 안 그러면 바로 죽을 수도 있다고.”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말했다.“사람을 다치게 하는 건 안 돼요.”그러자 대머리 남자는 나를 바라보며 비열하게 웃었다.“어디서 온 미녀야? 그럼 차라리 네가 내 품에 안겨봐. 그러면 너도 이 사람도 안전하게 놔줄게.”이런 사람들에게는 헛소리도 수준에 맞춰 나온다는 말이 딱 맞았다. 그는 보안 요원을 끌고 나에게 다
“무슨 일이야?”강유형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모든 걸 내려다보는 CEO의 태도였다. 조금 전 내게 투정을 부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여자가 변덕이 빠르다지만 남자도 만만치 않았다.얼굴이 하얗게 질린 보안 책임자가 다리가 후들거리는 와중에도 재빨리 달려와 상황을 보고했다.강유형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 진정우에게 시선을 돌렸다.“그러니까 이 사태가 정우 씨의 개인적인 일 때문에 생긴 건가요?”그 말을 듣고 나는 강유형이 진정우를 난처하게 만들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진정우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강유형은 비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맞죠?”“맞습니다.”진정우는 부정하지 않았다.강유형은 바닥에서 부서진 물건 조각을 주워들었다.“정우 씨,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까요?”“강 대표님은 어떻게 처리하시려는데요?”진정우는 그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나는 가만히 지켜봤다. 지금 내가 나서면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내가 없었다면 강유형이 이렇게까지 진정우를 곤란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성격상 오히려 진정우를 보호했을지도 모른다.어쨌든 여기는 KS 그룹의 영업장이고 부서진 것도 KS 그룹의 놀이공원이다. 이곳에서 난동을 부리는 건 강유형을 무시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강유형은 손에 든 조각을 내던지며 손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정우 씨의 개인적인 일부터 처리하시는 게 좋겠네요. 일이 해결될 때까지 이곳 일은 강 이사님께 맡기는 게 낫겠습니다.”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강유형이 진정우의 업무를 중단시키려는 것이었다.지금 조명 조정은 거의 마무리 단계라 진정우가 없더라도 큰 차질은 없겠지만 강유형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 마치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격이었다.순간 아까 그 사람들이 혹시 강유형이 보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우를 쫓아낼 핑계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저는 강 대표님의 직원이 아닙니다. 대표님은 이런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어요.”진정우가 단호하게 말하자 강유형은 비웃으
강진혁은 상황을 파악한 듯 진정우를 바라보며 말했다.“정우 씨가 개인적인 문제로 업무를 방해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오늘의 일은 보안팀이 외부인 출입을 막지 못한 탓도 있으니 정우 씨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죠.”강유형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형인 강진혁이 이렇게까지 진정우를 두둔할 줄은 예상치 못한 것 같았다.“강 실장, 지금 이곳은 내가 관리하는 곳입니다. 여기 일은 제게 맡기세요.”강진혁의 말은 강유형이 관할 범위를 넘지 말라는 뜻이었다.강유형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형의 말을 억지로 삼키며 물러섰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진작 내쫓았을 것이다.“좋아요. 또 이런 일이 발생하면 강 이사님과 정우 씨가 함께 책임지게 될 겁니다.” 강유형은 이를 악물며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그가 멀어지자 나는 숨을 고르며 한숨을 내쉬었다.강진혁은 진정우를 향해 차분히 말했다.“이번 일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해서 제출해 주세요. 그리고 오늘 손상된 시설은 제가 수리팀을 보내 복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수리 비용은 정우 씨 측에서 부담하는 걸로 하죠.”공과 사를 명확히 하는 그의 태도에 진정우는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강진혁 실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떠났다. 