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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화

작가: 꽃길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 업무에 빨리 익숙해지고 싶어서요.”

“그래도 너무 일찍 나오신 거 아니에요? 회사에서 추가 수당 안 주는 거 아시죠?”

허진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제가 자발적으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윤 부장님이 이 자리까지 오신 거겠죠. 모두가 부장님처럼 열심히 하면 우리 회사도 금방 대박 나겠어요.”

허진호의 지나친 칭찬에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났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에 진심과 농담을 섞어서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나는 이런 말에 진지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농담이 아니라, 회사 발전이 한 사람에게만 의존할 수는 없어요. 윤 부장님의 노력은 저도 충분히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표님께도 말씀드렸어요. 부장님이 너무 무리하셔서 건강을 해치기라도 하면 회사로서는 큰 손실이라고요. 앞으로는 좀 더 건강에 신경 쓰라고 하셨어요.”

허진호는 아예 내가 일찍 출근할 핑계마저 막아버렸다. 그래도 뭐, 오히려 잘 됐다. 이제 더는 진정우를 피해 다닐 필요도 없으니까.

진정우는 요 며칠 아침 식사를 문 앞에 두지 않았다. 내 뜻을 알았는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한 것 같다.

“듣기로는 오늘 고객이 오신다면서요? 게다가 꽤 큰 계약이라던데?”

허진호가 화제를 돌렸다.

“네, 10시에 오기로 했어요. 한 시간 정도 남았네요.”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이제 준비하러 가봐야 해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좋아요. 윤 부장님, 오늘도 좋은 결과 기대하겠습니다.”

허진호는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나를 응원했다.

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준비한 자료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9시 50분쯤 미리 회의실에 들어가 준비 상태를 확인했다.

오늘 만날 분은 정말 중요한 고객이었다. 이 계약을 성사할 수만 있다면 며칠 전 강유형이 빼앗아 간 고객으로 생긴 손해를 충분히 만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성과를 몇 단계 더 끌어올릴 기회였다.

10시 정각, 고객이 도착했다.

그런데 그가 회의실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표정이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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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원아!”강진혁의 목소리는 예전처럼 부드럽고 듣기 좋은 톤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 다정함이 오히려 날카로운 가시처럼 느껴졌고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남겼다.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온화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의 내면은 너무나 어두웠다.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 심지어 타인을 짓밟는 일조차 서슴지 않는 사람이었다.나는 감정을 억누르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오빠,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요?”“말해 봐.”그의 말투는 예전과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현재 그는 강유형 대신 KS 그룹을 이끌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목소리에는 자연스럽게 권위가 묻어났다. 역시 사람이 앉는 자리가 그 사람의 말투와 행동까지도 바꿔놓는 법이다.“우리 회사에 있던 직원, 이소희라고 아세요? 제 친구인데 얼마 전에 퇴사하고 연락이 끊겼어요. 혹시 오빠 인맥을 통해 그녀를 찾아줄 수 있을까요?”“이소희?”그는 내 말을 한 번 되뇌더니, 잠시 생각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알았어. 찾아볼게.”“고마워요, 오빠.”나는 여느 때처럼 예의 바르게 감사를 전했다. 그러자 그가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지원아.”“네?”“우리, 만날 수 있을까?”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좋아요. 언제요?”“네가 편한 시간에 맞출게.”그는 언제나 내 의견을 먼저 물었고 내 뜻을 존중해 주었다. 그는 한 번도 나에게 자신의 기준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그의 마음은 오래전부터 이런 식으로 나를 향해 있었고 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의 배려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감정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럼 내일 저녁에 봬요. 저를 데리러 와 주세요. 오랜만에 삼촌이랑 아줌마도 뵙고 싶네요.”내 말에 강진혁이 순간 멈칫했다.“...알겠어. 부모님께도 전해 놓을게.”전화를 끊고 나는 손목의 방울을 살짝 흔들었다. 그 맑고 청아한 소리를 들으며 속삭였다.‘정우야, 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강씨 집안과 엮이지 말라는 건 대체 무슨 의미였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625화