나에게 따로 말은 건네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강진혁은 나를 위해 강유형과 맞서 싸웠다. 그의 배려에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일이 마무리되었기에 나는 진정우를 한 번 바라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놀이공원을 나가던 중 내 차 앞에 강유형의 차가 가로막으며 서더니 강유형은 차에서 내리며 다가와 내 차 문을 열고는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올라탔다.“운전해.”나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할 말 있으면 지금 해. 출근해야 해.”“운전하라고 했잖아!”그는 목소리를 높이며 셔츠 깃을 풀어 헤쳤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을 보고 더 이상 저항해 봐야 소용없을 것 같아 핸들을 잡았다.“그래. 어디
‘조나연이 기다린다고 내가 꼭 가야 해? 자신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나는 메시지를 무시했고 강유형은 내 휴대전화 화면에 나타난 알림을 보지도 않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윤지원, 너 정말 나랑 끝낼 결심이야?”강유형은 눈이 충혈된 채로 물었다.몇 번이나 반복한 말이라 이제는 말하기도 지칠 지경이다. 나는 더 이상 답할 힘도 없어서 차라리 그에게 되물었다.“그럼 어떻게 해야 내가 진심인 걸 알겠어? 진정우랑 진짜로 혼인신고라도 해야 믿겠어?”그를 단념시키기 위해 진정우와 일부러 스킨십까지 했는데도 강유형은 아직도 내가 장난치는 줄로만 생각했다.“윤지원!”강유형은 이를 악물고 내 이름을 불렀다.예전엔 그가 이렇게 화를 내면 무서워했었는데 지금은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사람에 대한 마음이 이렇게 바뀔 수도 있구나 싶었다.나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강유형, 우리 사이는 정말 끝났어. 세상 모든 남자가 다 사라지고 너 혼자 남는다고 해도 나는 너와 다시는 함께하지 않을 거야.”내 말이 너무 잔인하고 모진 걸 알지만 나도 그의 집착에 지칠 대로 지쳤다.내 말에 그는 충격을 받은 듯 표정이 일그러졌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분노, 원망, 절망이 가득했다.“후회하지 마.”그가 나지막이 말했다.나는 핸들을 꽉 잡으며 답했다.“응, 후회하지 않아.”그러자 그가 갑자기 물었다.“내가 잘못되거나 큰 사고라도 나면, 그때는 후회할 거야?”그의 의도를 알 수 없어 고개를 돌려 보니 그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건 내 잘못인 거 알아. 내가 너한테 상처 줬어. 그래서 지금이라도 내 잘못을 고치려고 하는 거야. 나도 여러 번 너에게 용서를 구했잖아. 그런데도 넌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네...”그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눈가가 촉촉해졌다.“정말 내가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하겠어?”그는 정말로 후회하는 것 같았다.사실 나는 이미 그의 진
내 말에 용진표는 미소를 지었다.“똑똑한 여자네. 다음 생에선 좋은 집안에 태어나기를...”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일어섰고 나는 몸이 갑자기 앞으로 기울며 그가 신발을 신고 있는 곳으로 거의 쓰러질 뻔했다.용진표의 경호원이 바로 다가와 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이를 막았고 대신 나를 매섭게 쳐다보며 말했다.“이제 사실을 다 알았으니 뭘 더 하고 싶어? 내가 널 풀어줄까?”나는 그가 날 풀어주길 원했고 나는 아직 죽을 수 없었다. 이렇게 죽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대표님이 말한 내용이 믿기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건 대표님이랑 저랑 삼촌과 셋이서 마주하게 해주세요. 아니면 삼촌에게 전화라도 해서 제가 듣고 싶은 말을 하게 해주세요”이 말은 진심이었고 또한 나는 사실 시간을 끌고 싶었다. 시간을 끌어서 누군가가 나를 구하러 오게 하고 싶었다.하지만 누가 나를 구하러 올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용진표를 계속해서 바라보며 그를 붙잡고 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나를 무시하고 경호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 순간 나는 끌려 나갔다.용진표가 떠난 뒤 나는 다시 손발이 묶인 채로 갇혔고 그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내가 그동안 삼촌과 아줌마한테 받은 친절이 정말 진심이 아니었던 걸까? 그들이 나를 잘 대해준 이유는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 뿐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내가 강유형을 살릴 수 있는 피가 있어서?’