    용설아뿐만 아니라 허진호 역시 진정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적어도, 그가 겪었던 위험과 고비에 대해서는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그의 과거를 깊이 파고들 용기가 없었다.그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알면 알수록 더 마음이 아플 테고 그리움만 깊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저는 믿을 수 없어요.”허진호가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나 역시도 가슴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진정우가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만 같았다. 다만 내가 도달할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버린 것뿐이라고.“그럼 정우가 아주 먼 여행을 떠난 거라고 생각합시다.”나는 손목에 걸린 방울을 살짝 흔들었다. 맑고 청아한 울림이 공간을 가득 채웠고 그 소리에 마치 진정우가 여전히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조금이나마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다행이야.’그가 남긴 이 작은 방울이, 나를 붙잡아 줄 마지막 선물 같았다. 그때, 허진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조금만 시간을 줘요. 지원 씨에게 전해줄 물건이 있어요.”“뭐죠?”“직접 보면 알 거예요.”그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나는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한 번도 진지한 표정을 지은 적 없던 그가 마치 온 세상을 잃은 듯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걸 보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그에게도 진정우는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었다.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허진호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친구였다.그가 느낄 상실감 또한 나와 다르지 않을 터였다.허진호가 떠난 후, 나는 사무실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손목의 방울을 흔들었다.그저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그 소리는 나를 위로하는 듯했다.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회사를 나와 이소희의 집으로 향했다.전날 그녀에게 연락했지만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고 메시지에도 답이 없었다.회사에 알아보니 이미 사직서를 제출한 상태였다. 결국, 직접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누구세요?”소희의 어머님인 박수미가 나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624화

    남자는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특히, 여자 앞에서는 더더욱.하지만 지금, 나는 허진호가 내 앞에서 눈가가 붉어지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그가 그렇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그의 사무실을 나와, 그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충분히 진정우를 기릴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주었다.이 회사가 진정우의 것이라고 했지만 공식적인 사장은 허진호였다.그만큼 두 사람 사이의 신뢰가 깊었고 진정우는 그를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다.그런데 이제, 진정우가 사라졌다. 그를 기다리던 허진호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의 슬픔도, 나 못지않을 것이다.나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진정우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는 연구개발을 했기에 직접 실험을 진행하는 일이 많았고 책상 위에는 각종 실험 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하지만 그 많은 장비에도 불구하고 연구실은 전혀 어수선하지 않았다.나는 천천히 다가가 책상 위에 놓인 실험 기록 노트를 집어 들었다. 빼곡하게 적힌 숫자들, 그리고 그가 직접 쓴 강직한 글씨들. 손끝으로 글자를 따라가다가, 다시 가슴이 아려왔다.모든 것이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그는 더 이상 여기에 없었다.그가 남긴 것들은 내 손에 닿지만 정작 그는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그가 있었던 흔적이 이렇게나 선명한데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나는 자리로 앉아 그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평소 그가 쓰던 펜, USB, 블루투스 이어폰, 그리고 기록 노트가 있었다.그리고 눈에 띄는 투명한 상자 하나가 있어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내 열어보았더니 안에는 묘하게 낯선 질감을 가진 가느다란 팔찌가 들어 있었다.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금속이나 은이 아니라,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재질이었고 잠금장치가 없었다. 혹시 빠진 걸까 싶어 상자 안을 뒤적이다가 몇 개의 미완성 부품과 함께 접혀 있는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623화

    신입 사원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씩씩하게 대답했다.“그럼요! 윤 부장님, 밥 사주세요.”그 직설적인 대답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좋아, 그럼 오늘 저녁에 다 같이 ‘성해 반점’에서 모이자. 내가 쏠게.”“정말이죠?”“당연하지.”“와! 윤 부장님 최고!”신입 사원은 신나서 뛰어나갔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별것 아닌 대화였지만 회사 분위기가 한결 밝아진 것 같았다.가방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본 후, 나는 허진호가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는 책상 가득 쌓인 서류에 파묻혀 있었다.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른 채 바쁘게 사인을 하고 있었다.나는 그의 책상을 흘끗 바라봤다. 거기에는 내가 맡았던 부서의 서류들도 섞여 있었다.‘역시, 내가 아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건 이 사람이 뒤에서 버텨주고 있었기 때문이구나.'내가 없는 동안, 모든 업무를 그가 대신 처리했을 것이다.“허 대표님, 이렇게 혼자서 모든 걸 떠안고 일할 거면 차라리 사람을 더 뽑는 게 낫지 않아요?”내 말을 들은 허진호는 순간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그는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세상에, 윤 부장님!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저 정말...”그는 말을 멈췄지만 나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내가 회사로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하지만 만약 내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왜 새로운 직원을 뽑지 않았던 걸까? 혹시 내 퇴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허 대표님, 저 복직할 수 있는 거죠?”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당연하죠! 무조건! 그런데 복직 안 하면 설마 퇴사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절대 안 돼요. 회사 규정상 최소 1년은 근무해야 사직이 가능하다고요!”그의 말에 나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계약서에 그런 조항이 있었어? 나 왜 몰랐지?’“이건 말도 안 되는 규정이에요.”나는 장난을 치며 말했다.“서명했으면 끝난 거예요. 이제 와서 불평하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622화