나는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 십 년 동안 변함없이 잘해줬고 그게 가짜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다.그러니 아마 용진표가 나를 속이고 있을지도 몰랐다.‘그런데 왜 나를 속여야 하는 걸까? 내가 삼촌과 아줌마를 미워하도록 만들기 위해서?’하지만 용진표는 지금 날 죽이겠다고 했으니 내가 그들을 아무리 미워한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그렇게 나는 앉아서 고민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밖의 빛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느껴졌다. 심지어 나를 지키는 사람도 없어진 것 같았다.‘용진표가 나를 굶겨 죽일
몸을 앞으로 기울여 내 얼굴을 응시하던 용진표는 미소를 지었다.그가 왜 웃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를 계속해서 쳐다봤다. 마치 그가 나한테 대답하지 않으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그가 웃음을 멈추고 나서 말했다.“그러면 너한테 사실을 제대로 알려 주고 죽일게. 왜냐하면 네 부모님이 다른 사람의 돈길을 막았으니까.”그 말에 나는 바로 그와 계약하려던 그 계약서를 떠올렸다.“다른 사람의 돈길을 막았다고요? 그게 왜 제 부모님과 상관이 있나요?”나는 다시 의문을 제기했고 용진표는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잊었어?”그 말에 나는 깨달았다. 그도 다른 사람한테서 돈을 받았다는 뜻이었다.“그 사람이 누구죠?”나는 급히 물었지만 용진표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나에게 되물었다.“네 생각에는 누구일 것 같아?”내 부모님의 죽음은 결국 그 계약 때문이었고 그 계약은 결국 삼촌에게 넘어갔으니... 바로 그 사람일 것이다.전에도 한 번 의심은 했었지만 용진표는 그 의심을 지워버렸고 심지어 삼촌이 그 계약으로 번 돈을 나에게 따로 저금해 두었다고까지 했다.지금 그가 이렇게 암시하자 나는 정말 혼란스러웠다.“용 대표님, 나이가 드셔서 기억이 잘 안 나세요? 예전에 대표님은 저에게...“내 말투는 점점 자신감이 없어 보였고 그는 줄곧 웃고 있었다. 용진표가 방금 말한 것처럼 그는 다른 사람의 돈을 가지고 대신 일을 처리해 준다고 했으니 그의 말이 전부 사실일 수는 없었다.나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싫었지만 용진표가 계속해서 그런 걸 암시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지금 여기 있는 것도 남의 돈 받고 일을 하시는 거 맞죠?”내가 다시 묻자 용진표는 가볍게 웃었다.“내 생각이 맞았어. 네가 이렇게 똑똑한데...”그의 말에 나는 혼란스러워졌고 몸을 살짝 흔들며 대답했다. “믿을 수 없어요. 대표님이 저를 속이고 있는 거겠죠.”“내가 너를 부모님에게 보내 주려고 하는데 왜 굳이 널 속이겠어
나는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가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그때 함소은이 말했다. “용진표의 아내가 꿈을 꾼 게 아니라 용진표가 지원 씨를 만나고 싶다고 했죠.”“뭐라고요?”내가 말을 끝내기 전에 갑자기 나는 함소은이 완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몸이 뜨는 느낌이 들었고 귀에 함소은의 목소리가 들렸다.“잠깐만 자고 있어요.”나는 왜 자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 내 몸이 들어 올려지는 걸 느꼈지만 나는 눈은 뜨지 못했고 말도 할 수 없었다.어디론가 데려가졌고 그곳에서 물을 먹은 후 나는 눈을 떴다.눈에 들어온 것은 낯선 큰 남자였고 그가 바로 용진표의 경호원이었다.의식이 흐릿해지기 전에 함소은이 말한 내용을 떠올렸고 나는 이제 모든 걸 알았다. 나는 몸을 조금 움직이며 그에게 물었다.“용진표는 어디 있어?”그 사람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돌아서서 나갔다.나는 손과 발이 묶여 움직일 수 없었고 눈앞에 보이는 곳은 폐차장이었고 주변에 낡은 타이어들이 쌓여 있었다.그 모든 상황을 파악한 나는 용진표가 나를 잡아둔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그는 아마 내가 그가 한 일을 알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게다가 내 몸까지 묶었으니 나한테 별로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지 않았다.막심한 공포가 밀려왔지만 나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밖에는 용진표의 경호원이 서 있었고 내가 물을 마시고 깨어났으니 이제 아마 용진표가 올 것 같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고 경호원이 형님이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갇혀 있는 문이 열리자 용진표가 들어왔다. 그는 오늘 마치 무술 도복 같은 흰색 옷을 입고 있었다.“아가씨, 또 만났네.”용진표가 웃으며 말하자 나는 겁먹지 않고 대답했다.“용 대표님, 이런 식으로 만나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요.”“마음에 들지 않으면 왜 날 자꾸 자극한 거야?”그가 내 앞에 서자 경호원은 의자