    나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강유형을 바라봤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난 이미 알고 있으니까.”강현우의 눈빛이 깊어졌다.“누구라고 생각하는데?”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몸을 일으키며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지원아, 설마 형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형이랑 만나려는 것도 결국 진정우의 복수를 위해서야?”오랫동안 나를 사랑했던 사람답게, 내 속마음을 읽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진혁 오빠 아니야? 그렇다면 진짜 배후가 누구인지 알려줘.”내 질문에 그는 잠시 말을 삼켰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지원아, 형은 아니야. 사실 나도 정확한 배후가 누군지는 몰라. 그때 네게 말했던 건 그저 추측이었어.”나는 조급해하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아니라면 더 좋지. 그렇다면 내가 진혁 오빠를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겠네.”강현우의 표정이 굳어졌다.“지원아…“나는 깊은숨을 내쉬며 담담하게 말했다.“우린 10년을 알고 지냈고 4년 동안 사랑했어. 그리고 나는 진정우를 사랑하게 됐지. 나는 여러 가지 사랑을 경험했어. 짝사랑이 이루어지는 설렘도, 운명처럼 빠져드는 감정도. 하지만 결국 사랑이란 건 너무 피곤한 감정이더라. 이제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선택하고 싶어.”“좋아, 네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건 이해하지만 형은 절대 안 돼.”강현우는 강하게 반대했고 나는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왜 안 되는데? 이유를 말해봐.”그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지원아, 이유 모를 리 없잖아. 꼭 내가 말해야 해? 내 형이잖아. 너는 한때 내 약혼녀였고. 둘이 같이 있으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볼 것 같아? 우리 가족은 또 어떻게 보겠어? 나더러 어떻게 널 마주하라는 거야?”나는 잠시 침묵했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럼 네 체면과 감정을 위해, 난 내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는 거야?”그는 내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마음의 준비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621화

    만약 강유형이 정말 이대로 다리를 잃게 된다면 내가 그에게 진 빚이 너무 클 것이다.하지만 그와 더 이상 복잡하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할 수 있는 한 그를 설득해 제대로 치료를 받게 하려는 것뿐이었다.“그렇게 심각하지 않아. 몇 번 더 치료받으면 괜찮아질 거야.”그는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말했고 목소리조차 기운이 없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그를 더 설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강유형이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네가 돌아왔으니, 내 상처도 금방 나을 거야.”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지만 그는 곧장 화제를 돌렸다.“신지태가 널 몇 번이나 찾았어. 내가 말리지 않았으면 실종 신고라도 했을걸?”나는 한동안 연락을 끊고 지냈다. 그동안 나를 걱정한 사람들이 많았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지태 오빠 오늘 와?”나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모르겠어. 네가 왔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뛰어올걸?”그는 핸드폰을 집어 들며 신지태에게 연락하려 했다.그러나 팔을 움직이는 순간, 상처에서 뻐근한 통증이 밀려온 듯 그는 순간적으로 멈췄다. 나는 그의 감싼 팔을 조심스레 붙잡으며 말했다.“굳이 전화할 필요 없어. 내가 돌아왔으니, 곧 만나겠지.”그는 통증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의사 불러줄까?”그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적셨다.“물 좀 줘.”나는 컵을 건네주었고 그는 두어 모금 마신 후에야 얼굴이 조금 나아 보였다.“형은 너 보러 왔어?”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번 왔었어.”“어제 돌아오면서 우연히 마주쳤어.”“어디서?”“샤부샤부 집에서.”강유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반응이 흥미로워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나랑 참 인연이 깊은 것 같아.”그는 내 말을 단숨에 이해했는지,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지원아,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나는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620화