“진정우 씨.” 나는 평범한 동료처럼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를 했지만 진정우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았고 우리는 그냥 스쳐 지나갔다.하지만 그 순간 내 얼굴에 있는 미소가 조금 씁쓸하게 느껴졌다. 나는 회사 차를 몰고 함소은이 말한 곳으로 갔다.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함소은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그녀는 먼저 자리를 찾아 앉아 기다리라고 했다. 그녀를 기다리면서 나는 다시 휴대폰을 열었고 그때 진소영이 보낸 메시지를 받았다.스크롤을 위로 올려보니 진소영이 보낸 메시지는 거의 다 자책과 내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정우를 변호하는 내용도 있었지만 나는 딱 한 번만 답을 보냈고 그 후에는 다시 답하지 않았다.[언니, 보면 답장해 줘. 오빠가 나를 방에 가두고 나가지 못하게 해요.]진소영의 메시지를 보고 한참 생각한 후에야 나는 그녀에게 답을 보냈다.[소영아, 나는 괜찮고 이젠 정상적으로 출근하고 있어. 그리고 나랑 네 오빠 사이에 대해선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아도 돼.]그러자 그녀는 바로 답을 보냈다. [언니, 오빠는 언니를 정말 사랑해요. 정말이에요. 맹세해요.]나는 답하지 않았고 그때 다시 메시지가 왔다.[오빠가 언니에게 죽을 끓여줄 때 정신이 없어서 팔까지 데었어요.]그 메시지를 보자 나는 그가 버린 죽을 떠올리며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오빠가 언니한테 죽을 가져가고 돌아와서 잠도 자지 않고 창문 앞에 서 있었어요. 담배도 피웠고요.] [언니, 나는 언니와 오빠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언니, 오빠한테 다시 기회를 주면 안 돼요?][언니와 오빠가 이렇게 지내는 걸 보면 마음이 아파요. 난 평생 혼자 살아도 괜찮으니 그냥 언니 오빠가 행복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그 메시지를 보고 나는 웃음을 지었고 동시에 진소영이 소지훈에 대한 짝사랑을 떠올렸다.나는 또 한 번 메시지를 보냈다. [소지훈이 너한테 연락했어?][아니요!]진소영은 눈물 나는 이모티콘을 덧붙
나는 숨이 잠시 멈췄고 그의 눈빛과 마주쳤고 그는 나를 바라보며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그는 언제나 정직하고 대범하게 대했지만 나는 항상 마음이 불안했다. 마치 헤어진 게 딱 내 잘못인 것처럼 말이다.“호랑이도 자기 말하면 온다더니... 정우 씨, 방금 윤 부장님과 정우 씨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어요.”허진호는 능글맞게 말을 이어갔지만 진정우는 그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네.”“정우 씨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허진호는 정말 끝내주는 재치로 우리를 괴롭혔다. 진정우는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숙였고 허진호는 코를 문지르면서 다시 말을 이어갔다.“정우 씨가 살이 빠졌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또 뭐라고 했던가...”허진호는 말을 잠시 멈추더니 나에게 눈을 찡긋했다.“윤 부장님, 정우 씨에게 알려주지 말자고요.”“하하.”나는 속으로 찐웃음이 터져 나와서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고 진정우가 딱 그 순간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시선을 돌렸다.그가 나를 원하지 않았기에 나도 진정우 없이 잘 살 수 있는 모습을 증명하고 싶었다.점심때, 나는 항상 전화를 걸지 말지 고민했던 함소은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그녀가 용진표랑 함께 있어서 불편할까 봐 전화하지 않았다.“어떻게 됐어요? 괜찮아요?”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오늘은 잘 피했어요.”함소은이 가볍게 말했다.그녀가 어떻게 피했는지 묻지 않았다. 이 여자는 용진표의 곁에서 몇 년이나 보내면서도 여전히 복수를 품고 살아왔다. 그리고 그에게 아이까지 낳은 여인이라면 그만큼 능수능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처음 그녀를 봤을 때 나는 그녀가 단지 외모를 과시하는 여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던 내 자신이 정말 부끄러웠다.“그럼 다른 이유로 저한테 전화한 거예요?”“지원 씨가 찾으라고 한 사람을 찾았어요. 그래서 직접 만나보고 싶은지 물어보려고 전화했어요.”나는 예상보다 일이 빨리 진행되고 있다는 말에 조금 놀랐고 이내 흥분해서 대답했다.“가능하다면 직접 만나고 싶어요
“쫓아갈 거야?”나는 쫓아가서 꼭 물어보고 싶었다.하지만 쓰레기통에 버려진 도시락을 보니 더 이상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가 버린 것은 도시락도 음식도 아닌 나에 대한 마음이었다.그렇다면 내가 쫓아가서 물어본다고 해도 결국 스스로 굴욕을 찾는 일이었다.나는 마음을 되돌리고 도시락을 다시 내려놓고 내 병상으로 돌아갔으나 이제는 젓가락을 다시 들고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무거웠다.도시락을 주운 사람은 그 변화를 눈치챘는지 조심스럽게 도시락을 다시 내 앞에 놓았다.“가져가세요.”“아, 아니에요...”그 사람은 손을 움켜잡으며 물러섰다.“당신이 주운 거니까 그냥 가져가세요. 게다가 시름 놓고 드시면 돼요. 맛은 있을 거예요.”나는 한숨을 쉬며 음식을 다시 집어 들었다. 분명히 화가 나 있었지만 그런데도 다시 먹기 시작했다.강유형은 옆에서 음식을 먹으려는 내 손을 살짝 눌렀다.“내 음식한테 화내지 마.”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진정우는 아마 내가 여기에 있는 걸 보고 떠난 거 같아.”그 말에 나는 잠시 멈췄다. 방금 강유형이 내 입술 옆을 닦아준 걸 생각하니 마음이아팠다.‘아, 이거 정말... 오해는 점점 더 깊어만 지는구나.’내가 잠시 멍하니 있을 때 강유형은 내가 먹던 음식을 쥐고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치웠다. 그리고 도시락을 손에 쥐고 나가려 했다.그가 어디로 가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아줌마에게서 전화가 왔다.“지원아, 유형이 너한테 음식을 가져왔을 때 별문제 없었지?”나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아, 아줌마, 무슨 일이에요?”“유형의 입가에 상처가 있더라고. 싸운 거 같아서...”아줌마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설마 강유형이 나가서 진정우랑 싸운 거 아니야?’하지만 난 결국에 이 말을 내뱉지 않았고 아줌마는 또 몇 마디 했고 마지막으로 만두랑 음식이 맛이 어떤지 물었다.전화가 끊기자 나는 병원을 떠났다.다음 날 나는 회사에 갔고 마침 약속이
“잠깐만.”내 말을 들은 강유형은 재빠르게 일어섰다.지금의 그는 내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마다 언제든지 응해주고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먼저 다가오는 그런 사람으로 변해버렸다.만약 예전에도 이렇게 했다면 아마 난 강유형과 그렇게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세상에 만일이라는 건 없었고 나는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며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봤다. 화면이 멈춰 있었는데 그 영상 속에는 아마 3년 전의 내 모습이었다.나는 그때 내가 뭘 했는지 왜 그런 영상을 찍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휴대폰을 빼앗아 보고 싶었지만 또 그럴 수는 없어서 고민하던 그 순간 강유형이 물을 가지고 돌아왔다.그는 내가 휴대폰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고 얼굴에 당황한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잠드는 동안 예전 사진과 영상을 좀 봤는데 지금 넌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졌더라.”나는 물을 마시며 그가 한 말에 이어서 대답했다.“그러면 예전엔 내가 안 예뻤다는 거네? 그래서 네가...”“그만해.”그가 내 말을 끊었다.“그 사람은 더 이상 언급하지 마.”물 몇 모금 마시자 나는 목이 좀 편해졌다.“조나연 그 일은 이제 다 정리한 거야?”나는 젓가락으로 목이버섯을 집어 입에 넣으면서 물었고 그 상큼하고 새콤한 맛에 기분이 좋아졌다.강유형은 휴대폰을 다시 들고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그 화면을 보고 있었고 나도 그저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좀 더 먹으려던 찰나 강유형이 입을 열었다.“완전히 깨끗하게 끝냈어.”그 말에 나는 조금 더 생각했다. 그때 그 여자가 남긴 독한 말들을 떠올리며 이 일은 그렇게 간단히 끝날 일이 아닐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강유형이 이렇게 말하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 다시 음식을 먹을 준비를 했다.“알겠어.”“잠시만.”그때 강유형이 나를 막아 나서면서 손으로 내 입술 옆에 묻은 기름을 닦아 주었다.“기름이 묻어서.”나는 입술