    “지원아, 돌아왔구나?”강진혁이 나를 보며 살짝 놀란 듯, 그리고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네, 오늘 막 도착했어요.”나는‘오늘’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대답했고 안리영도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오자마자 이렇게 마주치는 거 보면 진짜 우연인가 보네요.”강진혁은 그녀의 말에서 숨은 의미를 느꼈는지, 위층을 가리키며 덤덤하게 말했다.“고등학교 친구들이 며칠 전부터 약속 잡고 여기서 모이기로 했어.”마침 누군가 그를 불렀다.“진혁아, 우리 먼저 갈게.”그는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 손짓하며 배웅한 뒤, 다시 우리를 바라보며 물었다.“더 필요한 거 있어? 주문할 거 있으면 내가 계산할게.”그의 말투는 자연스러웠지만 분명 의도적으로 챙기려는 느낌이 들었다.“이미 결제했어요.”안리영이 대신 대답했다. 그러자 강진혁은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원아, 좀 쉬고 나면 집에 와서 밥 한 끼 하자. 부모님이 네 걱정을 많이 하셔.”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조만간 먼저 연락할게요. 그리고... 휴링턴에서 신세 많이 졌어요.”굳이 ‘휴링턴’을 언급한 이유는, 그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서였지만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짧게 대답했다.“그래.”그는 안리영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유리창 너머로 그가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 순간, 안리영이 내 발을 슬쩍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뭐야, 강진혁 아직도 너 못 잊은 거 아냐?”나는 시선을 다시 테이블로 돌리며 끓어오르는 국물 속에서 부글거리는 재료들을 바라보았다.“리영아, 나는 지금... 강진혁이 이 모든 일의 배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뭐라고?”그녀는 놀라서 젓가락을 들던 손을 멈췄다. 나는 휴링턴에서 발견한 것들에 대해 조용히 이야기했다.“앞으로 내가 하는 일이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해해 줘.”안리영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이상하게 보인다니, 도대체 뭘 하려고?”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619화

    나는 의료 서적을 넘기며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갔다. 문외한인 내가 이런 책을 본다는 게 쉽지 않았지만 지난 한 달 동안 고요한 시간을 보내면서 마음이 차분해져서인지 의외로 집중이 잘 됐다.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내 마음이 가라앉았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얼마 후, 안리영이 수술을 마치고 돌아왔다. 문 앞에서 나를 보던 그녀는 몇 초간 멈춰 서 있더니,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나를 꼭 안아 주었다.“돌아왔네.”진정우의 일을 나는 오직 안리영에게만 이야기했다. 진정우를 어디에 묻었는지 아는 사람도 그녀뿐이었다.나는 그녀의 어깨에 기대며 익숙한 소독약 냄새를 맡았다.“나, 갑자기 훠궈가 먹고 싶어.”“좋지! 당장 가자!”그녀의 대답에는 묘하게 들뜬 기운이 섞여 있었다. 어쩌면 그녀도 내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게 반가웠던 걸지도 몰랐다.그래, 나도 이제 다시 살아가야 했다. 진정우는 떠났지만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식사를 하던 중, 문득 떠오른 듯 물었다.“강유형, 본 적 있어?”“그럼, 매일 보지. 악어한테 물린 이후로 계속 우리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그녀의 말에 나는 젓가락을 멈췄다.“벌써 한 달이 넘었잖아? 아직도 치료 중이야?”“응. 상처가 아물질 않아서 계속 곪고 있대. 이미 몇 번이나 괴사한 살을 도려냈다더라.”그 말을 듣는 순간, 강유형이 악어에게 물렸던 장면이 눈앞을 스쳤다.“그 정도로 심각했어?”“직접 가서 볼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나 때문이잖아.”안리영이 고기를 집어 내 그릇에 올려주며 말했다.“많이 먹어. 한 달 사이에 살이 너무 빠졌어.”“그래? 나 하루 세 끼 잘 챙겨 먹었는데.”나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진정우 곁을 지키는 동안에도 먹고 자는 것만큼은 철저히 지켰다.“그럼... 마음고생 때문인가 보네.”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나는 안리영을 보며 피식 웃었다.“넌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은데? 교수님이랑 잘 지내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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