강유형은 결국 강진혁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챘다.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그건 직접 물어봐야 할 거야. 그리고... 나는 지금 아무에게도 마음이 없어.”그러자 강유형은 무표정하게 말했다.“너무 자주 말하지 않아도 돼.”“사실을 말한 것뿐이야.”나는 말을 마친 후 기침을 두 번 했고 그러자 강유형은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진정우는 네가 사고를 당한 걸 몰랐어?”강진혁의 말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컵 안에 있는 뜨거운 물의 온기가 몸의 차가움을 녹여주었지만 마음속의 차가운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왔었어. 그리고 다시 갔어.”강유형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나는 물컵을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나 좀 자고 싶어.”내가 눕자 강유형은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는 열이 나서 눈꺼풀이 무겁고 잠에 빠져들기 직전에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렸다.“나와 헤어질 때는 네가 이렇게 아프지 않았던 것 같은데.”‘뭐라고 하는 거야?’사실 맞는 말이었다. 강유형과 헤어질 때 지금처럼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은 없었다.“아마 너는 천천히 칼날로 내 마음을 줄곧 찔렀기 때문에 난 아픔에 익숙해졌겠지.”내가 목소리를 낮춰 말하며 뒤로 돌아누웠고 결국 깊은 잠에 빠졌다.나는 밥 냄새에 잠이 깼다. 눈을 떴을 때 강유형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본 내용에 몰입한 듯 내가 깬 줄도 모르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정말 배가 고팠다. 침대 옆 식탁에 놓인 음식을 보며 일어나 보려고 했지만 몸의 상처가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고 냉큼 숨을 쉬었다.강유형은 그 소리를 듣고 급히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깨어났어? 나한테 말하지.”“배가 고파.”나는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고 간단히 말했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알겠어. 네가 배고플 줄 알았어. 예전처럼 감기나 열이 나면 깨자마자 먹는 게 첫 번째잖아.”듣고 보니 난 확실히 그랬었다. 다른 사람들은 병에 걸리면 입맛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배가 고팠다.
옆에 있던 강진혁은 눈빛이 어두워졌다. 방금 그가 내가 머리를 만져준다고 했을 때 난 바로 피했고 강유형이 나를 만졌을 땐 나는 거부하지 않았기에 그는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나라고 해도 그 상황이면 서운했을 것이다.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얘기를 나누었고 강진혁은 별다른 표정을 지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그를 볼 때 그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넌 아직도 강유형의 친밀한 행동에 익숙한 거 같아.”“......”“그건 당연한 소리지. 지원이는 거의 내 아내가 될 뻔했으니까.”“......”“맞아. 거의였지.”강유형은 강진혁을 바라보며 미소를 띠었고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표정이 가득했다.“아무래도 이마가 좀 뜨거운 것 같아.”강유형은 말을 끝내며 지나가는 간호사를 불렀다.“체온계 좀 줘봐요.”“괜찮아. 아마도...”내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강유형이 끊었다.“괜찮은 건지는 그건 네가 스스로 판단할 일이 아니야.”강유형의 말에 간호사는 바로 체온계를 가져와 내 이마에 대었다.“37.7도입니다.”그러자 강유형은 간호사에게 말했다.“의사에게 상황을 좀 전해주세요. 그리고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나요? 감염인지 아니면 그냥 물에 젖어서 감기가 온 건지 확인해 주세요.”강유형은 정말 전문가처럼 말을 이어갔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의사인 줄 알겠네.’간호사는 대답하고는 떠났고 강진혁은 나에게 따뜻한 물을 부어줬다.“따뜻한 물이라도 마셔. 아마 그냥 몸이 얼어서 그런 거 같아.”두 형제가 이렇게 나를 챙겨주는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지만 그만큼 부담도 컸다.나는 그들이 그만 가줬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강유형은 이미 먼저 말했다.“형, 아니면 먼저 돌아가. 내일 선보러 간다고 했잖아? 너무 늦게까지 있으면 피부에 안 좋아.”“오빠, 선보는 거예요? 방금 왜 말을 안 했어요?”나는 조금 놀랐고 강진혁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말할 새도 없이 강유형이 와서 방해했으니까.”이 말의 의미는 강유형이 우리 둘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